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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선운산 등반 아니 어쩌면 탐방이란 말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선운산 도립공원 안에 있는 산들이 최고봉인 도솔산(444m)에서 수리봉, 개이빨산, 천상봉, 청룡산 등 300m 내외의 준봉에다가 또 다른 이유는 등선로 따라 선운산들의 아름다운 비경들이 아주 많이 펼쳐져 선운산을 마음껏 탐닉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작년 봄(2010.5월)에 선운사를 다녀간 적이 있다. 고창에는 자랑거리가 많이 있다. 미당 서정주 시인이 고창 출신이고, 동학혁명의 역사적 주도자였던 오척단신의 작은 체구 녹두장군(전봉준)과 인촌 김성수 선생을 비롯한 많은 인사들이 태어난 명사의 고장이기도 한 곳이다.
그 밖에 선사시대 고인돌 유물과 무장면 성내리에 고창읍성 그리고 보리를 심어 5월이면 지역 축제로 성공을 하고 있는 공음면 선동리에 위치한 학원농장에서 진행하는 ‘청보리밭 축제’ 등이 유명하다.
가야 불교 산악회원들과 함께 김해에서(08:00) 출발해 고창군 해리면 월성 부락에서 하차하여(11:40분) 비학산 아래 있는 희어재(11:57)까지 농로와 나뭇길 따라 올라갔다. 출발할 때 혹시 마지막 단풍이라도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기만 월성 마을에서 산길을 따라 걸었지만 계절은 이미 단풍철이 지나버렸다. 산기슭에는 낙엽만 쌓여 늦가을의 정취만 풍길 뿐이었다.
희어재라는 이름이 특이하여 자료를 찾아보니 희어재는 아산면 월성에서 선운사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무장 해리쪽에서 선운사로 가는 이 고개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을 지니고 있다.
“참당암을 지을 때 새끼를 월성 마을에 맡겼다. 절을 지으면서 새끼를 가지러 가니 그제서야 짚을 추리고 있지 않은가? 당장 써야 할 새끼를 이제야 꼴 채비를 하고 있으니 낭패다. 발을 동동 구르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으니 짚배눌 밑에서 새끼 머리를 꼬아 주면서 끌고 가라고 했다. 충분히 쓸 수 있도록 대 주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월성에서 새끼를 꼬고 참당에서 끌어당겨 썼기 때문에 고개가 닳고 닳아 희어져서 희어재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월성에서 새끼를 고아 댄 사람은 도인이었던가 보다.
희어재에서 언덕길을 올라 보니 선운산 전체의 풍광이 나타났다. 우측으로 희어계곡과 도솔천 저수지가 바라보인다. 그리고 앞쪽으로는 쥐바위와 청용산 암봉들이 보였다.
비록 해발고도는 낮지만 칠팔백 미터 준봉의 능선 못지않은 등반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선운산 일원의 산들은 제각기 특이한 암봉 형태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그 암봉들이 만들어 내는 풍광들이 일품이었고 커다란 암봉 위에 있는 기분이 마치 칠팔백 미터의 봉우리 같이 높게 생각되는 기분인 것 같았다.
쥐바위 암봉 위에 발 빠른 일행들의 모습
쥐 같이 생긴 바위 같나요? 희어재에서 십오 여분 능선 길을 오르니 쥐바위가 나타난다. 발 빠른 일행들은 바위산에 올라가 있는 모습이 보인다.
차에서 내려 산행한 한시간만에 쥐바위(12:36)에 도착하였다. 이미 앞서 온 일행들은 쥐바위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점심을 먹고 있었다.
우리도 쥐바위 아래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조금 내려와 20여분 동안 점심을 먹었다. 어느 부부가 가져온 신선한 야채인 미나리와 고추를 양념 된장에 맛있게 먹고는 막상 출발할 때 고맙다는 인사도 못한 것이 못내 미안한 마음이 든다. 또 점심을 먹으면서 막걸리 한잔과 고량주 한잔을 얻어먹은 것이 기분은 무척 좋은데 다리가 풀리는 것처럼 잠시 동안 힘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서로의 인심이고 정인 것을......
오랜 만에 산행을 하면서 많은 시간을 점심 먹는데 소요를 하였다. 물론 산행에서 가져온 도시락을 함께 모여 먹는 즐거움도 한 몫을 하겠지만 나는 산악회원들과 산행을 할 때는 사진을 찍고 하다보면 걸음이 조금 늦은 관계로 혼자 경치 좋은 곳에 앉아 빨리 먹곤 하였다. 시간 늦게 도착하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에 항상 조심을 한다.
벼랑 바위 아래 도솔사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길목 한켠에 누군가가 정성스럽게 돌탑을 쌓고 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어느 정도의 규모로 완성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러한 정성이 아무 쓸모도 없는 조각돌을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탄생시키기 위해 쏟는 정성 그것이야말로 상생의 정신이 아닐까? 점심을 먹고 출발한지가 20분 만에 청룡산에 도착하니 눈앞에 배맨 바위가 우뚝 솟아 있었다.
닻줄에 달힌 자국인가? 배맨바위
‘배맨바위’를 왜 그렇게 부르는지 연유를 몰랐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연방 닻줄을 매는 시설물 모양으로 생겨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거대한 남성의 그것 모양과도 흡사하다. 선운산 소개에서 배맨바위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해리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뻗어 있는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밋밋한 산정에 우뚝 솟아있는 신비롭고도 괴이하게 생긴 계선암이라는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높이 20여m에 둘레 100m나 되는 퇴적암 무더기로 민둥한 산등성이에 위치하여 멀리서도 쉽게 시야에 들어온다. 주변에는 희귀한 산새들이 서식하고 수풀도 없어 우람하게 거대한 모습이 신비하고 거의 외경을 느끼게까지 하는데 멀리서 보기에는 아기를 업고 있는 사람모양 같기도 하고 배를 정박하여 밧줄로 묶은 것 같게도 보인다. 이곳을 "배맨바위"라고 부르는데 그 연유는 다음과 같다. 지금은 이곳에서 십 여리 떨어진 곳에 서해와 해안선이 접하여 있으나 예년에는 이산 정상까지 바닷물이 들어와서 배를 이 바위에 매어 달았다고 하는데서 "배맨바위"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곳까지 배가 들어왔다니 지금 생각하면 거짓말 같으나 주변 산 계곡에서 가끔 조개 껍질이 발견되고 바위가 모두 퇴적암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연유를 증명해 주기도 한다. 그동안 지각의 변화가 수 억년을 통해 변화했다는 일면을 보여주는 증거의 바위이기도 하다.”
우뚝 솟은 봉우리 위로는 올라 가 볼 수도 없고 옆길로 비껴가면서 천마봉을 향해 걸었다. 나의 마음은 선운산 안부를 비상하고 있는 기분이다. 높은 고봉을 정복한 것도 아니요 삼사백 미터의 준봉 능선은 타고 다니니 에너지는 충만하여 발걸음이 너무 가볍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수십 미터의 벼랑 아래로 설치된 철 계단을 딛고 내려왔다.
낙조대가 있는 정상 암봉들의 모습은 수반 위에 놓아진 아기자기한 산수석의 한 장면과도 같이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기도 하고 암봉 사이에 석양의 해가 걸려 암봉 주변을 온통 붉게 물들인 모습을 떠올릴 때면 낙조대 주변의 경치에 탄복할 따름이다.
아름다운 절경을 뒤로 하며 데크 계단을 내려와 소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천마봉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 아름다운 자태는 흐트러지지 않고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용문굴 어떤 곳에 가면 쌍홍(쌍룡)굴 또는 굴 사이를 벗어나면 하늘이 뚫린다고 하여 통천문 등으로 부르는 우리나라에 지질학적으로 비슷한 형태의 굴들이 많이 있지만 용문굴처럼 규모가 웅장하고 광장이 넓은 곳은 그리 많지 않다. 굴 사이에 수십 명도 족히 비를 피할 수 있는 넓은 광장과 주변의 경관이 아름다웠다. 내려오는 산길에는 미처 태우지 못한 단풍잎들이 채색되어가고 있고 길섶에 어지러이 쌓여
있었다.
용문굴에서 도솔사 가는 길목
용문굴에서 도솔사 가는 500m 길이 주변의 암봉과 미처 떨구지 못한 단풍들이 새로이 채색되어 가는 아름다운 등산로였다. 많은 인파들이 오르내리고 있었지만 천마봉의 거대한 암봉에 의해 그늘이 들고 새삼스럽게 물들어가는 단풍잎과 이미 나목이 되어버린 나무들과의 조화들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경치를 얼마나 탄복을 하고 지나칠지 궁금했다.
하산 하는 시간이 거리에 비해 의외로 많이 소요되었다. 너무도 좋은 경관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도솔사 어쩌면 선운사 보다 역사가 오래되고 유서 깊은 사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선운산을 도솔산이라고도 불렀는데 선운이란 구름 속에서 참선한다는 뜻이고 도솔이란 미륵불이 있는 도솔천궁의 뜻으로 선운산이나 도솔산이나 모두 불도를 닦는 산이라는 의미로 볼 때 그 도솔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도솔암 이야말로 선운산의 진정한 고찰이 아닐까 하는 나만의 생각을 가져본다. 이 도솔암에는 보물과 중요 문화제가 많이 있다. 용문굴에서 500m 내려오면 도솔암 마애불이 서편 칠송대의 바위면 새겨져 있다. 안내판 설명에 의하면 “도솔암 마애불은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연화좌대가 갖춰져 있어,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주위에서 출토된 기와명문을 통해서 선운사가 소재한 선운산이 전에는 도솔산으로 불렸다는 점에서 도솔암 마애불로 부른다. 마애불은 높이 약 40m의 바위면에 16m의 높이로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불신 높이 12.5m, 양 무릎의 폭 8.5m 그리고 불신 밑의 좌대높이는 2.7m로서 밑에서 보면 마애불은 지상에서 약 6m 올라가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마애불에 합장을 하고 몇 걸음 내려오면 도솔암 나한전 건물이 오래된 고찰의 형태로 나타난다.
도솔암 나한전과 내부전경
나한전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올라가면 도솔천 내원궁이라는 일주문이 나타난다. 이 일주문을 지나 고담스런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내원궁이 나온다.
천인암이라는 기암절벽과 맑은 물이 흐르는 깊은 계곡 사이에 자리한 내원궁은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으로 상도솔암이라고도 부른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초기에 짓고 순조17년(1817)까지 몇 차례 보수한 것이라고 한다.
고려후기불상의 최고 걸작으로 뽑히는 이 불상은 사후 세계의 주존인 지장보살을 조각한 것이라고 한다.
내원궁 뒤쪽으로 가면 산신각이 있는데 이름 모를 조사들의 화상이 너무도 선명하게 그려져 있어 몇 장 담았다.
내원궁 이름만 들어도 은밀함이 감도는 곳이다. 천마봉에서 바라본 내원암은 천인암의 큰 바위 위에 아늑한 햇살을 받으며 안정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재확인하며 내원궁을 벗어나면서 천마봉을 바라보았다. 천마봉 높이는 약 100m 정도이지만 사진에서 보듯이 하늘을 향해 한껏 입을 벌린 채 포효하는 듯한 기묘한 형상과 오후의 햇살을 받아 그늘이 드리워져 검은 바위 형태로 나나나 장엄하고 웅장한 멋을 이 땅의 그 어떤 암봉도 선뜻 맞수로 나서기 꺼려할 장엄미를 갖고 있기에 선운산이 각별한 사랑을 받아온 연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 한다.
내원궁 입구 계단 철책에 붙어놓은 좋은 글이 있어 사진에 담아 보았다.
내가 살아가는 내면세계도 그렇고 행동하는 하나하나가 그러한 규율을 벗어나지 못함을 볼 때 어쩌면 불교문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마치 천상의 세계인 내원궁을 벗어나 지척에 있는 도솔사로 내려와 대웅전과 그 부속 건물, 누각 없는 동종의 사진을 찍고 선운사 쪽으로 내려왔다.
불과 2~3분 거리에 장사송이 의연한 자태를 뽐내고 서있었다. 장사송의 나이는 600년으로 보이며 높이는 23m, 가슴높이의 둘레는 2.95m이다. 이 고장의 옛 이름인 장사현을 본 따 장사송이라 하였고 지척에 진흥굴이 있어 진흥송이라고도 부른다. 소나무처럼 보이지만 40cm 위에 가지가 난 흔적이 있어 반송으로 분류한다.
장사송 바로 뒤쪽에 진흥굴이 있다.
천연기념물 354호인 장사송 앞에서 진흥굴은 신라 진흥왕이 왕위를 물려준 뒤 수도했다는 전설이 얽힌 굴로 길이는 10여m 남짓 되며 관광객들이 놓아둔 각종 음료수와 과실들이 놓여 있었다.
진흥굴의 안팎 모습
장사송, 진흥굴의 모습을 구경하고 선운사 쪽으로 내려왔다. 길 양쪽 앙상한 나뭇가지 아래에는 떨어진 낙엽이 쌓여 늦가을의 정취를 자아내고 낙엽사이에는 꽃무릇이 새파랗게 돋아나 겨울채비를 하고 있었다. 잎과 꽃 평생을 가도 만날 수 없다고 하여 일명 ‘상사화’라고도 부르는 석산은 한여름 칠팔월에 음지에서 꽃대가 돛아 나 꽃을 피우고 지면 푸른 잎들이 돋아나 겨울을 넘기고 봄이 되면 지상부가 사그라져 다시 여름이 되면 꽃대가 나오는 여러해살이 숙근초이다. 도솔암에서 선운사까지 길 양쪽으로 대군락을 이루고 있어 꽃이 피면 장관인 모습이 연상이 되었다.
도솔암, 참당암, 선운사 삼거리 길이다. 아니 정상적인 도솔암과 선운사 길에서 좌측으로 500m 정도 올라가면 참당암이 있다.
←도솔암 1.2km, →참당암 0.7km 삼거리 갈림길에 서 있는 표지판
도솔천은 그리 넓지도 않고 물이 맑지도 않다. 그러나 나무들과 냇가의 자연발상적인 아름다움이 어우러져 너무도 이 가을날에 낭만적이고 약 2.5km 이상을 걷는 코스지만 지루한줄 모르고 가벼운 마음으로 하산을 할 수 있었다.
짓궂은 아이들이 돌팔매로 물수제비 놀이를 하면서 커다랗게 파문을 일으키지만 수제비는 생기지 않는다.
해리면 월성부락을 출발해 희어재와 청룡산, 천마봉, 도솔암을 거쳐 4시간을 걸으면서 피로할 줄 모르게 다닐 수 있는 것은 이 자연이 우리에게 무한한 에너지를 충전시켜 주는 까닭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어느 듯 오늘의 마지막 코스인 선운사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 30분경이었다. 선운사는 호남의 내금강으로 불리는 선운산 명승지에 조계종 24교구의 본사로 검단선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며 많은 문화재와 천연기념물을 갖고 있다.
사천왕문 입구에 선운사의 역사와 사천왕문에 대한 안내판에 있었다. 인간 세상에 권선징악의 표상이다.
종교에 대한 투철한 신앙이 없는 탓인지 예법이 미흡한 탓인지 모르지만 천왕문을 들어서면서 합장하여 절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아무튼 선운사 경내는 넓고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다.
맨 먼저 대웅전과 오층 석탑, 그리고 대웅전 앞에 있는 배롱나무를 사진에 담았다.
대웅전은 신라 진흥왕 때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현존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 1613(광해군 5)에 중수한 으로 편액에 ‘大雄寶殿’이라고 새겨져 있다. 단청벽화가 매우 아름답고 빗살 여닫이문이 화려한 건물이다.
선운사 대웅보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 5층 석탑은 높이 13m의 통일신라적 양식을 띠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대웅전 좌측에 있는 영산전은 1471년 2층 전각으로 조성하였다가 1614년에 단층으로 중건하였고, 조선 후기에 다시 두 차례에 걸쳐 중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전각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하는 삼존불과 여러 신중상 등이 봉안되어 있다. 전각 내부에는 조선 후기 회화이해의 중요한 자료가 되는 24개의 불교 설화를 그린 벽화가 있었는데, 최근 전각을 보수하면서 떼어 내어 보관하고 있다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석가모니불과 노사나불을 협시로 모시고 있는 대웅전 법당내
영산전 전각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하는 삼존불과 여러 신중상 등이 봉안되어 있다
관음전
현재 선운사 관음전에 보관되고 있는 석씨원류 목판본은 1486년(성종 17)에 왕이 주관하여 간행한 불교서적으로,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석가모니 이후 서역 및 중국에서 불법이 전파된 사실을 기술한 것이다. 성종 당시에 간행한 것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없어져 버렸으며, 이후 사명대사가 일본에 갔을 때 석씨원류 1질을 가지고 돌아와서 1648년(인조 26)에 최서용, 해운법사 등이 다시 간행한 판본으로써, 상하로 나누어 그림과 내용을 새겼다. 모두 408판에 이르나 36판이 없어져 현재는 372판만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영산전 뒤쪽에서부터 푸름을 간직하며 봄이 되면 붉은 꽃으로 장관을 이루는 천연기념물 184호인 동백나무 숲을 뒤로하며 천왕문을 나섰다. 천왕문 앞 도솔천을 가로 지르는 다리 끝에 보왕 삼매론의 글귀가 새겨진 비각이 있었다.
부도와 공덕비가 있는 곳( 추사가 짓고 쓰고 한 추사 글씨 중에서도 대표작인 백파율사비도 있음)
선운사 주차장 입구에 오니 두릅나무과에 속하며 상록성 덩굴식물인 삼인리의 송악의 군락 모습이 보인다. 천연기념물 367호인 삼인리 송악은 높이 약 15m, 가슴높이의 나무둘레 70~80cm로서 선운사 입구인 내천 건너편 절벽 아래에서 기근이 나와 다른 물체에 붙어 특이하게 자생하고 있었다.
오늘 하루 선운산 도립공원 안에 있는 자연을 마음껏 즐겼다. 내손을 쳐다보니 아무 것도 담긴 게 없다. 그렇다 자연을 가져갈 수 도 없고 훼손할 수도 없다. 오늘 선운산의 자연을 가슴 속에 좋은 그림으로 그려 가져간다.
그리고 오늘 하루 가야불교산악회 회원님들 덕분에 좋은 탐방을 하였음을 감사드립니다.
2011.11.12
정 우 찬씀
첫댓글 감사합니다... 자주 참석 하셔서 굴 올리 주시면 더욱 좋겠네요~
좋은글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모르고 그냥 지나쳤는데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