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 子曰 德之不修 學之不講 聞義不能徙 不善不能改 是吾憂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덕을 닦지 못하는 것, 학문을 연구하지 못하는 것, 옳은 일을 알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 착하지 않은 것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 나의 근심이다.”라고 하셨다.
尹氏曰 德必修而後成 學必講而後明 見善能徙 改過不吝 此四者日新之要也 苟未能之 聖人猶憂 況學者乎? 윤씨가 말하길, “덕이 반드시 닦인 연후에 이루어지고, 배움이 반드시 익혀진 연후에 밝아지며, 선한 것을 보면 능히 옮겨갈 수 있어야 하고, 잘못을 고치는 것에 인색하지 않는 것, 이 네 가지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요체이니, 만약 이것을 아직 잘할 수 없다면, 성인께서도 오히려 근심하였는데, 하물며 배우는 사람에 있어서랴!” 라고 하였다.
勉齋黃氏曰 修治也 謂去其疵類而全其善也 면재황씨가 말하길, “修는 다스리는 것이다. 그 흠 같은 것을 제거하여 그 善을 온전히 한다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上蔡謝氏曰 學須是熟講 學不講 用盡工夫 只是舊時人 상채사씨가 말하길, “배운 것은 반드시 익숙하게 익혀야 한다. 배운 것이 무르익지 않았음에도, 공부를 끝마치는 것은 그저 구시대의 사람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修德是本 如有害人之心 便是仁不修 有穿窬之心 便是義不修 德是理之得於吾心者 已是我有底物事了 便日日磨礱 勿令間斷 徙義改不善 須與分別 義是事之宜 我做這事 覺未甚合宜 須徙令合宜 此却未有不善處 不善便是過 惡須速全體改之 始得有輕重之別 주자가 말하길, “덕을 닦는 것은 근본이니, 만약 남을 해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곧 仁이 닦이지 않을 것이고, 벽을 뚫고 담을 넘으려는 마음이 있다면, 곧 義가 닦이지 않을 것이다. 덕이란 이치가 내 마음에 터득된 바이니,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날마다 갈고 닦아서 중간에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義로 옮겨가는 것과 不善을 고치는 것은 모름지기 분별해야 하는 것이니, 義란 일의 마땅함이다. 내가 이 일을 할 때, 매우 합당하지 않음을 느낀다면, 반드시 옮겨가서 합당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도리어 不善한 곳은 아직 없다. 不善이란 곧바로 지나치거나 악한 것이니, 반드시 신속하게 體를 온전히 하여, 그것을 고쳐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로소 輕重의 구별이 생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須實見得是如何 德是甚麽物事 如何喚做修 如何喚做不修 人而無欲害人之心 這是德得之於吾心也 然害人之心 或有時而萌者 是不能修者也 德者道理得於吾心之謂 修者好好修治之謂 更須自體之 須把這許多說話 做自家身上說 不是爲別人說 반드시 그것이 어떤 것인지 실제로 알아야 하는데, 德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해야 修라고 부르는지, 어떻게 해야 不修라고 부르는지 알아야만 한다. 사람이면서 남을 해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것이 바로 덕을 내 마음에 터득한 것이다. 그러나 남을 해치려는 마음이 간혹 싹 틀 때가 있는 자라면, 이는 닦지 못한 자이다. 덕이라는 것은 道理가 내 마음에 터득된 것을 일컫는 말이고, 修라는 것은 잘 닦아서 잘 다스리는 것을 일컫는 말이니, 더욱 반드시 스스로 체득해야 하고, 반드시 이러한 수많은 말들을 자기 몸에 해당하는 것으로 삼아 말해야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을 위해 말하는 것은 아니다.
問德之不修 可以包下三句否 曰 若恁地 夫子但說一句便了 何用更說四句 徙義改過 略似修德裏面事 然也別是箇頭項 講學自是講學 修德自是修德 如致知格物是講學 誠意正心修身是修德 博學審問謹思明辨是講學 篤行是修德 又曰 不善自家做得淫邪非僻底事 徙義是雖無過惡 然做得未恰好 便是不合義 若聞人說如何方是恰好 便當徙而從之 聖人說這幾句 淺深輕重盡在裏面 聞義不能徙底罪小 不善不能改底罪大 但聖人不分細大都說在裏面 學者皆當著工夫 누군가 묻기를, “덕이 닦여지지 않음이란 것이 그 아래의 3구절을 모두 포함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요?”라고 하였다. 말하길, “만약 이러하였다면, 공자께서는 단지 한 구절만 말씀하시고 말았을 것이다. 어찌 또 4구절을 말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義로 옮겨가고 잘못을 고친다는 것이 약간은 덕을 닦는 것 안의 일과 비슷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이는 역시 별개의 항목인 것이다. 講學은 그저 講學이고, 修德은 저절로 修德이다. 예컨대 致知와 格物은 講學이고, 誠意와 正心, 그리고 修身은 修德이다. 博學, 審問, 謹思와 明辨은 講學이고, 篤行은 修德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길, “不善이란 스스로 행하기가 음탕하고 간사하고 그릇되고 편벽된 일이다. 義로 옮겨간다는 것은 비록 잘못이나 악이 없을지라도, 행하기를 아주 좋게 하지는 못한다면, 곧바로 義에 합치하지 않는 것이니, 만약 남이 어떻게 하면 비로소 아주 좋게 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면, 곧바로 마땅히 옮겨가서 그것을 따른다는 것이다. 성인께서 이 몇 구절을 말씀하심에 있어, 깊고 얕음과 무겁고 가벼움이 모두 그 안에 있다. 義를 듣고서 옮겨가지 못한 죄는 작고, 不善을 고치지 못한 죄는 크다. 다만 성인께서는 작고 큰 것을 구분하지 않으시고 모두 그 안에서 말씀하신 것이니, 배우는 사람은 모두 이를 공부해야 마땅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 2 | 問先知德不可不修 方知學不可不講 能講學方能徙義 能徙義方能改不善 如此看如何 曰 修德是本 修德恰似說 入則孝出則弟 謹而信汎愛衆而親仁 學不可不講恰似說 行有餘力則以學文 遷善改過 是修德中緊要事 蓋只修德而不遷善改過 亦不能得長進 누군가 묻기를, “덕은 닦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만 비로소 배운 것을 익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능히 배운 것을 익힐 수 있어야만 비로소 義로 옮겨갈 수 있는 것이며, 능히 義로 옮겨갈 수 있어야만 비로소 불선을 고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보는 것은 어떻습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修德은 근본이니, 덕을 닦는다는 것은 흡사 ‘들어가면 효도하고 나오면 공손하며, 삼가서 신뢰를 주며 널리 뭇사람을 사랑하고 어진 사람을 가까이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고, 배운 것은 익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흡사 ‘행하되 여력이 있거든 文을 배운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잘못을 고쳐서 善으로 옮겨간다’는 것은 덕을 닦는 것 중에서 긴요한 일이다. 대체로 그저 덕만 닦을 뿐 잘못을 고쳐 善으로 옮겨가지 않는다면, 또한 오래도록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德之不修 至是吾憂也 這雖是聖人以此敎人 然學不厭之意多見於此 使有一毫自以爲聖 任其自爾 則雖聖而失其聖矣 此是聖人自憂也 聖人固無是四者之憂 所以然者 亦自貶以敎人之意 덕이 닦이지 않는 것부터 ‘이는 내 근심이다.’까지는 비록 성인께서 이로써 사람들을 가르치신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배움에 싫증내지 않았다는 뜻이 여기에서 많이 드러나 보인다. 만약 터락 하나만큼이라도 스스로 성인이라고 생각하여 그 자신에게 맡겨서 멋대로 한다면, 비록 성인일지라도 그 聖을 잃고 말 것이다. 이것은 성인께서 스스로 근심하신 것이다. 성인에게는 본래 이 네 가지의 근심거리가 없었지만, 그렇게 하신 것은 역시 스스로를 낮추어서 이로써 사람들을 가르치고자 하신 뜻이다. 南軒張氏曰 夫德不修 則無以有諸躬 學不講 則無以明夫善 聞義不能徙 則何有於義 不善不能改 則安於不善而已 是豈不可憂乎 남헌장씨가 말하길, “무릇 덕이 닦이지 않는다면, 내 몸에 그것을 갖고 있을 수가 없고, 배운 것을 익히지 않는다면, 저 善을 밝힐 수가 없다. 義를 듣고서도 옮겨갈 수 없다면, 義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不善을 고칠 수 없다면, 不善에 안주하는 것일 따름이니, 이것이 어찌 근심할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勉齋黃氏曰 德以修而日新 學以講而日明 徙義則善日益 改不善 則過日損 四者修身之大要也 不此之務 可無憂乎 면재황씨가 말하길, “덕으로 닦으면 날로 새로워지고, 배운 것으로 익히면 날로 밝아지며, 義로 옮겨가면 善이 날로 더해지고, 不善을 고치면, 잘못이 날로 덜어질 것이니, 이 네 가지는 修身의 큰 요체다. 이것에 힘쓰지 않는다면, 근심이 없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德必修而後新 學以講而益新 徙與改 皆是自新 故尹氏以爲日新之要 운봉호씨가 말하길, “덕이 반드시 닦인 이후에 새로워지고, 배운 것으로 익히면 더욱 새로워지며, (義로) 옮겨가고 (不善을) 고치는 것은 모두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윤씨는 날로 새로워지는 요체로 삼았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修德而繼以講學 如尊德性而道問學 是也 修德爲大本 講學爲實功 徙義改不善 修德之條目耳 講學之效驗也 修德而能講學 則行己應事 始能知其孰爲義 孰爲非義 孰爲善 孰爲不善 必徙之改之 始可以爲修德 始無負於講學矣 不然德之不修 自若也 學亦徒虛言之講耳 聖人不自聖 猶以是爲憂 此聖所以益聖 常人不知憂聖人之憂 此愚所以益愚也 신안진씨가 말하길, “덕을 닦고서 배운 것을 익힘으로써 계속하는 것은 마치 덕성을 높이고서 학문을 길 삼는다는 것과 같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修德은 大本이고, 講學은 실제적 공력이다. 義로 옮겨가고 不善을 고치는 것은 덕을 닦는 條目일 따름이고, 講學의 效驗인 것이다. 덕을 닦고서 능히 講學할 수 있다면, 곧 스스로에 행함과 일에 대응함에 있어, 비로소 어떤 것이 義이고 어떤 것이 義가 아닌지, 어떤 것이 善이고 어떤 것이 不善인지 알 수가 있어서, 반드시 義로 옮겨가고 不善을 고칠 것이니, 비로소 덕을 닦는 것이라고 여길 수 있고, 비로소 배운 것을 익힌 것에 어긋남이 없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덕이 닦이지 않더라도 태연자약할 것이고, 배움도 역시 한갓되이 헛소리나 익히고 있을 뿐일 것이다. 성인께서는 성인으로 자처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로써 근심거리를 삼으셨으니, 이것이 바로 성인께서 더욱 성스럽게 되신 까닭이다. 보통 사람은 성인의 근심거리로 근심할 줄 모르니,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가 더욱 어리석게 되는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