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잠(養蠶)이야기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 잠사학과(蠶絲學科)가 있었다.
누에고치에서 뽑은 실이 ‘잠사’이며 이 분야를 연구하는 학과다.
1990년에 과의 명칭은 시대에 맞게 ‘천연섬유학과’로 바뀐다,
커트라인이 낮아서 서울대입학숫자에 목매던 고교에서 활용했다.
사실은 ‘잠사’가 ‘천연섬유’이니 그 말이 그 말인 셈이다.
그 당시에는 솔직담백한 학과 명칭이 여러 개 있었다.
인문대학의 도서관학과가 그랬고, 농과대학의 축산학과도 그렇다.
후에 이들 학과는 문헌정보학과, 동물생명공학과 등으로 개칭된다.
나는 뽕나무를 보면 목가적인 전원의 옛 풍경을 상상해 낼 수 있다.
‘잠실’과 ‘잠원’은 양잠을 권장하던 조선시대에 누에를 치던 곳이다.
86년도 이미숙 주연의 애로영화 [뽕]은 나도향의 소설이 원작이다.
지난주에는 농막 근처의 길가에서 달밤에 아내와 오디를 따 먹었다.
[뽕따러 가세]라는 원로가수 황금심이 부른 민요풍의 노래도 있다.
처녀가 뽕따러 가는 일은 허가받은 외출로 칠보단장하고 나서면
마을 청년들이 뒤따른다. 그래서 ‘뽕도 따고 임도 본다.’고 한다.
그 옛날 처녀 총각의 순수한 마음이 듬뿍 담겨있는 노래다.
집에서 누에치던 때가 벌써 반세기나 지났다.
그 시절엔 집주위에 뽕나무가 유난히 많았다.
뽕나무는 메마른 산을 개간해서 심기도 했고,
집주변에 도랑이나 공터로 공간이 확보되면 심었다.
사실 농촌의 집근처에 자라는 나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감나무, 대추나무, 밤나무, 은행나무, 대나무, 뽕나무 등인데,
조경용이라기보다는 얻을 것이 확실히 있는 나무들이다.
대나무는 각종 생활용품을 만들어서 얼마나 유용하게 썼던가.
뽕나무도 유실수나 대나무 못지않게 소중했다.
산촌, 농촌에서 양잠만한 부업도 없었기 때문이다.
뽕나무는 생명력이 어찌나 강한지 일단 뿌리를 내려면
아무리 자르고 베어내도 그루터기에서 다시 순이 올라온다.
중2때는 3월에 내야 할 1분기 수업료를 5월까지도 못 냈다.
그땐 다 그랬듯, 담임선생님의 납부약속을 받아내는 질문에
봄누에 쳐서 수매하면 수업료를 치르겠다고 약조한 일이 생각난다.
뽕나무만 있으면 노동력을 투입하여 손에 쥘 수 있는 목돈이었다.
비단을 생산하는 누에의 일생은 이렇다.
누에씨(알)→ 애벌레→ 누에고치→ 번데기→ 나방.
뽕나무를 계산하여 기를 수 있는 양만큼 누에알을 신청해서
받아다가 부화시키는 누에씨 깨기로부터 양잠은 시작된다.
와이셔츠 상자에 넣고 적당한 온도와 수분을 유지해주면,
부화되어 나오는, 잘 보이지도 않는 것를 개미누에라 하는데,
개미보다 작아서 쓸어 모을 부드러운 붓도 옆에 두었으며,
첫 뽕잎을 먹일 때는 줄기 맨 끝에 달린 여린 잎을 송송 썰어줬다.
‘잠을 잔다.’고 표현했고 애벌레의 탈피과정으로 5령까지 있다.
잠을 잘 때는 2, 3일간은 머리를 곧게 세우고 가끔 미동만 한다.
4령과 5령 때는 먹이활동이 왕성해서 뽕잎을 대기가 바쁘다.
크면서 자리 넓혀주기를 하는데, 이때는 누에 감촉이 물컹하다.
하얀 누에 위에 푸른 뽕잎을 수북이 얹혀놓아도
금세 먹어치우고 앙상한 줄기만 남기는 그 왕성한 식욕.
사그락사그락 뽕잎을 갉아먹는 서정적인 소리를 듣노라면
어느새 뒤란 대나무 잎에는 봄비가 촉촉이 내렸다.
비가 오면 질벅거려서 뽕잎 따기가 곤욕스럽고
행여 젖은 뽕잎 먹는 누에가 배탈 나지는 않을까
어머니는 노심초사 방구석에 광목천 깔고 널어두셨고,
누에똥을 치우며 “잘 커서 상고치 되거라.”라고 이르셨다.
5령이 되어 일주일이 지나면 더 이상 뽕을 먹지 않는다.
명주실을 가득 저장한 앞가슴이 투명해지고 몸이 짧고 굵어지며,
머리와 가슴을 들어 두리번두리번 고치 지을 장소를 찾는다.
고생이 끝나가는 어머니 얼굴에 미소가 흐르는 때이기도 하다.
이렇게 익은누에에게 고치를 지을 장소를 마련해주는 것을
누에올리기라고 하는 데, 이 일은 오르지 아버지 몫이다
볏짚을 갈퀴로 추려서 15cm크기로 잘라 새끼줄에 넣고
돌려가면서 부챗살처럼 펴주면 누에가 올라가서 고치를 튼다.
거미가 거미줄을 칠 때와 마찬가지로 섶으로 올라가서
얼키설키 고치를 지탱해줄 실을 엮고 나서 고치를 짓는다.
손가락만한 누에는 2일간 경이롭게도 1500미터를 뽑아낸다.
그 가드다란 실을 뽑아내면서 서서히 자신의 몸을 가린다.
고치는 누에가 자신을 보호하는 은신처로 만든 집이지만,
인간은 물레로 풀어내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실로 만든다.
그 우아하고 따뜻한 감촉은 ‘섬유의 여왕’답게 감촉이 부드럽다.
나이론, 폴리에스테르같은 인공섬유와 비교하면 안 되는 이유다.
자신을 가린 누에는 번데기로 변하여 몸이 점점 굳어지며,
색깔도 황색에서 짙은 갈색으로 바꾸며 다음을 준비한다.
실은 몸이 굳어지는 게 아니라 다음단계인 나방으로 태어나
알을 낳고 스스로 자신의 생을 마감하려고 단단해지는 것이다.
살펴보면 누에의 일생이 얼마나 경이롭고 위대한가.
뽕잎만을 먹고 5번 허물을 벗으며 몸무게를 10,000배나 늘려
어른 손가락만큼 커서 60시간 동안 1,500m의 실을 뽑아,
누가 볼까 고치를 짓고 성스런 나방이 되니, 모든 과정이 신비다.
누에가 우화하려고 지은 고치를 삶아서 가느다란 견사를 뽑는데,
따뜻한 물에 담가 막대기로 젓다 보면 끝이 풀려서 걸리게 된다.
실의 시작은 당연히 고치 바깥에 있고 끝은 고치의 맨 안쪽에 있다.
실이 너무 가늘어서 고치 20여 개를 묶어 하나의 실을 뽑는다.
견사(명주실)를 뽑으며 삶아지는 번데기는 우리가 군것질로 먹는 것.
일본사람들을 기겁시키려면 번데기 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란다.
번데기에 복분자, 오미자, 구기자 등을 섞어 만든 정력제도 있다.
부산물까지 다용도로 쓰면 ‘버릴게 없다’고 하는데 누에가 그렇다.
어머니께서 정성을 들이며 누에와 교감하시던 모습이 선하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 젖가슴을 내어 첫 수유를 하듯,
여린 뽕잎을 잘게 썰어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누에 위에
솔솔 뿌려주면서 “탈 없이 무럭무럭 자라라.”며 독백을 하셨다.
수분을 유지해주려고 수건에 물을 적셔서 덮어주고
쌀쌀한 날에는 아궁이에 불을 더 때서 온도를 높여주었다.
쌀가마니 축내지 않고 중학생 아들 학비를 마련하셨던 어머니다.
농촌의 봄가을이니 좀 바쁜가, 그럴 때는 우리들 손도 빌렸다.
봄에는 뽕잎을 따라면 오디를 먹을 수 있어 기분이 좋다.
붉은 오디는 새콤하고, 검게 익은 오디는 설탕보다 달다.
우리 또래 농촌친구들은 누구나 뽕나무에 올라 뽕잎을 땄고,
오디에 정신이 팔려 땅에 떨어지고는 킬킬 웃던 추억이 있다.
우리 동네에서는 누나들이 마음껏 멋을 내고 뽕잎을 딸 때
동네청년들은 모내기철에 잠시 쉬면서 기타 치며 노래를 불렀다.
그 시절 대한민국 학생들이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이 기타였단다.
세고비아기타! 포크음악 붐이 한창이던 시기였으니 오죽했으랴.
망태기에 뽕잎을 따 담기 보다는 오디를 따먹기 바빴던 우리,
집으로 돌아올 때는 손가락과 입술 주위가 검붉게 물이 들었다.
처녀총각들에게는 설레는 하루가 되기도 했던 뽕나무밭은
돈가뭄에 시달리던 농촌의 늦봄에 목돈을 쥐어주던 고마운 곳이다.
지금은 비단옷 해 입는 양잠에서 먹는 양잠으로 변신중이다.
뽕잎을 이용해서 한과, 엿, 식혜, 차 등으로 가공하고,
누에 자체를 피부미용, 의료소재 등에 두루 사용한다.
물론 오디는 어엿한 봄 과일로 잼을 만들고, 술을 담그기도 한다.
오디의 추억만으로 누에치던 그 시절이 그립겠는가.
이때까지는 농약이나 제초제 사용이 없거나 매우 적었다.
청정이 보장되어야 살 수 있는 누에와 함께 했던 어린 시절,
환경오염 걱정 없이 뭐든 씻지 않고 툴툴 털어서 먹던 시절이었다.
(201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