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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위상
1970년도에 한국 천주교회는 인권 운동과 사회 정의 운동을 통해 사회 복음화에 힘썼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교회는 한국의 경제 발전에 따른 부정적인 측면들, 즉 물질 만능주의, 인간 경시 풍조 등을 지적하고, 상실된 인간 존엄성 구현에 앞장섰으며, 1980년도에는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1981) 행사,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1984)과 함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집전으로 '한국의 103위 순교 복자에 대한 시성식'을 그리고 제44차 세계 성체 대회(1989)를 거행하면서 화합, 합심하여 교회 내외적인 성장을 거듭하였다.
1990년도에 들어와서는 신자 개개인의 신앙 쇄신과 성숙을 통해 내실화를 다지고 있으며, 특히 '한 마음 한 몸' 운동 등을 통해 인간성 회복, 신뢰 회복, 자연 질서 회복을 지향하여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인류 공동체 건설과 함께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데 노력을 다하고 있다.
1. 서학(西學) 전래
17세기 초부터, 조선은 중국을 통하여 여러 서양 문물과 서적들을 접하게 되었다. 이를 통하여, 이제까지 명분만을 따지던 주자학(朱子學)의 틀에서 벗어나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위한 실학운동(實學運動)이 남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마침내 천주교(西學)를 연구하기에 이르렀다. 학문(천주학, 천학, 서학)으로 천주교를 연구하던 남인 학자들 중에 어떤 이들은 차츰 이를 믿는 신앙 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갔는데, 그 대표적 인물들은 이벽, 권철신, 일신 형제, 정약전, 약종, 약용의 3형제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중 정약전, 이승훈, 김원성, 권상학, 이총억, 이벽 등은 광주와 여주의 접경 지대인 앵자산에 있는 천진암과 주어사에서 천주교 교리 연구를 위한 강학회를 열었으며(1779년 혹은 1777년) 그들은 옛 성현들의 윤리서(倫理書)에서 시작하여 서학의 철학, 수학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책을 읽고 토론하였다. 마침내 그들은 '천주실의', '직방외기' 등을 읽으며 하느님의 존재와 그 섭리, 영혼의 신령함과 불멸성, 칠죄종(七罪宗)을 극복하기 위한 칠덕(七德)에 관하여 깊이 묵상, 토론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들은 어떤 진리의 빛을 깨달았고, 그 순간부터 즉시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 아는 것은 전부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이 강학회 후, 정약전은 '집계명가'를, 이벽은 '천주공경가'를 지어, 이를 통하여 천주께 대한 감사의 마음과 천주의 자녀로서 사람이 해야 할 도리를 표현하였다.
2. 한국 천주교회 창립(1784)
교리 서적의 부족을 느끼던 이벽은 동지사 편으로 북경에 가게 되는 이승훈에게 북경 천주당을 찾아 세계는 물론 천주교에 관한 더 자세한 교리, 서적, 성물을 가져올 것을 부탁하였다. 1784년 봄,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은 이벽에게 요한 세자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주고, 권일신에게는 프란치스꼬 사베리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주었는데, 이 세 사람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의 주요 인물들이 되었다. 이후 이들은 여러 사람에게 복음 선포와 함께 세례를 주어 수십 명의 영세 신자를 얻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벽, 이승훈, 정약전 3형제, 권일신 형제 등이 주축이 되어, 1784년 겨울 어느 날부터 서울 명례동(지금의 명동)에 있던 역관(譯官)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 모여 이벽을 지도자로 삼아, 주일 배례(主日 拜禮)를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이 되었다. 이렇게 외부로부터의 복음 선포 - 선교사 입국 전교 - 가 아니라, 우리 민족 스스로 진리를 찾아 나서고 자발적인 신앙 수용으로 천주교회를 세우게 된 일은 세계 전교 사상 우리 민족만이 갖는 독특하면서도 자랑할 만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3. 천주교회에 대한 박해
박해의 원인은 천주교인들의 조선의 전통적인 예절인 조상 제사를 거부했다는 것과 정치적인 파벌, 혹은 서양세력의 진출에 대한 거부감 등을 들 수 있다.
1) 최초의 박해 (1785년)
1784년에 창립된 한국 천주교회는 몇 달도 못 가서, 1785년 3월에 관헌에게 발각되어 그곳에 모였던 신자들은 잡히고, 교회 서적 및 성화 등은 압수되어 형조에게 넘겨졌다. 이것은 교회가 받은 최초의 박해였다 (을사추조적발사건, 乙巳秋曺摘發事件). 이 결과로 김범우가 태형과 유배 생활로 인해 사망했고(한국 최초의 순교자), 이벽은 아버지로부터 가택 감금을 당하고 끝끝내 신앙을 지키다가 사망했다.
2) 조상 제사 문제와 신해 박해 (1791)
한국 교회에 보내는 답서에서 북경 주교는 신부를 파견해 주겠다는 기쁜 소식과 조상 제사는 미신이니 금지하라는 곤란한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 결과 이듬해인 신해년(1791) 겨울에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하고 조선 천주교회의 주요 인물이 박해를 받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신해박해). 윤지충은 조상 제사 폐지와 신주(神主)를 불사름으로써, 권상연은 모친에 대한 제사 불이행과 신주를 만들지 않음으로써 친척들과 동네 사람들 그리고 천주교의 반대자들에게 비난과 고발을 받아 치명하게 되며, 이 여파로 평택 현감인 이승훈이 파직되고, 권일신, 원시장 등이 치명하게 되었다. 이 박해의 계기가 된 조상 제사 문제는 이후 1백년 동안 거듭된 박해의 표면적인 이유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천주교 신자들이 4대조까지의 시주를 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주자 가례(朱子家禮)'의 가르침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3)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신유 대박해 (1801)
신해박해가 일어난 2년 동안 조선 천주교회는 대외 활동, 즉 성직자 영입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시기에 용감히 교회를 이끌어 간 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권철신, 정약종, 최창현, 최인길 등이었다. 정약종은 '주교요지(主敎要旨)'라는 교리서를 한글로 만들어 전교에 힘쓰기도 하였다. 이러한 교회를 이끈 이들의 노력으로 1795년 마침내 주문모 신부를 모셔 왔고 이 때부터 조선 천주교회는 많은 발전을 이룩한다.
그러나 배교자의 밀고와 당파의 세도 싸움에 천주교가 큰 박해를 받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신유 대박해(辛酉大迫害)'이며, 이로써 주문모 신부를 비롯하여 권철신, 이가환, 이승훈, 정약종을 비롯한 초대 교회 지도자들과 신해 박해 후 용감히 교회를 이끈 열심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거의 순교하였다. 이후 교회는 34년 동안 목자 없는 교회가 되었고, 신자들은 심산 유곡에 흩어졌다.
4) 프랑스 성직자의 전교 활동과 기해 대박해 (1839)
그후 한국교회는 파리외방 선교회의 모방,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의 입국으로 말미암아 다시금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이들의 헌신적인 성사 거행과 신자들의 열심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의 수는 급속히, 그리고 많이 불어났다. 이러한 신자들을 사목할 방인 사제를 양성하기 위해 모방 신부는 1836년 12월 9일에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을 선발,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그러나 뜻밖에도 모진 기해 대박해가 일어났다. 기해 대박해의 원인도 신유 대박해 때의 것과 마찬가지로 표면적으로는 역시 당파의 세도 싸움이었다. 기해 박해의 결과 정하상을 비롯하여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와 약 200여 명의 신자들이 치명하였다.
한편 이 박해가 일어나자 앵베르 주교의 명을 받은 당시 전교 회장이었던 현석문은 '기해일기(己亥日記)'라는 책을 지었는데, 이는 시복식의 조사 자료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천주 교회사의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기해 박해 때 순교한 이들 중에 가장 큰 일을 이룩했던 순교자는 정하상이었다. 그는 교회 재건을 위해 무수한 활동 외에도, 박해를 짐작하여 '상재상서(上梓相書)'라는 글을 지어 조정에 바쳤는데, 그는 이 글에서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고, 더불어서 유학자들이 오해하여 비난하고 있는 점들을 설명하였다. 이는 곧 천주교 신앙을 옹호하는 최초의 호교론이라 볼 수 있다.
5) 김대건 신부의 전교 활동과 병오 박해 (1846)
마카오에서 유학 중이었던 김대건 신부는 1845년 페레올 주교의 집전으로 사제 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모시고 조선으로 입국한다. 두 외국인 성직자는 조선말을 배운 뒤 충청도를 중심으로 성무를 집행하였고, 김대건 신부는 서울, 양지, 용인 지방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고 이에 따라 신자들의 수는 더욱 더 늘어만 갔다.
기해박해 이후, 전교가 활발해지고 신자들의 수가 증가하자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에게 명하여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를 바닷길로 맞아들일 방도를 모색하게 하였다. 그러던 중 순위도에서 뜻하지 않은 시비에 말려 포졸들에게 잡히게 되었고, 기해 일기를 쓴 현석문을 비롯하여 10여 명의 신자와 함께 순교하게 되었다 (丙午 迫害).
6) 흥선 대원군의 쇄국 정책과 병인 대박해 (1866)
병오 박해 이후 10년간 조정은 교회에 대해 너그러운 태도를 보였고 이 때 최양업 신부를 비롯하여 12명의 프랑스 선교사가 들어와 선교 활동을 펴게 되었다. 특히 최양업 신부는 성무를 집행하는 한편, 신학생을 선발하여 충청도 제천 배론에 신학당을 세워 라틴어, 한문 등을 가르쳤다. 하지만 병인 대박해로 그 결실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열렬한 선교 활동과 신자들의 열심한 신앙 생활로 1836년에는 신자가 2만여 명에 달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성과 뒤에는 신자들을 위해 열심한 사목 활동을 펴시다가 객사(客死)한 최양업 신부의 노고도 숨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1836년 철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 대원군이 집권하게 되었다. 대원군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다지려는 생각으로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박해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박해가 바로 '병인 대박해(丙寅大迫害)'였다. 이 박해는 러시아의 남하, 프랑스 함대의 습격, 독일인의 내습, 미국 함대의 내습에 자극을 받아 악화되었으며, 그 결과로 9명의 성직자들을 비롯하여 만 여 명의 신자들이 치명하게 되었다.
4. 조선 교구 설정(1831)
정약종의 둘째 아들인 정하상은 교회 재건을 위하여 1816년 이래 10여회에 걸쳐 북경을 드나들었고, 교황청에 호소하여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로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조선 교구가 설정되고 초대 교구장으로 브뤼기에르 주교가 임명되었으며, 1836년에는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 모방 신부가 입국하게 되었다. 1841년 무염시태의 성모 마리아를 조선의 주보로 모시고 김대건 신부,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등 충청도 강경을 통해 조선에 입국하게 된다.
5. 신앙의 자유
조선은 일본과 무력적이고 불평등한 '병자 수호 조약(丙子修好條約)'을 체결함으로써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프랑스 선교사들은 조선에로의 입국을 시도하여 사목 활동을 펴기 시작했고, 1882년 '한미 수호 조약(韓美修好條約)'이 체결되자 대내적으로 조선에 입국함과 동시에 사목 활동을 전개하였다. 마침내 1886년 '한불 수호 조약(韓佛修好條約)'을 체결함으로써, 불완전하나마 조약 체결 때 9조 2항에 '양국인이 서로 다른 나라에 가서 그 나라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다'라는 뜻의 "교회(敎會)"라는 글자를 삽입함으로써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고, 이로써 그리스도교의 다른 종파도 이 특전을 입게 되었다.
이리하여 프랑스 선교사들은 자유롭게 전교 활동을 펴기 시작하였고, 이 결과 한국 천주교회는 교세 확장은 물론, 한국인 전체를 위해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은 기여를 하였다.
6. 일제 치하의 한국 천주교회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으로 말미암아 한국과 한국 천주교회는 일제 치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회의 지도층이었던 프랑스 성직자들의 소극적인 태도와 박해로 인해 신자들을 더 이상 잃고 싶지가 않았던 내적인 상황으로 신자들은 개별적으로 독립 운동에 가담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경상도 일원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한 김상태, 조선 침략의 원흉이었던 이토 히루부미를 응징한 안중근, 국채 보상 운동을 제창한 서상돈, 독립 운동 자금을 모았던 안명근 등을 들 수 있겠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기점으로 우리 나라와 한국 천주교회를 더욱더 탄압하였다. 즉 천주교 언론 매체였던 경향 신문 폐간, 신학교의 폐교, 주교 임명 개입, 신사 참배(神社參拜) 강요 등의 갖은 만행을 자행하였고, 1924년에 이르러서는 신사 참배를 빌미로 여러 신부와 신학생들을 징역에 끌고 갔으며 여러 곳의 성당을 그들의 거점지로 불법 점령했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적, 교회 외적인 어려운 상황을 한국 천주교회는 선조 순교자들의 신앙을 바탕으로 잘 극복하여 해방을 맞이했다.
7. 한국천주교회 현대사
광복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천주교회의 현대사는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1) 제1기 (1945-1950년)
이 시기는 일제시대의 막이 내린 시기이고, 군정시대가 시작되면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교회는 완전한 종교 자유와 함께 군정과 제1 공화국에서 개신교와 함께 특별 대우를 받았다. 한편 북한 교회는 침묵의 교회로 고립되어 가는 반면 남한에서는 반공의식이 강조되는 시기였다.
2) 제2기 (1950-1953년 휴전까지)
세계 제2차 대전의 종식과 더불어 시작된 냉전체제는 한반도에서 한국전쟁을 발발시켰다. 이 시기에 남한의 교회는 철저한 반공 체제하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세계 평화를 위해 공산주의를 박멸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전쟁을 지지하고 함께 싸웠으며, 북한에서는 종교 탄압이 더욱 심해져 원산의 덕원 신학교와 수도원이 빼앗기고 외국인 신부, 주교, 수녀들이 체포, 사살되었던 비운의 시기라 할 수 있다.
또 이 시기에 남한 교회는 유엔군의 보호하에 계속적으로 발전하였고, 특히 당시의 교회 원조기관을 통한 피난민 구제 활동으로 교회뿐 아니라 한국 전체에 막대한 도움을 주었다. 또 피난지에서도 신학교가 운영되어 밀양에 소신학교, 제주에 대신학교에서 1953년까지 53명의 사제가 배출되었다.
3) 제3기 (1953-1962년, 휴전 이후의 교회)
이 시기에는 자유당 독재가 강화되었고, 4.19 혁명과 5.16 쿠데타가 발생하였다. 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면서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전통문화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한편 교회는 이 시기에 놀라운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 이유로는 첫째 전쟁과 혁명 및 사회 변화, 빈부 격차 등으로 많은 이들이 종교로 많이 귀의한 점, 둘째 교회의 다양한 선교와 수도회의 진출 및 한국인 성직자가 급증한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쟁의 구호 물자로 인한 신자의 급증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교회와 정부와의 관계는 상당히 불편하였는데, 자유당의 탄압으로 '경향신문'이 폐간당했고, 이승만 정권과 노기남 주교 사이의 불화가 교황청에까지 비화되기도 하였다.
4) 제4기 (1962-오늘날까지)
먼저 이 시기에는 포교지 교구제도이었던 한국교회가 정식 교구장과 본당으로 승격되는 등 교계제도가 설정되었다. 이를 계기로 한국에는 서울, 대구, 광주관구로 나뉘어졌으며, 교육, 특수 분야에서 활동하는 수도회가 많이 진출하였다.
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으로 한국어 미사가 실시되었고, 새 교리서 발간되었다. 1968년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를 비롯한 많은 평신도 단체가 생겼으며, 교회 일치 운동도 활기를 띠어 공동 번역 성서가 발간되었다.
한편 70년대에 들어 공의회의 영향을 받아 교회의 사회 참여 의식이 고조되어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며, 반독재 투쟁에 교회가 앞장 서기도 하였다.
80년대에는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1981), 한국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 대회(1984), 제44차 세계 성체 대회(1989) 등 세 번에 걸쳐 대규모의 신앙대회 및 국제대회가 열려 교회의 외적인 팽창이 현저하게 늘어났다.
1. 바람직한 사목 전망
1) 우리 교회는 민족의 일치를 나타내는 표지로서, 타당한 이유 없이 분단된 민족의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가능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통일의 평화적 실현을 위한 밑거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 사회 안의 민주. 정의화와 조국의 평화 통일을 진심으로 염원하는 많은 개인과 단체들이 형제적 유대 관계를 맺으면서 민족의 염원을 공동으로 실현시켜 나갈 수 있도록 선도적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2) 정보 혁명의 시대에 발 맞추어 나가기 위해 교회는 노력해야 한다. 즉 끊임없이 생성 소멸하는 정보에 뒤떨어지지 않고 급변하는 사회에 발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보에 대한 즉각적인 접근은 교회로 하여금 현대 세계와의 대화를 심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3) 본당을 지역 문화의 장으로 활성화시켜야 할 것이다. 다양한 문화 생활과 여가 활동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 줄 만한 프로그램을 준비해 꾸준히 지속시켜야 한다.
4) 노인, 청소년들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에 더욱 치중해야 한다. 전통적인 가족 기능과 유대 약화로 이미 발생하기 시작하여 점차로 더욱 심각해질 사회 문제, 즉 노인과 청소년의 문제를 교회가 앞장 서서 풀어 가야 할 것이다.
5) 신앙인들은 생활의 질적 향상으로 말미암아 주일 미사에 참례하는 것을 소홀히 여길 여지가 많다. 따라서 교회는 이에 대비하여 충실한 신자 재교육을 준비해야 할 것이며 주말을 이용한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6) 소공동체 모임을 더욱 활성화하여 갈수록 대규모화, 기능화, 조직화하여 가는 사회 현실에서 이를 통해 각자가 더욱 신앙을 성숙시키고 또한 그 안에서 일반 사회에서는 맺기 힘든 공동체 상호간의 유기적 관계를 심화시킬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1. 최근의 한국 교회에서는 예비자의 수가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교회 내적인 원인은, 무엇보다도 본당들이 대형화되면서 사목자와 신자들간의 대화와 유대가 미흡하고 신자 재교육 및 내적 쇄신에 대한 관심이 낮아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예비 입교 때 실천적인 신앙 생활 규범이 소홀히 되고 지식 위주의 교육이 이루어져 신앙의 체험이 미약함을 그 원인으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교회를 찾는 사람들의 현실적인 욕구와 부합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임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그 대책을 강구하여야 할 것이다.
2. 오늘의 한국 교회의 신자수는 전체 인구의 6% 미만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오늘의 교회가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더욱 많은 노력을 경주해야 할 필요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더불어 이는 한국 교회가 한국 현대 사회의 모든 부분을 책임질 수는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오늘의 교회가 만능적인 해결사가 될 수 없으며,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아니 될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여 오늘의 교회는 참으로 정의롭고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드는 데에 지속적인 노력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3. 교회는 이 나라의 민주화와 이 민족의 인간화를 위해 최선의 길을 모색하고 이를 위한 실천적인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또한 교회는 북한의 복음화를 위해 더 큰 노력을 전개하여 민족의 재일치 및 화해에 대한 열망을 확산시키고, 그 방법을 다른 이들과 협력하여 모색하는 데에 앞장을 서야 할 것이다.
4. 교회는 인간다운 품위와 존엄성을 상실 당하고 있는 북한의 민중들에게 동족으로서의 아픔과 위로의 뜻을 전해야 한다. 독재의 채찍과 사슬은 그것이 무섭고 고통스러운 것일지라도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본성에 대치되는 것이므로 그 생명이 짧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남북한의 갈라진 겨레가 한 민족으로서 손잡을 수 있도록 다함께 기도해야 할 것이다.
5. 하느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신다. 우리 한민족의 역사 속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역사 속에서 찾아보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1.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
북경 천주교회를 본떠 설립한 제도로서 조선 천주교회 초기에는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 하에서 주일 미사 거행과 신앙 생활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권일신, 이승훈, 정약종, 최창현, 이존창, 유항검 등 10여명의 당시 가성직자들은 돌아가면서 신자들에게 강론과 세례와 고해성사와 견진성사를 베풀고 미사를 거행하는 등 전체 신자들과의 신앙 생활을 지속시켜나갔다. 그러나 교회 서적을 다시 검토해 본 결과 1788년에 이르러 자신들이 행해 오던 일과 자격에 의문이 생겨 이를 중지하고, 북경에 윤유일을 보내어 의문점과 함께 조선 천주교회의 사정을 자세히 알렸는데 여기에 대해 북경 천주교회의 구베아 주교는 크게 감탄하는 한편, 격려와 함께 가성직제도의 불가함과 세례 이외의 어떠한 성사도 거행할 수 없다는 답서를 주었고, 윤유일은 이 답서에 의해 그들이 해왔던 성무(聖務)를 즉시 중지하였고, 그해 5월 다시 윤유일로 하여금 신부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2. 황사영 백서(黃嗣永 帛書)
1801년 황사영이 신유교난이 일어나자 신앙의 자유를 강구하기 위해 당시 중국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고자 했던 청원서로써 여기에는 당시 교회의 박해 상황과 국내 정치 상황 그리고 포교를 위한 군함의 동원 요청의 내용 등이 적혀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800년 말부터 시작되었던 신유교난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어 천주교에 대해 더욱 심각한 탄압이 야기되었다.
3. 성인(聖人)과 복자(福者)
교회에서 생전의 매우 뛰어난 덕성과 행적을 찬양하고 모든 신자들의 귀감으로 삼아 본받고자 존경하며 떠받드는 인물을 '성인'이라 하고, 성인으로 추앙하는 절차에 있어서 덕성과 행적이 뛰어났음을 교회가 인정하나 아직 성인으로 선언하지 않은 인물에게는 '복자'라는 존칭을 드린다.
4. 군문효수(軍門梟首)
조선시대 국가에 큰 죄를 지은 죄인의 목을 베어 군문에 매달아 놓던 형벌의 한 가지로써 이는 군율로서 죄인의 목을 베어 군대 영문 안에 매달아 민중들을 경계하는 뜻에서 취해진 조치였다. 집행 과정은 먼저 군대가 형장에서 시위를 한 후, 사형수의 얼굴에 회칠을 하고 양팔을 등 뒤로 잡아 묶고, 어깨 밑으로 긴 막대기를 끼워 여러 번 형장 주위를 끌고 다니다가 큰 소리로 사형수의 죄상과 판결문을 낭독한 다음, 양쪽 귀에 화살촉을 위로 가게 꿰고 사형수의 상의를 벗긴 후 목을 벤다. 그리고 벤 목을 군문에 높이 달아 놓는다. 앵베르 주교, 베르뇌 주교, 다블뤼 주교, 김대건 신부, 샤스땅 신부, 모방 신부, 주문모 신부 등이 이 형벌을 받아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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