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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분권, 지방자치를 후퇴시키는
지방자치체제 개편안을 철회하라
정치권은 시․군․자치구를 몇 개씩 묶어 평균인구 60만에서 70만 명에 이르는 통합광역시를 만들고, 도 자치정부를 폐지하는 대신 전국을 몇 개의 권역으로 나누어 국가광역행정기관을 설치함으로써 행정효율과 국제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동안 축적된 ‘지방정부의 통합․분절에 관한 연구’는 이런 주장이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밝혀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야 국회의원들이 6월 3일 ‘지방행정체제개편특위’를 구성하고 졸속 입법하려고 하고 있다. 지방자치체제의 근간이 정치권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른바 ‘규모정치(politics of scale)'의 제물(祭物)로 희생될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1. 정치권 개편안의 문제점
정치권의 통합광역시 설치 발상은 이데올로기적 편견이다.
통합론자들과 분절론자들 사이에 뜨거운 논쟁을 벌여온 미국은 무려 8만7천 개의 지방정부를 갖고 있지만 통합적 정부구조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물론, 한때 미국 대기업 대표들로 구성된 경제발전위원회가 지방정부의 세분화로 인한 행정의 비효율을 해결하기 위해 지방정부 수를 80% 정도 감축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러나 1970년 이 주장을 철회했다. 1980년 미국행정학회는 지방정부의 적정 규모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흡수․통합과 같은 중앙집권적 행정구역개편을 비판하고 지방분권체제를 유지하고 광역행정수요에 대처하는 중층적 정부구조를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다. 이어 1987년 미국의 정부간관계자문위원회(ACIGR)는 ‘보고서 A-109’를 통해 종래 통합론을 지지하던 입장을 철회하고 소규모 지방정부들로 이루어진 분절적 정부구조를 옹호하는 입장을 천명했다. 그 결과, 현재 미국은 8만7천여 개의 복수목적 및 단일목적의 지방정부들로 이루어진 고도로 분절된 정부구조를 갖고 있다. 게다가, 이처럼 우리나라보다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잘게 분절된 기초자치구역으로 이루어진 선진국들에서도 통합론이 기초하는 규모경제 효과는 잘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공공선택론이 옹호하는 분절적 자치구조가 효율적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어왔다. 사정이 이런 데도, 이미 통합론적 관점에서 세계 최대(21만 명)로 설정된 시․군․자치구를 다시 몇 개씩 묶어 인구 60만-70만 명의 통합광역시로 만들려는 발상은 통합론자들의 이데올로기적 편견이 아닐 수 없다.
도 자치정부의 폐지는 중앙집권적 관치로의 퇴행이다.
도 자치정부를 폐지하려는 정치권은 자치계층 단층화의 성공사례로서 영국의 자치계층 감축사례를 흔히 거론한다. 그러나 이는 오해다. 과거 보수당 정부 때 영국의 자치계층 감축시도를 자치계층 단층화의 본보기로 단정하는 것은 1997년 노동당 집권 이후의 변화를 간과한 것이다. 영국은 노동당 집권 후 런던을 비롯해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에 각각 광역지방정부가 부활됨으로써 잉글랜드의 일부 도시지역을 제외하고 모두 2자치계층으로 전환되었다. 현행 2자치계층을 통합광역시 1자치계층으로 바꾸려는 사람들은 1980년대 초 기존의 3단계 자치․행정계층(2자치계층 + 1행정계층)에 우리나라 도와 비슷한 규모의 레지옹(région)이라는 제3의 광역자치계층을 신설한 프랑스 사례를 눈여겨보아야 한다. 프랑스에서 레지옹 광역자치계층이 추가된 까닭은 평균인구 61만 명의 데파르트망 지방정부로는 광역행정수요에 적절히 부응하고 전략적 지역발전을 추진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데파르트망의 평균인구 61만 명은 요즘 정치권이 구상하는 통합광역시의 평균인구규모와 비슷하다. 22개 국내 레지옹의 평균인구 266만 명 역시 우리나라 도의 평균인구 280만 명과 큰 차이가 없다.
국제적 지방자치헌장운동과 EU의 지역정책은 민주적 광역자치정부의 역할과 위상을 강화해왔다. 1985년 제정된 유럽지방자치헌장과 2007년 4월 UN-HABITAT에 의해 채택된 지방분권국제지침은 민주적 자치정부가 지방자치의 본질적 요소임을 규정하고 있다. 유럽회의(CoE)가 마련한 유럽지역민주주의헌장초안 역시 민주적 광역자치정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EU헌법안도 광역정부를 공식 자치계층으로 명시하고 있다.
선진국들이 광역 및 초광역 행정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지방 및 광역정부들 간의 협력을 도모하면서 새로운 광역정부를 설치하거나 기존 광역정부들의 통합을 모색하는 경향과는 거꾸로 도를 폐지하고 국가지방광역행정청 또는 국가지방행정기관인 도를 설치하려는 복안은 중앙집권적 관치로 회귀하려는 시대역행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제시한 개편안은 이 밖에도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
① 시ㆍ군ㆍ구 통합으로 인한 민주주의 결손
② 지식정보시대 대면 공동체의 가치 무시
③ 시․군․구 통합의 난관과 부작용
④ 불필요한 갈등과 마찰 야기
⑤ 계층 수의 증가 우려
⑥ 도 폐지로 인한 지역정체성과 건전한 지역주의의 파괴
⑦ 지방분권개혁의 지연․중단
⑧ 천문학적 개편비용 등의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2. 선진 한국의 지방자치체제 구축방안
향후 풀뿌리 주민자치를 활성화하고 지역의 국제경쟁력을 제고하며 나아가 동북아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는 선진 한국의 지방자치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노력이 필요하다.
첫째, 보충성원칙에 따른 정부간관계(IGR)의 재정립을 위한 지방분권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세방화시대의 지방주의 요구인 ‘작은 규모의 자치정부’와 지역주의 요구인 ‘큰 규모의 자치정부’를 아우르는 정부간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보충성원칙에 입각한 지방분권개혁이 필요하다.
둘째, 원칙적으로 현행 시․군․구제를 유지하면서 부분적인 자율 조정을 허용하고 읍․면․동 준(準)자치화를 통해 풀뿌리 주민자치를 활성화해야 한다. 풀뿌리 주민자치의 이상에 근접하기 위해서는 현행 시․군․구 자치구역은 너무 넓다. 그렇다고 지금 시․군 자치를 읍․면 자치로 전환하거나 읍․면․동 자치를 부활시켜 자치계층을 하나 더 늘리자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현실적으로 타당한 대안은 현행 시․군․구 자치구역의 기본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지나치게 넓은 시․군․구 자치구역의 한계를 극복하고 동네 수준의 주민자치를 활성화하기 위해 읍․면․동 행정계층을 주민자치적 성격을 강화한 이른바 준(準)자치행정계층으로 만드는 것이다.
셋째, 광역시의 도 통합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 지역의 국제경쟁력을 높이고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며 통일에 대비하기 위해 광역자치정부의 구역조정이 요구된다. 먼저, 광역시를 도에 흡수 통합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 광역시를 도에 흡수 통합시키는 것은 정치인들의 이익 때문에 만들어진 태생적 한계, 도시의 위계서열로 인한 중소도시와 농촌지역의 과소화 및 대도시의 비대화 초래, 도시의 몸집불리기 경쟁 조장, 이미 인구 100만 명에 도달한 대도시들의 광역시 승격에 대한 좌절 등 문제가 많은 현행 광역시제도를 해결하는 장점도 있다. 더불어, 오랜 세월 동일한 지역정체성을 형성해 왔던 지역에서 일부 도들 간의 자율적 통합을 고려할 수 있다.
3. 지방자치구역 및 계층구조 개편절차의 문제
향후 지방자치구역 및 계층구조 개편 논의를 추진할 때는 다음 사항을 특별히 유의해야 한다.
첫째,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연구․검토를 하고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자치구역 개편은 한번 결정되고 나면 다시 손대기 어려우므로 철저한 검증과 여론수렴을 거쳐 신중하게 추진되어야 한다. 정치권은 2010년 지방선거부터 개편된 제도를 적용하기 위해 연내 법안처리를 서두르고 있지만, 자치구역 및 계층구조 개편은 촉박한 날짜를 정해놓고 이에 맞추어 강행할 문제가 아니다. 더욱이, 많은 전문가들이 정치권 개편안에 대해 심각한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정치권이 자치체제 개편안을 서둘러 강행 처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로서의 고유한 역할을 저버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국민의 뜻을 배신하는 것이다. 지방자치체제 개편은 국가 통치구조의 기본 골격을 재편성하는 백년대계로서 대다수 국회의원들이 필요성을 인정하는 헌법개정과 함께 적어도 2년에서 3년 동안 충분한 연구와 검토를 거쳐 신중히 추진되어야 한다.
둘째, 이해당사자인 국회의원들이 지방자치체제 개편을 주도해서는 안 된다.
직접적 이해당사자들인 국회의원들이 자치체제 개편을 주도하는 것은 ‘편견의 억제(control of prejudice)’라는 절차적 정의의 원칙에 위배된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권이 지방자치체제 개편을 주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지방자치체제의 개편은 지방자치의 주인인 주민이 주도해야 하는 것이다.
셋째, 전문가들의 자문절차를 거치고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야 한다.
자치구역 및 자치계층 문제는 연구자들조차 오랜 시간 깊이 탐구하고 철저하게 검토하지 않으면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힘든 전문분야다. 따라서 마치 국회가 ‘안락사(安樂死)’ 문제를 다룰 경우에 뇌신경학자․법의학자․심리학자․윤리학자․종교인 등의 자문을 받는 것처럼, 국가 통치구조의 기본골격인 자치구역 및 계층구조에 일대 변혁을 가하는 입법을 위해 관련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울러, 전문가들의 도움은 지방자치체제 개편의 최종 결정권을 행사해야 할 주민에게도 반드시 필요하다. 대다수 전문가들이 심각하게 우려하는 정치권의 개편안을 무리하게 관철시키려는 것은 국민의 알 권리를 무시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지금부터라도 열린 토론의 장을 마련하여 찬반논의를 국민에게 소상히 알려야 한다.
넷째, 지방자치체제 개편결정에 지방자치단체와 그 전국연합체의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 지방자치체제를 개편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지방자치단체와 그 전국협의체가 입법과정에 참여하여 의견을 개진하고 이를 존중하는 입법절차가 마련되어야 한다.
다섯째, 개헌의 경우에는 국민투표, 그 밖의 경우에는 주민투표를 실시해야 한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개헌과 관련 없이 자치체제 개편안을 국민투표에 부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일견 국민의 의사를 묻는다는 점에서 타당한 방안처럼 보이지만, 자치체제의 개편과 관련해서는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 법인격을 갖는 한 지역 자치정부의 존폐문제를 다른 지역의 주민이 결정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치정부 존폐의 운명은 오직 해당 주민에 의한, 주민을 위한 결정이 되어야 한다.
여섯째, 공정한 주민투표운동과 활발한 주민투표토의를 보장해야 한다.
주민투표를 통한 자치체제의 결정이 정당성을 지니려면 공정한 주민투표운동이 보장되어야 한다. 용어의 선택 같이 사소한 일도 주민투표운동의 공정성을 크게 해칠 수 있다. 벌써 정치권의 개편안이 지칭하는 ‘통합광역시’라는 용어가 중소도시와 농촌지역 주민들로 하여금 통합광역시로 개편되면 기존의 ‘광역시’로 승격되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고 있다. 아울러, 주민투표가 심의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주민투표토의(referendum discussion)가 진작되어야 한다. 주민투표토의의 진작은 전문가집단과 시민사회단체 및 주민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는 언로(言路)의 개방이 필요하다.
2009년 6월 9일
지역균형발전과 민주적 지방자치를 위한
지 방 분 권 국 민 운 동
상임의장 안 동 규
강원본부 공동대표 김중석 외, 경남본부 상임대표 정원식
경기본부 상임대표 이재은, 광주전남본부 공동대표 류한호 외
대구경북본부 상임대표 조진형, 대전본부 상임대표 안성호
부산본부 상임대표 황한식, 충남본부 상임대표 이상선
충북본부 상임대표 조수종, 전국여성지방분권네트워크 상임대표 김귀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