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3년 6월, 중국 광저우에는 멀리서 온 세 척의 배가 도착했습니다. 배에서 내린 대영제국의 조지 매카트니(George Macartney) 경은, 84명의 다른 사절단과 함께 배에서 기압계, 천문 기계, 포켓용 지구본, 그리고 황제를 위해 영국에서 공들여 특별 제작한, 유리로 만든 고가의 천상의(planetarium)을 사람들이 꺼내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미지의 제국의 군주에게, 대영영국이 이에 못지 않게 부유하며, 지적인 교양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과시하기 위한 물품들이었습니다.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중국의 경제는 상업화 되기 시작했고, 명나라의 마지막 1세기 동안 "최소" 7,300톤에 이르는 은이 중국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16세기 중엽부터 18세기 말 까지 스페인령 아메리카 광산들의 총 생산량은 최소로 잡으면 30억 페소, 75000톤에 달하는데, 이는 대부분 결국 중국으로 흘러갔습니다. 급속도로 은이 대량 생산된 일본에서도 1만톤의 양이 중국으로 흘러갔습니다.
Andre Gunder Frank는 은의 흐름이, 과거 전 세계의 정치, 경제적인 사건들이 순환한 유일한 요인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본래 명의 관리들은 처음에는 채굴비가 너무 많이 들고 그 생산이 국가 통제 밖에 있으며, 은 부족이 상업 경제에 손실을 끼칠까봐 그 해악에 대해 염려했지만, 결과는 너무나도 달콤한 것이었습니다. 중국은 그야말로 세계의 은을 최종적으로 빨아들이는 '블랙홀'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건륭의 시대에 이르러, 영국은 청제국과 벌이는 대외 무역에서 은의 막대한 유출이 계속해서 일어나자 이에 우려를 표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중국은 제국이 가장 원하는 물건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바로 "차" 입니다. 비단, 면직물, 이색적인 도자기 등도 인기 있는 품목이긴 했지만 그 중 어느것도 차 만큼 압도적인 인기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1650년에 이 음료가 런던의 호화스런 사교계에 처음 소개된 이래, 그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50년안에 차는 영국 사교계에서 부유층이 애용하는 음료가 되었고, 18세기 말에는 매년 2300만 파운드가 넘게 수입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홍차" 입니다. 광저우에서부터 오랜 항해 끝에 머나먼 런던의 부두에 도착한 차들은, 그때쯤에는 색깔이 변하여 이러한 모습이 된 것입니다. 동인도 회사는 이 과정에서 한 몫을 챙겼고, 이제 차는 "생필품"의 지위까지 도달하여, 마치 헌대의 석유처럼, 정치적인 의미를 가지는 자원이 되었습니다. 차가 너무나도 인기가 이싿보니, 동인도회사의 사업은 90%가 차 무역에 여껴 있었고, 18세기 말 제국 황실의 세수 중 10%가 오로지 영국의 시장에 팔린 차에 부과한 세금에서 나올 정도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무역의 가장 강력한 지위를 차지한것은 차를 세계에 공급하는 중국이었습니다. 일본 역시 차를 생산하고 있었지만, 도쿠가와 막부는 폐쇠적인 기조를 유지하고 있어 한계가 있었고, 인도와 실론에서는 19세기 후반까지 차 산업이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차도 인기가 있었지만, 중국은 세계의 비단시장도 완전히 장악하였고, 고급 자기의 생산은 그야말로 독차지 했습니다. 조사이어 웨지우드(Josiah Wedgwood)같은 유럽의 여러 공예가들이 자신들의 재주를 살려보았지만, 중국제 상품의 그 오묘한 깊이에는 도저히 도달할 바가 없었습니다.
반면에, 중국은 유럽에서 생산된 독자적인 물품들 중, 필요로 하는것도 없었고 수요도 거의 없었습니다. 중국 수입품의 판매로부터 얻은 대부분의 이득은, 이듬해 선적된 차, 자기, 직물을 구입하기 위하여 곧바로 재투자 되어야만 했습니다. 당시 세계 무역에서 중국의 국제수지는 압도적인 우위에 있어, 1775년부터 1795년까지의 기간에 대략 3150만 량 어치의 영국 상품이 중국에 수출된 반면, 중국은 그것의 두 배에 해당하는 5600만 량 어치를 영국에 수출했고, 은의 순유입량이 경제를 유지시켜 줄 정도로 호황을 누렸습니다. 1781년부터 1790년간 중국은 영국으로 무려 9,626만 7,832은냥의 차를 수출했는데, 반면에 영국은 면사, 면직물, 모직물, 금속의 수입품을 모두 합해도 1,687만 1,592은냥에 불과해, 차 수출액의 6분 1 남짓에 불과했습니다.
이러한 어지러운 상황에서, 매카트니 경은 외국 무역을 허용하는 항구의 숫자를 확대하고, 상당히 독특한 위치를 가지고 있던 마카오와 같은 도시를 보다 더 늘리며, 북경에 영국의 대사가 주재 할 수 있도록 허가를 얻고, 역으로 중국의 대사가 런던에 주재할 수 있게 하며, 최종적으로 중국으로 드나드는 모든 상품에 대해 안정적이고 보편적인 무역조건을 협상하려는 계획을 가졌습니다.
사절단을 이끄는 조지 매카트니 경은 서인도 제도와 인도에서 근무한 노련한 식민지 행정관이었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대사 경력도 있었습니다. 아일랜드 출신이었던 매카트니는 신비의 동양 제국에 대해, 자신이 찾을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찾아 읽으며 준비를 했고, 비서진, 의사, 과학자, 정책입안자, 식물학자, 시계 제작자, 호위대, 음악 합주단 등 다양하게 구성된 인원을 꾸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광저우에 도착한 매카트니는, 때마침 황제의 생일 축하 행사가 곧 임박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에 쾌재를 부르며 이를 이용하려 했습니다. 호사스러운 건륭 역시, 소위 영길리국(英吉利國)의 오랑캐들이 자신을 축하하러 지구의 반대편을 거슬러 올라왔다는 사실에 꽤 기분이 좋아했고, 그들을 환영하고 필요한 식량을 무조건 적으로 제공하였습니다. 다만 매카트니는, "중국 황제에게 조공하러 온, 영국대사." 라고 쓴, 배 위에 펄럭이는 깃발에 대해 경악했지만, 건륭을 만나 여러 문제에 대해 따지기 전까지는, 이런저런 일들에 대해 참기로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베이징으로 가는 사절단의 눈에 보인것은, 화려하고 호사스러운, 모두가 부자이며 재물이 넘쳐나는 제국이 아니라, 부랑자와 거지, 의혹스런 눈초리로 일행을 쳐다보는 빈민들, 조금의 먹을것을 위해 빌붙는 거지 등의 참상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떠나 베이징에 도착할 때가 되자, 그제서야 자금성의 웅장함을 필두로 상상 속에 존재하던 화려한 아시아 제국의 모습이 조금은 엿보이는것 같았습니다.
사절단은 베이징의 편안한 숙소를 배정받았고, 알현을 준비했으며, 조정의 여러 관료들의 지령을 받았지만 대부분은 서로 모순되는 쓸모없는 일들이었습니다. 매카트니는 현지 사정에 가장 능통한 유럽인들인 예수회 선교사들을 만나고 싶었지만, 사절단의 동향에는 제약이 가해져 있었기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매카트니는 대영제국 군주의 대리로 이곳에 도착했고, 따라서 이전의 유럽인들처럼 아무렇게나 치루는 고두의 예 같은 예절에 대해서는 양보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는 영국 구고앙의 존엄을 굽히지 않는 선에서만 청조의 의례를 따르겠다고 선언했고, "고두"의 예는 매카트니가 양보할 선을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또한, 건륭의 주변으로는 누구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지만, 매카트니는 자신이 조지 3세의 편지를 직접 전해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고, 마침내 대부분의 조건이 수락된 타협한을 이끌어내었습니다.
고대하던 황제와의 만남은 오전 5시의 새벽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매카트니는 자신의 동료, 조지 스톤턴 등과 함께 가장 좋은 예복을 입고 다이아몬드 배지가 박힌 훈장을 둘러 각오를 다졌고, 5시에 황제의 야영지로 도착한 일행은 아침 6시 경, 팡파르가 터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건륭제가 나타난 것입니다.
매카트니는 건륭제에게 다이아몬드가 박힌 황금상자를 건네주었습니다. 이 안에는 조지 3세의 서한이 들어있었습니다. 건륭인 이에 대해 감사의 표시로 옥으로 만든 선물을 보내주었고, 매카트니는 추가로 시계를 선물받고 옥좌 아래에 있는 낮은 탁자 중 한 곳에 멀거니 앉았습니다.
이제 연회는 시작되었고, 매카트니는 한동안 이민족 군주가 벌이는 잔치에서 초대받지 못한 손님처럼 그저 앉아만 있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기다리고 있자니, 어느 순간 건륭이 그를 불렀고, 매카트니는 건륭의 옆에서 와인을 마시고 황제와 몇마디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끝났습니다.
건륭의 관점에서는, 이 연회가 끝나면서 모든것이 끝났습니다. 물론, 사절단은 정원과 황궁, 사원을 더 둘러볼 것이고, 베이징에서는 원명원을 방문할 수도 있고, 한번 더 황제를 알현 할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사가 환대를 받았고, 적절한 감상이 표출되었으며,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을 환영하는 예식도 열렸습니다. 건륭의 관점에서 보자면, 일은 다 끝났습니다.
하지만 매카트니의 관점에서 보면, 이건 시작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황제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대단히 노력했지만, 만남의 절차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종료되었고, 이제 제대로 시작해야 할 영국과 청제국과의 미래에 관한 토론은 논의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매카트니는 실권을 가진 만주족 관료들과의 만남을 주선하려 애를 썻지만, 거만한 만주족 관료들로부터 아무런 성과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영국인들의 선물은 늙은 건륭의 관심을 전혀 이끌어내지 못했고, 영국과의 무역 확대를 원하는 그들의 바램은 말을 꺼낼 수 조차 없었습니다.
이렇게 기다리는 사이에, 매카트니의 사절단은 고향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건륭은 마침내 사절단의 다양한 요구에 대한 답장을 내렸지만, 그 내용 자체는 의례적인, 그리고 매우 거만한 미사여구로 가득찬 상투적인 말들 뿐이었습니다. 요지는, "사해의 만물을 다스리는 천조는, 너희 나라의 상품이 조금도 필요하지 않다." 는 것입니다.
건륭은 젊은 시절, 서양 유리의 경이로움과 그 신비함을 찬미했습니다. 또한, 70여 종이 넘는 영국 시계를 수집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점에 이르러, 이질적인 외국, 어떤 면모에서 자신이 말한 "천조"를 능가하는 면이 있을지도 모르는 그 외국에 대해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중국에는 영국의 대사관도 생기지 않았고, 더 많은 항구의 개방도 없었으며, 아주 약간의 영토도 할양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이 만남의 결과에서, 영국인들은 상상 속의 중국 제국의 실체가 무엇인지 좀 더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고, 이 만남을 다룬 많은 그림들과 책이 출판되었지만, 중국에서 매카트니 일행은 전혀 관심을 받지 못했고, 그들이 떠난 후 이 일에 대해 논평이 이루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이는 매카트니 경이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국이 기대한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과거, 유럽의 외국인들은 중국의 선교사들로부터 어떠한 황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을 다스리는 그 사나이는 전통적인 요소와는 전혀 이질적인 서구의 문물에 극도의 호기심을 보이면서, 서양의 과학, 의학, 수학에 매료되었습니다. 신비스러운 동양적인 가르침 아래 서구 문물에 대한 호기심과 놀라울 정도의 지식욕을 지닌 황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그를 찬양하기에 이르렀으며, 그는 자신이 직접 사냥한 짐승을 선교사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고, 수억명의 인민들 위에 군림하면서도 라틴어를 공부하고, 하프시코드를 연주했으며, 유클리드 기하학을 풀때 가장 행복한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매카트니 사절단은 그들이, 과거 조아생 부베와 고트프리히 라이프치니가 찬양을 늘어놓던 강희제처럼, 건륭제에게도 다재다능한 점을 발견하기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황제의 관심을 조금도 이끌어 내지 못했습니다.
건륭제가 호기심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행을 좋아했고, 서양식의 묘사에도 흥미를 느꼈으며, 탐구심도 많았습니다. 그는 영국과 러시아의 관계, 이탈리아와 포르투갈의 관계 등에 대해 질문을 했고, 원명원의 황궁 건물 한쪽에 벽화로 걸 세계 지도를 제작했습니다. 또한 그는 "프랑스 혁명" 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고, 러시아의 조정에서 벌어지는 음모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코 자존심 때문에, 자신이 모르는 영역에 대한 질문 하는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강희제에 비해, 건륭은 달랐습니다. 그는 자부심이 넘쳤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했습니다. 마크 C 앨리엇은 이 당시 건륭이, 수십 년 동안 계속된 너무나 다양하고 거대한 제국의 일을 맡으면서, 상당히 지쳤으며, 또한 1790년대 조정의 정치적 분위기가 담대한 계획을 세우기는 부적절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매카트니의 사절단이 20년, 혹은 10년만 더 빨리 도착했다면 달랐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매카트니 경이 보았을 당시의 건륭제는, 이미 그의 영광의 시대를 모두 끝내고, 그저 늙은 추물, 추악한 늙은이에 지나지 않게 되고 있었을 무렵의, 한 변덕스러운 노인네 였을 뿐이었습니다.
또한 이 노인은 탐욕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의죄은(議罪銀)이라는 제도로 자신의 배를 불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조정과 각 성의 중요한 관리들이 과실로 죄를 지었을 경우, 황제가 어떤 관리가 잘못이 있다고 판단한다면 심지어 죄가 없을 경우에도 은냥을 납부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수많은 관료들이 황제에게 재물을 바치는데 열중했습니다. 한번 바칠때 5만, 8만, 10만냥이 넘는 액수가 끊임없이 바쳐졌으며, 그 대부분의 물자는 호부나 번고로 들어가지 않고, 내무부로 들어가 황실의 소비로 지출되었습니다.
또한 건륭은 황제나 황태후가 10년만다 대수를 맞을 때면, 경축을 빌리모 각 성의 상인과 농민들을 재촉하여 많은 기부금을 '강요' 하고 헌납을 강요했습니다. 각지의 대소 관료드이나 각 성의 상인들 역시 예외가 없었습니다.
건륭제의 팔순 행사는 당초 은 171만 8천냥으로 계획되었다가, 114만 4천 3백냥의 예산으로 시행되었습니다. 이 경비는 주로 관리와 상인, 그리고 각 성 백성들의 헌납으로 조달되었습니다. 모든 왕공대신과 팔기, 그리고 각 부원의 관리들이 돈을 내었으며, 각 성의 독무 등 관리들은 그 성에 내려지는 양렴은 액수의 25%를 반드시 바쳤습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관료들이 백성들을 수탈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황제는 강압적으로 관료들에게 헌납을 강요했고, 액수를 맞추어야 했던 관원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백성들을 수탈하여 돈을 잔뜩 보았습니다. 단지 경관을 꾸미고 길가의 건물을 수리하는데 은 36만 냥이 필요했고, 여러 건물들의 기와를 교체하고 유화로 장시갛는데 7만냥 이상이 필요했습니다. 황제의 가마가 지나는 길을 수리하는데 은 28만냥이 들었으며, 이러저러한 일에 필요한 71만 5천여냥 모두가 상인들에게서 수탈되어 충당되었습니다.
건륭은 또한 남순을 즐겨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백성들의 부담만 더해지는 결과였습니다. 건륭이 동순하여 산동 지역을 지났을때, 몽골의 왕공을 비롯하여 각지의 순무들이 모두 줄지어 금과 진주, 옷감 등 을 바쳤습니다. 건륭이 지나는 길에 상인들은 황제를 위한 행궁과 원림을 건축하여 순행의 쉼터로 삼았으며, 행궁을 다 짓고 나면 다시 돈을 털어 궁궐 안에 들어갈 호화품을 구입했습니다. 온갖 골동품, 꽃과 나무, 진귀한 보석, 대나무와 돌 등 헤하릴 수 없는 장식품들이 필요했습니다. 심지어, 본래 매화 따위는 있지도 않는 지역에서, 건륭이 지나는 길에 구경하기 위해 매화 1만여 그루가 심어지기도 해습니다.
많은 대신들이 남순은 백성들의 부담을 준다며 이를 만류했습니다. 건륭이 지나는 길은 모두 보수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받기 때문입니다. 건륭이 타고 있는 배가 강을 지나면, 여러 총독들은 폭죽을 쏘아 황제를 환영했고, 이때문에 여러 사람들은 기침을 하며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남순은 1년 전에 준비되어 친왕이 물자를 조달했고, 황제가 지나는 길의 '사회질서 안정' 을 위해 갑자기 도둑들이 잡히고 부서진 곳을 보수하고 깨끗하게 만들면서 그럴듯한 모습을 꾸미게 되었습니다.
황제가 이렇게 사치를 벌이는데, 신하들이 청렴결백 할리가 없습니다. 첫쨰로, 건륭제가 신임하던 인물 중에 우민중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고 반년도 안되어 우민중의 집안에서 분란이 생겼고, 이를 의아하게 생긴 건륭제가 조사해본 결과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우씨 집안의 숨겨진 재산이 저택과 전원, 비녀와 팔찌 등 장신구, 의류 그리고 숨겨놓은 모든 금은이 200만냥이 나온 것입니다.
물론, 관리가 일개 봉록만으로 200만냥을 벌 수는 없습니다. 건륭은 즉시 화를 내어 재산을 몰수하고, 우민중의 첩을 공자 묘의 하녀로 보내어버렸습니다. 우민중은 생전에 수서 군기대신이었었고, 이는 대형 스캔들이었으므로 건륭이 자신의 체면을 위해 당시는 물론 그 이후에도 모든 내용을 비밀로 부쳐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조선왕조실록만이 진실을 고하고 있습니다.
각로 우민중(于敏中)은 본래 청렴 정직하다고 소문이 나서 황제가 신임하였습니다. 내각(內閣)에 들어가 수십 년 동안 있으면서 비록 말할 만한 사업은 없었으나 백성의 칭찬 또한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그가 죽은 뒤에 그의 첩 장씨(張氏)가 집안의 재산을 사사로이 분배하여 우민중의 조카 우사격(于士格)에게 몰래 주고 그 손자에게 준 것은 매우 적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손자가 복융안(福隆安)에게 하소연하니, 복융안이 황제에게 아뢰었습니다. 황제가 화신으로 하여금 그의 가산을 조사하게 하였더니, 주택, 전원 및 비녀, 팔찌, 의복 등속과 우사격이 갖고 있는 금·은 모두 합하여 따지면 2백만 냥이나 되었습니다.
황제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짐이 수십년 동안 우민중에게 일을 맡겨 그가 청렴하고 정직한 줄로 알았는데, 어찌 그렇게 많은 재산이 있단 말인가?’하고, 그의 가산을 적몰하라 명하였으며, 장씨의 삼품 부인(三品夫人) 고명(誥命)을 빼앗고 곡부(曲阜) 공자묘(孔子廟)의 노비로 삼아 그로 하여금 보고 느끼게끔 하였다고 합니다.
서장관 조정진이 청나라를 다녀오고 나서, 이 일에 대한 보고를 정조에게 올렸고, 따라서 그 기록이 남아있게 된 것입니다.
또한 건륭제의 옆에서 수많은 횡령을 하여 유명한 화신의 경우, 그 액수가 상상을 초월할 지경입니다. 화신은 정홍기 출신의 인물로서 그렇게 높은 작위를 가진 진압은 아니었지만, 건륭제에게 신임을 맺어 황실과 연을 맺었고, 건륭제의 일방적인 총애를 바탕으로 엄청난 재물을 긁어모으기 시작했습니다.
황금 150만냥
적금 580만 냥(은으로 따질치 1700만냥)
사금 200여만냥
은원보(銀元寶) 1천개 (하나당 100냥)
원보은(元寳銀) 940만냥
단계연(端溪硯 : 옥으로 만든 벼루) 700여개
커다란 홍보석(루비) 180여개
작은 루비 980여개
남보석(사파이어) 크고 작은 합쳐서 4070여개
전당포 75개
은행 42개
골동품점 13개
이 모든것은 끝이 아니라 일부일 뿐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가경제가 훗날 화신의 죄목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부분이 언급됩니다. 가경은 화신의 죄목 스무가지를 말했는데, 게중에서 재산과 관련된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제 화신의 집을 조사해 보니, 남목(楠木)으로 꾸민 집의 참람되고 사치스러운 것이 법제를 넘었다. 또한 다보각(多寶閣)과 격단(隔段)의 양식은 모두 영수궁(寧壽宮)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고, 동산을 꾸며 놓은 것은 결국 원명원(圓明園)이나 봉도(蓬島)의 요대(瑤臺)와 다름이 없었으니, 이것이 그 열세 번째 큰 죄이다"
"계주의 분묘에는 제사지내는 전각을 버젓이 세워놓고 수도(隧道)까지 만들어 두었으므로 부근에 사는 사람들은 화릉(和陵)이라고 부르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그 열네 번째 큰 죄이다."
"그리고 집안에 가지고 있던 구슬과 보물 중에 진주 팔찌가 2백여 개 나 되었으니, 이것은 대궐 안에 있는 것보다도 몇 배나 많은 것이다. 그리고 큰 구슬이 있었는데 이것은 황제의 관(冠) 위에 다는 것보다도 더욱 컸으니, 이것이 그 열다섯 번째 큰 죄이다. "
"또한 보석정(寶石頂)은 그의 머리 위에 얹을 물건이 아님에도 그가 가지고 있었던 진짜 보석정은 수십여 개가 되었다. 그리고 덩이 채로 있는 큰 보석은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니, 이것이 그 열여섯 번째 큰 죄이다"
"집안에 있는 은냥과 옷가지 따위의 숫자가 천만 개 를 넘었으니, 이것이 그 열일곱 번째 큰 죄이다"
"그리고 협장(夾墻)에 쌓아 놓은 금이 2만 6천여 냥이나 되었고, 땅굴 속에 묻어 놓은 은냥도 백만여 냥이 되었으니, 이것이 그 열여덟 번째 큰 죄이다."
"서울 부근의 통주(通州)와 계주 지방에 모두 당전점(當錢店)이 있는데 그곳의 자본을 조사하여 계산해 보니, 십여만 냥을 밑돌지 않았다. 이것이 그 열아홉 번째 큰 죄이다."
"그의 집에서 일하는 유금(劉金)이라는 자는 미천한 가노(家奴) 에 불과한데도 그의 자산을 조사해 보니, 이십여만 냥 이나 되었다. 그리고 아울러 큰 구슬과 진주 팔찌가 있었으니, 만약 명하여 거두어들이게 한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그 스무 번째 큰 죄이다. "
평가의 산정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화신이 횡령한 금액은 무려 국가 재정의 10년치 정도라고 합니다. 이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경악스러운 일입니다. 당시 청조의 판도는 사상 최고의 수준이었고, 어마어마한 재물이 맴돌았으며, 대외무역에서도 성과를 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국의 10년치 재정이라면, 이는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액수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화신이 아무리 건륭의 총애를 바탕으로 몰래 재물을 모았다고 해도, 건륭이 그걸 이렇게 모르고 있다는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떠한 사람들은 화신의 재산이 곧 건륭의 '저금' 중 하나였으며, 화신이 건륭의 비호 아래 공공연하게 재물을 긁어모았다는 해석을 내놓기도 합니다. 즉, 화신이 재물을 모은건 실질적으로 건륭이 수탈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진실이 어찌되었건, 확실한것은 한가지입니다. 건륭은 이제 과거, 원명원을 아름다움을 할아버지 옆에서 노래한 그 영리한 소년이 아니라, 미쳐버린 노인네에 지나지 않았고, 노망난 늙은이의 손에 제국은 비명을 지르며 급속도로 무너져내리고 있었습니다.
매카트니 경은, 강하지만, 그러나 깨지기 쉬운, 그리고 이미 무너지고 있는 제국을 보았습니다. 과거, 강희제는 연해 지방의 총독들에게, "앞으로는 서양의 나라들이 근심거리가 될 것이다." 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윌 듀란트의 말처럼, "모든 위대한 문명은 외세에 정복당하기 전에 내부로부터 붕괴" 되는 법입니다. 이제, 제국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첫댓글 건륭제의 경우에는 역시 너무 오래 통치를 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군요..
가노가 ㅋㅋㅋㅋ 20만냥이면 가노할만하네
화신은 중국드라마 기효람에서 나오는 그 화신인가.......
강건성세라는 말을 붙이기 민망할 지경이군요...
한국의 5년단임제는 너무 짧지만 너무 길게 하는거도(설사 공정한 투표에 의해 선택되더라도)안 좋아.사람의 에너지는 한계가 있고 나이먹어서 약해지는건 막을수 없거든.
진짜 책으로 쓰셔도 되겠어요.
동감입니다.
444444
이건 show me the money 치다가 버그난 꼴...ㅉ
저승에서 강희, 옹정이
"홍력아! 홍력아! 네 어찌 이럴 수 있느냐!"라 외칠 꼴..........
잘 봤습니다. 볼때마다 스케일은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