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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 사이엔스 – 2019년 홍성욱
저자 홍성욱 교수는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을 연구해 석·박사가 된 뒤에 캐나다 토론토 대학 교수를 거쳐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그림으로 보는 과학의 숨은 역사」, 「인간의 얼굴을 한 과학」, 「과학, 일단 상상하자」등이 있으며, 공저로 「4차 산업혁명이라는 유령」, 「융합이란 무엇인가」,「21세기 교양, 과학기술과 사회」등이 있고, 그 외에도 여러 번역서가 있다.
과학은 우리 생활과 문화 속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과학과 인문학또한 우리 일상에서 끊임없이 교차하고 있지만, 복잡한 이론과 공식으로 매우 어렵게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은 복잡한 이론과 공식이 아닌, 문화 속에서 발견하는 ‘흥미진진한 과학의 향연’을 펼친다고 하는데, 책을 통해서 일상생활에서의 과학의 힘을 발견하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기대는 해 본다.
과학은 자연의 사실을 다루고, 인문학은 인간의 가치를 다룬다. 그래서 둘은 융합되기 어렵다고 보았으나, 이 책에서는 과학과 대중문화의 크로스(교차)를 볼 수 있는 여러 사례들을 살피고 있다. 『프랑겐슈타인』,『1984』, 『멋진 신세계』같은 소설, 「탁터 스트레인지러브」,「메트로 폴리스」, 「블레드 레너」같은 영화, 그 외 잡지와 사진, 에니메이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같은 일제강점기 소설 등 다양하다고 한다.
이는 ‘이미 문화 속에 사실(과학)과 가치(인문)가 잡탕처럼 섞여 있고, 그 얽힘을 읽어내는 작업은 두 문화의 간극을 좁힐 수 있는 교두보가 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과학과 인문학 두 문화 사이의 거리를 조금이라도 좁혔으면 좋겠다는 것이 바람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책의 중요 키워드는 ‘기술과학(과학보다 기술 발전이 과학을 이끔)’, ‘융합(접목)’, ‘유토피아(이상향)’, ‘디스토피아(유토피아의 반대)’, ‘인공지능(AI, 컴퓨터 기술)’, ‘초지능(사람 지능을 초월하는 기계)’, ‘프라이버시(개인 생활)’, ‘유전자 가위(유전자를 잘라내는 기술)’, ‘우생학(2차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 ‘사이보그(능력이 극대화 된 인간)’등인데 나로서는 알 듯 모를 듯한 것들이다.
미친과학자와 오만한 과학자, 수퍼우먼
소설 『프랑겐슈타인』은 1818년 영국의 여류작가 ‘메리 셸리’가 쓴 것으로 처음에는 익명으로 출간했다가, 1831년 개정판이 나올 때 비로소 실명을 밝히고 책 쓰게 된 과정 등을 공개했다. 소설 『프랑겐슈타인』의 원제목은 〈프랑겐슈타인 또는 근대 프로메테우스〉인데, 프로메테우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에게 지식과 불을 가져다 준 신으로, 제우스가 하지 말라는 일을 함으로써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고, ‘로마신화’에서는 그가 사람을 만든 신으로도 등장하는데, 인간에게 지식과 불, 진흙과 물로 사람을 만든 인류의 은인이기도 하다.
미국의 정치인이자 과학자인 ‘벤자민 프랭클린’은 번개를 통제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던 시절에 하늘에 얇은 쇠줄로 만든 연을 날려서 그 연줄을 통해 일어난 전기를 끌어당겨 축전지인 ‘라이덴 병’에 담는데 성공했다. 이 실험은 ‘피뢰침’으로 이어졌고,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실험을 한 프랭클린에 대해 ‘모던 프로메테우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과학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벽을 넘었다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 지금도 번개를 끌어다 자원으로 활용한다는 것은 요원한 것이고 보면 앞으로 과학은 더 발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소설 『프랑겐슈타인』은 주인공인 프랑겐슈타인 박사가 기존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영역을 넘어 기괴한 피조물을 만드는 금기에 도전함으로써 괴로움을 당한다. 이것은 프로메테우스 이미지와 흡사한 것으로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고 창조하고 그 대가로 고통을 당하지만, 이후 프랑겐슈타인 박사는 과학자의 전형적 이미지가 되었다. 과학자는 미쳤거나 괴짜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소설 속 프랑겐슈타인 박사는 인간을 닮은 피조물을 만드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엄청난 열의를 갖고 실험을 지속해 드디어 인간과 닮은 한 생명체를 만들어낸다. 신이 자신을 닮은 인간을 만들었듯이, 박사는 자신을 닮은 생명체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번식해갈 새로운 종의 아버지로서 자부심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박사는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게 어린 동생이 죽임을 당하는 실수를 마주함으로써 괴물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괴물이 먼저 자신에게 짝을 만들어주면 누구도 해치지 않고 아무도 없는 오지로 들어가 행복하게 살겠다고 제안한다.
박사는 괴물의 요청을 받아들여 짝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으나 후에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고 약속을 번복하기에 이른다. 짝을 만들어주면 괴물의 자손이 번식해 하나의 부족이 생겨날 테고 그리되면 인간 사회가 더 큰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요청을 거절하자, 화가 난 괴물은 급기야 박사의 친구와 막 결혼한 박사의 신부를 죽이고 도망간다. 박사는 괴물을 쫓아가고 결국 얼음으로 뒤덮인 북극에서 둘은 죽음을 맞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미친 과학자들은 100%가 남성인데, 왜일까? 여성 과학자들이 없어서일까? 아니다. 여성 과학자 하면 ‘마리 퀴리’즉 퀴리 부인이 떠오르고 그녀는 온화하고 정의로운 성품에 높은 학구열과 투철한 애국심으로 가정적이면서 천재적인 머리를 가진 여성으로 인식되어 프랑겐슈타인 박사와는 정반대의 이미지이다. 퀴리 부인의 실제의 이미지는 어떨까?
진화론적으로 남성은 사물에 관심을 갖는 방향으로 진화하였고, 여성은 사물보다는 인간, 특히 관계에 관심을 두는 방향으로 진화했다고 하기도 하는데, 여성도 수학자, 과학자 또는 프로그래머가 될 수 있지만 뛰어난 이들은 거의가 남성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남녀 간 차이를 사회적 여건 탓으로 보는 사람들은 수학이나 컴퓨터 공학 같은 분야에 여성 과학자에 대한 편견이 널리 퍼져 있고, 연구를 평가하는 심사위원과 학술지 편집인들이 대부분 남성들이기 때문에 여성의 연구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며 선천성은 근거가 없다고 논박한다. 지적인 능력에서 남녀는 평등하지만 여러 가지 사회적 요인이 특정 분야에서의 불평등을 유발한다는 주장이다.
의학은 크게 발전했지만, 출산은 여전히 여성의 몫이고 남성의 참여가 늘고는 있으나 육아와 가사는 여전히 여성이 담당해야 하는 몫으로 남성보다 더 많다. 과학자 같은 전문직을 꿈꾸는 여성들에게 장벽이 아닐 수 없다. 중고등학교 때 상상하던 과학자는 천재적 머리로 무엇을 창조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과학자도 머리와 몸을 가진 사람이다. 과학자라고 해서 독감에 걸리지 않는 것도 아니고, 노벨상을 수상했다고 하루가 24시간 이상 주어지는 것도 결코 아니다.
노벨상을 두 번이나 탄 퀴리 부인의 전기는 그녀가 사망한 3년 뒤에 딸 ‘에브 퀴리’에 의해 쓰여졌다. 여기에 보면 두 딸을 독립적이고 규율 있게 키우지만, 속마음은 무척 따뜻한 엄마로 묘사되었다. 남편이 사망한 뒤 두 딸을 안고 찍은 사진을 보면 그녀가 훌륭한 엄마로 보여지는 모습이다. 첫째 딸인 ‘이렌 퀴리’가 나중에 결혼한 남편(사위)도 노벨상을 수상했다는 것은 엄마가 딸들을 잘 키워 대를 이어 과학자로 만들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엄마 마리 퀴리의 전기 『퀴리부인』은 위대한 과학자, 헌신적인 아내, 꼿꼿한 어머니로만 그려졌지 사적인 욕망을 가진 존재는 아니었다. 둘째 딸 에브 퀴리가 그린 『퀴리부인』은 영혼만을 가진 존재로 육체를 가진 존재가 아니었다. 이것은 실제로 마리 퀴리가 그녀의 딸들에게 교육하고 싶었던 메시지인지 모른다. 감수성이 풍부했던 둘째 딸은 엄마를 많이 닮았던 언니 에렌 퀴리와 달리 엄마의 교육을 잘 수용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가진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해 엄마를 세상에 존재하기 힘든 이상적인 과학자로 그려낸 것이다. 『퀴리부인』의 전기를 읽고 꿈을 키우는 많은 소녀들을 응원하고 싶다.
인간과 동물은 무엇이 다르며 그 경계는 어떤 것이고 고통은 인간만이 느끼는 특성일까? 2000년이 넘는 서양의 사상사에 거대한 영향을 미친 기독교는 신이 인간과 동물을 만들 때 인간만을 신의 모습을 본떠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인간에게 다른 모든 동물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런 인식은 20세기 들어 환경위기가 인간이 동식물을 포함한 환경을 자유롭게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인했다. 즉 20세기 세계 환경위기는 인간이 다른 존재를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다는 기독교의 믿음이라는 것이다. 반론도 있기는 하지만 《성경》은 인간과 다른 동식물의 조화로운 공존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환경에 대한 인간의 착취를 고무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누가 옳고 그른가를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아니라도 사람들이 인간보다 동물을 하찮게 여긴다는 것은 동서양을 불문하고 공통적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명체를 생명체로 존재하게 하는 제1원리로 영혼을 꼽았다. 그는 식물에게는 ‘생장의 영혼’, 동물에게는 ‘예민한 영혼’인간에게는 ‘합리적 영혼’이 있다고 보았다. 앞의 둘은 인간의 영혼에 비해 열등한 것이었다. 즉 인간의 합리적 영혼은 식물과 동물의 유기체적 기능을 다 담당하고 여기에 덧붙여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이성적 이해와 의지라는 기능을 행한다는 것으로, 동물은 본능에 국한될 뿐 이해나 의지가 결여된 존재이므로 소리를 통해서 신호를 내고 듣지만 언어로 소통은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동물의 영혼과 인간의 영혼이 다르다면 동물은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기독교는 인간의 고통은 에덴동산에서 타락함으로써 받는 형벌이라고 보았다. 이에 따르면 타락하지 않았던 동물이 고통을 느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세 말 교황이던 파이어스 2세는 “동물이 우는 것에 대해 인간이 동정할 필요는 없다. 뜨거운 쇠를 해머로 쳤을 때 나는 소리, 밀을 탈곡기에 넣고 돌렸을 때 나는 소리에 동정할 필요가 없듯이”라고 한 것을 보면, 기독교의 입장은 인간만이 고통과 기쁨을 느낀다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유할 줄 모르는 동물은 그 자체가 복잡한 기계, 복잡한 자동인형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인간의 육체도 자동인형이지만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동물 기계와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동물과 동물을 닮은 복잡한 자동기계는 구별할 수 없다. 아무리 복잡한 기계를 만들어도 기계는 절대 인간이 될 수 없다. 기계가 인간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은 기계가 하지 못하는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는 유창한 언어고, 두 번째는 인간의 광범위한 행동 범위다.”라고 했다.
데카르트 이론을 근거로 후계자들은 ‘무감각하게 개를 때렸으며, 개도 고통을 느낀다며 개를 불쌍하게 바라본 사람들을 비웃었다’또 이들은 ‘동물들을 판자에 묶고 네 다리에 못을 박아서 산 채로 해부해서 당시 과학적 토론의 중요한 주제였던 피의 순환을 관찰하기도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점차 데카르트를 비판하는 학자들이 나오고 동물도 신의 피조물이므로 동물에게도 느끼고 기억하고 상상하는 능력이 있다고 봐야 한다는 주장이 일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정도의 차지에 불과한 것이지 본질에서의 차이는 아니라고 한 것이다.
20세기 초 이탈리아의 법학자 ‘사레 롬부로소’는 범죄를 통계적으로 연구하면서 남성 범죄자에 비해 여성 범죄자가 현저히 적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것은 여성이 남성보다 도덕적이어서가 아니라, 여성은 범죄를 저지를 정도의 지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느 정도 똑똑해야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데, 여성은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고 본 것이었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논리가 과학이란 이름으로 사람을 차별하는데 일조한 것은 물론이다. 당시 교과서에는 여러 인종의 얼굴을 그려놓고 어느 쪽이 문명인이고, 어느 쪽이 야만인인지 구별하도록 하는 문제가 실려 있기도 했는데, 학생들은 외모만 보고 문명과 야만을 구별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오랜 역사를 가진 인종차별주의는 이렇게 해서 낳고 이런 교육이 유럽식 인종차별주의를 강화한 것이다.
1930년대 히틀러는 가장 우수한 민족이 ‘아리안족’이라며 아리안족 두상을 가진 남녀를 뽑아서 시상하곤 했다. 그는 독일인, 즉 아리안족이 첫 번째 인류이고, 타락하지 않고 순수성을 면면히 이어온 민족이라고 믿었다. 이에 비해 유대인과 집시는 타락하고 불결한 민족이었다. 그러면서 독일 민족 내에서도 선천적 장애인, 동성애자, 공산주의자는 독일 민족을 오염시키는 존재들로 간주해 이들을 말살하기에 이르렀는데,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벌어졌던 인류 최대의 비극 대학살(홀로코스트)이 그것이다.
지금도 과학의 이름으로 우등과 열등을 나누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누가 우리를 멸시하면 발끈한다. 우리가 유전적으로 우수하고 ‘한글’이 가장 과학적이라는 말이 나오면 으쓱댄다. 사이비과학은 이런 마음을 비집고 자라난다. ‘중국인들의 천성은 원래 그래’, ‘여자가 그런 건 자연스러운 거야’, ‘유전자가 그런데 어쩌겠니?’, ‘그건 남자의 본성이야’등 천성이나 본성, 피, 유전자, 자연적… 이런 것들은 대부분 과학의 외피를 쓴 사이비과학이다.
인종의 자연적 차이, 인간성과 지능의 유전적 차이, 고정적 성별 차에 대해 회의적이던 생각들이 점차 자취를 감추고는 있지만, 과학이 만들어내는 차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새로운 차별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과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은밀히 우리의 허영심을 비집고 들어오기에 더욱 그렇다. 현대과학은 원자력의 발전이나 녹색혁명 같은 성과를 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방사능에 의한 위험과 GMO처럼 낯선 식물에 대한 두려움을 낳기도 한다. 과학적 산물이 우리를 앞으로 어떤 세상으로 이끌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미래는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도연맹이 동양의 이상향 「도화원기」를 쓰고 1000년 이상 지난 1516년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를 발표했다. 이 소설은 현실성을 가미한 것으로 ‘좋은 곳’이라는 뜻과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합쳐진 단어다. 이때부터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을 뜻하게 되었고, 인간은 현실이 어려울수록 궁극적으로 선에 대해 더욱 고민하고,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는 존재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유토피아에 대한 신화와 믿음이 존재한 것이다.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의 반대말로 끔찍한 미래에 대한 어떤 사회를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단어다. dys는‘나쁜’, ‘고된’이라는 뜻으로 19세기 들어 역사가 오래되지 않은, 산업혁명 이후 사회적 불평등이 확산되고 기계화로 인하여 인간성 상실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면서 만들어진 말이다. 『유토피아』를 통해 모어는 영국 사회의 모순을 크게 질타했다.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고, 일도 안 하는 귀족, 은행가, 금세공업자들이 잘산다는 것에 대해 그들을 ‘기생충’이라고 했다. 조세제도는 가난한 사람들의 등골을 빼먹는 제도이고, 공화국이라는 이념은 이런 불평등한 정의를 정당화하려는 음모라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착취와 권력의 독점, 불평등 같은 문제를 극복하고 어떻게 하면 이상적인 삶을 살아갈까에 대한 해답으로 두 가지를 제시했는데, 하나는 공동체 생활, 다른 하나는 화폐 없는 경제였다. 공유사회는 화폐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다면서 돈이야말로 인간의 오만을 집대성한 것이기에 돈을 없앰으로써 문제가 해결된다고, 국민들이 생계에 대한 걱정이 없이 평화롭게 일하고, 도움 되지 않으면서 호화롭게 생활하는 사람이 없는 사회, 목수와 노동자, 농민이 대접받는 사회를 유토피아 사회라고 했다. 진정한 공화국도 이런 사회에서 가능하다고 했다.
조지오웰의 소설 『1984』는 1948년에 썼으나, 거꾸로 1984년을 예측한 소설이다. 1948년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독일의 전체주의에서 벌어졌던 악행들이 세상에 밝혀지기 시작한 때였다. 소설 속의 1984년은 세계가 수백 개의 나라가 아닌 불과 세 개의 나라, 즉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이스타시아로 나뉘어 있고, 소설의 무대인 오세아니아는 아메리카와 영국을 포함한 큰 나라로 주인공 ‘윈스틴 스미스’는 오세아니아의 외부당원으로 당은 절대권력을 가지고, 당원은 특권층이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원보다 훨씬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다.
오늘날의 공산당 같은 당은 네 개의 부서로 구성되는데, ‘평화부’는 전쟁을 관장하고, ‘애정부’는 범죄를 관리하며, ‘풍요부’는 배급을, ‘진리부’는 정보를 조작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오세아니아는 항상 전쟁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비상사태를 유지하는 나라다. 주인공스미스는 진리부에 근무하고 진리부의 슬로건은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다. 정보 조작, 특히 과거를 조작하는 진리부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 중에서 당에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건들은 그 역사를 전부 바꾸는 일을 수행한다.
하나의 역사를 바꾸면 그와 연관된 또 다른 역사를 바꿔야 하기 때문에 이런 수정 작업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계속된다. 과거의 역사를 지우고 역사가 적힌 자료들을 없앤 후 새로운 책으로 대체하는 등의 일을 하는 주인공은 모순된 당의 슬로건을 강요하는 일도 담당한다. 예를 들어 2 더하기 2는 4가 아니라 5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결국은 이를 받아들이게 만드는 식이다.
주인공 스미스는 당의 위선을 깨닫게 되고 자신의 일에 환멸을 느끼며 동료와 이런 전체주의에 저항하고자 했지만, 곧 들통이 나고 만다. 함께 모의한 동료가 비밀경찰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사과정에서 줄리아라는 여성과 연애한 사실까지 발각된다. 여기서는 결혼은 허용되지만, 애정은 허용되지 않았는데, 금지된 연애한 사실이 발각되어 모진 고문과 세뇌를 받게 되고 결국 권력에 무릎을 꿇고 ‘빅 브라더’를 마음속 깊이 존경하는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은 사랑하는 여성을 다시 만나게 되지만, 두 사람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소설 『1984』는 감시의 기술로 가득 찬 전체주의 사회가 지금의 우리에게도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작품이다. 선전 광고를 전송하고 시민을 감시하기 위해 개인의 집에는 커다란 ‘텔레스크린’이 설치되고, 모든 개인은 여기에 종속되어 있다. 스크린에서 체조가 나오면 바로 따라 해야 하고, 만약 따라 하지 않으면 즉시 제대로 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스크린에서는 영상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감시카메라이기 때문이다. 이런 텔레스크린은 집뿐 아니라, 거리·공공장소에 모두 설치되어 있어 내가 어디에 가더라도 항상 당이 나의 행동을 주시한다. 어젯밤에 맥주를 마신 친구가 사상경찰일 수도 있는 세상이다.
놀라운 사실은 『1984』가 쓰진 그 시절에는 컴퓨터나 정보통신기술이 발달하기 이전인데도 정보통신기술이 고도로 발달했을 때 그것이 감시 ‘테크놀로지’로 사용될 것이라는 미래를 전망하고 있다. 저자의 통찰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영국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은 모든 것을 감시할 수 있도록 만든 원형 감옥을 ‘판옵티콘’이라 했는데, 간수가 있는 가운데 공간은 높고 어둡게, 죄수들의 공간은 360도로 낮게 하여 불을 환하게 밝혀 단 한 명의 간수가 수백 명의 죄수를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고안한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감옥의 책임을 맡겨주면 효율적인 감옥을 만들고 죄수들의 노동을 통해 수익을 내겠다고 장담했다. 이런 시스템이 효율적으로 운영되고 있고 이제는 감옥만이 아니라 학교, 공장, 병원 등 공공기관과 사설 기관에도 도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국가인권위원회’에 따르면 수도권 지역 한 사람이 하루 평균 cctv노출 횟수는 83회라 한다. 이는 몇 년 전 통계로 지금은 더 늘어났을 것이다. 영국은 하루 평균 300회 세계에서 cctv가 가장 많은 나라다. 미국은 상대적으로 cctv가 많지는 않다. 우리 모두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얼굴이나 행동이 찍힌다는 것에 불편해한다. 그렇지만 개인이 이에 대해 저항할 방법은 별로 없다. 언제 어디서 찍혔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테이터를 이용해 1년에 1조 원 이상의 수익을 올리는 회사로 ‘넷플릭스’라는 미국의 온라인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회사가 있다. 넷플릭스에 가입하고 PC나 TV를 열기만 하면 내가 볼 수 있는 영화들이 끊임없이 소개되어 나온다. 가입 후 일단 영화를 한 개만 선택하게 되면 이후로는 바로 나의 취항을 정확하게 파악해 추천해준다. 구글과 아마존 모두 이런 마케팅을 잘하는 회사다. 예를 들어 ‘괌 호텔’을 검색한 후 메일을 열어보면 괌 호텔에 대한 정보가 들어와 있다. 의료기관이나 보험회사뿐 아니라 정부도 이런 빅데이터를 수집하고 있다.
2004년 탄생해 2017년 현재 전 세계 인구 70억 명 중, 20억 명이 사용하는 세계 최대 소셜네트위크서비스인 ‘페이스북’은 20억 명을 연결해 주고 있는데 실로 엄청난 서비스다. 앞으로 전 세계의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진정한 네트위크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놀라운 기능은 또 하나의 ‘빅 브라더’라는 우려를 낳는다. 그런데 페이스북의 CEO ‘마크 저크버그’는 얼마 전 자신의 입으로 ‘프라이버시는 죽었다’고 말했다. 이 말은 페이스북에 자신의 프라이버시가 노출됨으로 그렇다는 말도, 빅 브라더로서 페이스북의 기능을 문제 삼은 것도 아니었다. 저크 버그는 프라이버시에 대해 ‘자발적 공유’라고 했다.
사람들은 페이스북이 요청하지 않아도, 자신의 온갖 사생활을 일일이 기록하고 저장한다. 몇 시에 일어났고 어디 갔는지, 누구를 만나 무엇을 먹었는지, 어떤 음식이 맛있고 예쁜지 등, 시시콜콜 다 공개한다. 아주 적극적으로 자신을 노출하려고 애를 쓴다. 어떤 사람들은 일상을 실시간 중계하기도 한다. 자기를 감추기보다 알리려고 애를 쓰는 것, 저크 버그는 이를 두고 프라이버시는 죽었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신상정보를 스스로 공개하는 이런 세상에서 프라이버시는 꼭 지켜져야만 하는 것일까? 외국에서는 SNS에 올린 글로 지원자를 평가해 떨어뜨린 경우가 10%에서 많게는 30%에 이른다고 한다. 사람을 구분하고 차별하는 일은 불법이지만 이런 차별은 실제로 우리가 잘 모르는 사이에 진행되고 있다. 개인 정보보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우리가 자발적으로 공개하는 개인 정보를 이용하여 차별적인 판단과 정책을 꾀하려는 사람들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멋진 신세계』는 20세기 과학 소설 중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꼽는다. 자동차 공장을 기계 위주 시스템으로 만든 ‘포드주의’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파시즘 등 경험을 바탕으로 프랑스 작가 ‘올더스 헉슬리’가 1932년에 발표한 책은 세계 3대 SF소설로 꼽힌다. 여기서는 그야말로 놀랍고 멋진 신세계가 펼쳐진다. 소설 속 세계는 매우 평화롭고 사람들은 매일매일 행복하다. 무엇이든 원하면 얻을 수 있고, 병으로 괴로워하지도,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자손은 인공수정을 통해 태어나기 때문에 자식 때문에 속 썩일 일도 없다. 우울하거나 힘들 때는 약으로 감정을 조절하면 된다.
『멋진 신세계』의 배경은 2540년쯤, 과학기술이 매우 발달했기 때문에 상품과 원자재가 매우 풍부하다. 자연분만이 사라지고 아이들은 인공수정 으로‘병’에서 태어난다. 모든 사람은 60살까지만 살 수 있고, 60살이 되면 안락사시킨다. 가족이 없기 때문에 슬퍼 해 줄 사람도, 자기가 죽는 것에 대해 슬픔을 느낄 이유도 없다. 60세까지 아주 행복하게 쾌락만 추구하다 생을 마감하고 후손은 인공 자궁에서 계속 만들어진다. 쾌락 중에 성적 쾌락이 중요해 어린 나이부터 섹스를 하고 성적 경쟁을 한다. 결혼이나 임신에 대한 부담이 없기 때문에 쾌락주의로 성관계를 맺는다. 로맨틱한 관계는 상상하기 어렵다. 가족을 만드는 의무감도 없다. 오히려 ‘가족’이라는 말은 외설적인 말로 인식된다.
『멋진 신세계』가 던지는 메시지는 대량생산과 기술화된 자본주의 사회가 계속 발전하다 보면 사회는 풍부한 쾌락을 제공하고 동시에 인간에게 중요한 사랑, 우정, 갈등, 행복 같을 것을 앗아갈 수 있음을 경고란 것은 아닐까? 이미 우리 사회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관념조차 없어진 사회가 아닌가? 쾌락만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말초적인 행복만 추구하는 태도는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진정한 감정에서 멀어지는 행위로 사람들은 아예 그런 관념 자체를 상실한 상태다.
『멋진 신세계』가 묘사하고 있는 사회는 풍요롭고 근심 없는 사회지만, 우리가 원하는 사회와는 거리가 먼 비인간적인 사회다. 과학기술의 진보만으로는 인간을 구원해주는 유토피아가 만들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특히 과학기술이 잘못되었을 때는 비인간화, 인간성 상실, 진정한 자아로부터 일탈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1984』와 『멋진 신세계』는 과거가 부정된다. 내가 어떤 과정을 통해 지금 이 자리에 있는지를 이해한다는 것은 미래를 기획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일임에도 과거를 알지 못하게 한다. 개인은 생각할 시간이 없는데 한쪽은 감시 때문에, 또 다른 쪽은 쾌락위주로 사랑과 자아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1984』와 『멋진 신세계』의 디스토피아는 우리가 진정한 가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생겨날 수 있는 세상이다. 이런 작품을 통해 지금 우리가 고무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며, 간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가치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그것들을 더욱 소중히 간직하고 공유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로봇과 인간은 공존할 수 있을까.
‘크리스퍼(crispr)’라는 영어가 있다. 우리말로 옮기면 ‘유전자 가위’ 혹은 ‘유전자 편집’이라고 하는데, ‘유전자 가위’로 더 많이 쓰인다. 이 기술이 발전하게 된 계기는 ‘바이러스와 박테리아 연구’때문이었다. 바이러스는 사람만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박테리아도 공격한다. 그런데 박테리아들은 바이러스에게 공격을 당하다가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는 이를 이겨낸다. 과학자들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연구했는데, 박테리아들은 처음 공격한 바이러스의 DNA를 기억하고 있다가 나중에 똑같은 것이 공격해 오면 바이러스 DNA 조각을 잘라버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 이용해 원하는 DNA 조각을 잘라내는 기술을 생각해 낸 것이다.
이를 두고 전 세계는 엄청난 경주를 벌이고 있다. 우리나라도 상당히 앞서 있는데, 미국 중국 일본 영국 등 선진국들과 같이 엄청나게 투자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근육 양이 엄청 많은 ‘몸짱 동물’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 과학자들이 중국과 협력해 근육 돼지를 만들었고, 정상적인 돼지보다 근육이 엄청나게 많은 돼지의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영화 〈옥자〉는 유전자 조작을 통해 만들어진 슈퍼 돼지의 이름이다. 초반에는 옥자가 전 세계적으로 수십 마리에 불과한 희귀종인 줄 알지만, 후반부로 가면 동일한 돼지가 수천 마리나 사육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슈퍼 돼지의 사육목적은 단 하나 식용으로 돈을 벌기 위해서이다. 이외에도 콩, 토마토 등 무수히 많은 식물들에게 유전자가 조작되어 재배되고 있는데, 이렇게 재배된 야채나 과일을 먹어도 괜찮은지, 병에 걸리는 것은 아닌지 하고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유전자 가위 기술은 좀 다르다. 예를 들어 벼가 다 자라면 고개를 숙이는데, 이때 볏대가 바람에 넘어지기도 하여 수확량이 줄어든다. 이때 볏대를 단단해지지 못하게 하는 유전자를 잘라내면 줄기가 단단해져 볏대가 잘 넘어지지 않는다. 유전자를 삽입한 것이 아니니 소비자는 안심하고 이런 쌀을 먹어도 되는 것일까.
‘찰스 다윈’은 모든 생명체는 진화하며, 진화의 메카니즘이 생명체간 생존경쟁, 즉 누가 더 환경에 적합한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환경에 적합한 것은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것은 점차 수가 줄고 사멸한다는 게 이론의 핵심이다. 그것을 ‘자연선택’이라고 하는데 오랜시간을 두고 보면 사람에게도 이 자연선택이 적용된다. 그래서 당뇨병 등이 걸려 죽어가는 사람을 국가 예산으로 살려내는 것은 자연적 진화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동물에게는 해당하지 않으나, 유독 인간만 자연에 역행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라고 불만 갖는 것이다.
독일은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기형아에 대한 자비로운 살해가 시작됐다. 심각한 기형으로 태어난 아이는 어릴 때 안락사시키는 법이 통과됐고, ‘살 가치가 없는 삶’이라는 개념이 널리 퍼졌다. 처음에는 유아를 대상으로 시행되다 1939년에는 3세까지 넓혀졌고, 1941년에는 17세까지 높아졌다. 이를 계기로 모든 기형아, 동성애자, 유대인으로 범위를 확장하여, 2차 세계대전 동안 홀로코스트라는 대학살이 시작되어, 이로써 600만 명 이상이 이유 없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이 끝난 후, 이 ‘우생학’은 강한 비판을 받고 금지됐다. 학문이 아니라 실제 정책으로 시행되면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을 통해 우생학이 한국에 들어왔고, 1933년 ‘조선우생협회’라는 학회가 생겨 지식인이라는 윤치호, 여운형, 주요한, 김성수, 이광수 등이 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우생》이란 잡지를 간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은 독일이나 미국처럼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수단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도 가끔 ‘우월한 유전자다. 연예인은 동생까지 잘 생겼다’는 등의 말이 TV 등에서 아무렇지 않게 방송되기도 하고, 공부 잘하고 똑똑한 사람은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 우월한 유전자라고 하는 게 바로 우생학적 사고다.
우리 모두는 미래에 대해 약간 두려움을 갖고 있다. 20세기 초 1930년대는 자동화가 초보적이었음에도 찰리 채플린 영화 〈모던 타임즈〉처럼 조립라인이 자동화되면 노동자들이 쫓겨나고, 기계는 계속 돌아가 실업이 생길 것을 기계 탓으로 돌렸다. 이어 1960년대는 다시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기본소득’을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했고, 공장은 점점 자동화될 것이므로 실업의 공포에 떨어야 했다. 오늘날 4차 산업혁명 속에서, 가까운 미래에 AI의 발전이 인간을 공장과 사무실에서 쫓아낼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청년실업이 높아지는 이유는 새로운 산업이 만들어내는 일자리보다도 없어지는 일자리가 더 많기 때문이다. ‘구글’은 미국서 가장 자산가치가 높고 이윤도 많이 내는 회사다. 이전까지 ‘제너럴 모터스사(GM)’가 그 자리를 차지한 적이 있었고, 당시 GM에 고용된 사람은 60만 명이었던 데 비해, 지금 구글의 직원은 5만 명으로 GM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정예소수면 된다는 것이다. 직장을 잃은 많은 사람들은 다시 기본소득을 제공해야 한다고 하지만 1960년대 외치던 기본소득은 시행되지 않고 있다. 기술발달로 새로운 직장을 만들고는 있으나, 일자리는 계속 줄어들고 있다. 앞으로 몇십 년 뒤는 어떻게 될까? 우리가 위기를 제대로 느끼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현재의 위기가 과장된 것이었다고 여기게 될까?
1932년에 제작된 ‘로봇 알파’는 자신을 만든 ‘해리 메이’에게 총을 겨누고 발사했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과연 당시 만들어진 허술한 로봇이 주인을 겨냥해 총을 쏜 것이 사실일까? 알파가 발사한 총은 총에 화약을 넣다가 실수로 화약이 터졌고, 그래서 메이가 손에 약간 부상을 당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사고는 과장되고 왜곡되어, 알파가 인간에게 총을 발사했다고 실로 터무니 없는 과장보도가 나온 것이다. 왜 그랬을까?
당시에는 기계가 인간의 일자리인 직장을 없앨 것이라는 불안감이 팽배해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언론이 작은 사고를 자극적인 사건으로 과장한 것이었다. 로봇이 인간을 공격했다는 기사에서 기계 때문에 직장을 잃을지 모르는 현실을 걱정하면서 기계 도입을 불안해하던 사람들이 원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인공지능과 로봇에 대해 가진 두려움은 정말 근거가 있는 것인가.
우리는 매일 ‘휴대전화’라고 하는 작은 기계를 갖고 산다. 반도체로 만든 이것은 고성능 렌즈와 카메라, 터치스크린, 복잡한 알고리즘, 그리고 전파를 연결해 주는 기지국과 국제적 송수신망까지 결합 된 네트워크다. 네트워크와 결합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는 ‘사이보그(인조인간)’인 셈이다. 의수나 의족이 크게 발전했지만, 아직은 인간의 몸을 기계와 직접 연결하지는 못하고 있다. 지난 100년간 뇌과학이 크게 발전했지만, 인간의 의식과 기억을 ‘업로드’하거나 ‘다운로드’하지는 못한다. 인간이 휴대전화 같은 기술에 의존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사이보그가 될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기계인간’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앞으로 50년이나 100년 정도의 가까운 미래에는... 그렇지만 1000년이나 5000년 뒤에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과학의 시대, 생각의 경계가 무너진다.
지구에 사는 다른 사람의 삶이 비참하고 불행한데 나만 풍족하고 행복할 수는 없을 것이고, 다른 생명체(동식물)가 비참한데 나만 태평성대를 구가할 수도 없을 것이다. 과학과 인문, 예술, 이런 모든 것들의 결합은 나를 둘러싼 조건들을 이해하고 보다 적극적인 삶을 살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가 아닐 수 없다. 물리학으로 대표되는 과학적 문화와 문학으로 대표되는 인문 문화 사이에는 안타깝지만 커다란 간극이 있다. 또 그 간극을 경험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19세기 말에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전등, 전차, 활동사진 같은 전기 문명은 과학기술에 대한 조선사람들의 생각을 변화시켰다. 세상을 보는 방식이 바뀐 것이다. 1900년대 등장한 신소설에는 전기, 전차, 전등으로 대표되는 신문물이 소개되는데, 조선이 받아들이고 배워야 하는 문명의 상징이기도 했다. 이는 당시의 친일적 경향의 소설이나 민족주의 성향의 소설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1902년 한성전기회사가 전등 사업을 시작하자, 일본인들은 일본영사관이 있었던 정동과 충무로, 일본인 밀집 거주지역인 진고개에 치안을 목적으로 가로등을 설치했고, 남대문에 밀집한 상가들도 앞다투어 전등을 가설해 ‘불야성’을 이루었다.
전등 가설은 점점 늘어나 1920년대 말 서울의 일본인 가구 90%, 조선인 가구 40% 정도에 전등이 설치되었다. 전등과 함께 도시의 경관을 바꿨던 전차는 1900년대 청량리와 마포, 용산과 종로를 잇는 구간을 운행하다가, 1910년 이후에는 돈암동, 효자동, 왕십리, 신길동으로 확대되어 시민들의 보편적 교통수단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하고 서울을 확장하는 데 한몫했다. 전기 문명은 활동사진으로 이어져, 1903년 한성전기회사가 동대문발전소 마당에서 서양 영화를 상영했고, 1906년에는 동대문 활동사진소가 개소했으며, 이후 최초의 영화관이라고 할 수 있는 고등연예관(1910), 단성사(1912)가 문을 열었다. 사람들은 이 영화에 호응했으며 도시민의 대중적인 오락거리가 되었다.
전기 문명은 기차와 함께 낙후된 전통사회를 극복하기 위해 수혈되어야 하는 과학의 요체였다. 이광수의 장편소설 『무정』에서는 과학이 힘이자 문명이라고 했고, 주인공 형식은 전기 문명과 조선의 낙후된 상황을 비교하면서 과학자가 되겠다고 결심하기도 한다.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전등이나 영화를 처음 본 사람들은 이를 ‘마술’이라고 생각했다.
「경성유람기」(1917) 라는 단편소설은 시골에는 아직 전기가 보급되지 못했을 때 함경도에 사는 이승지라는 양반이 서울에 올라와 전기와 같은 문명을 접하고 받은 충격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승지는 전등불을 환하게 밝힌 음식점을 보고는 ‘영롱찬란한 수정궁궐’이라고 표현했다. 한편, 전기가 괴이한 일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1887년 경복궁 건천궁에 전등을 가설하고 발전기를 냉각시키기 위하여 연못물을 이용하였는데 뜨거워진 물을 다시 연못으로 흘려보내자 연못의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했다. 이를 보고 대신들은 서양에서 들어온 사악한 것으로 인해 물고기가 죽었다고 노라워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전차에 대한 반대도 많았는데, 철도가 서울의 지맥을 끊어 가뭄을 낳는다고 믿었다. 「경성유람기」에서 이승지는 처음 활동사진을 보고 ‘귀신의 희롱이 아니면 정녕 내 놈이 마술에 홀린 것일세그려’라고 했다고 적었다.
전기를 문명의 상징으로 무조건 칭송하고 수용하려 했던 초기작품과는 달리 1920년대에는 전기가 개인과 조선 사회 모두에게 비싼 대가를 요구한다는 생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1923년 「개벽」에 실린 수필에서 4년 만에 평양을 찾은 작가는 전차와 비행장을 자랑하는 친구에게 “전차는 외국인의 밥벌이 통이고, 번쩍번쩍하는 새 집들은 모두 일인의 것이거나 중국인의 것이고, 조선인을 기본으로 하지 않는 이런 발전을 우리를 한층 더 슬퍼게 하고 한층 더 자성해야 한다”고 했다. 어쨌거나 1920∼1930년대 소설 중에는 전기를 어둡거나, 뭔가 모르게 불편하거나, 기계적으로 차갑게 묘사한 것이 많다. 이는 식민지적 일상의 우울함, 불균형, 무력감, 아이러니와 같은 모순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과학과 인간 (마지막 이야기)
이제까지는 어쩌면 가상적인 문학을 통해 과학과의 연관성을 살펴보았다면, 마지막에 살펴볼 주제는 우주다. 코페니쿠스가 처음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수금지화목토천혜와 항성(별)들이 존재한다는, 별들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눈에 보이는 별이 우주의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별들이 우주의 끝이라 믿지는 않는다. 우리가 바라보는 별은 어떤 공간의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은하계의 태양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우리 은하계’에는 1000억 개 이상의 별이 존재하지만, 실제 눈으로는 몇백 혹은 몇천 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한때 우리 은하계를 우주 전부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늘에서 볼 수 있는 은하수가 ‘우리 은하계’인데, 20세기 초에 ‘허블’이 이 은하계 밖의 별을 발견하고 그것은 우리 은하계가 아닌 ‘안드로이드 은하계’에 속하는 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안드로이드 은하계에도 태양과 같은 항성이 수천억∼1조 개 정도가 존재한다고 한다. 그러면 우주에 은하계는 몇 개나 존재할까? 적어도 1000억 개 내지 2000억 개 정도 된다고 하다가 2016년 2조 개 정도로 늘어났다. 광활하다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우주의 정체다.
지금은 망원경이 발달해 100억 광년 정도 떨어진 별도 관찰할 수 있다. 이것은 100억 년 전 별에서 나온 빛을 지금 우리가 보고 있다는 말이다. 불과 500년 전까지도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지구, 모든 행성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고 여기고, 우주는 그저 아늑할 정도로 작다고 믿었으나, 이제 지구는 하나의 행성일 뿐이고, 우주는 무한대에 가까울 정도로 커졌다. 막연히 종교에 심취한 사람이 아니라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진화의 산물이라는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인간과 동물은 다른 존재가 아니며 오히려 인간은 동물로부터 진화했고, 인간의 역사는 길게 봐도 수백만 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 짧은 역사다.
몇백만 년에 불과한 인간의 역사는 우주의 역사, 지구의 역사로 볼 때 매우 짧은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하다. 크기도 마찬가지다. 우주가 얼마나 거대한지 우리 은하계와 그 안에 속한 태양계, 태양계 안의 지구 위에서 살고 있는 우리 인간은 그저 먼지 조각에 불과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든, 태양이 지구를 돌든 그 차이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겠는가 싶다. 영향이 있을까, 없을까? ‘코난 도일’은 자신의 추리소설 주인공 ‘셜록 홈즈’를 통해 ‘세상이 어떻게 작동하든 우리 각자의 삶에는 어떠한 상관도 없다’고 했다. 여기에는 자연과학이 발견한 사실들은 인간 삶의 의미에 대한 답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인문학적 주장이 담겨 있다. 인문학자들은 인간 존재의 의미를 인문학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철학, 문학, 역사, 윤리, 종교 등을 익힘으로써 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일까? 과학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과학은 자연에 대한 진리, 사실을 밝힌다는 그 자체로 가치를 인정받아왔다. 인간은 질문할 줄 아는 동물이고 궁금한 것을 알고 싶어하기 때문에 자연을 탐구하는 과학의 등장은 필연적인 것으로 여긴다. 문과에 속하던 이과에 속하던 학창 시절 끙끙대며 배운 분자와 미적분이 인생에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충분한 삶을 사는데 미적분이 필요할까? 도덕적인 삶을 사는데 과학이, 수학이, 양자역학이 필요할까?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사는데 우리가 우주의 먼지 조각에 불과하다는 지식이 필요할까? 우주와 진화, 물리학을 알아야 할까?
주자는 이기(理氣)의 개념으로 자연의 이치를 앎으로써 철학과 윤리를 알게 되고, 자연의 작동원리에 따라야 할 규범이 정치에 있다고 보았다. 이는 동양의 정치, 사회에서 자연과 덕성, 과학과 윤리는 밀접히 관계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서양에서도 철학자가 우주의 작동원리를 아이들에게 설명해 주는 그림이 있는데, 이것은 인간이 따라야 하는 도덕이나 규범이 자연이 작동하는 방식에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기인하는 것으로 태양계의 운동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과거의 과학자들은 동물은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점차 과학이 발전해 동물도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물고기는 먹던 채식주의자들 중에 물고기도 고통을 느낀다는 연구가 있은 뒤에 물고기조차 안 먹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사람은 새롭게 무언가를 알게 되면서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질 수가 있다. 물론 동물이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안다고 모두가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의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질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이 100% 당위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사실을 알게 되면 일단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진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사실이나 가치가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것은 우리의 일상과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사실과 가치는 그 연결이 느슨하거나 팽팽한 정도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삶 속에서 마치 동맥과 정맥이 모세혈관을 통해 연결되어 있듯이 미세한 연결망들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실만의 세상에서 살아가지 않듯이 가치만의 세상에서 살고 있지도 않다. 과학과 인문학의 분리, 사실과 가치의 분리, 자연과 삶의 분리는 과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오해로부터 출발한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물리학자 뉴턴을 굉장히 존경했는데, 저서「순수이성비판」은 뉴턴 과학에 대한 철학적 분석이다. 그러나 칸트는 뉴턴을 천재라고 평가하지는 않았다. 천재는 다른 사람이 모사(模寫)하지 못하는 업적을 이루어야 하는데 뉴턴의 업적은 한 세대가 가기 전에 다른 과학자들에 의해 다시 똑같은 방식으로 재현되었고, 이는 뉴턴의 업적이 천재에 의한 업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아인슈타인과 베토벤 중 누가 진정한 천재인가에 대한 물음에 아인슈타인은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비슷한 업적을 이루었을 것이라고 하는 반면에 베토벤이 없었다면 〈합창 교향곡〉같은 작품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며 베토벤을 천재로 꼽는다.
과학과 인문·예술의 관계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출발점은 상상력일 것이다. 과학의 핵심은 발견이지만 과학도 무언가를 만드는 활동이기 때문에 과학에도 상상력이 매우 중요하다. 이탈리아 철학자 ‘비코’는 “과학은 이상에만 근거하고, 인문학은 상상력에 근거한다”고 했지만, 과학에도 상상력이 중요하다.
뉴턴 이전의 과학자들은 행성이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왜 타원운동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이에 뉴턴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통해서 이 문제를 증명했다. 그는 행성과 태양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 행성은 타원 모양으로 태양 주위를 돈다는 사실을 증명해냈다. 그 힘이 바로 ‘만유인력’이라는 것이다. 보통 사과를 떨어뜨리면 땅으로 떨어지는데 이는 중력 때문이다. 우리는 중력이 실제 한다고 믿고 중력이 없으면 우주로 날아간다고 배운다. 그런데 뉴턴은 중력을 자연에서 찾아냈을까? 아니면 만들어 낸 것일까?
사실 뉴턴이 만유인력을 만들었다는 애기는 황당하다 못해 과학에 대한 모독으로 들린다. 아인슈타인은 뉴턴을 넘어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뉴턴식의 끌어당기는 중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태양이 우주공간에 놓이면 태양 주위로 공간이 휜다. 침대보에다 무거운 쇠구슬을 놓으면 침대보가 푹 파이듯이. 지구는 이 휜공간을 따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이다. 지구가 우주에 놓이면 지구 주변의 공간이 휘고 그 휜 공간을 따라 사과가 운동을 한다. 이것이 사과의 낙하이다. 우리는 그 현상을 보고 중력이라고 말한다. 지금 보면 아인슈타인이 옳게 말한 것이다.
뉴턴이 발견한 중력의 법칙, 수학적 공간에서는 타원의 초점에 있고, 다른 물체는 그 주변을 운동한다. 이때 물체 사이에 서로 끌어당기는 힘을 가정하면 주변을 운동하는 물체가 타원운동을 한다는 것을 증명한 뉴턴은 이전까지는 태양과 지구처럼 멀리 떨어진 물체들 사이에 끌어당기는 힘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만유인력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이를 증명했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도 예술처럼 새로운 개념, 존재를 만드는 활동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1971년 아폴로 17호가 우주에서 지구의 모습을 최초로 사진 찍었던데 이어, 무인탐사선 보이저 1호가 60억㎞ 떨어진 곳에서 지구 전체를 바라보면서 사진을 찍었다. ‘창백한 푸른 점’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지구에서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심지어 이념과 명분으로 목숨을 거는 행위가 얼마나 우스운 짓인지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우주 속에서 우리의 위치를 깨닫는다면 우리는 지구에서 버텨내야 하고 이를 위해서 서로와 환경을 아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우리 은하계 한 귀퉁이에 있는 태양계의 세 번째 항성 지구에서 지금도, 오늘처럼 이렇게 살고 있다. 우리의 삶의 터전인 창백한 푸른 점을 아끼고 보존해야 하는 책임감이 느껴진다.
우주의 관념이라고 해서 인간의 생로병사가 의미 없다는 것은 아니다. 삶이 허무하다는 말도 아니다. 죽음을 염세주의로 받아들이라는 애기도 아니다. 다만 영생과 같은 허황된 약속 때문에 현재 삶을 왜곡하고 경시하거나 나와 다른 신을 믿는다고 서로 미워하고, 어디에 산다고, 이념이 다르다고 서로 죽이는 일이 얼마나 허망하고 멍청한 짓인가를 깨닫자는 것이다. 권력과 성취를 위해 짧은 삶에 서로 위해를 가하거나 생명체를 유지하기에 딱 적합한 이 지구와 생태계를 마구 훼손해서 균형을 깨지는 말자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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