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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모임]
24. 생명의 복음 (3)
2020. 9. 25. 이현래 목사
오늘은 사도행전에 들어왔다. 생명의 복음 세 번째 말씀으로 죄 문제이다.
기독교는 특별히 죄와 깊은 인연이 있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부흥회를 가면 언제든지 첫째 날은 회개하는 날이다. 공식적이다. 나는 회개할 것이 없어서 아주 애를 먹었다. 모두 회개하느라 야단인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가슴을 치고 통곡할 죄가 없었다. 더군다나 내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이 시인이 안 되니까 상당히 어려웠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셨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였다.
이것은 사실 베드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오순절 이후에 ‘예수는 생명의 주’라고 말했다. 그리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행3:19)’고 이야기했다. 죄 용서를 받으라는 말보다 훨씬 더 강한 말이다.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죄란 원래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존재론적으로 말하면 죄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은 것이니까 없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죄라는 말을 아예 무시해 버린다. 원래 없는 것이니까 그 사람들은 죄 문제에 대해서 이러고저러고 할 일이 전혀 없다. 그런데 유태교나 기독교에서는 죄 문제가 아주 큰 문제다. 왜냐하면 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 문제의 해결이 없이는 정상적인 관계를 가질 수가 없다.
베드로는 죽은 사람이었다. 예수님이 죽으신 후로 베드로는 죽은 사람이었다. 숨 쉬고 고기 잡는 것은 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었다. 하나님에 대해서 죽은 사람, 특별히 예수에 대해서 죽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살아 나와서 난리를 치고 다니는 것이다. 공회에 불려가기도 하고 심판을 받기도 하고 여러 가지가 나온다. 베드로뿐만 아니다. 사도들이 다 그렇고 오순절에 함께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랬다는 것이다. 다 살아났다는 것이다. 오순절 사건은 굉장한 사건이었던 것 같다. 모두 오순절 사건을 통해서 살아났다는 것을 간증하는 것이다. 나는 살아났다.
베드로의 복음은 생명의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살아났다고 하는 것이니까. 나는 죽었었지만 살아났다. 예수는 죽었다가 살아났다 이 말은 알고 보면 자기가 지금 살아났다는 말이다. 예수가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객관적으로 말하면 사실은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르기 때문이다. 그 현장에서 봤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모르는 일이다. 사람은 한 번 나면 죽는 것이다. 죽으면 다시 살지 못한다는데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듣는다고 해도 모르는 일이다.
죽었다가 소생했다는 것은 짐작이 간다. 또 경험해 본 사람도 많다. 나도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아무 것도 모르겠다. 분명히 의학적으로는 죽었었는데 다시 살아난 것이다. 오순절 사건에서 살아났다는 것은 소생과는 다른 문제다.
생명의 복음, 살리는 복음, 이렇게 해도 될 것 같다. 오순절에 사람들이 살아났다. 하여간 무슨 소동이 벌어져서 땅이 진동하고 사람들이 방언을 말하기도 하고 불 칼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니까 대단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와 비슷한 사건들은 기독교 역사에서 군데군데 있는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도 1904년인가 평양에서 일어난 대 부흥회 사건 때도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던 것 같다. 그 이후에 한국 교회는 굉장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때 당시의 사정을 이야기로는 들었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을 만나본 적은 처음이었다.
서울에 있을 때 한 할머니를 만났는데, 그때 분이셨다. 평양까지 자기 집에서 80리 길이라고 한다. 거기를 주일날이면 갔다 오는 그런 분이었다. 내가 만났을 때가 30대였는데 그분은 하얀 노인이었다. 방 안에 그냥 쭈그리고 앉아 있는 노인이셨다. 우리 교회 집사님 중 한 분이 사돈댁이라면서 특이한 할머니가 있다고 꼭 가보자고 해서 갔던 일이 있었다. 여러 명이 갔었는데 구역 예배 형식으로 예배를 보고 기도를 하는데 아주 특이했다.
내가 기도를 하는 중에 그 할머니께서 ‘윽, 윽’ 했다. 특이하다 생각했는데 기도를 하고 나니까 그 할머니가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나보고 노망했다고 하기도 하고 해서 말을 안 하는데 오늘 전도사를 보니까 말을 하고 싶다면서 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하시라고 했더니 그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다. 평양에 갔다 오는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는 비를 하나도 안 맞았다고 한다. 집에 들어오니까 식구들이 깜짝 놀라더라는 것이다. 이 우중에 어떻게 오느냐고 했다. 그런데 자기 몸에는 비를 하나도 안 맞았다고 했다.
쌀 한 되를 가지고 기도하러 가서 20일을 있다가 왔는데 밥을 세끼 밖에는 안 먹었다고 한다. 일부러 금식한 게 아니고 때가 없어진 것이고 시간이 없어진 것이라는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얼굴을 보면 너무 너무 평화롭고 항상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다. 물으니까 자기는 지금도 항상 천사들의 노랫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나는 세상에 그런 할머니는 처음 만나 봤다. 날라리가 아니고 진실했다.
나는 그것을 직접 체험해 보지 못했으니까 사정을 잘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은 틀림없이 맞다. 그 여파가 지금은 모르겠는데, 우리나라에 순복음 교회가 들어오기 전에, 여수에 오순절 신앙을 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있었다. 그 사람들은 꿈꾸고 방언하고 예언하는 분들이었다. 그런 아주머니를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어렸을 때라 별로 특별한 관계는 없었다.
나는 지금도 이런 체험이 없다. 지금까지도 없으니까 신비로울 뿐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신비로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건들을 봤으니까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어떻게 된 것인가? 전에도 한 번 말했지 싶은데 너는 나의 피조물이다. 내가 내일 일을 모르고 살 때, 내일 끼니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살 때, 나는 피조물이구나. 이 한 말씀을 듣게 되었다. 그냥 공중에서 들려온 말이 아니고 깨달은 것이다. 아, 나는 피조물이구나.
그런데 신기한 일은 그것을 비쳐서 알고 난 그 순간부터 내 머리 속에 들어 있던 복잡한 생각들,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이런 복잡한 생각들이 사라졌다. 그때가 아마 25이나 27살 때였지 싶다. 교회를 10살 때부터 열심히 다녔다. 그런데 세례를 받으라고 할 때 자신이 없어서 못 받았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르면서 세례를 받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계속 미루어 오다가 그날 이후로 스스로 받고 싶다는 생각이 났다. 세례가 무엇인지 모르는데 교회를 다니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일부러 요청해서 세례를 받았다.
그 이후로 머리가 싹 정리가 되었다. 나는 피조물이구나. 내가 내일 일도 모르겠는데 하나님을 어떻게 알겠는가? 알고 보니까 이렇게 간단한 문제였다. 아주 복잡해서 알아보려고 하고, 책도 읽어 보고 누구에게 질문도 해보고 별 짓을 다 해 봤는데 너무 간단한 문제인 것이다. 나는 피조물이다. 나는 내일 일도 모른다. 이렇게 해버리니까 모든 문제가 다 원인 무효가 되고 간단해져 버렸다. 이게 난 특별한 은혜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죽은 자 가운데서 난 살아난 것이다. 교회는 다니지만 하나님께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다. 내가 20살에 기적적으로 병이 나았다. 그런데도 그것을 하나님께서 고쳐 주셨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믿음이 없는 기독교인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확 달라졌다. 그래서 교회생활이 재미가 있었고, 나대로는 깊이 참여하게 되었다. 『주의 손에 이끌려』에 자세하게 썼으니까 참고하시면 좋겠다. 이 말씀은 평생 나의 삶과 믿음에 기반이 된 것이다. 한 번도 변함이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여러 가지 말을 하지만 기반은 ‘나는 피조물이다.’이다. 여러분이 잘 들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내가 전하는 모든 말들의 기반은 바로 ‘나는 피조물이다.’라는 이 말이다. 인간은 피조물이다. 간단하다. 이것 때문에 너무 단순해졌다.
하나님은 여러 방면으로 사람을 살리는 것 같다.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한다. 베드로는 오순절에 살아난 사람이고, 나는 곤고했던 그날에 살아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은 다른 면에서 다른 입장에서 살아났을 것이다. 여러분도 다 개인적인 경험이 다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11:29)고 각자 다른 주문식 구원인 것 같다. 그 사람에게 맞춰서 부르신 것 같다. 사영리를 전하면 그것을 읽고서도 눈물을 흘리며 예수를 믿겠다는 사람이 있다.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어떤 방면으로 살림을 받았든지, 은혜를 받았든지, 살림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렸다는 말이다. 어떤 방법으로 왔던지 간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린 것이다.
이 관계를 개선하지 못하도록 막는 끈질긴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이 죄 문제는 안 떨어지고 계속 따라 다니기 때문에 아주 귀찮고 끈질긴 것이다. 모든 게 다 시원치 않다. 죄라는 문제 때문에 열심히 해도 시원치 않고, 충성을 해도 시원치 않고 하여간 뭘 해도 시원치 않다. 어떻게 사람이 죄를 짓지 않겠는가? 이러면 다 끝난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죄를 짓지 않겠는가? 이렇게 밖에는 말할 수가 없다. 사람인데 어떻게 죄를 짓지 않겠는가?
그런데 베드로가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것을 보면 “죄 없이 함을 받으라.”(행3:19)고 한다. “죄 없이 함을 받으라.” 물론 죄 사함을 받으라는 말도 많다. 그런데 가장 매력적인 말은 죄 없이함을 받으라는 이게 아니겠는가? 사함은 받아 봤자 다음에 또 할 수 있다. 아예 없애 버리면 이 문제로 고통 할 필요가 없다. 죄는 없어져야 할 것이다. 없애는 방법이 되어야지 사함 받는 방법으로는 안 되겠다. 용서받고 또 짓고, 용서받고 또 지으면 용서 받으나 안 받으나 별 차이가 없다. 큰 차이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문제로 고민을 많이 하다가 우리나라에도 구원파 사건이 나서 지각 변동이 일어났던 때가 있었다. 그때 너무 좋았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발이 땅에 닿는지 안 닿는지 모르고 6개월을 다녔다든지 이런 사람들이 많다. 나는 그게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한 사람이 아주 많다.
우리나라에는 장로교가 많으니까 특별히 장로교 안에 대 변동이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거기로 빠져 나가고 대 혼란이 일어났다. 그 이후에 기도원이 생겼다. 기도원에 가면 은혜 받는다고 성령 받는다고 하고, 방언도 하고 저마다 다 그것을 전하러 다니느라고 열심히 나서 70년대에는 부흥사 전성시대가 있었다. 사방에서 부흥회 운동이 일어나는 이런 일이 생겼었다.
기독교인들은 특별히 죄 문제로 고민을 많이 하는 것 같다. 나는 신학교를 가기 전에는 그런 고민을 안 해 봤다.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만 고민했지 죄 문제로 어떤 고민을 안 해 봤다. 교회가 그래서 그런지 그런 것에 관심이 별로 없는 교회였다. 제대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이 문제가 굉장히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유교에서는 죄를 뭐라고 생각하는가? 천리를 어긴 것, 하늘의 이치를 어긴 것, 이것을 가장 큰 죄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인륜을 어겼다든가, 이런 것이 나오게 되고, 확대하면 사회적인 윤리 문제가 나오게 된다. 유교는 아주 현실적이다. 천리, 순천자(順天者)는 흥(興)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亡)한다. 인격적인 것은 아니지만 하늘은 절대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유교는 이것을 빼고 말할 수가 없다. 신이 없는 종교라고 하지만 천리를 빼면 유교는 아무 할 말이 없다. 유교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할 말도 없다. 천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불교에서는 죄가 아예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죄 이야기는 불교에서 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원래 없는 것인데 무슨 이야기를 할 게 없다. 원래 없는 것이라는 것도 참 재미있는 생각이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원래 죄라는 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죄는 무슨 이유로 발생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진 백성들이기 때문에 그것을 어긴 것을 가장 큰 죄라고 한다. 기독교인들은 좀 애매하다. 성경 말씀을 어긴다거나 심지어는 교리를 어긴다거나 이런 것을 다 죄라고 한다. 또 개인적으로 지은 잡음 죄들은 수없이 많으니까 아주 복잡하다. 그래서 죄를 회개하라고 하면 사람마다 다 다르다.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누이와 관계가 나빠서 회개한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가 많이 있으니까 종합선물 세트다. 죄라는 것이 현대 기독교에서 설정한 것은 종합 선물 세트다. 모든 게 다 포함되어 있다. 나쁜 것은 다 포함되어 있다.
일반적으로는 가르침과 양심의 깨달음, 이런 것이 죄책을 가져오게 된다. 사회적 규범이나 민족성, 문화, 이런 것과 관계가 많이 된다. 역사를 살아온 기독교는 죄에 대한 생각은 상당히 복잡하고 혼란스럽다. 분명히 갈라내는 사람도 별로 없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사도행전 3장 19절에는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행3:19)는 이런 내용이다.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것이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베드로 설교의 중심이었다.
이것을 직접적으로는 너희가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행3:15) 여기서 시작하는 말이다. 너희가 생명의 주를 법 없는 자들에게 내 주어서 죽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다고 말씀하다가 이 말이 나왔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예수 죽인 것을 회개하고 돌이켜서 죄 없이 함을 받으라는 이런 말이다.
그러면 예수를 죽인 것만 회개하면 되는가? 예수 죽인 것을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한다. 예수 죽인 것을 회개하고 돌이키면 죄 없이 함을 받는다. 그러면 예수를 죽인 죄는 없어질 것이다. 그런데 그게 전부인가? 아니면 일부냐?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근원적으로 생각하면 이게 전부다. 근본적으로 생각하면 이게 전부다. 예수를 죽인 것이 모든 죄의 근원이다.
죄의 목표는 생명의 주를 죽이는 것이다. 선악을 아는 지식은 무엇 때문에 있는가? 이것은 생명을 죽이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어디든지 선악을 아는 지식이 들어가면 생명은 죽는다. 거기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우리가 아주 편하게 살고 있는 현대 사회 세계가 벼랑 끝으로 가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과학 문명이 발달한다. 과학 자체는 기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니다.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전부 다 과학화 되고 만다. 과학적인 지식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면 생명은 소용이 없어져 버린다. 실제로 육신이 살고 있기는 생명으로 살고 있는데, 생각하는 것은 전부 과학으로 생각한다. 생명을 과학으로 생각하면 생명은 아무 것도 아니고, 그냥 죽임을 당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 별거 아닌 문제 같지만 심각한 문제다. 목표가 생명을 죽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담 시대에, 동산 시대에 무슨 과학이 있었겠는가? 그런데 그런 말씀이 있었다. 생명나무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냐? 이 둘 중에 하나를 사람이 선택하도록 되어 있었다.
지금 세상을 보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90%쯤 되고, 생명나무에 관한 것은 10%밖에 안 된다. 원시적인 생명, 육신의 생명, 이것만 지금은 생명에 관계가 되지 다른 것은 다 과학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생명은 10%로도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있는지 없는지 생각도 안 한다.
내가 왜 있는가는 과학적으로 있는 것만 생각한다. 부모가 결혼해서 나를 낳았다. 이것은 생명의 문제다. 이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할 필요도 없으니까 생각하지도 않는다. 모든 것을 다 과학적으로만 생각한다. 이래서 하나님 말씀을 알아듣겠는가? 하나님 말씀이 과학을 이루려고 말씀이 아닌데, 하나님 말씀이 알아지겠는가? 이게 큰 문제다.
죄의 목표는 생명을 죽이는 것이다. 어떤 생명이든지 간에 생명을 죽이는 것이다. 근원으로 올라가면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끊는 것이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남자가 여자 없이, 여자가 남자가 없이, 자식을 낳을 수 있다면 이것은 굉장히 신기한 일 같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다. 그것마저 없어지면 완전히 끊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없어지면 세상은 끝이 날 것이다. 로봇이 사람을 대신하고, 사람은 낳을 필요도 없고, 공장에서 찍어 만들면 되니까 인간 사회는 없어지는 것이다. 장난 같은 문제가 아니다.
근원적인 죄가 바로 생명을 죽이는 것이다. 이것이 근원적인 죄다. 그것이 모든 죄의 근원이다. 베드로는 단순히 너희가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행3:15),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행3:19)고 말했지만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말이다.
상황 하나만 보면 간단한 것 같다. 예수와 관계가 없는 사람은 관계도 없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원리로 들어가면 이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다. 예수를 죽였다는 문제는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의 주를 죽인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주는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끊는 것이니까 가장 중요한 문제다.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 모든 죄의 근원이다. 생명의 관계를 무시하는 것은 결국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 끊고 약화시키는 것이다. 결국에는 그렇게 된다.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생각하면 생명관계는 없어지는 것이다. 무시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모든 것이 다 끊어지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기름부음이 끊어진다. 사람에게 기름 붓는 기름부음이 끊어지니까 위임이 끊어지고 축복이 끊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축복 안에 포함된 모든 것, 기름부음 안에 포함된 모든 축복이 다 끊어지는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가장 중요한 문제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어떤 것이 없다면 사람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고, 동물이나 인간을 구별할 수가 없다. 사람이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하나님의 위임이 있기 때문에 구별된다. 우리가 무슨 지식이 많고 지혜가 많아서 구별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위임 때문에 사람은 동물과 구별된다.
우리가 인공위성을 타고 별에 간다고 해서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인간의 존재 의미가 된다고 할 수 없다. 그렇게 하면 인간이 되는 것인가? 그게 아니다. 몇 년에 걸쳐서 우주를 탐험하는 것을 보니까 놀랍다. 몇 년 동안을 공중으로 날아가서 예정한 지점에 도착한다는 것을 생각하니까 놀랍다. 귀신도 그것을 하겠는가? 못한다. 이보다 놀라운 일은 없다. 그런데 이것만이겠는가?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그 세계는 헤아릴 수도 없는 그런 문제가 아닌가? 그러는 동안에 사람의 사고방식이 전부 다 그렇게 바꿔지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그것으로 측정하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되겠는가?
내가 금붕어를 볼 때 과학적으로 본다면 하나의 생물이다. 그것을 더 과학적으로 알려면 해부도 해 봐야 되고, 세포 하나하나를 다 연구해서 DNA가 어떻고 RNA가 어쩌고 이렇게 분석하면 그게 과학적으로 아는 것인데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그렇게 알아지겠는가? 그렇게 관계가 되겠는가? 남자와 여자가 둘이 결혼하면서 다 분석해 보고 한다면, 과학적으로 결혼을 한다면, 결혼이 되겠는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더 나아가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하려면 개념이 바꿔져야 한다. 과학적인 개념을 가지고 친구를 사귀거나 결혼을 하면 끝난 것이다. 모든 게 다 끝나버린 것이다.
죄를 처리한다는 말은 이 문제를 처리해야 된다. 남의 밭에서 사과 하나를 훔쳐 먹었다는 것을 처리한다는 말이 아니다. 근본적인 문제다. 생명과 죄에 관한 문제가 아주 중요한 문제다.
교회가 이것을 버리고 과학 시대에 맞춰서 무엇을 하다 보면 교회가 존재할 필요가 없어진다. 교회가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지금 이 죄가 안 없어지니까 용서에다 맞추고 있다. 예수를 믿으면 용서를 받는다. 죄 용서를 받는다. 그러나 용서만 받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용서를 받으면 또 할 수 있다. 없어진 게 아니니까 용서를 받았으면 다음에 또 그렇게 해야 된다.
차라리 불교처럼 죄란 없는 것이다 해 버리면 나은데 죄를 인정하면서 용서받으면서 ‘구원받은 죄인’이라는 말도 나온다. 구원받은 죄인이다. 구원은 은혜로 받았고 죄는 아직 처리가 안 됐다는 말이다. 참 딱한 일이다. 함정이다. 죄는 용서를 받기도 해야겠지만 없어져야 하는 것이 문제다. 죄는 없어져야 한다. 없어져야지 용서만 받아서는 안 된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없어져야지 마스크를 끼고 사회적 거리를 유지해 봐야 되겠는가? 어떤 사람은 그런 말을 한다. 사람이 말을 할 때 침이 얼마나 튀는가? 사회적 거리두기를 2미터 하는데, 침이 4미터 까지 날아간다고 한다. 심하면 8미터까지 날아간다고 한다. 이것을 무슨 수로 막아내겠는가? 그리고 손 씻기를 계속 강조하는데, 사람이 만지는 것이 한 사람이 만지고 마는 게 아니다. 엘리베이터는 사람마다 한 번씩 만지는데, 무슨 수로 손을 씻어서 되겠는가? 문고리를 손으로 잡고 열고 한다. 사람마다 다 와서 계속해서 문을 열고 닫고 하는데 어떻게 손을 다 씻겠는가? 그런 말이 나온다. 어느 정도 막는다는 것뿐이지 완벽하게 되기는 어렵다. 나 혼자 딱 살면 되는데 사회적으로 살려면 그게 불가능한 일이다.
용서도 마찬가지다. 용서를 받는 것은 그런 식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없어지지 않는 한 어느 사무실에 가서 문고리 하나를 잡기도 어렵다. 항상 조심하고 살아야 한다. 용서 받은 사람이나 용서를 안 받은 사람이나 별 차이가 있는가? 하나님께 용서 받은 사람이나 용서받지 않고 그냥 사는 사람이나 별 차이가 있는가? 죄가 없다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나 죄가 있는데 용서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별 차이가 없다. 기독교인이라고 자랑할 게 아무 것도 없다. 용서 받았으면 없어져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죄를 없이 하려고 아들을 보냈다.’고 말한다. 성경구절은 못 찾겠는데 어디에 이 말이 있다. 죄를 없이 하려고 아들을 보냈다. 아들을 보낸 것은 그때그때 죄를 용서해 주려고 보낸 게 아니고, 근원적으로 해결하려고 보낸 것이라는 말이다. 근본적으로 처리하려니까 아들이 필요했다. 그때그때 용서하는 것이야 아들이 아니라도 할 수 있다.
천주교회에서는 그때그때 용서하기 위해서 고해성사라는 아주 묘한 방법을 만들어 놓았다. 찝찝하면 가서 고해성사를 하면 된다. 간단하다. 기독교인들은 교회에 가서 새벽기도하면 된다. 기독교인들보다도 천주교인들이 더 쉽다. 구체적으로 가서 회개하면 거기서 사면해 준다. 벌금 낼 것 같으면 벌금을 내게 한다. 재미있다. 성당 청소 며칠 해라고 하면 되는 것이다. 벌금 얼마 내면 된다. 꼭 세상 법정과 비슷하다. 차라리 그렇게 하고 나면 그 사람들은 시원해진다.
기도를 해놓고 나면 하나님이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모른다. 얼마나 열심히 했느냐를 생각해야 되는데, 얼마나 열심히 기도해야 하나님이 내 죄를 용서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또 하고 또 하고 계속하는 것이다. 방언하는 사람들을 보면 밤새도록 기도한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맨날 그런 이야기다. 되풀이 한다. 한 말 또 하고 한 말을 또 한다. 그렇게 하니까 사람이 흥분되어 황홀해진다. 그런 것을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밤에 자지 않고 기도한다.
옛날에 나는 그게 부러웠다. 어떻게 하면 잠을 안 자고 저렇게 기도하는가? 기도하면 할 말이 별로 없었다. 부흥사에게 말을 하면 뭐라고 하는지 아는가? 기도를 3분도 못한다고 뭐라고 한다. 한 시간이라도 기도를 해야 되는데 한 시간 동안 할 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참 딱한 세상을 살았다.
죄를 없이 하려고 아들을 보냈다. 이 죄를 없이 하려면 어찌해야 이 죄가 없어지는가? 회개하는 것은 위치를 바꾸는 것이다. 그냥 회개 하니까 너무 가볍게 생각한다. 위치를 바꿔야 될 일이지 잘못했다고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위치를 바꿔야 한다. 죄 있는 위치에서는 그 자리에서는 죄가 없어지지 않는다. 그 자리가 죄 있는 자리이기 때문에 죄가 없어지지 않는다. 항상 거기가면 죄가 있다. 그 자리에 가면 언제든지 죄가 있다.
우리 집에는 다 좋은데 한 가지 안 좋은 것이 있다. 이웃집에서 연탄을 피우는데 그 연탄가스가 우리 집으로 들어온다. 우리 집 지형이 움푹하게 생겨서 저기압이 되면 다 우리 집으로 모인다. 옛날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우리 집에 돈도 많이 모이고 모든 것이 모이는 곳이라 굉장히 좋은 곳인데 연탄가스가 모이니까 이것이 문제이다. 바깥 공기가 그러니까 밤에는 문을 열어놓지 못한다. 산속이니까 공기가 신선하고 좋은데 그런 공기를 맡을 때가 별로 없다. 항상 그 집에서 연탄을 때기 때문이다. 새벽에 늦게 되어야 기압이 올라가니까 공기가 조금 좋아진다. 그런데 여기를 떠나야 연탄가스가 없지 여기서 마스크를 쓴다고 되겠는가? 산소통을 쓴다고 되겠는가? 이속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죄 있는 위치에서는 죄는 없어지지 않는다. 위치를 바꿔야 한다. 왜냐하면 죄 자체가 위치를 이탈한 것이 죄다. 위치를 이탈한 것이 죄인데 무슨 수로 해결이 되겠는가.
유대인들은 율법을 어긴 것을 죄라고 하고, 기독교인들은 성경말씀을 어긴 것을 죄라고 한다. 모든 죄는 관계에서 발생한다. 원래 있는 것이 아니고 발생한 것이다. 그러면 왜 관계에서 발생하는가? 아무 관계가 없으면 발생도 하지 않는다. 관계가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관계는 계약이다. 사회적인 계약이다. 여기 도장을 찍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것이 사회적으로 계약이 되어 있으니까 사회적인 죄가 생기는 것이다. 나는 남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는 계약이 되어 있다. 이 계약을 위반한 것이다. 차는 좌측으로 통행하고 사람은 우측으로 통행한다는 것은 법이다. 이 법속에는 상호간의 계약이 들어 있다. 왜냐하면 반대로 가면 사고가 나니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추석에 고향에 가지 말라고 했는데 갔다면 이것은 권고 사항이니까 죄는 되지 않는다. 하지만 법령으로 절대 가면 안 된다고 해놓으면 죄가 된다. 이번 추석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될 수 있는 아주 절박한 기회라고 당국에서는 대단히 긴장하여 될 수 있는 대로 가지 말라고 하는데, 기어코 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시골에 있는 부모들이 오지 말라고 전화를 한다고 한다.
사실은 부모를 만나려고 간다는데 잘못하면 그 부모가 전염될 수 있다. 죽은 사람들 대부분이 노인들이다. 젊은 사람들이 가서 퍼트려놓으면 노인이 죽는 것이다. 효도 하려면 이번 추석은 가지 않는 것이 효도이다. 돈이나 보내주고 그것이 효도이지 싸가지고 가는 것은 효도가 되지 않고 큰 불효가 될 수도 있다. 이런 말을 방송으로 많이 들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도 좀 정부 시책에 기여하는 사람이 될 것인데 듣는 사람이 얼마인지 모르겠다.
관계에서 발생한 것이니까 이것은 계약이다. 무언의 계약도 있고, 유언의 계약도 있다. 유대인에게는 왜 이런 죄 문제가 생겼는가? 유대 민족 자체가 약속의 백성이다. 하나님과의 약속이 있는 백성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죄가 생긴 것이다.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율법은 하나의 약속이다. 모세가 율법을 선포했을 때, 백성의 장로들이 대표로 나와서 뭐라고 했는가 하면 “옳습니다. 우리가 다 그대로 준행하겠나이다.”(출24:3,7) 이것은 계약이었다.
모세는 우슬초에 피를 발라서 언약서에 뿌렸다고 한다. 두 번인가 세 번인가 그렇게 했다고 한다. 이것은 피로 언약을 확실하게 하자는 말이다. 피로 언약을 하자, 생명으로 언약을 하자는 말이다. 바둑판의 뒷면에 보면 구멍이 파진 것이 있다. 그것이 피로 맹세한 것이라고 한다. 승부를 결정해서 목숨을 내놓겠다는 그런 서약 속에 한 것이라고 한다. 바둑을 둘 때, 법을 어기면 안 된다는 말이다.
계약이 있기 때문에 죄가 성립한다. 계약이 없으면 죄가 될 수 없다. 유대인들은 계약의 백성이다. 유대인들이 2천년 동안 세계에 흩어져 살았는데, 이 사람들의 특색이 계약이다. 계약이 철저하다. 중국사회에서는 계약이라는 것이 없었다. 영국 사람들이 와서 아편전쟁에 져서 문제가 생겼는데 조약을 맺자고 하니까 조약은 무슨 조약이냐고 했다. 조약이 무엇인지를 몰랐던 것이다.
한국과 중국은 어떤 관계인가? 그냥 상하관계이다. 조약을 맺은 것이 아니다. 일본 사람들은 우리와 합병 조약을 맺었다. 일본 사람들은 이미 서구문명을 받아들여서 우리와 그냥 같이 지내자는 것이 아니고 합병조약을 맺었으니까 꼼짝을 못한 것이다.
중국 황제가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어서 저런 오랑캐들이 어디서 와서 조약을 맺자고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양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 다 어디서 왔는가? 모두 유대인에게서 왔다. 무엇을 하든지 철저하게 계약서를 쓰는 것이다.
미국에 사는 유대인들 가운데서 변호사가 제일 많다고 한다. 법률 전문가들이 제일 많다. 이것은 그들 민족이 계약된 민족이기도 하고, 객지에 가서 살아남으려니까 힘이 없는 사람은 계약을 맺어야 한다. 말 해놓고 힘 있는 사람은 지키지 않으면 그만이다. 시골에 가면 그런 것이 많다. 법이 있어서 계약을 맺어 놓으면 힘이 있는 놈도 꼼짝을 못한다.
우리나라도 계약이 생기면서부터 이런 문제가 생겼다. 계약이 있기 때문에 죄가 생긴 것이다. 유대인들을 생각하면 돈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관념이 세계인들에게 박혀 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한다. 섹스피어가 <베니스의 상인>이라는 소설을 썼다. 거기에 샤일록이라고 하는 사람이 친구에게 급한 일이 생겨서 돈을 구하게 되었다. 친구를 위해서 돈을 빌리러 갔더니 유대인이 하는 말이 기일 내에 갚지 않으면 심장에서 가장 가까운데서 살 1파운드를 뗀다고 계약을 맺었다.
그런데 약속한 기한에 돈을 갚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때 칼을 다 준비를 해 놓고 재판장이 명 판결을 했다. 1파운드의 약속을 했으면 그대로 지켜라. 대신에 살 1파운드에서 조금이라도 넘어가면 안 된다. 더군다나 피는 포함되지 않았으니까 피한방울도 흘리면 안 된다고 재판관이 그렇게 판결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그것을 못하고 말았다. 그것을 소설화 시켜놓은 것이 <베니스의 상인>이다. 이 책 때문에 유대인들은 완전 수전노로 몰렸다. 그 사람들은 계약서를 쓰는 것이 너무 상식적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그것이 잘 안되어서 계약을 맺을 때는 적당히 맺어 놓고 다음에 사고가 나면 재판을 받아야 된다. 맺을 때 확실하게 맺어야 하는데, 구체적으로 별로 하지 않는다. 계약서를 쓰자고 하면 그것 자체로도 어색하고, 너무 야박한 것 같은 것이 우리 민족이다. 우리도 그런 사회를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습관이 되어 있다. 대부분 계약을 허술하게 해서 다음에 가면 계약 때문에 싸움이 생긴다.
건축을 하는 데도 계약을 허술하게 해놓고 마지막에 집을 짓고 나면 대부분 싸운다. 아주 평화롭게 해결되는 데는 거의 없다. 우리 교회를 지을 때도 철저하게 계약을 했다. 교회 형제가 꼼꼼하게 해서 하루라도 만일 공사가 늦어지면 얼마의 벌금을 내기로 했다. 돈도 하루라도 늦게 주면 벌금을 내기로 했다. 그 사람들이 공사 기간을 맞추지 못해서 한 번 걸려서 벌금을 받았다. 그러니까 꼼짝을 못했다. 야박한 것 같은데 그렇게 해야 뒤끝이 조용하다.
우리는 약속을 했다. 내가 돈은 반드시 기일 내에 준다. 대신에 일도 반드시 기일 내에 마친다. 그 다음에 교회 일을 하는데 제일 어려운 것이 입이 많다고 한다. 장로마다 와서 다 얘기를 하지, 이 사람은 이 말하지 저 사람은 저 말하면 공사하는 사람들이 그것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고 한다. 목사가 와서 얘기하지, 장로가 와서 얘기하지, 집사가 얘기하지, 다 한마디씩 하면 일이 안 된다.
그래서 시세가 좋고 경기가 좋을 때는 될 수 있는 대로 교회 일은 받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교회에서 또 약속을 잘 안 지킨다. 돈이 없어서 2층 올려놓고 나서 부흥회를 한다. 2층 올려놓고 또 부흥회를 한다. 이러니까 공사 업체가 죽을 지경이라서 잘 안하려고 한다고 한다.
우리 교회를 지을 때는 경기가 어려울 때니까 서로 하려고 했다. 대신에 계약을 잘못 해놓으면 큰 코 다치는 것이다. 계약을 아주 깐깐하게 해놓고, 또 우리 형제들에게 일체 입을 닫으라고 했다. 창구를 하나로만 한다고 사장에게 약속했다. 어떤 사람도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하겠으니 한 사람만 상대해서 하라고 했다. 공사할 때 자기들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끝날 때 사장이 참 감사하다고 했다. 이런 교회 같으면 어째서 교회 일을 꺼리겠느냐고 했다.
계약이 오늘날 사회를 살려면 너무 중요하다. 그 대신에 계약을 어기면 죄가 된다. 유대인들은 이것이 습관화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들이 습관화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유대인들이 전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도 자기들의 무엇을 가지고 살고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경에서 죄, 죄, 하는 문제가 그냥 나온 문제가 아니다. 계약적 백성이기 때문에, 언약의 백성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는 죄의 개념이 아주 구체적이고도 엄격하다. 어려서부터 아이들을 가르칠 때, 약속을 지킨다는 개념을 아이들에게 철저히 교육을 시킨다고 한다. 우리는 그런 것을 교육을 시키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공부 좀 잘하게 할까, 이것밖에 엄마들의 생각이 없다.
이번에도 코로나 때문에 대면 수업을 못한다고 도시에서 시골로 주민등록을 옮겨서 아이들을 시골학교로 보낸다고 한다. 시골학교는 학생 수가 얼마 되지 않아서 대면수업을 해도 넉넉해서 문제가 없다고 한다. 나는 고등학생이나 된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고 초등학교 2학년 3학년 학생들을 데리고 내려가는 것이다. 한국 엄마들은 대단하다. 이것을 보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육열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제대로 된 교육열이 못된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어떤 아픔이다. 공부를 해서 출세를 해야지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박혀 있는 사람들이다. 유대인들은 구체적으로 계약을 철저하게 가르친다고 한다. 앞으로는 세상이 점점 자유로워지면 그럴수록 더욱더 계약이 필요한 것이다.
미국 같은 사회는 자유가 중심인데 그렇기 때문에 계약이 더욱더 철저하게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해도 다 개인 변호사가 있다. 우리는 아직도 그렇게 안 되니까 길바닥에 서서 서로 욕하고 삿대질하고 교통사고 나면 싸운다. 그 사람들은 변호사에게 맡기면 되니까 서로 싸울 필요가 없다.
일반적으로는 가르침, 양심, 그런 것들이 관계가 되고, 사회적인 규범, 민족성, 문화와도 관계가 된다. 이 역사를 살아온 기독교인들이다. 유대교를 지나서 희랍사회를 지나서 로마로 옮겨온 기독교니까 죄에 대한 생각이 복잡하다. 그리고 혼란스럽기도 하다. 맨날 교회에서 죄에 대해 얘기를 하지만 뭐가 죄인지를 잘 모른다. 말하는 사람도 모르고 듣는 사람도 모른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행3:19) 놀라운 말이다.
하나님도 용서는 할 수 있어도 없앨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자기 길로 갔다. 자기 길은 무슨 길인가? 우리 이름을 세상에 빛내자. 이것이 아담이 가는 길이었다. 그 길로 갔다. 이 길에 가 있는 사람은, 거기 있는 사람은, 혹시 어떤 특별한 사정에 의해서 하나님이 용서할 수는 있는데, 없이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세계가 그런 세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라도 어찌할 수 없다. 죄가 없어지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다.
죄를 없이 하려면 위치를 바꿔야 한다. 바벨로 가던 길을 돌이켜 다른 길로 가야지 바벨로 가면서 죄 용서함을 받으면 된다고 해서는 안 되는 문제이다. 왜 죄 용서만을 중요하게 생각했는가? 바벨로 가기 때문에 그렇다. 바벨로 가기 때문에 용서라도 받아야 되기 때문이다. 그 길로 가면서 용서 받는 것이 받아봤자 그것은 영원한 것이 되지 못한다. 아예 돌아서야 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보면 죄라는 말이 없다. 길을 다른 길로 돌아섰다. 그것은 죄와 관계된 길이 아니고 다른 길이었다. 바벨로 가는 사람들은 죄 용서를 받는다. 그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부름 받은 사람들은 죄 용서를 받아가지고는 안 된다. 죄가 없어져야 된다. 죄가 없어진 길로 가는 것이다.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하나님도 그 길에서는 없이 할 수 없다. 그 길 자체가 죄이기 때문에 거기서 죄를 없이 할 수가 없다.
연탄가스가 꽉 차있는 공간 안에서 마스크를 쓸 수는 있지만 영구적인 것은 안 된다. 똑같다. 죄를 회개해라고 하고 만날 회개를 해도 안 된다. 이것이 같은 길에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들도 자기도 모르고 남도 모른다. 입만 아프지 아무 효과가 없다.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을 어찌하겠는가? 일시적으로 사람이 뉘우치는 경우도 있다. 정말로 뉘우치면 그때 그 문제에 대해서는 되겠지만 사람이 항상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 죄 안 짓고 살 수 있냐? 죽은 후에나 해결이 되지 지금 어떻게 해결이 되겠느냐? 이런 말이 나온다.
자기 이름을 빛내자 하고 가는 길에는 죄가 없어지지 않는다. 이 길에서 돌아서서야 한다. 돌아서는 것이 회개이다. “회개하고 돌이켜.”(행3:19)라고 했다. 용서는 있을 수 있어도 죄가 없어지는 길은 아니다. 부르심은 돌이켜서 이리로 오라는 말이다. 불렀다는 말은 가던 길을 돌이켜서 이쪽으로 오라는 말이다. 옛 위치를 떠나서 부르심의 목적 안으로, 다른 목적으로 오라는 말이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서도, 예수를 만나서 따라다니면서도, 목적이 다른 데 있었다. 심지어 제자들도 목적이 다른 데 있었다. 열심히 따라 다니면서 죽을지라도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고, 옥에도 같이 가고 죽는 데도 같이 가겠다고 했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결심을 했는데도 이것이 안 되었다. 믿어도 안 되고 힘써도 안 되고 뭘 해도 안 된다는 옛날 노래 가사가 있다. 그 노래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해보니까 안 되니까 그 말을 한 것이다. 믿으면 되겠다고 나중에 그렇게 말하지만 믿음이 어느 정도 되어서 되는 것인지는 구체성이 없다.
돌이켜서 이리 오라는 것이다. “너의 고향(본토)과 친척과 아버지(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다른 길이다. 그 길에는 죄와 관계된 길이 아니다. 아브라함도 잘못한 것이 있고, 이삭도 잘못한 것이 있고, 야곱도 잘못한 것이 있고, 다 있다. 있는데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는다. 연단의 과정에서 필요했던 것들이지 죄로 여기지 않는다. 길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도 거짓말을 했다.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해서 오히려 책망을 들었다. 네가 거짓말을 해서 큰 죄를 지을 뻔 했다고 그랄 왕이 책망했다. 그런데도 성경을 읽어보면 재미있는 것이 많은 재물을 얻어서 나왔다고 했다. 이삭도 거짓말을 했다. 야곱도 얼마나 거짓말을 많이 했는가? 그래도 죄로 정하지 않았다. 길이 다른 길이다.
부르심은 참 중요한 것이다. “너의 고향(본토)과 친척과 아버지(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이것이 중요한 말이다. 이것을 나도 그렇게 하고 남에게도 제시해야 한다. 하나님이 부르신 그 길을 제시해야 한다. 죄를 회개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그 길로 불러야 된다. 죄가 없어진 길로 불러야 된다.
다른 사람의 죄를 취급하려면 얼마나 어렵겠는가? 나는 검사 같은 사람들은 참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만날 사람을 잡아도 놓고 다 긁어 파서 나오게 하려고 그 사람의 죄를 추궁하고 있다. 또 별놈이 다 있을 것이다. 거기 가서 자기가 살려고 오죽 거짓말을 많이 하겠는가. 옛날에는 고문을 하거나 때리는데 요즘은 그런 것도 못하게 하지 그것이 참 못할 일이다. 서로 못할 일이다. 이*화 형제가 배치를 받을 때, 검사로 갈까 판사로 갈까 하고 묻기에 판사로 가라고 했다. 검사로 가면 사람 버린다고 했다. 지금 판사를 한다. 사람을 취조하는 그런 일은 없다. 사람을 취조한다는 것이 사람을 말리는 것이다.
부르심의 목적 안으로 인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내가 부르심의 목적 안으로 가는 사람이라야 그 사람을 나도 끌고 가지 내가 그렇지 않고는 할 수 없다.
부르심의 목적은 어디인가? 어디가 목적지인가? 아브라함도 모르고, 이삭도 모르고, 야곱도 몰랐다고 할 수 있다. 예수와 연합하여 죄가 없어지는 곳이다. 거기로 부른 것이다. 예수와 연합하면 죄가 없어지는 것이다. 왜? 죄로 말미암아서 예수를 죽였다. 예수와 연합된다면 죄가 없어지는 것이다. 여기 사도행전에서 말한 죄가 없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 길에서, 부름 받은 그 길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와 연합했다. 그 길이 그 길이다. 왜 아브라함은 100세까지 기다려야 했는가? 왜 이삭은 모리아 산에서 나와야 했는가? 왜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20년 동안 그런 길을 걸어왔던가? 전부 다 예수와의 연합이다. 그때부터 예수와 연합한 것이다. 그 뒤는 연합의 길이었다. 예수와 연합해야 아버지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이런 질문들을 혹시 받을 것이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다. 예수님이 구원이라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죽은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렇게 묻는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예수님이 있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8:58) 아브라함은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 그 길을 간 것이다. 이삭도 예수를 만나러 그 길을 간 것이다. 야곱도 마찬가지이다. 그 길의 종착역은 다 예수를 만나는 길이다. 예수를 만나서 그분과 연합한 것이 종착역이다. 우리 인생이 갈 종착역이고, 특별히 부름 받은 사람의 갈 길이 거기이다. 어디로 부르고 있는가? 바로 거기로 부르고 있다.
천당이냐? 이것이 아니다. 이것은 생명의 승리이다. 생명을 잡아먹는 여러 가지 것들 속에서 생명의 승리이다. 과학시대에 생명의 승리가 있어야 한다. 지금 과학이라는 것이 엄청난 힘이다. 젊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인데 그 속에서 생명은 살아남아야 된다. 그것이 우리 희망이다. 새 예루살렘은 생명의 성이다. 이것이 없으면 기독교는 있으나 마나이다. 소용없다. 이것이 없으면 결국 기독교는 없어질 것이다.
불교가 지금 더 인기가 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 자유인데 불교의 목표는 자유다. 둘이 만나면 얼마나 잘 통하겠는가? 기독교는 아직도 사람들의 인상 속에 뭐가 들었느냐 하면 기독교에 가려면 죄를 회개해야 되고, 또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이 다 있다. 불교가 들어가서 자유를 선포하면 교회 갈 사람이 없어진다.
우리에게 맡긴 것은 생명이 세계이다. 연합의 세계를 맡겼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와 연합하러 가는 것이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다 이 길에 있었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이다. 예수 없을 때 태어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아니다. 예수 없을 때 태어난 사람도 이 길로 가는 것이다. 생명이 길은 이 길이다.
예수 이전 사람도 예수 안에 포함되고 예수 이후 사람도 예수 안에 포함되고 다 그분 안에 포함되고 그분이 우리 종착역이다. 우리의 출발이고 동시에 우리의 목적지이다. 우리는 다 그분 안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분 안으로 가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 있는 말씀 그대로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1:30)라고 한다. 근본이 같다. 근본이 같으니까 근본이 같은 데서 만나져야 한다. 사람이니까 사람의 씨는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이다. 벼는 뭐가 되는 것인가? 벼는 벼 되는 것이다. 다른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으로 나온 것은 예수나 우리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예수 가는 데로 우리도 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정한 사람은 그 사람뿐이니까 그곳으로 가는 것이다. 농부가 인정하는 것은 자기가 뿌린 씨밖에 인정하지 않는다. 자기가 뿌린 것밖에. 똑같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었으면 그 사람밖에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에게 필요한 것은 그 사람이다. 내가 농사를 지을 때는 그 곡식이 필요해서 농사를 지은 것이다. 벼가 필요한 사람은 벼를 심고, 보리가 필요한 사람은 보리를 심는다. 어떤 농부이든지 간에 농부의 마음은 똑같다. 다른 열매가 열린 것은 다 소용이 없는 것이다. 벼가 필요해서 벼를 심었는데 거기서 콩이 난다고 되겠는가? 안 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다 예수 만난 사람들이다. 우리보다 더 확실하게 만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완전히 그분이 해부돼서 공개된 분을 만난 것이고, 그분들은 그렇게까지는 만나지 못했다.
히브리서 1장은 그 말이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1:1,2) 우리는 이 마지막 날에 아들을 만났다. 이것이 보통일인가!
알고 보면 짚신을 만들 때도 나이키 신발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사람들은 짚신을 나이키로 신은 것이고, 우리는 지금 그 짚신을 나이키로 신는 것이다. 그때 짚신도 아주 곱게 삼은 것이 있었다. 그냥 짚만 아니고 왕골로 아주 곱게 만든 짚신이 있었다. 그런데 투박하게 해서 농사짓는데 신고 다니는 것도 있었다. 그런데 신발이 발전해서 그때 제일 좋은 신발보다 지금 것이 더 좋다.
예수 생명도 계속 계속 발전해서 우리에게 올 때는 완전히 좋은 신발이 되어 온 것이니까 우리는 행운아들이다. 아브라함보다 우리가 복되고, 이삭과 야곱보다 훨씬 복된 사람들이다. 생명의 승리이다. 이것이 생명의 승리이다. 생명의 승리가 하나님의 승리이다. 여기서 죄가 없어지는 것이다. 생명의 승리가 되면 죄는 없어진다. 회개하고 말고 이런 세계가 아니다. 죄를 멸하기 위해서 오셨다. 이것이 할렐루야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할 일이고, 예수를 찬송할 일이다. 예수를 더 기다리고, 기다리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계22:20)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 말은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예수도 만나본 사람이 더 만나고 싶다. 안 만난 사람은 아무 감각이 없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우리는 영원토록 그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그분 안에서 할렐루야가 되니까, 그분 안에서 참으로 아멘이 되니까, 그분 안에서 아니라 함이 전혀 없다.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이 ‘예’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기다리는 것이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