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년 |
월 일 |
약 사 |
|
현종 즉위년(1659) |
탄생. 부 장형, 모 윤씨 | |
|
숙종6년(1680) |
4월 |
경신환국으로 서인집권 |
|
10월 |
인경왕후 사망. 숙종 궁녀 장옥정과 만남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가 장씨를 내쫓음. | |
|
숙종 7년(1681) |
5. 2 |
인현왕후 민씨 왕비 책봉 |
|
숙종 9년(1683) |
12. 5 |
명성왕후 사망 |
|
숙종 12년(1686) |
12. 10 |
장씨 재입궁. ‘숙원’으로 책봉 |
|
숙종 14년(1688) |
‘소의’로 봉함 | |
|
12. 27 |
왕자 윤(昀, 경종)을 낳음 | |
|
숙종 15년(1689) |
1. 11 |
윤을 원자로 정함 |
|
1. 15 |
원자를 종묘사직에 고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승격 | |
|
2. 2 |
장씨의 3대 추증/ 기사환국으로 남인 집권 | |
|
5. 2 |
인현왕후 민씨 폐위 | |
|
5. 13 |
장씨를 ‘왕비’로 책봉하고 종묘사직에 고함 | |
|
숙종 16년(1690) |
6. 16 |
원자 윤, 세자 책봉(3세) |
|
10. 22 |
왕비 장씨 정식 책봉례 거행 | |
|
숙종 20년(1694) |
4. 1 |
갑술환국으로 서인 집권 |
|
4. 12 |
민씨 복위와 장씨 폐위 | |
|
숙종 27년(1701) |
8. 14 |
인현왕후 민씨 사망(35세) |
|
9. 25 |
무고의 옥 발생 | |
|
10. 7 |
숙종은 후궁이 왕비에 오르지 못하도록 명함 | |
|
10. 10 |
장씨 사사(43세) | |
|
숙종 28년(1702) |
1. 30 |
양주 인장리에 장사 지냄 |
|
숙종 45(1719) |
3. 12 |
광주 진해촌으로 천장 |
|
경종 2년(1722) |
10. 15 |
장씨를 추존하여 ‘옥산부대빈’으로, 사당은 ‘대빈묘’라 하여 교동의 경행방에 세움 |
|
융희 2년(1908) |
7. 23(양) |
대빈궁이 육상궁 안으로 옮겨짐 |
|
1969년 |
장씨의 무덤을 경기도 광주에서 서오릉 안으로 이장 |
“「왕을 낳은 후궁들」 / 최선경, 김영사”를 토대로 재구성
장희빈은 본관은 인동(仁同)이고, 뒤에 의정부 영의정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에 추증(追贈)된 아버지 장형(張炯)과, 어머니는 파산부부인 윤씨(坡山府夫人 尹氏) 사이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강세황의 초상화를 바탕으로 해 재구성한 장희빈의 얼굴/
조선왕조실록에도 '자못 얼굴이 아름다웠다.'고 표현되어 있다고 한다.
어려서 아버지가 죽어 당시 조선의 거부였던 당숙(아버지 4촌) 역관(驛官) 장현(張炫)의 후원을 받아 장현이 집에서 성장하였다. 어려서 나인(內人)으로 궁에 들어가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1686년(숙종 12) 숙원(淑媛)이 되었으며, 1688년 소의(昭儀)로 있을 때 왕자 윤(昀 : 뒤의 경종)을 낳았다.
이듬해 1월 숙종이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의 반대를 물리치고 윤을 원자로 책봉함에 따라 내명부 정1품 희빈으로 승격되었다. 그해 2월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권하고 남인이 집권했으며, 7월에는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가 폐위되었다. 1690년 윤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왕비로 책립되었다.
1694년 서인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爀) 등의 민비복위운동을 계기로 남인이 옥사를 일으켰으나 숙종이 오히려 남인을 제거하고 서인을 재집권시킨 갑술환국이 일어났다. 그해 4월 민비가 복위됨에 따라 다시 희빈으로 밀려났고, 오빠 장희재(張希載)와 함께 복위를 도모했으나 무산되었다.
1701년 민비가 병으로 죽자, 궁인·무녀 등과 함께 민비를 무고(巫蠱)했다는 서인의 탄핵을 받고 사사(賜死)되었다. 이후 남인은 몰락하며, 희빈장씨 및 남인에게 동정적이었던 남구만(南九萬)·최석정(崔錫鼎) 등 소론도 함께 몰락하게 되고 노론이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 숙종은 이후 빈을 비로 승격하는 것을 법으로 금했다.
흔히들 장희빈의 라이벌로 인현왕후를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나는 달리 생각한다. 나는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1670-1718)가 장희빈의 진정한 라이벌이었다고 생각한다. 장희빈을 남인들이 후원하였다면, 노론에서는 숙빈 최씨를 후원하였다. 숙빈 최씨는 장희빈을 겨냥한 노론에서 후원할 정도이니 미모도 뛰어났을 것이다.
숙빈 최씨는 장희빈보다 11살 아래다. 장희빈이 죽었을 때 숙빈 최씨는 갓 30살이 넘은 나이였다. 숙종을 중심으로 생각하여 43살의 지는 꽃 장희빈과 32살의 만개한 꽃 숙빈 최씨를 대비하는 것은 불온하고 지나친 상상일 뿐일까?
장희빈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갔다. 장희빈은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 자랐고, 그녀가 사사(賜死)된 이후 장희빈의 친정은 어떻게 살았을까? 우리는 장희빈 친정 묘역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3. 장희빈의 친정 사람들
1) 대표적인 역관 가문
인동 장씨 집안은, 조선 중기와 후기 사이에 주목할 만 한 중인 가문으로 꼽힌다. 장희빈 친정 집안에서 처음으로 역관이 된 사람은 장희빈의 증조할아버지인 장수(張壽)다. 장수는 관직이 가의대부(종2품)에 이르렀고 뒤에 장희빈이 왕비가 되자 좌의정에 추존되었다. 이들 중 초기에 특히 활약이 컸던 사람이 바로 장희빈의 할아버지 장응인(張應仁)이었다.
조선 시대 외교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 통문관지에는 역관으로서 크게 활약한 사람들이 소개돼 있는데, 장응인의 이름도 여기에 있다. 이에 따르면, 장응인은 “품격이 우아 호방하고 의협심이 있으며, 또 문필에 능하여 중국어를 잘했다. 번번이 중국 사신과 차관(差官)이 오면 차비관으로서 말을 잘 하였으므로 비록 탐욕스런 중국 사람이라도 감히 함부로 요구하지 못하였다.”는 내용으로 보아 그의 능력과 됨됨이를 짐작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기록에 의하면 그는 시문(詩文)에도 매우 능했다고 하는데, 전해오는 시문은 없어 안타깝다.
장희빈의 할아버지 장응인의 무덤
장응인은 죽을 무렵 유언을 남겼는데, “나는 평생 동안 선한 사람 좋아하기를 친족 대하듯이 했고, 악한 사람 미워하기를 마치 원수와 같이 했다. 후세 자손들은 나의 이 말을 가슴속에 새겨 두어라.” 라고 하였다고 한다.
장응인 이후로 인동 장씨 집안에서는 20여명의 역관이 나왔는데 그중 역과에 수석으로 합격한 사람이 장희빈의 큰오빠 장희식(張希軾)을 포함해 7명일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장희빈의 가문은 할아버지 장응인과 당숙 장현 등 청나라 사신들이나 상대편 정부의 고위관리들을 주무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고, 청나라와의 관계를 잘 처리해서 좋은 평판을 얻고 있었다고 한다.
2) 부모
장희빈의 아버지 뒤에 의정부 영의정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에 추증(追贈)된 장형(張炯)과, 어머니는 파산부부인 윤씨(坡山府夫人 尹氏)이다.
장형의 첫째 부인은 영주부부인 고씨(瀛州府夫人 高氏)이다. 이분은 장희빈의 큰 오빠 희식(希軾)을 낳고 일찍 죽었다. 파산부분인 윤씨는 둘째 부인인데, 이분은 사역원 첨정(僉正, 종4품)을 지낸 윤성립(尹誠立)의 따님이다.
|
일부에서는 파산부부인 윤씨가 당시의 유력한 외척인 조사석의 노비였다는 등 조사석과 내연관계였다는 등 음해성 내용들이 여과 없이 유포되고 있다. 이런 주장에 대하여 난 참 가슴이 아프다. 역사에서 패배하여 주류사회에서 밀려난 것도 억울할 텐데, 별 생각 없이 지금도 그런 주장이 사실인양 인용하는 것은 역사의 패자에 대한 지나친 이지메가 아닐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역관이 아무리 중인이라도 재벌급에 해당하는 집에서 뭐가 아쉬워 노비를 정실부인으로 맞이했겠는가? 또한 조선시대는 노비들은 종모법(從母法)이 적용되었다. 즉 어머니가 노비면 자식들도 노비이다. 윤씨가 노비면 장희빈도 노비였어야 맞다는 얘기다.
또한 노비에서 환속이 되었다고 주장도 타당하지 않다. 낮은 신분 때문에 평생 왕실에서 무시를 당한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에 비하면 장희빈은 왕실에서 냉대를 받은 기록이 없다. 어머니가 천출이었으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조사석과의 내연관계라는 주장은 장희빈과 정적 관계에 있는 노론에서 주장한 것으로 신빙성 또한 떨어진다.
|
장형은 재산증식에 별 관심이 없었던 듯싶다(물론 그렇다고 가난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장희빈의 당숙처럼 나라의 거부로 성장하는 데 관심이 적었다는 뜻이다.). 장형은 아버지의 유언을 늘 품에 품고 다니며, 욕심내지 않고 거문고와 노래를 즐겼다고 한다.
장희빈 친정 부모(옥산부원군 장형, 어머니 파산부부인 윤씨, 장형의 첫 번째 부인 영주부부인 고씨) 무덤
일각, 특히 노론계열에서는 어머니 윤씨가 좌의정을 지낸 조사석(趙師錫, 1632(인조 10)∼1693(숙종 19))의 노비였다는 등, 조사석의 정부(情夫)였다는 등 악평이 많다. 이러한 악평은 실질적인 근거가 없다. 다만 장희빈 집안이 정치적으로 남인과 가까웠고, 남인들과 여러 가지로 정치적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악평은 여과 없이 지금도 인터넷을 떠돌고 있으며, 심지어 백과사전이라 칭하는 곳에조차 실릴 정도다.
3) 오빠 장희재(張希載)
?∼1701(숙종 27). 장희재는 장희빈이 성은을 입기 전에 자력으로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희빈이 숙종의 총애를 받음에 따라 금군별장 등을 거쳐 숙종 18년(1692) 총융사(摠戎使, 종2품)에 임명되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인현왕후(仁顯王后)가 복위(復位)되자 서인들로부터 희빈과 함께 인현왕후를 해치려는 음모를 꾸몄다 하여 탄핵을 받고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1701년 인현왕후가 죽은 후 희빈이 저주 · 무고한 사실이 발각되고 그 자신의 언문 편지가 발견되어 처형되었다.
장희재의 영혼무덤
4) 당숙(堂叔) 장현(張炫)
|
압록강 해진 후에 - 장현
압록강(鴨綠江) 해진 후에 어여쁜 우리 임이 연운만리(燕雲萬里)를 어디라고 가니는고 봄풀이 프르고 프르거든 즉시 돌아오소서
-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심양으로 볼모가 되어 갈 때 통역관으로 따라간 장현이 두 왕자의 신변을 염려하여 지은 시조. |
장현(1613년 - ?)은 1639년(인조 17년) 역과에 수석 합격하였고, 효종 때부터 숙종 때까지 40여 년 간 역관으로 활동하면서 이름을 날렸다.
중요 역관의 행적이 담겨 있는 통문관지에 따르면 장현은 “풍채가 좋고 사무 처리에 부지런하였다. 일찍이 뱃길을 경유하여 중국에 갔으며, 정축년(인조 15년)에 소현세자를 배종해 심양에 가서 6년 동안 머물렀으므로 저들의 정상을 자세히 알았다. 돌아와서 그 공로로 승자(陞資)하여 수임(首任-수석역관)이 되었고, 수임으로 있던 40년 동안 연경에 간 것이 30여 번이고, 여러 공무에 있어 그의 주선에 힘입은 것이 많았다. 벼슬은 숭록대부(종1품)에 이르렀고 여섯 번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고 한다.
「비변사등록」(숙종 1년 1675년)을 보아도 목래선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자금이 없어 곤란을 겪을 때 역관 장현이 사재를 털어 청국의 기밀을 탐지하는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나온다.
숙종 20년 실록에 의하면 “역관 장현은 청나라 사람이 내각에 비장했던 문서를 얻어왔으니 마땅히 품계를 올려줘야 한다.” 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실록에는 "역관장현 국중거부"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장현은 거부였다.
장현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 그의 아버지 장경인 옆에 묻혔다.
그러나 숙종 20년(1694년)은 인현왕후가 복권되고, 장희빈이 왕비에서 빈으로 강등된 해이기도 하니, 이해 윤5월 13일 장현은 절도유배형을 받는다. 이때 그의 나이 63세였으며, 그의 행적은 이후 실록에서 보이지 않는다.
4. 장희빈의 사사 이후 친정
장희빈 친정이 장희빈의 죽음과 함께 완전히 몰락했을 거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나보다. 정치적으로는 몰락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상당한 재력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또한 장희빈 사사 이후에도 유명한 역관들이 줄줄이 나온 기록이 있다.
장희빈 친정이 당시 재력을 모으기 쉬운 역관 집안이었던 데다, 숙종 임금은 무덤을 지키는데다 쓰라고 20결의 토지를 하사하기도 했다.
결이라는 단위는 넓이 기준이 아니라 토지 생산량을 기준으로 한 단위이므로, 최상급 토지는 약 3,000평, 최하등 토지는 약 9,000평 등 일정치가 않다. 20결이라면 최상급 기준으로도 6만평의 토지를 하사한 것이다.
장희빈과 장희재의 사형 이후 집과 토지, 노비들을 몰수했지만, 이후에 장형의 후손이 성장하면 돌려주라는 어명이 있는 것으로 봐 후손들은 이후로도 상당한 재력을 소유했을 것으로 보인다.
* 장희빈 친정묘역은 고양올레길 두 번째 코스에 있다.
고양올레길 찾는 사람들
http://cafe.daum.net/gyol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