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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유배 연표/
유배의 땅 제주로 온 조선 왕족들/
조선정치인들
제주 유배 연표
▲1392년=한천, 김만희(조선개국 반대)
▲1402년=이미(조선개국 반대), 강영(왕자의 난)
▲1409년=민무구·민무질 형제(왕자의 난)
▲1469년=민수(세조실록 사초 수정)
▲1496년=김순손(연산군 비난)
▲1498년=홍유손(무오사화)
▲1504년=홍상(갑자사화), 유헌(유자광 탄핵상소), 김양보(명령거부)
▲1520년=김정(기묘사화)
▲1522년=이세번(조광조 무죄옹호)
▲1547년=유희춘(벽서사건)
▲1555년=이희손(을묘왜변 패전)
▲1565년=보우(유림의 탄핵)
▲1594년=소덕유(정여립사건 연루)
▲1608년=이홍로(대북파의 탄압)
▲1612년=이태경·송상인(역모혐의)
▲1614년=정온(영창대군의 사망에 대한 부당성 호소)
▲1618년=광산부부인 노씨(칠서의 옥), 원종(허균의 역모), 이익·조직(인목대비 폐모반대)
▲1623년=박승조(인조반정)
▲1628년=인성군·이건(광해군 복위 혐의)
▲1637년=광해군(인조반정, 강화도에서 이배)
▲1644년=이덕인(역모혐의)
▲1646년=홍무적(소현세자빈 강씨 박해 반대)
▲1647년=소현세자의 세 아들 경선군·경완군·경안군(소현세자빈 강씨 박해 후속 조치)
▲1673년=신명규·이정기(남인의 탄핵)
▲1680년=유혁연(경신환국, 영해에서 이배)
▲1689년=송시열(기사환국)
▲1689년=김예보(기사환국), 김진구(중전 민씨의 폐위 부당성 상소)
▲1694년=장희재·김덕원(갑술환국)
▲1702년=오시복(무고의 옥)
▲1706년=김춘택(폐비윤씨 복위 관련)
▲1721년=조성복(소론의 탄핵)
▲1722년=신임·유성추·김수천·김학손(신임사화)
▲1723년=조승빈(신임사화)
▲1725년=윤지·이현장·서종하(신임옥사)
▲1727년=임징하(탕평책 반대)
▲1731년=조관빈(이광좌 탄핵상소)
▲1740년=김원재(위시보관사건), 이규채(탕평책 반대)
▲1751년=이존중(탕평책 반대)
▲1754년=조영순(탕평책 반대)
▲1756년=최학령(탕평책 반대)
▲1757년=조중명(탕평책 반대)
▲1771년=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은신군(왕권세손 유지 관련)
▲1777년=조정철(정조 시해 음모)
▲1791년=권일신(천주교 신해 박해)
▲1801년=이치훈(천주교 신유박해), 정난주(황사영 백서사건)
▲1840년=김정희(윤상도 옥사 재론)
▲1849년=이하전(왕위계승 실패)
▲1853년=이명혁·최봉주(김수정 모반사건)
▲1861년=염희영(철종 외척 사칭 연좌)
▲1862년=백낙신(진주민란 원인 제공)
▲1862년=김시연(진주민란 문책)
▲1870년=정만식(이필제의 난)
▲1873년=최익현(계유상소)
▲1876년=조병창(개항반대)
▲1881년=김평묵(만인소 상소문)
▲1882년=백낙관·윤상화(개화반대)
▲1893년=안효제(상소내용 부도덕)
▲1895년=한기석·김국선·박진수·허엽·김명호·장덕현·최형순(이준용 역모 사건),
ㅡ이민굉·이충구·전우기·노흥규(명성왕후 시해 복수 기도)
▲1896년=서주보·정병조·김경하·이범주·이태황·홍우덕(아관파천), 정원노·임록길·안관현(어윤중 피살사건)
▲1897년=이근용·김낙영·김사찬·장윤선·이용호·한선회(친러정권 타도 모의), 김윤식(민비시해사건), 이승오(을미사변연좌)
▲1907년=박영효(대신 암살 음모)
▲1911년=이승훈(항일독립운동, 안악사건 연루)
[유배의 땅 제주로 온 조선 왕족들]
눈에 띄는 유배인 중에 인목왕후의 어머니 광산부부인 노씨(光山府夫人 盧氏, 1557~1637)가 있다. 그녀는 광해군 5년(1613년) 외손자인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한 거짓 역모사건인 계축옥사(癸丑獄事)로 남편인 연흥부원군 김제남(金悌男, 1562~1613)과 세 아들, 외손자를 잃고, 둘째딸인 인목대비도 폐모가 되는 참화를 겪는다. 노씨 역시 이 참화로 광해군 10년(1618) 제주로 유배돼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인목대비(仁穆大妃, 1584~1632)가 복권된 1623년까지 5년여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 유배기간 제주목사에 부임해 온 양호(梁護)는 대북파에 잘 보이기 위해 노씨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먹을 것도 주지 않으면서 밥 먹듯이 학대를 하자 노씨는 술 찌꺼기를 걸러내 팔아서 끼니를 연명하기도 했다. 노씨의 귀양살이가 끝난 후 그녀를 극진히 보살폈던 제주출신 전량(全良)은 조정으로부터 무관벼슬을 받았고, 아첨꾼인 양호 목사는 파직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인성군(仁城君, 1588~1628)과 그의 가족도 제주 유배자로 기록돼 있다. 인성군은 인조 6년(1628) 유효립(柳孝立) 등이 대북파의 남은 무리들을 규합하여 모반을 기도할 때에 왕으로 추대됐다 하여 그는 제주도 정의현, 가족들은 진도에 유배됐다. 얼마 없어 인성군은 가족이 유배된 진도로 옮겨졌으나 곧 사망하였다. 1628년 6월에 그의 가족들은 모두 제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동계 정온이 이들의 무죄를 상소하여, 인조 13년(1635) 11월에 인성군의 첫째,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인 이건(李健)은 강원도 회양으로 유배지가 옮겨졌고, 나머지 가족들은 모두 유배에서 풀려났다. 이건은 귀양살이 하면서 유명한 '제주풍토기'를 남겼다.
광해군(光海君, 1575~1641)도 제주에 유배왔다. 광해군 15년(1623) 3월 13일에 서인세력인 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 등이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광해군의 조카인 인조를 옹립하는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광해군은 그의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됐다. 뒤에 강화도에 부속된 작은 섬 교동도에 이배됐고, 인조 15년(1637) 4월에 제주도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당시 조정에서는 광해군에게 유배지를 알리지 못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바다를 건널 때에는 배의 사방을 모두 가려 밖을 보지 못하도록 하여 비밀리에 제주 유배를 진행했다. 그는 인조 19년(1641) 7월 7일 18년간의 유배생활 중 제주섬에서 약 4년을 살다가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광해군은 명과 청이 교체되던 국제 정세 속에서 중립외교를 펴며 조선의 안위를 보존하고자 했던 걸출한 임금이자 탁월한 외교가였으나 역사의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복권도 되지 않았다. 광해군이 죽자 당시 제주목사 이시방(李時昉)과 제주도민들은 조정에서 예관이 도착할 때까지 예를 갖추어 호상했다. 제주도민들이 얼마나 애통해 했는지, "음력 7월 7일 제주에 내리는 비는 광해군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주도민의 눈물"이라 전해지기도 했다. 인조는 예조참의를 제주에 파견하여 광해군의 시신을 옮겨와 양주에 안장했다. 조선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유배 기록이다.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의 세 아들도 제주에 유배왔다. 소현세자는 인조의 장자이다. 그는 병자호란으로 9년간이나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있다가 인조 23년(1645)에 귀국하여 병으로 급사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인조의 방관에 의한 독살이라는 의견도 많다. 인조는 후궁 조소용(趙昭容)이란 여인을 총애한 나머지 세자가 죽자, 소현세자의 장자 석철(石鐵)이 세자의 뒤를 당연히 이어야 함에도 인조는 후궁의 아들 봉림대군(鳳林大君, 1619~1659, 효종)을 세자로 책봉해 버렸다. 이를 반대하던 홍무적(洪茂績, 1577~1656)이 제주에 유배된 것도 이 때이다.
인조와 인조의 후궁에 의한 소현세자의 부인 강씨(康嬪)와 세 아들에 대한 탄압은 극성스러웠다. 결국 인조 24년(1646) 3월에 인조는 왕을 독살하려 했다는 죄명을 덮어 씌워 세자빈을 폐출시키고 사약을 내려 처형했다.(강빈옥사) 그것도 모자라 보복당할 것을 우려해 소현세자빈이 낳은 세 아들 경선군 석철(慶善君 石鐵, 당시 12세, 1636~1648), 경완군 석린(慶完君 石麟, 당시 8세, 1640~1648), 경안군 석견(慶安君 石堅, 당시 4세, 1644~1665)을 인조25년(1647) 5월에 제주에 유배시켰다. 어린 이들을 돌볼 보모와 약간 명의 내관이 함께 보내졌다. 내통을 우려하여 이들 이외에 그 누구도 유배 적소를 출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남 석철과 막내 석견이 유배 1년 만에 유배장소에서 죽고 말았다. 효종이 즉위하자 석견은 남해현, 함양현, 강화도로 그 유배지가 여러 차례 옮겨지다가 효종 7년에 풀려났다.
사도세자의 서자이며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恩彦君, 1754∼1801)과 그의 동생 은신군(恩信君, 1755~1771)도 영조와 그 계비 정순왕후의 계략에 걸려들어 상인에게 빚을 졌다는 이유로 제주에 유배를 당했다. 영조 47년(1771)에 은언군은 직산현에서 다시 제주도로, 은신군은 제주도로 유배를 갔다. 궁궐 밖에서 살던 두 왕자가 빚을 진 이유는 가난 때문이었다. 은언군은 1774년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은신군은 유배를 시작하자마자 제주에서 병사했다. 다시 은언군은 정조 10년(1786) 아들 상계군이 홍국영(洪國榮)이 꾸민 모반죄에 몰려 자살하자 정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순왕후의 고집으로 다시 유배되어 강화도로 쫓겨났다가 순조 1년(1801) 신유사옥 때 천주교 신자였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와 함께 처형당했다.
이외에도 왕족이었던 회은군 이덕인(懷恩君 李德仁)은 당시 심기원(沈器遠) 등이 인조를 거부하고 회은군을 왕으로 추대를 기도했다는 역모죄의 당사자로 연루되어 1644년에 제주에 유배됐다가 1645년에 서울로 압송되어 사약을 받고 사망했다. 심기원은 능지처참을 당하고 공모자로 지목된 사람들도 모두 죽었다. 모의 사실은 확실치 않다.
또한 영조의 8촌지간이던 이증(李增)은 1748년 자신의 본가 묘당에서 괴이한 투서가 발견되어 역모혐의를 받고 제주에 유배됐다가 이곳에서 죽었다. 헌종이 후사가 없이 사망하자 왕위계승 후보자였던 완창군 이시인(完昌君 李時仁)의 아들 이하전(李夏銓)도 그의 지지자인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이 안동김씨의 미움을 받아 철종 즉위 후 숙청됨에 따라 제주도에 유배되어 보름 만에 사약을 받고 생을 마쳤다
유배의 땅 제주로 온 조선정치인들
충암 김정(沖庵 金淨)은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중종 때에 조광조(趙光祖)와 더불어 왕도정치 실현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기묘사화로 조광조 등과 함께 탄핵당한 그는 사형 직전에 정광필(鄭光弼)의 노력으로 처음에는 금산으로 유배됐다가 다시 소환되어 망명죄의 누명을 썼다. 또 다시 정광필의 구원으로 간신히 사형을 면하고, 중종 15년(1520) 8월에 제주로 유배됐다. 그는 이듬해 중종 16년(1521)에 사약을 받고 제주에서 죽었다. 중종으로부터 자진(自盡)하라는 명을 받은 그는 한 잔을 호쾌하게 마시고 "긴 밤 어두워라, 언제 아침이 오려나...슬프다, 천만년 후 나를 슬퍼하리라"고 읊은 뒤 목숨을 끊었다. 겨우 서른다섯의 나이였다. 시신은 중종 17년(1522)에 충주로 옮겨졌으며, 인종 원년(1545)에 복관되었고, 인조 24년(1646) 영의정에 추증(追贈)됐다. 선조 11년(1578)에 조인후(趙仁後) 제주판관에 의해 충암묘가 건립됐으며, 현종 6년(1665) 귤림서원에 배향(配享)됐다.
광해군 때 유영경(柳永慶) 등과 함께 소북파로 몰려 대북파의 탄압으로 제주에 유배된 이홍로(李弘老)는 광해군 4년(1612)에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당했다.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옥'은 대북 일파가 소북의 세력을 제거하려고 일으킨 것인데, 이 사건으로 100여 명의 소북파가 처벌됐고, 이태경·송상인(宋象仁) 등이 제주에 유배됐다.
영창대군(광해군의 이복동생)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대북파가 폐모시킨 것을 반대하다가 1618년 이익(李瀷)·조직이 제주에 유배됐다. 이익은 유배기간 동안 고홍진·김진용·문영준 등 제자를 키워 제주 교육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동계 정온(桐溪 鄭蘊)은 영창대군이 죽자, 이를 주도한 강화부사 정항(鄭沆)을 문책할 것과 예를 갖춰 장례를 지내고 사후 추증할 것을 상소했다가 유배를 당했다. 광해군 6년(1614년) 8월부터 인조 원년(1623) 3월까지 10년여를 제주 대정현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현종 10년(1669)에 그는 귤림서원에 배향됐으며, 헌종 8년에 이원조(李源祚) 제주목사가 그의 적거지에 유허비를 건립했고, 그 이듬해에는 그의 적거지에 송죽사를 건립하여 정온을 배향했다.
'새로운 이상사회의 건설'이라는 혁명을 모의하던 허균(許筠)과 함께 동지였던 원종(元悰)이 광해군 10년(1618) 역모의 전모가 밝혀지면서 유배를 당했다. 현종 때는 남인의 탄핵과 예송문제에 연루됐던 신명규(申命圭)·이정기(李廷夔)·이지달(李枝達) 등이 제주에 유배왔다. 숙종 때는 주로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에 연루된 사람들이 제주에 유배를 왔다. 장희재(張希載, 장희빈의 오빠), 송시열(宋時裂) 등이다.
영조 때에도 정치적 인물들이 많이 유배되는데, 신임옥사, 탕평책 반대, 정미환국과 연루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서재 임징하(西齋 任徵夏)는 탕평책에 반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영조 2년 평안도 순안현에 유배됐다가 영조 3년(1727)에 다시 제주로 유배됐다. 그는 그 일대의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많은 시를 남겼고, 지방 유생들의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숙종 때 제주목사를 지냈던 임홍망(任弘望)의 손자이며, 숙종 때 제주에 유배왔던 김진구(金鎭龜)의 사위이다.
정조 2년(1777)에는 조정철(趙貞喆)이 제주에 유배되어 그는 할아버지 조승빈·조관빈(趙觀彬), 아버지 조영순(趙榮順) 등에 이어 집안에서 네번째로 제주 유배인이 됐다. 할아버지 조승빈은 1723년 신임옥사로 정의현에 유배됐고, 조승빈의 동생이자 정헌의 작은 할아버지인 조관빈은 1731년에 대정현에, 정헌의 부친인 조영순은 1754년에 제주에 유배됐다. 조정철에게는 남다른 사연이 전해지고 있다. 그는 제주에서 홍윤애(洪允愛)와의 애틋한 사랑을 키웠으나, 집안끼리 원수지간이었던 소론파 김시구(金蓍耉)가 제주목사로 부임하면서 사랑은 깨지고 만다. 하지만 홍윤애는 죽음으로 조정철을 보호했다. 그후 유배에서 풀린 조정철은 순조 11년(1811)에 제주목사로 부임했고, 홍윤애의 무덤에 가서는 묘비를 세워 연민의 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조정철 집안은 노론파였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는 헌종 6년(1840)에 '윤상도의 옥' 사건이 재론되면서 그에 연루되어 제주 대정현에 유배되었다. 윤상도(尹商度)는 1830년에 호조판서 박종훈(朴宗薰) 등을 탄핵하다가 군신 사이를 이간시킨다는 죄로 추자도에 유배된 인물이다. 그런데 헌종 6년(1840)에 이 문제가 다시 거론되어 윤상도 등이 결국 사형에 처해졌고, 추사는 부친과 함께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로 인해 김정희는 제주 대정현에 유배되어 1848년까지 9년간을 제주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유배기간 동안 강기석·강도순·강사공·김구오·김여추·김좌겸·박계첨·이시형·이한우·홍석우 등에게 학문을 전수했다. 김정희의 제주 유배는 그에게 있어 필생의 역작 추사체를 완성시켰으며, 우리나라 문인화 중 최고 걸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는 '세한도'(국보 제180호)를 그린 곳이 됐다. 제주 유배인 가운데 추사 김정희만큼 제주문화에 영향을 끼친 인물도 드물다. 현재 대정읍성 동문자리 안쪽 추사적거지에는 기념관과 함께 초가 한 채가 단장돼 있다.
종교인으로서는 명종 20년(1565)에 문전왕후의 비호를 받던 승려 보우(普雨)가 제주에 유배됐다. 그는 당시 제주목사 변협의 학대와 장살에 견디지 못해 제주에서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천주교인으로서 신해박해로 제주에 유배된 권일신(權日身),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된 정난주(마리아)가 순조 때 제주에 유배됐다. 그녀의 어머니는 거제도로, 그녀의 두살배기 아들은 추자도로 유배됐고, 그녀의 남편 황사영(黃嗣永)은 대역죄인이 되어 능지처참으로 사형 당했다. 정난주는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의 맏형 정약현(丁若鉉)의 딸이다. 그녀는 제주목 관노로 37년을 살다가 1838년 사망했다. 뼈아픈 역사다.
고종 때는 개화반대 세력들이 대거 제주에 유배당했다. 고종 10년(1873) 대원군의 하야를 이끌어낸 계유상소의 장본인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은 제주 유배기간 동안 이기온(李基瑥)을 비롯한 제주 유림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훗날 제주지역 의병항쟁의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했다.
한말에는 김윤식·박영효 등을 비롯해서 정치 거물들이 제주에 유배됐다. 김윤식(金允植)은 온건개화세력으로 친청나라 입장을 견지하던 인물이다. 아관파천으로 친러정권이 들어서자 민비시해의 음모를 사전에 알고서도 방관했다는 이유로 제주에 유배됐다. 유배지에서 그는 제주유림 김응빈(金膺斌)과 홍종시(洪鍾時) 등 제주 출신 10여 명과 귤원시회를 만들어 활동을 했다. 고종의 사위였던 박영효(朴泳孝)는 3개월 만에 부인과 사별하고 갑신정변, 고종폐위 음모 등으로 두 번의 일본 망명길에 올랐다가 1907년 귀국하여 정치일선에 복귀했으나, 다시 대신암살 음모에 연루되어 제주에 유배됐다. 그는 유배지에서 뮈텔신부를 도와 제주도 최초의 근대 여성학교인 신성여학교 개교에 힘썼으며, 원예농업에 힘을 기울여 제주의 원예농업 발전에 이바지했다.
일제에 의해 최초로 제주에 온 유배인이자 제주도의 마지막 유배인은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남강 이승훈(南岡 李昇薰)이다.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우리 역사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안악사건(安岳事件, 안명근사건)에 연루돼 1911년 5월 제주도에 유배됐다. 유배지에서 그는 기독교 사상과 신교육, 새로운 정신을 제주주민들에게 전하며 교육과 문화사업을 일으켰다. 유배 중이던 1911년 가을에는 안악사건의 연장선에서 105인 사건이 일어나 신민회 간부와 600명의 애국지사가 잡혔는데 이때 이승훈도 주모자로 지목되어 서울로 압송됐다.
첫댓글 많이도 왔다 가셨네요
고난한 삶을 살며
회한의 눈물을 흘렸을까?
억울함으로 분노와
고통의 나날을 살았을까?
당시에 태어나지 않았음을
참으로 감사하게 여기며
질곡의 삶을 살다가신 모든 영령께
삼가 명복을 빌어 마지않는다:)
200여명의 유배객 관련하여 많이 궁금해하며 체계적으로 정리된 자료를 찾던 중이었는데 교수님께서 소중한 자료를 올려주셨네요.
감사드리오며 동기분분께서도 참고하면 유배관련 궁금증이 많이 해소되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