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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보이지 않는 꽃비가 내리다 (1989년 2월 16일)
경문
석두 화상의 초암가(草庵歌)
사랑하는 스승님!
나는 세속적인 보화라곤 아무것도 없는 초암(草庵)을 지었다. 자연스럽게 먹고 자는 나는 편안하다. 초암을 지었을 때 풀은 새것처럼 보였다. 지붕이 낡으면 새 풀로 다시 인다. 초암에 사는 사람은 항상 거기 있다. 안팎에도 없고 안과 밖의 중간에도 없다. 나는 세상 사람이 사는 곳에 살지 않는다. 나는 세상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초암은 비록 작지만 법계(法界)를 모두 담고 있다. 방장 스님은 이를 잘 안다. 상승의 보살은 이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범인은 이를 의심한다.
“초암은 부서지는가, 부서지지 않는가”라고 묻는다면, “부서지건 아니건 주인은 항상 존재한다”고 말하리라. 나는 동서남북 어디에도 살지 않는다. 초암의 기초는 더없이 튼튼하다. 푸른 솔 아래, 초암의 밝은 창가에 서면 황금 궁전도 부럽지 않다. 몸에 걸치고 머리에 두른 것 버리니 세상만사 나는 모른다.
나는 이 초암에 살면서 인생의 답 구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인생의 답들을 팔기 위해 진열해 놓는 자들은 누구인가?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면 나는 초암으로 돌아온다. 신비한 근원에 닿아 긍정도 부정도 없다. 눈 밝은 조사를 만나 가르침을 받은 뒤로, 홀로 초암을 짓고 살면서 물러서지 않았다. 삶이 흐르는 가운데 손 놓고 일 없어도 문제없다. 온갖 답들은 수행의 방편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초암에 사는 불멸의 사람을 알고 싶다” 하면서 왜 가죽부대를 떠나려고 하는가?
벗들이여!
나는 오늘 루돌프 살만 루시디(Rudolph Salman Rushdie)의 악마의 시(The Satanic Verses)에 대한 출판금지조치를 풀어주기를 인도 수상인 라지브 간디(Rajiv Gandhi)에게 요청한다. 이 책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 책을 없애려고 들거나 출판을 금지시키려고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 책을 읽어보지도 않은 사람들이다.
루시디는 인도의 이슬람 가정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계적인 문학가가 되었다. 인도에서 태어났으므로 그에게는 아직도 인도 시민권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인도 헌법은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기본 인권으로 보장한다. 살만 루시디는 자신의 책에서 마호메트에 대해 한 가지만을 언급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의 표현은 비난 조도 아니다. 그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했을 뿐이다. 그뿐 아니라, 루시디가 기술한 사항은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이슬람 신학자들이 공인한 사실이다.
문제가 된 부분은 초기 코란에 나오는 세 명의 여신에 관한 것이다. 마호메트는 초기 코란에서 세 명의 여신을 이슬람의 신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후에 세 여신에 관한 시편들은 악마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선언한 뒤 코란에서 삭제해버렸다. 마호메트가 세 여신에 관한 시편들을 삭제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루시디의 책은 신학자들 사이에서 공인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한 것이다. 결코 비난의 의도를 지니고 서술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루시디로 인해 마호메트도 악마의 꾐에 넘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슬람계가 그렇게도 분노하는 것이다. 루시디가 세 여신에 대한 내용을 기술하지 않았더라면 그 내용은 영원히 묻힐 뻔했다. 그렇다면 다른 시편들은 어떠한가?
살만 루시디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책임이 있다면 마호메트 자신에게 있다. 이슬람교인들은 마호메트도 속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그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하여튼 살만 루시디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신학적 문제를 주제로 해서 악마의 시라는 책을 썼을 뿐이다.
이 문제로 인하여 파키스탄 주재 미국 대사관 앞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이 시위에서 다섯 명의 파키스탄 사람이 죽었다. 루시디의 책은 영국에서 이미 출판되어 시중에 나왔으며 미국에서는 곧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래서 파키스탄 사람들은 미국 대사관 앞에 모여 미국 정부는 루시디의 책을 출판 금지시켜야 한다고,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테러도 불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들은 루시디의 책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조차 모르는, 그저 소문만으로 루시디의 글을 접한 이슬람 광신도들이다. 경찰은 시위대의 미 대사관 진입을 막기 위해 발포했으며 다섯 명의 이슬람교인이 총에 맞아 사망한 것이다.
인도는 민주적인 세속 국가다. 라지브 간디는 출판금지 조치로 자신이 겁쟁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렸다. 그가 겁쟁이라는 사실은 상관없다. 하지만 그는 일국의 수상이기 때문에 인도 헌법에 위배되는 위헌적이고 위법적인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출판금지 조치를 당장 취소하라!
나는 라지브 간디가 악마의 시를 읽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만약 읽었다면 악마의 시는 픽션이기 때문에 문제될 게 없음을 알았을 것이다. 이제는 이슬람 학자들조차 살만 루시디를 변호하고 나섰다. 물론 이 학자들은 이란에 살지 않는다.
소위 종교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저질이다. 그들은 자기 종교에 관한 문제를 하나만 제기해도 상대를 죽이려고 든다. 상대의 책을 읽어보지도 않는다. 네 명의 사람들이 죽어야 할 만큼, 루시디의 책 안에 거창하고 중대한 내용이 들어 있는지 모르겠다. 루시디를 죽이려고 드는 것은 이슬람법뿐 아니라 이란의 헌법에도 위배되는 행위다.
이란은 전세계의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그들은 한 문학가의 기본적인 인권을 유린하고 있다. 우리는 왜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가? 왜냐면 악마의 시에는 마호메트를 비난하는 내용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미 이슬람 학자들이 1,400년 동안 받아들인 역사적인 사실을 기술하는 것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방송에서 “작자인 살만 루시디, 그리고 발행인과 인쇄인과 판매인, 이 네 명을 없애는 것은 전세계 이슬람의 의무다. 가차없이 죽여야 한다”라고 발표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행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살만 루시디는 지금 영국에서 숨어 지내고 있다. 그는 출판 홍보차 미국으로 가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나는 라지브 간디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찾고 있었다. 또한 이슬람 학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루시디에 대한 인권 유린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세계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다음은 내가 읽은 뉴스 기사다.
전(前) 마드라스(Madras) 고등법원장 이스마일(Ismail) 판사를 위시하여 저명한 이슬람교인들은 악마의 시의 작가인 살만 루시디와 출판 관계자들에게 이슬람법을 위배했다는 혐의로 ‘사형 선고’를 내린 아야톨라 호메이니를 강렬히 비난하고 나섰다.
이슬람 학자들은 호메이니의 사형 선고―법학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신학적으로도―는 허무맹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약 1백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 영국 이슬람교인의 대변인인 헤샴 엘에사위(Hesham El-Essawy)는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호메이니의 명령을 집행하는 사람은 당연히 살인죄로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호메이니의 성명에 대해 영국 이슬람교인 모두는 진심으로 유감을 표명하는 바이다. 그의 사형 언도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살인 위협이나 폭력 행위는 어떠한 명분을 내세운다 해도 종교적인 행위로 받아들일 수 없다. 현 상황이 위험스럽게 전개되고 있는 바, 많은 사람들이 루시디에 대해 공감을 표시하고 있음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영국 국회의원들도 이란에게 공식적으로 항의할 것을 정부 측에 요청하고 나섰다.
종교 지도자들의 광신적이고 독단적인 태도에 우리는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정치 지도자들은 권력을 남용하지 않도록 각별히 깨어 있어야 한다. 루시디의 책에 대한 출판금지는 명백한 권력 남용이다. 나는 강렬하게 이 조치를 비난한다. 나는 루시디나 악마의 시나 이슬람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아무런 관심도 없다. 나의 관심사는 이번 사건이 문명사회의 초석이 되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파괴하는 전례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뿐이다.
라지브 간디는 정신을 차리고 루시디의 책에 대한 출판금지를 철회하라! 세계의 정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식으로 출판금지가 자행되면 시인과 소설가의 창작력은 파괴될 수밖에 없다. 시인과 소설가들이야말로 이 땅의 소금이다. 그들만이 이 땅의 진정한 창조자들이다. 창조적인 예술행위를 억압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세상과 아름다움, 진리, 문화, 문명에 기여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이 한 일은 파괴뿐이다. 그들은 신의 이름으로 파괴를 자행했다. 하지만 불쌍한 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애초에 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산야신들의 질문에 답을 하기 전에 언급하고 싶은 말이 하나 더 있다. 내가 몇몇 선사들을 일본인이라고 한 것에 대해 중국 산야신들이 불만을 표시한다는 사실을 나는 오늘에서야 알게 됐다. 중국 산야신들이 제기한 문제는 내가 언급한 여러 선사들이 사실은 일본인이 아니라 중국인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나는 지식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는 지식 너머의 것으로 이야기한다. 선은 어느 나라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어떤 선사가 중국인이냐, 일본인이냐, 인도인이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선을 나라나 인종이나 언어에 가두려고 하지 말라. 적어도 선만큼은 말이다. 선은 온 우주의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야단법석을 떨 필요 없다. 내가 강의하는 선의 경문들은 전에 내가 책을 뒤져서 읽고 선별한 것들이 아니다. 마니샤가 경문을 골라서 가져오면 나는 그냥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강의할 뿐이다. 나의 유일한 관심사는 오직 선이다. 일본이냐 중국이냐가 아니다.
여기 석두가 하는 말을 보라. “나는 동서남북 어디에도 살지 않는다.” 선을 인종이나 언어, 지구촌의 어느 땅 조각에 가둬보라. 그러면 선은 당장 죽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나는 학자도 아니요 지식인도 아니다.’ 내가 하는 말은 순간순간 즉석에서 흘러나온다. ‘선은 온 우주의 것이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신경쓰지 말라. 기분이 상했는가? 맞다, 나의 특기는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사소한 것들에 기분 상하는지 아는가? 석두가 중국에서 태어났든, 일본에서 태어났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나는 심지어 인도인도 아니다. 나는 우주의 사람이다. 광대무변한 사람이 되라. 왜 정치가와 성직자들이 그어놓은 작은 감옥에 갇히려 하는가? 사람들을 광대무변한 우주로, 영원하고 무한한 우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 이것이 나의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전히 중국과 일본과 인도에 매달린다. 좋다. 그러면 중국 무슨 성(省), 무슨 군(郡), 무슨 현(縣)을 다 밝혀야 하는가? 무슨 도시, 무슨 마을까지?
선사는 그냥 선사일 뿐이다. 선사는 선의 사람일 뿐이다. ‘선사’라고 할 때 그 선사는 중국 사람도 아니요 일본 사람도 아니며 인도 사람도 아니다. 나는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경계란 경계는 다 놓으라. 왜 그렇게도 쓸데없는 것에 집착을 하는가? 왜 이 광대무변의 우주를 향해, 이 드넓은 하늘을 향해, 피안을 향해 자신의 문을 열지 않는가? 선은 피안의 세계에 속한 것이다. 범인이 되지 말라. 내 산야신이 범인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산야신이 우주의 시민이 되길 바란다.
그러면 첫 번째 질문부터 보자.
일전에 말씀하신 대로, 신이라는 개념에서 자유로워져서 인간의 자존을 되찾으면 더 이상 에고에 끄달리지 않아도 됩니까?
그렇다, 에고에 끄달리지 않아도 된다. 신이 마음의 부분인 것처럼 에고도 마음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신과 에고는 사촌지간이다. 허구다. 신을 버리는 순간…… 신을 버릴 배짱이 있다면 에고를 버릴 배짱도 있는 것이다. 에고는 내면의 작은 신이기 때문이다. 사촌형이 죽으면 사촌동생은 자동적으로 죽게 되어 있다. 먼저 사촌형을 죽여라. 이 사촌형이라는 존재는 마음이 투사한 것이다. 신은 에고이스트다. 거대한 에고이스트다. 에고는 이런 신에게서 태어난다.
자존(自尊)과 에고(자만)를 혼동하지 말라. 자존은 겸손한 마음과 소박한 마음,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온다. 나무의 모습을 보라. 존귀하다. 나무가 봄에 꽃을 피울 때의 존귀한 모습을 보라. 공작이 날개를 활짝 펴고 춤추는 모습을 보라. 그 다채로운 색깔, 아름다운 춤…… 그 모습에 에고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거기에는 에고가 없다. 자존이 있을 뿐이다.
자존은 에고와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자신을 존중하는 것이다. 에고는 항상 타인을 지배하려고 든다. 자존은 두 발로 당당하게 서서 자신의 자유를 누릴 뿐이다. 결코 타인을 지배하려고 들지 않는다. 타인 위에 서려는 마음이 떠오르는 순간, 그대는 에고의 덫에 걸려든다.
신이 만물을 창조하여 지배한다고들 한다. 그래서 신이 가장 큰 에고이다. 신은 전지전능하다고들 한다. 성직자들을 보면 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교황을 보라. 그는 ‘교황 무류설(敎皇無謬說)’을 주장한다. 교황은 전혀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에고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은 결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자존을 아는 사람은 당당하고 기품 있게 걷는다. 그는 노예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걷지 않는다. 사자처럼 걷고 사자처럼 포효한다. 이것이 자존을 아는 사람의 힘이요 에너지다. 에고는 타인에게 의존하려는 마음에서 태어나며, 자존은 내면에 있는 생명의 원천에서 태어난다. 자존은 명상 속에서 꽃피운다. 명상에서는 에고의 그림자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신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란 곧 자신의 마음에 투사된 신의 형상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신이 사라지면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에고가 사라지는 것이다. 달이 사라지면 호수에 비친 달도 사라진다. 에고란 하나의 달이 수많은 연못과 호수, 강, 바다에 비친 것이다. 먼저 달을 없애라! 그러면 물 위에 비친 달도 사라질 것이다. 물 위에 비친 달을 모두 없애려면 장구한 세월이 걸릴 것이다. 사실, 달을 먼저 없애지 않으면 물 위에 비친 달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신의 머리를 내려친다. 선사들은 불쌍한 제자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려쳤다. 나는 에고가 떠오르는 근원, 바로 그것을 내려친다. 신을 치우라. 그러면 에고는 사라진다. 물 위에 비친 달은 사라진다.
성경에 따르면 신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지었다고 한다. 이것이 에고를 만들어냈다.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존재계에서 가장 높은 차원의 동물로 창조되었으며 동물은 인간의 먹이로 창조되었다. 세상 경전과 종교들은 이런 식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동물을 파괴해도 좋다고 가르친다. 신은 인간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를 위해 이 모든 것을 지었노라.” 이런 신 때문에 인간에게 에고가 태어난 것이다.
먼저 신을 버리라. 그러면 에고는 자연스럽게 떨어져나갈 것이다. 에고는 단지 신의 그림자였음을 깨달을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현상과 자존을 체험할 것이다. 자존을 체험한 사람은 타인 위에 서거나 타인을 지배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존은 인간을 창조하고 사랑하는 존재계의 기쁨이다. 인간은 결코 우발적인 존재가 아니다. 존재계는 인간에게 자존을 부여하고 기품을 부여한다. 그것은 타인에 의존하지 않는 자존이요 기품이다. 그런 자존과 기품은 내면의 가장 깊은 곳을 체험함으로써 우러나온다.
참나를 존재론적으로 체험한 사람은 우주가 된다. 그의 존재에 엄청난 영광과 드높은 의식이 드러난다. 그때 그는 사자후를 토한다. 처음으로 자신이 노예가 아님을 깨닫는다. 처음으로 자신이 피조물이 아님을 깨닫는다. 처음으로 자신은 이방인이 아님을 깨닫는다. 존재계가 나의 집이요 존재계가 매 순간 나를 돌보고 있음을 깨닫는다.
존재계가 개인을 통해 어떠한 높이의 의식과 사랑과 자비, 통찰과 지혜와 깨달음에 오르려고 하는 데에는 어떤 목적이 있고 어떤 운명이 있다. 존재계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인간의 내면을 붓다로 변형시킨다. 붓다가 되는 순간, 인간의 자성이 드러난다. 그 자존에는 어떠한 우월의식도 존재하지 않는다. 장미꽃에도 자존이 있다. 하지만 장미에게는 힘으로 타인을 누르고 그 위에 서려는 마음이 없다. 아주 섬세하고 연약하지만 장미도 엄청난 자존의 존재다. 태양 아래서, 빗속에서, 한 줄기 산들바람에 춤출 때 장미는 존재계가 가장 아름다운 것을 자신 속에 창조했음을 안다.
명상에서 자존이 태어난다. 마음에서 에고가 태어난다. 걱정할 필요 없다. 명상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할 것이다. 명상을 해서 에고이스트가 되는 일은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두 번째 질문을 보자.
신은 죽었다. 이젠 선이 유일하게 살아 있는 진리이다(God is Dead, Now Zen is the Only Living Truth)라는 시리즈 강의 첫날에 “존재계는 그대를 필요로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말의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제게는 이 말도 믿음처럼 들립니다.
나는 그대가 믿으라고 혹은 믿지 말라고, 그 말을 한 게 아니다. 그 말은 나의 체험일 따름이다. 그리고 체험을 나누고 싶었을 따름이다. 내 말을 믿을 필요도 없고 믿지 않을 필요도 없다. 그대 자신이 체험 속으로 들어가 직접 맛을 보라. 자신의 존재 중심으로, 내가 말하는 경지로 직접 들어가보라. 그렇게 자신 직접 체험할 때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알게 된다. 존재계는 분명 그대를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가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다. 존재계가 그대의 삶을 지속시킬 이유도 없다.
내 말을 믿기 시작하면 그대는 필경 나를 오해하고 말 것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신앙 체계를 가르치지 않는다. 나의 말을 믿지도 말고 불신하지도 말라. 그대 스스로 이해하고 탐색하라. 직접 내면으로 들어가 내 말이 맞았나 틀렸나 확인하라. 의문을 품고 찾으면 그대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대를 어떤 신학이나 신앙, 혹은 종교로 개종시키는 데 관심이 없다. 나는 그런 더러운 일을 하지 않는다. 수많은 선교사들이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아니다! 내가 하는 일은 개종이 아니다. 내가 하는 일은 그대의 믿음을 부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믿기 시작한다? 제발 부탁한다, 나를 믿지 말라! 나를 믿든 누구를 믿든, 모든 믿음은 무지에서 나올 뿐이다. 먼저 내 말을 들으라. 그런 다음 듣고 이해한 바를 철저히 검증하라. 직접 해보라. 나는 내가 말하는 것이 진리임을 안다. 하지만 그대가 내 말을 믿거나 신봉하길 바라지 않는다. 직접 해보라! 탐구하라! 그러면 그대도 찾게 될 것이다.
자기 말을 믿으라고 말하는 사람들은―예수는 계속 “나를 믿으라”고 외치고 다녔다―한마디로 말해 자신이 떠들고 있는 진리에 대해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체험한 진리를 확신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믿으라고 떠들지 않는다. 그 대신에 이렇게 말한다. “직접 해보라. 의문을 갖고 탐구하라.” 나는 길을 가리킬 뿐이다. 그 길을 스스로 찾아갈 수 있도록 자극할 뿐이다.
그대의 길을 떠나라. 자기 자신을 찾으라. 거짓은 믿고 신봉하는 것이다. 진리는 스스로 찾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을 강요하는 메시아나 예언자는, 그리고 “나는 신의 화신(化身)이다”라고 떠드는 사람은 그대가 진리의 길을 가지 못하게 훼방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그대의 진아(眞我) 실현을 방해하는 자들이다. 그대의 불성과 본성과 진리를 앗아가는 자들이다. 내가 하는 일은 메시아와 예언자, 화신,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이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뿐 아니라 나는 그들이 하는 일을 전적으로 반대한다. 그들은 인간의 마음에 믿음과 신앙을 주었다. 하지만 나는 인간의 마음에 있는 믿음과 신앙을 부순다. 왜냐? 나는 진리를 스스로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가 스스로 묻고 구하면 그대도 찾을 수 있음을 절대적으로 확신한다. 나는 누구에게 믿음을 강요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자기 체험에 자신 없는 자들만이 남에게 믿음을 강요한다. 자신이 말하는 것을 진정으로 찾을 수 있을까, 확신하지 못하는 자들만이 남들에게 믿으라고 선전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면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직접 체험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믿음을 신봉하면 그대의 구도는 거기서 끝이다. 그러므로 특정 신앙을 신봉하지 말라. 자신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라. 자신의 의식 세계를 계속 탐구해 들어가라. 그러면 아름다움과 진리의 가능성을 발견할 것이다. 그대의 중심 속으로 들어가면 존재계가 그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대는 존재계의 자식이며 별에 가닿으려는 존재계의 손이다. 의식의 진화가 존재계의 가장 위대한 꿈이다. 존재계는 크나큰 믿음으로 그대를 신뢰한다.
마음을 넘어가라. 마음은 사회의 산물이다. 타인이 그대에게 강요한 모든 것을 넘어가라. 그리고 참나가 되라. 그대는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 변하지 않는 존재이다. 이를 깨달으라. 그대의 몸은 변해간다. 소년은 청년으로, 청년은 중년으로, 중년은 노년으로, 그리고 죽음으로 몸은 계속 변해간다. 마음은 몸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변해간다. 마음은 매 순간 변한다. 아침에 이것이었다가 저녁에 저것이 된다. 이러한 몸과 마음 너머에 불멸의 공간(space)이 있다. 사람의 몸이 젊든 늙든, 살아 있든 죽어 있든 항상 변함없이 존재하는 공간이 있다.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의식은 항상 변함없이 존재한다. 이것이 유일한 진리다. 이 진리를 깨달으면 존재계가 자신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를 깨닫는다. 그대 안에는 가장 위대한 붓다의 씨앗이 들어 있다.
이제 경문을 보자.
석두 화상의 초암가(草庵歌)
사랑하는 스승님!
나는 세속적인 보화라곤 아무것도 없는 초암을 지었다. 자연스럽게 먹고 자는 나는 편안하다. 초암을 지었을 때 풀은 새것처럼 보였다. 지붕이 낡으면 새 풀로 다시 인다. 초암에 사는 사람은 항상 거기 있다.
석두가 말하는 초암은 몸을 상징한다. “초암에 사는 사람은 항상 거기 있다.” 이를 보면 초암이 몸을 상징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초암이 몸을 상징하고 있지 않다면 초암에 사는 사람은 밖에 나가서 물도 긷고 밥도 지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초암에 사는 사람은 항상 거기 있다.
안팎에도 없고 안과 밖의 중간에도 없다.
이러한 석두가 어떻게 중국인이 되고 일본인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세상 사람이 사는 곳에 살지 않는다.
세상 사람은 어디에 사는가? 세상 사람은 몸에 살고 마음에 산다.
나는 세상 사람이 사는 곳에 살지 않는다. 나는 세상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세상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돈과 권력과 명예다. 석두의 말은 이렇다. ‘나도 사랑한다. 하지만 세상 사람이 사랑하는 식으로 사랑하지는 않는다. 나는 세상 사람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객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를 사랑한다. 나는 나의 주체를 안다. 그래서 사람들의 주체를 사랑한다. 내가 항상 거기에 있는 것처럼 사람들도 항상 거기에 있다. 어떤 사람은 주체를 알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주체를 모르기도 한다. 나는 그들의 육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의 육신과 마음 뒤에 있는 것, 육신과 마음 너머에 있는 것을 사랑한다. 나는 세상 사람처럼 사랑하지 않는다. 세상 사람은 조건들을 달고 사랑한다. 사랑에 조건을 붙임으로써 사랑을 타락시킨다. 나는 “사랑이 나의 본성이기 때문에” 사랑할 뿐이다. 나는 사랑이 넘쳐흐르는 곳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어떠한 조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가 석두와 나의 사랑을 받아준다면 이는 석두와 내에게 고마운 일이다. 그대는 거절할 수도 있다. 당연히 그대 자유다. 하지만 그대가 넘치는 기쁨으로 받아준다면 이는 ‘그대가’ 석두나 나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 아니다. ‘내가’ 그대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다. 나는 사랑으로 충만해 있다. 그런데 그대가 와서 나의 사랑을 덜어준다. 이는 내가 그대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인 것이다.
초암은 비록 작지만 법계를 모두 담고 있다.
초암은 사람 안에 있기 때문에 작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이 깨닫는 순간, 마음과 사념이 아니라 마음을 넘어선 의식으로 깨닫는 순간, 홀연히 내면에 있는 작은 중심이 온 법계를 담고 있음을 본다. 하나의 작은 씨앗이 무한한 것을 담고 있다. 그래서 작은 씨앗 하나가 온 세상을 푸르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내면의 작은 중심은 엄청난 것을 담고 있다. 그래서 내면의 중심은 온 우주를 가득 채우고도 남는다. 이를 깨우치면 그대는 이를 영원히 간직한다. 이 중심에는 어떠한 경계도 한계도 없다.
방장 스님은 이를 잘 안다.
초암은 비록 작으나 존재계 모두를 담을 수 있음을 안다는 말이다.
상승의 보살은 이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범인은 이를 의심한다.
세상은 범인들뿐이다. 일전에 라지브 간디에게 전보를 보낸 일이 있다. 오늘 신문에 내가 보낸 전보 내용을 비판하는 기사가 실렸다. 참으로 범용한 마음의 극치라 아니 할 수 없다. 나는 그 전보에서 이렇게 썼다. “귀하가 진정으로 정직한 사람이라면 모든 살상의 무기들을 바다에 던져 넣고 군대를 해산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군인들을 논과 밭, 공장과 일터로 보내십시오.”
전에 라지브 간디는 전세계 과학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연설했었다. “나라도 국경도 필요없으며 무기도 전쟁도 필요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라지브 간디의 속마음을 떠보고자 전보를 보냈던 것이다. “정말 그렇게 하실 용의가 있습니까? 실제로 그렇게 하실 용의가 없다면 전세계 과학자들을 상대로 한 말은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이 됩니다.”
나는 라지브 간디가 그렇게 할 용의도 능력도 없음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아무도 그렇게 할 용의도 능력도 없다. 누가 침략받기를 원하는가? 라지브 간디도, 그 누구도 무기를 버리지 못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 말라. “무기를 모두 바다에 버리고 군대를 해산해야 한다”는 나의 주장은 라지브 간디에게 아무런 호소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의 지성의 깊이를 측정해보고 싶었을 따름이다. 아마 나의 주장이 너무도 명확해서 라지브 간디의 말문이 막혔을 것이다.
사실, 라지브 간디는 마하트마 간디를 흉내내고 싶어했던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미국 작가인 루이스 피셔(Louis Fischer)에게 군대와 무기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루이스 피셔는 간디와 함께 살면서 간디의 전기를 준비했던 인물이다.
루이스 피셔가 간디에게 이렇게 물었다.
“인도가 독립을 하게 되면 인도군의 무기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시는 인도가 독립하기 전이었다.
“선생께서는 비폭력을 옹호하고 가르쳤습니다. 비폭력의 관점에서 군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기를 양산하는 군수공장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간디는 전혀 주저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무기를 바다에 던져 넣겠소. 모든 군인을 제대시켜 사회로 돌아가게 하겠소. 우리에게는 군인이 필요한 게 아니라 의류와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오.”
간디의 말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루이스 피셔가 재차 물었다.
“외국군이 침입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간디는 또 서슴없이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손님으로 환대할 거요. 그들에게 ‘환영합니다. 이 땅에서 살고 싶다면 얼마든지 사십시오’라고 말해주겠소.”
라지브 간디는 이런 마하트마 간디를 흉내낸 것이다. 미사여구를 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문제는 마하트마 간디도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파키스탄으로 출격하는 폭격기를 누구보다 앞서 축복한 사람이다. 폭격기들은 당시 간디가 머물고 있던 뉴델리(New Delhi)의 비를라(Birla) 집 근처에 착륙했다. 비를라는 인도 갑부 중의 갑부였다. 간디는 사람들을 상대로 빈곤과 기아를 가르치면서 궁전이나 다름없는 비를라의 대저택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하여튼 세 대의 폭격기는 파키스탄으로 출격하기 전 마하트마 간디의 축복을 받고자, 간디가 머물고 있던 비를라의 집으로 접근했다. 그러자 간디가 정원으로 나와서 두 손을 들고 축복해 주었다.
“가라. 가서 이기고 돌아오라.”
이 비행기들은 파키스탄으로 폭격을 떠나는 최초의 비행기들이었다. 바로 몇 년 전에 무기를 바다에 던져 넣고 침입자를 손님으로 맞이하겠다고 공공연히 말해 놓고서…….
그래서 나는 라지브 간디를 떠보았다. 정신 좀 차리라고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도 맙시다.” 나에게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수상에게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자제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라지브 간디가 참으로 정직한 사람이라면 세계 과학자 회의에서 한 연설 내용을 사과를 하든지, 아니면 연설 내용을 실행에 옮기든지 해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는 나를 비난한 기사 이야기다. 그 기사 내용은 라지브 간디의 연설에 대한 나의 주장을 비난하는 것이다. 기고자는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러면 외국에서 쳐들어오면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지금 제정신입니까?” 나는 이 사람에게 마하트마 간디의 말을 먼저 상기하라고 답장했다. 이 사람의 말이 옳다면 마하트마 간디가 미쳤다는 말인가? 기고자는 나의 전보 내용을 이해하기에 머리가 좋지 않은 것 같다. 그저 평범한 사람인 것 같다. 내가 쓴 전보는 나의 주장이나 생각을 피력하고자 했던 게 아니다. 내가 쓴 전보는 라지브 간디가 국제회의에서 행한, 말도 안 되는 연설에 대한 비평이었다는 것조차 신문 기고자는 이해하지 못했다. 라지브 간디는 군대를 해산시킬 수 있다는 연설을 한 뒤 나흘도 지나지 않아서 그와는 정반대가 되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그는 힌두 국수주의자들에게 행한 연설에서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지켜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불과 나흘 전에 “모든 국경은 사라져야 합니다”라고 말했던 라지브다. 국경이 사라지면 나라는 어디에 있고 민족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 인도인은 애국자니까 나라와 민족을 지키고 다른 나라 사람들 보고는 나라와 민족을 없애라는 말인가?
정치가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있다. 나는 그저 라지브 간디의 가면을 벗겨서 자신의 얼굴을 보게 하려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 기사를 쓴 바보는 내 전보의 내용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전보에서 마하트마 간디와 라지브 간디를 비판했다. 식언을 서슴없이 하는 정치가들을 비판했다.
인간은 지구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이랬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사물을 맑게 꿰뚫어볼 수 있는 눈이 없다. 그래서 무조건 의심부터 한다. 오직 보디삿뜨바만이, 붓다가 될 수 있는 사람만이…… ‘보디삿뜨바’는 붓다가 될 수 있는 사람을 뜻한다. 그대는 보디삿뜨바다. 그대의 내면에 붓다의 씨앗이 잠자고 있다. 그래서 그대가 명상을 통해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가면 나는 그대를 붓다라고 부를 것이다. 그 순간만큼 그대는 붓다다. 그런 다음 그대는 보디삿뜨바로 다시 떨어진다. 명상을 계속 해나가면 서서히 보디삿뜨바와 붓다와의 차이를 알게 된다. 명상이 정점에 이르면 보디삿뜨바는 붓다로 녹아든다. 붓다만이 진리를 밝게 안다. 오직 붓다만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본다.
“초암은 부서지는가, 부서지지 않는가”라고 묻는다면, “부서지건 아니건 주인은 항상 존재한다”고 말하리라.
이제 좀 더 명확해졌다. 석두는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초암이 부서지든 말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그 안에 살고 있는 존재는, 주인은,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의식은 초암이 부서지든 부서지지 않든 아무런 해를 입지 않는다는 말이다.
몸은 죽어도 몸의 주인은 죽지 않는다. 몸은 태어나도 몸의 주인은 태어나지 않는다. 주인은 항상 여기에 있었고 지금도 여기에 있다. 설령 생사가 수없이 되풀이된다 해도, 생사는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대생명 속에서 작은 삽화에 불과하다.
나는 동서남북 어디에도 살지 않는다.
중국이 어디에 붙었는가? 이 사람, 석두를 동서남북 어디에 떨어뜨린단 말인가? 떨어뜨릴 곳이 마땅치 않을 때 나는 항상 일본에다 떨어뜨린다. 왜냐면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기 때문이다. 땅이 없다! 그래서 나는 일본의 인구를 계속 늘리고 있다. 걱정할 것 없다! 걱정해야 될 사람들은 오히려 일본 사람들이다. 왜 중국인들이 걱정하는가? 나는 조마간 일본 천황이 이렇게 항의해오길 기대한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일본에 보내십니까? 일본은 이미 만원입니다.”
도쿄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다. 땅이 부족해서 인공 섬을 만들고 있을 정도다. 일본의 국토는 그리 넓지 않다. 그런데 일본 인구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급증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자, 자연은 즉각적으로 숫자를 회복하기 위해 많은 아기를 낳게 했다. 전쟁이 끝나면 출생률이 급증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갑자기 여기저기서 전보다 훨씬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것이다. 급증하는 출생률을 조절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일본 아이는 참으로 귀엽다. 하지만 자라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일본 아이는 참으로 귀엽고 예쁘다. 일본 인형처럼 말이다. 나는 그렇게 예쁜 아이들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자라면서 아름다움을 상실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어른이 되면 완전히 추해진다. 어떻게 아름다운 아이가 그렇게 추해질 수 있는지 궁금한 일이다.
나는 일본의 아이들 때문에 일본을 사랑한다. 나는 일본의 거듭남을, 일본의 거듭난 선사들을 사랑한다. 그러니 나를 용서하라. 선객에게는 우주가 그의 집이다. 동서남북이 아니다.
초암의 기초는 더없이 튼튼하다. 푸른 솔 아래, 초암의 밝은 창가에 서면 황금 궁전도 부럽지 않다.
옛날 우화가 하나 생각난다. 한 가난한 사람이 오두막에 살고 있었다. 아주 작은 오두막이었다. 오두막은 그와 아내가 누우면 가득 찰 만큼 작았다. 그들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어느 날 밤, 누가 문을 두드렸다. 사방은 칠흑같이 어둡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어느 나그네가 길을 잃은 모양이었다. 그곳은 깊은 산중이었다.
남편이 문가에 누운 아내에게 말했다.
“문을 열어 주시오.”
아내가 말했다.
“누울 자리가 없는데요.”
남편이 말했다.
“여기는 왕궁이 아니오. 가난한 오두막이오. 왕궁에는 누울 자리가 없을지 몰라도 우리 오두막에는 항상 누울 자리가 있소.”
아내가 말했다.
“참 이상하시네요. 이 오밤중에, 저 사람은 물에 빠진 생쥐 마냥 젖었을 텐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이 밤중에 여기에다 사람을 재우고 싶으세요?”
남편이 대답했다.
“그렇소. 그냥 문을 열어 주시오. 야박하게 문전박대할 수는 없잖소?”
아내가 마지못해 문을 열어준 다음 남편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죠?”
남편이 대답했다.
“문제없소. 세 명이면 앉을 수는 있으니까,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 될 게요. 읍내 소식 들은 지도 오래됐으니, 읍내 소식이나 들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면 얼마 안 있어 날이 밝을 게요. 오늘 밤도 이미 반은 지나갔으니까.”
그래서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들어와서 같이 앉게 되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 자신이 누울 자리도 마땅치 않음을 알게 되었다. 부부에게 큰 폐가 됨은 뻔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집 안까지 들어와서 다시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방은 칠흑같이 어둡고 비는 억수같이 퍼붓는데다가 길마저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낯선 이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부부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비록 누추한 오두막이지만 앉을자리만큼은 넉넉합니다.”
그리고 셋은 앉아서 이 얘기 저 얘기를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를 피해 들어와 있던 사람은 문가에 앉아 있었다.
주인이 그에게 말했다.
“열어 주세요.”
그가 말했다.
“예? 자리가 전혀 없는데요.”
주인이 말했다.
“당신이 문을 두드렸을 때, 자리가 좁다고 불평하던 제 처의 말을 들었더라면 당신은 들어올 수 없었을 거요. 자리가 없다니 무슨 말이요? 좀 더 가까이 붙어 앉으면 한 사람 더 앉을 수 있어요.”
그래서 문가에 앉아 있던 사람은 마지못해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이 들어왔다. 새로 들어온 사람이 말했다.
“용서하십시오. 오갈 데가 전혀 없어서요. 칠흑같이 어두운 사방을 둘러보다 여기 오두막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창문으로 흘러나오는 작은 불빛 말입니다. 그래서 작은 불빛만 보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이렇게 폐를 끼치게 돼서 죄송합니다.”
주인이 말했다.
“아닙니다. 조금만 좁혀 앉으면 되지요. 그러면 따뜻해서 좋을 거구요. 흠뻑 젖었는데 춥지요? 사람이 많으니까 방안이 따뜻해질 겁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새로 들어온 사람이 문가에 앉았다. 얼마 있다가 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나귀였다.
주인이 두 번째로 들어온 사람에게 말했다.
“열어 주세요. 나귀는 저를 아주 좋아합니다. 우리 집에 자주 온답니다. 지금 비를 피할 만한 데가 마땅히 없었을 거예요. 열어 주세요.”
문가에 앉아 있던 두 번째 사람이 말했다.
“뭐라고요? 나귀한테요? 아니, 어디에 나귀가 서 있을 자리가 있다고…….”
주인이 말했다.
“먼저 들어온 사람도 당신같이 말했어요. 아마 그 사람 말을 들었더라면 당신은 못 들어왔을 겁니다. 걱정할 것 없어요. 아직도 자리를 만들 수 있으니까. 다 못 앉으면 서 있으면 되지요. 나귀는 가운데 서고. 이 녀석은 참 철학적인 친굽니다. 귀여운 데가 있는 녀석이죠.”
비를 피해 주인집에 들어온 두 사람이 말했다.
“참 이상하시군요.”
주인이 말했다.
“예, 맞아요. 그렇지 않았다면 두 분이 들어올 수 없었지요. 제 처는 따지는 걸 아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아무에게도 문을 열어 주려고 하지 않아요. 집 안이 너무 좁다고 말이죠. 하여튼 문을 열어 주세요. 집주인은 접니다. 여러분은 우리 집에 온 손님들이시고…… 열어 주세요.”
그래서 두 번째로 들어온 사람이 문을 열어 주었다. 아주 마지못해, 나귀를 집 안으로 들인다는 사실에 화가 나기까지 했다. 나귀가 들어오자 모두들 일어서야 했다. 나귀가 가운데 섰다.
주인이 물었다.
“자, 어때요? 이 가난한 오두막이 넓어 보이지 않나요? 집이 넓냐, 좁냐의 문제가 아니에요. 가슴이 넓냐, 좁냐의 문제이죠. 그래서 궁전에 산다고 해도 넓은 데서 사는 게 아니에요. 가슴이 넓지 않으니까 어쩌면 좁은 데서 사는 거죠. 아마 여기가 궁전이었다면 두 분에게 문은 열리지 않았을 겁니다. 이 가엾은 나귀도 들어올 수 없었을 거고요. 하지만 가난한 이의 오두막은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석두는 이렇게 말한다.
초암의 기초는 더없이 튼튼하다. 푸른 솔 아래, 초암의 밝은 창가에 서면 황금 궁전도 부럽지 않다.
석두의 초암은 바위 위에 있다. 석두는 바위 위에서 수행을 하곤 했다. 그래서 그에게는 돌머리, 즉 ‘석두(石頭)’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삭발한 석두의 머리는 돌처럼 보였다. 그는 좌선을 하던 바위를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시켜서 그에게 암자를 지어준 것은 스승 청원이었다. 바위 위에 지었으니 초암의 기초가 튼튼할 수밖에. 석두가 좌선을 하던 바위는 평평해서 암자를 짓기에 좋았다. 청원의 제자들이 바위 위에 암자를 짓기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그들이 초암을 짓는 데 열심이었지만 석두는 말없이 수행을 계속했다.
제자 하나가 청원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 스님 이상해요. 저희들이 오두막을 짓고 있는데도 무얼 하냐고 묻지 않습니다.”
청원이 말했다.
“그는 깨닫기 전에도 이상했다. 그가 깨달은 지금, 그보다 더 이상한 사람은 보기 힘들 게다. 상관하지 마라. 암자나 계속 지어라. 머리는 돌같이 딱딱해 보이지만 가슴은 참으로 부드러운 사람이다.”
석두의 말은 옳다. “밝은 창가에 서면 황금 궁전도 부럽지 않다.” 그대가 진정으로 살아 있다면 조그만 오두막 창도 아름다운 일출과 일몰, 밤하늘을 가득 채운 별과 달, 푸른 솔과 그 향기로 통한다. 누가 궁전 따위에 신경을 쓴단 말인가? 의식이 깨인 사람에게는 곳곳이 모두 궁전이다. 드넓은 하늘이 그의 궁전이다. 석두가 사는 초암의 기초가 아주 튼튼할 뿐 아니라 그의 중심도 아주 튼튼하다. 이제 장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어디를 가든 황제다. 어디에 있든 바로 그곳이 궁전이다.
몸에 걸치고 머리에 두른 것 버리니 세상만사 나는 모른다.
몸에 걸치고 머리에 두른 것 버리면 태양도, 달도, 하늘도, 별도 사라진다. 세상도 사라지고 모든 것이 사라진다. 내가 몸에 걸친 것, 머리에 두른 것 버리면…….
세상만사 나는 모른다.
이것이 바로 선사의 아름다움이다. 그는 자신의 ‘모름’을 받아들일 줄 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할 줄 안다. 사실 모름 속에서 더없는 지혜가 나온다. 모름 속에서 더없는 순수함이 나온다. 모름의 어둠 속에서 새 아침이 밝아온다. 이 모름은 범용한 사람의 모름하고는 전혀 다르다. 이 모름은 마음 너머에서 오는 모름이다.
마음은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다. 이런 마음을 넘어서면 “나는 존재한다”는 말밖에 할 수 없다. 어쩌면 ‘나’라는 말이나 ‘존재한다’라는 말조차 필요없다. 그저 존재만이 있을 뿐, ‘존재가 있다’라는 말도 동의어 반복이다. 지식으로 인한 어떠한 동요도 일어나지 않는 순수한 여여…… 여여의 순수함과 아름다움은 무한하다. 그 속에서 인간이 그토록 바라고 소망한 것들이 넘치도록 피어난다. 이 순수의 꽃은 모름 속에서 피어난다. 진리의 연꽃도 모름 속에서 피어난다.
거울은 아무것도 모른다. 거울은 앞에 사람이 오면 그대로 비출 뿐이다. 선사는 거울과 같다. 선사에게 질문을 해보라. 그는 지식으로 답하지 않는다. 질문을 하면 선사는 거울처럼 질문을 비춘다. 그의 대답은 모름에서 나온다. 경전에 의지해 답하지 않는다. 그의 대답은 완전한 각성과 자발성에서 나온다.
나는 이 초암에 살면서 인생의 답 구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세속을 넘어간 사람에게는 의심이나 믿음, 의문, 답 등이 없다. 그는 그냥 존재한다. 그의 존재는 인간 가능성의 궁극적인 개화(開花)이다.
인생의 답들을 팔기 위해 진열해 놓는 자들은 누구인가?
붓다가 된 사람, 즉 깨달은 사람은 모든 것을 사람들과 나눈다. 팔기 위해 시장에 내놓지 않는다. 모든 종교는 장사를 한다. 그들은 신을 팔고 천국의 땅을 판다. 그들은 아무거나 다 판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턴다. 사람들이 호주머니를 털리고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죽음 뒤의 일을 보장받는 것도 아니다. 무엇을 산다 해도 영수증도 못 받는다. “저는 성직자에게 많은 돈을 예금했습니다. 제 계좌는 어디에 있습니까? 돈을 받은 성직자는 계좌번호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신에게 따질 수도 없다. 사후의 문제를 누가 안단 말인가?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 사람들이 성직자에게 맡긴 것은 모두 성직자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맡긴 것은 성직자에게서 끝난다. 결코 신에게 전달되는 일은 없다. 그들은 신의 주소조차 모른다. 성직자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파는 사람들이다.
사람은 성직자에게서 사후에 대한 희망이나 위안을 산다. 사람은 사후의 긴 여로(旅路)를 위해 뭔가를 사두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혹시 누가 아는가, 성직자의 이야기가 맞을는지도? 하여튼 성직자의 말대로 사후의 일이 전개되든 안 되든, 준비를 해두면 커다란 위안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죽음의 어둠 속으로 편하게 들어간다. 죽음은 길고 긴 터널이다. 사람들은 그 터널이 어디서, 어떻게 끝나는지 모른다. 하지만 성직자로부터 사후를 보장받으면 적어도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성직자에게 돈을 주고 사후를 보장 받는다. 모든 교회와 종교, 종파들이 하는 게 무엇인가? 신을 파는 일이다. 그들은 전혀 실현될 수 없는 희망을 판다. 그렇기 때문에 성직자는 더없이 위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결국 실망으로 끝날 위안을 팔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참으로 위험한 사람들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희망도 약속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이 스스로 찾고 스스로 탐색하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게 되기를 바란다. 사람들이 찾지 못한다 해도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대가 진정으로, 깊이 찾는다면 틀림없이 찾게 될 것이다. 내가 찾았고 석두가 찾았다면, 모든 사람이 찾을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보디삿뜨바로 태어난다. 이 보디삿뜨바의 씨앗을 틔워서 키우면 된다. 그러면 꽃은 절로 피어날 것이다.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면 나는 초암으로 돌아온다. 신비한 근원에 닿아 긍정도 부정도 없다. 눈 밝은 조사를 만나 가르침을 받은 뒤로, 홀로 초암을 짓고 살면서 물러서지 않았다. 삶이 흐르는 가운데 손 놓고 일 없어도 문제없다.
석두는 장장 1세기, 그러니까 100년을 살았다. 석두의 말은 이런 뜻이다. ‘나는 초암을 떠나지 않겠다. 나는 전적으로 충만하다. 그래서 무얼 찾기 위해 어디를 찾아가야 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 나는 찾았다. 그건 내 안에 있다.’ 석두 옆에서 100년의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갔지만 석두는 아직도 천진한 어린아이로 남아 있다. 100년의 기나긴 세월도 그를 더럽힐 수 없었다. 그는 타불라 라사(tabula rasa), 즉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순수 석판이었다. 완전히 텅 비어 있었다. 이 텅 빈 공간에서는 모두가 똑같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용케도 미끄러운 길을 찾아낸다.
깨달은 사람에게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그래서 진리를 찾는 사람은 에고라는 방해물에도 불구하고 알게 모르게 깨달은 사람에게로 끌린다. 설사 사람들이 원치 않는다 해도 말이다. 깨달은 사람이 잡아당기는 힘은 사람들의 마음보다 훨씬 강하다. 그래서 진리를 찾는 사람은 어느 곳에서 어떤 자극이 오면 자신도 모르게 그쪽으로 나아간다.
나는 세상에서 악명 높기로 소문난 사람이다. 아마 나만큼 온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은 사람은 다시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구석구석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온다. 왜 사람들이 나를 찾아오는가? 모든 정부가 나를 반대하고 모든 종교가 나를 반대한다. 하지만 그것조차 사람들이 나를 찾아오는 것을 막지 못한다. 정부나 종교보다 훨씬 강한 힘이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이다. 올 수밖에 없다. 거기에 저항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일단 이곳을 찾아오면 그냥 갈 수 없다. 그냥 간다 해도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나의 향기를 가지고 간다. 가방에 넣어 가지고 가는 게 아니다. 가방이야 얼마든지 잃어버릴 수 있는 물건이다. 가방이 아니라 그대 가슴에 지니고 간다. 가방을 믿지 마라! 나는 사람들의 가방 속에 답답하게 있고 싶지 않다. 나는 가방이 하나도 없다. 내게 필요한 물건은 모두 아비르바바가 가방 속에 넣어가지고 다닌다. 무려 18개나 되는 가방으로 말이다! 나는 종종 아비르바바가 18개나 되는 가방을 어디에 보관하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어쩌면 방에 가방을 죽 늘어놓고 그 위에서 자는지도 모를 일이다. 맞는가, 아비르바바?
(오쇼가 아비르바바를 향해 몸을 돌리자 그녀는 놀라 비명을 지면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눈썹을 치켜올린 오쇼는 그 장면을 보면서 웃는다. 그리고 나서 계속 경문을 읽는다.)
온갖 답들은 수행의 방편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초암에 사는 불멸의 사람을 알고 싶다” 하면서 왜 가죽부대를 떠나려고 하는가?
인간의 가죽부대, 육신, 초암 속에 붓다가 있다. 아무 문제없이, 아무런 의문이나 답도 없이 살고 싶다면―어느 것에도 끄달리지 않는 순진무구한 삶을 살고 싶다면―다른 곳으로 가지 말라. 이 가죽 부대 속에, 이 육신 안에 붓다가 있다. 바로 이곳이 극락이다. 석두의 말은 참으로 대단하다. 여기 제목 ‘초암가’는 참으로 적절한 제목이다. ‘초암가’는 노래다. 참으로 기쁘게 불어야 할 노래다.
잇사의 하이쿠.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이 평정!
이 시원함!
아마 잇사는 그대를 위해 이 하이쿠를 썼을 것이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지만 이 평정, 이 시원함을 보라! 이 평정과 이 시원함을 위해 무엇을 소유해야 할 필요가 없다. 사람은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온 우주가 사람 안에 있다. 이슬방울 안에 대양이 있고 하나의 씨앗 안에 온 세상을 뒤덮을 수 있는 푸르름이 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옳은 말이다.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지만 거대한 평정 속에 있다. 영혼의 시원함이 존재의 중심을 꿰뚫고 있다. 그 평정이 ‘지금 여기에’ 있다. 그 시원함을 그대도 체험할 수 있다. 잇사는 이 작은 하이쿠에 선의 골수를 담아내고 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이 평정!
이 시원함!
마니샤의 질문을 보자.
사랑하는 스승님!
알란 왓츠(Alan Watts)는 부활절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이렇게 제시한 적이 있습니다. “부활절 주일은 장엄하고 경건하게 성경을 화장(火葬)해야 한다. 신인성(神人性)은 지금 여기, 인간의 내면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지, 성경의 자구에 있는 게 아니다. 이것이 당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 부활과 승천의 참다운 뜻이다.”
알란 와츠의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단하다!
마니샤, 이제 사르다르 구루다얄 싱 시간이다. 불을 밝혀라! 나의 사람들이 웃고 찬미하는 것을 보고 싶다.
소련의 레닌그라드에 거주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당국으로부터 왕국회관의 건축허가를 받아서 회관을 완공했다.
헌당 예배가 거의 끝나갈 때쯤 설교에 야유를 보내는 사람, 고함을 지르는 사람, 실신하는 사람 등으로 장내가 어수선해졌다.
이런 와중에서 보토비치 할머니가 땀을 흘리면서 회관 앞쪽으로 힘겹게 걸어나가고 있다. 이 할머니는 거대한 십자고상 앞에 엎드린 다음, 고개를 들고 그리스도의 발에 오랫동안 촉촉한 키스를 한다.
KGB 요원인 몰로토프가 커튼 뒤에서 보토비치 할머니의 행동을 주도면밀하게 감시한다.
몰로토프는 할머니에게로 가서 이렇게 떠본다.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 동지의 발에도 그렇게 입맞출 수 있습니까?”
할머니가 대답한다.
“물론이에요! 우리들의 위대한 동지를 이렇게 십자가에 못박아 준다면 말이에요!”
선술집 문이 휙 열리고 치킨 쵸퍼가 불을 붙이지 않는 담배를 꼬나물고 들어온다. 치킨은 스탠드 쪽에 앉아 있는 딕 풀러 옆에 자리를 잡는다. 딕은 맥주를 마시면서 시가를 피우고 있다.
“라이터 있어요?” 치킨이 물어본다.
“꺼져!” 딕이 퉁명스럽게 내뱉는다.
“왜 그래요!” 치킨이 의아해한다. “라이터 좀 빌리자는데…….”
“그래 안다구.” 딕은 여전히 퉁명스럽다. “그러니까 꺼지라구!”
“여보세요!” 치킨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좋아요, 그런데 왜 라이터는 안 빌려주는 거죠?”
“왜냐하면, 설명을 해주지.” 딕이 대답한다. “내가 라이터를 빌려주면 자네가 술을 한잔 살 거 아냐. 그렇게 되면 나도 자네에게 술 한잔을 안 살 수 없고. 그러다 보면 우리 둘 다 취하게 될 거 아냐. 그러다가 서로 친구가 될 거고. 그 다음, 자네를 우리 집으로 초대하고. 그런 다음 귀가 시간이 너무 늦어지고. 그렇잖아?”
“그래요, 그럴 것 같기도 합니다.” 치킨이 다음 말을 기다린다.
“그렇다니까.” 딕 풀러가 딱 잘라 말한다. “그렇게 되면 자네가 하룻밤 재워 달라고 부탁할 거잖아, 안 그래?”
“예.” 치킨이 대답했다. “어쩌면…….”
“우리 딸애는 정말 예뻐.” 딕이 계속한다. “자네는 내 딸애하고 같이 자고 싶어하겠지, 안 그래?”
“물론이죠!” 치킨이 외친다.
“그런 다음.” 딕이 계속한다. “자네는 걔를 임신시킬 거고. 맞지?”
“예!” 치킨의 목소리가 한결 높아진다.
“자네는 그러면 내 딸애와 결혼하고 싶어하겠지?” 딕이 묻는다.
“예.” 치킨 쵸퍼는 들떠서 외친다. “예, 따님과 결혼할 겁니다.”
“안 돼, 자네는 걔와 결혼할 수 없어.”
“왜요?”
“왜냐하면 자네한테 라이터를 빌려주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두 명의 영국인, 찰스와 헨리는 어느 날 밤, 런던의 ‘듀크와 타트’라는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 그들은 술집 저쪽에 앉아 있는 두 명의 아일랜드인, 패디와 신이 눈에 띄자, 시비를 걸기로 한다.
“그냥 내가 하는 걸 봐, 찰스.” 헨리가 말한다. “내가 저 아일랜드 멍청이들, 약을 올리면 덤비겠지? 그러면 한바탕 붙어보는 거야.”
헨리가 패디에게 가서 아주 거만한 어조로 묻는다. “어이, 친구 양반! 성 패트릭이라고 아슈?”
“예, 물론이죠.” 패디가 맥주잔을 내려놓으면서 말한다. “직접 본 일은 없지만 알긴 알아요.”
“그러면 말이여.” 헨리가 계속한다. “그럼, 성 패트릭이 지독한 호모였다는 것을 아는감?”
“처음 듣는 말인데요.” 패디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다. “그거 아주 재미있는데요. 호모라고 하셨죠?”
“그것만이 아니야, 이 친구야.” 헨리는 패디를 어떻게든 약을 올려보려고 한다. “성 패트릭은 개새끼였다구!”
“정말요?” 패디가 놀란다. “그거 놀랄 만한 사실인데요. 많이 배우셨군요.”
이 말에 헨리는 그만 포기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온다. 그러자 찰스가 벌떡 일어나서 말한다. “나에게 맡겨! 내, 그 새끼 돌아버리게 해주지!”
찰스가 비틀비틀 패디 쪽으로 가서 말한다. “여봐, 이 쪼다야! 성 패트릭이 영국인이었다는 사실을 아냐?”
“알죠!” 패디가 대답한다. “방금 전, 아저씨 친구 분이 말해주던 걸요!”
니베다노……
(그림)
니베다노……
(그림)
침묵하라.
눈을 감고
몸이 완전히 얼어붙었다고 느껴라.
지금 이 순간이 좋다.
모든 것이 가라앉으며
주위에 단비가 내리고 있다.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이 쉬워진다.
모든 에너지와 의식을 불러모아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가라.
마치 이 순간이 삶의 마지막 순간인 것처럼
절박함을 가지고 중심으로 날아가라.
존재의 중심은 단전에 있다.
점점 빠르게……
점점 깊이……
중심에 다가감에 따라 거대한 침묵이 단비처럼 내린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라.
그러면 평화가 솟아날 것이다, 빛나는 평화가.
이 평화는 마음을 넘어선 것이다.
그래서 신비가들은 이를 ‘직관 너머의 평화’라 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라.
그러면 신성에 취하기 시작한다.
중심으로 마지막 발을 내딛으라.
그러면 그대는 순수 환희가 된다.
움직임 없는 춤, 가사 없는 노래, 소리 없는 음악이 된다.
인간의 본래 존재는 이것이다.
선에서는 이를 본래면목이라 한다.
본래면목은 영원 전에도 있었고 영원 후에도 있을 것이다.
고타마 붓다의 얼굴(불상)이 우리의 본래면목을 상징한다.
본래면목을 모르는 사람은 보디삿뜨바다.
본래면목을 아는 사람은 붓다다.
이 순간 그대는 붓다다.
붓다라 함은 ‘관조’라는 불성을 깨달은 사람을 말한다.
그대가 몸이 아님을 관조하라.
마음이 아님을 관조하라.
오직 관조자임을 관조하라.
이것이 명상의 전부요
신비 중의 신비를 여는, 하늘 위에 하늘 문들을 여는 만능열쇠다.
거기에는 오직 시작만 있을 뿐, 끝은 없다.
고타마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무명(無明)에는 시작은 없지만 끝이 있고
깨달음에는 시작은 있지만 끝이 없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다.
이 말을 깊이 새겨보라.
이 순간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그대에게 이 말이 깊이 다가온다.
이 말은 엄청난 체험으로 피어난다.
다시 한번 더 말해 보겠다.
“무명에는 시작은 없지만 끝이 있고
깨달음에는 시작은 있지만 끝이 없다.”
그대는 지금 출발 선상에 서 있다.
지금부터 무한과 영원, 궁극, 절대를 향해 나아가라.
관조를 좀 더 맑게 해보자.
니베다노……
(그림)
릴랙스……
그대는 몸도 마음도 아님을,
오직 관조자임을 계속 기억하라.
관조가 깊어지고 의식이 녹아들고 경계가 사라진다.
고타마 붓다 오디토리움이 의식의 바다가 된다.
일만 붓다가 하나의 의식 속으로 녹아든다.
물결 하나 일지 않는 바다 의식 속으로 녹아든다.
존재계 전체가 그대와 함께 기뻐한다.
존재계가 그대에게 꽃비를 뿌린다.
다른 사람들이 덧없는 세상사에 끄달리고 있지만
여기에 있는 그대는 이 순간 지상에서 가장 큰 축복을 받았다.
그대는 본질적인 것, 영원한 것을 찾아 명상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신이나 인간이 꾸며낸 것들에서 위안을 얻지만
그대는 진리를 찾기 위해 치열하게 명상하고 있다.
존재계는 존재계 자체로 이미 넉넉하다. 이것이 진리다.
존재계는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존재계 전체가 고타마 붓다의 경지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모든 존재를 필요로 한다.
저 너머 세계의 꽃과 그 향기를 모으라.
그대의 붓다가 뒤를 따라오도록 붓다를 설득하라.
붓다는 그대의 본성이요 타고난 권리이다.
이를 항상 기억하라.
이제 붓다는 그림자처럼 그대 뒤를 따라올 것이다.
이 그림자는 깨달음의 견고한 초석이다.
이 그림자는 거의 만져질 듯 주위를 감싸고 있는, 더없는 따뜻함이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붓다가 앞서간다.
그대가 그림자가 되는 것이다.
그대의 그림자는 붓다의 광채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세 번째 단계, 깨달음으로 가는 마지막 단계에서는 그대가 사라진다.
그대는 그림자였다.
가짜 인격과 가면이었다.
이제 그런 그대는 완전히 사라지고 붓다만이 남는다.
이때 남아 있는 의식이 그대의 본래적(本來的)인 존재다.
이것이 그대의 존재론적인 진리요 삶이다.
이를 알려면 매 순간이 찬미와 축제가 되어야 한다.
‘나 자신을 찬미하노라.’
그리고 그대도 자신을 찬미할 날이 오길 바란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엑스터시 속에서 찬미하고
신성에 취하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 세계는 자멸의 길을 피할 수 있다.
더없는 축제 분위기와 웃음바다에서,
더없는 자연스러움과 자발성 속에서
누가 전쟁 따위에 신경을 쓴단 말인가?
3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보장한다!
온 세상에 퍼져 있는 나의 사람들 때문에
3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사람들이 이 땅의 유일한 희망이다.
수많은 붓다들만이 평화와 사랑과 자비와 찬미의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
죽이고 파괴하라고 생명이 주어진 게 아니다.
생명은 창조하고 기뻐하고 찬미하라고 주어진 것이다.
울고 슬퍼할 때 그대는 외롭다.
기쁨 속에 찬미할 때 전 존재계가 그대와 함께 한다.
오직 찬미 속에서 우리는 궁극과 만날 수 있다. 영원과 만날 수 있다.
오직 찬미 속에서만 윤회의 수레바퀴를 넘어갈 수 있다.
니베다노……
(그림)
돌아오라……
붓다로 돌아오라.
평화와 침묵과 축복을 가지고 돌아오라.
잠깐 동안 앉아서
방금 지나온 황금빛 길과 체험을, 뒤를 따라온 붓다를 깊이 되새겨보라.
그대 뒤에 있는 따뜻함과 광채와 빛을 느껴보라.
곧 새날이 밝아올 것이다.
곧 새봄이 찾아올 것이다.
그때에는 붓다가 주인이 되고 그대는 그림자가 될 것이다.
일단 붓다가 주인이 되면 마지막 단계는 그리 어렵지 않다.
붓다, 즉 깨어난 자의 빛과 광명 아래 그림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저절로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그곳에서 그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존재계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대는 내가 말하는 찬미의 축제를 벌일 것이다.
노래와 춤과 삶, 그리고 사랑과 자비가 풍요롭게 넘쳐흐르지 않는
삶은 헛된 삶이다.
그런 삶은 서서히 죽어가는 삶이다.
그러니 전체적으로, 치열하게 살라.
전체적으로, 치열하게 사는 자에게만 삶의 변형은 가능하다.
그런 사람들만이 궁극적인 삶의 비밀을 본다.
오케이, 마니샤?
예, 사랑하는 스승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