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도장을 갖고 썼었다. 두 개 다 막 도장에 가까운 나무도장이다. 하나
는 우선덕이라는 한글도장으로 10여 년 된 것이고 이 것으로 인감을 내고 인지
를 찍을 때 주로 사용했다. 또 하나는 우지향(禹志享)이라는 한자 이름인데 우선
덕이라는 이름이 나쁘다해서 등단 당시 필명으로 쓰려고 바꾼 이름이다. 그러나
어느 신문사, 잡지사에서도 우지향이라는 이름을 사용해주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른 작가들은 본인의 의사대로 필명을 잘도 바꿔 사용하던데 내 경우
는 우선덕 이름이 작가답고 좋다며 우지향을 써주지 않으니 그참 불가항력이었
다. 나쁘다는 것은 싫다. 궁리 끝에 우지향 도장을 만들어 은행도장이라도 해야
지 했던 게 한 7년 정도 사용했다. 어쨌든 도장 두 개 다 길이 들고 정이 들어
남들이 상아도장이니 옥도장이니 해도 관심이 없었다. 내 취미에는 나무도장이
맞았다.
사람은 때때로 자기 자신을 본인이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는가보다. 그렇게 오
래 쓴 도장 두 개가 동시에 한꺼번에 싫어진 것이다. 들여다보면 글자 새김이 너
무 품위가 없고 가늘었다. 그동안 관록 있게 길이 났다고 생각하던 손때가 너저
분하고 초라하게만 여겨졌다. 도장 하나 바꾸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루
가 지날수록 그 기분은 더욱 강렬해졌다. 이 도장은 싫다, 왠지 정말 싫어졌다.
빨리 새로 하나 만들어야겠다.
사람들만 보면 어디 도장 잘 새기는 집 아느냐고 물었다. 동네에 하나 있긴 한
데 아이들 막 도장 만들 때 보니 내가 원하는 글씨체가 아니었다.
외출이 드문 나는 어쩌다 밖에 나갈 일이 있으면 아는 이들에게 물었다.
"어디 도장 잘 파는 집 알아요? 왜 옛날에는 도장 파는 할아버지들이 사무실
에 들어와 도장 파주고 갔잖아요? 보면 아주 글씨도 좋고 그렇던데."
요즘은 그런 사람들을 통 못 보았다고 그들은 대답했다.
"글쎄, 종로나 청계천에 나가보면 또 몰라."
시내 나가면 여러 일을 보고 서둘러 들어와야 하기 때문에 종로나 청계천까지
어슬렁거려 볼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몇 년 만에 만난 후배에게까지 도장 이야기를 했더니 아주 간단하게 대답을 해
주었다.
"돈 좀 들여요 언니. 그 왜 무슨 당, 무슨 당, 해서 도장 파는 유명한 집에 가
서 만들면 되잖아. 언니도 그런 도장 가질 때 됐어."
아참 그렇구나. 그런 도장 가질 시기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닐 테지만 어차피
잘 만드는 집 찾던 길이니 유명한 집이면 확실히 잘 만들어 주긴 하겠다. 그러
고 보니 우리 집에도 그런 집에서 만든 도장이 하나 있긴 있다는 생각이 났다.
전에 애들 아버지에게 들어온 뇌물성 도장인데 부귀영화가 따르는 몇 십만 원짜
리라고 애들 아버지가 자랑했던 적이 있는 것이다.
좋다. 부귀에 영화까지라니. 그런데 그런 도장집은 또 언제 시간을 내어 갈
수 있단 말인지 원고가 밀려 조금도 외출할 틈을 낼 수 없었다.
"그럼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해보면 되지요."
찬거리 사러 나갔다가 즉석에서 두툼한 전화번호 책을 뒤져 무슨 당 중의 한
집과 드디어 통화가 되었다. 말인즉슨 너무나 간단했다. 전화주문도 받으니 주문
하고 돈만 부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희 집은 좀 비쌉니다."
"네, 알고 있어요."
몇 십만 원 한다는 소리겠지.
"그럼 맞추시겠습니까?"
"당연하죠."
"무엇으로 하실 겁니까? 옥이나 상아는 오만 원 대부터 있고……."
오만 원 대라? 각오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싸다. 몇 십만 원이라고 그렇게 겁
들을 주더니.
"예, 그런데 저는 돌 종류보다는 나무가 좋은데요."
"예, 나무는 좀 더 비쌉니다."
"어머, 그래요? 왜 그렇죠?"
"하하… 비싸니까요."
그것은 정말 뜻밖이다. 옥이나 상아의 재질이 훨씬 비싼 줄 알았는데 너무 이
상하다.
"어쨌든 나무로 해주세요. 저는 돌은 싫으니까요."
"대추나무는 십 오만 원입니다."
"나무는 대추나무가 제일 좋은 건가요?"
"벼락맞은 대추는 삼십 육만 원입니다."
"예? 오호호… 벼락맞은 대추요? 그건 또 뭐예요?"
"벼락맞은 대추죠 뭐."
"그런데 그건 왜 그렇게 비싸요? 어떻게 달라요?"
저쪽 입에서 벼락맞은 대추 소리가 나올 때도 웃음이 나오고 내 입으로 벼락맞
은 대추 소리를 할 때도 웃음이 나왔다. 정말 우스웠다. 벼락맞은 대추, 왜 하
필 벼락맞은 대추인가?
"달라요?"
"다르죠."
"어떻게 다르죠?"
"보시면 알죠."
"그걸 어떻게 알죠?"
"그냥 믿으셔야죠."
어쨌든 도장을 주문했다. 36만 원짜리는 너무 비싸 그냥 대추로 하기로 했다.
그랬더니 저쪽에서 하는 말이 괘씸했다.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냥 대추로 하면서는 부자가 된다든가 잘 된다든가 하
는 것은 아예 생각도 마세요."
"뭐라구요? 아니 여보세요! 그게 무슨 악담이에요? 세상에! 그런 일을 하는 분
이 덕담은 못할망정 손님에게 악담을 하다니요?"
보통 괘씸한 게 아니었다. 취소하고 싶었지만 사실 전의 도장은 이제 바라보기
도 싫었고 도장은 하루가 급하게 필요했다.
"죄송해요."
다행히 저 쪽에서 그렇게 나왔다. 순간 나의 화도 조금 풀렸다. 그런데 저쪽에
서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렇지만 사실이 그런 걸요."
괘씸한 화보다는 그때는 웃음이 쿡, 하고 나왔다.
"좌우지간 나는 그냥 대추로 하겠어요. 대금을 부치면 언제 도장이 오지요?"
"… 저 말이죠, 이렇게 하시죠. 그냥 대추로 하시되 거기에 복채로 삼만 원
더 올려서 십 팔만 원 부치세요."
"아니, 왜요? 무슨 복채요? 도장에 뭘 하나요? 거기에 무슨 주문이라도 외워
요?"
"아니죠. 그러면 우리 사장님이 직접 파시거든요."
"그래요? 그렇지 않으면 누가 파는데요?"
"제가 파죠."
"댁은 누구신데요?"
"총뭅니다."
그럼 그 사장인가 하는 이는 신통력이라도 있단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해도
그 비슷한 무엇이 있나보다. 아유, 모르겠다. 36만 원 짜리 까지는 못해도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거금 18만 원을 우체국 전신환으로 부쳤다. 나흘 후쯤 도장이 도착했다. 가격
탓인지 꽤 마음에 들었다. 전에 쓰던 도장과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비슷한 나
무 재질이지만 글씨 모양이 다르고 우아하고 품위가 있었다. 흡족했다.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을는지 어쨌을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이야기는 거기서
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도장 한 개 값으로는 거액인데 혹시 나무라는 재료가 내게 맞지 않는 것은 아
닐까. 내게는 상아나 옥, 그런 게 맞는 게 아니었을까? 이왕이면 좋으라는 염도
있던 것인데 좋지는 않더라도 나쁜 것일까 봐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몇 년 전부터 사주 계의 스타로 암암리에 소문난 정지영 감독 집에 전화를 넣
었다.
"그러지 않아도 일주일 전부터 전화를 하려고 했는데 안산 시내가 쭈욱 전화불
통이었어."
소문 난 사람은 정 감독이 아니라 물론 그의 부인이다.
"어제서부터 전화가 되는 거야. 그래서 전화를 할까말까 하고 있었지."
"어머, 왜요?"
"응, 사실은 도장 하나 만들라고 하려고. 거긴 도장을 많이 쓰잖아."
"도장이요? 도장! 아이 참, 나 도장 하나 만들었어요. 그래서……"
앞뒤 옆을 이야기했다.
"아이, 더 주더라도 벼락으로 하지."
"왜요? 도대체 그건 어떻게 다른 건데요?"
그랬더니 벼락맞은 대추는 아예 사주팔자를 뛰어넘는 액땜의 효과를 갖고 있
는 거라고 했다. 그저 지니고만 있어도 좋다는 것이다.
"도장 이야기는 그만 두지 뭐. 그냥 대추를 그렇게 비싸게 했는데 또 도장할
수는 없잖아. 사실은 내가 벼락맞은 대추를 몇 개 얻어서 하라고 하려고 했는데
그만 둬."
이랬다.
전에도 어머니에게 소리를 들었다. 명색이 지식인이라는 애가 저 모양이라는
것이다. 꼭 믿어서는 아니고, 일단 흥미 있고 그 다음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
각에 몸조심하고 술 조심도 하고 그러기는 했었다. 술 조심을 하면 실수를 덜하
게 되고 몸조심을 해도 마찬가지니 액운이 들었든 아니든 좋을 것은 당연한 이치
였다.
여기서 나의 그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사고방식에 발동이 걸렸다. 벼락으로
다시 하겠다고 졸랐다. 애초 무슨 당에서 몇 십만 원 주고 했다고 여기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드디어 벼락맞은 대추 도장을 갖게 되었다.
그냥 대추와 벼락맞은 대추는 그럼 어떻게 다른가. 그 효능은 같았다. 도장을
찍는 일에 사용한다는 것 말이다. 더 부자가 되는지 아플 게 아프지 않은지 그
효력은 모르겠지만 그냥 대추와는 비교할 수 없게 장엄한 느낌마저 드는 재질이
었다. 같은 대추나무인데도 벼락맞은 것은 거뭇거뭇하고 단단하며 돌만큼 무거웠
다. 그냥 대추일 때도 마음에 들었는데 벼락대추는 마음에 든다할 정도가 아니었
다. 상당히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벼락대추를 그냥 대추에 비교한다는 일은 벼
락대추에 대한 모욕이었다.
와, 이렇게 좋은 걸 나 혼자? 더구나 진품은 그렇게 구하기 어렵다는데…….
우선 내 아이들 것을 하나씩하고, 사방 팔방에 전화로 소문을 냈다. 일이 있어
나가면 만나는 이들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되어 여동생네 가족을 비롯
해 아주 많은 이들이 안산에서 받아 온 벼락맞은 대추를 한 개씩 품고 다니게 되
었다. 적어도 나쁘지 않다니까 너도나도 가졌다.
밥 먹고 살만하니까라는 비난의 소리도 들렸음직 했다.
사주팔자, 사람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함께 갖고 나온다는 운명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10여 년 전에 사주팔자를 믿는가 아닌가 하는 여성지 특집이 있었다. 거기서
나는 사주팔자를 믿고 있으며 다사다난하다는 나의 팔자에 몹시 만족하고 있다
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지금도 나는 사주팔자, 운명 등을 믿고 있다. 타고 난 그대로를 믿는 것이 아
니라 개척해 바꿔 나가는 그 운명을 믿고 있다. 다사다난하고 때로 영광도 있다
는 내 사주 내용과 달리 평온한 날이 지속되면 불안과 불만이 동시에 엄습해 온
다. 그 삶은 너무 맹물이고 나는 맹물은 싫은 것이다. 사주가 평탄하다는 사람
이야기를 듣게 되면 마치 나의 일인 것처럼 평탄한 사주팔자 주인공에게 애틋한
연민마저 느끼게 된다. 아아 저 사람의 인생은 얼마나 재미없을고.
직선은 재미없다. 굴곡이 아름답다. 노인의 험한 주름살이 아름다움일 수 있
는 것처럼. 부단히 부대끼는 삶이 좋다.
그렇다면 벼락맞은 대추로 도장을 하고 부적까지 하나 차고 다니는 이유를 무
엇으로 설명할 것이냐고?
의외로 답은 간단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보다 높은 질의 험난함이며, 그것이
내게는 행운이라는 생각이다.
찬란함, 눈부심…… 질곡의 헤침 속에서 '행운' 그 단어는 비로소 생명력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