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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사진편지 제1638호 (12/5/25/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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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셨습니까?
대한민국 U자걷기의 각 구간 걷기가 종료되면 우리가 걸은 길에 얽힌 역사적인 유래와 일화 등을 한번도 빠짐없이 유려한 필치로 구수하게
그려주시는 윤종영 고문님께서 이번에도 변함없이 제 9구간 걷기길의 역사적인 조명을 집필해주셨습니다.
이처럼 심도있는 장문의 글을 집필하시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 것입니다만 연로하신 윤 고문님께서는 매 구간 이러한 고생을 스스로 짊어지시는 것을 보면
그 학문적 열정이 존경스럽고 한사모와 우리 회원님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얼마나 깊으신지를 잘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윤종영 고문님의 그간의 노고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번 제8구간 때 이미 말씀드렸지만
11구간까지 걷기를 모두 마치면 그간의 주옥같은 글들을 한데 모아 단행본으로 엮어서 우리가 걸은 대한민국 둘레길을 역사적으로 들여다본 한국 최초의 '한반도 둘레길 역사 기행'으로 세상에 내놓기를 기대합니다.
윤 고문님의 이번 글을 2회로 나누어 전해드리겠습니다. 회원님들의 많은 탐독을 권해드립니다.
함수곤 드림
제9구간 걷기 길의 역사적 조명(1)
글 : 윤 종 영(한사모 고문, yooncy1936@hanmail.net)
2012년 4월 9일 11시경, 한사모 걷기팀 57명은 봄날의 따뜻한 훈풍속에 금강하구둑 군산에서 충청도를 향해 제9구간 300리길 대장정 첫발을 내딛었다. 특별한 행사 없이 둑 계단에 앉어 사진 한장 찍고 가벼운 마음으로 지휘부의 간단한 주의사항만 듣고 대오를 정리, 출발하였다. 이제는 지휘부가 회원모두를 걷기의 달인 경지에 이른 것으로 믿고 있는 것 같다.
금강하구둑을 선두를 따라 걸으며 나는 이번 걷기의 중심 무대인 충청도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을 떠올려 보며 옆에 걷는 회원들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선조 의 대표적 인문지리서인 택리지(擇里志:李重煥)에는 충청도를“------물산의 풍성함은 영남. 호남에 미치지 못하나 산천이 평평하고 아름다울 뿐 아니라 서울에 가까운 남쪽에 있어 사대부들이 모여 사는 곳이 되었다. 서울의 유력 세가(世家)들은 충청도 안에 모두 농토와 집을 두어서 이곳을 근거지로 삼지 않는 사람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런 역사지리적인 배경 속에 사대부들의 삶이 이곳에 뿌리내리면서 자연을 벗삼아 즐기는 느긋한 성품이면서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선비정신이 자리 잡게 되어 충청도가 “충청도 양반(忠淸道 兩班)” 또는 “청풍명월(淸風明月)”이라 우리 선인들이 일컬으며 예찬(禮讚)하게된 인성(人性)이 형성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러한 충청도의 인성과 기질이 국가에 기여한 훌륭한 인재, 특히 일제에 의한 국권강탈기에 애국운동에 앞장섰던 수많은 애국의사(김좌진, 이상재, 윤봉길, 유관순, 한용운 등 등)들을 배출하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금강하구둑을 걸으며 수십년 전, 이곳을 저녁노을 속에 배로 건느며 술잔을 기우렸던 생각이나 주변을 다시 더듬어 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곳 금강하구에 서면 옛 백제의 애수어린 망국의 한이 느껴지곤 한다. 백제의 영역이 호남과 충청도 경기도를 포괄하고 있었는데도 유독 이곳에서만 옛 백제의 망국의 애달픔이 깊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백제의 마지막 서울이었던 부여가 이곳과 연계되어 있는 부근이기도 하고 또 백제가 멸망할 때 나당군이 공격로였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더욱이 부여는 경주나 평양, 개경과 달리 백제의 망국의 슬픈 역사를 떠올릴 수 있는 많은 유적(白馬江. 落花岩, 釣龍臺또는 龍岩 등)을 지니고 있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것 같다. 나는 길을 걸으며 옛날 유행했던 “백마강 달밤”에 기억나는 노래 구절“---낙화암 그늘아래 울어나 보자”를 흥얼 그려 보았다.
나는 부여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6.25전쟁 중 긴 기간은 아니었지만 부여 석성면(扶餘 石城面)으로 피난와 머물었섰기에 당시 부여모습이 머릿속에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일본강점기 말기에 부여에 신궁(神宮)을 짓는다고 도시전체를 황량(荒凉)하게 만들어 논 흔적이 당시에도 그대로 남아 이를 보며 새삼 망국의 백제를 떠올렸던 기억이 난다. 그 뒤에 여러차례 부여를 찾았지만 이번 걷기에서도 이곳을 찾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졌었으나 금강하구를 걷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오늘은 첫날이지만 점심 전에 10여리 이상을 걸을 계획 인 것 같다. 그렇지만 이에 대해 회원모두가 별 이의 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열심히 잘들 걷는다. 나는 충청남도는 자주 찾을 기회가 있어 비교적 이 지역에 역사적 유적지는 많이 찾아 보았지만 최근에 복원된 몇 곳을 찾고 싶었다. 우리가 오늘 걷는 서천군에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1850-1927) 선생 생가(2010년에 완성)도 그중 하나지만 계획에 없어 아쉬움속에 그냥 지나칠 수밖에. 월남 선생은 이곳 한산면 종지리 출신으로 한말에 선각자로 근대화와 애국운동에 헌신하였고 일본강점기에 국내에 남아 민족지도자로 우리 민족의 등불이 되었던 분이다.
월남이 돌아가셨을 때 식민지하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사회장을 거행하였고 이때 전국에서 수만의 조문객이 참집(參集)하였을 뿐 아니라 선생의 유해를 고향인 충남 한산으로 모실때 경성역(지금의 서울역)에서 군산까지 각역마다 조문객으로 인산 인해를 이루어 일본인을 놀라게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선생에 대한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특히 교훈적인 해학(諧謔)과 풍자(諷刺)그리고 경구(警句)는 지금도 많은 식자(識者)들 사이에서 회자(膾炙)되고 있다. 월남은 고려말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후손으로 이 부근인 기산면에 한산이씨 후손들이 세운 목은의 신도비가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이곳도 다음에 월남생가를 찾을 때 가보기로하고 걸음을 재촉하였다.
우리일행은 하구둑을 건너 68번 국도를 따라 걷고 있는데 도로표식판에 “원수교”가 시선을 끈다. 원수리라는 행정구역명에서 나온 것이지만 어떻든 재미있는 지명이 가끔 눈에 띄인다. 근 1시간여 걸어 오늘 점심 먹을 식당 “자연횟집”에 도착, 바닷가 정취에 맞는 “생우럭매운탕”으로 즐거운 식사시간을 가졌다. 오후에 걸을 거리가 12Km, 점심시간에 반편성이 이루어져 오후 걷기는 반별로 대오를 지어 걸음을 옮겼고 모든 회원들은 걷기에 숙달된 모습을 과시하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속도를 높였다.
걸으면서 보는 길가 주변 마을모습은 아직까지 보아왔던 영남. 호남과는 다른 조용한 시골마을의 한적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마음속에 기대했던 모습과 달리 영남. 호남에서 보았던 윤택해 보이는 마을의 분위기나 자주 눈에 띠었던 전통와가(傳統瓦家)의 모습도 별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영호남에서 많이 보았던 옛 비석(정절비. 공덕비 등)이나 사당이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우리가 걷는 617번 도로가 바닷가에 근접해 있어서인지. 나의 이런 느낌을 같이 걷는 몇몇 회원에게 이야기해보니 모두가 나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것이 전통적인 충청도민의 기질이나 인성 때문인지 묘하게 이번 걷기팀에 춤남출신이 한분도 않계셔서 내 나름대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다.
한참 걷는 나의 눈에 옥남사(玉南祠)라는 안내표식판이 보여 반가운 마음에 표식판 방향으로 걸음을 옮겨보았지만 보이지 않아 서천군 문화과에 전화로 문의 해보니 우리가 걷는 곳과 방향은 다르지만 이곳에서 가까운 곳(마서면 옥산리 발동)에 위치한 고려시대 인물인 두남 나광현(斗南 羅光賢)을 모신 나주 나씨(羅州 羅氏) 문중에서 세운 사우(祠宇)라고. 찾고 싶었지만 이것도 다음기회로 미루고 일행의 뒤를 따랐다.
이번 9구간은 계절이 늦은 것도 아닌데 이상기온 탓인지 벚꽃 가로수는 물론 주변 산야에 꽃이 별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 약간 흐리어 스산한 느낌은 들었지만 걷기에는 최적의 날씨였다. 우리일행은 한명의 낙오자도 없이 전원 오늘 걷기에 종착점인 한성사거리에 도착. 버스에 승차, 오늘의 최종 종착지인 춘장대 해수욕장 “산에 바다에 펜션”에 도착, 반별로 숙소 배정을 받았고. 저녁은 ‘동양회타운’에서 이곳 최고의 제철 계절생선인 쭈꾸미 철판구이에 권영춘회원님이 제공한 참뽕주를 겻들인 환상의 식탁으로 첫날의 피로를 풀었다.
다음날(4월10일)
새벽 어두음 속에 밖에서 인기척소리가 들려 커텐을 열고 내다보니 컴컴한 어둠속에 삼삼오오(三三五五) 짝을 지어 주변을 서성거리는 회원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초등학교 시절 소풍날 마음이 들떠 새벽에 일어나 집 안팎을 서성거리었던 옛 생각이 난다. 이런 걷기행사가 우리를 수십년 전 어린시절로 마음을 되돌려 놓는 것 같다. 나도 서둘러 밖으로 나와 이들과 합류, 상쾌한 새벽 어둠속에서 이리저리 몸을 풀며 걸음을 옮겨보았다. 그런데 날씨가 걱정스럽다. 일기예보에 비가 온다고 했는데, 높은 곳에 계신 높은 분이 잘 봐주시겠지 하면서도.
오늘 아침은 어제 저녁을 먹은 “동양회타운”에서 맛깔스러운 된장찌개 백반으로 입맛을 달구었다. 오늘 걷는 거리 27Km, 만만치 않은 거리다. 이제는 회원 모두가 이런 정도의 거리는 별로 부담스럽지 않은 모양이다. 걱정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작년 7구간 때와 같은 발바닥 고통을 당하지 않기를 기원하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일행은 607번 국도를 따라 열심히 걸었다.
길 이름이 ‘부사로’라고 바닷가 주변이어서인지 주변풍광이 풍성해 보이지 않는다. 한참 걷다보니 “부사방조제”, 우리는 둑위로 올라 보니 방조제 끝이 아득해 보인다. 서해안에 이미 우리가 걸은 새만금 방조제를 비롯해 금강하구둑, 그리고 지금 걷는 부사방조제 그리고 앞으로 걸을 수개의 방조제를 생각해보면 서해안 지도가 완전히 바꾸어진 것 같다. 이에 대한 찬반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어떻든 단군이래 최대의 국토확장역사(國土擴張役事)가 우리세대에 이루어졌고 자랑스럽고 대단한 일이라 하겠다.
한참 걷다보니 보령시 웅천읍 시계 표지판이 보인다. 보령시에 발걸음을 들여놓으며 약간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보령시 해안 길을 걸으며 찾고 싶었던 곳이 “충청도수영성(忠淸道水營城: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오천항)”이었다. 그런데 제9구간 일정표를 보니 이 지역은 버스에 승차 그대로 통과하도록 되어 있어 서운했지만 다음기회로 미룰 수밖에...
충청도 수영성은 조선시대 충청도 수군절도사(忠淸道 水軍節度使)가 머물던 수영으로 우리가 걸으며 찾아보았던 한산도(제승당), 통영(세병관), 여수(진남관), 해남(우수영), 등과 같은 조선시대 수영이다. 임진왜란으로 충무공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면서 충청도 수영도 충무공의 휘하에 들어갔다. 충무공이 파직후 정유재란시 충청수사였던 최호(崔湖: -1597)공도 원균휘하로 칠천량해전에 참전, 전사하였다. 난중일기에 보면 충무공이 최호공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글이 보인다(亂中日記:丁酉 七月十八日 丁未晴-----舟師大敗, 統制使 元均 全羅右水使 李億祺 忠淸水使 崔湖 ----多數被害云不勝痛哭-----)
나는 이곳을 옛날에 한번 찾은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옛 모습이 많이 손상되어 아쉬워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당시 이곳에서 보았던 것으로 객사 건물과 성벽일부와 아문 그리고 각종 공덕비등이 생각난다. 그런데 최근 많이 복원되었다는 소식이 들리고 우리의 U자걷기에 임란(壬亂)과 관계있었던 수영(水營)은 거의 코스에 들어 들러보았기에 이곳도 한번 찾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앞 회원을 따라 발걸음을 재촉하는 속에 일기예보를 확인 하듯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다행히 빗줄기가 심하지 않아 우산속의 낭만을 즐기며 걷다보니 오전 종착지 독산사거리에 도착, 여기서 버스로 “동호식당”이동, 보양식인 닭도리탕으로 허리끈을 풀었다.
오후걷기는 길 이름도 아름다운 “열린바다길”, 길을 따라 해변길을 열심히 걷다 보니 남포방조제, 우리는 둑위 길에 올라 주변에 갯벌과 호수사이로 난 길을 따라 부슬비속을 걸었다. 둑위에서 내려다 보니 건너편 길위에 “고운 최치원 유적지(孤雲 崔致遠 遺跡地:857-?)”안내 표식판이 보인다. 반가웠다. 별로 옛유적지 흔적이 눈에 뜨이지 않아 지도를 열심히 더듬으며 길 부근에 유적을 찾아 보곤 했는데. 고운의 유적은 제4구간 해운대을 걸으면서 이미 보았던 바와 같이 거의 전국에 분포 되어 있다.( 경남 함양, 경북 고령, 전북 정읍, 가야산 해인사 등 등) 이는 고운이 신라의 골품제 사회에서 6두품이라는 골품의 한계에 부딪쳐 벼슬에 뜻을 접고 전국을 유랑하며 여생을 보냈기 때문이다.
둑길을 내려 유적지를 찾고 싶었지만 거리가 상당히 있어 보여 찾는 것을 포기하고 보령시 문화원에 전화로 문의 해보니 고운의 후손인 경주최씨 집안에 최덕원이라는 분을 소개해 주었다. 이분은 친절하게도 우리를 내일시간을 만들어 보령시에 있는 고운의 유적지를 안내, 소개하겠다고 했지만 일정상 어려움을 말씀드리고 고운유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이곳의 고운 유적은 맥도(麥島:보리섬-남포면 월전리)에 있는 평풍바위에 고운이 남긴 글씨(문화재 145호:1984)인데 지금은 거의 마멸되어 글씨의 흔적은 보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맥도는 원래 섬이였지만 1995년 남포방조제가 조성되면서 육지가 되어 이제는 쉽게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이분의 말로는 가까운 성주산에도 고은의 신도비가 있고 이웃한 홍성군 가야산(장곡면)에도 고운의 유적지가 있다고. 나는 이 부근을 수차례여행을 하였지만 이번 걷기에서 이곳의 고운 유적지를 처음 알게 된 수확을 얻었다.
우리는 우산을 폇다 접었다하며 해안 도로를 따라 걸음의 속도를 잃지 않고 예정된 시간에오늘 걷기에 종점인 대천해수욕장에 전원이 꼴인, 이곳에서 버스에 승차, 오늘의 숙박지인 “비체펠리스”에 도착, 여장을 풀었다. 저녁은 “등대회집”에서 이곳 명물인 회정식과 노래와 춤이 어우러진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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