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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8 강원원주 조사자료 마산문화유산답사회
== 원주/단양 현황 ==
= 원주
* 위치 ; 원주시는 한반도의 중심부이자, 강원도의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반도의 백두대간에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하여 서남쪽에 자리잡아 남한강과 섬강을 경계로 경기도 여주시, 남한강과 운계천을 경계로 충청북도 충주시 등 2개의 다른 도와 접하고 있는 위치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 행정구역 ; 1읍 8면 16동 * 인구 ; 347,506명(2019.08.31.)
= 단양
* 위치 ; 단양군은 충청북도의 동북단에 위치하며, 동남쪽으로는 경상북도 영주시, 북쪽으로는 강원도 영월군, 남쪽으로는 경상북도 문경시, 서쪽으로는 제천시와 각각 경계하고 있는 3도 접경의 도 경계를 형성하고 있다
* 행정구역 ; 2읍, 6면, 151리 * 인구 ; 30,003명(2019.07.31.)
*** 단양 적성[丹陽 赤城]
사적 제265호(1979.07.26.)
* 단양의 성재산(323.7m) 정상부에 둘러 쌓은 삼국시대의 퇴뫼식 석축산성이다.
* 이칭 ; 성산성(城山城), 고성(古城), 민보성(民堡城), 농성(農城)
* 소재지;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 하방리 산 3-1
* 크기 ; 성 주위 922m * 규모 ; 8만 8648㎡
= 신라 진흥왕 때(545∼551) 축성되었다. 할석(割石) 및 자연석으로 축조되었는데, 성의 기반을 토석(土石)으로 다지고 그 위에 외벽은 자연석으로 고루 쌓았다. 남서쪽 끝의 산봉을 기점으로 하여 북동쪽으로 닫는 산등성의 외측(外側)을 돌아 축성되었고, 이 능선의 남쪽 저지(低地)는 밭으로 되어 좋은 곳은 북동쪽 끝으로, 상후(上厚) 0.6m, 내고(內高) 1.8∼3.3m, 외고(外高) 2.0∼4.3m의 성벽이 남아 있다. 성문의 유지(遺址)는 남서쪽 끝과 남쪽에서 당고개로 이어지는 능선쪽, 그리고 남동쪽의 3곳에서 확인되었다. 신라가 한강을 건너기 직전의 전진기지(前進基地)로서 전략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성이었다. (두산백과)
– 함남 황초령비 568년 북한국보 110호 – 함남 마운령비 568년 북한국보111호
- 경남 창녕비 561년 국보 제33호 - 서울 북한산비 555년 국 보 제3호
*** 단양 신라적성비[丹陽 新羅赤城碑] 551년(진흥왕12) 국보 제198호
* 소재지 ;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 하방3길 100(하방리)
* 건립시기 ; 신라시대 545(진흥왕 6)∼550년(진흥왕 11)
* 높이 ; 93cm, 윗너비 107㎝, 아랫너비 53㎝.
= 신개척지 유공자의 공훈을 새기고, 충성하는 자에게 포상을 약속한 내용의 비.
1978년 1월 단국대학교박물관 조사단에 의해 발견되었다.
원래의 발견지점에다 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각을 세워 관리하고 있지만 무절제한 탁본 등으로 말미암아 비면에 먹물이 묻는 등 훼손이 심하다.
= 비의 상단부가 파손되어 그 건립연대를 단정할 만한 연호나 간지와 같은 직접적인 근거는 없으나 내용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기존의 문헌기록과 대비하여 비의 건립연대를 545년 이전으로 보는 설, 550년으로 보는 설, 551년 이후로 보는 설 등으로 크게 엇갈려 있는 상태이다.
= 비의 원래 모습은 알 수가 없지만 현존 비석의 높이는 93㎝, 최대너비는 107㎝로서 부정형의 모습을 하고 있고 약간 둥근 형이다. 석질은 단단한 화강암으로서 한 면을 정교하게 물갈이하여 글자를 새겼는데, 글자의 크기가 2㎝ 내외로 작고 또 얕게 팠음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비문 자체가 가진 기능이 상실되어 오랫동안 땅 속에 파묻혀 있었던 탓인지 판독이 불가능한 곳은 거의 없다. 상단에서 하단으로 금이 간 7행의 일부에 보이는 1-2자만을 둘러싸고 이견이 제기되어 있을 정도로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비문은 순수한 한문이 아니라 이두문과 신라식 한문이 혼용된 문체로 작성되었다. 서체는 중국 남북조시대의 해서(楷書)를 기본으로 하지만 예서(隸書)의 기운이 강하게 남아 있다.
= 전체 22행으로 구성되었으며, 비편(碑片)의 발견에 의하여 원래 매행 20자씩의 정연한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20·21·22행은 다른 행에 비해 약간 글자 수가 적었던 듯한데, 원래의 글자 수는 428자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 있는 글자 수는 284자이지만 주변의 발굴을 통하여 수습된 비편에서 확인된 21자를 합하면 305자에 달한다.
= 비문은 크게 세 문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문의 서론에 해당하는 첫째 문단은 국왕(眞興王)이 대중등(大衆等)이란 직명을 가진 탁부(喙部) 출신의 이사부지(伊史夫智)를 비롯한 9인의 고관들에게 결정된 사항을 집행하도록 교(敎)를 내린 부분이다. 교의 내용은 비문에 보이는 전체 내용을 가리키는 듯한데 이 고관들은 고구려의 적성지방을 공략하는데 직접 참여한 군사지휘관들로, 여기에는 김유신의 조부(祖父)로서 문헌상에서도 확인되는 무력(武力)을 비롯한 인물이 보여 주목된다.
= 둘째 문단은 사실상의 본문으로 적성지방 출신의 야이차(也이次)란 인물이 행한 어떤 공로를 기려 그의 처 등 가족들 및 그와 일정한 관계에 있는 인물들을 포상하는 내용이다. 포상의 대상은 몇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구체적인 포상의 내용이 각기 다르다. 이는 그들이 주인공인 야이차와의 관계에서 뿐 만 아니라 수행한 역할에서도 어느 정도 차이가 났기 때문일 것이다. 이 문단의 제일 후반부 문장에는 이후에 다시 야이차가 하였던 행위와 같은 일이 발생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포상을 하겠다는 중앙정부의 결정사항이 명시되어 있다. 이 둘째 문단에는 적성전사법(赤城佃舍法), 국법(國法) 등의 용어가 보이는데, 이는 법흥왕대 반포된 율령과 관련하여 크게 주목되는 사항이다.
= 셋째 문단은 비문의 마무리 부분으로 결정된 사실을 현장에서 관련자들에게 전달하고 실제로 집행한 사람과 비를 쓰고 세운 인명을 열거하였는데 왕경인과 지방민의 두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다.
= 전체적으로 보아 이 비를 세운 목적은 신라가 고구려의 영역이었던 적성지역으로 진출하는 데 어떤 공로를 세운 중심인물인 야이차를 포상하여 그 내용을 포고(布告)하려는 데에 있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를 통하여 그러한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신라가 새로운 복속민들을 적극 회유하려는 정책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아마도 이처럼 새로운 복속민에 대해 취하였던 시책은 신라가 영역을 확장하여 가는 데 주효하고 마침내 삼국통일전쟁에 성공할 수 있게 된 중요한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 이 비는 6세기 전반의 신라사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먼저 전혀 예기치 않았던 지역에서 이 비가 발견됨으로써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로를 새롭게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법흥왕 7년(520)에 반포된 율령의 실상과 내용을 둘러싸고 진행되어 왔던 논란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는 점이다. 셋째, 복속민을 신라의 지방민으로 포섭하는 하나의 방책을 확인함으로써 지방통치의 한 측면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넷째, 외위(外位)나 경위(京位) 등 신라 관등제의 발전과정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밖에 부(部)나 인명표기방식, 지방민의 존재양상, 서체나 문체 발달 등 여러 방면에 걸친 핵심적인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고고학사전, 2001. 12.)
= 1978년 1월 6일 하방리 뒷산인 성재산 적성(赤城) 내에서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견, 조사되었다.
출토상태는 표면이 위를 향하고 뿌리가 북쪽을 향해 비스듬히 누워 있어 깊게는 30㎝ 정도가 묻혀 있었다. 비문은 화강암 자연석의 곱고 판판한 면에 새겼는데, 얕게 음각했으나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어 비면이 깨끗하고 자획(字劃)이 생생하다.
비의 형태는 위가 넓고 두꺼우며 밑으로 내려오면서 좁아들고 얇아져 22㎝, 14㎝, 5㎝의 두께이다. 개석(蓋石: 뚜껑돌)과 대좌석(臺座石)이 없이 발견되었으나, 비의 모양을 보아 뚜껑돌은 본래부터 없었던 것 같고, 밑부분이 좁은 것을 보면 꼽는 형식의 대석(臺石)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현재 비의 윗부분이 절단, 파손되었으나 좌·우 양쪽 측면은 거의 완형이고, 특히 비 표면은 양쪽이 완전해 22행의 비문이 분명하다.
각 행의 명문은 20자씩으로 짐작되어 19행까지는 20자씩 모두 380자이고, 20행과 21행은 19자씩으로 38자이며, 끝 행은 12자로 전체의 명문은 도합 430자로 추산된다.
지금 남아 있는 글자는 284자로서 판독이 가능하다. 글자는 자경 1.5㎝, 2㎝, 3㎝ 크기로 각 행의 명문은 가로와 세로의 줄을 잘 맞추고 있는데, 예서풍(隷書風)의 해서(楷書)로서 서예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결국, 결락된 글자는 146자인데, 파손된 윗부분을 보면 첫머리인 제1행부터 제4행까지와 제8행부터 제10행까지, 그리고 제13행부터 제16행까지가 큰 덩어리로 파손된 것 같고, 다른 부분은 얇게 격지로 깨지면서 조각이 난 것으로 짐작된다.
큼직한 덩어리로 떨어져나간 것 같이 보이는 부분은 돌 색깔이 검게 죽어 있고, 바위이끼의 흔적까지 있어 파손된 시기는 상당히 오래 전인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발견 당시 노출되어 있던 석비의 첫머리 부분은 비바람에 씻기고 등산객들의 발길에 시달려 마손된 부분도 있다. 그 뒤 3, 4개월에 걸쳐 석비 주변 일대를 발굴해 동서 12m, 남북 9m 범위의 장방형 발굴구역 내에서 옛 건물터 및 비편, 기와·토기조각·금속제 유품 등 많은 유적과 유물을 수습, 조사하였다.
석렬(石列)로써 추측해본 건물자리는 남면 길이 7.5m, 서쪽면 길이 7m인데, 비는 서쪽면 석렬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서편으로 또 다른 석렬 자리가 있어, 이들 석렬 사이에 3m 너비의 툇간이 있었고, 이 곳에 석비를 보존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건물자리는 작은 냇돌[川石]을 평평하게 거의 전면에 깔아 다졌는데, 이 부분에서 약간의 삼국시대의 기와·토기조각들이 발견되었다. 이곳의 건물은 주변의 지세, 대지의 위치, 적성산성과의 관계 등으로 보아, 적성을 축성하고 건립한 건축물로서 당시의 지휘본부와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수습된 유물을 비편부터 살펴보면, ‘성재(城在)·아간(阿干)’, ‘주(主)·제차(第次)’, ‘사(舍)·추문(추文)’, ‘십(十)·육가(六家)’, ‘전사(佃舍)’, ‘본(本)’, ‘도(道)’, ‘선(선)’, ‘적(赤)’, ‘성(城)’, ‘물(勿)’ 등이 새겨진 11조각에서 21자를 판독하였다. 11조각 중에서 ‘성재·아간’, ‘주·제차’, ‘사·추문’, ‘십·육가’ 등 4조각은 2행씩이고, 나머지 7조각은 1행 혹은 1자씩이다.
이 밖에 글자를 알 수 없는 비편 6조각, 글자가 없는 비편 23조각이 발견되었다. 23조각 가운데는 둥근 부분이 9조각이나 있어 석비의 윗부분이 둥근 형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발굴된 21자를 더해 이제까지 판명된 비문은 총 305자가 된다.
기왓장은 불에 맞아서인지 붉은색 평와편[赤色平瓦片]이 많고, 얇고 단단한 회청색(灰靑色)의 전형적인 삼국시대 평기와도 드물게 보이며, 평행선이나 사선이 그려진 기와도 있었다.
토기는 삼국시대 신라의 붉은색 연질토기편[赤色軟質土器片]과 고배편(高杯片)을 비롯해 그릇의 입구 둘레편과 손잡이 등의 토기조각들이 통일신라시대까지의 유물로 출토되었다. 금속류의 유물로는 철지은피교구(鐵地銀被鉸具) 1점, 철로 만든 칼·화살촉·둥근장식편·못 등이 출토되었는데, 모두 녹이 슬고 삭아서 형태를 분간하기 어렵다.
비문의 자체(字體)는 중국 남북조 초기의 것과 일치하며, 굴곡을 지닌 율동적인 글씨로 예서에서 해서로 옮겨가는 과정이 나타난 운필법(運筆法)이다. 얕게 새겼음에도 붓을 움직인 선율의 감각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다.
글씨의 특징은 약간 옆으로 퍼져 있어 진흥왕 때의 정방형체의 비문들과는 다른 취향을 보이고 있다. 중국 북조의 비가 대체로 방필(方筆)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남조의 영향을 받아 원필(圓筆)을 사용하였다. 고구려의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나 『평양 고구려고성 각석(平壤 高句麗古城 刻石)』의 방필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가로와 세로의 간격을 맞추어 썼는데도 글자 크기가 일정하지 않고, 자유분방한 맛을 풍기는 것도 더욱 높은 품격을 보여주며, 서예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비문의 이체자(異體字)들은 중국 남북조 초기의 비갈들의 글자와 일치해 시대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문장체는 신라고비(新羅古碑) 중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문장이다. 향찰식(鄕札式)도 아니며 그렇다고 한문체로도 통하지 않는다. ‘절(節)’·‘중(中)’·‘야(耶)’·‘여(如)’ 등 향찰에 쓰이는 글자가 없지 않으나 관계사가 거의 없어 향찰식의 연결이 불가능하다. 또한 한문식의 어기사(語氣詞)인 ‘야(也)’, ‘야(耶)’ 등이 있으나 한문식으로도 문맥이 통하지 않는다.
제6행의 “절교(節敎)…” 이하에서 제17행까지 모두 11행이 문장에 해당되는데, 이 문장 가운데 ‘사문(師文)’·‘파진루(巴珍婁)’·‘도지(刀只)’·‘마례혜(馬禮兮)’·‘도두지(道豆只)’·‘열리파(悅利巴)’·‘도라혜(刀羅兮)’ 등 6인의 사람이름을 제외하면 모두가 연속되는 문장으로서 삼국시대 신라비로는 가장 긴 글이다.
문장 첫머리에 왕교(王敎)를 받은 10명의 중앙고관의 이름이 나오고 있어 주목된다. 이들은 이간(伊干) 이하 급간(及干) 이상의 고관이고, 모두 탁부(喙部)·사탁부(沙喙部)의 출신부를 가진 점으로 보아 왕경인(王京人)임을 알 수 있다.
인명 밑에 ‘지(智)’의 경칭이 있는 것은 진흥왕순수비와 같으나, 관등 밑에도 ‘지(支)’의 경칭이 붙은 것은 다르다. 출신부명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있는데, 없는 경우는 앞사람의 부명과 같기 때문에 생략된 것이며, 황초령비(黃草嶺碑)나 마운령비(摩雲嶺碑)에서도 볼 수 있다.
10명은 이사부(伊史夫: 伊干)·두미(豆彌: 彼珍干)·서부질(西夫叱: 大阿干)·거칠부(居柒夫: 大阿干)·내례부(內禮夫: 大阿干)·고두림(高頭林: 미상)·비차부(比次夫: 阿干)·무력(武力: 阿干)·도설(導設: 及干)·조흑부(助黑夫: 及干) 등이다. ‘이사부’는 『삼국사기』의 이사부, ‘내례부’는 『삼국사기』의 노리부(弩里夫), ‘비차부’는 『삼국사기』의 비차부(比次夫), ‘무력’은 『삼국사기』의 무력(武力), 즉 김유신(金庾信)의 할아버지이었다.
특히 이사부는 지증왕대부터 진흥왕대에 걸쳐 북방개척의 주역을 담당하고, 진흥왕 후반기에는 거칠부에게 임무를 넘겨준 최고사령관이었다.
비차부는 551년(진흥왕 12) 거칠부를 따라 고구려의 10군을 탈취할 때 출정한 장군이었다. 무력은 553년 백제의 동북지방을 빼앗아 설치된 신주(新州)의 군주(軍主)가 된 장군이었다. 이러한 사실로 보면 ‘이사부’ 이하 8명은 북방개척의 군사령부의 수뇌들인 것이 확실하다.
뒤에 명기된 두 사람의 당주(幢主) 역시 북방 경략의 직접적인 담당자였음은 분명하다. 당주는 주(州)에 설치된 군주보다 하위단위의 군사 책임자로 촌이나 성에 설치되었음은 여기에 나오는 추문촌당주(鄒文村幢主)’·‘물사벌성당주(勿思伐城幢主)’에서 알 수 있다. 이들 추문촌당주와 물사벌성당주가 당시 적성 지방의 공략에 참가한 사람인지, 적성 점령 후 그 지방에 설치한 당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비문의 ‘추문촌파진루하간지(鄒文村巴珍婁下干支)’에서 적성 부근의 당주로 추측할 수도 있겠으나, 비문의 해독에 따라 오히려 적성 지방 공략에 참가한 전진기지의 당주일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진흥왕의 왕교를 받은 이사부 이하의 왕경인 고관들은 북방 경략의 중심인물로 적성 지방의 공략과 관련있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앞의 8인은 군사령부의 수뇌들이고, 2명의 당주는 현지 군지휘관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당주와 관련해 물사벌성은 525년(법흥왕 12) 상주(尙州)에 군주를 설치한 사벌주(沙伐州)와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비문 첫줄에 보이는 대중등(大衆等)은 대등(大等)과 어떻게 구별되는지는 연구과제 중의 하나이다.
비문의 대체적인 내용은 진흥왕이 이사부 등 10명의 고관에게 하교해, 신라의 척경사업(拓境事業)을 돕고 목숨까지 바쳐 충성을 다한 적성인 야이차(也爾次)의 공훈을 표창하고, 장차 야이차와 같이 충성을 바치는 사람에게는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국가정책의 포고인 것 같다.
이것은 다른 진흥왕순수관경비(眞興王巡狩管境碑)에서 새로 개척한 지방의 민심을 살피고 노고를 위로하며, ‘충신정성(忠信精誠)’ 있는 자와 나라를 위해 용맹하게 싸워 공훈을 세운 사람에게는 상작(賞爵)을 내리겠다고 약속한 취지와 같다. 이렇게 보면, 적성비는 순수비의 선구적 형태로 척경비의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비의 건립연대는 비문 첫머리 연대 부분의 4자가 결락되어 절대연대는 알 수 없고, 다만 추정연대뿐이다. 당시 적성지방을 중심한 역사적 상황과 비문에 보이는 인물들을 분석함으로써 추정하고 있다.
551년 거칠부 등 8장군이 백제와 더불어 고구려를 침공해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 이남의 10군을 탈취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지금 단양 지방이 이때 신라에 편입되었다고 보는 것은 속단이다. 이보다 앞서 신라의 북방 경략은 진행되고 있었고, 적성의 신라 귀속은 551년 이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동해안 지방은 일찍부터 북진을 서둘러 505년(지증왕 6) 삼척에 ‘실직주(悉直州)’를 설치, 이사부를 군주로 삼았다. 512년에도 이사부가 강릉의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가 되어 영토를 확장하였다.
또한, 내륙 지방에서도 525년 대아찬(大阿飡) 이등(伊登)으로 상주의 사벌주 군주를 삼아 일찍부터 관산(管山: 지금의 옥천)·서원(西原: 지금의 청주)·모산(母山: 지금의 진천) 지방으로 진출하였다. 550년 백제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 지금의 천안)·금현성(金峴城: 지금의 전의)를 공취했고, 이듬해 진흥왕이 낭성(娘城: 지금의 청원)에 순행하였다. 따라서, 청주·충주와 연접한 단양 지방이 551년까지 고구려의 세력권에 있었다고 볼 수 없고, 늦어도 550년에는 신라에 귀속된 것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한편, 인물들을 분석해볼 때 10명 가운데 다른 사료(史料)에도 보이는 사람이 이사부·비차부·무력 등이다. 이간 이사부는 지증왕 때 실직주와 하슬라주의 군주가 되고, 541년 병부령(兵部令)에 임명되어 신라의 경략사업에 주역을 맡았던 이사부임이 분명하다. 이렇듯 진흥왕대의 원로재상인 이사부의 등장은 이 석비가 진흥왕 때 세워졌음을 증명한다.
또, 무력은 김무력(金武力)으로서 김유신의 할아버지이다. 비문에는 관등이 보이지 않지만 ‘아간 비차부’ 다음에 나열되어 아간(阿干) 이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무력은 553년 대아간(大阿干)으로서 한강 하류에 신설된 신주(新州)의 군주가 되었고, 561년 건립한 창녕척경비에는 잡찬(迊飡)이었다. 따라서 무력이 아간 이하의 관등을 가졌던 적성비는 553년 이전에 세워졌음이 분명한 것이다.
한편, 아간 비차부는 『삼국사기』거칠부전의 551년 고구려를 치기 위해 파견된 ‘대아간 비차부’와 동일인이다. 이것은 석비가 비차부가 아간에서 대아간으로 승진하기 이전, 즉 551년 이전에 건립되었음을 입증한다. 따라서 적성비 건립의 하한 연대는 550년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건립의 상한 연대는 제3행 첫머리의 ‘支□□夫’에서 ‘□□夫’가 되는 당시의 중앙고관을 추정하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인물의 관등은 대아간이었다. 그렇다면 진흥왕대 초반에 ‘이사부 이간’을 중심으로 북방경략과 국력을 확장할 때 대아간으로서 국가정책을 수행할 수 있었던 사람으로 거칠부를 들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거칠부전에 의하면, 진흥왕은 545년 7월 이사부의 말에 따라 대아찬 거칠부 등에게 『국사(國史)』를 편찬하도록 했으며, 그 공으로 그에게 파진찬(波珍飡)의 벼슬을 주었다.
그는 『국사』를 편찬, 완성시에는 대아간이었고, 완성 후에는 파진찬이 되었던 것인데, 그렇다면 적성비 건립의 상한은 늦어도 545년 거칠부가 대아간의 자리에 있을 때이어야 할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 온달전(溫達傳)에 의하면, 고구려 양원왕(陽原王, 陽岡王)이 즉위함에 온달이 출정해 신라군과 아단성(阿旦城) 밑에서 싸우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양원왕(양강왕) 즉위’를 즉위년으로 본다면 545년, 곧 진흥왕 6년에 해당한다.
당시 온달이 회복할 것을 맹세한 계립현(雞立峴)과 죽령은 이미 신라의 점령지였으며, 이곳은 신라 북방 경략의 전초기지였다. 다만, ‘아단성’을 고구려의 을아단현(乙阿旦縣: 지금의 단양군 영춘면)으로 비정할 수 있다면, 온달군과 신라군의 싸움은 적성의 인접지역에서 벌어졌던 것으로, 이 시기의 적성은 신라 수중에 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상을 종합해볼 때 적성비의 건립연대를 545년에서 550년 사이로 추정함이 옳을 것이다.
고대사 연구에서 금석문(金石文)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 이러한 점에서 적성비의 역사적 가치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비문에 보이는 10명의 중앙고관과 그들의 관등 및 지방의 관등도 새로이 등장되는 관명이 있어 주목된다.
특히 신라 율령제도(律令制度)의 발달을 이해하는 데 많은 새로운 것을 알려주고 있다. 즉, 노역체제에 대한 율령, 재산분배에 대한 국법이 진흥왕대 초반에 이미 마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적성지방의 관습적인 전사법(佃舍法)을 법으로 삼아 공인한 점을 통해 법이 이룩되는 새로운 사례를 알 수 있다. 또한 ‘야이차’ 등의 공훈자에 대한 특수한 포상조처를 일반화하여 전국에 통용되는 국법으로 발전함을 알 수 있다.
한편, 신라 통치자들이 공을 세운 지방민을 조처하는 방책을 어떻게 취했는가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신라가 죽령을 넘어 고구려세력을 축출하고 첫발을 디딘 요충지에 비를 세웠다는 점에서 또한 의의가 있다.
죽령 너머 최초의 기지인 적성에 유공자의 공훈을 새기고, 충성을 다하는 자에게 포상을 약속한 척경비를 세운 것은 새 영토에 대한 신라의 국가시책의 천명인 것으로, 뒤에 세워진 순수비 정신의 최초의 표현인 것이다. 따라서, 적성비는 비록 국왕의 직접적인 순행비는 아니나 척경비의 성격을 지니고 순수관경비의 선구적 형태라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비문에 ‘적성’은 모두 세 번 보이는데, 이곳 단양은 본래 고구려의 적성현으로서 신라가 점령한 뒤에도 적성이라 불렀던 것이다. 현지에 남아 있는 석성은 고구려 이래 신라가 적성현을 경략한 뒤에도 요충으로서 다스리던 적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적성은 신라의 영역인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에서 죽령을 넘어 남한강을 건너기 전 바로 강 연안의 성재산 거의 정상부에 축성되어 있다.
지리적으로 천험한, 그리고 전략적으로도 그리 높지 않은 곳에서 사방을 정찰할 수 있는 요충이다. 그리하여 신라가 일찍이 158년(아달라이사금 5) 3월 죽령의 길을 개척하고, 진흥왕 때 이르러 강력한 북진정책에 따라 이곳 단양 지방을 완전히 점령하고 적성을 고구려 경략의 전초기지로 여기에 석성을 구축했던 것이다.
적성의 축성방법에서도 기초부분은 돌과 진흙으로 다져 든든히 하고, 외벽을 자연석으로 고루 쌓았으며, 내면은 외벽에 비해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그리고 안쪽으로 군사와 병마가 다닐 수 있게 평평하게 다졌는데, 이러한 축성은 삼국시대는 신라나 백제의 산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석비의 발견장소가 거의 원위치로 짐작되고 있는데, 적성비 자체도 중요하지만 적성 내에서 발견되었다는 점과 적성이라는 성 이름이 밝혀진 일, 그리고 천연적인 요충지역을 북방경략의 전초기지로 택한 사실 등이 주목된다.
적성에서 동북쪽을 바라보면 멀리 남한강 상류의 영춘(永春), 즉 고구려의 을아단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강줄기가 보인다. 영춘에는 바로 강가에 온달산이 솟아 있고 산의 정상부를 에워싸고 있는 석성을 온달산성이라 일컫고 있다. 온달산성이라는 이름은 고구려의 장군 온달과 얽힌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원주 용소막 성당[原州龍召幕聖堂]
* 강원도유형문화재 제106호(1986년 05월 23일)
*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용암리 719-2에 있는 소규모 벽돌구조 성당.
* 건립시기 ; 대한제국기
= 천주교원주교구장의 소유로 되어 있으며, 풍수원성당(豊水院聖堂)과 원주성당에 이어 세번째로 설립되었다. 1898년(광무 2) 풍수원성당의 전교회장(傳敎會長)으로 있던 최석완(崔碩完)이 원주본당 소속 공소로 모임을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인 E.A.J.드브레 신부가 같은 원주교구 소속인 풍수원성당의 정규하(鄭圭夏) 신부와 본당 분할 문제를 협의하였다. 협의한 끝에 1904년 용소막성당을 새로 설립하였다.
= 설립 당시 원주·평창(平昌)·영월(寧越)·제천(堤川)·단양(丹陽) 등 5개 군에 17개의 공소를 관할하고 있었다.
= 건물의 전면은 중앙에 종탑(鐘塔)이 돌출하여 있고, 직사각형 모양의 평면으로 된 벽돌구조이다. 벽체는 붉은 벽돌로 쌓아올리고 버팀벽은 회색벽돌을 사용하였다. 창의 형태는 모두 원형으로 된 아치형이며 테두리를 회색벽돌로 장식하였다. 고딕미술의 양식을 변형시킨 소규모 벽돌구조 성당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두산백과)
= 처음에 성당건물은 초가집이었는데 시잘레신부에 의해 벽돌건물로 지어지게 되었다. 한국전쟁 때 일부 파손된 것을 후에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중앙에 종탑이 튀어나와 있고 건물은 네모난 모양이며, 붉은 벽돌로 쌓았다. 건물을 받쳐주는 버팀벽은 회색벽돌을 사용하였다. 창의 모양은 모두 아치형이며, 테두리를 회색벽돌로 장식하였고, 내부 바닥은 널판지마루이며 벽은 회를 발라 마무리 하였다.
= 원주 용소막성당은 이 시대 성당건축양식의 일반적인 형태와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지붕 꼭대기의 뾰족한 탑이 매우 높은 것이 특징이다.
== 朴景利 [1926·10.28~2008.5.5.] 소설가 ==
* 본명 ; 박금이‘
1926년 10월 28일 경상남도 충무시(지금의 통영)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박금이. 1945년진주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김행도 씨와 결혼해서 이듬해 딸 김영주를 낳았다. 1950년수도여자사범대학 가정과를 졸업한 후 황해도 연안여자중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6.25 전쟁통에 남편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되었다가 죽고, 연이어 세 살 난 아들을 잃게 된다. 이후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1969년부터 한국현대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대하소설 「토지」연재를 시작하여, 1994년 8월 집필 26년 만에 「토지」전체를 탈고하였다.
1980년 지금의 박경리문학공원 자리인 원주시 단구동 742번지에 정착하여 창작활동을 계속하였다. 1992년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에서 소설창작론을 강의하였고, 1995년 같은 대학교 객원교수로 임용되었다. 1996년토지문화재단을 창립하고, 이어서 1999년토지문화관을 개관하여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토지문화관은 문학인들에게 창작공간을 제공하고, 다양한 학술 문화 행사를 기획, 개최해 왔다. 2008년 5월 5일 폐암으로 타계하여 고향인 통영시에 안장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박경리 문학공원
*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단구동 1620-5
= 원주는 1980년부터 박경리가 정착하여 《토지》 4, 5부를 집필한 박경리의 삶과 문학 혼이 깃든 고향이다.
박경리문학공원은 2008년 8월 15일부터 토지문학공원에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토지》 속의 주요 배경을 테마 공원으로 조성해 작가의 문학 세계를 탐방할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공원 내에는 단구동 옛집과 작가가 직접 가꾸었던 텃밭이 있으며 전시관으로 이용되는 2층 건물의 관리사무소 앞에는 경남 하동의 평사리 들녘을 연상할 수 있는 평사리 마당을 조성하였고, 옛집 위쪽으로는 홍이동산, 그 아래로 멀리 간도 용정의 벌판을 연상하게 하는 용두레벌을 조성하여 답사객들이 작품과 작가의 문학 세계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 토지문화관
1999년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에 개관하였다. 삶과 환경의 바탕이 되는 문화와 사상의 새로운 이념정립을 통해 우리 삶의 질을 고양하고 한국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설립되었으며 전도유망한 학자, 예술가의 창작과 저술을 위하여 창작실(귀례관)을 마련하여 지속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토지문화관 바로 옆에 있는 사택은 소설가 박경리가 1998년부터 2008년 5월 타계할 때까지 거주하였던 2층집이 있어 작가의 소탈하고 인간적인 면도 함께 볼 수 있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2010. 1. 15.)
*** 원주 강원감영지[ 原州江原監營址 ]
* 사적 제439호 (2002년 3월 9일)
* 조선시대 강원도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관청이 있던 자리.
*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일산동 54-1에 있으며, 에 ‘사
* 크기 ; 면적 9,608㎡
= 강원감영지(江原監營址)는 전체면적이 9,608.6㎡로, 당시의 건물인 선화당(宣化堂)·포정루(布政樓)·청운당 등이 원래 위치에 남아 있다. 또 중삼문지, 내삼문지, 담장지 등 관련유구가 보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강원감영 이전의 원주목 관아 건물지 등이 하층에 그대로 잘 남아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관아 건물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강원감영 청사로 사용된 선화당은 정면 7칸과 측면 4칸의 단층이며, 팔작지붕이다. 선화당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원주목사 이후산(李後山, 1597~1675)이 1667년(현종 8)에 완공하였다고 전해진다.
= 내부는 네 방향에 내진주(內陳柱)를 세워 모두 툇간으로 달았으며,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선화당의 정문인 포정루는 2층 누각으로서 정면 3칸과 측면 2칸의 초익공집으로 팔작지붕에 겹처마이다. 1667년 선화당이 건립에는 온돌방과 창고가 함께 있는 민도리 계통의 ‘ㄱ’ 자형 목조 기와집인 청운당이 될 때 함께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가운데 6·25전쟁 때 파손되어 다시 보수하였다. 문루(門樓)는 직사각형 초석(礎石) 위에 민흘림기둥이며 2층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고 주위에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돌렸으며 궁창부는 별다른 장식이 없다. 선화당 옆있다. 청운당은 후대에 옮겨지어진 건물이다.
= 역사 = 강원감영은 강원도 내 26개 부·목·군·현을 관할하던 지방행정의 중심지였다. 1395년(태조 4)에 설치되어 1895년(고종 32)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실시됨에 따라 감영이 폐지될 때까지 500년 동안 강원도의 정청(政廳) 업무를 수행한 곳이다. 태조 4년에 행정구역이 개편됨에 따라 영동의 강릉도(江陵道)와 영서의 교주도(交州道)가 강원도로 합쳐지면서 원주에 감영을 설치하게 되었다. 강원감영이 원주에 설치된 이유는 각 도의 감영은 도내(道內)의 계수관(界首官) 가운데 가장 큰 고을에 설치하되 한양(漢陽)으로부터 도계(到界) 지점이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는 지리적 여건에 따라서이다. 그리고 이 지역이 강원도 계수관 가운데 가장 큰 지역이며, 지리적으로 한성부에서 가장 가까운 도계 지점이고, 도내를 순력하면서 임무를 수행하기 편리하다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 강원감영의 건물들은 1750년대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관찰영(觀察營)’ 항목에 건물의 동수(棟數)와 칸수[間數]가 기록되어 있다. 4대문을 각각 하나의 건물로 볼 때, 선화당을 비롯하여 객사(客舍), 포정루 등 총 31동 509칸이었다. 1830년대에 편찬된 『관동지(關東誌)』 ‘강원감영 영지(江原監營 營誌)’의 기록을 통해서 보면 총 33동 450칸으로 관풍각의 칸수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1875년에 강원감영의 건물은 43동 459칸으로 비교적 정확하게 규모를 알 수 있고, ‘1893년 중기(重記)’의 기록 등을 감안하면 19세기 말 강원감영에 있던 건물은 적어도 50동 670칸 규모인 것으로 보인다.
= 강원감영은 이후 1895년에 조선 8도제가 23부제로 개편되면서 원주가 충주부에 소속됨으로써 감영의 기능은 상실되었다. 1896년 이후에는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의 본부로 사용되다가 일제강점기 때 원주헌병수비대가 사용한 이후 6·25전쟁을 겪으면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고, 지금까지 도심 속에 선화당·포정루·청운당의 일부 건물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1995년에 강원 정도 600주년을 맞아 도심 속 역사문화사적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한 발굴조사가 시작되고 2000년부터 선화당, 포정루, 중삼문, 내삼문, 행각(行閣) 등 시설을 정비·복원하여 2005년 8월 31일부터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 내용 = 원주 시내의 도심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강원감영지는 선화당·포정루·중삼문·내삼문·내아·행각 등 건물과 공방고·책방이 있던 터가 정리되어 있고, 선정비군에 여러 개의 비석이 서 있다. 그리고 선화당 뒤쪽의 책방지 옆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나무는 강원감영보다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수령 600여년의 고목이다.
= 선화당은 강원감영의 본관 건물로, 강원도관찰사가 직무를 보던 곳이다. 선화당(宣化堂)이라는 편액은 임금의 덕을 선양하고 백성을 교화하는 건물이라는 뜻이다. 관찰사는 이곳에서 행정, 농정, 조세, 재판 등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현재 강원감영제의 유교식 제례인 ‘관찰사고유제’가 이곳 선화당에서 행해진다. 조선시대에도 관찰사가 부임하면 치악산동악단에서 동악제를 지낸 다음 선화당에서 고유제를 지냈다고 한다.
= 강원감영의 정문인 포정루는 ‘포정(布政)’은 어진 정사를 베푼다는 의미이다. 포정루는 그동안 ‘선위루(宣威樓)’, ‘강원감영문루(江原監營門樓)’ 등의 편액을 달았다가 1991년 문헌에 근거하여 조선시대 강원감영 정문의 명칭인 ‘포정루(布政樓)’로 편액을 바꿔 달았다. 조선시대 강원감영의 정전(正殿)인 선화당으로 들어가려면 포정문을 거쳐 중삼문을 지나 내삼문을 통과해야 했다. 현재 강원감영지에는 중삼문과 내삼문이 복원되어 있다. 이외에도 ‘청운당’이라 불리는 내아(內衙)와 행각이 있다.
= 터를 복원한 것은 공방고지(工房庫址)와 책방지이다. 공방고지는 공방에서 필요한 도구를 만들어 보관한 창고인 공방고가 있던 자리이다. 책방지 옆에 있는 느티나무는 인근 주민들이 둥치에서 뻗은 두 가지를 암수로 보고 신성시하여 제를 지내던 나무라고 한다. 강원감영지는 이밖에도 선화당을 중심으로 하여 외곽으로 둘러쳐진 담장터, 행각터 등과 선화당 뒤쪽에 있는 연못터인 방지의 호안석축 등이 비교적 잘 남아 있어 관아의 건축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계속해서 관풍각, 봉래각, 환선정, 연지 등이 복원될 예정이다.
(한국민속신앙사전: 마을신앙 편, 김진순(金鎭順), 코리아루트 2009. 11. 12.)
== 원주 강원감영[原州 江原監營]
강원감영은 조선시대인 1395년(태조 4)에 원주에 설치되었다.
감영은 조선시대에 각도의 관찰사(觀察使:監司)가 정무를 보던 청사로 원주·전주·평양의 감영을 제외하면 한곳에 계속 있지 않고 소재지의 변천과 도시화 등으로 그 본래의 형태를 찾아보기 어렵다.
= 강원감영지는 당시의 건물인 선화당(宣化堂), 포정루(布政樓), 청운당 등이 원래 위치에 남아 있고 중삼문지, 내삼문지, 담장지 등 관련유구가 보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강원감영 이전의 원주목 관아의 건물지 등이 하층에 그대로 잘 남아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관아 건물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 강원감영 청사로 사용된 선화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단층이며 팔작지붕이다. 선화당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원주목사 이후산이 1667년(현종 8)에 완공하였다고 전해진다. 내부는 네 방향에 내진주(內陳柱)를 세워 모두 툇간으로 달았으며,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 선화당의 정문인 포정루는 2층 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익공집으로 팔작지붕에 겹처마이다. 1667년 선화당이 건립될 때 같이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6·25전쟁으로 파손되어 다시 보수하였다. 문루(門樓)는 직사각형 초석(礎石) 위에 민흘림기둥이고 2층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주위에는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돌렸으며 궁창부는 별다른 장식이 없다.
= 선화당 옆에는 온돌방과 창고가 함께 있는 민도리 계통의 ‘ㄱ’자형 목조 기와집인 청운당이 있는데 후대에 옮겨지어진 건물이다. (두산백과)
*** 치악산 구룡사(龜龍寺)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 1029
건립시기 ; 668년
=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668년(문무왕 8) 의상(義湘)이 창건하였으며, 창건에 얽힌 설화가 전하고 있다. 원래 지금의 절터 일대는 깊은 소(沼)로서, 거기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다. 의상이 절을 지으려 하자, 용들은 이를 막기 위해서 뇌성벽력과 함께 비를 내려 산을 물로 채웠다. 이에 의상이 부적(符籍) 한 장을 그려 연못에 넣자 갑자기 연못 물이 말라버리고, 그 중 용 한 마리는 눈이 멀었으며, 나머지 여덟 마리는 구룡사 앞산을 여덟 조각으로 갈라놓고 도망쳤다. 의상은 절을 창건한 뒤 이러한 연유를 기념하기 위해서 절 이름을 구룡사(九龍寺)라 하였다고 전한다.
창건 이후 도선(道詵)·무학(無學)·휴정(休靜) 등의 고승들이 머물면서 영서지방 수찰(首刹)의 지위를 지켜왔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부터 사세가 기울어지자 어떤 노인이 나타나 이르기를 “절 입구의 거북바위 때문에 절의 기가 쇠약해졌으니 그 혈을 끊으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거북바위 등에 구멍을 뚫어 혈을 끊었지만 계속 사세는 쇠퇴하였으므로, 거북바위의 혈을 다시 잇는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구룡사로 불러 그대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에서는 1706년(숙종 32) 중수되었다. 근래에서는 1966년 종영(宗泳)이 보광루를 해체 복원하였으며, 1968년에는 심검당과 요사를, 1971년에는 삼성각을, 1975년에는 대웅전을 보수 단청하였다.
이 절의 당우로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보광루(普光樓)·삼성각(三聖閣)·심검당(尋劍堂)·설선당(說禪堂)·적묵당(寂默堂)·천왕문(天王門)·종루(鍾樓)·일주문(一柱門)·국사단(局司壇) 등이 있다.
이 중 동향한 대웅전은 조선 초기 개축된 건물로서, 여러 차례 중수하여 예스런 무게가 다소 감소되었으나, 내부의 닫집은 당시의 조각술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귀한 것이며, 못 하나 쓰지 않고 지은 건물이기 때문에 비록 낡았지만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보광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이층 누각이며, 이층 마루에 깔린 멍석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것이라고 전한다.
= 현재 입구에는 조선시대에 세운 황장금표(黃膓禁標)가 있는데, 이것은 치악산 일대의 송림에 대한 무단벌채를 금하는 방으로,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표지로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
** 구룡사 보광루(龜龍寺 普光樓)
*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구룡사로 500(학곡리)
* 강원도유형문화재 제145호(2004.01.17)
* 면적 ; 약 98.5㎡
= 구룡사의 누문(樓門) 역할을 하는 건물로, 사천왕문 뒤쪽의 높은 축대에 자리하고 있다. 누하(樓下)인 1층의 계단을 오르면,바로 사역(寺域)의 중심인 대웅전 앞마당에 이른다.
*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다포식(多包式) 팔작지붕건물.
=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화재로 소실되어 2004년 1월 17일 유형문화재에서 해제되었다.
*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60.5㎝, 가로 221cm.
*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70㎝, 가로 250㎝.
두광과 신광의 테두리는 다섯 가지 색으로 가늘게 돌려 마치 나무 나이테처럼 단단한 느낌이 난다. 수미단은 붉은 바탕에 흰 빗살무늬를 이었으며 맨 아래 부분에는 연꽃문양을 그렸다.
구룡사 삼장보살도는 파계사 삼장보살도(1707년)보다 성중의 종류와 수가 대폭 늘어나서 완벽한 구성을 갖추었다. 성중 상호가 원만하며 필선이 생기 있고 문양도 정교하다.
* 마산박물관 000분(06;30) 0.0 km 06;30 ⇒
단양신라적성(사적제265호)/적성비(국보제198호) 60분 / 10;20 ⇒
* 원주용소막성당33분(11;00) 46.9 km 30분 / 11;30 ⇒
= 항아리보쌈식당25분(12;00) 18.2 km 40분 / 12;40 ⇒
* 박경리문학공원 5분(12:45) 18.2 km 40분 / 13;25 ⇒
* 강원감영지 11분(13;40) 3.7 km 30분 / 14;10 ⇒
* 구룡사 34분(14;50) 20.7 km 50분 / 15;40 ⇒
* 마산박물관 220분(19;20) 317.4 km <<19;20~19;30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