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언제 어디서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대가 왔습니다. 도심을 휩쓰는 인파들, 그들은 같은 거리를 지나다니고 있지만 귀로는 각자 다른 음악을 듣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장소를 이동하며 들을 수 있는 음악은 고작해야 거리 악사들의 바이올린 연주나 아코디언 연주가 전부였습니다.
모든 것이 디지털로 전환 가능한 요즘, 음악도 샘플링한 음색을 내려 받아 합성하면 굳이 악기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전자기타, 전자오르간, 전자피아노가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필자는 전자 아코디언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아코디언은 만들어질 때부터 사람의 손을 많이 필요로 하는 악기입니다. 다양한 악기가 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해 만들어지고 있는 시대지만, 아코디언은 아직 수공업 단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아코디언 연주를 듣고 있자면 아날로그 감성이 자극되어 옛 추억이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릴 때 제가 처음 만져본 악기는 풍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풍금 소리만 들으면 어린 시절의 추억에 잠기곤 합니다. 아코디언도 마찬가지입니다. 풀무질을 해서 바람의 힘으로 소리를 내지만 정작 음색을 결정하는 것은 얇은 쇠판입니다. 풍금이나 아코디언은 소리 내는 방식도 같습니다. 풀무질할 때 발을 구르느냐 팔을 벌리느냐의 차이입니다. 파이프에 공기를 주입하는 것은 파이프오르간과 같지만 풍금이나 아코디언에는 바람 주입구에 자유롭게 흔들리는 쇠판이 붙어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프랑스어 발음 같은 콧소리에 금속성이 더해진 독특한 음색이 특징입니다.
아코디언의 먼 조상을 찾는다면 중국 악기 솅(笙)입니다. 이것은 길이가 다른 여러 개의 대나무 관을 바가지에 묶은 다음 입으로 불어넣은 공기가 각 관에 전달되도록 하고 입구에 붙여 놓은 쇳조각을 울려서 소리를 내는 관악기입니다. 우리나라에는 그대로 전래되어 생황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모니카를 소리 내는 원리 역시 마찬가지다. 아코디언의 별명은 ‘핸드 하모니카’입니다. 손이 입의 역할을 대신할 뿐입니다. 아코디언의 또 다른 매력은 무릎 위에 악기를 올려놓고 양팔 사이에 끼워 가슴으로 연주하는 점에 있습니다. 악기의 떨림이 고스란히 연주자의 가슴으로 전달됩니다. 연주자의 가슴 깊이 사무친 감정이 고스란히 아코디언으로 옮겨져 더욱 애틋한 선율로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코디언은 183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당시 클래식 작곡가들은 이 악기에 별로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떠돌이 악사나 아마추어들이 연주하는 악기라는 선입견 때문이었습니다. 이국적이고 목가적인 음색을 내기 위한 특별한 상황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한 일반적으로 아코디언은 오케스트라 정규 편성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아코디언을 위한 작품 목록을 뒤져 보면 20세기 이후에 발표된 곡이 오히려 더 많습니다.
차이코프스키의 관현악 모음곡 제2번의 3악장에는 아코디언이 네 대나 등장합니다. 연주 시간이 40분이 걸리지만, 이 작품에서 아코디언 연주 분량은 40초밖에 되지 않습니다. 차이코프스키가 이 곡에 굳이 아코디언을 넣은 것은 하층 계급의 저급 코미디 쇼를 떠올리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이탈리아 작곡가 움베르토 조르다노도 그의 오페라 <페도라 (1898)>에서 아코디언을 사용했습니다. 스위스를 배경으로 한 3막에서 알프스 목동의 노래를 반주하기 위해 아코디언이 세 번 등장합니다. 모두 27마디에 걸쳐 나오니까 그래도 차이코프스키보다는 낫습니다.
20세기 독일 작곡가 파울 힌데미트도 실내음악 제1번에 아코디언을 넣었습니다. 차이코프스키나 조르다노와는 달리 이 곡에서는 아코디언이 제법 주도적인 역할을 합니다. 알반 베르크의 오페라 <보체크 (1922)>에서는 술집 장면에 아코디언 연주자가 무대 위에 등장합니다. 물론 연기자는 악기만 들고 연주하는 시늉만 낼 뿐 실제 연주는 오케스트라 파트에서 합니다. 쇼스타코비치의 발레 음악 <황금시대>도 4막의 거리 악사 장면에서 아코디언을 사용합니다. 지휘자 겸 작곡가 로린 마젤의 첼로 협주곡에도 아코디언이 나옵니다. 공산주의 소련 시절 러시아 정부는 민속 음악의 보존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는데 키예프 음악원 등에 아코디언 전공을 개설하고 전문 연주자를 양성해냈습니다. 지금도 러시아 출신들이 세계 각지에서 열리는 아코디언 콩쿠르를 휩쓸고 있습니다. 러시아 출신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미하일 플레트노프의 아버지는 유명한 아코디언 교수입니다.
반도네온은 아코디언의 일종인데 아코디언보다 음색이 훨씬 우울합니다. 1900년대부터 탱고 음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악기로 자리 잡았습니다. 네모난 모양의 긴 주름상자의 양 끝에 단추식 건반을 갖추고 손목을 통해 악기를 떠받치는 가죽 밴드가 달려 있습니다.
오른손의 건반은 고음부, 왼쪽은 저음부의 음을 내고, 오른쪽 건반(옆에 공기구멍과 개폐판)을 조절하는 금속제의 레어가 있습니다. 오른손은 38건, 왼손은 33건으로 142음을 내고 아코디언으로는 낼 수 없는 날카로운 스타카토 연주가 가능하고, 깊은 맛이 나는 매력적인 음색을 냅니다.
한편, 독특한 악센트와 함께 부에노스아이레스 서민들의 고독과 우울을 담아온 음악은 반도네온이라는 악기가 있었기에 탱고 고유의 정서를 채색할 수 있었습니다.
아르헨티나 탱고의 황금기를 구가했던 시절 탱고 단체의 리더로 활약했던 많은 명인들이 반도네온 주자였고, ‘New Tango’의 시대를 열어 탱고를 예술의 경지에 올려놓은 피아졸라 역시 뛰어난 반도네온 연주자였습니다. 다른 장르의 음악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탱고를 탱고답게 만드는 ‘탱고의 꽃’이라 할 만한 악기가 바로 반도네온입니다. 가장 유명한 연주자는 아스토르 피아졸라입니다. 아코디언을 들으면 서커스, 댄스홀, 거리 풍경이 떠오르지만, 반도네온 선율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의 술집에서 노동으로 지친 일상의 무게를 털어내기 위해 탱고에 빠져들었던 소시민들의 애환과 한숨이 담겨있습니다.
아코디언과 반도네온이 함께 하는 아주 좋은 음반 추천
<피아졸라, 반도네온과 현악 사중주로 듣는 탱고>, 반도네온 헬무트 아벨, 포르투나 4중주단 (Profil 5010)
피아졸라가 탱고 음악에서 추구한 악기 편성은 바이올린, 피아노, 기타, 베이스, 반도네온의 5중주입니다. 탱고를 제대로 즐기려면 악기 편성이 단출할수록 좋습니다. 피아졸라도 생전에 크로노스 4중주단과 함께 작업한 적이 있습니다.
<피아졸라, 반도네온 협주곡>, 탱고 센세이션, 첼로 다비드 게링가스, 리투아니아 체임버 오케스트라 (델로스 DE3349)
이 음반은 피아졸라에 대한 다소 클래식한 재해석입니다. ‘반도네온 협주곡 1980’은 피아졸라의 악보에 충실히 따르지만 ‘리에주에 대한 경의1985’는 원래 기타와 반도네온, 현악 합주를 위한 협주곡인데 기타 대신 첼로를 위해 협주곡으로 편곡했습니다. 바얀 연주자 드라우그스폴은 원래 작곡을 전공했습니다.
<에디트 피아프, 나는 전설이다> (소니 뮤직)
에디트 피아프의 히트곡을 두 장의 CD로 엮었습니다. 그의 샹송 가운데는 유난히 파리의 거리 풍경을 담은 노래들이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아코디언이 빠지면 샹송의 맛이 나지 않습니다. ‘아코디언 연주자’ ‘파리의 하늘 밑’ ‘사랑의 왈츠’ 등에서 아코디언이 등장합니다.
마르크 페로네 <시네마 메모리> (아르모니아 문디)
아코디언 연주자 마르크 페로네는 영화 사운드트랙 작업을 많이 한 편입니다. 베르나르 파브르 감독의 <발자국>(La Trace 1983
)을 비롯해 <시골의 어느 하루> <아코디언> <르느와르> <모네> 등에 그의 아코디언 연주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 음반은 <물랭 루즈> 등 페로네가 연주했던 영화음악 중 하이라이트를 엮었습니다.
<파리 카페 뮤직> (러프 가이드 RGNET1084)
이 음반에는 파리의 서정이 물씬 풍기는 샹송과 아코디언 연주를 모았습니다. 전통적인 샹송에 재즈적인 요소까지 가미해서 부담없이 즐길 수 있습니다. 에디트 피아프는 물론 람세스, 장 코르티, 미셸 베르나르 등의 샹송 선율도 흐릅니다.
피아졸라, <반도네온 협주곡, 세 개의 탱고>, 세인트 루크 오케스트라 (일렉트라 논서치 7559-79174-2)
이 음반은 피아졸라의 연주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음반입니다. 랄로 시프린이 편곡을 맡아 오케스트라가 다소 풍부한 사운드를 냅니다. 협주곡이나 탱고나 반도네온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처 : 사외보 아주좋은날 2014.09+10월호
IN MUSICAL INSTRUMENTS 특별한 악기에 얽혀 있는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글 :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