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RPG의 등장인물이나 사건은 실제 인물이나 사건을 비하하거나 조롱하려는 의도가 아니며 이를 통해 불쾌감을 느끼게 할 의도가 일절 없다는 것을 알립니다.
이 RPG에서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물, 지명, 국가, 회사 또는 단체, 그 밖에 모든 명칭, 사건과 에피소드 등은 모두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만일 실제와 유사한 예가 있더라도 이는 해당 사건이나 인물 등을 비하하거나 정치적으로 가치판단하려는 의도가 없다는 점을 밝힙니다.
이 RPG는 허구적 창작물로서 특정한 사상, 이념, 정치체제, 인권 탄압과 폭압적 정치질서를 옹호, 미화하거나 찬양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음을 밝힙니다.
“사회주의 없는 자유란 ‘시혜’이자 부정의이며, 자유 없는 사회주의란 야만이자 노예제도나 다름없다.”
- 미하일 바쿠닌, <신과 국가> 중
15-1. 국토종합개발계획
1947년 11월, 정부 수립과 광복 2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무사히 마무리된 가운데, 소련은 대한민국을 즉각 승인하고 경제정책을 지원하겠다며 사전 통보 형식으로 경제대표단 파견을 알렸습니다. 수석대표로 국가계획위원회 부주석인 막심 사부로프가 내정되자, 외무부와 내각은 큰 긴장에 빠졌습니다. 사부로프가 이끄는 대표단은 도착에 앞서 토지개혁, 산업개발, 화폐개혁, 임금제도 등 4가지 핵심 경제 분야에 대한 세부 정책안을 한국 정부에 전달하였습니다. 정부는 이에 응답하여 장시우 국가계획위원장을 중심으로 각 부처 장관과 정파 대표들을 소집해 ‘국토종합개발계획위원회’를 조직하였고, 소련 측과 본격적인 정책 조율에 착수하였습니다.
위원회에서 사부로프와 장시우는 각각 세 가지 안을 내놓으며 토지개혁 및 제1차 산업개발 계획을 주도적으로 논의하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소련 경제대표단의 니콜라이 페도렌코는 조선의 산업 구조가 일본 본토로의 자원 반출에 최적화되어 설계되었음을 지적하며, 현재로서는 단절된 공급망으로 인해 산업 잠재력을 충분히 활용하기 어렵다고 평가했습니다. 사부로프는 페도렌코의 말을 가로채며, 조선이 만주 산업지대와 연계될 경우 극동 최대의 중공업 거점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고, 이를 위해 식량 생산과 유통에 대한 국가 통제의 필요성을 언급하였습니다.
허경훈은 토지 소유권의 사회화에는 찬성하지만 무리한 콜호즈식 집산화에는 회의적이었기에, 사부로프가 제안한 안을 일정 부분 지지하였습니다. 그는 식량 위기를 유발하지 않는 선에서 공업 시설을 효율적으로 개조하려면 생산량과 가격의 통제가 필수적이라 말하며, 소련 경제대표단 내부의 권력관계를 엿보려 하였습니다. 실제로 사부로프와 페도렌코는 서로를 상당히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과학자 그룹인 칸토로비치 일파는 이들의 갈등에서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페도렌코가 사부로프의 오랜 라이벌이자 고스플란 주석 보즈네셴스키의 심복이라는 사실도 알력의 원인으로 보였습니다.
허경훈은 조공 당중앙의 입장을 확인하고자 김삼룡 공안위원장을 찾아갔습니다. 김삼룡에 따르면 만주와 조선의 중공업이 연결될 경우 민주진영(사회주의권) 전체에서 조선의 입김이 커질 것이며, 사부로프의 중공업 집중투자 방안을 지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김삼룡은 중국이 조선의 중공업 발전을 경계하는 배경을 설명하며, 박헌영이 중국 대사관으로 사실상 ‘끌려간’ 것도 그 연장선상이라 추측하였습니다. 허경훈은 이에 어느 정도 공감하면서도 박헌영의 입장을 염려하며, 김삼룡의 입장에 조심스럽게 동의하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권가연은 조용히 논의를 지켜보다가, 식량 위기와 공급망 단절의 원인을 일제의 제국주의적 통치와 미군정의 정책 실패로 돌리며 입을 열었습니다. 그녀는 회의장에 참석한 위원장과 부장들 중 콤그룹 출신의 소련파 인사가 없다는 사실을 빠르게 파악하였고, 그 결과 논의는 자연스레 공산당 이북 국내파 중심으로 흘러갔습니다. 권가연은 이북 국내파의 장시우 국가계획위원장에게 유상몰수-유상분배의 토지개혁안을 전달했지만, 장시우 위원장은 지대수익을 인정하는 어떤 방식에도 강하게 반대하며, 그것이 곧 국가를 봉건적 소유 질서로부터 해방시키지 못하는 길이라 경고하였습니다.
한편, 레오니트 칸토로비치 박사 등 ‘최적화론자‘들과 대화하며 성급한 농지 집산화가 가져올 부작용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은 이상이는 농지의 사회화를 주장하되, 사로당이 주창하는 협동조합이 아닌 지역 인민위원회를 주체로 삼자고 제안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사로당의 영향력을 배제하려는 의도를 드러냈습니다. 또한 이상이는 조선의 농촌이 경술국치 이래로 일본 제국주의의 도구로 전락했음을 강조하며, 일제가 만들어놓은 토지 제도를 인정하는 것은 곧 제국주의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그는 무상분배든 사회화든 집산화든 모든 농지를 전면적으로 몰수하고 재분배함으로써 일제의 유산을 청산해야 한다고 강하게 선동했습니다.
공산당원들은 열렬히 호응했지만, 타 정파들은 계산이 복잡해 보였습니다. 특히 국무령 여운형의 정파인 민족자주연맹은 과격한 토지개혁 방식에 우려를 표하며, 지나친 강경책이 오히려 민중의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음을 경고했습니다. 권가연은 더 이상의 양보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사로당의 이여성과 절충하여 산업개발안 초안을 직접 회의에 제출했습니다. 해당 안은 농업 관련 산업 육성과 인프라 재건을 중심으로 하되, 선별적 중화학 투자와 경공업의 지방 분산, 산업 인력 재건 방안 등을 담고 있었습니다. 공산당 소속 위원들은 중공업의 분산투자가 비효율적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권가연의 안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상이의 농지 전면 몰수 주장에 대한 반응이 미적지근하자, 허경훈은 기존 자작농의 1결 이하 소유는 계승하도록 하자는 수정안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토지를 전면 몰수하면서도 소농의 불안을 줄이고, 토지를 지켜낸다는 인식을 유도하는 절충안이었습니다. 이상이는 이를 곧바로 수용하며 입장을 선회했고, 그 결과 오히려 노농당의 친임정계 인사들이 더 강하게 공산당 중앙의 입장을 지지하게 됩니다. 그들은 토지 분배가 겸병이나 불만을 초래할 수 있음을 지적하며, 사회화가 백년대계임을 강조했습니다. 건설부장 주녕하도 도평의회 주도의 상향식 농지계획 수립이라는 조건 하에 이상이의 사회화안에 조심스레 동의했습니다.
이상이는 이어 북부 공업지대 활용, 만주와의 연계, 인프라 확충, 남부 경공업 육성, 재일조선인 귀환 등의 중공업 중심 산업계획을 제안했고, 사부로프는 이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권가연은 생산량 부풀리기를 방지할 감시기구의 설치를 제안했으며, 이에 페도렌코는 물론 사부로프와 칸토로비치까지 크게 공감해 라브크린 설치 필요성에 동의했습니다. 사부로프는 “사회주의 생산양식을 이해하고 인맥에 휘둘리지 않는 인물”이 위원장이 되어야 한다며 원칙적 기준을 제시했고, 공산당원들은 박수로 호응하며 감시와 통제의 필요성을 인정했습니다. 이로써 토지와 산업, 통제 시스템을 포괄하는 경제 운영 논의가 한층 구체화되었습니다.
사부로프가 원하던 대로 토지 사회화-중공업화가 한국의 향후 개발방향으로 자리잡히는가 싶을 무렵, 허경훈은 전설적 고려인 사회주의자 이진하의 제자라는 젊은 여성 당원 이화영을 만났습니다. 이화영은 “얼마 전 숙청당한 말렌코프의 최측근인 사부로프는 끊긴 동앗줄“이라며, 한반도-만주 공업지대안을 살리면서도 사부로프의 의견 자체는 전부 부결시켜 페도렌코나 칸토로비치의 윗선인 즈다노프, 그리고 그 윗선인 스탈린을 만족시키라고 조언했습니다. 드디어 모스크바의 복잡한 셈법을 알아챈 허경훈은 민족자주연맹 측 온건파의 입을 빌려 토지 사회화 반대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스탈린의 의중을 오독하고 사부로프의 노선에 일시 동조했던 판단을 즉각 철회한 이상이는 자신의 중공업 중심 계획을 철회하고 허경훈의 노선을 지지하기로 했습니다. 다만, 사로당 주도의 개혁안에 그대로 끌려가는 건 부적절하다고 판단해 공산당 독자 노선을 마련할 필요성을 제기했습니다. 그 시점에서 중국대사관에서 돌아온 박헌영은 민자련과 사로당의 토지개혁안을 기반으로 삼되, 산업개발 방침은 인프라 재건에 중점을 두되 중공업으로의 이행을 분명히 명시하라는 방침을 내렸고, 이에 호응이라도 하듯 사로당의 정책통 인정식은 공산당 측에 노동자 민주주의의 제도화를 요구하며, 공장 내 자치기구를 공식화할 경우 조국전선 내 야당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인정식의 제안을 자신과 자신의 계파(서상파)에게 주어진 절호의 기회로 인식한 허경훈은 내친김에 ‘공장위원회’를 설립하고 생산, 고용, 안전, 회계에 대한 열람 및 거부권, 공동결정권을 부여하자는 제안을 꺼내며, 더 나아가 의정원의 직능대표를 직장위원회와 협동조합 등에서 선출하자는 장기적 개편안을 제시했습니다. 인정식과 주녕하는 이를 과도기적 조치로 인정하며 동의했고, 이상이도 긍정적인 입장을 표했습니다. 이상이는 이후, 공장위원회 체제를 기반으로 한 지역 노동자평의회 체제와 국가계획위원회의 한정된 감독권을 포함하는 절충안을 제안하며 평의회주의적 경향을 일정 부분 수용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전평과 생협도 실질적으로 노동자 자주 경영체제를 수용하게 되었으나, 농협-전농 간 입장 차이로 인해 헌법 개정안은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후 확정된 경제 개혁안은 토지 무상몰수 및 유상분배를 원칙으로 하고, 대규모 토지 소유 제한, 토지대금을 국토개발기금으로 전환하여 산업 및 농업 투자 재원으로 활용하는 구조를 담습니다. 산업 부문은 기반 인프라(철도, 전력, 항만 등) 우선 투자를 명시하고, 중장기적으로 중공업을 강화하되 작업장마다 공장위원회를 설치해 노동자의 경영 참여와 감시 기능을 제도화했습니다. 한편, 소련 대표 사부로프는 갑작스레 귀국하고, 그를 대신해 쿠즈네초프 중앙감찰위원회 부주석이 ‘한소상호경제원조협정’을 체결하러 방한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논의의 무게는 더욱 실질적이고 정치적으로도 민감한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15-2. 국가금융관리계획위원회
사실상 숙청된 사부로프를 대신해 소련 경제대표단의 새로운 단장으로 방한한 쿠즈네초프는 여운형, 박헌영 등과 각각 장시간 독대하며 정무 현안을 조율하였습니다. 이어 11월 18일, 그는 각 정파에 화폐개혁 및 임금체계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사부로프보다 훨씬 부드러운 말씨로 모든 이의 의견을 경청하는 듯한 42세의 젊은 실세 쿠즈네초프는, 실은 훨씬 교묘한 방식으로 “한반도-만주 극동거대공업지대” 개발 촉진에 저해될 것이라 ‘판단되는’ 의견들을 무릎꿇릴 계획이었습니다.
사로당의 박현우, 노농당의 신지훈, 여운형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주아문을 김삼룡 공안위원장과 함께 부른 쿠즈네초프는 통역을 통해 정파 지도부가 부재한 자리인 만큼 자유롭게 의견을 말해 달라고 했습니다. 우선 “국가의 신뢰와 존엄이 인민의 노동가치를 통해 실현되어야 한다”며 상품본위 단일화폐안과 노동시간 기준 임금제를 주장한 주아문의 의견에 대해 쿠즈네초프는 이에 “계획의 일관성과 실효성”이야말로 국가의 존엄성을 뒷받침한다고 답하며, 상품본위 화폐안이 가진 불안정성과 산업개발 측면의 리스크를 지적했습니다.
이어 자신이 자본주의 경제의 전문가라고 밝히며 “노동자가 직접 관리하는 기업이 정당한 경쟁을 펼쳐 경제적 효율을 극대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 신지훈의 의견은 ”그럼 공장위원회가 ’붉은 완장을 찬 이사회‘로 변질될 뿐“이라고 일축되었고, ”노동시간을 기준으로 임금을 분배하되 생산량 등에 따라 인센티브를 부여하자“는 박현우의 주장 역시 ”노동자의 근면함을 보상하려면 생산량 기준 임금제(피스레이트)를 도입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쿠즈네초프의 반박에 직면했습니다.
“한국은 더 이상 실험실이 아니라 민주진영 전체의 전략적 공업중심지로 거듭나야 할 요충지”라고 선언한 쿠즈네초프는 특히 신지훈의 이윤 중심 임금제에 강한 반대 의사를 밝히며, 공장위원회가 경영성과 중심으로 운영된다면 공공재 개발이 외면받고, 산업 간 이윤율 차이로 인해 노동귀족화가 발생할 수 있음을 경고하였습니다. 이에 주아문은 진동하는 감정을 억누르며, 현재 대한민국의 유통 및 행정 인프라 미비 속에서 배급표 중심 이중통화 체제는 민심을 잃고 암시장을 조장할 수 있다는 현실적 우려를 피력했습니다. 그는 투명하고 예측 가능한 유통체계야말로 국가 신뢰의 기반이며, 상품본위화폐는 계획경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작동 가능한 틀로 만드는 건널목이라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쿠즈네초프는 “신뢰는 통제가 아니라 독재에서 나온다”며, 다만 그것이 “수학이나 공식이 아닌, 고려 노동계급의 독재이기를 바란다”고 단언했습니다.
박현우는 배급제를 강력히 비판하며 쿠즈네초프에게 격앙된 어조로 항의했습니다. 그는 “배급화폐를 받은 인민이 그것을 자신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으로 인식하겠는가, 아니면 국가의 통제로 받아들이겠는가”라며, 배급제야말로 자본론이 경계한 반인간적 체제라 주장했습니다. 김삼룡은 무려 소련 “2인자(즈다노프) 파벌의 2인자”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박현우의 발언에 사색이 되었지만, 쿠즈네초프는 의외로 냉정한 태도로 대응하며 “노동을 통해 생활이 보장된다면 당연히 보상 아니겠는가”라고 단호히 답하였습니다.
과열된 분위기를 얼른 식히려던 주아문은 쿠즈네초프의 ‘계급 독재’ 발언에 동의한다는 입장을 밝히며, 배급표가 아닌 노동자 중심의 가치 창출에 기반한 통화체제를 제안했습니다. 그는 대내 화폐와 대외 무역화폐를 분리하여 설계할 것을 주장하였고, 이중화폐제 하에서 안정적이고 계획 가능한 경제 시스템을 구축하겠다는 입장을 피력하였습니다. 그러자 쿠즈네초프는 이 ‘노동화폐’ 체계를 높이 평가하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쿠즈네초프는 박현우와 신지훈의 급진적 발언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각각 ‘사회파시즘’과 ‘기계론적 오류’라는 레토릭을 차용하여 유보적 경고를 전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노동시간 기준 기본급에 필수재 가격 고정을 연계하고, 대외결제에는 생산성과 태도 등 노동자의 공헌도를 반영한 인센티브 지급 체계를 제안했습니다. 이는 실질적으로는 소련의 체르보네츠-소브즈낙 제도와 유사한 구조로, ‘인민폐’와 ‘무역환’이라는 두 개의 화폐를 운용하되, 둘 모두 ‘원’을 단위로 하되 교환비율은 매일 조정하여 발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쌀 10g을 기준으로 1원이라는 고정가치를 부여하되, 그 외 품목의 기준가격은 변동 가능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결국 국무원에는 쿠즈네초프 주도의 이중화폐 체계가 그대로 상정되었고, 노동자는 기본급만으로는 생계가 빠듯해 성과급을 통해 가족 생계를 꾸릴 수밖에 없는 구조가 형성되었습니다. 신지훈과 박현우는 더 이상의 반론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의사를 표했습니다. 쿠즈네초프는 이를 의외로 여겼고, “내 생애 가장 큰 업적”이라며 기뻐했습니다. 이후 김삼룡은 두 사람에 대한 직접적 징계를 꾀하지는 않았지만, 박헌영에게 즉시 이상이가 제안했던 ‘근로인민당’ 창당 구상을 보고하며 대응에 나섰습니다. 이는 민자련의 중심을 허헌이 아닌 여운형에게 다시 집중시키기 위한 정치 재편의 신호탄이 되었고, 박헌영 역시 이에 적극 호응하였습니다.
경제 계획이 일단락된 후, 국내 정치 지형도 재편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공산당과 족청은 전농과 농협 간의 갈등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하였으나, 각 농민 단체들이 참여하는 ‘농민평의회’ 설치에 원론적으로 합의하였습니다. 사회노동당은 구 청우당-인민당원 중심의 ‘노동자파’와 구 기독사민당-일부 천주교계의 ‘농민파’로 분열되었으며, 공산당 콤그룹계의 이강국은 이를 두고 “룩셈부르크와 부하린의 결별”이라며 조소를 보냈습니다.
한편, 사회민주당원들이 대거 민족자주연맹에 입당하여 여운형에게 지지를 보내자, 허헌은 전당대회 불출마를 선언하였고, 여운형은 97.7%의 지지율로 위원장에 복귀해 당명을 ‘근로인민당’으로 변경하였습니다. 명목상 민자련 소속이던 유자명, 정화암 등 아나키스트들은 이를 ‘전체주의’라 비판하며 고려사회혁명당을 창당하고, 박열을 통해 별도의 재일조선인 귀향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한편 공산당은 대한노농당 임정계와 연합을 시도하였으나, 평등 개념과 혁명 전략의 차이로 협상은 진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박헌영과 김삼룡 등은 이들이 국가 권력을 통한 가치 실현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협력 가능성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1948년 1월, 소련이 기술경제협력기구(STЭС) 창설을 발표하였고, 한국은 창립국으로 가입하였습니다. 중국은 가맹을 보류하고 옵저버 자격으로 참여하였으며, 쿠즈네초프는 왕밍을 중국 공산당 동북지구당 총서기로 앉히며 영향력을 확대하였습니다. 이는 모스크바가 한국을 사회주의권의 주요 산업중심지이자 한반도(북부)-남만주 중공업지대의 조종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며, 졸지에 우선순위에서 밀린 중국과의 갈등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16.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전조선과도입법의원 출범 후 3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일제 치하의 부역행위를 본격적으로 조사·처벌하기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설립 논의는 오랫동안 답보 상태에 머물렀습니다. 미소군정 시기 이미 상당수 우익 친일파가 각종 범죄 혐의로 단죄되었고, 살아남은 이들은 좌익 세력으로 전향해 좌익 제정파의 중심 실무인력으로 포섭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오직 대한노농당 내 한독당계 인사들만이 부역자 처벌에 적극적 입장을 견지했고, 이들의 요구는 정부 수반과 공산당 지도부조차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압력이었습니다.
1948년 8월 28일, 한독당계 의원들이 의정원에 제출한 ‘반민특위 설치 결의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습니다. 결의안은 구체적 처벌 범위는 명시하지 않은 채 설치만 촉구하는 형태였지만, 각 정파들은 이 결정이 한독당계의 단계적 전략임을 알면서도 여론을 의식해 찬성표를 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특별법 기초위원회가 꾸려지고, 가장 ‘깨끗한’ 한독당계가 논의를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1949년 1월 5일, 반민특위 기초위원회에서 제시된 <반민족행위 처벌법> 초안은 사형 및 재산몰수 규정이 포함되었으나, 실제로는 형량 기준이 온건했습니다. 그러나 핵심은 ‘공민권 무기한 정지’ 조항이었습니다. 이는 부역자들이 평생 공직이나 정당 직책, 선거 참여에서 영구 배제된다는 의미로, 좌익 전향 인사들을 포함한 ‘반민족행위자’의 정치적 퇴장을 상징하는 조치였습니다. 초안을 작성한 김의한은 이것이 복수나 조리돌림이 아닌, 민족적 최소한의 정의 실현임을 강조했습니다.
이상이는 초안이 시행될 경우 공산당, 특히 중앙파가 유진오, 신태악, 김한경, 김기진, 현영섭 등 이론가와 언론인, 문화예술계의 최승희, 황철, 군 내부의 최남근 등 중추 인사를 모두 잃게 된다는 사실을 곧바로 파악했습니다. 박현우 또한 사회노동당 역시 인정식, 고경흠 등 주요 이념가의 공민권 박탈은 물론, 천도교·개신교·천주교계까지 대대적으로 부역자 조사가 확산되면 사로당 전체가 “매국노 정당”으로 낙인찍힐 위험을 예견했습니다. 이에 허경훈은 ‘우익’도 김성수같은 독립운동 경력자까지 잃게 될 수 있다고 슬쩍 떠봤지만, 김의한은 “공은 공, 책임은 책임”이라며 단호하게 책임 규명을 주장했고, 허경훈은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습니다.
신지훈은 정파 ‘두목’ 이승만이 자신의 측근인 일민계 부역자들을 반드시 보호할 것임을 간파하고, 도덕적 우위에 집착하기보다는 한독당의 강경한 공민권 박탈론을 어떻게든 저지해야 할 입장임을 깨달았습니다. 신지훈은 김의한 등 한독당계에 반민특위의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공민권의 영구박탈은 인권 원칙과 국제규범에 어긋나며, 일제의 파시즘적 수단을 답습하는 결과가 될 수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그는 공민권이라는 천부인권은 박탈하지 말고, 대신 형사처벌을 강화하는 방향이 더 정당하다고 주장했고, “일제와 뭐가 다르냐”는 그의 한변은 돌부처처럼 원칙주의적이던 김의한조차 흥분시켰습니다.
이상이는 반민특위가 시행될 경우 당 중앙파가 큰 피해를 입을 것이라 우려하며, 이승만과의 연대를 통한 특별재판소 설치와 처벌 방식 주도권 확보를 제안했습니다. 이를 보고받은 박헌영은 소련 검사 출신 방학세와 서울검찰청의 오제도, 선우종원을 소개시켜 주었고, 그들은 이른바 ‘보도연맹’이라는 조직을 만들고 부역자들을 명부에 올려 공개적으로 반성하게 하며 “공산당과 이승만 계열이 ’누가 죄인인지‘를 결정케 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허경훈은 이 계획이 예조프식 비밀 숙청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고 격렬히 반발하며, 오히려 공개적 인민재판과 적색테러를 강하게 옹호했습니다. 그는 “부역자를 좌우익 가리지 않고 공개적으로 단죄해 민중의 지지와 명분을 얻어야 한다”며, 오히려 맹렬한 사회주의적 열정으로 직접적 처벌과 공개적 단죄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허경훈의 말에 감동받은 방학세는 고개까지 숙이며 적극 동의했고, 대학에서 폭력 소요를 벌이는 극좌 청년단체들을 동원해 정파를 가리지 않는 ‘적색 테러‘를 펼치는 안은 정말로 채택되었습니다.
한편, 이승만계의 대표로 이 비밀회의에 참석한 신지훈은 자신이 이 논의에 관여했다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입을 수 있음을 날카롭게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허경훈이 공개적 적색테러와 인민재판을 강하게 주장하자, 그로 인해 이승만 측근 내 부역자들까지 대거 제거될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면서 신지훈 자신에게는 오히려 정치적 이익이 돌아올 수 있음 역시 빠르게 간파했습니다. 결국 그는 회합 참석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칠 것을 요구했고, 허경훈 등도 이를 수용하며 서로의 이해관계를 지켜주었습니다.
한편 권가연은 반민특위 국면에서 사로당과 종교계의 도덕적 주도권을 확립하기 위해 인정식·고경흠 등 당내 주요 인사들이 이미 각오를 가지고 조사에 임할 것임을 확인했습니다. 천도교계에 대해서는 원로 오세창을 직접 찾아가 사로당이 주도적으로 교단 내 친일파 처벌을 관철할 수 있도록 조력을 요청했으며, 오세창 역시 정치적 이해관계를 넘어 민족신앙의 참된 부활을 강조하며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권가연은 오세창과의 대화를 조봉암, 김기전, 김달현 등 사민당계와 공유하며 강경한 친일파 숙청 의지를 피력했고, 기독교계에는 박현우와 협의해 새 교단 창설 대신 초대교회 정신의 사회실천과 결속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노선을 제안하였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에 힘입어 가톨릭민주연맹은 각종 진보적 사상을 바탕으로 박현우의 “초대교회 부활” 구호에 호응했고, 해방 이후 소멸되었던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가 “한국교회협의회(한교협)”로 재편되어 한국 가톨릭·정교회까지 아우르는 연대가 이루어졌습니다. 권가연은 당내 정책 토론기구 신설 및 오세창과의 논의 결과를 공유한 뒤, 사로당의 모든 정파에 근로인민당과의 합당을 제안했고, 주요 구성원 대부분이 여운형 중심의 통합에 찬성함으로써 좌우 갈등을 완화하고 당의 단결력을 크게 높였습니다.
회의장에서, 주아문은 영구적 공민권 박탈이라는 원칙을 고수하되, 10년 경과 후 복권위원회 심사를 통해 일정한 기회를 부여하자는 절충안을 제시했습니다. 이에 신지훈은 복권위원회 구성의 공정성과 정치적 흥정으로 전락할 위험성을 비판하며, 공민권 박탈 대신 공개 사과, 친일인명사전 편찬, 사회봉사 명령, 재심 절차 강화 등 제도적 대안을 주장했습니다. 비공개 회합에선 현실적 이해득실을 셈하다가도, 공개적 논쟁에선 인권과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명분 싸움에 집중하던 그는 공민권 박탈이 세계인권선언에 위배된다는 국제적 시각을 내세웠지만, 신생 한국에서 ‘공민권 영구 제한’이란 조치가 식민지배의 역사와 민족적 상처에 비추어 오히려 정의와 사회적 합의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현실적 논리도 만만치 않게 대두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박현우와 권가연은 각각 기독교적 용서의 논리, 혹은 비국민 선언의 위험성을 근거로 과도한 처벌을 경계하며 종신형·무기징역·재산몰수 등 다른 대안을 제시했으나, 김의한은 정의 실현과 정치적 재참여 금지의 필요성을 단호하게 역설했습니다. 논쟁이 거듭될수록 사면복권심사위 설치 등 다양한 절충안이 논의됐고, 허경훈은 사회혁명당의 아나키스트들에게 복권심사를 맡기자는 대안까지 내세웠습니다. 결국 처벌 기준을 세부화하고 사면복권심사위원회가 처벌 대상자들의 공민권 회복을 심사하게 하는 타협안이 통과되면서, 반민특위는 드디어 출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출범한 반민특위에서는 특위의 활동을 도울 특별경찰대를 신설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친일경찰이 이미 숙청된 상황에서 불필요하다’는 공산당 측 논리에 따라 무산되었습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듯, 이상이의 강력한 지휘 아래 전대협 등 청년조직들은 허경훈 시기와 달리, 조직적이고 군사작전급의 적색테러를 감행했습니다. 이들은 공개 퍼레이드, 모욕적 고깔, 분장 등 수치스러운 방식으로 부역자들을 조리돌림했으며, ‘물리적 위해 최소화, 최대한의 모욕’이라는 방침 아래 좌우를 가리지 않고 예술인·문필가·종교계 인사까지 대상을 넓혔습니다. 이 과정에서 좌익 청년세력의 예상치 못한 과감함에 김의한조차 당황했고, 여운형은 경찰을 투입해 학생 시위를 진압해야 했습니다.
이에 좌익 청년들은 문필투쟁으로 전술을 전환하였고, 반민특위 창설에 제동을 걸었다고 여겨진 신지훈은 공개적으로 ‘미제 간첩’ 비난을 받으며 조리돌림의 표적이 되었으나, 실제로는 앞선 허경훈, 이상이와의 ‘거래’대로 이승만의 신뢰를 받는 최측근 인사가 되었습니다. 주아문이 우려하던 국군 내 부역자 숙청 역시 구 만주군·국민혁명군·한독당계 등 다양한 세력이 상호 견제하며, 내분을 피하는 선에서 정치적 조정을 이뤄냈습니다.
한편 천도교단은 오세창의 주도로 정치활동 중단 및 종교 본연의 역할에 복귀함으로써 청우당계 해체와 천도교의 민족종교적 재정립을 실현했고, 개신교·천주교는 내부 자정과 교단 재편의 국면을 맞았습니다. 근로인민당에 흡수통합된 사회노동당 중 좌파는 몽양계의 주축으로 자리잡았고, 기독교계(우파)는 사실상 당내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조직이 되어 다른 당처럼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많은 논쟁을 일으켰던 사면복권심사위원회는 공산당 주도의 적색테러와 민족주의자들의 곱지 않은 눈초리 속에 실제 설립도 되지 못하고 좌초되었습니다. 즉, 민주적 참여의 논리보다는 민족적 배제의 논리가 우선적으로 적용되었던 것이지요.
17. 충무 사태
1949년 4월 28일, 연합군최고사령부(SCAP)는 기존 조업한계선을 뒤집고 독도를 포함한 동해 주요 어장을 일본 어선의 조업구역에 포함하는 지침을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라 일본 어선들은 한반도 연안까지 진출했고, 분노한 한국 어민들은 ‘국토수호애국자경단’을 조직해 실력 행사에 나섰습니다. 6월 1일, 자경단은 독도에 상륙해 태극기를 게양했으나 일본 해군에 의해 체포되고, 석판과 국기가 파손·압수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국무원은 ‘충무 2호’를 발령했고, 명목상 국가원수인 의정원장 이승만은 대한민국이 준전시상태에 돌입했음을 선포했습니다.
이후 중앙청 지하 지휘통제소에서 열린 회의에서 이상이는 즉시 일본에 선전포고를 주장했으나, 이승만파의 임병직 외무부장은 일본이 주권국가가 아니므로 이는 곧 연합군총사령부(SCAP)에 대한 전쟁 선포와 같다고 경고했습니다. 뒤이어 제안된 ‘특별군사작전’을 통한 제한적 선제타격 역시 사실상 미국과의 전쟁 행위를 의미했기에 반려되었죠. 박현우는 외교 협상을 통해 일본과 해안선을 확정하자고 제안했고, 이승만은 즉각 미국과의 비선 접촉을 지시했습니다.
신지훈과 박현우는 이승만의 지시에 따라 도쿄에서 미국 하원의원 월터 주드를 비공식 접촉했습니다. 극렬 반공주의자면서도 진보적 성향을 가진 주드는 회담 초반 독도(리앙쿠르 암초) 문제를 ‘사회주의·국수주의 정권의 공세적 외교’로 규정하며, 이를 군사 거점화하려는 의도가 아니냐고 추궁했습니다. 신지훈과 박현우는 독도가 역사적으로 한국 영토임을 주장하며, 군사적 목적이 아닌 어업·기상 관측 거점으로 활용하겠다고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주드는 ‘공해 자유 원칙’을 내세우며 영유권 주장을 일축하고, 대신 한국과 일본의 어업 쿼터를 설정하는 절충안을 제시했습니다.
이 제안은 현재의 어업 기술력 차이로 일본에 유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높았기에, 신지훈은 장기적 협상으로 미루자고 우회적으로 대화 종료 의사를 밝혔습니다. 이에 주드는 공해상 군사행동이 한국의 운신 폭을 좁힐 것이라 경고했습니다. 물론, 이 협상 결과를 둔 국내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이상이는 일본 폭격 대신 ‘독도 해전’을 제안하며 강한 반일 정서를 자극했고, 중앙청 지하 벙커는 순식간에 구호로 가득 찼습니다. 허경훈은 일본 내 여론이 독도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점을 파악한 뒤 일본과의 비밀 접촉을 주장했고, 이를 통해 전 대화숙장이자 현 일본 우익 중의원 나가사키 유조와 연결되었습니다.
나가사키와의 회담에서 범민련 위원장 이상이는 재일조선인 전원에게 한국 국적을 부여해 더 이상 일본공산당의 게릴라 투쟁을 걱정하지 않게 해주겠다는 급진안을 제시했습니다. 나가사키는 이에 기술자를 비밀리에 파견해주겠다며 화답했고, 심지어 동해상에서 해전이 벌어지더라도 묵인하겠다는 의사까지 내비쳤습니다. 하지만 허경훈은 “동해 해전”이 곧 일본 우익의 해군 재무장을 불러올 것이라는 점을 직감했고, 결국 나가사키와의 밀약은 “비군사적 충돌” 묵인, 재일조선인 국적 부여, 일본 기술자 파견 정도로 정리되었습니다.
한편, 이승만은 임병직을 통해 발언을 외교적으로 정리하며 해상 “주권선” 선포 방안을 꺼냈습니다. “한국 영토의 지리적 연장인 대륙붕 역시 한국의 주권이 미치는 영역”이라는 주아문의 논리는 타고난 외교관인 이승만의 손을 거쳐 “제국주의가 채 청산되지 않은 무정부적 국제정치 현실 속에서 약소국 대한민국의 생존을 위해서는 대륙붕 주권을 선언할 수밖에 없다”는 문장으로 재탄생했습니다.
권가연과 박현우의 서유럽 좌파-진보 기독교계 네트워크를 이용해 칠레, 노르웨이, 그리스 등 중소국가들을 잔뜩 끌어들인 한국 정부는 ”대륙붕 주권에 관한 제네바 선언“을 발표, 독도 근해는 물론 토카라 열도 근해까지 자신의 주권적 영역으로 삼았습니다. 당연히 일본 정부가 이에 동의할 리 없었고, 동해상에서는 양측 ‘해상경비대’ 간의 저강도 분쟁이 판을 치게 되었습니다.
활활 타오르던 해양경계-독도 문제를 한순간에 주변적 의제로 치워버린 것은 바로 소련의 핵실험이었습니다. 뒤이은 미국의 수소폭탄 개발 선언, 동해상에서의 한일 간 저강도 무력 대치, 재일동포 송환 문제와 관련한 일본 내 강제추방 조치 등이 복합적으로 얽히며, 서울은 국익 수호와 국제적 입지 확장을 동시에 추진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정부는 한편으로는 범민련과 일본적십자사의 접촉을 통해 인도적 송환 절차를 조율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원자력위원회 창설과 대륙붕 국제규범 창설 논의라는 장기 전략을 병행하는 방향으로 대처해 나갔습니다.
17-EX. 냉전 중도파
권가연은 제네바와 독일을 거쳐 독일 사민당 위원장이자 독일공화국 수상인 구스타프 뵐러와 회담을 가졌습니다. 이 자리에서 그녀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 출범 준비 과정과 서유럽 온건 사회주의 진영의 전략 방향을 직접 확인하였고, 이는 서구 좌파를 중심으로 한 ‘탈소련적 사회주의 연대’의 윤곽이었습니다. 권가연과 박현우는 이를 활용하여 비공식 채널을 통한 정책 교류망을 확장하였습니다. 근로인민당의 공식 SI 가입을 반대하였으나 굳이 권가연이나 박현우를 막지는 않은 여운형 덕에, 두 사람은 이를 사적인 인적 네트워크로 전환해 서유럽 온건 사회주의 및 진보 기독교 세력과의 협력을 넓혔습니다.
세계적 관점에서, 소련과 미국 모두에 비판적인 SI는 ‘냉전 중도파’로 국제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습니다. 애초 소련이 서구권의 냉전 공세에 맞서기 위해 준비했던 반미·반핵 전선 등 각종 평화 공세도, 소련의 핵실험 이후에는 이 중도파적 움직임에 흡수되었습니다. 특히 SI 가맹정당인 노르웨이 노동당 출신으로 초대 유엔 사무총장이던 트뤼그베 리가 미·소 양국 모두 꺼리던 이탈리아 내전의 휴전 협상을 성사시켜 3년간의 극한 대결을 종식시키는 데 성공하자, 전세계는 ‘냉전 중도파’가 비록 작지만 독자적인 행위자로 자리 잡았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E.E.샤츠슈나이더 허어니 ㅋㅋㅋㅋㅋㅋ ㄹㅇ 동구권간 입장이 갈라지고 중소결렬이 되는.....
+SI는..... 아예 좌익 파시즘을 불렀네요....
++이탈리아 사회주의 통일당은 포강-에밀리아 지역을 관할하는 이탈리아 공화국의 여당인가요?
@E.E.샤츠슈나이더 SI는 눈치가..(?)
@dnjdss 세상의 그 어떤 파시스트도 노동자 자주관리를 하지는 않았는데, 벌써부터 대충 이상하면 파쇼라 부르는 경향이.....
@렌지파일 이탈리아가 무솔리니와 최초로 전형화된 파시즘(...)이 나온 고향이니만큼 저런거에 발작하는게 있을겁니다 게다가 살짝 과대해석하면 대한민국 사회주의 통일당이 서울진군도 했고 말이죠(??)
+근데 좌익 파시즘에서 주장 자체는 한 적이 있다네요 근데 예시에서 나오는게 보수파와 군부와의 딜 성사로 없는 일이 되거나 아예 숙청당한....
@렌지파일 공산당은 파쇼와 제일 많이 싸웠으니까 이질적이면 적으로 간주하고 적 칭호 달아주는게 아닐까요 ㅋㅋㅋ
@렌지파일 현실에서 부엉거리는 부엉이들도 자기들에게 반대하거나 의견이 다르면 화짱조 아님 빨갱이라 하는데 크흐흐흠....
@dear0904 노선대립과 적대의 차이가 있죠(...)
@렌지파일 노선 대립도 적으로 간주하는 경우를 하도 많이 보다보니(???)
@dear0904 어허! 그런 말씀하시면 다음 이벤트가 진짜로 중소결렬이 되어버려요!(???)
@dnjdss 다음 이벤트…
https://namu.wiki/w/조선로동당%20중앙위원회%201956년%209월%20전원회의?from=조선로동당%201956년%209월%20전원회의
@E.E.샤츠슈나이더 여기서 끝이 아니라요?
@E.E.샤츠슈나이더 아니.... 드립이 진짜가 되는.....
@E.E.샤츠슈나이더 아니... 이게 현실이 될줄은 ㅋㅋㅋ...
@dear0904 근데 원역사에서 통일사회당이 SI의 회원였는데 여기에선 그냥 거의 원수지간이 되어버렸네요 ㅋㅋㅋ...
@dnjdss 결국 그걸 만든 사람을 조졌으니 그럴수밖에 없긴 하지만요 ㅋㅋㅋ
@dnjdss 넨니의 사회당과 톨리아티의 공산당이 합당한 정당이고, 알피나 구(롬바르디베네토)의 연립여당이자 파다노에밀리아나 구의 제1야당입니다.
@E.E.샤츠슈나이더 오호.....그렇군요 근데 전에 썼긴했는데, 진짜로 이탈리아가 반 연방주의자들의 미국을 실체화시킨 국가가 되어버렸네요
@dnjdss 파시즘에선 노동자 자주관리에 가장 가까운게 살로 공화국(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인데, 거기서는 경영평의회란걸 만들고 거기 노동자 대표가 참가할 수 있게 한 정도였습니다.
명색이 생디칼리스트라는 국민생디칼리즘 주장자들도 노동자 자주관리(소유권과 상관없이 노동자가 사업체를 직접 경영하는 제도 그자체)는 논한 적이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공산주의의 핵심이니까요
+ (파시 디 콤바티멘토는 진짜로 노동자 자주관리를 주장하긴 했는데 주장에서 끝납니다. 오토 슈트라서는 경영참여 쪽)
@렌지파일 돼지비계로 만든 살로 공화국은 있는데 왜 살코기 공화국은 없죠(?)
@렌지파일 오호.... 그렇군요
@차들어 홍차야 그 포지션은 소련이 가져갔습니다(???)
이상이와 신지훈의 운명도 권가연처럼 다이스로 정해지나요?
다음 이벤트가 아마 피날레라서, 끝나고 적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고보니 다음화에 올라갈 포트레이트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인건 같아지셨네요(??)
@dear0904 다음 이벤트가 꼬여서 소련군이 침공하면 모두가 포트레잇을 걱정하시게 될겁니다(?)
@로콘 괜찮습니다 ㅋㅋ 그러면 어떻게든 통일전선 마지막화 포트레잇을 볼거니까요(???)
@로콘 이렇게요? (…)
통합 보상으로…
경험치에 관계없이, 각자 원하는 능력치를 하나 골라 +1업할 수 있습니다.
다음 이벤트가 마지막이므로 신중히 선택해주시면 되겠습니다.
고민하다가 그냥 5화를 올려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