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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예수 십자가는 능력입니다.” 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예수 십자가는 능력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처음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습니까? 건강하고 부유하고 행복할 때였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 반대입니다. 우리가 가난하고 고독하고 병들고 괴로웠을 때 바로 그 때, 우리는 신앙에 대해 마음 문이 열리고 믿음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믿은 후에 우리는 축복을 경험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번영하게도 되었고, 건강도 얻었으며 인생의 여유 또한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다 보니까 처음 믿었을 때와 우리 생각이 많이 달라진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축복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었으며, 마치 그것을 나의 권리로 생각하고 우리는 그렇게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다수 유명한 목사님들의 메시지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당신들도 나처럼 예수를 믿어 성공을 누리세요. 당신들도 나처럼 기도하고 나처럼 헌신하고 헌금하면 내가 성공한 것처럼 당신들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유명한 교회가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교회가 크다는 사실 자체가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장한 것을 보니 뭔가가 있겠지!’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는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핀트가 빗나간 것입니다. 주소를 잘못 알려 주는 것입니다. 애초에 주님을 그렇게 만난 것이 아니고 애초에 그런 동기로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닌데 결과를 가지고 동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세요. 예수님을 믿고 성공하세요. 예수님의 능력을 믿으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이렇게만 가르친다면 세상에 예수님을 안 믿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안 믿는 것이 손해이기에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믿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다수가 예수 믿기를 거부한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들이 미련하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이들이 예수 믿기를 거부하는 이유는 오히려 우리보다 기독교를 더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는 역설적인 말이긴 하지만 기독교인들보다 비기독교인들이 십자가의 도를 더 잘 압니다. 다만 그것을 거부하고 싫어하고 저항하는 것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하나님은 약해 보입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전지전능하시다면 왜 좀 더 화끈하게, 좀 더 빠르게 세상 문제를 처리하지 않느냐?
왜 내 문제를 좀 더 빨리 시원시원하게 해결해 주지 않느냐? 내 문제는 고사하더라도, 하나님 당신의 문제조차도 확실하게 해결하지 못하지 않느냐?
세상의 많은 범죄자, 마약, 전쟁, 기근, 이단 사이비 등... 내가 하나님이라면 단숨에 보란듯이 처리할 텐데, 왜 하나님은 미적미적 거리시나? 하나님이 기적 몇 개만 일으키시면 대한민국 인구의 50%는 믿을 텐데 왜 그렇게 하시지 않느냐?’
여러분은 뭐 이런 생각 하신 적이 없으십니까? 그런데 우리 눈에도 분명 하나님이 약하고 무기력하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25절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 하나님의 약하심’ 여러분? 우리가 평소에 쓰지 않는 말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권세, 뭐 이런 말 쓰기를 좋아하지, 하나님의 어리석음, 하나님의 약하심! 이런 개념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생소합니다.
제가 오늘 설교 주제와 맞는 찬송가를 한 번 찾아 보았는데, 딱 맞는 찬송가가 별로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찬송가 뿐만이 아니라, 그 많은 찬양곡 중에도 십자가의 도를 노래하는 곡이 많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는 굉장히 놀라운 일이요, 중요한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그만큼 십자가의 도가 사람들이 깨닫기 어렵기 때문이요, 십자가의 도를 깨닫더라도 사람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십자가의 도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어리석음, 하나님의 약하심 즉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을 말하는 것인데 십자가의 도를 모르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이 눈에 보이질 않고 납득이 되질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독교의 진리는 십자가의 도에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잊지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게 맞습니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다만 하나님은 인생의 불편함, 인생의 모순, 인생의 시련을 제거할 목적으로 당신의 능력을 과시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십자가의 수난을 피할 수 없으셨습니다.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이 나를 지나가게 해 달라.’고 간구하셨지만, 그 잔은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잔을 마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잔을 통해서만 이루실 위대하고 선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같이 18절 말씀 함께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는 부적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가 부적 같은 힘이 있다고 생각해서 십자가를 드라큘라에게 보여주면 드라큘라가 무서워 할 거라 착각합니다.
또한 자동차 백미러에 십자가를 걸어 놓으면 사고를 예방에 줄 거라 오해합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그런 게 아닙니다. 십자가는 단지 금목걸이로 목에 거는 악세사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 바로 그 자체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능력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보면 연약하고 미련해 보이지만 도리어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나타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현재 당하고 있는 시련을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제거해 주시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믿는 하나님이 무기력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믿음으로 이끄시며 예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시고, 반드시 선한 결과를 이루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또한 여러분? 여기에서 ‘도(道)’라고 하는 것은 살 길을 추구하는 진리나 도리를 말합니다. 한 마디로 기독교의 출발은 십자가요, 기독교의 기초도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출발해야 부활이 나오고, 부활을 통해야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아야 이 땅에서 받은 사명을 잘 감당하다가 주 앞에 가서 칭찬과 상급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통해 십자가의 도를 온전히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십자가에는 어떤 능력이 있을까요?
첫째, 예수 십자가에는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18절에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온 인류가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로마서 3:23절과 24절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임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 나의 구주로 믿기만 하면 저와 여러분 모두 다 영생의 기쁨과 감격을 맛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
둘째, 예수 십자가에는 화목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두 개의 나무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세로목으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의미하고, 또 다른 하나는 가로목으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은 원수지간이었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끝없는 살인과 약탈,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로목과 가로목 중앙에서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십자가의 보혈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진정 하나님의 복된 자녀가 된 줄로 믿습니다.
셋째, 예수 십자가에는 치료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보면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마태가 인용하면서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여 이 자리에 건강이 나쁜 분이 계십니까? 눈을 들어 예수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위해 흘리신 보혈을 의지하면서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노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어느 순간부터 인가 회개의 눈물, 감사의 눈물이 터지고 생명의 기쁨이 솟구치면서 병 고침의 놀라운 역사가 반드시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넷째, 예수 십자가에는 승리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십자가는 패배의 상징이 아니라, 승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골로새서 2:15절에 보면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최후의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도 마침내 승리자가 될 것임을 분명히 약속해 주신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십자가의 능력을 믿고서 이 험한 세상을 담대히 헤쳐나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수 십자가의 능력을 통해 구원받고, 화목하게 되고, 병 고침 받고 마침내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구원, 화목, 치유, 승리! 그렇습니다. 이를 위해 주님이 우리를 예수 십자가로 부르십니다. 첫째로, 다같이 따라합시다. “주님이 우리를 예수 십자가로 부르십니다.” 26절 말씀 다같이 함께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많은 분들은 교회에 나오게된 동기가 마치 사람 때문인 것처럼 말들 합니다. 자기 스스로, 혹은 부모님이나 아내 때문에, 혹은 친구나 누구의 전도 때문에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고 말이지요.
아닙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할 것은 우리가 교회에 나온 것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저와 여러분을 불러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셔서 아무 공로 없는 이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어떠하다고 했습니까? 26절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여러분? 고린도 교인들은 대부분 신분이 낮았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의 구성원들 대부분은 천한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회당장 그리스보 같은 이도 있었고, 고린도 성의 재무를 보던 에라스도 같은 이도 있었습니다. 이 외에도 귀족 계층의 사람과 상류 계층의 사람들이 어느 정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숫자는 많지 않았습니다.
당시 고린도 시에는 노예가 얼마나 많았던지, 70만 명의 인구 중에 약 3분의 2에 이르는 숫자가 노예였습니다. 고린도전서 7:21절에 보면 고린도 교회는 이처럼 가난하기 짝이 없는 노예들이 많이 출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적으로 뛰어난 분들보다는 가난한 자, 병든 자, 여러 가지 고통의 문제를 안고 나온 자들이 교회의 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자들을 부르신 겁니다.
예수님이 참 메시아인지 알고 싶다고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통해 물어왔을 때 예수님은 뭐라 답변하셨습니까? “맹인이 보며 못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난다.”고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말씀을 더 하시기를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는 역으로 지식이 높은 자나 부자, 지위가 높은 자나 문벌 좋은 자들은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으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부르시지만, 많이 배웠고 많이 가졌다는 자들은 교만하기 때문에 그 부르심을 대부분 거절한 겁니다. 오직 가난한 자, 병든 자,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아온 겁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지금 현재 지위나 물질이나 능력 등 모든 것을 갖추고 있으면서 떵떵 거리며 사는 자들에게 십자가가 과연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그런 자들을 부르실 때에는 깨어지게 만드신 후 부르시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학벌이나 문벌이나 능력이나 모든 면에 있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부르실 때 다메섹 도상에서 눈이 멀게 하신 후 십자가를 체험하게 하신 겁니다.
그렇습니다. 모태부터 믿는 사람이라도 평안할 때는 십자가를 지식으로만 알 뿐 체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진로나 사업의 위기, 가정이나 건강의 위기를 만났을 때, 오직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는 순간, 바로 그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진정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야말로 하나님의 크신 복을 받은 행복한 주의 자녀들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좀 전에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교만입니다. 우리 주님은 교만한 자를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러므로 바로 그 교만을 예수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둘째로, 다같이 따라합시다. “교만을 예수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무슨 말입니까? 자기의 능력이나 세상 것들을 의지하지 말고 철저히 주님만 의지하라는 겁니다. 다같이 19절과 20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페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더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이 세상의 천한 자들, 멸시받는 자들, 없는 자들을 부르신 이유가 그들에게 예수 십자가의 능력을 부어 주심으로 세상 것으로 자랑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는 깊은 의도가 담겨 있다는 겁니다.
27절과 28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여러분? 우리는 이 사실을 로마 사회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그 당시 로마 영토에도 노예가 얼마나 많은지 6천만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 숫자는 전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되는 엄청난 숫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짐승 취급을 받았습니다.
여인들을 성희롱의 대상으로 삼기 일쑤이고, 가축처럼 시장에 내다가 사고 팔았습니다. 심지어 ‘심심해서’ 노예를 죽이는 사람도 있었을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노예들은 끊임없이 목숨 걸고 폭동을 일으키곤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노예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겁니다. 노예들을 통해서 로마가 복음화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짐승이나 다름없던 노예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함으로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외양간 같은 곳에 모여서 찬송 부르고 기도하는데 자기들을 학대하는 주인들을 위해서 그들이 기도합니다.
처음에는 로마 관리나 주인들이 기독교인들을 체포해서 고문하거나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심지어는 시민들의 구경꺼리로 원형경기장에서 노예들을 맹수와 싸우게 하기도 하고 끝까지 예수 믿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 자들은 십자가에 매달아 기름을 부은 후에 화형식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잔인한 로마 시민들은 그들이 살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이나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놀랍게도 기독교인들은 로마 시민들을 향해 욕하기는 커녕, 저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는 찬송을 부르면서 웃는 얼굴로 순교를 당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 당시 로마인들은 세계 일류 민족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높은 학문과 관용, 뛰어난 용맹과 예의범절이 가장 특출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짐승이나 다름없는 노예들이 예수님을 믿고 난 후, 그 무엇보다도 잔인하게 고문하고 살해하는 로마 시민들을 위해서 용서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모습 앞에서 그들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오늘 말씀 그대로 천한 것들, 멸시 받는 것들이 소위 귀하다는 자들을 너무나도 부끄럽게 만든 겁니다.
바로 그 때부터 로마인들은 무엇이 이들을 이처럼 변하게 만들었으며, 무엇이 그들을 그처럼 높은 수준의 인격을 갖춘 자들로 만들었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십자가의 능력이 이런 역사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들은 마침내 기독교에 의해 순식간에 깨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아의 교만을 철저히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 십자가의 능력을 온전히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 안에서 예수 십자가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셋째로, 다같이 따라합시다. (시작) “주 안에서 예수 십자가만 자랑해야 합니다.”
31절 말씀 다같이 함께 읽습니다. (시작)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에도 고린도 교회에는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들보다는 로마의 식민지 아래서 고통당하며 사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분들 중 일부가 자기들이 교회를 이끌어가는 기둥같은 인물이라고 착각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자들을 향해 엄중 경고하고 있습니다. 결코 세상 것을 가지고 교만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29절 말씀입니다.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고린도 교인들이 처음 은혜 받을 때에는 자기들 같이 천하고 부족한 인간들을 십자가 사랑으로 부르시고 그 능력으로 강하게 만들어 주셨음을 감사하고 주님의 은혜를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어느 새 첫 사랑을 잃어 버렸는지, 세상 것으로 서로 자랑하고 반목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동안 겸손히 충성하던 분들도 자기 공로를 내세우기 시작함으로 분열의 위기를 자초하게 된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교만을 앞세우고 있는 이 모습이야말로 너무 나도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야말로 자랑할 것이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십자가의 능력을 깊이 체험하고 난 뒤에는 지금까지 최고로 여기던 모든 것들... 율법이나 높은 학벌, 문벌이나 로마 시민권등을 다 배설물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왜 그랬을까요? 자기가 교만할 때에는 하나님이 전혀 역사하지 않으셨는데, 자기 자신이 한없이 연약한 존재임을 고백하고 주님만 전적으로 의지할 때에는 성령 하나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심을 온전히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4절과 5절 말씀입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날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고난주간에 사도 바울처럼 세상 모든 자랑은 배설물처럼 버리고, 오직 예수 십자가만 자랑하겠노라 다시금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도 성령의 능력으로 더욱 강하게 무장시켜 주심으로 이 험한 세상을 기쁘고 즐겁게 찬송 부르며 넉넉히 헤쳐 나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받는 우리에게는 능력인 줄 믿고서 주 안에서 예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