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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학, 과학, 철학(Mathèse, science et philosophie, 1946)[스물하나]
- 편지들과 다른 원문들(Lettres et autres textes: LAT, 2015), pp. 288-298 (P.314).
번역: 들뢰즈 다양체: 편지와 청년기 저작 ... (2022)(서창현, 갈무리)
나로서는 이 논문이 그의 죽음에 앞에서 나온 논문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읽은 지 일년이 지났는데, 더욱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들뢰즈가 스무살에 자신의 삶의 전개를 평생동안 노력하며 풀어갔던 것이 아닌가 한다. 마치 한 구도자처럼, 또는 아라한처럼, 어쩌면 말라르메의 ‘책’처럼 자신을 묶어가면서, 내부의식을 풀어갔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한 인간이 자기 삶의 과정을 일관성 있게 정체성을 찾고 유지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는데, 마치 보살이 될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 흐름을 순환하고 풀어가면서 계속하는데, 벩송이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56TMF)
「보편학, 과학과 철학(Mathèse, science et philosophie, 1946)」은 이탈리아 출신 의사인 말파티(Malfatti, 1775-1859)가 쓴 책에 대한 입문 글이다. 이 글을 읽으면 말파티의 지식들의 무권위와 위계화에 관한 연구, 의학의 특별한 적용과 더불어(Studien über Anarchie und Hierarchie des Wissens mit besonderer Beziehung auf die Medicin. 1845)(프랑스어 Études sur la mathèse, ou Anarchie et hiérarchie de la science, avec une application spéciale à la médecine)라는 책 내용에 대한 구도를 잡을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 같다. 말파티가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하였겠지만, 그보다 들뢰즈가 말타피의 중요점이 무엇인지를 말하고자 한다. 들뢰즈가 보기에 말타티는 “보편학”을 말하고자 한다는 것인데, 이 보편학의 설명이 일반에게 잘 와 닿지 않는다. 한마디로 인간 본성(자연)을, 생성과 통일성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기존의 과학과 철학이 다루는 방식과 달리, 보편학은 “생명”을 다룬다는 것이리라. 이 생명이 보편이며 생성이지, 이데아가 보편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고, 이런 의미에서 기존의 생명을 다루는 방식과 다르게 보고 있다. - [이런 생각은 아마도 벩송의 「형이상학 입문(Introduction à la métaphysique, 1903)」과 「끌로드 베르나르의 철학(La philosophie de Claude Bernard, 1913)」에 대한 독해에서 나왔을 것이다. (56TLC)]
아마도 여기서 생명을 토대로 두고서, 생명이 스스로를 생성하는 능력인데 경향상으로 이중성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 이원성은, 고대의 하늘과 땅, 그리고 데카르트 이래로 영혼과 신체의 문제가 아닌가? 이중성은 스피노자와 연관이 있을 것 같다. 두 속성 중에서 철학이 영혼을, 과학이 신체를, 다룬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질병은 과학의 소관인가? 과학에서 중요 주제가 되었다. 그러나 생명은 성관심과 더불어 과학의 것도 철학의 것도 아니기에 보편학이라고 제기 한 것 같다.
이분화의 길에서 공통의 토대로서 생명이 있다. 이 생명은 철학의 체계에도 과학의 이론에도 속하지 않는 아나르키(anarchie)라고 제시할 수는 있을 지라도, 이로부터 생성, 생산, 창조를 말하기는 어렵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생명을 다루는 방식이 있어왔고 있고 있을 것이다: 그 전수(내밀한 전수)는, - 한의학이 전수되듯이 - 철학과 과학의 방식과는 다르다(?).
들뢰즈가 일찍이 형이상학이 아니라 형이심(深)학을 염두에 두고 또는 관심을 가지고 썼을까? 아니면, 벩송은 베르나르(Bernard, 1813-1878)의 실험의학 입문(1865)에 대해 「클로드 베르나르의 철학, 1913」(PM)을 썼을 때, 인간 생명을 다룸에서 새로운 이데아가 있다는 것을 설명했다. 들뢰즈는 ‘새로운 개념’이 “있다”로 읽었을까? 들뢰즈는 이런 새로운 이데아를 생명으로 제시하면서 사유의 길을 열어놓으려 했을까? 벩송은 물체들의 원본인 이데아는 다른 물체들을 동일하게 만드는 원인 또는 거푸집이지만, 생명의 이데아가 원인일 경우에 다른 경향들과 방향들을 인도하는 유도적인 이데아이라는 것이다.
들뢰즈가 이런 이데아와 연관있는 저술로서 말파티의 저술을 예로 삼으면서, 이런 사유방식은 인도 문명에서 길어왔을 것이라고 언급한다. 그런데 그 언급의 자료에 대해 쓰지도 않았고, 주를 달지도 않았다. - 글을 쓰기를 권한 소개한 마리 막들렌 다비(1903-1999)가 인도에 관심일까? - 그럼에도 우리가 막연하게 벩송의 논문과 등치시키고자 하는 것은 ‘생명’이라는 변화하면서 흐르고 있고 생성하며 발전하는 대상을 이데아라는 용어를 붙일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게다가 말파티에서 생명을 보편으로 제시하면서, 두 갈래의 학문, 즉 철학과 과학으로 전개하는 것이, 자연 즉 신에서 두 속성만큼이나 전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이데아라는 용어를 수학과 천문학(물리학)에서 쓰이는 방식과 달리, 생물학(의학)과 심리학에서도 이데아를 쓸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들뢰즈는 이런 생명에 대한 용어로서 이데아를, 말파티를 빌어서, 마테즈(보편학)로 용어[개념]를 창안 또는 설명하려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가 말하는 형이심(深)학의 토대는 아페이론(흐름)이고 여기서 생명이 생성되고 또한 물체도 고착되는, 생명과 물체의 이원성을 갖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이원성은 서로 환원되지 않으며, 생명체에서는 철학이 영혼(의식, 직관)이라는 이름으로, 물체에는 과학이 정신(지성, 논리)이라는 이름으로 다루고 있다고 구별해야 하지 않을까? 형이심학의 철학은 생명을 다루는 한에서 영혼(의식), 의학, 생물학, 병리학, 생리학 등의 자료를 총괄해야 할 것이며, 형이상학은 전통적으로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수학, 언어학(논리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기계학, 반도체, AI를 다룬다고 해야 할 것 같다. (55RM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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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사에서 연속성의 이론과 위계질서 사이에서 어느 쪽에 서느냐에 따라서 그 학자의 학문적 체계도 삶의 터전의 양상들도 다르다. 전자에는 무소유가 후자에는 사적이익의 확대에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철학사에서는 본질(실체)에서 두 갈래의 길 과학과 철학이라고 하지만, 그 두 갈래의 근본이 되는 원리는 통일성이다. 이에 비해 여기서는 묘하게 언급된 것 같은데, 마테즈가는 원초적 흐름이 있고 그 흐름의 갈래로서 과학과 철학이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상위 삼위격의 학문 해석(설명)에 대해 들뢰즈는 심층의 삼원성에서 중심 또는 생성(다양체)의 연속성에서 갈라지는 여러 갈래들에게 각각에게 특이성을 부여하고자 했던 것 같다. 상위의 삼각형(나중에 가족삼각형이 되겠지만)에 대한 반대의 사유로서, 즉 생명의 사유로서, 심층의 생성과 탄생, 삶의 과정, 그리고 소멸의 삼원성으로 보았다는 것도 흥미롭다. 들뢰즈는 벩송의 시간성을 잘 보았고, 게다가 인민들이 모두 신이 되는 특이성의 발현을 상상(l’imagination)했을 것이다. (56TMF)
# 보편학, 과학과 철학(Mathèse, science et philosophie, 1946)
[00] - [Études sur la mathèse : ou Anarchie et hierarchie de la science avec une application spéciale de la médecine.]
보편학(la mathèse)을 과학과 철학 연관 속에서 정의(定義)하는 것은 흥미로울 수 있다. 부득이하게, 그러한 정의는 어떤 의미에서 보편학 그 자체의 외부에 머물 것이다. 그 정의는 단순하고 임시적이며, 단지 그 정의는 역사적인 매 순간에 독립적으로, 보편학이 정신의 위대한 태도들 중에서 항상 현실적인 하나의 태도를 묘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 (288) [보편학(la mathèse): 이 용어는 들뢰즈가 창안한 것 같다.]
말하자면 여기서 사람들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보편학에 반대하여 불러올 시도를 항상 해왔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전수자(initié)”라는 단어에 부여해야 하는 의미화에 초점맞추기를 발견할 것이다. (288)
사람들은 인도 문명의 계획(ce plan, 구상)을 확실히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인데, 그 인도 문명에서 보편학이 전개된다는 것이다.그런데 그것은 보편학의 본질적인 것이다. 이런 문명으로부터 사람들은 보편학이 추상적일 수 있다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단지 우리 서구 심성의 한 가운데에서 근본적인 몇 가지 요구들이 제기되어서, 일종의 서문으로 그 자체에 붙어 있는 머리말에서 보편학은 이미 그 요구들을 충족시키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이런 관점에서 이 말파티(Malfatti, 1775-1859) 박사의 이 책은 중요한 관심을 소개한다. 아마도 인도의 의식(la conscience indienne)에서 보다 앞서 나간 다른 작품들이 그 후로도 출판되었다. 그러나 이 책보다 더 잘 보편학 용어 그 자체를 – 과학과 철학을 보편학과 연관 속에서 - 도입하는 저술은 많지 않다. (288)
∴ [01]
주기적으로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을 대립시키는 토론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과학은 대상에 자리 잡고, 심지어 사유 대상의 수준에서 실재성 자체를 재구축하거나 발견하지만, 결코 가능성의 조건들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반대로 철학자는 표상으로서 대상을 인식 주체와 연관(rapport) 속에 위치한다. 알끼에(Alquié, 1906-1985)가 주목하듯이 최종적으로 물질, 아마도 원자들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철학자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전혀 다른 표상으로서 원자들은, 원자들을 표상[재현]하는 정신에 관련해서만 철학적 지위를 가질 뿐이기 때문이다. (289)
그리고 현대 물리학의 최근 발견물들이 어떤 변화를 예를 들어 18세기에 나온 버클리(Berkeley, 1685-1753)의 개념작업들에게 부과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이리하여 온과학과 온철학 사이에서 지식의 내부에 근본적인 이원론이, 즉 아나키의 원리가 제기된다. 바탕에는 너비적 실체와 사유적 실체 사이의 데카르트적 대립이 있다는 것이다. (289)
데카르트의 예는,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가 지식의 통일성, 보편 수학(mathesis univeralis)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만큼 더 흥미롭다. (289) [데카르트의 보편수학(mathesis)과 다른 방향에서 들루즈가 마테즈(la mathèse)를 주목한다.]
사람들이 통일성을 긍정하는 바로 그 찰나에, 통일성은 깨어지고 파괴된다. (289)
그러나 통일성이 깨어지면서도, 데카르트는 여전히 주목하였는데, 통일성은 다른 평면[도식] 위에 다시 형성되고, 거기에서 통일성은 그것의 참된 의미를[방향을] 다루게 된다. 사유와 너비의 이론적 통일해체가 긍정되는 한에서 또한 이 양자[사유와 너비]의 실천적 통합의 사실도 긍정된다. (289)
[데카르트의] 인식의 나무는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다. 이 통일성, 즉 모든 아나키적 이원성저너머 있는 위계질서, 그것은 다른 두 질서에 환원할 수 없는 제3의 질서를 묘사하는 생명의 통일성 자체이다.생명은 신체의 관념으로서 영혼과 영혼의 너비로서 신체 사이의 통일성이다. 더욱이 다른 두 질서, 과학과 철학, 생리학과 심리학은 살아있는 인간의 수준에서 그들의 잃어버린 통일성을 되찾는 경향이 있다. (289)
먼저 보편학이 신비적 지식, 접근 불가능한 지식, 초인간적 지식이라고 믿는 것은 전적으로 오류 일 것이다. 거기서 “전수자”라는 단어에 관해 해서는 안 될 첫째 오해(contresens, 반대의미)가 있다. 보편학은 삶(la vie)의 수준에서 살아있는 인간의 수준에서 펼쳐진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육화(l’incarnation)의 사유,개체성(l’individualité)의 사유이다. 보편학은 본질적으로 인간적 자연(la nature humaine [본성])의 정확한 서술이기를 원한다. (290)
그럼에도 보편학은 살아있는 인간적 자연을 넘어서는가? (290)
이런 의미에서 생명은 묵계(copmplicité)로서 정의되며 단체(l’équipe)와는 반대된다. 이런 이유로 단체는 공통세계의 실현이며, 그 세계의 보편성은 스스로 위태롭게 될 수 없거나 또는 쪼가리로 나누어 질 수 없으며, 마치 이 실현화의 과정 자체에서 구성원들의 서로서로 대체는 가능하며 무차별적인 것과 같다. 그러한 것이 과학이다. ... 반대로 묵계에서도 공통 세계가 있다. 그러나 공통세계를 공동체[공산사회]로 만드는 것은, 한 번 더 말하지만, 각자가 그것[앞문장]을, 타자들과 공통척도 없이 자기 나름대로 그리고 가능한 대체 없이도, 실현해야 하는 것이다. 탄생, 사랑, 언어, 죽음과 같은 인간적인 중요 실재성들은 이와 동일한 윤곽 (ce même profil)을 그리는 것은 분명하다. 죽음의 표시(le signe) 아래서 각자는 대체할 수 없는 것으로서 현존하며, 스스로를 대체할 수도 없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죽음의 보편성이다. 동일한 방식으로 삶은 이런 실재성이며, 거기에서 보편적인 것과 그것의 고유한 부정은 하나를 이룬다. (290-291)
정확히 말해서 묵계의 고유성은 무시되고, 부정되고, 배반될(trahie) 수 있다는 것이다. “각각(chacun)”라는 단어는, 그 단어가 보편적인 것을 긍정하는 찰나에 보편적인 것을 매우 잘 부정하기에, 사람들은 이런 부정적인 측면에 만 민감할 수 있다. (291)
보편학의 제일 목표는 생명과 그것의 연관 속에서 생명체의 의식파악을 보증하는 것이고, 개체적 숙명에 대한 지식의 가능성을 정초하는 것이다. (291)
순수하게 자연적이고 내재[무]의식적인 묵계로부터 – 그 묵계에서 각 개체는 다른 개체들에 반대하면서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 보편자에 반대하면서 만이 제기되는데 - 출발하여, 묵계 자체를 알게 되는 하나의 묵계[인격]로 이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의 묵계에서 각각은, 자기가 이미 구성한 우주 가운데서 “전체의 부분(pars totatis[toutatis])”일 줄로 알고 있다. 달리 말하면 연방(la fédération). 이것은 이 책의 번역자 오스트로프스키(Ostrowski, 1811-1882)가 매우 호기심있는 방식으로 보았다. “고대 게르마니아가 수세기 전에 사라졌던, 아마도 우리 세기에 와서 겨우 회복될 게르만 연방 통일을 재건하려고 할 때(1849), 이 과감한 사상가인 민족에 의해 시도된 노력들을 검토하는 것은 흥미 없지 않을 것이며, 또한 과학을 마치 기원적 출발점 또한 공통의 중심과 같은 통일성으로 옮겨놓기 위해서라도 흥미로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생명의 정의(définition)와 같은 연방이지, 힘의 숭배를 토대로 한 통일이 아니었다. (291)
따라서 사람들은 동일성이 구체적 인간 수준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안다. (291)
각 개체는 보편자를 부정함으로써만 현존한다. 그러나 각 개체의 현존이 다수성에 연관되어 있는 정도에서, 이런 부정은 각 개체의 총망라된 형식 하에서 보편적으로 조작되며, 비록 그 형식은, 형식[자체]이 부정하는 무엇을 주장하는 인간적 방식일 뿐일 지라도 말이다. 이런 인간적 방식을 우리는 의식적 묵계라고 불렀다. 전수(l’initiation)는 다른 것이 아니다. 전수는 신비적 의미가 아니다. 전수는 생명의 사유이며, 생명을 사유하는 가능한 유일한 방식이다. (292)
원이나 바퀴를 신을 표상한다는 것을 상기해서 말타티의 단어를 우리가 글자 그대로 취해야만 한다. “인간과 무한과 연관 속에서 인간에게서는 보편학이, 공간에서는 운동작용(la locomtion)과 같은 것이리라.” (292)
따라서 보편학은 과학도 철학도 아니다. (292)
말파티에 따르면 그의 코기토는 이렇게 진술된다. 나는 현존한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sum, ergo cogito); 나는 현존한다 고로 나는 생장한다(sum, ergo genero). 이 말은 그의 방법은 과학적이지도 철학적[형상형이상학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292)
∴ [02]
과학적 방법은 설명작업이다. 설명하다, 그것은 어떤 것을 그것 이외의 다른 것을 통해서 고려하는 것이다. 열은 운동이고, 물은 H2O로 합성되어 있다. (292)
보편학의 대상을, 우리는 정의했다. 과학과 철학, 사유된 대상과 사유하는 주체의 대립으로부터 정의했다. 이것은 아나키(anarchie)의 첫째 측면일 뿐이다. 왜냐하면 사유 대상은 사유하는 주체로서 ‘사유’일 뿐만 아니라, 감각적 대상으로서 ‘객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93) [아나키의 두 측면이란 하나는 사유 다른 하나는 너비인데, 전자의 확장도 무한정하고 후자의 확장도 무한정하다. 전자는 시간으로 후자는 공간으로, 이런 무한정하게 볼 수 없는 것이 있다(현존)의 대상 이전에 실재성으로 지속하고 영속한다는 것이다. 그 실재성이 아니키이다. (56TME)
철학적으로 색은 제2성질, 인식 주체의 표상일 수 있고, 과학적으로 색은 실재의 최종적 표현으로서 “진동”[3조진동/초]이라는 사유 대상으로 환원될 수 있다. (293)
입방체는 언제나 3면으로 그 윤곽[외형]을 드러내 보일지라도, 3면과 더 이상 드러나지 않는 면, 그것은 이미 6면이다. 입방체는 이미 자기 자신에게 고유한 토대가 있음이 틀림없다. (293) [이 논의의 제기는 감각적인 것과 다른 인식의 측면이 있다. 그것은 사유 이전에 길이의 윤곽들이 있다. 신체를 통해 지각 작용한다. - 동시에 6면을 아는 것은 두 손의 촉각이다.]
3차원의 한 공간에서 덩어리로 현존하는 6면 위한 유일한 방식, 그것은 그것의 3면[표면]을 소개[현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외연과 내포의 동일성은 단순하게 공간을 정의한다. 말하자면 이런 공간 가운데서 감각적 대상 일반은, 동일성과 같은 이름으로 완전한 개념(concept)이다. 단어 “개념”은 여기서 “사유된 대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294)
보편학에서 수들의 이론에 대한 여러 찰나들 중에 하나가 여기에 있다고 해보자. 그런 이유로 여기 수 7이 있다고 해보자. 말파티의 분석은 이와 같다. 1) 그것[수]은 직선들을 수단으로 해서 재현되지만 곡선을 수단으로 결코 재현되지 않는다. 그것은 3차원의 출현이다. 그것은 물체 전체(불가분)가 마치 표면의 외연처럼(4) 고려될 수 있다는 이런 진리를 지적한다. 2) 그러나 다른 한편 7은 개념(concept)이다: 그것은 실재적이 된 개체를 아직 재현하지 못하고, 그것은 “보편자의 셀 수 없는 개체성들 속에 다수의 다수 전개이다; 그것은 시간의 아버지이고 그리고 분할할 수 있는 시간에 앞서 아버지의 이미지이다. 그 분할할 수 있는 시간은 공간 속에서 겉모습의 파동치는 이미지들 위에 구른다‥… 그것은 겉모습 그 아래에서 스스로 움직인다.” 그러한 개념작업의 철학적 또는 과학적 비판은 근거가 약하다: 이것은 동일한 영역도 동일한 방법도 아니다. (294, 이 문단 전체 번역)
보편학의 이런 방법이 넘어서야할 대립 앞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사유의 대상과 감각적 대상의 대립. 과학은 감각적 대상을 ... 사유 대상에 의해 설명한다. 다음차례로 이원성 .. 사유 대상을 감각적 대상으로 끌고 간다. ... 예로서 말라르메의 “부채(Eventail, 1884)”가 있다. (294)
[황혼의 서늘함이 한 줄기씩
파닥임 한 번마다 네게 오나니,]
그 붙잡힌 날갯짓이 지평선을
그리 살포시 밀어내는구나. (295)
시의 전체 진행은 감각적 대상 속에 운동의 사유를 구현[육화]하는 데 있고, 즉 유운동의 사유를 이런 대상 속에 변형하는데 있다. (295)
여기에서 하나의 예일 뿐이다. 이 예는 우리에게 상징 일반의 의미, 지식의 구현화[육화], 보편학의 진행을 지적한다. 설명과 반대로, 상징은 정체성[동일성]이고, 감각적 대상과 사유 대상의 만남(la rencontre) 이다. (295) - 전수자가 있다.
상징적 진행을 인간에게 적용해보자. 인간 조건에 대한 사유, 말하자면 인간 조건의 내포는 인간조건을 마치 그것의 본질과는 분리된 현존처럼 정의한다. 그러나 인간 일반에서 본질과 현존은 해체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 그것은 여러 인간들(외연)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295)
달리 말하면 감각적 질들을 정초하는 것은 성관심이다. 말파티는 히포크라테스의 말을 인용한다. “인간은 이원성이고, 인간이 이원성이 아니라면 인간은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보았듯이, 감각 작용은 3차원에 참조한다. 또한 주목해야 할 것은 사랑의 3원적 성격인 만큼이나 성적 이원성이 아닌가? “자기애(l’amour de soi, 이기심) 없는 개체적 삶은 무엇일까? ... 성적 사랑은 두 가지 다른 사랑, 에고이즘과 영웅주의을 화해시킨다.” 게다가 3원 기호 아래 확립되는 것이 세계의 사랑이다: 생성 즉 탄생; 곱하기[다양체]로서 지속하기 즉 곱하기에 의한 생성의 작동을 보존하기; 파괴 즉 빼기[죽음]. (296) ,
따라서 탁월하게 인간적 개념은 어떤 개념이 [미래에] 될 것인가? 신이지, 본질과 현존의 통일성은 원(le cercle)에 의해 개념화된다. . ] (296)
따라서 말파티가 발생과 발생이전이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 즉 한쪽이 빈 것으로(en creux) 다른 쪽을 그린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을 볼 것이다. (297)
사람들은 그 방법이 보편학의 대상 자체와 재결합한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것이다. 한편으로 수는 십진법 안에서만 현존한다. ... 다른 한편 보편학이 수에 아주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한다고 설명하는 것은 이런 특권이다. (297)
10에 대해 말타티는 이렇게 썼다. “그것(le 10)은 들어가는 행동[작용]에도 나가는 행동[작용]에도 지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속에 작은 세계(소우주)의 주권자이다.” (297-298)
보편학의 정의는 이중적이었다. 즉 정의의 대상의 측면에서는 사유하는 주체-사유되는 대상이라는 이원성과 연관해서이고, 정의 방법 측면에서 사유된 대상- 감각적 대상이라는 다른 이원성에 연관해서이다. 우리는 이 두 주제가 끊임없이 교차되고(se recouper 다음측정 되고), 동일시되는 이 점에 도달한다.(298)
보편학은 하나의 다른 영역에서, 상징의 이중 두께에서 진화한다. 상징은 보편학에서 여전히 더욱 밀접한 상응관계들의 체계를 끊임없이 정립하는 의학, 마치 그 의학의 살아있는 기술(art)처럼 완성된다. 이 의학에서는 더욱더 개별적인 실재성들이 밀집된다. (298)
(8:12 56TME), (8:24, 56TMF)
# 들뢰즈가 이 글을 쓰게 한 여성, 마리 막들렌 다비(1903-1999)가 출입한 곳은 마르셀 모레(Marcel Moré, 1887-1969)의 집일 것인데, 1934년 이래로 Esprit 편집위원이었던 모레는 1945년 살아있는 신(Dieu vivant)지를 창간 한다. 모레 거실에 모인 이들이 “새로운 신”. “살아있는 신”과 함께 하는 모임일지도 모른다. 폐쇄적 비밀서클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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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6 데카르트 (René Descartes, 1596-1650) 프랑스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1685 버클리 (George Berkeley, 1685-1753), 아일랜드 영국 국교 주교, 철학자. “esse est percipi aut percipere (« être c'est être perçu ou percevoir »)”
1775 말파티(Jean Malfatti di Montereggio, Johann Baptist Malfatti von Monteregio, 1775-1859), 이탈리아/오스트리아 의사, 볼로냐 대학에서 갈바니(Luigi Aloisio Galvani, 1737-1798)에게 의학을 배웠다. 작곡가 베토벤(1770-1827)의 주치의였다. 저술로는 병원인학 초고: 생명의 진화와 혁명에서(Entwurf einer Pathogenie aus der Evolution und Revolution des Lebens, 1809.(Draft pathogeny of Evolution and Revolution of Life), 와 지식들의 무권위와 위계화에 관한 연구, 의학의 특별한 적용과 더불어(Studien über Anarchie und Hierarchie des Wissens mit besonderer Beziehung auf die Medicin. 1849)(Études sur la mathèse, ou Anarchie et hiérarchie de la science, avec une application spéciale à la médecine)이 있다. 후자의 프랑스어 번역은 오스트로프스키(Christien Ostrowski, 1811-1882)가 1849년에 했는데, 1946년판 프랑어판 제목은 보편학에 관한 연구: 과학의 무권위와 위계(Etudes sur la mathèse ou anarchie et hiérarchie de la science, 1946)(입문 pp. ix-xxvi + 206 pages)이다. 오스트로프스키가 번역을 했다면 1849년 번역했던 것을 [마리-막들렌 다비의 요청으로] 1946년에 들뢰즈의 입문을 포함하여 출판한 것 같다.
1811 오스트로프스키(Christien Ostrowski ou Kristien Ostrowski, 1811-1882), 폴란드 정치가이며 장군의 아들, 폴란드 출신 시인, 문학가, 1831년 서유럽으로 이전, 프랑스와 벨기에로 이주. 스위스 로잔느에서 죽었다. 그의 부친은 바르샤바의 근위대 사령관이면서 상원의장이었다고 하고, 1831년 소련의 점령으로 가족이 파리로 추방되었다고 한다. 폴란드 시인 미키에비츠(Adam Mickiewicz, 1798-1855)의 시를 프랑스어로 번역했다. // - 1831년이면 폴란드 혁명의 실패로, 벩송의 아버지도 그때 독일을 거쳐, 프랑스로 이민 갔다가 스위스 로잔에서도 정착하지 못했다. - 오스트로프스키가 유대인이 아니기에 벩송 부친과 친교가 없었을 수도 있다. /
[1887 마르셀 모레(Marcel Moré, 1887-1969) 에꼴 폴리테크니크 출신, 프랑스 작가, 쥘 베른을 따르는 작가. 1934년 이래로 정신(Esprit) 편집위원. 1945년에 살아있는 신(Dieu vivant)창간. Le Très Curieux Jules Verne, 1960
1842 말라르메(Étienne Mallarmé, dit Stéphane Mallarmé, 1842-1898) 프랑스 시인, 번역가, 예술비평가.
1887 마르셀 모레(Marcel Moré, 1887-1969): 들뢰즈가 이 글을 쓰게 한 마리 막들렌 다비(1903-1999)가 출입한 곳은 마르셀 모레(Marcel Moré, 1887-1969)의 집일 것인데, 1934년 이래로 Esprit 편집위원이었던 모레는 1945년 살아있는 신(Dieu vivant)지를 창간 한다. 모레 거실에 모인 이들이 “새로운 신”. “살아있는 신”과 함께 하는 모임일지도 모른다. 폐쇄적 비밀서클은 아닌 것 같다.
1903 마리 막들렌 다비(Marie-Magdeleine Davy, 1903-1999), 에띠엔 질송의 제자. 파리 카톨릭 연구소 등록(여성으로서 처음), 여성철학자, 중세 신비학의 신학자이며, 비의(秘義, ésotérisme)에 가깝다. 박사학위 후 인도와 일본을 여행했다. 「Les trois étapes de la vie spirituelle d'après Guillaume de Saint-Thierry」(Recherches de science religieuse, 1933)(아마 박사학위). La Connaissance de soi, 1966, L'homme intérieur et ses métamorphoses, 1974. 묘비명 « Sois heureux, passant ! »
[생-띠에리(Guillaume de Saint-Thierry, 1085-1148) 시스테리안 수도회]
[1910 르 소(Henri Le Saux, 인도이름 Swami Abhishiktananda, 1910-1973) 프랑스 베네딕트 수도사. 크리스트교와 힌두이즘 사이의 대화에 기여하고 인도 크리스트교의 신비적 인물이다. 마리 막들렌 다비(1903-1999)에게 영향을 주었다.
1906 알끼에(Ferdinand Alquié, 1906-1985) 프랑스 철학자. 카톨릭 왕당파 가정 출신, 고등학교 시절 넬리(René Nelli)와 부스께(Joë Bousquet)를 만나 문학과 초현실주의에 관심을 가졌다(그런데 「« le vent de crétinisation systématique qui souffle d'URSS, 1933 ».」 논문은 공산당에서 브르통과 엘뤼아르를 축출하게 했다고 한다). 파리학부 출신으로 1931년 교수자격 일등이라. 데카르트와 칸트 전문가.
(9:38, 56TME) (10:15, 56TM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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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들뢰즈는 말라르메의 “부채” 중에서 ‘다른 부채: 말라르메 양에게’를 인용했다.
부채
- 말라르메 부인의 부채
언어라도 되는 듯 가진 것은 고작
하늘을 향한 파닥임밖에 없어도
미래의 시가 매우 정교한
住居로부터 풀려나오는구나
아주 나직한 날개 전령
이 부채 이것이 그것이라면
바로 그것으로 그대 등 뒤에서
어떤 거울 청명하게
빛났던 것이라면 (거기 보이지 않는
재만 약간 알알이 쫓겨났다
다시 내려앉아
나를 우수에 젖게 할 터라)
언제나 그렇게 나타나야 하리
부디 게으르지 말고 그대 손 사이에.
다른 부채
-말라르메 양의 부채
오 꿈꾸는 아가씨야, 저 길도 없이
순수한 희열에 내 잠기도록,
부디, 섬세한 거짓말로, 너의 손에
내 날개를 붙잡아둘 줄 알아라.
황혼의 서늘함이 한 줄기씩
파닥임 한 번마다 네게 오나니,
그 붙잡힌 날갯짓이 지평선을
그리 살포시 밀어내는구나.
어지러움이여, 바야흐로 허공이 떠는구나,
누구를 위함도 없이 태어나기를 열망할 뿐
솟아오르지도 가라앉지도 못하는
거대한 입맞춤처럼.
너도 느끼느냐. 매몰찬 낙원이
묻어 감춘 웃음인 양
흐르는구나, 네 입술 구석에서
혼연일치의 주름 저 안쪽으로!
저 금빛 저녁 위에 고이는
장밋빛 다른 기슭의 왕홀, 바로 그것이지,
네가 한 개 팔찌의 화염에 기대놓는
이 닫힌 하얀 비상은.
Stéphane MALLARME 1842 - 1898
Eventail de Madame Mallarmé [1884]
Avec comme pour langage
Rien qu'un battement aux cieux
Le futur vers se dégage
Du logis très précieux
Aile tout bas la courrière
Cet éventail si c'est lui
Le même par qui derrière
Toi quelque miroir a lui
Limpide (où va redescendre
Pourchassée en chaque grain
Un peu d'invisible cendre
Seule à me rendre chagrin)
Toujours tel il apparaisse
Entre tes mains sans paresse
Eventail de Mademoiselle Mallarmé
Ô rêveuse, pour que je plonge
Au pur délice sans chemin,
Sache, par un subtil mensonge,
Garder mon aile dans ta main.
Une fraîcheur de crépuscule
Te vient à chaque battement
Dont le coup prisonnier recule
L'horizon délicatement.
Vertige ! voici que frissonne
L'espace comme un grand baiser
Qui, fou de naître pour personne,
Ne peut jaillir ni s'apaiser.
Sens-tu le paradis farouche
Ainsi qu'un rire enseveli
Se couler du coin de ta bouche
Au fond de l'unanime pli !
Le sceptre des rivages roses
Stagnants sur les soirs d'or, ce l'est,
Ce blanc vol fermé que tu poses
Contre le feu d'un bracel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