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I love 안도 원문보기 글쓴이: ahndo
제 14강 나의 수필과 구조
제1부 수필이란 무엇인가.
1. 수필의 개념
수필이란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생각나는 대로 붓가는 대로 견문이나 체험, 또는 의견이나 감상을 적은 글을 말한다.흔히 수필을 essay의 역어로 생각하나 동양에서는 일찍부터 써왔다.
중국 남송 때 홍매의 '용재수필(74권 5집)'의 서문에 '나는 버릇이 게을러 책을 많이 읽지 못하였으나 뜻하는 바를 따라 앞뒤를 가리지 않고 써 두었으므로 수필이라고 한다'라는 말이 보이고, 한국에서는 연암 박지원의 연경 기행문 '열하일기'에 '일신수필'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보인다.
프랑스어의 에세(essai)는 '시도' 또는 '시험'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말은 '계량(計量)하다' '음미(吟味)하다'의 뜻을 가진 라틴어 '엑시게레(exigere)'에 그 어원이 있다. 영어의 essay는 프랑스어의 essai에서 온 말이다. 에세라는 말을 작품 제목으로 처음 쓴 사람은 프랑스의 몽테뉴이며 그의 '수상록'(1580)은 에세라는 제목을 붙인 서책으로서는 서양 최초의 저서이다.
어원으로 볼 때, 동서양의 수필의 개념은 거의 일치한다. 수필은 일반적으로 사전에 어떤 계획이 없이 어떠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의 느낌․기분․정서 등을 표현하는 산문 양식의 한 장르이다.
그것은 무형식의 형식을 가진 비교적 짧고 개인적이며 서정적인 특성을 가진 산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이야기한 홍매의 정의나 '수필은 한 자유로운 마음의 산책, 즉 불규칙하고 소화되지 않는 작품이며, 규칙적이고 질서잡힌 작문이 아니다'라는 S.존슨의 정의나, '수필은 마음속에 표현되지 않은 채 숨어 있는 관념․기분․정서를 표현하는 하나의 시도다. 그것은 관념이라든지 기분․정서 등에 상응하는 유형을 말로 창조하려고 하는 무형식의 시도다'라는 M.리드의 정의 등도 모두 대동소이하다.
수필은 그 정의가 좀 막연한 것과 같이 종류의 분류도 일정하지 않다. 수필을 에세이와 미셀러니(miscellany)로 나누는 이가 있는데 전자는 어느 정도 지적(知的)․객관적․사회적․논리적 성격을 지니는 소평론 따위가 그것이며, 후자는 감성적․주관적․개인적․정서적 특성을 가지는 신변잡기, 즉 좁은 뜻의 수필이 이에 속한다.
영문학의 경우를 전제로 하여 포멀 에세이와 인포멀 에세이로 나누는 이도 있는데, 인포멀이란 정격(正格)이 아니라는 뜻이므로 전자는 소평론 따위, 후자는 일반적인 의미의 수필에 해당한다.
또 중수필(重隨筆)․경수필(輕隨筆)․사색적 수필․비평적 수필․스케치․담화 수필(譚話隨筆)․개인 수필․연단 수필(演壇隨筆)․성격 소묘 수필(性格素描隨筆)․사설 수필 등으로 나누는 사람도 있다.
수필의 기원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다. 테오프라스토스의 '성격론', 플라톤의 '대화편', 로마시대의 키케로, 세네카, 그리고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등도 수필이라고 할 수 있으나 프랑스의 몽테뉴의 '수상록'을 수필의 원조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영국 수필의 원조는 그보다 17년 늦은 프란시스 베이컨의 '수상록'을 꼽는데 영국에는 그 이후에 C.램, W.해즐릿, L.헌트, T.드 퀸시 등의 유명한 수필가가 배출되었다. 특히 램의 '엘리아 수필집'(1823)은 시정인(市井人)의 여유와 철학이 깃들어 있으며 신변적․개성적 표현이면서도 인생의 참된 모습이 묘사되어 있고, 영국적 유머와 애상이 잘 드러나 있다.
한국에서는 김만중의 '서포만필', 편자․연대 미상의 조선초의 '대동야승', 유형원의 '반계수록', 그리고 고려시대 이인로의 '파한집', 최자의 '보한집' 등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근대 최초의 수필은 유길준의 '서유견문'(1895)이며, 이어 최남선의 '백두산 근참기', '심춘순례'(1927), 이광수의 '금강산유기' 등이 간행되었으나 이것들은 모두 기행문으로서의 수필이다.
그 뒤 김진섭의 '인생예찬', '생활인의 철학', 이양하의 '이양하 수필집', 계용묵의 '상아탑' 등이 나왔으며, 이 밖에 조연현․피천득․안병욱․김형석․김소운 등의 등장으로 한국의 수필 문학은 종래의 기행문적인 것에서 벗어나 다양하고 깊이 있는 인생 체험에서 우러나온 수필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이제부터는 실제로 수필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준비와 수필을 쓰기 위한 준비와 의미, 그리고 어떻게 써야 좋은 글인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문학 지망생이 처음 생각하는 것은 대개의 경우 시가 아니면 소설이다. 그러다가 여의치 않으면 수필이나 써보자고 한다. 수필이 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수필이 어떤 글인가를 모르고 하는 생각이다. 여하간 수필을 쓰고자 할 때에는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문장이 좋은 것을 읽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벽에 부딪힌다. 모범이 되는 글을 찾아 읽어야 하는데, 수필(에세이)이라는 이름이 붙은 베스트셀러면 문장이 좋은 것인 줄 안다. 이래서 첫걸음의 방향이 잘못 잡힌다.
문장에 재질이 있어도, 모범이 될 만한 글을 읽지 않으면 만권의 책을 읽어도 글다운 글을 쓸 수 없다. 좋은 글이 몸에 배지 않은 상태에서 쓰는 것은, 어둠 속을 헤매는 것과 같은 까닭이다.
최근에는 각종 문학 강좌에서 수필 강좌가 공개적으로 열리고 있어 쉽게 공부할 수가 있으나,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좋은 글을 찾아 읽는 일이다.
하지만 초보자는 좋은 글을 찾아 읽는 일이 쉽지 않다. 작자의 유명도나 또는 광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베스트셀러라는 것에 빠지기 쉬운 까닭이다. 따라서 좋은 글의 선택을 위해서는, 스승이나 선배에게서 소개 받는 것이 무난한 방법이다.
여하간 좋은 글에 의해 스스로 안목을 키워나가지 않으면, 그만큼 바른 길로 들어서는 일은 늦어진다. 수필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우선 문장이 돼야 하는 글이다. 따라서 좋은 문장을 가려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좋은 글을 대하는 일밖에 다른 길이 없다.
그렇다면 수필을 쓰고자 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소재를 만났을 때 수필은 시작된다.그러나 소재에서 오는 충동만으로 수필이 된다고는 볼 수 없다. 스스로 쓰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일단 생각해 보아야 한다. 쉽게 말하면, 남이 읽어서 의미가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의미란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용이 독자에게 얼마만큼 공감을 주겠느냐 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사회를 떠나 살 수 없다. 어느 시대이든 그 사회 속에 소속되어 살고 있으며, 사회적 유대와 인간정신에 의해 지탱된다. 수필에는 그런 정신이 담겨져야 한다. 말하자면 인간끼리의 공감하는 세계다. 수필이 신변 잡담의 차원을 넘어, 문학의 영역이고자 하는 이유는 이러한 요소가 들어 있는 것을 뜻한다.
수필에는 일정한 형식이 없다.도덕적 가치개념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무엇 때문에 썼는가를 모르게 쓴 글이 있다. 이 말은 독자를 설득해야 한다든가 요구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조그마한 얘깃 거리밖에 안되는 소재일지라도, 그것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과 생각하는 것이 인간적일 때, 수필은 비로소 가치를 지닌다는 얘기다.
이웃과의 사랑․고뇌․연민․시대적 우수(憂愁) 또는 비분(悲憤) 등이 내부에서 연소되어 나온 글이면, 이것이 독자에게 공감을 주는 글이며 의미를 지니는 글이 된다. 그러면 좋은 수필이란 어떤 것인가.
좋은 수필이 되자면 몇 가지 규범이 따르는데, 무엇보다도 문장이 솔직하고 소박해서 진솔성(眞率性)이 있어야 한다.사물을 나타내는 말에는 오직 그것에 맞는 말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진실을 나타낸다는 뜻이며 솔직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수필의 본질이다.
문장은 아름답게 꾸미려고 할수록 진실과 멀어진다. 꾸미는 글은 좋은 글이 될 수 없다. 수필의 문학성을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으나, 본질론으로 말해 본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소설이나 동화는 허구(虛構)이고, 시는 심상(心象)의 형상화라고 한다면, 수필이 지니는 문학성은 개인의 인격적 고백성에 있다.
이와같이 수필의 문학성은 1차적으로 개인의 인격적 고백성으로 독자를 감동시키는 데 있으나 그것은 내용과 함께 문장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작자의 사상과 감정이 내부에서 걸러지고 삭혀져서, 잘 익은 술처럼 향기를 내야 한다.
흔히 수필의 문학성을 서정성에 두고 있으나, 지적(知的)이거나 논리적이라 해서 문학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어떤 것이든 인간의 문제가 담기면서 공감을 주는 것이면 그것이 수필의 문학성이다. 그러면 좀더 구체적으로, 좋은 수필이 되게 하는 요건들이 어떤 것인가를 보자.
2. 수필가의 자질
작품에 반영되어 수필을 빛나게 하는 탁월한 인품이란 반드시 도덕적으로 높은 경지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예리한 관찰력과 풍부한 상상력, 해박한 지식과 심오한 사상, 뛰어난 예술 감각, 뚜렷한 개성 등 모든 방면에 있어서의 탁월성은 어느 것이나 좋은 수필을 쓰는 데 보배로운 자산이 될 것이다. 특히 뛰어난 해학은 값진 수필을 위해서 크게 도움이 되는 성격 특질이다.
수필가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바로 작가의 인품과 문장의 구성이라고 하겠다.표현되는 대상으로서의 나와 표현하는 문필가로서의 나는 수필을 구성하는 두 가지 기본 요소이다.
따라서 수필의 우열은 표현되는 대상으로서의 나의 우열과 표현하는 문필가로서의 우열의 결합에 의하여 결정된다. 만약 표현되는 대상으로서의 나의 사람됨이 탁월하고, 또 표현하는 문필가로서의 나의 문장력도 탁월하다면, 그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수필은 더없이 훌륭한 작품이 될 것이다.
수필에 있어서 인품과 함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작가의 문장력이라고 하겠다. 여기서 '문장력'이라는 말은 구상까지도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고 이해를 해야 한다. 자신의 체험과 사색을 들로 나타낼 수 있는 표현의 능력을 통틀어서 편의상 문장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떠한 인품이 탁월한 인품이냐에 대해서 견해의 대립이 있을 수 있듯이, 어떠한 문장이 좋은 문장이냐에 대해서도 견해의 대립이 있을 수 있다. 인품에 있어서나 문장에 있어서나, 탁월성의 기준을 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 것은 인간성과 문화적 전통일 것이다.
이와 아울러 수필가는 꾸밈없는 솔직성과 함께 평명성(平明性)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수필가가 자신의 인품이 탁월함을 과시하고자 하는 동기를 따라서 글을 쓸 때, 그 작품은 결정적으로 실패한다.
성현 군자연한 글뿐 아니라 자신의 박식이나 견문을 과시한 글은 독자에게 거부감을 일으킨다. 의도함이 없이 은연 중에 작가의 인품이 작품에서 풍길 때 독자는 기쁜 공감에 젖는다.
자신의 결함 또는 실패담을 솔직하고 꾸밈없이 다룸으로써 좋은 작품을 얻을 경우가 있다. 솔직함은 그 자체가 미덕일 뿐 아니라 마음의 여유와 결합하면 해학을 낳기 때문이다.
자기만을 위한 것이 아닌 모든 글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그 뜻이 독자에게 잘 전달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의미 전달이 잘 되지 않는 문장은 원칙적으로 좋은 문장이 아니다. 다만 높은 경지에 이른 작가는 더러는 탁월한 독자에게만 이해될 수 있는 글을 쓸 특권을 갖는다.
그리고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이 바로 독자들의 마음을 읽고 그에 맞는 문장을 써야 한다는 점이다. 즉 독자의 미적 심금에 와 닿는 문장이 좋은 문장이라는 것을 모르는 작가는 없을 것이다. 다만 어떤 독자층의 미감을 매혹하느냐가 문제다. 초보적 독자들의 미감과 잘 어울리는 문장을 세상에서는 흔히 미문이라고 부른다.
의도적으로 멋있는 글을 쓰고자 꾀하면 도리어 저속한 글이 된다. 평범한 듯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글이 좋은 글이다.
함축성과 간결성또한 수필가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수필은 결코 긴 글이 아니기 때문에 함축적인 언어 구사 능력과 함께 간결하게 문장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나름대로 길러야 한다.
즉 독자에게도 느끼고 생각할 여지를 남겨 놓는 글이 좋은 글이다. 모든 말을 다 해버리면 독자는 지루함에 빠진다. 함축은 수필의 생명이며 함축을 위해서는 문장이 간결해야 한다. 군소리는 글을 죽인다.
문장이 보편 타당성을 가져야 된다는 것은 문학인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기본이 될 것이다. 되도록 여러 사람에게 공감을 일으키는 글이 좋은 글이다. 자기 혼자의 정취나 감흥에 젖어 제멋에 도취한 글은 소수의 독자들에게만 매력이 있을 뿐 일반 독자들의 공감을 얻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수필은 여운이 백미인 문학의 한 분야라고 생각해도 된다. 그럴 만큼 수필에서의 여운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수필에서의 여운은 짧은 것 보다는 길면 길수록 좋은 것이다.
수필을 읽고 나서 마음속에 잔잔한 물결이 일면서 오랫동안 가슴울림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해보자. 문학의 정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여운이 길게 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수한 수필가가 될 것이다. 결론을 단정적으로 내리는 글은 결코 좋은 글이 아니다.
또한 수필에는 나름대로의 품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가장 정제되고 정갈한 문학인 만큼 품위가 있지 않고서는 독자들에게 다가가기가 쉽지 않다. 수필을 쓰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면 반드시 생각해두어야 할 문제이다.
더구나 문장은 수필의 품위를 좌우함에 있어서 결정적 구실을 한다. 야비하거나 표독한 표현은 글의 품위를 깎는다. 재주를 앞세워도 품위는 떨어진다.
마지막으로 수필이 가져야 할 것이 바로 교훈적이라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과 직선적인 표현은 피해야 한다는 점이라 하겠다.
수필에서 삶의 교훈을 얻는 것은 어느 것보다도 보배로운 일이며 인생의 아름다운 경험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이 없는 수필은 그저 낙서에 불과하다고까지 폄하를 시킬 수 있다. 작가가 목소리를 높여서 설교를 꾀해도 좋은 수필이 되지 못하는 것이 다반사라는 것은 기정 사실이다. 반대로 이러한 설교조의 수필이 성공을 하는 경우는 아주 특수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필에 있어서 비판 정신은 글을 돋보이게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비판은 공정해야 하며 자기 자신의 분수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교훈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비판도 직선적이기보다는 간접적인 것이 수필에 어울린다. 이 글은 1983년 한국 수필가 협회 개최 세미나에서 김태길 교수가 발표한 내용이다. 이러한 것만 지킬 줄 안다면 누구나 수필가가 될 수 있으며 누구나 문학가의 소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좋은 수필을 쓸 수 있는 요건이 무엇인가를 몇 가지 대목으로 요약하였다. 또, 윤오영(尹五榮)은 좋은 글과 좋지 않은 글을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내용이 저속한 글을 속문(俗文) 즉, 속된 글이라 하고, 문장이 좋지 않아 표현이 졸렬한 글을 악문(惡文)이라 했다. 품격을 강조하기를, 윤리적이거나 교훈적인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천한 인격이 드러나는 글을 품위 없는 글이라 했다. 좋은 수필이란 품위 있는 글로 요약된다.
3. 수필 문장의 요소
오늘의 수필 범위는 여러 가지 형식을 포함시켜 논설문까지를 두루 포함하고 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수필에서는 논설문을 제외하고는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작가가 개인적으로 보고 듣고 체험한 것에, 생각과 느낌(감상)을 붙이는 일이다.이 부분이 수필의 주제가 된다.
작가가 보고 듣고 체험한 것만을 쓴다면 그것은 단순한 보고문에 지나지 않고, 또 감상쪽으로만 치우친다면 현장감 없는, 삶의 실체성이 없는 공허한 관념에 흐르기 쉽다.
느낌(감상)이란 작자의 개성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나 삶에 대한 철학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어떻게 드러나느냐에 따라 수필의 질의 갈림길이 된다. 두 가지 요소가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예문으로 보자.
[예문 1] 서오릉(西五陵)
① 어제는 모처럼 벼르던 가족 나들이를 했다. 만원 버스로 30분, 처음으로 서오릉엘 갔다. ② 서울의 중심부에서 멀지 않은 곳이지만, 놀랄 만큼 울창한 산림이 마음속 깊이까지 시원하게 해준다.
① 세검정 골짜기나 관악산에 가본 일이 있으나, ② 언제나 발 들여놓을 틈도 없어 짜증이 앞서곤 했다. 그런데 서오릉은 워낙 넓어서인가, 북적거리지 않아 하루의 휴식처로는 안성마춤이다.
① 아내는 가지고 간 음식을 펴 놓고, 수도 장치가 된 곳에서 물을 떠왔다. ② 별다른 음식이 아닌데도 자연 속에 나와 먹는 맛이, 집에서 먹는 것과는 다른 맛이다. 숲 속이 싱그럽고 신록의 향기 속 공기가 맑은 탓일 것이다.
(H 사보에서)
예문 속의 ①의 부분은 작자가 직접 체험한 것을 나타낸 것이고, ②의 부분은 작자의 느낌이나 생각을 나타낸 부분이다.
작자에 따라 생각(사상)하는 바가 다르게 나타나나, 수필은 이것에 의해 죄우되며, 작자의 인격적인 것이 드러난다. 묘사나 표현을 잘 한다 해도, 생각의 깊이가 없을 땐 좋은 글이 되지 않는다. 앞의 예문이 만일 다음과 같이 되었다고 했을 때를 생각해 보자.
[예문 2] 서오릉(西五陵)
어제는 모처럼 벼르던 가족 나들이를 했다. 서울의 근교는 거의 가보지 않은 곳이 없어, 가족 회의 끝에 서오릉으로 향했다. 우리들은 시원한 숲 속 그늘 한 군데를 차지했다. 돗자리를 깔고 누워 책을 펴들었다가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때는 이미 12시가 지나 아내는 점심 준비를 했다. 집에서와 같이, 특별한 것이 아니고 보통으로 싸온 것들이었다.
점심을 마치고 아이들과 잔디밭에서 공을 찼다. 여기저기서 점심을 마친 가족 동반의 행락객들이 자리를 깔고 쉬고 있었다.
오후가 되어 사람들이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4시쯤 되어 우리도 자리를 챙겨 돌아올 준비를 했다. 그때 마침 직장 친구 가족들이 저쪽에서 돌아나왔다. 그들도 우리처럼 하루를 교외에서 지낸 셈이다. 모처럼의 하루를 교외에서 지내고 돌아왔다.
문장 자체로는 흠이 없다. 독자로 하여금 밖에서 지낸 일을 잘 알 수 있게 쓴 점은, 섣부른 생각을 붙인 것보다 오히려 선명하다. 하지만 작자의 느낌이나 생각은 한 군데도 들어가 있지 않아 생동감이 없다.
초등 학생의 작문만도 못한 죽은 글이다. 사상, 즉 생각하는 부분이 들어 있지 않은 까닭이다. '세수하고 밥먹고 학교에 갔다' 식의 어린이들과 다를 바가 없는 보고문에 지나지 않는다. 체험 부분과 생각하는 부분이 문장 조직에서 어떤 효과를 내고 있는가를 다시 보자.
[예문 3] 이국(異國)에서 부른 아리랑
유람선에서 바라보는 홍콩 구룡항의 야경은 불빛으로 장관을 이루고 이었다. 선실(船室)의 만찬회는 서서히 무르익어 갔다.
주최측인 홍콩을 비롯하여 한국․미국․캐나다․멕시코․영국․서독․불란서 등 기타 기억할 수 없는 공산권 나라를 포함한 30개국에서 모인, 6백여 명의 부부동반 바다의 사나이들은, 각자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아 웃음과 이야기에 꽃을 피우고 있었다, 앞자리에는 밴드에서 흘러나오는 경음악에 맞추어 몇 사람이 춤을 추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나는 몸에 익지 않은 모임에 가슴 설레이면서, 포도주잔을 들어 이국적인 분위기에 젖어들고 있었다. 그럴 무렵, 갑자기 악단 쪽에서 아리랑 노래가 울려 퍼졌다. 세계 도선사(導船士) 회원 중에서 몇 사람이나 아리랑을 알겠는가. 우리 일행은 귀에 익은 노래에 한동안 멍하니 듣고 있었다. 듣고 있다기보다는 벌써 흥분하고 있었다. 마침 남편이 그 노랫 소리에 맞춰 일어섰다. 그리고 무대 위로 나가서 마이크를 잡았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우유빛 바지에 다갈색 비로드 상의를 입은 남편은, 마치 오늘밤 대가수처럼 무대를 누비고 있었다. 흥겨웁던 분위기가 갑자기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슬픈 정감으로 불려지는 선율 때문일까. 노랫 소리는 밴드에 맞추어 계속 이어져 나갔다. 어느 결에 우리측 일행 부인들도 그 노랫 소리에 합류가 됐다. 내 나라가 아닌 남의 나라에서 듣는 아리랑……목이 메어 이어지지가 않았다.
나는 문득 텔레비젼에서 보았던,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레슬링으로 금메달을 따낸 Y선수의 얼굴과 LA올림픽에서 메달을 목에 건 우리 선수들이, 땀과 눈물을 흘리며 태극기가 올라갈 때 따라 부르던 모습들을 떠올렸다. 아리랑을 부르는 남편의 얼굴은 선수들의 얼굴과 다를 바가 없었다.
노래를 들으면서 다시 떠오르는 것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을 잡고 보았던 아리랑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영화 속의 주인공 나운규는 붉은 피를 본 충격으로 제 정신으로 돌아오지만, 끝내 오랏줄에 묶여 아리랑고개를 넘는다. 그리고 주인공의 모습과 함께 주제가인 아리랑이 깔린다.
나는 이 영상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 영화는 속박하는 자와 속박 당하는 자의 대립을 암시하였다. 주인공 나운규를 광인(狂人)으로 설정함으로써, 나라를 빼앗겨 제 정신이 될 수 없었던 우리 민족의 비애를 상징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 아리랑이 새로운 감흥으로 뇌리를 스친다.
단상의 연주단이 많은 나라의 노래를 다 제쳐놓고, 청하지도 않은 아리랑을 어떻게 해서 연주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앙코르와 함께 손뼉치는 소리에 노래는 그칠 줄을 몰랐다.
내 나라에서 예사로 듣던 아리랑 노래를 조국을 떠나서 들으니, 그토록 가슴에 와 닿을 수가 없었다. 해외로 나가서는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고 한다던가.
세계 도선사 회원 중에는 아직도 한국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날 총회에서 있었던 일을 잊을 수가 없지만, 오전 아홉 시부터 점심 시간 한 시간을 쉬고 오후 다섯 시까지 회의는 계속되었다.
총회의 내용은 도선사 헌장의 초안을 놓고 각국 대표들이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었다. 한국 대표인 남편은 의견을 제시하기 전에, 우리나라를 알지 못하는 대표들에게 대한민국 표지판에 사우스 코리아로 표기되어 있는 것을 지적하며, "여러분, 우리나라 정식 국명은 리퍼블릭 오브 코리아라고 합니다. 정정해 주시기를 정식으로 요망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수도 서울은 지금 '88 올림픽 게임을 주최하는 준비로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습니다."하고 설명을 했다. 그리고 헌장 초안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다.
발언이 끝나자 주최 사무국측에서는, 처음에 놓았던 팻말을 거두고 리퍼블릭 오브 코리아로 쓴 팻말로 바꾸어 놓으며 정중히 사과했다.
낮에는 연설과 밤에는 아리랑을 부른 남편의 얼굴에서, 조국에 대한 애정을 느꼈다. 민간 외교가 따로 있겠는가. 일본 대표의 부인이 무엇을 아리랑이라고 하느냐고 묻는다.
나는 아리랑 노래만 알지 설명은 어려웠다. 우리나라에서 널리 부르는 민요라고만 대답할 수밖에 없어 부끄러웠다. 일본말로 토를 달아주면서 따라 불러 보라고 했다.
1984년 12월 4일 홍콩 구룡항 선상의 밤은 아리랑 노래와 더불어 깊어갔다. 유람선은 천천히 구룡 부두에 닿았고 숙소인 쉐라톤 호텔로 돌아갈 때까지, 각국 회원들은 우리들에게 따뜻한 우정의 미소를 던져 주었다. 다음 총회 장소인 파리에서 다시 만나도, 만찬회의 세계 도선사와 그 부인들은 리퍼블릭 오브 코리아의 아리랑을 기억할 것이다. (김경자)
이국에서 부른 아리랑 속에, 작자의 주체적 사상이 드러나고 있다. 단순한 여행 기록에 그치지 않고,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한 의도가 나타났다. 머나먼 이역에서의 아리랑, 그것은 바로 조국애다. 이 조국애로 연결된 얘기가 작자의 생각, 사상이다. 이 사상이 독자를 공감의 세계로 이끈다. 체험의 부분과 사상의 부분을 생각하면서 예문을 다시 보자.
[예문 4] 삼베 고의를 입고
연일 찌는 듯한 더위가 2주째 계속되고 있다. 올해도 삼베 고의에 모시 적삼을 입기로 했다.
삼베옷을 입을 때면 고향의 일이 떠오른다. 텃밭에는 삼이 심어졌고, 할머니와 어머니는 연중 일과처럼 삼베를 낳으셨다.
6월 중순쯤에 삼을 베어낸다. 나무칼로 삼잎을 털어내고, 삼대 길이만큼 크게 만든 양철 가마에 넣어 하룻밤을 쪄낸다. 밤새도록 찌고 나서 아침에 꺼내 놓으면, 동네 아낙들이 품앗이로 삼대 껍질을 벗겨낸다.
이것을 줄에 널어 말려 거두어 두었다가, 농사일이 한가해지면 할머니와 어머니는 일을 시작하신다. 말린 삼을 물에 적셔 잘개 쪼개고, 이것을 무르팍에 대고 비벼감아 한 가닥 실이 되게 이어나간다. 이 작업을 일러 삼을 삼는다고 한다.
한 해 겨울 삼아 놓으면 커다란 항아리같은 실덩이가 몇 개 생긴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봄이 되기를 기다리고, 봄이 오면 이 실덩이를 푼다. +자형 돌개라는 실감개를 빙글빙글 돌리며 그 돌개에 풀어 감는다. 타래를 만드는 것이다.
이 실타래는 껍질을 벗겨 원사(原絲)를 만든다. 양잿물로 삶은 것을 냇가로 들고나가 빨래를 쳐대듯 빨아대면, 실은 비로소 원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바딧살에 한 올씩 꿰고, 피워놓은 불 위를 지나면서 풀칠을 해서 말린다. 이 때 도꼬마리라는 것에 감는 것인데, 이것이 삼베는 매는 일이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긴긴 봄날이면 바깥 마당에서 이런 작업을 하셨다.
이제 남은 것은 베틀에 올려놓는 일뿐이고, 이런 작업 중간에서 또 한가지의 일거리가 있다. 도꼬마리에 감아올린 것은 날(經)이고 이 날에는 씨(緯)를 넣을 실꾸리를 겯는 일이 그것이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밤이 깊도록 꾸리를 결으셨다.
삼베의 품질은 넉새 베니, 엿새 베니, 일곱새 베니 해서 등급처럼 말한다. 이것은 바디의 칸살이 넓고 좁음에 따라 삼베가 곱게 짜여지고 굵게 짜여지는 것을 말한다. 굵고 거친 것일수록 숫자가 아래로 내려오고, 고운 것일수록 숫자가 높여져 불린다. 내가 입은 옷은 일곱새 베이지만, 고향의 머슴이 입던 옷은 석새가 아니면 넉새 베였다.
어머니는 이른 봄부터 늦봄까지 베틀에 올라 베를 짜셨다. 한 필을 짜내는 기간은 보통 2주쯤으로 기억한다. 이렇게 짜낸 것은 모두 식구들의 옷이 되었다. 어쩌다 남는 것은 장에 내다 팔기도 하였다. 그 시절엔 모두가 제각기 삼베를 낳아 입었다.(하략)
(회사원)
위 글은 삼베옷을 입었다는 부분에서 생각하는 부분이 조금 비치고 있을 뿐, 오직 삼베 낳는 얘기를 백과사전처럼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생각하는 부분이 들어가지 않아 작자의 인격적인 것이 보이지 않고 있어 아무런 감흥이 없다.
문맥이 통하고 묘사가 정확해도 이런 글은 좋은 수필이 되지 아니한다. 작자의 사상이 없는 까닭이다. 적어도 할머니, 어머니에 대한 감상 한 토막쯤은 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런 류의 글이 종종 눈에 띈다.
앞의 [예문 3]과 [예문 4]를 통해서, 수필이 갖추어야 할 두 가지 요건이 어떤 것인가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4. 문맥과 문장의 조직
문자의 뜻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것이 문맥이다.문맥이 끊어지면, 혈관이 끊어지거나 막힐 때 인체가 부자연스럽게 되는 것과 같다. 문맥은 한 단락 안에서도 이어져야 하고, 단락과 단락 사이에서도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문맥을 잇는 것은 반드시 앞의 말을 설명하듯 이어받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설명하듯 하지 않아도 뜻으로 연결이 이루어지면 된다. 초심자의 경우는 설명을 붙여야 하는 것으로 알고, 문장에 군더더기를 붙여 놓는다.
문맥이 끊기거나 흐려지거나 부자연 또는 정연하지 않은 경우는 다음과 같을 때다.
① 앞의 문장에 이어댄 문장의 개념이 다르거나 필요가 없을 때 - 논리성을 잃을 때, ② 관련지은 부분이 군더더기가 되고 있을 때,
③ 논조(論調)의 논리가 흐트러졌을 때, ④ 부드러워야할 감정 표현이 강한 표현이 되었을 때,
⑤ 솔직하고 쉽게 표현해야할 부분이 미화되어 꾸미고 있을 때,
⑥ 앞 문장과 같은 뜻의 말이 되풀이 되었을 때,
⑦ 앞 뒤 순서가 바뀌었을 때,
⑧ 추상적이거나 상징적인 말로 알 수 없게 썼을 때,
⑨ 문장의 음운유형(音韻類型)이 중복될 때 등이다.
이상과 같이 여러 가지 형태로 문맥은 표현코자 하는 언어가 제자리에 놓여 있을 때라야 명쾌하게 통한다. 문단과 문단이 통하지 않을 땐 접속사로 이어야 할 경우가 있으나, 그렇게 하지 않고 서로 통하도록 해야 한다. 초심자의 경우는 이것이 쉽지 않다. 문맥을 통하게 하는 일이 문장을 조직하는 일이다. 문맥에 관한 요소별 사례를 보자.
① 앞 문장에 이어댄 문장 개념이 다르거나 필요가 없어, 논리성을 잃은 까닭에 맥이 통하지 않는 경우.
[밤 한 시에 나누는 말]
㉠ 때로는 말을 못하는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그들은 표정과 손짓으로 말을 할 뿐이지만, 우리가 표현하는 어떤 말보다 절실한 것이다. 아무리 많이 모여 앉아도 그들은 소란스럽지가 않다. 더러는 내가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한다. 나는 그들이 순진하다고 생각한다. 웃을 때의 표정은 너무나도 천진스럽다.
㉡ 우리는 말의 소음에 찌든 것일까? 제각기 쏟아대는 말의 공해. 그래서 우리는 날카로워지고, 건조해지는 모양이다.
㉢ 간단없이 토해내는 그들의 짧은 발음이 가끔씩은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것은 새의 지저귐과도 같고, 언어가 생기기 이전, 아득한 시절의 그리움 같은 것이기도 하다.
언어 장애자를 소재로 쓴 글이 ㉠에서부터 ㉢까지 펼쳐져 나가다가 ㉡부분에서 갑자기 다른 개념의 문장으로 튀어나온다. 장애자의 세계를 미화하고자 한 뜻으로 짐작이 가나, 그것이 의문형으로 논리성을 잃어 문맥이 통하지 않는다.
이런 경우라면 "말 못하는 장애자들을 생각하니 그들의 세계가 오히려 평화스럽게 여겨진다."하고 나서, "우리는 말의 소음에 찌든 것일까"가 아니라 "찌들어가고 있다."라야 할 것이다.
② 앞 문장과 이어진 것이 군더더기가 되고 있을 때.
[사보를 보면서]
몇 년 전 겨울의 일이다. 눈이 수북이 쌓인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일이 있다. 처음에는 거꾸로 떨어지다가 나중에는 굴러버렸고 맨 밑바닥에선 눈으로 쌓인, 눈사람이 된 나를 발견했다. 나는 그 눈들을 헤치고 세상으로 나왔다. 그리고 보통 그런 사고를 당할 경우 죽는데 비해, 나는 죽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실망을 금치 못했다. 깨어보니 꿈이었다.
꿈 얘기를 순서대로 쓰고 있으나, 요약할 수 있는 내용이 몇 갈래로 갈라져 있다. 180자가 넘는 글인데, 군더더기를 없애면 선명해진다. 문장은 되도록 간결해야 한다. 필요에 따라 세 마디로 할 것은 두 마디로 하고, 두 마디로 할 것은 한 마디로 해서 군더더기를 없애야 한다.
위 글을 고친다면 "눈이 수북이 쌓인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 밑으로 떨어졌을 때는 마치 눈사람이 된 것 같았다. 죽을 뻔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기어나왔으나, 이상하게도 실망감 같은 것을 느꼈다. 깨고 보니 꿈이었다."
③ 논조의 논리가 흐트러졌을 때(앞뒤가 맞지 않을 때).
[법과 사람의 마음]
백범 선생 암살범이 피습된 사건을 사설들이 일제히 다루고 나섰다. 그 논조가 한결같이 배후는 밝혀져야 한다고 하고, 이러한 현실을 규탄과 개탄의 목소리로 담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법이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라 해도 민족사와 정의 구현을 위해서, 범죄의 이면은 법 이전에 밝혀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나도 의분을 금할 수가 없다. 어찌하여 애국지사를 암살한 범인이 호강을 하며 살아왔고, 배후가 가려지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인가.
암살범 안두희 씨는 이번이 두 번째의 봉변이라 한다. 그런데 그는 법의 심판을 받고 지금까지 잘 지내온 사람이다. 이제와서 또 피습을 당한 것은 한편으로는 지나치다는 생각이 없지도 않다. 배후가 밝혀져야 한다고 했지만, 다 지나간 얘기가 아닌가.
백범 선생 암살범에 대한 국민적 규탄에 동감하면서, 그런 감정이나 논리와는 다르게, 왜 그렇게까지 문제를 삼느냐는 식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글을 만들고 있다. 얼른 보기엔 작자의 도덕적 윤리관이 관대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대의와 명분을 내용으로 한 이상에는 문장으로서 일관성이 없다.
따라서 이 글은 작자의 생각이 이율배반적이어서 문맥이 통하지 않는 글이 되고 있다. 이런 글의 경우에는 강도있는 표현으로 이어져야 한다. '법의 시효가 있고 일사부재리라는 원칙이 있다지만, 그대로 넘긴다면 민족 정기라는 말도 필요 없고, 역사의 바른 길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쯤으로라도 정의감의 표시가 따라야 한다. 이때의 표현은 물론 감정적이어서는 안되고, 품위를 잃어서도 안된다.
④ 부드럽게 이어져야 할 감정 표현이 강한 표현으로 되었을 때.
[서리]
㉠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면 지난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서리라는 것을 해 보았을 것이다. 서리란, 과수원이나 참외밭에 들어가 장난삼아 아이들이 몇 개 따 먹는 것을 말한다. 내가 자랄 때만 해도 그러했다. 불과 20년 전의 일이 되지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뿐, 도둑질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어른들도 그렇게 생각해서 몇 마디 훈계로 그치고 말았다.
㉡ 그러나 지금은 나부터가 용서를 할 수가 없다. 땀 흘려 가꾼 것을 훔친다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
전원 생활의 토속적 풍습을 아름다운 회상으로 시작한 글이다. 서리는 남의 것을 승낙없이 손대는 것이지만, 작자는 죄가 되지 않았다고 회상하고 있다.
그런데 인간성에 바탕을 둔 이런 추억이 ㉡부분에서 갑자기 강한 감정 표현으로 변하고 있다. ㉡부분이 설사 오늘의 현실이라 해도, ㉠에 이어지는 문맥이라면 승화가 되어, 사회를 보는 시각이 관조적 성찰로 온건하게 나타나야 한다.
"아무리 땀흘려 가꾼 농작물이라 해도, 어린 것들의 철모르는 짓을 도둑으로 볼 수는 없는 일이다"라든가 "차를 대 놓고 밤중에 도둑질을 해 간다니, 서리를 하던 시절의 인심이 아쉽기만 하다" 따위로, 앞 문장의 분위기와 맞아야 한다.
⑤ 솔직하고 쉽게 표현해야 할 것을 아름답게 쓰려고 해서 뜻을 흐리게 한 것.
딸아이의 갑작스런 행동에 우리 내외는 배를 잡고 웃었다. 하룻밤 자고나면 전날의 일도 잊어버릴 때인데, 지난 여름의 일이 아이의 마음에 얼마나 큰 충격으로 남아 있었으면 저럴까 싶다.
선거유세 광경을 흉내낸 딸아이의 행동을 쓴 글의 서두 부분이다. 시작을 솔직하게 쓰지 않고, 문장을 꾸미려고 해서 알 수 없는 서두가 되고 있다. 사실대로 쓴다면 다음과 같은 글이 될 것이다.
TV를 보다가 딸아이의 갑작스런 행동에 안사람과 배를 잡고 웃었다. 하루만 지나도 어젯일을 잊을 아이가, 지난 여름의 선거 열기가 얼마나 인상적이었기에 그것을 잊지 않고 흉내를 내는 것일까.
⑥ 앞 문장과 같은 뜻의 내용이 되풀이 된 것.
[아픈 마음]
새로 맞춘 유니폼에 단발머리 나풀거리며, 언니들 꽁무니 따라다니던 신입사원 시절, 모든 게 낯설고 생소해서 어려운 친척집에 엄마따라 놀러간 아이처럼, 늘 언니들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신입 사원 생활이 서툴러서 선배 사원을 따라다녔다는 것으로 사적된 짤막한 문단 속에, '언니'를 따라다니던 얘기가 되풀이 되고 있다. 다음과 같이 해야 할 것이다.
새로 맞춘 유니폼에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며 언니들을 따라다니던 시절도 벌써 몇 달이 지났다. 모든 것이 낯설고 시툴렀으나, 지금은 손에 익고 몸에 배서 제법 자신감이 생겼다.
⑦ 앞 뒤 문장의 순서가 바뀐 것.
[어머니]
올해도 어머니를 뵙고 집을 나설 때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몸조심하라고 하였다. 내가 태어난 마을은 바다가 보이는 작은 농가다. 고향을 떠난 이후, 농사일에 찌든 어머니를 뵐 때는 마음이 항상 무거워진다.
고교를 마치고 서울로 와 있는 시골 소녀가, 고향에 다녀와서 쓴 글이다. 얼른 보아서는 문맥이 통하지 않는 글이 아니다. 그러나 천천히 들여다보면 처음 시작 부분 - 서두에서 한 말이 다음으로 이어지는 글과 부자연스러움음 알 수 있다. 즉 밑줄 친 부분은 이 글의 끝으로 가서 붙어야 한다.
⑧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말로 일관된 것.
[밀알 같은 얘기]
㉠ 친구야!
오늘도 쉼없이 돌아가는 시계 바늘의 '뚝딱뚝딱' 소리에 우리의 삶을 연결해 보고, 우리가 크고 작든 간에 한 가지의 이상을 꿈꾸며 많이 웃고, 올고, 아파하면서 조금 더 성숙의 계단을 오르는 연습을 하지 않으련? 저녁 노을을 보니 우리들의 사랑으로 수놓은 감미로운 멜로디가 기억나는구나.
㉡ 교문 밖, 유난히도 마음 설레이게 했던 쥐포 냄새에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충족되어야 한다며, 수업 시간에 열과 성의를 다해 눈치껏 쥐포를 뜯던 우리반 왈패들. 그리고 하나씩 떠오르는 얼굴들을 지울 수가 없구나.
편지 형식으로 쓰고 있으나 첫 마디에 느낌표(!)를 쓴 것도 강한 표현이고, 추상적 상징적인 말로 장황하게 이어져 얼른 보아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문단 속에 "계단을 오르는 연습을 하지 않으련"한 것이글의 주제인 듯 싶은데, 이런 표현이 말장난이다.
㉡부분에서는 쥐포 얘기로 먹는 얘기가 튀어나와 앞의 문단과 연관이 없어 문맥이 끊어지고 있다. 문단과 문단과의 문맥이 끊어지고 있을 뿐 아니라, 자기만이 알 수 있는 말을 쓰고 있어, 문맥이 확실치 않아 글 전체가 말장난이 되고 있다.
⑨ 문장의 음운 유형이 중복될 때.
진달래 봉우리가 터지기 ㉠시작했으니 봄꿩 우는 소리가 들려오겠다. 뒷산에서 뻐꾸기 소리가 ㉡들리겠으니 고향이 그리워진다.
㉠과 ㉡의 표현은 이 글의 한 단락 속에서 같은 음운 '으니'가 중복이 되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부분은 "뒷산에서 뻐꾸기 우는 소리가 들려" 쯤으로 앞의 것과 중복을 피해야 한다.
(어떻게 써야 좋은 글인가)에서 수필 문장의 기본적인 요소를 충분하게 설명을 하였다. 일반적으로 문장은 평론가의 글이나 학자의 글처럼 어렵게 쓴 글이라야 좋은 것으로 아는 경우가 많은데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초보자들이 문장을 어렵게 쓰려는 경향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무슨 말을 썼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말로 쓰거나, 또는 아름다운 말로 꾸며져야 좋은 글로 안다. 이것은 수필 문장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까닭이다.
수필은 쉽게 읽혀지는 글이라야 한다.쉽게 읽힌다는 것은 힘 안들이고 썼다는 뜻이 아니다. 힘 안 들게 읽혀지는 글일수록 또는 편하게 읽혀지는 글일수록 힘들여 쓴 글이다. 쉽게 쓴다는 것은 꾸미지 않는 것은 말하며, 꾸미지 않는다는 것은 아름답게 쓰려고 하지 않고 간결하고 담백하게 쓴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담백하게 쓴 글이 어떤 것인가를 예문으로 보자.
[예문 1] 냉면기
날이 더워지는데 따라 냉면의 풍미도 한층 더해간다. 학인(學人)이 식도락(食道樂)을 논하는 것은 약간 체통에 어울리지 않는 것같이 보이겠으나, 또 먹지 못하면 연구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그것을 그리 타박할 것도 못 된다. 그것이야 어찌 되었든간에 어쩌다 의식을 하게 되면 대개 냉면을 먹고, 또 그럴 때마다 흔쾌한 기분을 맛보게 되는 것이 보통이므로, 이 냉면맛이 더 나는 계절에 냉면을 얘기해 보고 싶어진 것이다.
여러 해 전에 들은 이야기지만, 미국의 대통령까지 지낸 아니젠하워 장군은 취미가 요리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취미를 물으면 실상은 별로 읽는 것은 아니지만, 흔히 독서라고 대답하는데 비하면 좀 궁상스럽게 여겨지기 쉽다. 그가 군인이기 때문에 자기 취미를 솔직하게 공개한 것일 게다.(하략)
(차주환)
화롯가에 앉아 한가롭게 담소를 나누는 것처럼 그리고 편안하게 읽혀지면서 정감을 주고 있는 것이 그려진다. 아름답게 꾸며 쓴 데가 없다. 얼른 보면 얘기하듯 이어져 나가고 있으나 유의해서 보아야 할 일은, 한마디도 군더더기가 없다는 점이다. 써야 할 말만이 들어가 있다.
이렇게 꾸미려 하지 않을 때 문장은 소박하다. 소박해야 진실성이 담기며 진실성이 있어야 감동을 준다. 소박하게 쓰자면 부사나 부사어 또는 형용사 따위를 함부로 쓰지 않는 일이다.
소박하다는 것은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수식을 지나치게 하는 것은 분칠을 하는 것과 같아서 진실성을 희박하게 한다. 수필 문장의 특성은 소박한 데 있고, 글 속에 감정이 숨겨지도록 쓰는 데 있다.
따라서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는 글은 독자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 독자가 글 속에서 감정을 찾아내게 하는 것이 소박한 글이다. 이런 점에 유의하면서 예문을 보자.
[예문 2] 정리된 낙서
흐트러진 마음 가득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 앉은 날, 세월의 막연함을 묵살하기 전에 그동안의 내 삶은 얼마만큼을 얻고 또 얼마만큼을 잃었는가. 삶의 계산대에 올려질 만큼 충실한 삶이었던가?
분주한 가을마저 떠나가 버리고 이제는 외로운 겨울 앞에서 감상도 몸부림도 어설픈 망상도 거두고 숙연히 월동 준비에 분주해야 하며, 인내를 되뇌이고 내 주위의 떠나버린 모든 것에 대해 회상하는 작은 인생의 계단에 올라서서, 흩어진 낙엽들의 외로움을 탓하기 이전에 그저 묵묵히 삶의 생활방침에만 의존할 뿐, 무책임한 자신이 싫고 연약하기에 하루를 시작하는 이런 시각의 찰나.
(D사보에서)
이 글은 체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 아니라 생각만을 나타낸 사색적인 글이다. 서두의 첫 구절부터가 솔직한 표현이 아니어서 무엇을 말한 것인지 뜻이 명확하지 않다. 아름답게 꾸미려고 한 까닭이다.
마음이 안개처럼 흐렸다는 것인지, 실제로 안개가 낀 것을 말한 것인지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초심자들은 이와같이 꾸미려고 해서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글을 쓴다.
이 글의 끝 부분, "이런 시각의 찰나"도 자연스러운 표현이 아니다. 가령 첫 구절 부분을 고쳐본다면 다음과 같은 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안개가 자욱히 내려서 흐트러진 마음을 더 무겁게 한다."
[예문 3] 잃은 것 찾기
하늘이 어깨 위로 내려와 있다. 짙은 회색의 오후다. 아무래도 비는 내리고야 말 것 같지만 오늘은 우산을 챙겨드는 인색함을 접어두고 싶다. 먹장구름이 하나 가득 흩어진 하늘은, 마치 묶여지지 못한 원고지들이 떼지어 흩어진 습작 소설가의 방바닥과도 같다.
우울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거리. 표정을 저당잡힌 무표정의 얼굴들이 범람하고 흡사 자력에 이끌리는 쇠붙이처럼 저항의 몸짓을 상실한 빛깔없는 생활인의 모습들이 표류하고 있다. 저마다 제 행동의 당위를 찾기에 분주하고 그 당위를 인정받는 일에 골몰해 있다.
(H사보에서)
사보(社報)의 응모작 중에서 장원으로 뽑힌 글이다. 이 글 역시 수필 문장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쓴 것이다. "하늘이 어깨 위로 낮게 내려와 있다"부터가 꾸민 글이다. 앞서의 예문과 같이 이런 글을 신선한 표현으로 볼 사람이 있을 것이다.
계속되는 구절, "오늘은 우산을 챙겨드는 인색함을 접어두고 싶다"처럼 꾸민 글이 또 있을 수 없다. 첫 문단의 끝부분, "소설가의 방바닥과도 같다"까지를 냉면기와 비교해 본다면, 이 글이 얼마나 솔직하지 않게 쓴 글인가를 알 것이다. 예문 첫단의 뜻을 살려 고쳐 본다면 다음과 같은 글이 되어야 한다.
금새 비라도 올 것같이 구름이 낮게 흐른다. 웬만큼 흐리지 않으면 우산을 들고 나서지 않는데 오늘은 들고 나섰다. 먹구름이 분분하게 흐르는 모양이, 마치 땅바닥에 흩어진 원고지처럼 어지럽다…….
이밖에 "표정을 저당잡혔다"느니 "저항의 몸짓을 상실한 빛깔없는 생활인의 모습"이니 한 것 등은, 모두 지나치게 꾸민 말장난이며 알맹이가 없는 글이다. 초심자의 경우 대부분이 이런 표현을 즐겨 쓰는데, 어째서 이런 문장이 유행처럼 번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국어 교육의 잘못된 단면이 아닌가 한다.
중․고등 교과서나 대학 국어에는 상당량의 수필이 들어 있다. 그것은 모두 문장으로서 표본을 보인 글들이다. 그런데도 앞의 예문과 같은 글이 나오는 것은 속된 문장처럼 수필문장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쓴 일부 문필에 물든 탓이다.
자기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알쏭달쏭한 표현을 쓴다는 것은, 마치 시인이 난해한 시를 써놓고 자기만이 알 듯이, 좋은 문장으로 착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자기 도취의 글이 되고 마는 것이다.
다음 예문은 현재 주요 일간지 문예 강좌에서, 수필 실기 강의를 통해 많은 문필가를 배출시킨 강사의 글이다. 문장의 진솔함과 소박성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볼 수 있다. 보기에는 평범하나, 한 구절 한 자의 군더더기가 없다.
[예문] 쌍동이 마을
여수에서 15Km 떨어진 중촌 마을이 장수와 쌍동이의 마을로 보도되자, 건강을 지키려는 사람과 아기를 못낳는 부인들의 행렬이 이곳 약수터로 줄을 잇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와는 달리 중촌 마을 바로 이웃에 있는 하촌 마을과 오룡 마을에서는 쌍둥이가 태어나지 않아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다.
유독 중촌 마을만 75가구 가운데 35가구에서 388쌍의 쌍둥이가 태어났는데, 이것은 동쪽에 보이는 쌍태산의 정기 때문이라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 마을에서 쌍둥이가 태어나는 것이 중촌 마을에서만 보이는 쌍태산 때문일까.
성남시에 있는 조철래(男巫․42)씨의 경우 남자이지만, 경대 앞에서 화장도 하고 가슴에 브래지어를 하는 등 여복을 한 다음, 창피해서 바깥 출입을 못하고 하루 종일 방안에만 머물러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기를 낳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 아기 낳으면 입힐 옷과 기저귀감까지 끊어다 놓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어떤 때는 상상 임신을 해서 배가 불러올 때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하 생략)
(서정범)
[예문] 변두리 다방
일요일이 되면 무료한 시간을 어떻게 메꿀 것인가 고민 아닌 고민을 많이 하게 된다. 도무지 취미라고는 없는 사람이어서인지 일요일 아침을 먹고 나면 할 일을 생각하느라 멍하고 한참을 앉아 있기 마련이다. 담배도 피우지 않고 초점없는 동공을 하고 앉아 있는 모습은 내가 여자라 해도 그런 남자야말로 참 매력없이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아내는 도무지 어떻다고 말을 하지 않는다. 원래가 활동적이 아닌 사람인데다 주머니 사정이 좋을 때가 없는 위인에게, 아이들서건 어디 놀이를 가자고 제의하면 괜히 약 올리기 위해 하는 소리로 오해받을 까 싶어서인지 내 하는 대로 보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요즈음 나는 일요일이면 으레 우리 동네의 S다방을 들르고 있다. 누구와 약속이 있다거나 하다못해 그 다방에 있는 레지 아가씨 한 사람이라도 보고 싶어서 찾아가는 것은 아니다. 국민학교 1학년짜리 딸아이 손을 잡고 산책삼아 다방에 들렀다가 차 한 잔 하고 돌아오면, 일요일 내내 방구석에만 쳐박혀 지낸 것만은 아니라는 자위를 지닐 수도 있거니와, 하루에 커피를 딱 한 잔 해야 하는 습관을 떼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하 생략)
(박연구)
두 편의 예문이 보이는 것은 첫째, 문장이 쉽고 편안하게 읽힌다는 점과 둘째, 꾸밈이 없이 솔직하고 소박하다. 그런 까닭에 아름답게 쓰려고 한 글보다 마음 속으로 와 닿는 진실성이 강하다.
(목차)
(목차)
5. 서두 쓰기
어떤 글이든 서두가 있고 독자는 서두에서부터 읽어 들어간다. 서두는 독자를 끌어들이는 첫번째 관문이다.
신문 칼럼을 읽는 사람 중에는 서두와 중간과 끝부분만 읽는다는 사람도 있다. 전문(全文)을 이해하는 데에 서두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서두는 작품을 좌우한다는 말일 수도 있다.
소재를 만난 사람의 머리 속에는 쓰고자 하는 말이 가득차 있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다. 어디서부터, 무엇부터 써야 할까를 생각해야 한다. 물론 아무데서나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서두가 독자를 끌어들이게 할 것인가에 서두의 중요성이 있다.
이 중요성을 "땅을 비집고 솟는 싹의 떡잎 같은 것"이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고 한 속담을 인용한 말이다. 나그네의 갈림길 같다고도 했다. 말하자면 갈림길에 들여놓은 발길의 방향에 인생길이 달라지듯, 수필의 서두도 그런 결과를 가져온다는 뜻이다.
서두를 어떻게 시작해야 하느냐는 간단하게 말할 수는 없다. 취향과 개성에 따라 다를 수가 있다. 하나의 나무를 보고 쓴다고 하자. 이 때의 서두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나무를 보게 된 동기에서 시작할 수 있고, 나무가 서 있는 입지적 조건이나 나무의 모양, 또는 주위 환경 상황에서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
서두는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의 한 부분이다. 동기부터 쓸 수도 있고 결론부터 말할 수도 있다. 대상을 순서대로 시작할 수도 있고 중심부분에서 시작할 수도 있다.
수필은 서두의 제시 방법에 따라 작품의 성공이 좌우된다. 제시 방법이란 표현 방법을 뜻한다.말하자면 신선미가 없이 진부한 설명적 표현이거나, 걸러지지 않은 감정의 표출이거나, 독자에게 강박감을 주거나 하는 따위다.
서두는 차분한 말로 정적 분위기를 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문체나 형식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부드러운 수필의 경우는 서두의 목소리가 높아서는 안된다. 요구하거나 교훈적이거나 설교적이어서도 성공적인 것이 못 된다.
서두의 표현에는 몇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첫째 불분명한 인상을 주지 않는 일이다.이를테면 첫 구절 시작이 지시 대명사인 '그'니 '어느'로 시작되는 경우다. 이와같은 대명사의 시작은 막연한 상황을 말하는 식이므로 사실 개념과 떨어져 실감을 주지 못한다. 따라서 독자를 끌어들이기에 효과적이 아니다.
다음은 1인칭 대명사인 '나'로 시작하는 경우다. 특별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서두에 붙는 '나'는 군더더기일 경우가 있다. 수필은 문장 주체가 이미 '나'이다. 그러므로 '나'가 붙는 것은 서두에서 내용에서나 군더더기일 때가 많다. 다만 예외인 경우는 작자 자신을 강조해야 할 때다.
'그'라든가 '어느' 따위로 시작되는 것은 수필의 본질에서도 벗어난다. 작자가 주체가 되지 않는 형식, 이를 테면 논설체같은 경우가 아니면, 수필에도 육하원칙 같은 것이 요구된다. 작자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 어떤 생각을 했는가 따위다. 막연히 지시 대명사인 '그'로 시작하는 것은 처음부터 원칙에서 벗어난다. 예문을 보자.
[예문 1] 화해의 그때
그녀와 헤어진 후 우울한 기분은 떠나질 않는다. 커텐을 한 쪽으로 밀어붙이고 창문을 활짝 열어 놓는다. 그래도 시원함은커녕 끈끈하고 습기 찬 공기가 가슴을 더욱 무겁게 만든다.
검은 구름이 바로 머리 위에서 몰려 다니는 것을 보니 곧 비가 내릴 것 같다. 비가 와야 가뭄이 풀릴 터이지만 믿을 수는 없다. 사흘째 연이어 구름만 떠돈다. 나의 마음이 우울한 것은 날씨탓만은 아니다.
(B사보에서)
[예문 2] 수화기를 놓으면서
나의 용돈으로 서점에 가서 처음 산 책이 미우라 아야꼬의 '빙점'이다. 그때 친구들 간에는 '빙점'이 인기있는 책이었다. 베스트셀러였다.
(S사보에서)
[예문 3] 그 남자의 손
신호등이 바뀌었다. 길을 건너기 위해 차도로 내려섰다. 옆에 있던 남자가 팔을 둘러 손으로 내 등을 밀며 걷는다. 나는 갑자기 하던 말을 중단했다. 등허리에 가득 덮힌 듯한 남자의 손에 온통 신경이 쏠려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대낮 서울 거리에서 나와 함께 팔을 겯고 걸어도 상관없을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주부)
[예문 4] 손 들고 세운 차
나는 공짜로 남의 차를 얻어 탈 때가 있다. 함께 어울리다 같은 방향인 때는 편승할 때가 있긴 하지만, 그것보다는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를 얻어 탈 때도 있다.
모르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일 수도 있으나 나와 빈 가슴을 얼마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자연 숭배주의자이다. 시골을 즐겨, 찾아 나설 구실을 만든다. 몇해 전에는 완행열차에 실려 기차여행을 했지만, 근래에는 완행버스에 실려 곧잘 서울을 벗어나기도 한다…….
(주부)
[예문 1] 서두의 '그녀'와 [예문 2]의 '나'는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예문 3]의 둘째 단락에서도 갑자기 '그'가 되고 있다. 그러나 [예문 4]에서는 '나'가 들어감으로써 문장이 산 경우가 된다. 작자인 주체를 강조해야 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문장의 수식(꾸미는 것)은 서두에서 더욱 금기 사항이다.앞에서 말한 바 있으나 화려하게 꾸미는 것은 좋은 문장이랄 수가 없다 예문의 서두를 다시 보자.
[예문 1] 상록수를 읽고
밤이 조금씩 그 깊이를 더해가고 있을 때 뿌연 달빛이 문틈 사이로 스며든다.
(B사보에서)
"밤이 깊어지면 문틈 사이로 달빛이 스며든다"면 되는 것을, 쓸데없는 수식인 "깊이를 더해가고"로 꾸미고 있다.
[예문 2] 중심 찾기
가을! 탐스럽게 익어가는 곡식 과일들은 모두에게 풍요로움을 안겨 준다. 빨갛게 익어가는 사과에 기쁨과 희망을 가지고 생활하는 이들에게 어느날 좌절을 줄 수 있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사과에 이상이 발견되었을 경우이리라. 겉은 누가 보아도 깨끗하고 탐스러운데 속은 어느 벌레에게 긁히고 있다면 누구도 발견치 못한 작은 구멍이 뚫렸으리라.
사과의 중심이 흔들리고 그것에 희망과 기쁨을 쏟으면서 생활하던 이에게 중심을 잃도록 하는 것이리라. 나는 어느 날 나의 생활 속에서 작은 구멍에 의해 중심이 썩어가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 글은 끝 부분에 가서야 작자가 하고자 한 말을 겨우 알 수 있다. 이 부분이 서두가 되었다면, 독자를 끌어들이는 힘은 훨씬 강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뒤에 가서야 단락을 바꾸어 말한 것은, 서두를 아름답게 써 보려는 생각 때문에, 쓸데 없는 말을 해서 꾸민 결과다.
사과가 익어가고 있다는 얘기와, 익은 사과에 해충이 붙어 있다는 말을 솔직하게 쓰면 된다. "가을!" 하고 감탄법을 쓴 것은 강한 것이므로, 조용하고 차분하게 시작하는 것이 좋다. 이를테면 "엊그제까지 찌는 듯하던 더위가 머리 속에 아직 남았는데, 어느덧 가을이다"면, 독자를 차분하게 끌어들인다.
"중심이 썩어가고"의 표현도 적합하지 않다. 중심이 무엇을 말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런 경우도 추상적으로 표현할 것이 아니라, 사과밭에 병충해가 심하다면, "노력한 대가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쯤으로 하면 자연스러운 글이 된다.
수필은 서두에서부터 품위를 잃지 말아야 외면을 당하지 않는다.품위가 없으면 문장을 아는 사람의 눈에 들 리가 없다. 다시 예문을 보자.
[예문] 내 애인 비우 파이오니어
옥포만에 오자마자 짝사랑 애인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내 애인이 처음부터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처음 그녀를 만난 것은 초겨울이었다. 모르긴 해도 그녀에 대한 내 어설픈 짝사랑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지금도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그녀가 시집을 가더라도 그녀만은 잊지 못할 것 같다.
(H사보에서)
얼른 보기에 흠 잡을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글이다. 그러나 교양인이라면 이 글이 제목과 서두에서부터 얼마나 품위를 잃고 있는가를 쉽게 알 것이다. 제목부터가 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제목이다.
말할 때는 '애인'이니 '사랑한다'는 말을 예사로 할 수 있으나, 수필 문장은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독자가 알 수 있도록 함축시켜아 한다.
글의 시작이 "옥포만에 오자마자 짝사랑의 애인을 갖게 되었다"로 되고 있으나, 이런 문장은 개인 일기 속에나 적힐 글이다. 남에게 읽히는 수필 속에 거리낌 없이 이런 말을 드러내는 것은, 첫째 수필 문장의 품격이 어떤 것인가를 모르는 소치이고, 둘째로는 평소에 이 작자의 교양을 의심케 하는 표현이다. 셋째는 이런 식의 표현은 소설적 수법이고, 서양의 언어 습속에서 온 잘못된 생각의 표현이다.
이런 까닭에 문장은 바로 그 사람이라고 했다. 인격 수련이 앞서야 문장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위 예문에서 작자가 애인 얘기를 서두로 꼭 써야 했을 것이라면, "옥포만에 오자마자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났다"쯤이면 서두의 품위가 살아난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는 말 속에는 은근한 깊이가 있다. 독자는 이와같은 함축에서 정감의 깊이를 읽어내게 된다. 수필 문장의 용어는 이와같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함축적인 말을 쓸 때 향기를 내는 글이 된다. 서두에서 결함을 드러낸 예를 다시 보자.
[예문] 짙어진 우애
얄밉도록 푸른 하늘과 향긋한 풀내음이 우릴 부를까?
야호! 통통배를 타고 물살을 가르며 청평연수원으로 향하는 우리네(한빛회) 마음은, 한없이 부풀고 함박 웃음꽃이 얼굴 가득 피어오른다.
도착과 동시에 호박이랑 무랑(오매! 동족 상잔의 비극이잖여-)을 숭숭 썰어 보골보골 찌개를 만드는 우리는 예비 새악시. 왁자지껄 시끄럼 속에 어느새 근사한 지상 식탁.
"햇살은 따뜻, 강물 위는 금빛. - 맛있게도 냠냠."
(D사보에서)
서두를 의문형의 강조법으로 쓰고 있는 것부터가 시작을 위태롭게 해서 안정감을 잃고 있다. "얄밉도록․야호․오매" 따위의 표현이 천박하다. 침착하지 못한 문장으로 호들갑을 떨고 있는 모습이 작자를 보지 않아도 보는 듯하다. 청평유원지로 가는 기분과 점심 준비 과정을 솔직하게 과장 없이 쓰면 된다. 고쳐본다면 다음과 같은 글이 될 것이다.
"푸른 하늘과 향긋한 풀내음이 우리들을 부른다. 통통배가 물살을 가르며 우리를 지금 청평유원지의 연수원으로 실어가고 있다." 이렇게 써야 자연스럽고 솔직하며 품위 있는 글이 된다. 예문을 또 보자.
[예문] 미(美)에게
다들다들한 종이 위에 무어라 적어야 할까? 문득 미의 얼굴이 떠오른다.
미야! 오늘도 이렇게 무작정 흘려보내 버렸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찌는 듯한 여름 은 지나가고 물드는 계절로 바뀌었지만, 또다시 다가오는 싸늘한 계절에 옥이와 미, 우리는 영원히 굳게 약속하자. 땀 한 방울 한 방울이 후에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말이야.
(S사보에서)
편지 형식의 글이나, 앞의 예문과 같이 첫단락의 서두가 의문형 강조법으로 시작이 되어 부자연스럽다. "다들다들"하다는 표현도 알 수 없는 말일 뿐 아니라, 어느 지방의 말인지도 알 수 없다.
즉 표준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작자가 임의로 만들어낸 것 같은데 이런 것은 삼가야 한다. 시인이 시어를 만든다고 하나 산문을 그렇게 생각한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다들다들"이 설사 표준어라 해도, 문맥상으로나 문장의 분위기에 어긋나는 말이면 쓰지 말아야 한다.
무게가 없고 경박스런 이런 글은 예외없이 젊은 층에서 보게 되는 결점이다. 적어도 수필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문장의 격이 어떤 것인가부터 익히고 나서 써야 할 것이다.
[예문] 친구
인생은 누구나가 한 번 태어나면 만났다가 헤어지게 마련이다.
오늘은 뜻하지 않게 B의 부음(訃音)을 듣고 S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 어제 저녁 늦게까지 종로에서 차를 나누고 헤어졌던 그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니, 허망하고 믿어지지가 않는다.
(회사원)
이 글의 서두 "헤어지게 마련이다"는, 작자의 감정이 친구를 잃은 충격의 분출로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런 말은 진부한 얘기다. 신선미를 잃고 있기 때문이다. 삭제해야 더 효과적이다.
[예문] 참사랑
결혼을 하는 사람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사랑이 없으면 결혼이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어제는 같은 과 동료 미숙이 결혼을 했다. 그들의 사랑이야말로 이 세상 둘도 없는 사랑이었다. 대학을 마치기까지 무려 6년간을 한결같은 사이였다.
(C기업 여사원)
이 글 역시 서두의 단락이 군더더기로 붙어 있다. 설교조요, 훈시조다. 한마디로 진부하다. 문체에 따라 이러한 서두가 있을 수는 있으나, 이런 경우의 문장 성격은 논리적이라는 것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서두의 문장은 논설문의 성격으로 전개가 되어야 한다.
서두의 또 한 가지 흠은 대화체 형식의 대사로 시작하는 글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필요없이 대화체로 시작되는 것은 수필 문장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
[예문 1] 마당발
"그렇게 큰 구두는 없습니다."
십여 년 전의 일로 기억된다. 245사이즈의 구두를 찾던 내게, 제화점 주인은 점잖게 무안을 주었다.
(주부)
대화체로 시작된 부분을 지문으로 풀어서 써야 한다. "십여 년 전의 일이다. 245사이즈의 구두를 찾았더니, 그렇게 큰 구두는 없다며 제화점 주인은 점잖게 내게 무안을 주었다."로 시작되어야 한다.
[예문 2] 포장마차 집에서
"오늘 밤엔 꽤 바람이 부네요."
"아, 글세 포장 날아갈까 걱정이라우."
포장마차 끄트머리마다 큰 돌맹이를 갖다 누르며 사람좋게 보이는 주인 아저씨는 성근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H사보에서)
역시 대화체로 시작된 서두가 수필이 아닌 소설적 기법의 형식이다. 작자가 문장 속에 들어가 있지 않다. 고쳐본다면 다음과 같은 글이 될 것이다.
오늘밤은 바람이 유난하다. 성근 이를 드러내며 포장마차 주인이, 바람에 날아가겠다면서 걱정을 한다. 네 귀에 무거운 돌을 지질러 놓았으나, 그래도 바람에 못이겨 펄럭거린다.
이상으로 여러 가지 형태의 서두의 결함을 살펴보았다. 예문으로 제시한 글은 대부분 수필에 뜻을 둔 회사원과 주부들이 쓴 글이다.
다음 예문의 서두는 비교적 안정된 문장으로 시작되고 있다. 솔직해서 꾸미려고 하지 않는 점이 차분한 분위기를 빚어내 독자를 끌어 들인다.
[예문 1] 변화가 나를 부를 때
창 밖에는 비가 조용히 내리고 있다. 요즈음은 계절이 바뀌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며 살아간다. 오늘은 그동안 변화되어온 내 모습을 조용히 앉아 돌이켜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했다.
(회사원)
[예문 2] 서로가 얻는 삶
입사한 지 어언 6개월, 적은 시간이면서도 많은 세월이 흘러버린 것 같은 느낌 속에 하루를 보낸다. 일하다 보면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일까 하고 반문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자기 나름대로의 목표를 향해 열심히 살지만,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를 반성하고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일하면 된다. 많은 사우들의 일하는 자세에서 그런 모습들을 본다.
(K사보에서)
[예문 3] 사미인곡
혼자서 아이 둘을 데리고 집 밖으로 나서다 보면 뭔가 잊은 듯 허전할 때가 있다. 초겨울 바람에 떨어져 길 위를 뒹구는 낙엽을 보면 미진한 것들이 고개를 든다.
남편과 결별 후, 한 사람이 남기고 간 빈 자리가 얼마나 절실한 것인가를 최근에야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주부)
이상으로 대략 서두의 성격과 방법을 살펴보았다. 수필 문장의 성향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면 지적 논리성과 감성적 서정성이랄 수가 있다. 서두가 논리적 문체로 시작되면 내용이 사회적․비평적 성격을 지니게 되며 부드럽게 시작이 되면 서정적 분위기의 글이 된다.
형식에 따라 또는 취향에 따라 자유롭게 쓰는 것이 수필이기는 하나, 초심자의 경우 상당수의 글이 서두가 논리적 성격을 띤다는 점이다. 논리적 형태로 시작이 되었다면 문장 전체가 그런 성격이라야 하는데, 서두만이 그렇고 전개 과정에서는 가벼운 느낌의 부드러운 수필이 되고 있다.
바꿔 말하면 서두를 잘못 시작한다는 얘기다. 정적인 내용일 때 서두의 시작은 이에 맞게 담담하게 시작되어야 한다. 충동에 의해 쓰게 되는 것이나, 차분히 가라앉혀서 나지막한 소리로 혼자 얘기하듯 시작해야 한다.
(목차)
(목차)
6. 소재와 주제
소재(素材)란 글을 쓰고자 하는 재료를 말하며, 일상 속에서 보고 느낀 것은 모두 소재가 된다.이를테면 눈 쌓인 창가에 핀 매화를 보았을 때라든가, 신문 사회면에서 선행(善行)에 관한 기사를 읽고 감동했을 때라든가, 길 모퉁이의 포장마차와 그 주인을 보고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든가 할 때, 매화․선행․포장마차가 소재가 되어 충동을 일으킨다.
일상 속의 모든 것이 소재가 된다고는 했으나, 작자의 체험이 특이하면 더욱 좋다고 할 수 있다. 평범한 것이라 해도 남다른 관찰력과 높은 식견의 인격에 사색이 따르면 좋은 수필이 된다.
이와 같이 소재에 의한 충동이 수필을 쓰게 하는 것이나, 앞에서 말했듯이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쓰는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즉 쓰고자 하는 중심 사상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주제다.글에 나타나는 주제는 문체나 형식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니고, 다만 작자의 개성적 인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뿐이다. 어떤 형태로든 중심 사상이 들어있어야 하고, 이것이 없으면 수필의 가치는 없다.
주제는 같은 대상이라 할 지라도 작자의 시각(인격)에 따라 달라지므로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가시적으로 겉만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보이지 않는 내면까지 보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시인이 소재의 대상에서 심상을 잡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수필도 실체적 대상에서 심상의 대상으로까지 확대시킬 때 주제는 분명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주제 의식이다. 가령 찬바람이 부는 밤길 모퉁이의 군밤장수가 있다고 하자. 큰 봉지를 사드는 사람, 작은 봉지를 사드는 사람, 어떤 날은 사는 사람이 눈에 띄지 않는 날도 있다. 이 때 작자의 눈에 비치는 군밤장수의 모습에 작자의 느낌(사상)이 붙는다.
이러한 군밤장수가 소재가 되었다고 했을 때 군밤장수는 작자의 시각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첫째, 군밤장수가 있는 것조차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둘째, 그저 있구나 하는 정도일 수 있으며, 셋째로 군밤을 사면서 그가 살아가는 모습에 관심을 기울여 자신과 비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단순히 물건을 팔고 사는 관계 이상으로 군밤장수에 대한 사정이나 연민 같은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 정신에 바탕을 둔 것과, 타산적․이기적인 상반된 인생관의 글로 나타날 수 있다.
이와 같이 소재와 주제와의 관계는 작자의 시각에 따라 갈려진다. 글이 사람이란 말은 이런 데서 나오는 말이다. 독자를 움직이자면 글 속에 인간정신이 깔려 있어야 한다. 짤막한 수필이 장편 소설 못지않은 질량감을 지니는 이유도 이런 점에 있다. 예문을 통해 소재와 주제의 갈림이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보자.
[예문 1] 군밤장수
밤 늦게 돌아오는 동네 어귀에 군밤을 파는 아주머니가 있다. 어디에 사는지는 모르나 어머니와 비슷한 나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지만 좀처럼 사드는 사람이 눈에 띄지 않는다. 어쩌다 사는 사람을 보면 내가 군밤장수가 되기라도 한 듯 마음이 밝아진다.
아주머니는 오래 전부터 철따라 리어커 장수를 한다. 여름이면 참외, 수박을 팔고 가을이면 밤을 굽기 시작한다. 가을이 가고 찬바람이 일기 시작하면 카바이트 등불을 깜박이며 밤 늦게까지 행인을 기다리고 있다. 국민학생 아니면 중학생쯤의 딸아이가 번갈아 나와 어머니를 돕는 모습이 보인다. 아버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혹시 없는 것은 아닐까 하면서 지나가다녔다.
나는 무심할 수가 없어 팔리지 않는 모습을 볼 때 가끔 군밤봉지를 사들곤 했다. 고향에서 군밤을 만들어 먹던 일을 회상하면서 하루에 팔리는 양을 묻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밝게 웃으면서 팔릴 때도 있지만 별로 없을 때도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내가 군밤을 사면 두서너 개를 언제나 덤으로 집어주곤 한다. 어렵게 살아도 마음씨 착한 사람들이 그렇듯 보이지 않는 곳에 있어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길은 어두운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집에 돌아와 식구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리 속에서 동생과 먹으면서 군밤장수 아주머니 얘기를 했다. 동생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다. 어머니를 따라 나와 있는 딸아이를, 동생은 자신에게 비교하면서 말했다. 살아가는 길이 제각기 다른 것이라고는 하지만, 고난을 딛고 살아가는 아주머니 가족들의 얼굴엔 어둠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창문을 흔드는 바람 소리를 들으니 날씨가 또 추워지려는 모양이다. 늦은 밤 귀가를 서두르는 발걸음 소리와 차 소리가 소란스럽다. 자주는 못 팔아줘도 정직하고 착하게 살아가는 군밤장수 아주머니의 희망을 돋구기 위해서도, 이따금 나는 군밤봉지를 사들곤 한다.
(회사원)
냉장고에는 언제나 갖가지 먹을 것이 채워져 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이 입맛대로 먹도록 배려를 해야 한다. 사시사철 음료수는 물론, 이른 봄부터 딸기로 시작해서 한 여름의 수박에 이르기까지 고루 갖춰 놓아야 한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그래도 불평이다. 어쩌다 미처 대놓지 못할 때가 있으면 참지를 못한다. 그럴 때면 부모로서 자식들에게 불평을 왜 들으랴 싶어 열심히 채워 놓는다. 하지만 그래도 정성이 부족할 때가 있다.
우리집 아이들은 이처럼 군것질을 즐기는데, 지난 가을에는 밤 줍는 모임에 데리고 나갔다. 남이섬으로 갔지만 거기까지 안 가도 밤은 얼마든지 살 수가 있다. 하지만 맑은 공기 마시며 즐기고자 해서 승용차로 나섰던 것이다. 돌아올 때는 상당한 분량의 밤을 싣고 왔다. 오던 길로 삶아서 주었더니 군밤 맛만 못하다고 한다. 이튿날 군밤을 만들어 먹었으나 웬일인지 길가에서 파는 것과 같지 않았다.
아이들의 불평에 따라 어제는 동네 어귀의 군방장수로부터 사들고 돌아왔다. 동창회를 마치고 늦게 돌아오는 길이었다. 큰 봉지를 집어들자 덤으로 두서너 개 넣어주었지만, 내가 몇 개 더 집어 넣었다.
동네 어귀의 그 군밤장수는 매우 궁색해 보인다. 지나다니며 몇번 팔아주었더니 나를 보면 인사를 하지만, 그 인사가 내게는 부담스럽다. 군밤을 팔아달라고 하는 것 같아서이다.
오늘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바나나를 샀다. 며칠 전부터 바나나가 떨어져 있었던 까닭이다. 동네로 들어섰을 때 군밤장수의 시선을 느꼈지만, 못 본 체하고 지나쳐 왔다. (주부)
같은 소재를 쓴 글인데도 주제는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문 1]은 삶의 진실과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연민, 자기 성찰이 깔려 가치 있는 글이 되고 있으나, [예문 2]의 경우는 문장으로서 흠잡을 데가 없어도 한마디로 속된 글이다. 이런 글을 속문이라 한다.
자신의 행복감에만 도취되어 있고 진실성이라든가 삶에 대한 철학이 없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물질주의, 이기주의의 극치를 드러내 자신의 행복만을 그리고 있다. 이것을 수필이라고 인정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두 예문을 비교할 때, 전자는 미혼 여성이지만 삶을 보는 눈과 생각의 깊이가 있고, 후자는 인생을 알 만큼의 나이에다 자녀를 가진 주부인데도 삶에 대한 생각이 천하고 속되기 그지없다.
오늘의 한국 수필에는 이런 류의 글이 적지 않다. 물론 작자의 개성적 영역이므로 남이 간섭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글을 써야 할 이유와 읽어야 할 가치가 없다.
7. 작품의 구성
구성이란, 내용을 요소별로 가려 하나의 유기적 통일체가 되도록 작품을 조직하는 것을 말한다.다시 말하면 요소별 내용을 체계 있게 배열하는 것이다. 소재를 다룰 때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떤 모양으로 만들어 내는가, 또는 쓰고자 하는 요소별 내용의 배열을 어떤 순서로 하는가이다.
소재가 수필이 되는 과정에는 여러 가지 요소별 이야기가 있다. 이것을 앞 뒤 순서를 가려 통일된 작품이 되도록 엮어내는 일이다.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문맥이 이어져야 한다는 문제가 생긴다. 각기 다른 요소들의 이야기가 주제를 향해 통일체를 이루게 하는 데는 문맥이 이어져야 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구성은 합리적이어야 하고 요소별 내용들이 제자리를 잡아야 한다. 건축물로 비교하면 평면적․입체적 공간 구축이 합리적일 때, 건축물의 효용도는 높아진다. 이 때의 건축물 구축에는 대지 선정에서부터, 설계․시공․준공까지의 순서가 따른다. 그러나 수필이라는 건축물은 순서가 바뀔 수도 있다.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뀌어야 효과적이다. 건축은 기초부터가 시작이 되나 수필은 지붕에서부터 시작할 수도 있고, 벽체에 관한 것부터 쓸 수도 있으며, 대문의 위치에서부터 쓸 수도 있다. 마무리 부분부터 시작할 수도 있고 시작한 동기부터 쓸 수도 있다, 이것이 수필의 구성이다.
작품의 구성 과정에 유의할 점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문맥이다. 여러 가지 요소의 단락적 내용이 배열될 때, 문맥이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소별 배열의 형태, 구성의 예를 보자.
예문 1] 분단의 현장에서
㉠ 옆자리의 20대 젊은 내외가 아까부터 품안의 아기에게 재롱을 떨리며 간다. 쾌적한 통일로, 임진각으로 달리는 버스 속이다. 차창 밖 논에는 기름을 발라 씻은 듯한 모들이 자라고 있다. 엊그제까지 가뭄 소동이더니 끝없이 펼쳐진 들판이 푸르다. 마음도 푸르다. 그러나 통일로를 북상하면서 푸르던 마음에는 어느덧 엷은 안개가 끼기 시작한다. 녹음에 물든 6월의 산하가 수심에 잠겨 울적해 보이는 까닭이다.
나는 오늘 통일로를 달리며 잃어버린 고향을 생각하고 있다. 실향민의 연약한 감상이 아니다. 동통으로 되살아나는 아픔인 것이다. 무슨 생각으로 가느냐고 옆자리 젊은이에게 물으니, 진주가 고향이라는 그들은 관광차 가는 것 뿐이라며 밝게 대답한다. 젊은 그들에겐 6월의 상처가 없다.
임진각에 닿아 또 한 쌍의 젊은이게게 같은 질문을 던져보았다. 제주도가 고향이라는 그들도 임진각에 맺힌 한을 모른다. 강 건너 보이는 땅이 건너갈 수 없는 곳일 뿐, 별다른 감회가 없다고 한다. 광주에서 올라온 두 처녀도 철조망이 섬뜩하달 뿐, 임진강 앞에서 제 허리 잘린 아픔을 모르고 있다.
㉡ 어느 때부턴가 나는 어디를 가나, 차창에 펼쳐지는 경관을 그림으로 보는 버릇을 지녔다. 하지만 오늘은 통일로 북단에 와서, 그림으로 보이던 산하가 정을 거두고 있는 것을 보아야 한다.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 추켜 세우지만, 더 밝아 보여야 할 6월은 그렇지가 못하다. 기억 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게 곁을 주려하지 않고 있다.
한 걸음 정을 두고 앉은 산하를, 자유가 무성한 도시 속 젊은이들에게서 보는 일은 더욱 우울한 일이다. 6월의 상처를 되새기는 일을 주체스러워 하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그런 기억을 되살리기보다는 그들의 오늘의 자유가 부러울 뿐이다. 6월의 강산은 그래서 더 울적한가.
통일로 주변 멀리서 가까이서 뻐꾸기가 울고 있다. 그 울음 소리가 슬프고 처량하다. 자유의 다리를 뒤로 돌아서려니 어머니의 말씀이 귓전에 와 울린다. -- 집 앞까지 왔다 그냥 가려느냐…… 임진각에 온 사람들의 마음이 나와 같을 리는 없을 것이다……(윤모첨)
[예문 2] 분단의 현장에서
㉡ 어느 때부턴가 나는 어디를 가나, 차창에 펼쳐지는 경관을 그림으로 보는 버릇을 지녔다. 하지만 오늘은 통일로 북단에 와서, 그림으로 보이던 산하가 정을 거두고 있는 것을 보아야 한다.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 추켜 세우지만, 더 밝아 보여야 할 6월은 그렇지가 못하다. 기억 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게 곁을 주려하지 않고 있다.
한 걸음 정을 두고 앉은 산하를, 자유가 무성한 도시 속 젊은이들에게서 보는 일은 더욱 우울한 일이다. 6월의 상처를 되새기는 일을 주체스러워 하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그런 기억을 되살리기보다는 그들의 오늘의 자유가 부러울 뿐이다. 6월의 강산은 그래서 더 울적한가.
통일로 주변 멀리서 가까이서 뻐꾸기가 울고 있다. 그 울음 소리가 슬프고 처량하다. 자유의 다리를 뒤로 돌아서려니 어머니의 말씀이 귓전에 와 울린다. -- 집 앞까지 왔다 그냥 가려느냐…… 임진각에 온 사람들의 마음이 나와 같을 리는 없을 것이다……
㉠ 옆자리의 20대 젊은 내외가 아까부터 품안의 아기에게 재롱을 떨리며 간다. 쾌적한 통일로 - 임진각으로 달리는 버스 속이다. 차창 밖 논에는 기름을 발라 씻은 듯한 모들이 자라고 있다. 엊그제까지 가뭄 소동이더니 끝없이 펼쳐진 들판이 푸르다. 마음도 푸르다.
그러나 통일로를 북상하면서 푸르던 마음에는 어느덧 엷은 안개가 끼기 시작한다. 녹음에 물든 6월의 산하가 수심에 잠겨 울적해 보이는 까닭이다.
나는 오늘 통일로를 달리며 잃어버린 고향을 생각하고 있다. 실향민의 연약한 감상이 아니다. 동통으로 되살아나는 아픔인 것이다. 무슨 생각으로 가느냐고 옆자리 젊은이에게 물으니, 진주가 고향이라는 그들은 관광차 가는 것뿐이라며 밝게 대답한다. 젊은 그들에겐 6월의 상처가 없다.
임진각에 닿아 또 한 쌍의 젊은이게게 같은 질문을 던져보았다. 제주도가 고향이라는 그들도 임진각에 맺힌 한을 모른다. 강 건너 보이는 땅이 건너갈 수 없는 곳일 뿐, 별다른 감회가 없다고 한다. 광주에서 올라온 두 처녀도 철조망이 섬뜩하달 뿐, 임진강 앞에서 제 허리 잘린 아픔을 모르고 있다.
위의 [예문 1, 2]는 같은 내용의 글이다. [예문 1]의 구성은 작자가 임진각으로 가는 과정을 출발부터 순서대로 쓴 것이고, [예문 2]는 요소별 내용 ㉠과 ㉡을 바꿔서 구성한 것이다. 수필은 어느 경우이건 문맥이 통하고, 무리가 따르지 않아야 한다.
[예문 3] 추억의 바이올린
① 어렸을 적, 한산했던 서울 거리에 흐르던 약장수의 바이올린 선율은 나를 매혹시켰다.
② 해방이 되자 본토로 돌아가는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물건이 시장바닥에 쏟아져 나왔다. 호주머니를 털어 싸구려 바이올린을 하나 샀다. 일본제 스즈키. 바이올린이라기보다는 깡깡이라고 부르는 게 나았을 것이다. 그 때 내 나이 열 아홉, 대학 예과 졸업반이었다.
③ 무턱대고 긁어본다. 그 소리에 질려 상을 찌푸렸던 식구들도 1년쯤 지나니까 완전 면역이 되었던지 자못 평화스러운 표정으로 변모했다.
④ 학부에 진학했을 때 이른바 국대안(國大案)이라는 것으로 해서 대학은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 휴교 조치가 내려졌다. 그래서 나는 군정청 보건 사회부의 통역사로취직했다. 차라리 잘 되었구나 싶었다. 등록금이라도 벌자는 것, '주변없는' 이사관이었던 부친의 호주머니에서 늘 찬바람이 일고 있었기 때문이다.
⑤ 사무실에 들락날락하는 한 젊은 바이올리니스트가 있었다. 나중에 그가 내 바이올린 선생이 되고, 내가 그의 영어 선생이 된 것은 한 기연(奇緣)이 아닐 수 없다. 악기를 바꿨으면 하는 그의 눈치를 챈 나는, 한 달치 봉급을 몽땅 털어 모처럼 구했던 다섯 권짜리 독일어판 해부학 책을 내다 팔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든가, 얼마 후 나는 사이언티스트 오케스트라의 단원이 되었고, 급기야는 꿈이었던 제1 바이올린 주자로까지 올라갔다.
⑥ 시인과 농부 초입부 연주에서 E선 꼭대기가 잡히지 않아 애태웠던 추억. 선생끼리 배우는, 학생끼리 가르치는 이 공부는 6․25동란이 터질 때까지는 근 5년간 계속 되었다. 마지막 받았던 레슨은 '스프링 소나타.' 중공군이 서울에 육박하고 있을 때 나는 망부(亡父)의 친구였던 R국장 지프에 편승, 남하했다. 이불을 차 지붕에 실을 정도였으니까 차마 "바이올린도!"하는 말은 목구멍에 걸려 나오질 않았다.
⑦ 그 때 서울 대학 병원은 제주도 한림에까지 후퇴했다. 진료는 오전 중, 그래서 오후만 되면 바닷가에 나가 육지를, 식구를, 짐을, 그리고 그 바이올린을 그리워했다. 간호원들이 붙여준 내 별명은 '약장수'. 가끔 미친 듯 빈 손으로 바이올린 연주를 하는 내 모습을 훔쳐 본 모양이었다.
⑧ 이듬해, 몹시도 추웠던 그 어느날, 나는 인기척 없는 서울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한시 빨리 바이올린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방에 들어서면서 나는 이를 악물었다. 바이올린은 산산조각이 난 채 방 한 구석에 내동댕이 쳐져 있었다. 후퇴하면서 개머리판으로 짓이긴 듯, 그 처참한 잔해는 시신을 연상케 했고 교과서까지 내다 팔은 쓰라림을 되살아나게 했다.
⑨ 2년이 지났다. 공군 군의가 된 나는 여전히 빈손으로 바이올린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이종찬 장군이 소시적 당신이 아껴 간직했다는 바이올린을 보내 주었다. 바이올린 수학차 청운의 뜻을 품고 현해탄을 건넜던 장군은 어쩌다 바이올린 대신 군도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명장이 되었다.
⑩ 세월은 흘렀다. 셋방살이 시절, 내 바이올린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 단잠을 설치던 갓난 아이가 어언 커서 동아 음악 콩쿨 바이올린부에서 1등을 차지하게 되었다. 아들은 지금 미국에서 바이올린 공부를 하고 있다. 말하자면 대를 물린 셈이다.
⑪ "집안 크리스마스 음악회가 참 멋있었다고 기억합니다. 이젠 제가 없으니 아버지가 대신 바이올린을 맡으셨으면 합니다. 한 때는 날리셨다고 늘 말씀하시잖았어요? 제가 듣기에도 약주를 안 드시면, 제법 음정도 정확하시던데요? 기분 먼저 내시느라 템포가 틀려서 사고지……."
⑫ 미국에서 온 편지다.
얼마 전 나는 20여년만에 바이올린을 장군에게 반납했다. 추억의 바이올린!
"한 곡 들려 주시겠소?"
백발이 성성한 퇴역 장군 앞에서 나는 '주버니어(추억)'를 연주했다.
이제 바이올리니스트도 퇴역하는 것이다. (이장규)
이 글의 구성을 살펴보자. ①, ②는 바이올린을 하게 한 동기를, ③은 시하하게 된 동기를, ④에서는 취직을 하게 된 사연, ⑤에서는 제1 주자가 된다. ⑥에서는 전란으로 인해 손에 없는 바이올린을 그리워하고, ⑧에서는 수복 후 찾은 바이올린의 처참한 광경과 애정이 드러난다.
⑨에서 구성이 바뀌어, 장군이 준 바이올린에 대한 사연이 되고, ⑩, ⑪은 대물림한 사연으로 변한다. 그리고 끝으로 ⑫에서 장군에게 반환하면서, 바이올린에 대한 추억을 되새긴다.
이 작품 구성은 작자에 따라 순서가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다. 장군에게 반환한 사연부터 할 수 있고, 대물림 얘기에서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 여하간 어느 부분에서 시작을 하고 전개가 되든, 각각 필요한 요소의 내용에 문맥이 이어져야 함은 말할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예문 5] 일하며 배우며
출근 후 작업 준비에 부산하던 현장에 스피커 소리가 엄숙하게 울려 나오자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다. 각 조마다 계장․주임․조장의 주도하에 조회를 시작한다. 일하면서 배우는 수출의 주역, 우리들은 이렇게 해서 하루를 시작한다.
작업 시작벨이 넓은 작업장에 울려퍼지면 모두들 제자리에 앉아 일을 시작한다. 앞에 걸려 있는 흑판이 눈에 띈다. 흑판에는 오늘의 생산량과 배 시간당 생산량이 적혀 있다.
열심히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즐거운 점심 시간이 된다. 1시, 오전 일과가 끝나는 벨이 울리자 바쁘게 움직이던 작업장이 일순 정지되는 듯해진다.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빗자루를 들고서 간단한 청소를 한 후 식당에 갈 차비를 한다.
1시 30분이 되면 거의가 식사를 끝내고 현장에 들어온다. 점심 식사가 끝나면 재미있는 레크레이션을 하면서 즐겁게 보낸다. 요일마다 각각 다른 레크레이션이 있다. 율동과 함께 노래도 부른다. 아쉬운 점심 시간이 끝나는 벨이 울리자 모두들 자기 자리로 돌아가 일할 준비를 한다. 곧바로 작업장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고, 흑판에 쓰여지는 생산량을 눈여겨 보며 열심히 해 보자고 한다. 다른 부서보다 우리 과는 2시간 정도 빨리 퇴근을 한다.
4시 50분. 하루 일과를 마치는 벨이 울리면, 최종 라인에 쌓여 있는 완제품들 앞에 걸려 있는 흑판에는 커다랗게 써 놓은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1계 목표량 달성, 2계, 3계, 목표량 달성…….
일을 마친 작업장은 수출 직전의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사라진다. 모두들 학교갈 준비와 내일의 작업 준비를 위한 간단한 정리 정돈을 끝내고 종례를 한다. 수고했다고 서로들 인사를 한 후, 탈의실로 달려가 교복으로 갈아입고 즐거운 마음으로 현장을 나온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작업복을 입고 일하던 우리가 학생으로 변하는 것이다. 보람 있는 우리의 하루는 이렇게 해서 끝이난다. (박희자․근로학생)
근로 학생이 하루의 일과를 시간대에 따라 순서대로 쓰고 있다. 이 정도의 글을 쓴다면 구성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하루의 생활이 시간표대로 이루어져 나가는 것이긴 하지만, 글로 쓸 때는 앞 뒤 순서를 바꿔 써 보는 것이다. 수필은 자기 체험을 쓰는 글이되, 재구성을 해야 좋은 글이 된다. 이것이 구성이다.
점심 시간에서부터 시작해서, 짧은 점심 시간이 아쉽다든가, 하루를 마치고 교복으로 갈아입는 시간을 서두로 내세울 수도 있다. 이를테면 "오늘도 고된 일과를 무사히 끝냈다. 지금은 내가 교복으로 갈아입는 시간이다.
이 순간은 내게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또 다른 의미의 하루의 시작이다."라든가, "매일 되풀이되는 공장 소음 속에서 풀려나 교복으로 갈아입는 시간은, 내게 있어서 새로운 삶을 찾게 하는 시간이다." 따위로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루의 일과 중 어느 부분을 시작으로 하는 서두의 전개와 마무리 부분이 짜여지면 된다.
건축물의 구조가 평범할 때 미관이 없듯이, 문장도 평면성을 벗지 못하면 단조롭다. 수필이 짧은 글이긴 하지만 짧을수록, 구성의 묘가 없으면 밋밋한 글이 되고 만다.
8. 제목과 마무리
수필을 써 놓고 제목을 붙일 수가 없어 고심할 때가 있다. 이것은 제목이 내용과 관련성이 있어야 한다는 데서 오는 것이다.
수필 제목은 작품에서만이 아니라 수필집에서 붙이는 일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명사적 성격의 짤막한 것이었으나, 지금은 문장의 한 구절 같은 형식으로 붙이는 것을 본다. 이에 대해 차주환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런 현상은 독자층의 관심을 불러 일으켜 출판의 활력소 구실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는 얼마 동안 지나서 다시 과거의 형태로 짧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일시적 유행이며 '초가집' 같은 짧은 제목들과, '사랑을 줍는 사람들의 기침 소리',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따위로 길게 붙는 제목들은 독자층을 지나치게 낮게 평가하는 태도이며, 이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긴 제목에 부정적 견해를 나타내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그런 수필집 제목은 말장난같이 느껴지며, 지나치게 신경을 써서 그런 제목을 붙이는 일은 생각해 볼 문제다."
수필에 제목을 붙이는 일은 가령 옷으로 비교해 볼 수가 있다. 1차적으로 사람의 풍취를 외형적으로 가려보게 되는 것이다. 지난날에는 신분상 계층까지를 옷으로 나타냈으나 오늘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옷차림으로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쯤은 짐작이 간다. 접객 업소의 여인 차림을 하면 현숙한 주부도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다. 옷은 입은 사람의 본체를 심층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본질에 비추어, 수필에 붙는 제목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문] 장갑
…정치 초년생인 남편에게 공천이 주어진 것은 요행으로 된 것만은 아니다. 앞으로의 일은 유권자의 표를 얼마나 얻느냐 하는 결전만이 남아 있다. 지연․혈연․친지․이웃 등 가가호호를 방문하며 종횡으로 뛰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늦게 유세장에서 돌아온 그가 흰 토끼털 가죽장갑 하나를 내놓았다. 동짓달 바람이 매서우니 끼고 다니라 했다.
가난한 정치 지망생의 아내인 나에게 그 토끼털 장갑은 작은 선물이 아니었다. 집집을 돌아 기호표를 나누어 줄 때는 그 장갑이 오히려 거추장스러워, 들고 다니거나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한 짝을 잃고 말았다.(중략)
그가 가고 없는 지금, 출근을 서두르는 아침길 손끝이 시리다. 퇴근길에는 백화점엘 들러 장갑을 사 끼어야 하겠다. (이병남)
제목이 실명론적(實名論 的)이다. 작자는 출근길 추위 속에서 토끼털 장갑에 얽힌 추억을 회상하고 있다. 이 글은 삶과 사랑과 선거라는 이름의 인생 도박을 치르고 남편이 타계한 현실 속에서, 지난날의 추억을 토끼털 장갑에 건 얘기다.
허명론적(虛名論的)으로 붙인다면, '삶과 사랑과 선거라는 이름의 인생 도박'쯤이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독자를 자극하는 요소가 어느 정도는 드러날지 모르나, 표피적으로 자극하는 말장난이요 상업주의적 제목일 뿐이다. 이제 여기까지 작업을 했으면 남은 것은 작품의 최종 마무리이다.
문장의 첫 부분을 서두(書頭, 序頭)라 하며, 마무리 부분을 결미(結尾), 또는 결말(結末)이라 한다. 모두가 문장 요소의 한 부분으로 중요성을 의미한다. 지난날의 편지투에는 서두와 결미 부분이 형식화되어 이 형식에 맞추지 않으면 서투른 솜씨로 보았다. 그러나 오늘의 수필의 서두와 결미가 문장 형식의 부분이기는 하나, 지난날의 편지투와 같은 형식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반복이 되지만 수필은 서두에서부터 좌우가 된다고 했다. 그러나 잘 쓴 수필도 마무리가 잘못되면 흠이 된다. 마무리를 어떻게 하느냐는, 서두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와 같이 한마디로 단언하기 어렵다. 수필 문장의 마무리 부분은 여운이 담겨져야 효과적이다. 여운은 논리적이건 서정적이건 문체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는 있으나, 수준 높은 문예영화의 마지막 장면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영화가 끝나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아쉬운 상태 - 그런 감동의 진폭이 수필 문장의 마무리가 된다면 그 이상의 효과는 없다. 여운은 작품의 감칠맛(향기)을 이르는 말이며, 할 말을 더 하면 그것은 사라진다. 적당한 곳에서 붓을 거둘 때만이 살고, 작품 전체의 성패를 좌우하게도 한다.
9. 문장 꾸미기
(어떻게 써야 좋은 글인가)에서 수필 문장의 기본적인 요소를 충분하게 설명을 하였다. 일반적으로 문장은 평론가의 글이나 학자의 글처럼 어렵게 쓴 글이라야 좋은 것으로 아는 경우가 많은데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초보자들이 문장을 어렵게 쓰려는 경향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무슨 말을 썼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말로 쓰거나, 또는 아름다운 말로 꾸며져야 좋은 글로 안다. 이것은 수필 문장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까닭이다.
수필은 쉽게 읽혀지는 글이라야 한다.쉽게 읽힌다는 것은 힘 안들이고 썼다는 뜻이 아니다. 힘 안 들게 읽혀지는 글일수록 또는 편하게 읽혀지는 글일수록 힘들여 쓴 글이다. 쉽게 쓴다는 것은 꾸미지 않는 것은 말하며, 꾸미지 않는다는 것은 아름답게 쓰려고 하지 않고 간결하고 담백하게 쓴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담백하게 쓴 글이 어떤 것인가를 예문으로 보자.
[예문 1] 냉면기
날이 더워지는데 따라 냉면의 풍미도 한층 더해간다. 학인(學人)이 식도락(食道樂)을 논하는 것은 약간 체통에 어울리지 않는 것같이 보이겠으나, 또 먹지 못하면 연구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그것을 그리 타박할 것도 못 된다. 그것이야 어찌 되었든간에 어쩌다 의식을 하게 되면 대개 냉면을 먹고, 또 그럴 때마다 흔쾌한 기분을 맛보게 되는 것이 보통이므로, 이 냉면맛이 더 나는 계절에 냉면을 얘기해 보고 싶어진 것이다.
여러 해 전에 들은 이야기지만, 미국의 대통령까지 지낸 아니젠하워 장군은 취미가 요리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취미를 물으면 실상은 별로 읽는 것은 아니지만, 흔히 독서라고 대답하는데 비하면 좀 궁상스럽게 여겨지기 쉽다. 그가 군인이기 때문에 자기 취미를 솔직하게 공개한 것일 게다.(하략)
(차주환)
화롯가에 앉아 한가롭게 담소를 나누는 것처럼 그리고 편안하게 읽혀지면서 정감을 주고 있는 것이 그려진다. 아름답게 꾸며 쓴 데가 없다. 얼른 보면 얘기하듯 이어져 나가고 있으나 유의해서 보아야 할 일은, 한마디도 군더더기가 없다는 점이다. 써야 할 말만이 들어가 있다.
이렇게 꾸미려 하지 않을 때 문장은 소박하다. 소박해야 진실성이 담기며 진실성이 있어야 감동을 준다. 소박하게 쓰자면 부사나 부사어 또는 형용사 따위를 함부로 쓰지 않는 일이다.
소박하다는 것은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수식을 지나치게 하는 것은 분칠을 하는 것과 같아서 진실성을 희박하게 한다. 수필 문장의 특성은 소박한 데 있고, 글 속에 감정이 숨겨지도록 쓰는 데 있다.
따라서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는 글은 독자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 독자가 글 속에서 감정을 찾아내게 하는 것이 소박한 글이다. 이런 점에 유의하면서 예문을 보자.
[예문 2] 정리된 낙서
흐트러진 마음 가득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 앉은 날, 세월의 막연함을 묵살하기 전에 그동안의 내 삶은 얼마만큼을 얻고 또 얼마만큼을 잃었는가. 삶의 계산대에 올려질 만큼 충실한 삶이었던가?
분주한 가을마저 떠나가 버리고 이제는 외로운 겨울 앞에서 감상도 몸부림도 어설픈 망상도 거두고 숙연히 월동 준비에 분주해야 하며, 인내를 되뇌이고 내 주위의 떠나버린 모든 것에 대해 회상하는 작은 인생의 계단에 올라서서, 흩어진 낙엽들의 외로움을 탓하기 이전에 그저 묵묵히 삶의 생활방침에만 의존할 뿐, 무책임한 자신이 싫고 연약하기에 하루를 시작하는 이런 시각의 찰나.
(D사보에서)
이 글은 체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 아니라 생각만을 나타낸 사색적인 글이다. 서두의 첫 구절부터가 솔직한 표현이 아니어서 무엇을 말한 것인지 뜻이 명확하지 않다. 아름답게 꾸미려고 한 까닭이다.
마음이 안개처럼 흐렸다는 것인지, 실제로 안개가 낀 것을 말한 것인지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초심자들은 이와같이 꾸미려고 해서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글을 쓴다.
이 글의 끝 부분, "이런 시각의 찰나"도 자연스러운 표현이 아니다. 가령 첫 구절 부분을 고쳐본다면 다음과 같은 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안개가 자욱히 내려서 흐트러진 마음을 더 무겁게 한다."
[예문 3] 잃은 것 찾기
하늘이 어깨 위로 내려와 있다. 짙은 회색의 오후다. 아무래도 비는 내리고야 말 것 같지만 오늘은 우산을 챙겨드는 인색함을 접어두고 싶다. 먹장구름이 하나 가득 흩어진 하늘은, 마치 묶여지지 못한 원고지들이 떼지어 흩어진 습작 소설가의 방바닥과도 같다.
우울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거리. 표정을 저당잡힌 무표정의 얼굴들이 범람하고 흡사 자력에 이끌리는 쇠붙이처럼 저항의 몸짓을 상실한 빛깔없는 생활인의 모습들이 표류하고 있다. 저마다 제 행동의 당위를 찾기에 분주하고 그 당위를 인정받는 일에 골몰해 있다.
(H사보에서)
사보(社報)의 응모작 중에서 장원으로 뽑힌 글이다. 이 글 역시 수필 문장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쓴 것이다. "하늘이 어깨 위로 낮게 내려와 있다"부터가 꾸민 글이다. 앞서의 예문과 같이 이런 글을 신선한 표현으로 볼 사람이 있을 것이다.
계속되는 구절, "오늘은 우산을 챙겨드는 인색함을 접어두고 싶다"처럼 꾸민 글이 또 있을 수 없다. 첫 문단의 끝부분, "소설가의 방바닥과도 같다"까지를 냉면기와 비교해 본다면, 이 글이 얼마나 솔직하지 않게 쓴 글인가를 알 것이다. 예문 첫단의 뜻을 살려 고쳐 본다면 다음과 같은 글이 되어야 한다.
금새 비라도 올 것같이 구름이 낮게 흐른다. 웬만큼 흐리지 않으면 우산을 들고 나서지 않는데 오늘은 들고 나섰다. 먹구름이 분분하게 흐르는 모양이, 마치 땅바닥에 흩어진 원고지처럼 어지럽다…….
이밖에 "표정을 저당잡혔다"느니 "저항의 몸짓을 상실한 빛깔없는 생활인의 모습"이니 한 것 등은, 모두 지나치게 꾸민 말장난이며 알맹이가 없는 글이다. 초심자의 경우 대부분이 이런 표현을 즐겨 쓰는데, 어째서 이런 문장이 유행처럼 번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국어 교육의 잘못된 단면이 아닌가 한다.
중․고등 교과서나 대학 국어에는 상당량의 수필이 들어 있다. 그것은 모두 문장으로서 표본을 보인 글들이다. 그런데도 앞의 예문과 같은 글이 나오는 것은 속된 문장처럼 수필문장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쓴 일부 문필에 물든 탓이다.
자기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알쏭달쏭한 표현을 쓴다는 것은, 마치 시인이 난해한 시를 써놓고 자기만이 알 듯이, 좋은 문장으로 착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자기 도취의 글이 되고 마는 것이다.
다음 예문은 현재 주요 일간지 문예 강좌에서, 수필 실기 강의를 통해 많은 문필가를 배출시킨 강사의 글이다. 문장의 진솔함과 소박성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볼 수 있다. 보기에는 평범하나, 한 구절 한 자의 군더더기가 없다.
[예문] 쌍동이 마을
여수에서 15Km 떨어진 중촌 마을이 장수와 쌍동이의 마을로 보도되자, 건강을 지키려는 사람과 아기를 못낳는 부인들의 행렬이 이곳 약수터로 줄을 잇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와는 달리 중촌 마을 바로 이웃에 있는 하촌 마을과 오룡 마을에서는 쌍둥이가 태어나지 않아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다.
유독 중촌 마을만 75가구 가운데 35가구에서 388쌍의 쌍둥이가 태어났는데, 이것은 동쪽에 보이는 쌍태산의 정기 때문이라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 마을에서 쌍둥이가 태어나는 것이 중촌 마을에서만 보이는 쌍태산 때문일까.
성남시에 있는 조철래(男巫․42)씨의 경우 남자이지만, 경대 앞에서 화장도 하고 가슴에 브래지어를 하는 등 여복을 한 다음, 창피해서 바깥 출입을 못하고 하루 종일 방안에만 머물러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기를 낳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 아기 낳으면 입힐 옷과 기저귀감까지 끊어다 놓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어떤 때는 상상 임신을 해서 배가 불러올 때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하 생략)
(서정범)
[예문] 변두리 다방
일요일이 되면 무료한 시간을 어떻게 메꿀 것인가 고민 아닌 고민을 많이 하게 된다. 도무지 취미라고는 없는 사람이어서인지 일요일 아침을 먹고 나면 할 일을 생각하느라 멍하고 한참을 앉아 있기 마련이다. 담배도 피우지 않고 초점없는 동공을 하고 앉아 있는 모습은 내가 여자라 해도 그런 남자야말로 참 매력없이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아내는 도무지 어떻다고 말을 하지 않는다. 원래가 활동적이 아닌 사람인데다 주머니 사정이 좋을 때가 없는 위인에게, 아이들서건 어디 놀이를 가자고 제의하면 괜히 약 올리기 위해 하는 소리로 오해받을 까 싶어서인지 내 하는 대로 보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요즈음 나는 일요일이면 으레 우리 동네의 S다방을 들르고 있다. 누구와 약속이 있다거나 하다못해 그 다방에 있는 레지 아가씨 한 사람이라도 보고 싶어서 찾아가는 것은 아니다. 국민학교 1학년짜리 딸아이 손을 잡고 산책삼아 다방에 들렀다가 차 한 잔 하고 돌아오면, 일요일 내내 방구석에만 쳐박혀 지낸 것만은 아니라는 자위를 지닐 수도 있거니와, 하루에 커피를 딱 한 잔 해야 하는 습관을 떼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하 생략)
(박연구)
두 편의 예문이 보이는 것은 첫째, 문장이 쉽고 편안하게 읽힌다는 점과 둘째, 꾸밈이 없이 솔직하고 소박하다. 그런 까닭에 아름답게 쓰려고 한 글보다 마음 속으로 와 닿는 진실성이 강하다.
(목차)
(목차)
4. 창작의 실례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 「국화 옆에서」 전문
․작가의 창작 동기
하나의 시상이라는 것은 한 순간에만 의거하는 것은 아니올시다. 또 모든 과거의 상념들과 전연 무관하게 단독으로 우연히 성립될 수 있는것도 아니올시다.
「국화 옆에서」를 예로 들어 말씀드리더라도 여기에는 네 개의 이미지가 중첩되어 있습니다만, 이것들은 그 하나도 한 순간에 우발적으로 투영된 것에만 의거한 것은 아닙니다.
4연 중 맨 첫연의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봄부터 소쩍새는/그렇게 울었나보다"의 ---한송이의 피어 있는 국화꽃의 색채와 향기의 배후에 봄부터 첫가을까지 계속되었던 저 소쩍새의 울음의 음향을 참여시킨 이미지는 물론 색채와 음향을 조화시켜 볼려는 표현적 의도에 의해서 결정을 보게 된 건 사실입니다 만은 이 한 개의 국화를 중심으로 하는 이미지가 고정되기까지에는 그 전에 이와 비슷한 많은 상념이 내 속에 이루어지고 연멸하고 다시 이루어지면서 은연중에 지속되어 왔었던 거을 나는 기억합니다.
그 중에 몇 가지를 예로 들어 말씀드리면, "저 우리 이전의 무수한 인체가 하여 부식해서 흙속에 동화된 그 골육은 거름이 되어 온갖 풀꽃들을 기르고, 그 액체는 수증기로 승화하여 구름이 되었다가 다시 비가 되어 우리 위에 퍼부었다가 다시 승화하였다가 한다"는 상념이라든지, "한개의 사람의 음성에는---그것이 청하건 탁하건 절실하면 절실할수록 거기에는 반드시 저 먼 의 음향이 포함되리라"는 상념이라든지 "저 많은 길거리의 젊은 소녀들은 한 우리 애인의 분화된 갱생이라"는 환상이라든지---이런 것들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상념들은 언뜻보기엔 「국화 옆에서」의 첫 연의 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 '인체 윤회'의 상념이나, 저''의 환각등은 --요컨대 이러한 상념과 환각의 거듭 중복된 습성은 한송이의 국화꽃을 앞에 대할 때, "이것은 저 많은 소쩍새들이 봄부터 가을까지 계속해 운 결과러니"하는 동질의 을 능히 불러일으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또한 제2연의 내용이 되는 국호개발의 한 원인으로서 여름의 천둥소리들을 끌어올 수도 있는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에 쓴 '인체 윤회'나 ''이나 '愛人부활'의 상념 등이 「국화 옆에서」의 1․2연의 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이 '천둥과 국화'나 '소쩍새와 국화'에 관한 상념의 습성은 여기에서만 해소해버리는 일이 없이 내 인생의 다음 체험에 반드시 그 그림자를 던지게 될 것임은 물론입니다. 그거야 하여튼 다음의 제3연은 이 모든 젊은철의 흥분과 모든 감정 소비를 겪고 인제는 한 개의 잔잔한 우물이나 호수와 같이 이 잡혀서 거울 앞에 앉어있는 한 여인의 美의 영상이 내게 마련되기까지에는 이와 유사한 많은 격렬하고 잔잔한 여인의 영상들이 내게 미리부터 있었을 것임은 물론입니다. 새로 자라오르는 보리밭 위에 뜬 달빛과 같은 애절한 여인의 영상도 있을수 있습니다. 오월의 아카시아 숲을 보고 그 향기를 맡는 것 같은 신선한 여인의 영상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는 저 에집트의 여왕 크레오파트라와 같이 오만하고 요염한 여인, 또는 산악고 같이 든든하고 건실하고 관대히 아름다워 우리가 그 무릎 아래 가서 포근히 쉬어보고 싶은 여인, 또는 성모마리아와같이 다수굿하고 맑고 성스러운 여인 또는 저 와 같이 스스로도 멋지고 또 고차원의 온갖 멋을 이해할 수 있는 여인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성질의 여러 가지 형태의 여러 가지 여인의 미의 영상이 우리의 속에 계속해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러한 모든 여인의 미의 영상의 체험 역시 그 중복됨을 따라 우리에게 여인들의 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져옴은 사실입니다. 좀 쑥스러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형편이 이 되었습니다만은, 내가 에 '소복하고 거울 앞에 우두커니 홀로 앉아있는 의 여인'의 모습을 보았다면, "흥! 저 아주머니는 핼쓱한게 밉상이야. 얼이 빠졌어!" 하고 비웃었음에 틀림없었을 것이지만, 인제 이만한 여인의 미를 새로 이해하게 된 것도 앞에 쓴바와 같은 것들의 많은 되풀이, 되풀이의 결과임은 물론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느 해 새로 이해한 이 정일한 사십대 여인 속에 잠재해 있다가, 一九四七년 가을 어느 해 어스름때 문득 내 눈이 내 정원의 한그루의 국화꽃에 머물게 되자, 그 이 내 속에서 비로소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국화는 물론 내가 어려서부터 많이 보아온 꽃이고, 가끔 꺾어서 책상 위에다 꽂아 놓기도 했고, 또 '아름답다'고 말해본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때처럼, 절실하게 가깝고, 그립고, 알 수 있고, 까닭없이 기쁘게 느껴진 적은 그 전엔 없었습니다. '이것을 시로 쓰리라' 작정하고 책상머리에 와서 앉아, 내가 맨저 기록해 놓은 것은 제3연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써 놓고, 몇 시간을 누었다 앉었다 하는 동안 제1연과 제2연의 이미지가 저절로 모여 들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내게 있어서는 오랫동안 어느 구석에 잊어버렸다가 앞서 찾아내서 쓰게 되는 낯익은 내 옛날의 소지품을 상용하는 것과 같은 감개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연만은 좀처럼 표현이 되지 않아, 새벽까지 누었다 앉았다 하다가 그만 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이것은 며칠 동안을 그대로 있다가, 어느 날 새벽 눈이 띄어서 처음으로 마련되었습니다. 밖에선 무서리가 오는 듯한 늦가을의 상당히 싸늘한 새벽이었는데 '내가 안 자고 혼자 깨어있다'는 호젓한 생각 끝에 밖에서 서리를 맞고 있을 그 놈을 생각하자, 그것은 용이히 맺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만은 그 뒤에도 많은 문구상의 수정을 오랫동안 계속했던 것을 말해 둡니다. 이상과 같이 나는 내 미진한 작품 「국화옆에서」의 13행의 문자를 기록했었습니다. 요컨대 나는 인생이란 되도록 오래 체험하고 살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박이도 <문예창작실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