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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제12장 英雄에게는 美女가 따르는 법
잔디밭이었다.
희봉아는 새처럼 작은 몸을 웅크리고 애처로울 정도로 몸을 떨고 있었다.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파리했고, 입술 또한 새하얗게 탈색된 채 금방이라도 까무러칠 듯한 모습은 보기에도 안타까울 정도였다.
희봉아의 앞에는 난감한 기색의 냉검상이 서성이고 있었다.
희봉아는 고통을 참을 수 없는지 입술을 깨물며 연신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저...... 저좀...... 어떻게 해 주세요."
냉검상은 눈살을 찌푸렸다.
"
나는 의원이 아니야. 그리고 당신의 이 괴상한 증세를 알 수도 없어. 날 보고 뭘 어떡 하란 말이야?"
희봉아는 냉검상의 차가운 말에 그만 가슴이 식어 버리는 기분이었다.
원래 냉검상은식인혈마 대독청을 죽이고 희봉아를 안고 오던 중 갑자기 희봉아가 괴이한 증세를 보인 것이다.
그녀의 몸이 얼음처럼 차가와지더니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시면서 학질이라도 걸린 듯 무섭게 몸을 떨기 시작한 것이다.
도대체가 알 수 없는 현상이었다.
해서 냉검상은 일단 그녀를 하오의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쪼이는 잔디밭에 내려놓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희봉아는 점점 고통스러운 듯 보기에도 애처로울 정도로 몸을 떨며 파리하게 변해가는 것이었다.
냉검상은 조금마음이 안쓰러워졌다.
한 마리의 순진한 사슴 같은 여인이 고통에 겨워하고 있는 것을 보기만 하기에는 그의 마음은 냉정하지 못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방법이 있나? 소저는 자신의 그런 증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희봉아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전 아래에 장심(掌心)을 밀착시켜 양강(陽剛)의 진력(眞力)으로 임독양맥을 통해 뜨거운 기운을 불어 주면 많이 좋아질 거예요. 저의 체질은 특이한 칠음절맥(七陰絶脈)이라...... 음......"
말을 하다 말고 더욱 고통이 밀려오는지 희봉아는 입술에 피가 나도록 이빨을 악무는 것이었다.
냉검상은 대충의 방법도 들었겠다, 희봉아의 모습을 보면서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냉검상은 희봉아를 안아 풀밭에 반듯하게 눕히면서 말했다.
"내가 좀 거칠더라도 이해를 해라."
희봉아는 덜덜떨면서도 장삼이 찢어진 가슴 부위를 두 손으로 꼭 가리고 있었다.
냉검상은 피식 웃더니 대뜸 그녀의 손을 잡아 가슴에서 치워 버렸다.
그리고는 거칠 것이 없이 장삼의 앞자락을 헤쳤다.
희봉아는 창백한 안색 위로 살풋 홍조를 띠었다.
자신의 가슴을 남자에게 보인다는 처녀의 수줍음 때문이었다.
냉검상은 의외로 풍만하고 보기좋은 희봉아의 흰 젖가슴을 보며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이내 그의 얼굴에는 담담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당신 얼굴과는 딴판이군?"
"예?"
희봉아가 말뜻을 얼른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의외로 몸이 좋다는 말이다."
희봉아는 냉검상의 노골적인 말에 수치와 부끄러움을 느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다...... 당신 어떻게 그런 말을......"
희봉아의 음성은 모기소리만큼 작았다.
냉검상은 대수롭지 않은 듯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마음이다. 나는 아름다운 것을 사랑한다. 그렇기에 보고 느낀대로 이야기를 할 뿐이다."
"......"
직선적이면서도 솔직담백한 맛을 풍기는 냉검상의 말에 희봉아는 잠시 아연해졌다.
냉검상은 모든사람들이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지만 표현하지 않는 것을 스스럼없이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걸 느끼면서도 얼른 냉검상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네 가슴은 정말 아름답다. 마음껏 애무하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다지 신경을 쓰지 말아라. 어차피 내가 이런 말을 하든 안 하든 치료를 원한 것은 너였으니까."
희봉아는 더욱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격렬하게 몸을 떨면서 더욱 고통스러운 빛을 보였다.
냉검상은 약간다급한 표정이 되어 자신의 양 손을 희봉아의 배꼽 아래 단전 부근에 밀착시켰다.
순간 희봉아의교구가 물에 젖은 새처럼 떨렸다.
"조, 좀 더...... 아래......"
억지로 입술을열어 위치를 교정시켜 줄 때 그녀는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냉검상은 그런 일에 조금도 눈치를 보지 않았다.
대뜸 치마 속으로 그의 양 손이 스며들고......
손 끝에 까칠하게 느껴지는 음모(陰毛)의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냉검상은 이내 숙연한 표정으로 자신의 양강진력을 장심을 통해 불어넣기 시작했다.
"아......"
고통인지 신음인지 모를 이상한 소리를 내며 희봉아는 그만 눈을 감아 버렸다.
가늘게 떨리는 속눈썹이 서러울 정도로 길어 보이는 것이었다.
희봉아는 부드러운 물결처럼 자신의 내부로 스며드는 따스한 기운을 느끼며 나른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 * *
따각따각!
한 필의 청마(靑馬)가 한가롭게 움직이고 있었고, 마상(馬上)에는 희봉아를 앞에 태운 냉검상이 보였다.
냉검상의 양강진력을 반 시간쯤 받아들이자 신기하게도 희봉아는 화색을 되찾으며 언제 고통스러웠냐는 식의 얼굴이었다.
칠음절맥이란 괴질의 특성을 모르는 냉검상으로는 조금 의아했지만 이 청초한 여인이 빛을 되찾았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악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희봉아는 말에탄 순간부터 단 한 마디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것은 냉검상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말을 붙여주길 기대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냉검상은 그런 희봉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몰아갈 뿐이었다.
지나치는 사람들은 두 사람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늦은 오후가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동정호로 몰려들고 있어 두 사람의 모습은 더욱 돋보였다.
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와 희봉아의 갈색 머리칼을 가볍게 나풀거리게 했다.
이제나 저제나 냉검상이 말을 붙여 주기를 학수고대하던 희봉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냥 지나치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공자의 도움으로 생명의 구함을 받았으니, 진정 어떻게 고마움을 표시해야 할런지 모르겠어요."
냉검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내가 그대를 구해준 것은 그 늙은 괴물이 너무 잔혹했기 때문이고, 또 그대가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야.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파괴하려는 것처럼 못된 것은 없지."
희봉아는 기쁨을 느꼈다.
단순히 냉검상이 자신을 아름답다고 표현한 것이 그녀에게는 더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희봉아는 활짝웃으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공자의 존함은 어찌 되세요?"
냉검상은 잠시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대답했다.
"유림......"
거짓말을 한 것이다.
왠지 자신의 이름보다는 동생이 떠올라 성을 빼고 동생의 이름을 말한 것이었다.
(유림...... 유림......)
희봉아는 마치잊어 버리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유림이란 이름을 마음 속으로 외우고 또 외웠다.
이때 냉검상은희봉아의 허리를 감은 손을 말고삐를 잡아채기 위해 약간 들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완강한 팔뚝으로 희봉아의 풍만한 가슴의 질감이 느껴졌다.
(이 여인은 어찌 보면 금루와 비슷하다. 단지 금루보다 아름답고 총명해 보일 뿐이지.)
생각을 한 냉검상은 넌지시 손을 올리며 더욱 희봉아의 가슴을 느껴 보았다.
희봉아는 약간 움찔했다.
그녀의 가슴은 급격히 뛰면서 두근거리는 마음을 나타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냉검상의 손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냉검상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가슴을 느끼면서 물었다.
"그대 이름은?"
"희봉아......"
작은 음성이었다.
"무슨 일로 그 늙은 놈과 싸우게 된 거지?"
본래부터 말투가 반말이었슴에도 불구하고 희봉아는 별로 의식할 수 없었다.
아니 냉검상에게는 오직 자연스러운 말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자는 식인혈마 대독청이란 자로 마도(魔道)에 속한 소름끼치는 전대노마(前代老魔)예요."
"......"
"무당파의 명숙이신 송학도장(松鶴道長)께서 악양에서 우리 금봉문(金鳳門)의 제자를 희롱하는 청년을 발견하고 그 자를 따금하게 훈계했는데...... 공교롭게도 그 자가 바로 대독청의 제자였고, 그로 인해 대독청은 우리에게 무자비한 손속을......"
식인혈마 대독청을 떠올리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지 희봉아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냉검상은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송학도장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고는 물었다.
"그대가 금봉문의 총사가 맞나?"
"그래요."
"총사라면 어떤 직위지?"
잠시 설명하기가 애매모호한 희봉아는 입술을 다물고 생각을 하다 말했다.
"일반적인 장원의 총관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물론 조금의 차이는 있겠지만......"
"음. 그럼 금봉문은 여자로만 구성돼 있는 단체인가?"
"예."
냉검상은 싱긋웃었다.
"재미 있겠군."
희봉아는 냉검상의 그 말뜻을 잘못 해석하고 있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면서 금봉문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물론 재미있는 곳이예요. 우리 금봉문은 백여 년의 역사를 가진 문파로 처음부터 여인들로만 구성됐어요. 지금은 상당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무시하지 못하지요."
"문주는 젊은가?"
"그럼요. 제게는 사문의 언니뻘 되는 분이예요. 대단히 아름답고 무공도 상당히 강하지요. 아마 공자께서 놀러 가시면 반드시 훌륭한 대접을 받을 거예요. 저의 생명을 구해 주셨는데 금봉문으로는 최고의 손님이시지요."
냉검상은 호기심을 느꼈다.
불쌍한 희봉아는 여자를 다루는데 천재인 냉검상을 은근히 금봉문으로 초대하려는 것이었다.
마치 양떼 속으로 늑대를 끌고 가는 것처럼......
이때 냉검상은문득 말꼬비를 바싹 당겨 말을 멈추게 했다.
희봉아는 이상한 듯 냉검상을 돌아보았다.
냉검상은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무엇인가를 보고 있었다.
"......?"
희봉아는 의아함을 느끼며 냉검상이 시선을 준 곳을 바라보았다.
석비(石碑), 세월과 풍우(風雨)에 시달린 듯한 거대한 석비를 냉검상은 바라보고 있었다.
한동안 석비를 응시하던 냉검상은 무슨 생각에선지 말에서 내렸다.
"고, 공자......"
희봉아도 조금당황한 듯 냉검상을 따라 내렸다.
냉검상은 말없이 걸음을 옮겨 거대한 석비로 다가갔다.
무려 오 장이 넘는 높이의 거대한 석비는 웅장한 모습으로 보는 사람을 압도하고 있었고, 석비의 하단부에는 힘이 있는 필체로 글씨들이 음각되어 있었다.
〈천위대장군(天威大將軍) 냉염(冷炎)과 부장(副將) 탕화(湯和) 전우덕(傳友德)이 이곳에서 확곽첩목아(擴廓帖木兒)의 십만대군을 전멸시켜 무혼(武魂)을 빛냈으며...... 이 곳에 지나는 모든 인물들은 하마(下馬) 하고 대례를 갖추어 옛 명장의 충혼(忠魂)에 경배하라.
홍무제(洪武帝) 주원장.〉
한동안 이 석비를 응시하던 냉검상의 두 눈에 고뇌의 빛이 어른거렸다.
그의 시선은 석비의 첫 글귀에 못박힌 듯 고정돼 있었다.
〈천위대장군(天威大將軍) 냉염(冷炎)......〉
왜일까?
냉검상의 두 눈 깊숙한 곳에서 잔잔한 파문처럼 일어나는 아픔의 빛은......
이때 희봉아는냉검상의 옆에 다가와 이상한 듯 올려다 보았다.
이내 그녀는 석비로 시선을 돌려 석비에 새겨진 글씨들을 읽어보고는 생긋 웃음을 지었다.
"이 공적비(功積碑)를 처음 보시는 모양이군요? 이 근처에서는 꽤 유명한 거예요. 냉염대장군은 너무도 유명한 분이시잖아요? 백 년 전 대명제일의 무장(武將)으로 꼽히는 분으로, 홍무제의 오른팔이잖아요. 예전에는 이 공적비를 매일같이 손질하고 다듬고 관리했지요. 그 당시만 해도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가면 관부에서 잡아갔을 정도였으니까요."
"......"
냉검상은 말없이 시비를 볼 뿐이었다.
희봉아는 냉검상이 석비에 대해 많은 관심이 있다고만 느낄 뿐이었다.
"한 인간의 역사(歷史)가 태양의 빛을 받으며 신화(神話)가 되고,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흠모를 받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잊혀지는 것도 어쩔 수 없나 봐요. 지금은 이 공적비를 관리하는 사람조차 없잖아요."
그러나 냉검상의 귀에는 희봉아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냉검상은 차분한 표정으로 길게 숨결을 토해내며 눈바람과 추위 속에서 파랗게 얼어 죽어가던 동생의 모습을 떠올렸다.
-형, 다시는 중원으로 가지 마...... 큰형들이 형을 죽일 거야.
냉검상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지그시 말아쥐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안락원에서 만났던 취옥성 출신이라던 애화(哀花)의 말이 떠올랐다.
-취옥성에 가본 적이 있으세요?
냉검상은 갑자기 마음 한 구석이 답답해지는 기분이었다. 하늘을 올려보았다. 창(槍)처럼 눈을 찌르는 하늘빛이 아리했다.
(취옥성...... 내가 태어나고, 내가 떠난 곳......)
냉검상은 점점더 답답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마음을 풀려는 듯 희봉아에게 말했다.
"이 공적비를 잘 알고 있는 모양이군."
"그래요. 홍무제께서 냉염대장군을 얼마나 아끼셨는데요? 그때 냉염대장군은 승상의 지위까지 오를 수 있었지만 모든 공직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셨지요. 해서 홍무제께서는 이 공적비를 세웠고, 또한 그 분에게 왕위(王位)를 하사하여 그 분의 고향이신 사천의 농서 지방에 취옥성(翠玉城)을 건립해 주셨으며, 농서에 수백 리 영지를 주시기까지 하셨잖아요."
희봉아는 비교적 냉염대장군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었다.
냉검상이 묵묵히 이야기를 듣자 흥이 난 듯 희봉아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지금에 와서 취옥성은 하나의 나라와 같은 형상을 유지하고 있지요. 황궁의 간섭을 일체 받지 않은 채, 수십만의 백성과 수만에 해당하는 자체 군사까지 거느리고 있으며...... 그로 인해 서융(西戎)이나 금천(金川)의 이족(異族)들도 감히 대륙을 넘보지 못하는 것이지요."
"......"
"얼마 전 취옥성의 성주이신 서평왕(西平王)께서 죽은 이후 후계자 쟁탈전이 꽤 복잡한 양상을 띠면서 시끄러운 것 같아요."
"......"
냉검상은 문득 인자한 모습의 중년인을 뇌리에 떠올렸다.
누구보다 음(音)을 좋아하고, 새(鳥) 키우기를 즐겨하던 인물이었다.
세상의 사람들이 서평왕이라고 부르던 사람......
(무능하기만 한 분이셨어.)
냉검상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면서 다시 동생 냉유림을 떠올렸다.
그리고 냉유림이 죽어가면서 그의 손을 잡고 마지막 말을 되새기는 순간,
(그래...... 죽어도 그곳에는 돌아가지 않는다, 유림!)
이때 희봉아는지나치는 말투로 물었다.
"공자께서는 취옥성을 아시나요?"
냉검상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의 표정은 어느 새 차분하게 변해 있었고, 오히려 희봉아를 향해 싱긋 웃어보이는 것이었다.
"물론, 그곳에 미녀가 많다는 소리를 들어 많은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지."
"어머!"
희봉아는 화들짝 놀라며 냉검상을 향해 눈을 흘겼다.
"너무 뻔뻔스러운 말이예요."
"하하하!"
냉검상은 통쾌하게 웃으면서 희봉아의 허리를 감아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 말을 묶어놓은 곳으로 가면서 말했다.
"어차피 영웅에게는 미녀(美女)가 따르는 법!"
냉검상은 크게웃으면서 부끄러운 듯 몸을 움츠리는 희봉아를 말에 태우고 있었다.
그러나 희봉아는 몰랐다.
냉검상의 웃음과 쾌활함 속에 숨어 있는 아픔과 고뇌의 무게를......
* * *
술(酒).
악양에서 제법정평이 나 있다는 군자루(君子樓)의 명품이라는 십일취(十日醉)는 독특한 맛이 느껴졌다.
마시고 난 후의 톡 쏘는 듯한 향기가 일품이랄까?
아무튼 희봉아와 악양으로 돌아온 냉검상은 곧장 군자루로 와서 몇 근의 십일취를 위장 속으로 털어넣었다.
돌아오면서 쾌활하게 웃고 떠들었지만 그의 마음은 깊은 수심으로 차 있었다.
사람이란 비교적 재산과 권력, 명예와 신의는 포기하기 쉽다.
그러나 추억! 몸의 흉터처럼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아프고 쓰린 추억은 영원히 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냉염대장군의 공적비를 보고 옛 추억을 떠올렸고, 그로인해 가라앉은 마음을 풀어보려고 냉검상은 술을 마시고 또 마셨다.
그러나 술을 마시면 마실 수록 정신은 거울처럼 빛나고, 그래서 냉검상의 우울함은 더 해만 갔다.
창으로는 석양이 지고 있었다.
마지막 정열처럼 붉은 빛을 토해내는 태양의 빛은 밀물처럼 밀려들어 냉검상을 휘감고 있었다.
석양빛 때문인지, 술기운 때문인지 냉검상의 얼굴은 불그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런 냉검상의얼굴을 탁자에 손을 올려 턱을 괴고 바라보는 희봉아의 눈은 몽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마음이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 차는 것을 그녀는 단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었다.
(마치 모든 것이 아름다움으로 뭉쳐진 사람같아.)
그러나 냉검상은 희봉아의 눈길을 의식하지 않고 술잔만 비웠다.
간간이 고개를 돌려 창 밖의 석양을 보는 눈은 왠지 알 수 없는 슬픔을 느끼게 할 만큼 고독해 보였다.
그때였다.
냉검상과 희봉아가 앉아 있는 이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에 두 여인이 나타났다.
나이는 희봉아와 비슷했는데 생기발랄한 모습에 허리에는 똑같이 연검을 차고 있는 여인들이었다.
두 여인은 희봉아를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그러나 옆에 냉검상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얼른 다가오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희봉아는 그녀들을 보고 웃으면서 일어났다.
냉검상은 희봉아와 만나는 두 여인을 보면서 생각했다.
(금봉문의 제자들인 모양이군.)
조용한 음성으로 희봉아와 두 여인은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모습으로 보아 희봉아를 공경하는 빛이 역력했다.
한동안 여인들과 이야기를 나눈 희봉아는 냉검상에게 돌아와 난처한 빛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잠깐 어디를 다녀와야겠어요."
"나는 그대를 못 가게 말리지 않았어."
"아, 알아요. 하지만 기다리셔야 돼요. 제가 돌아올 때까지 다른 곳에 가시지 말고 기다리겠다고 약속해 주셔야 해요."
"......"
냉검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희봉아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꼭 기다려 달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 했다.
냉검상은 싱긋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톡톡 건드렸다.
"이봐, 희봉아 낭자. 당신이 쫓아도 나는 그냥 가지는 않아. 나는 아직 당신에게 구해준 대가도 받지 못했잖아?"
냉검상의 말에희봉아는 활짝 웃었다.
"정말이죠? 제가 돌아오면 어떤 대가도 지불할 거예요. 가지 마세요. 어떤 대가라도 지불할 테니까......"
말을 하다 말고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희봉아는 살풋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냉검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돌아서서 두 여인과 함께 군자루를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후후...... 귀여운 여자야. 충분히 남자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 순종적이고......)
혼자 미소를 짓던 냉검상은 문득 정금산장의 설청하를 떠올렸다.
(청하, 그 계집하곤 성격이 정반대야. 그러고 보니 청하를 못 본 지가 벌써 반 년이 다 돼 가는군. 지금 뭘 하고 있을까? 그 동안 나를 잊은 것은 아닐까?)
냉검상은 피식실소를 흘렸다.
(무슨 생각인가? 청하가 나를 잊을 리가 없지. 내가 잊게 내버려 두지도 않는다. 청하는 반드시 내가 거둘 것이다.)
냉검상은 다시술잔을 채우려다 술병이 비어 있음을 알고 점소이를 불렀다.
몇 근의 술을 더 시키고 고개를 돌리다 그는 문득 층계를 타고 오른 세 사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모두 문생 차림이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낯이 익었다.
(저 자는?)
앞서 들어오는문약해 보이는 청년은 바로 당소완의 비밀통로에서 두 명의 복면인을 거느리고 사라졌던 바로 그 청년이었다.
아! 바로 젊은 황제 효종이었다.
그러나 그가 황제란 사실을 모르는 냉검상은 오히려 효종의 뒤를 따르는 두 사람의 문생을 주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대조적이었다.
또한 차림은 문생이었지만 무인의 기질을 은연중에 풍기고 있었다.
한 명은 얼굴이 오철(烏鐵)처럼 검고, 한 명은 눈(雪)처럼 희다.
검은 얼굴의 사내는 딱 벌어진 어깨와 비록 장삼을 걸치고 있지만 강철처럼 강인한 근육질의 몸매를 느끼게 했다.
허리에는 묵직해 보이는 패검(覇劒)을 차고 있었다.
흰 얼굴을 가진 사내는 준수하기보다 섬세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깨끗한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머리에는 영웅건을 썼으며, 조금은 왜소한 체구가 남자치고는 여성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손에는 철선(鐵扇)을 쥐고 있었다.
냉검상은 바로흰 얼굴의 사내를 보면서 어디선가 한 번쯤 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얼른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때 우연하게도 흰 얼굴의 사내는 냉검상과 눈이 마주치고 일순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는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철선을 촤르르 펼치며 살짝 얼굴을 가리는 것이었다.
냉검상은 더욱의혹을 느꼈다.
(분명히 낯설지 않은 얼굴이다.)
아무리 더듬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다가가서 확인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몇 차례 흰 얼굴의 사내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냉검상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냉검상은 모든 것을 골치 아프게 생각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이미 석양은 완전히 침몰해 창 밖으로는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