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가리 대 화재와 오룡당
1660년 현종 원년 경자 2월에 불이 나서 2백여 집이 전소되고 사람들과 가축들이 불에 타 죽었다.
이 일을 듣고 베 460필을 내려주고 영남의 속미(粟米) 60석으로구휼하였다. 1695년 숙종 21년 을해에
찰방 권만년(權萬年)이 역전에 *정송(楨松)하였다. 1770년 영조 경인에 비로소 평릉관에 개폐문을
갖추었다.(삼척향토지 253쪽).
*정송(楨松)의 뜻을 몰라서 아직도 찾는 중입니다.
그 옛날에 무슨 집이 많아서 200호가 탔다니, 고을 전체가 잿더미 된 거네.
그 엄청난 재해를 어떻게 극복했을까? 그 시가지는 어딜까? 아마도 지금의 시동과 재동이었을 게 틀림없다.
오호라! 임금님께서 구휼미를 보내주셨구나!
그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고청산 오룡당에서 오랜 세월 근덕면민들이 임금님의 만수무강을 빌었던 것인데,
어떤 이유에서건, 근덕에서 임금님을 위한 축원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상당한 충심이다. 웬만한 곳에서는
그런 일을 할 수 없었을 것 같은데….
고려 때 느티나무에서 영감을 받아, 석고가의 ‘산호벽수교지가 ’싯구를 떠올려 지명을 얻은 교가리, 조선조에
산호벽수관이 420여 년 존속하던 곳, 인구도 적던 시절에 가옥이 200 채나 있던 매우 큰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던 곳, 임금님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던 고장이 근덕이다.
우리 근덕 초등 33회를 포함하여, 맹방-동막-궁촌초교와 근덕 중학교 11회 동기회가 서울에서 모임을 갖는다.
특히, 33은 우리 나라에서는 고래로부터 의미가 남다르다.
한말 보부상 단체의 발기인 수와 3.1독립선언 민족대표 수가 33인이다. 대통령 후보 시절 윤씨의 지지모임도
33인으로 구성하였다. 별 이유도 없이 운이 좋아 행운의 33을 누리는 우리는 그냥 기분이 좋은 만큼, 좋은
일도 하고 싶다.
동기회 날
칠십 넘은 근덕 지역 우리 동기생 나마니들이
소풍오듯 밤 대추 따고, 기지떡 싸고, 담근 술 병에 담아
미국-창원-대구-춘천-청주-강릉-삼척에서 서울로, 서울로,
지남철에 이끌려 모이는 근덕 궁촌-동막-맹방-덕산-교가 ‘근우회’ 모이는 날.
한 세상 사노라니 시름도 많고 씨름할 일도 많은데,
이 하루, 노인-외로움-그런 씰(쓸) 데 없는 거 저다 내꼰재삐리고(저기에 내던져버리고),
“울다가 웃으면 똥꾸영(똥구멍)에 쐬미(수염) 열닷 발!” 놀리던 동심으로 돌아가,
이 간나(계집애) 저 예나(여자애) 자박생이(머리채) 끄집고 싸우던 어린 시절 회상하며,
장군도 이등병도 다 내롸놓고(내려놓고), 잘 살아도 못살아도 다 잊어버리고,
우리찌린(끼린)데 뭐, 노래 잘 못 불러도 남새시룰(창피할) 거 없는 이게 동기회다.
학교 댕길 때 살짝 좀 만져보고 싶던 터질 듯 곱던 니(네) 뽈디기(볼)에
못 된 놈! 어데 올라가 안쟀사(앉았나) 이 쭈그랑방탱이 주름놈아!
그게 젊은 날 니가 행복하게 너무 많이 우사사(웃어서) 생긴 거라면
내 고마(그만) 눈 탁 감고 덕봉산같이 점잖게 너그러이 용서해주마.
비누로 감고, 샴푸로 빨고, 70년이 넘도록 그래사(그래서) 그렇나?
아이고 그 새카맣던 머리 탈색돼사(되어) 허옇게 돼삐린(되어버린) 머리칼.
그게 찬 비 맞고 맞바람 맞고 산 이 풍진 세상 헤쳐온 노숙함의 표시라면
내 고마 눈 탁 감고 근덕 바다같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마.
동기생 인연으로 인생 세월에서 하루를 빼는 행복한 동기회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