+ 그리스도의 평화
청보리님과 평화댁 냄의 신학 토론을 뒤늦게 보았습니다.
우선 요즘 경황이 없어서 카페에 자주 들리지도 못하고, 회원님들과의 좋은 글을 나누지도 못하는 것에 죄송한 마음이네요.
그래도 이 질문은 민감한 질문일 수 있기에 몇 가지 생각의 고리를 풀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거라 생각이 되었습니다.
본당에서 가장 활발한 레지오 마리애 활동에서 레지오 선서문에 담겨져 있는 내용에 대한 신학적 문의에 감사 드립니다.
충분히 질문을 하실 수 있는 내용이고, 나름 평화댁님의 답변도 일리가 있는 내용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 모든 질문과 대답은 그렇게 간단한 논리로 해답을 드리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선, 전제로 말씀드려야 할 것은, 마리아와 관련된 모든 가톨릭 신학의 주제에는 '그리스도 신앙'을 전제한다는 점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 신앙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의 토대 위에서 마리아와 관련된 신심과 신학이 전개되어야 한다는 점이죠. 이것을 신학적으로 '진리들의 위계'라고 부릅니다. 즉, 진리에도 위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가령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다."라는 교리와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시다"라는 교리는 분명히 그 믿을 교리라는 진리에 있어서 위계 질서가 있다는 말이죠. 후자의 진리는 전자의 진리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제가 오랫동안 신학교에서 마리아론을 강의하면서 신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신학과 신심은 상호 결합되어 있지만, 때로는 신심이 신학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신학은 신심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는 말을 합니다. 이 점은 마리아 신심과 공경의 오랜 가톨릭 전통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레지오 마리애는 가톨릭 교회 안에서 신심 단체 입니다. 신심단체란, 교회의 다양한 신심들, 즉 그리스도 신앙을 성장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영적 성장을 목표로 하는 영성 조직을 뜻합니다. 레지오 마리애 역시 하나의 신심 단체입니다. 비록 마리아 공경과 마리아의 교회 안에서의 독특한 지위를 생각하면 다양한 신심들 가운데 마리아 신심이 차지하는 교회사적 무게와 한국 천주교에서 마리아 신심이 성장하게 된 배경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지오 마리애는 가톨릭교회에서 공인한 신심 단체이면서도, 국제적 조직이지요.
문제는 이 레지오 마리애가 고백하고, 선포하는 신심의 핵심에는 신학적으로 과장되거나, 때로 오해를 빚을 수 있는 신학적 요소들이 없지 않다는 점입니다. 청보리 님께서 지적하신 내용은 신학적으로 다분히 문제가 있는 구절입니다. 마리아의 중재성은 당연히 하느님 은총의 특은으로부터 나옵니다. 마리아 역시 한 역사의 인간으로 구원된 대상이고, 그리스도의 구원의 첫번째 표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회의 역사 안에서 마리아는 어떤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은 여인으로 고백됩니다. 구세주를 잉태하시고, 낳으시고, 기르시고, 그분의 십자가의 여정을 함께 걸으셨고, 부활의 첫 증인이 되셨고, 사도들의 오순절 성령강림의 자리에서 초대 교회의 어머니가 되신 분이시죠. 이 점은 평화댁 님이 지적하셨듯이 교회의 오랜 전통이며 신심의 뿌리에 속하는 내용입니다.
사실 신학적인 원리에서 보면 성모님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에 결정적인 협력을 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믿음의 순종이 없었더라면 강생의 신비는 이루어질 수 없었을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지위는 가톨릭 신학의 역사 안에서 신심의 영역과 맞물려 고유한 지위를 갖습니다. 그것이 가톨릭교회가 마리아에 대한 공경의 근거입니다.
하지만 레지오 마리애의 선서문이 과연 정당하냐는 물음은 신학적인 물음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봅니다. 물론 신학적으로 선서문의 내용은 오해의 여지가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를 통해서' 하느님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신념은 마리아 신심을 전면에 내세운 레지오 마리애의 정신에 비춰볼 때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마 '성모 마리아만을 통해서' 혹은 '성모 마리아를 통하지 않고서는'이란 표헌은 다분히 신학적인 문제가 되는 점이지요. 마치 개신교가 오직 성서만으로, 오직 은총만으로, 오직 믿음만으로를 외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점을 잘 이해하시려면 레지오 마리애 신심 운동이 시작된 시대적 배경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레지오 마리애는 1921년 9월 7일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Dublin)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21년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이 황폐화되면서 공산주의가 발흥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교회는 근대주의의 이성의 합리주의의 여파로 신앙의 위기만이 아니라, 교회의 위기를 느끼고 있었고, 유럽의 전쟁 통에 참된 구원에 대한 갈망이 컸을 때였지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는 그야말로 서구 교회의 가장 최악의 혼란기였고, 문명의 전환기였으며, 종교와 신앙이 가장 심각하게 위기에 처해 있을 때였습니다. 무신론이 팽배해지고, 그리스도교의 존립에 큰 위기가 닥친 때였지요.
마리아 신심과 마리아 관련 단체들이 활발하게 발생하던 시기가 바로 이 시기란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왜 성모님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유독 교회 안에서 사적 발현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자 하셨을지도 고민해봐야 합니다. 사실 교회의 역사 속에서 성모님의 발현은 5천번도 넘게 증언되었는데, 유독 이 시기에 성모님 발현이 기적적으로 교회로부터 공인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봐야 합니다.
교회는 신자들에게 확실한 신앙의 징표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지요. 흔들리는 교회와 신앙을 지킬 의무를 지닌 가톨릭교회가 성모님의 기적적 발현을 통해 이 시대의 불신앙을 넘어 초월적 하느님의 개입을 증언할 필요가 있었고, 신자들에게 가장 강력한 성모님의 모성을 통해 품어 안아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장 힘들때 어머니를 떠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가 성모님에 대한 공경심이 사라진 적은 없지만, 이 시기 만큼 성모 신심이 발전한 적도 없습니다. 레지오 마리애는 이런 분위기에서 흔들리는 교회와 세상 속에서 성모님의 품과 그분의 성덕, 그리고 그분의 통고의 삶에 대한 깊은 체험에서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특히 아일랜드의 가장 깊은 마리아 신심가들에 의해 시작되었지요.
그래서 마리아 신심의 가장 절정에 이른 시기에 레지오 마리애의 정신과 사상, 선언문들이 정립되었고, 그것이 교황청으로부터 승인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 시대의 신앙 증거의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죠.
문제는 그 이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고 서구 교회 중심의 신학과 그리스도교가 세상과 배타적으로 맞서던 흐름과는 달리 세상 속의 교회, 대화하는 교회, 쇄신과,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이 다시 정립되면서 마리아 신심도 다시 교회의 본래 중심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신심은 어느 정도 과도한 시대적 요청 속에서 중립을 되찾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마리아 신심이 있습니다. 사실 가톨릭 교회가 지나칠 정도로 마리아 신심을 강조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신심은 어디까지나 신앙에로 이르는 통로입니다. 그 통로가 없이는 신앙에 도달할 수는 없겠지요. 문제는 그 통로의 다양성이 열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천주교회는 오랜 모성에 대한 깊은 체험 덕분에 마리아 신심이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고, 지금의 한국 교회의 신심단체의 중심이 되었던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마리아 신심 외에도 가톨릭에는 성체 신심, 예수 성심신심, 성인 공경의 신심 등 다양한 신심의 통로들이 존재합니다. 물론 이 신심들 가운데 마리아 신심도 하나의 통로이지만, 교회의 역사 안에서 특별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마리아 신심가들이나 마리아 운동가들의 비판을 받게 될 것이라 생각되지만, 저는 한 명의 신학자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지닌 균형감각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과도한 마리아 신심에 대한 문제와 마리아 신심을 통한 신앙 성장을 추구하는 이들 사이의 갈등을 피할 수는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레지오 마리애가 신심 단체란 표현을 쓴 것은, 그 단체의 정관과 규정이 마리아를 통해 그리스도께로 가고자 하는 신념의 표현이기 때문에 레지오 마리애 선서문은 그런 신심을 고백하고, 그 정신 안에서 활동하는 이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도 늘 고민하고 있지만, 하나의 신심이 균형감각을 잃을 때 맹신이 되고, 광신이 된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한국의 레지오 마리애가 이루어 놓은 놀라운 선교 열정과 교회 성장의 힘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모든 신념이 이념이 될 때 배타성이 발생합니다. 다양한 신심을 통한 신앙 성장의 길을 인정하면서도 성모님의 놀라운 성덕과 신앙의 모범, 교회의 어머니성을 균형있게 고백할 때 진정한 보편적 가톨릭 신앙은 성장하는 것입니다.
긴 글이 되었네요.
나름대로 두 분의 신학적 토론이 오랜만에 제 신학 하는 즐거움을 이루어주었음을 고백합니다.
제 글이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고,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제 카페의 회원이라면 제가 평화방송에서 했던 강의나 이 카페에서 나눈 글들을 읽으시면서 좀 더 그리스도교 신앙의 풍요로움을 맛보시길 기대합니다.
만추의 사색에 감사드리고, 모든 회원님들이 신학의 즐거움에 빠져보시길 빕니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카페지기 송용민 신부
첫댓글 신부님 저도 감사히 읽었습니다.
글 모셔갑니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저는 본당에서 레지오 마리애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청보리님께서 지적하신 내용대로 그렇게 마리아론을 이해하는
단원은 없었습니다. 모든 은총은 성령께서 자유로이 주시는 것이지만
우리는 마리아의 군대로서 어머니를 사령관으로 모시고 활동하기에
레지오 마리애 선서식에서 성령께 어떤 전구를 청하고 있는가 하면,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실 때 "예!"라고 응답하신 것처럼 우리도
어머니처럼 그렇게 성령의 이끄심에 "예!"라고 응답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간청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서문에 나와 있는 그러한 문구를 성령의 모든 은총이 마리아만을
또는 마리아를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는다고 이해하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선서문의 그 내용은 성모님의 아기 예수님 잉태시 "예!"
라고 응답하신 부분에 대한 깊은 이해로 보고 있을 뿐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성모님을 통하여 오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모님께서 성령님을 가장 먼저
알아보신 분이시기도 하고요. 이러한 이해 안에서 우리도 성모님과 함께
활동하면서 성모님께서 성령님을 가장 잘 알아보셨고, 성령님의 말씀에
예라고 응답하셨듯이 우리도 그러한 은총을 청하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또한 레지오 마리애 신신은 예수님께로 가기 위한 하나의 통로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레지오 마리애 신심을 1순위로 놓고 활동하는 단원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미사와 성경 그리고 다음이 레지오 마리애 이런 바탕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활동 배당 중에서 미사참례와 성경 읽고 쓰는
것을 활동으로 배당하고 있기도 합니다. 다른 본당은 사정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저희 본당은 레지오 마리애는 예수님을 향하여 가는 한 신심단체로 보며
큰 무리없이 잘 가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레지오단원으로 수년간 선서문을 고백하면서 한번도 의아해본적이 없던 구절이네요...오히려 저는 이 부분을 고백할때 ^^울컥하기도 했던..
성모님의 무조건적인 "네!"하는 순종을 닮으려 노력했었어요,주님께서 하라시는건 모두 "네!"^^
그리고 성모님께 저의 기도를 전구해달라고 빌지요...언제나
신부님의 글을 읽으면 저도 신학을 공부하고싶다는 열의가 불끈불끈 솟아올라요^^
저도 레지오 마리애 쁘레시디움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활동배당에 따라 성경읽기 및 묵상과 묵주기도, 평일미사 열심히 참례하고 있지요. 성모 마리아의 신앙은 탁월하지만, 레지오 마리애 교본을 자세히 앍어 보면 하느님과 예수님이 들어가야 마땅할 자리를 성모 마리아가 차지하고 있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의탁해야지 어찌 같은 인간의 한 분이신 성모님께 온전히 의탁한단 말입니까? 저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깨서 가르치신 것처럼 이성적 신앙인이 되어야지, 맹목적 신앙인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저는 어떻게 보면 레지오를 하지 않고 성모님에 대해서 전혀 공부하지 않는 분들이 성모님에 대해서 맹목적인
신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계신 것 같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가끔 어떤 싸이트에서 보면 9일 기도를 하면
어떤 소원이든지 이루어진다는 표현들을 많이 하고 있더군요. 어떤 면에서 보면 묵주기도가 자신들의 어떤 소원
이나 들어주는 그런 기도로 알고 하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더군요. 저는 이런 분들이 많다는 것이 더 좀 걱정입니다.
다른 분들은 모르겠습니다. 저는 우리 자신을 성모님께 온전히 의탁한다는 표현에 대해서 그리 거부감이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성모님께서 온전히 하느님을 신뢰하시고 의탁하셨던 그 마음을 본받고 싶은 그 의탁하는 마음으로
성모님께 다가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온전한 의탁처럼 그저 그 의탁을 본받고 싶은 마음으로 성모님께서 나도 당신
마음처럼 이끌어 주십사 의탁하는 그런 마음에서 의탁하기에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입장이라서 그동안
열심히 답글을 올렸던 것입니다. 그동안 많은 나눔을 할 수 있어서 참 기뻤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주님 안에서 행복
한 신앙의 길을 함께 걸었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저는 세례를 받기위해 공부한 교리지식 조금과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부님들과 수녀님들 그리고 신자들과 함께한 묵상나눔정도가 기껏 제 머릿속에 들어있는 정도랍니다.하지만 그 짧은 지식이 주님을 알기에 주님을 만나는데 모자람이 있다고 느껴본적은 없지요.^^어떤 성인들이 어떤 가르침을 주셨는지도 잘 몰라요. 그저 내가 주님을 만나고 느끼고 사랑하고 감사하고 ....믿고 바라고...^^
그리고,한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며..
그분을 낳으신 분을 공경하며 그 믿음을 본받으려 노력하지요...
청보리님의 질문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신부님의 좋은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청보리님의 지적은 일부분 맞다고 봅니다.
신심 단체의 중심이 되는 인물(성인 성녀)이 예수님, 하느님 보다 커질 때 우리의 신앙은 잘못되어 가지요.
저도 아주 오래 전에 레지오 활동을 해본 경험은 있지만
그 신심 활동을 통하여 제 신앙의 기초와 믿음을 성장, 성숙시켜 주지는 못했습니다.
기도와 성서공부, 다른 신심단체 활동을 통해 하느님과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제 개인적인 신앙 체험이며, 경험입니다.)
본당에서 보면 세례를 갓 받은 많은 분들이 레지오 신심단체로 이끌려 교회 활동을 '처음' 시작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 중심의 신앙 감각과 확실한 믿음이 생기기도 전에
또 신앙의 우선순위와 균형이 잡히기도 전에
마리아 신심 단체를 통해 마리아론을 먼저 배우고 마리아 신심을 먼저 받아드리게 됩니다.
따라서 교본(선서문)이 교회의 진리와 위계를 벗어난다면 수정이 되어야 하겠지요.
마리아 신심 단체는 레지오 교본을 엄청 중시하기에 교본도 새롭게 쇄신 정리 발전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레지오마리애 교본은 절대 수정할 수 없다고 하는 그 독단이 문제입니다. 잘못 된 부분은 수정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활동배당을 통해 성경읽기 및 묵상과 일주일에 2회이상 평일미사 참례, 월 2회 고리미사 참례를 통해서, 즉 성경말씀과 신부님의 강론, 그리고 성체성사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가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레지오 마리애 교본에 나오는 가르침은 "성모마리아의 신앙을 모범으로 배우자"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 갑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것이 당연하지만, 안타깝게도 레지오 단원이 아니면 성당에서 봉사할 기회마저 봉쇄당하니 하는 수 없이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만 말씀드립니다.
성경의 예를 보면...한글 성경도 '공동번역 성경'에서 성경 원본에 충실하고 현대적 감각의 신앙 언어로 번역 수정된 개정판인 새 성경책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 몇년 전에 북미에서 사용하는 영어 성경책도 새로 수정 번역되어 새 영어성경이 나왔습니다.
송신부님 말씀대로 레지오마리애 교본은 1차 세계대전이라는 공황과도 같은 상황에서 출발하여
1921년 경에 쓰여진 오리지널 아일랜드 영어교본이 한글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빚어질 수 있는 오류나
84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 현대 언어에 맞게 그리고 신학적, 교리적 측면 등 다각적 시야에서 교본을 검토하고 수정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쇄신은 '아래로 부터 쇄신' 될 수도 있고 '위로 부터 쇄신'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카톨릭은 위로 부터 쇄신이 되지 않고는 힘들지요.
레지오 신심 단체를 비롯하여 본당 내에서 활동하는 단체들의 대부분은 '수동적'으로 시키는 대로 합니다.
단체의 리더들도 새로운 신앙 감각으로 단체를 쇄신으로 이끌기보다...늘 해오던 습관대로...관습대로 관행대로 해오고 있는 솔직한 실정입니다.
평신도가 카톨릭교회의 다수를 차지하지만 평신도는 늘 수동적 입장입니다.
습관적이며 관습적인 틀에 박힌 신앙생활은 결코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생활은 아니겠지요.^^
레지오마리애 교본 수정같은 큰 과제는 신학자와 성직자가 발벗고 나서지 않는 한 변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레지오마리애는 평신도 신심 단체이기에...그 교본의 수정이나 이의 제기는 성직자나 신학자 같은 분들이 나서서 해결해 주셔야 되지만...레지오마리애에 관심과 열정을 갖고 총대를 멜 만한 분이 없을 것 같습니다.
평신도 중에서도 전문적인 지식과 신앙 식견을 갖춘 분을 찾기 힘들 것 같구요.ㅎㅎ
아무튼 위로 부터 쇄신이 이루어져야 하는 카톨릭은 아래로 부터 쇄신은 물론 더 어렵겠지요. ^^*
레지오 교본 수정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수정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이런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저희 본당이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 본당인데 신부님께서 이렇게
가르쳐 주시더군요.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설립 당시 만드신 회칙은 수정 될 수 없답니다. 왜냐?
회칙을 만드신 당사자만 수정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회칙은 수정할 수 없지만
시대의 변화와 흐름에 따라 회헌이라는 게 있는데 그것은 모든 프란치스코 회원의 회의에 의해서
수정 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이해 안에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레지오 마리애 교본
해설서가 있더군요. 그렇다면 교본 해설서에서 요즘 시대에 맞는
해설을 해서 새롭게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도 레지오 마리애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열심히 공부하는 단원은 많지 않더군요. 레지오 교본은 그저 선서하기 전에 좀 읽어보고,
매주 회합 때 조금 읽는 정도(?) 그 정도 수준이었습니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보면 다른 공부도
많이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신심 서적을 안 읽으면 올 한 해를
신심서적 읽는 해로 정했겠습니까? 그래서 꾸리아 차원에서 신심서적 50권을 본당에 준비해서
읽기 운동을 했습니다만 독후감 써서 내는 사람은 단 몇 분 뿐이었습니다. 평신도들이 어떤 면에서는
그만큼 공부를 많이 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여자가 여자의 적이라는 말이 있듯이 평신도 스스로가
평신도들을 신뢰하고 있지 않는 면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가톨릭 굿뉴스 오늘의 묵상방에 개인
묵상글을 올리지만 평신도의 순수한 글은 많이 열어보지 않습니다. 신부님들의 강론글에 비해서
평신도들 스스로 관심을 주지 않더군요. 오늘의 묵상방에 또 다른 평신도 분이 깨어나는 기도라고
해서 신자들이 어떻게 하면 성체조배를 잘 할 수 있고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글을 매주 올리고 있지만 그 역시도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현실 안에서 평신도들인 우리들이
서로 관심과 겪려를 주며 함께 성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저도 미소하지만
늘 성경을 읽고 묵상한 내용을 글로 표현해서 개인 블로그에 매일 올리고 나눔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홀아비 심정은 과부가 안 다고 세상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성경을 대하고 묵상하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나눔하는 것은 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큰 호응을 얻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굴하지 않고 매일 열심히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다 때가 되면 묵상집도
낼 날이 오겠지요. 아무튼 전 제가 하는 이 일을 사명으로 여기고 열심히 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행복하게요.
인터넷 상에서 신앙에 관한 글이 넘쳐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올라오는 글들을 읽다보면 이글이 저글 같고 저글이 이글 같아..식상이 되고 무뎌지더군요.
홍수처럼 쏟아지는 너무 많은 글들로 인하여 요즘 현대 신앙인들은 시각적 매너리즘에 빠져 ..
아마도 성서말씀처럼 "너희는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고도 보지 못하는' 타성에 젖기 쉬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터넷 상에서는 짜임새있는 시간 활용으로 자기 신앙생활에 필요한 글이나 말씀을 구하는 지혜가 필요하겠지요. ^^
인터넷 신앙활동을 하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초심이며, 핵심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타인의 시선, 평가나 칭찬에는 안중에도 없으셨던...성인 성녀들이 살아오신 길이 숨겨진 작은 길, 고난의 십자가 길이었듯이...하느님과 예수님이 자기 삶의 모든 것, 가장 우선순위가 되어야겠지요.^^
하느님의 현존을 일상 살아간다면...세상사 이런들 어떠하리오~ 저런들 어떠하리오~
하느님만 보고 계시다면...그분만이 전부라면 아쉬울 것 없어라.
평신도 글이건 성직자 글이건 ...읽다보면...심금을 울리는 글을 만나면 기쁘지요.
책에서 읽은 내용을 인용하거나 예화로 글을 쓰는 기법의 신부님이나 평신자 글이 많아 식상이 되기도 합니다. ^^ 마치도 자기 논문을 쓰는 사람이 자기 의견은 하나도 없고 남의 논문으로 짜집기 하듯이...
자기 글에 자기 얘기, 의견은 없거나 쬐금~~그리곤 책 내용이나 예화로 도배하거나 짜집기식 글은 알맹이 없는 죽정이와도 같아 쓸모가 덜 하겠지요.^^
중요한 것은 글쓴이 자신의 진솔한 신앙 체험이나 하느님과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나 그분을 향한 사랑고백, 그리고 솔직하고 겸손한 신앙고백 등이 가슴에 잘 와닿습니다. ㅎㅎ
두 분께서 지니신 생각을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벽미사에 자주 참례하면서 미사 때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묵상을 하게 됩니다. 미사를 마치고 성전을 떠날 때, 내 몸은 성체를 모신 성전이니 나의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 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혹시 관심이 있으시면 굿뉴스에 글 올리고 있는 이정임이 저 평화댁입니다.
기회가 되면 제 글을 통해서 만나뵙고 싶네요.
순수하게 제 신앙을 고백하고 있답니다.
고맙습니다.
"신심은 어디까지나 신앙에로 이르는 통로입니다." 신부님의 이 말씀을 곰곰이 새깁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풍요로움"을 느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