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아버지
아버지 !
멀고 먼 하늘나라에서 잘 지내고 계신지요 ? 외롭진 않으신가요 ?
아버지 ! 저는 아버지 덕택에 이 세상 소풍 , 잘하고 있습니다 .
아버지 ! 감사합니다 .
저도 이제 62 년을 살았고 , 교단에서 40 여 년을 보냈습니다 . 이제 머지않아 저의 인생 최고의 일터에서 아쉽게도 물러납니다 . 퇴직하면 저도 자유롭고 시간적 여유를 누릴 거라 기대합니다 . 저는 지금까지의 인생 여정에서 분에 넘치는 즐거움과 행운을 누렸습니다 . 많은 행운 중에서 부모님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가장 큰 행운이었지요 . 부모님과 천지신명께 감사드립니다 .
80 년을 선하게 살다 가신 아버지 . 가신 지 손가락 몇 개면 헤아릴 수 있을 법한데 벌써 17 년이 되었습니다 . 저도 교직생활을 마무리 하며 그간의 생애를 정리하려니 불현듯 아버지가 그립습니다 . 아버지는 참 착하게 사셨습니다 . 뛰어난 재능이나 특별한 행운도 얻지 못하고 참으로 평이한 삶을 사셨지요 . 한 번도 큰소리칠 만큼 사신 적도 없고 과시한 번 못하시고 떠나셨습니다 . 그러나 ,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일이 없고 , 조그만 불편조차도 주지 않아 '법 없이도 살 사람' 이란 말을 들으며 바위 산처럼 한 생애 꿋꿋이 사셨습니다.
10 대 때 조실부모하여 조부모의 유산도 받지 못하였지만 , 아름답고 똑똑한 아내를 만났지요. 당돌한 아내라서 냉엄하기도 해 부드러운 사랑은 별로 받지 못하셨지요. 그래서 달콤한 사랑이나 인생의 즐거움은 별로 느껴보지못하고 적적하게 사셨지요 . 다만 천품이 근면 성실하시어 노후에는 안정된 삶을 사시다 조용히 가셨습니다 .
저 역시 , 아버지께 살갑게 해드리지 못했는데 그렇게 떠나시니 나이가 들수록 아버지께서 참 쓸쓸한 생애를 사셨구나 싶어 마음이 짠합니다 . 제가 이제 퇴직을 앞두니 언젠가는 저도 아버지의 발자국을 따라 가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말씀이 거의 없으셨지만 가슴 속에는 음악적 감각이 매우 발달된 분이셨습니다 . 아버지는 동네의 풍물단에서 가장 멋져 보이는 주인공이었습니다 . 백부님께서 상쇠를 두드리며 나아가면 아버지는 장구를 치며 뒤를 따르셨지요 . 현규 어른이 북을 치셨고 , 영열이 아저씨가 징을 치며 추석날과 정월 대보름날에 동네를 휘돌았지요 . 고향 친구들은 “양 장구를 치는 네 아버지가 가장 멋있다 .” 고 했습니다 .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아버지께서 운동회에 참석하셨습니다 . 학부모님들이 운동장으로 나오시어 축구공을 몰고 6 0~70 미터의 깃대를 돌아오는 경기에 아버지도 참가하셨습니다 . 아버지께서는 잰걸음으로 공을 모는데 얼마나 빠르게 잘 모시는지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 아버지의 멋진 모습으로 기억되는 한 장면입니다 .
역시 초등학교 때였을 겁니다 . 외가의 외숙부 댁에서 친지 몇 분과 술자리가 익어갈 때 좌중의 어른들이 상판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 돌아가며 노래 하나씩을 부르는데 아버지께서 노래를 얼마나 잘 부르는지 놀랐습니다 . 차분하고 여리게 , 조용하면서도 점잖게 가다듬은 고운 목소리라 다른 사람들도 무척 놀랐지요 . 옆에서 구경하던 아주머니들이 아버지께서 노래를 가장 잘 부르신다고 소문을 내기도 하였습니다 .
아버지의 칠순잔치 때 아버지께서는 주인공으로서 노래 제안을 받고 ‘돌아와요 부산항에 ’를 칠순 노인 같지 않게 구성지게 부르셨습니다 . 가사는 언제 외우셨는지 , 평소에 한번도 노래를 부르시는 모습을 보지 못했고 흥얼거리는 것조차 보지 못하여 또 한 번 놀랐습니다 . 아버지께서 그렇게 잘 부르셨기 때문인지 우리 5 남매도 직장에서는 손꼽아 주는 정도로 노래를 부르는 편입니다 . 아버지의 유전인자를 닮은 것이지요 .
60 여 년 전 , 채무상환면제법이 발효된 적이 있었습니다 . 이 법이 발표되기 직전에 아버지는 인근 방앗간에서 쌀을 빌렸었습니다 . 그 시절엔 돈 대신 쌀로 돈처럼 거래를 하던 시기였습니다 . 생활이 곤궁한 농민들이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 당시에는 이자가 비쌌습니다 . 장리 빚도 얻어 썼습니다 . 장리 이자는 1 년 뒤에 배로 갚아야 하는 아주 높은 이자였습니다 . 장리 이자라도 빌려야만 굶어죽는 것을 피할 수 있었던 시기였지요 . 가난한 소작 농민들은 농사를 지어도 도지를 내면 남는 게 별로 없어 한번 빚지면 빚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구조였지요 . 그래서 임시로 채무상환변제법이 한번 시행되었습니다 .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방앗간의 빚을 갚았습니다 . 갚지 않아도 되는 법이 있다고 해서 빌려다 쓰고 안 갚는 건 말이 안 된다고 하셨대요 . 그래서 아버지는 동네에서 법이 필요 없는 분이라고 했지요 . 그런 신용이 있어 아버지는 돈이 필요할 때는 방앗간에서 우선 적으로 빌려 주었다고 해요 . 그래서 빚을 얻기 힘든 사람들은 아버지가 부탁을 해서 얻어 주었다 합니다 .
학교도 제대로 다닌 적이 없는 아버지 . 그런데도 아버지의 선한 마음은 학식의 여부가 아니라 인간의 기본이었지요 . 아버지는 평소의 지론이 “선한 끝은 있어도 악한 끝은 없는 법이다 ”는 아버지의 좌우명이었습니다 . 그래서 저는 우리 아들 이름을 선한 [착한 ]이라고 지었습니다 .
아버지께서 타계하시어 장례식을 할 때 특별한 추도식을 했습니다 . 100여 명의 문상객들 앞에서 어느 장관이 국장이라도 치르는 듯한 경건한 장 례식이었지요. 저는 아버지에 대한 회고사에서 “우리 아버지께서 못 갚은 빚이 있다면 제가 갚겠습니다 .” 고 선언했습니다 . 그러나 아무도 아버지께서 빌려간 빚이 있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 아버지께서 빚을 남겼을 리가 없을 거라고 저는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
반가운 손님이 오시면 아버지께서 닭을 잡았습니다 . 아버지께서는 항상 닭발과 닭 머리를 드셨습니다 . 살점이 많은 닭다리나 날개를 드시지 않고 보기에도 민망한 그런 부위를 드셨습니다 . 다른 사람들은 기피하는 부위였지요 . 생선 역시 대가리는 아버지 차지였습니다 .
잔치집이라도 다녀오신 날은 주머니에서 사탕 한두 개를 꺼내 저에게 주셨습니다 . 어린 마음에 저는 아버지께 , “가져오는 동안 잡수시고 싶지 않으셨어요 ?” 하고 여쭈었지요 . “아니 . 먹고 싶지 않았다 .”고 대답하셨습니다 . 나는 거짓말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 그런데 아버지 말씀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훨씬 뒤에 알았습니다 . 저도 아들에게 갖다 주려고 주머니에 사탕을 넣어 가져다 준 적이 있는데 정말 먹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더군요 .
아버지께서는 가끔 제게 특별한 먹을거리를 주셨습니다 . 닭을 잡으면 온기가 남아있는 닭똥집을 날것으로 주셨고 , 돼지나 개를 잡으면 날간을 핏기만 닦아 소금을 찍어 주셨습니다 . 씨암탉이 낳은 달걀을 따뜻할 때 어서 먹으라고 주셨습니다 . 이른 봄 어느 날에는 개울가에서 떠온 개구리 알을 저에게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 진흙이 조금 묻어 있고 뭉텅이가 콧물처럼 느클느클하여 먹을 엄두를 못 냈습니다 . 그러자 아버지께서는 , 동네 뒷집 아저씨도 탐내던 보약이라 하시며 , 몸에 좋은 거라고 몇 번 권하시기에 눈 딱 감고 먹었지요 . 먹을 게 귀하던 시절에 개구리 알은 단백질 공급원이 될 수 있어 굶주린 사람에게는 약도 될 수 있었겠지요 .
아버지는 해방 전에 원산 부두에서 노동일을 하셨습니다 . 해방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며 구두를 사 신고 오셨습니다 . 잘 사는 사람들이나 신던 구두를 신고 오자 백부님께서 빌려 신고는 돌려주지 않으셨다지요 . 또 시계점을 운영하시는 친척이 있어 괜찮은 손목시계를 사셨는데 외삼촌이 군대에서 휴가 나왔다가 빌려 차고는 그대로 입대를 하고 말아 귀한 손목시계를 잃어버렸지요 . 그 당시 동네에서는 리장이신 백부님이나 찰 수 있는 시계였지요 .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원망의 말씀을 평생 동안 하지 않으셨습니다 . 그 뒤로도 외삼촌은 쌀 몇 가마를 빌려 갔지만 끝내 갚지 않고 말았습니다 .
어머니는 친정 동생을 하나 데려다 길렀습니다 . 먹을 게 별로 없던 시절이라 식솔 하나 느는 것도 부담이련만 아버지는 일절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 명절날이나 집안의 행사 때 손님이 오시면 밥상에서도 거의 말씀을 안 하시고 식사가 끝나면 조용히 일어나 건넌방이나 밖으로 조용히 나가셨습니다 . 다른 사람들이 편하게 이야기 나누고 담배도 피울 수 있도록 배려하신 거지요 .
아버지는 매년 백부님 생일도 챙겨드렸습니다 . 백부님은 동생인 아버지의 생신을 한 번도 챙겨주신 적이 없었습니다 . 숙부님은 장사하시다가 형편이 어렵자 칼을 가지고 와서 어머니에게 협박을 한 적도 있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안 하셨습니다 . 동네 사람들과 다투시는 걸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
66 세 되시던 해 , 30 년 이상을 사시던 고향 집을 떠나 군포로 오셨습니다 . 연로하여 농삿일을 하시기 힘드시리라 여겨 제가 모시기로 한 거지요 . 그런데 뜻밖에도 국회의장을 지낸 이재형 씨의 농장 관리인으로 취업이 되었습니다 . 자전거에 도시락을 매달고 그 농장으로 페달을 밟으셨습니다 . 신바람 나게 한 5 년은 다니셨을 건데 그 때 10 년 여 번 돈이 그 이전 50 여 년에 번 돈보다 많을 거라고 어머니께서 좋아하셨습니다 . 그때가 아버지의 전성기였지요 .
수리산 아래 전답이 모두 메워지고 신도시가 만들어지며 주변이 아파트 단지로 개발되어 이재형 씨의 농장이 평택으로 이사가 아버지의 일자리가 없어졌습니다 . 그러나 아파트 공사가 시작되자 공사장 일을 한 4~5 년쯤 다니셨습니다 . 그리고 80 세로 돌아가시기 두어 달 전까지 폐지 줍는 일을 하시느라 새벽이나 늦은 밤까지 집 주변을 돌아다니셨습니다 . 벌써 20여 년 전 일이군요.
대장암으로 수술을 4 년 사이에 세 번이나 하셨고 , 항암 치료를 계속하셨지만 결국 재발되어 80 세이던 2001 년에 먼 길을 떠나셨습니다 . 두 번째 수술 뒤부터는 장루를 달으셨는데 돌아가시기 한 달 전까지 손수 관리를 잘 하셨습니다 . 배에 복수가 차 마지막에는 병원에서 한 달 간 투병 생활을 하셨는데 치아 사이에 피가 맺히는 고통 속에서도 여간해서는 진통제도 맞지 않고 견디셨습니다 . 아버지의 그 엄청난 인내심이 무척 존경스러웠습니다 . 입원해 계실 때에는 주로 아내와 제가 번갈아가며 병간호를 했지요 . 아내는 낮에 , 저는 직장에서 퇴근한 후 저녁에 도시락을 싸 들고 가서 함께 먹으며 아버지의 밥맛을 도와드리고, 아버지 침상 곁에서 새우잠을 자고 출근하곤 했지요.
돌아가시기 직전에 장롱 바닥에서 아버지의 지갑을 발견했는데 용돈으로 넣어 두신 돈이 80 만원이었습니다 . 아마 아버지께서는 그 지갑을 어디서 잃어버린 줄도 모르셨던 것 같았습니다 . 그 사실을 말씀드리고 장학금으로 기부하겠다고 했더니 아버지께서 흔쾌히 허락해 주셨습니다 . 아버지께서 멀리 떠나신 2001 년 , 부의금으로 받은 돈을 일부 합쳐 300 만원을 재단법인 초원장학회에 기탁했습니다 . 그래서 초원장학회에서 제가 추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했습니다 . 그 유지 장학금의 이름이 '규순장학금'인데 ‘규 ’는 아버지의 이름에서 따고 ‘순 ’은 어머니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지요 . 그 후 어머니께서 초원장학회에서 '장한어머니상'을 받으시고 부상으로 금 한 냥 값을 받았습니다 . 어머니께서 정말 기분이 좋으셨는지 나중에 500 만원을 주시어 규순장학금을 800 만원으로 늘렸습니다 . 2012년에 제가 제 1 회 대한민국스승상을 수상하여 옥조근정훈장을 받았고 부상으로 받은 상금에서 200 만원을 보태 합계 1,000 만원으로 아버지 이름으로 장학금을 수여할 수 있었지요 . 아버지께서 남겨주신 종자돈으로 그런 기부를 시도할 수 있었습니다 .
아버지의 80 생애 , 그리고 아버지 슬하에 살던 33년의 생애 중에 기억나는 일들을 적다보니 4 페이지가 되었습니다 .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오래 간직하고자 정리해 보았습니다 . 아버지께서는 지금 먼 하늘나라에 계시지만 저와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 아버지의 과묵하심과 인내정신을 본받아야 할 텐데 제가 많이 부족합니다 . 아버지의 ‘선한 끝은 있어도 악한 끝은 없다 ’ 라는 좌우명을 본받으려 노력하며 살겠습니다 . 손자 이름이 '선한' 이니 제 아들도 선하게 살겠지요. 제가 누린 인생의 즐거운 소풍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땀과 피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버지 , 안녕히 계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