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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면은 진주시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전기 진주목(晋州牧) 동면(東面) 금산리(琴山里)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며, 속사리에 있는 금선봉(琴仙峰)에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조선 전기까지는 진주목(晋州牧) 동면(東面) 금산리(琴山里), 대여촌리(代如村里), 월아미리(月牙彌里), 조동리(槽洞里)라 하였다.
임진왜란 후에는 대여촌리와 월아미리는 금산리에 합하여 금산리(琴山里)와 조동리라 하였다. 1832년(순조 32) 다시 금산리, 대여촌리, 조동리라 하였고, 1864년(고종 1) 이래로는 금산면, 대여촌면, 조동면이라 하였다. 1914년 3월 1일, 진주군 대여촌면, 금산면, 조동면을 합쳐서 금산면이라 하였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시 진주군 금산면은 가방리(加芳里), 장사리(長沙里), 용아리(龍牙里), 중천리(中川里), 송백리(松栢里), 속사리(束沙里), 갈전리(葛田里)의 7개 법정리로 개편되었다.
1987년 1월 1일에는 대곡면(大谷面) 와룡리(臥龍里) 일부를 가방리로 편입하고, 가방리 일부를 대곡면 단목리(丹牧里)로 이속하고, 집현면(集賢面) 덕오리(德梧里) 일부를 장사리로 편입하였다.
1995년 1월 1일자로 법률 제4774호에 의거한 행정구역 개편(도농 통합)에 따라 진주시와 진양군이 통합되면서 진주시 금산면으로 개칭 되었다.
진주시의 중앙부에 위치하여 동으로는 진성면(晉城面), 북으로는 대곡면(大谷面), 서북으로는 집현면(集賢面), 남으로는 문산읍(文山邑), 서로는 초장동(草章洞)과 접해 있다.
금산교를 통해 진주시내와 금산면이 연결되어 있고, 면의 동북쪽의 1007번 지방도와 면 중앙부의 1009번 지방도가 남북으로 관통하여 인근의 문산읍, 대곡면, 집현면 등과 연결된다. 진주시 중앙부에 위치하며 남강을 중심으로 구천강, 반성천 등이 인근 지역과 경계를 이룬다. 2006년 1월 1일 현재 면적은 32.80㎢이며, 총 5,239세대에 16,568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7개의 법정리와 29개 행정리, 154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연마을은 남성, 석교, 관방, 용심, 월아, 신기, 조동, 중마을, 속사, 송백, 어리골, 구암, 상의, 덕의, 덕정, 사동 등이 있다. 주요 지명은 대모통이, 물뫼등, 장군대, 뱃고개, 황유진 등 남강 및 임진왜란과 관련되어 유래된 지명이 많다.
1988년에 공군교육사령부가 대전(大田)에서 이전하면서 유동 인구가 날로 급증하고 있으며, 진주의 동부권 발달로 인한 각종 아파트 건립, 택지 개발 등의 신시가지 개발과 도시 팽창이 나타나고 있다.
주요 기관으로는 금산면사무소와 갈전 보건지소, 우체국, 농협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 진주동중학교와 금산초등학교가 있으며, 공군교육사령부, 진주지방노동사무소, 진주우편집중국 등이 입지하고 있다.
금산면의 남동부는 월아산(月牙山, 482m)을 중심으로 하여 구릉지를 형성하고, 북서부에 남강이 남에서 북으로 회류하여 다시 남동쪽으로 흘러 나가며, 그 주변을 따라 농경지가 펼쳐져 있다. 중천리, 장사리, 용아리의 경계되는 지역에 5㎞ 둘레의 금호지(琴湖池)가 위치하고 있는데, 신라시대에 자연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월아산에서 떠오르는 보름달이 금호지에 비칠 때 그 모습이 아름다워 '진주 12경'의 하나로 지정되어 있다. 둘레가 약 5㎞로 굴곡이 많고 W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한눈에 못의 전부를 볼 수 없다.
금호지가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신라시대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설에 의하면, '황룡과 청룡이 하늘에서 치열한 싸움을 하였는데 어느 용사가 하늘을 쳐다보며 싸움을 멈추라고 일갈하자 청룡이 땅을 내려다보는 순간 황룡이 청룡의 목에 비수를 꽂았고, 이 때 청룡이 떨어지면서 꼬리로 땅을 쳐서 생긴 것'이 금호지라고 전한다.
일제강점기 때 둑의 일부분을 돋우고 물넘이를 새로 만든 것 외에는 천 년이 넘도록 옛날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금산면의 문화재로는 월아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청곡사(전통사찰 제74호)를 중심으로 국보 제302호인 청곡사 영산회 괘불탱, 보물 제1232호인 청곡사 목조제석천, 대범천의상 등이 있다.
금산면 남서쪽으로 남강과 영천강이 흐르고 있는 지형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실제로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의 유물인 '빗살무늬토기' 파편이 발굴되기도 했다.
최근의 발굴 조사에서 금산면 지역에서도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금산면 지역의 청동기 유물은 2006년 발굴 조사 이전에도 간간이 출토되기도 하였는데, 1970년대에 경지정리를 할 때 돌칼과 토기가 많이 출토 된 적이 있다.
당시에는 이 유물에 대한 인식이 없었을 터라 유물이 출토되면 그 유물들은 무덤에서 나온 것이라 하여 집에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여겼기에 금산초등학교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금산면 지역에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자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실시 된 적이 있는데 (재)우리문화재연구원이 금산면 중천리 일대를 대상으로 2006년 8월 4일 ~ 9월 12일까지 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삼국시대의 주거지, 건물지는 물론 도로와 고려~조선시대의 건물지, 우물 등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를 토대로 발굴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는데 이 조사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석관묘 9기, 수혈유구 5기 등이 발굴되었다.
금산면 지역에서 발견된 고려시대의 주요 유물로는 이밖에 월아마을의 가마터에서 발견된 들 수 있다.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는 이 가마터에서는 고려 말 삼강청자에서 상감분청사기로 이행된 초기단계의 것으로 볼 수 있는 자기 파편들이 발굴되었다. 월아마을의 가마터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주(州)'의 동쪽 월아리에 자기소(磁器所)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당시에는 널리 알려졌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천년고찰로 알려진 청곡사에는 국보 제302호인 청곡사 영산회 괘불탱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가 있다. 보물 제1232호인 진주청곡사목조제석천ㆍ대범천의상,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39호 청곡사업경전 등이 있다.
금산면 가방리에 있는 임천서원은 진주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조선 숙종 28년(1702) 신암(新菴) 이준민(李俊民), 성재(誠齋) 강응태(姜應台),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 창주(滄州) 하증(河澄), 조은(釣隱) 한몽삼(韓夢參) 등 다섯 분의 학문과 그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 유림의 의견을 모아 창건하였다. 그 가운데 하증은 어머니 진주 강씨 부인이 왜놈에게 항절하다 죽음을 당하였기 때문에 평생토록 일본이 있는 동쪽을 향해 앉은 일이 없었다고 한다. 또 한몽삼은 1613년(광해군 5)에 사마시에 급제하고, 인조 때 특천되어 대군사부(大君師傅)를 지내고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역임했으나, 이후, 산골에서 일생을 보냈다. 이들 5인은 학문의 경지는 물론이요, 충효의 본을 이루는 사람들로써 그 공적을 추모할만 하다고 하겠다.
고종 때 흥선대원군에 의해 서원철폐령이 내려지자 1869년(고종 6) 이 서원도 철폐되었다가 1928년 가방리 314-2 산 아래 현 위치에 복원하였다.
서원 건물의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목조 기와집이다. 경상남도의 유림 대표들 주관으로 격년제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금산면 가방리 659번지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97호 부사정이 있다. 진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우도(慶尙右道) 학자들이 모여 학문을 닦던 장소였다.
부사정(浮査亭)의 '부사(浮査)'는 부사 또는 야로(野老)로 불리던 성여신(成汝信 1546~1632)의 호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성여신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공실(公實), 호는 부사ㆍ야로로 남명 조식(曺植) 선생의 문인으로 알려져 있다. 진주의 임천서원(臨川書院)과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되어 있으며, 저서로 『부사집(浮査集)』을 남긴 인물이다.
부사정의 건축물은 반구정(伴鷗亭)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려지고 있지만, 대체로 반구정을 포함한 건물 전체를 통틀어 '부사정'이라고 부르고 있다.
1600년(선조 33)에 부사 성여신의 제자와 유림이 선생의 호를 따서 건립하였다.1785년(정조 9년)에 반구정을 제외한 17동이 불에 타버렸다. 이후 부사정은 곧 중건되었으며, 1997년에는 지은사를 복원하였다.
부사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자그마한 단층 건물로 나지막한 언덕 중턱에 위치한 정남향의 건물이다. 지붕은 팔작 형식이며 사방으로 뻗은 서까래가 시원한 모습을 하고 있다. 크기는 대략 정면 12미터, 측면 7미터이고, 높이는 주춧돌을 기준으로 7미터 정도이다. 정문에서 보면 부사정 오른편으로 정면 4칸의 자그마한 부속건물 4동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부사정은 가운데 벽을 틔울 수 있는 방 두개가 있고, 방 주변은 난관이 있는 마루가 둘러싸고 있는데, 두 개의 방과 동서(東西) 방향에 위치한 마루는 문을 걷어 올리면 모두 통하게 되어 있다. 두 개의 방에는 좌측에 '반구정(伴鷗亭)', 우측에 '부사정(浮査亭)'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그리고 양쪽의 마루 위에는 상량문(上梁文)과 함께 부사정을 중수한 사실을 기념하는 글들이 함께 걸려 있다. 건축 구조로 볼 때, 후학들을 강학(講學)하던 장소로 쓰기 위해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부사정 동편으로 작은 문(門)을 지나면 같은 모양의 부속 건물 4동이 위치하고 있다. 이들 부속 건물은 부사정보다는 다소 규모가 작으나 가운데 마루를 두고 양쪽으로 두 개의 방을 두고 있으며, 4동 모두 비슷한 형태의 구조를 지닌 건물들로, 유생(儒生)들의 거처로 쓰였던 곳이다.
1993년 12월 27일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97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최근에는 대문과 담장 등을 정비하여 완전하지는 않지만 옛 모습을 되살려 놓았다.
부사정은 성여신이라는 조선중기 문인의 유적이라는 것 외에 조선 중기 유림(儒林)들의 학문과 주거라는 두 가지 목적을 겸한 건축 양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 중기 유교 문화의 이해에 큰 도움을 주는 건축물이다.
금산의 독특한 문화의 한 단면이 바로 '금산동약(琴山洞約)'이 있었다는 점이다.
'금산동약'은 부사 성여신이 71세 때 금산(琴山)에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본받아 이를 약간 보완하여 시행한 것이다.
참고로 여씨향약은 중국 섬서성(陝西省) 남전현(藍田縣) 여씨 문중에서 도학(道學)으로 이름 높던 대충(大忠) ㆍ대방(大防) ㆍ대균(大鈞) ㆍ대림(大臨) 4형제가 문중과 향리를 위해 만든 것이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좋은 일을 서로 권장한다(德業相勸) ② 잘못을 서로 고쳐준다(過失相規) ③ 서로 사귐에 있어 예의를 지킨다(禮俗相交) ④ 환난을 당하면 서로 구제한다(患難相恤)로 되어 있다.
이 향약은 그 뒤 주자(朱子)에 의해 약간의 수정이 가해져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이 만들어졌다. 한국에서는 1517년(중종 12) 중앙정부의 명령으로 각 지방장관에 의해 『여씨향약』이 인출 광포(廣布)되었고, 이를 토대로 이황(李滉)은 『예안향약(禮安鄕約)』을, 이이(李珥)는 『서원향약(西原鄕約)』을 만들었다.
1533년에 퇴계 이황이 금산 청곡사를 지나면서 옛 일을 회상하면서 시를 지었다.
1533년 3월 26일에 월아산(月牙山) 법륜사(法輪寺)에서 독서하고 있던 강회숙(姜晦叔)과 강응규(姜應奎)를 방문하러 갔으나, 모두 부재중이라 퇴계 혼자 법륜사에서 유숙하였다. 이에 앞서 강회숙이 퇴계에게 편지를 보내어 책망하기를, "의령(宜寧) 가까운 곳에 와서 봄 석달을 다 보내면서도 소식이 없느냐?"라고 하였으므로, 이들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퇴계와 사마시(司馬試)에 동방급제(同榜及第)한 인연이 있었다. 법륜사는 문산면(文山面)월아산 남록(南麓)에 있던 큰 사찰이었는데 병화로 소실되어 그 유지(遺址)만 남아 있고, 거기 있던 탑은 인근의 두방사(斗芳寺)로 옮겼다.
이 때 퇴계는 의령에서 법륜사로 가다가 길을 잘못 들어 금산 쪽을 경유하게 되어, 청곡사를 지나게 되었다. 청곡사는 숙부인 이우공이 진주목사로 부임했을 때 자기의 두 형이 독서하던 곳이었다. 퇴계로서는 연고가 있는 곳이었으므로, '과청곡사(過靑谷寺)-청곡사를 지나며'라는 시를 지었다.
금산 가는 길에 해거름에 비를 만났다네.
청곡사 앞엔 콸콸 솟아나는 차가운 샘물.
눈 녹은 진펄 위에 찍힌 기러기 발자국 같은 인생,
죽고 살고 헤어지고 만나고 하는 일에 눈물 주루룩.
(金山道上晩逢雨, 靑谷寺前寒瀉泉.
爲是雪泥鴻跡處, 存亡離合一然.)
이때는 자기 형들이 독서하던 시절로부터 27년의 세월이 지났는데, 셋째 형은 1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넷째 형은 조정에서 벼슬하고 있어 자주 만나기 어려웠는데, 그 때 고향으로 다니러 온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자신이 남쪽 지방에 머물고 있어 만날 수 없었기 때문에 제3, 4구에서 이렇게 읊었던 것이다.
금산면 속사리 속사 마을에 있는 갈마정 우물과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 관련 된 이야기도 전해온다.
이성계가 남해 금산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올라가는 길에 속사마을(옛 사월마을)을 지나다 목이 말라 마침 갈마정 우물에서 물을 긷는 처녀에게 물을 청했다. 처녀는 바가지에 물을 뜨더니 우물가의 버드나무 잎을 훑어 물 위에 띄워 주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나뭇잎을 후후 불어가며 천천히 물을 마신 후 그 연유를 물으니, 처녀는 "선비님이 너무 목말라하는 것 같아 급히 물을 마시면 체할까 두려워 천천히 드시라고 그랬다."고 대답하였다. 이성계는 처녀의 지혜에 감탄하여 그녀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태조 이성계 부인의 고향이 진주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금산면이 태조 이성계의 부인 강씨와 연관이 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전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