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음
황인숙
달팽이 시내를 건넙니다ㆍ
달팽이 시내를 건넙니다ㆍ
달팽이 시내를 건넙니다ㆍ
달팽이 종일토록 시내를 건넙니다ㆍ
유리창 위의 달팽이 한 마리ㆍ
종일토록 시내를 건넙니다ㆍ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1984경향신문신춘당선ㆍ서울예술대문예창작과ㆍ
------------------------------------
#시감상
저녁의 퇴고 길상호
앉은뱅이 밥상을 펴고
시 한 편 다듬는 저녁,
햇살이 길게 목을 빼고 와
겸상으로 앉는다
젓가락도 없이 시 한 줄을
쭈욱, 뽑아들더니
허겁지겁 씹기 시작한다
너무 딱딱한 단어 몇 개
가시처럼 발라내놓고
익지 않은 수사들은
퉤퉤 뱉어내놓고,
넘길 게 하나 없었는지
잇자국 가득한 언어들
수북이 밥상 위에 쌓인다
노을보다 더 벌게져서
얼른 창을 닫고 돌아오니
시는 시대로 나는 나대로
발목을 잃은 앉은뱅이,
먹을수록 허기진 밥상은
잠시 물려놓기로 한다
- 길상호,『우리의 죄는 야옹』(문학동네, 20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의자 /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 이정록 시인의『의자』
(문학과지성사, 2006)
-------------------------------------
괜찮다 / 박종현
다들 괜찮다 위로하기에
정말 괜찮아진 줄 알았어
삶은 박살이 나고 있었는데
참 슬프게
그 말을 한 그누구도
그 말에 책임지는 사람 없었어
듣기 편한 거짓말이더라
괜찮다는 그 말
-------------------------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성선경
턱을 괴고
곰곰이 마음의 길을 따라 사유하나니
버린다고 다 아픈 것은 아니다
내 하나를 버릴 때는 아팠으나
내 둘을 버릴 때까진 아팠으나
이제 다 버리고 돌아앉으니
나는 이제 아프지 않다
내 이제 거친 생활의 가사까지 벗어던졌나니
마땅히 도 틔워 황홀히 성불하겠다
턱을 괴고 삼생의 연을 순간처럼 잊으니
머리 위로는 밝은 음악이 백호같이 빛나고
내 아래로는 진리의 땀 꽃비같이 흐르겠다
내 이 찰나에 깨달았으니
내 이제 찰나에 잊겠다
턱을 괴고
몸 굽히니
순간이 고요히 반가사유
사진: 서울 봉은사
----------------------------------------
나를 꼭 잊고 싶다면 / 김정한
나를 꼭 잊고 싶다면
조금씩 지워가며 잊어주시기를
나를 꼭 지우고 싶다면
한꺼번에 삭제 버튼을 누르지 마시고
당신을 흔들어놓았던 메일을 한 줄씩 지워 가시기를
바라옵건대
조금씩 천천히 지워 가시기를
그저 당신에게 용서를 구할 것이 있다면
허락받지 않고 당신을 사랑한 죄밖에 없으니
가끔씩 당신이 그리우면
당신에 대한 기억 몇 자락만이라도 몰래 끄집어내어
혼자만이라도 웃고 또 울며 추억할 수 있게
새털만큼 가벼운 흔적만이라도 남겨 두시기를
나를 꼭 잊고 싶다면
조금씩 지워가며 잊어주시기를
-----------------------------------
친구같은 애인 하나 그립다
나이가 들어 배가 좀 나온 것도
부끄럽지 않고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친구같이 편한 애인 하나 간간히 그립다.
나이 차이가 나지 않아
어떤 이야기를 해도
쉽게 이해하고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친구같은 애인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취미가 같아 언제든 서로 원할 때
배낭여행이라도 따라나설 수 있는
친구 같은 애인이 살다 보니 그립다.
서로의 배우자에 관한 이야기를
아무 꺼리낌 없이 하고
들어주며 의논할 수 있는 친구 같은
애인 하나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 . .
이성이 그리워질 때 애인도 되어주고
괜시리 외롭고 가슴 시리고 우울한 날에
서로 불러 하루종일 기분이 풀릴 때까지
함께 할 수 있는 친구 같은 애인하나 그립다.
나이는 들어도 장난기가 발동하여
가볍게 던지는 조금 야한 농담도
재치있게 웃으며 받아넘길 줄 아는
인정 많으며 마음이 따뜻하고
온유한 친구 같은 애인...
감성도 풍부하여
내가 슬플 때 함께 울어줄 줄 아는
그런 친구 같은 애인하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더 그리워진다.
--------------------------------------
#시감상
코스모스 꽃길에 서면 / 이대흠
코스모스 꽃길에 서면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게 된다
저렇게 저마다 꽃을 피워 내면서도
꽃들은 다른 꽃을 다치게 하는 법이 없다
꽃 피운다는 게 누군가를 밟고서
올라가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꽃들은 이미 알기 때문이다
하늘하늘 흔들리는
코스모스 꽃길이 아름다운 것은
꽃과 더불어 잎도 줄기도
기쁘게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때 쯤 하늘은 한 뼘 더 높아진다
제 그늘은 한사코 간직하면서
꽃은 그늘 아래 움츠리지 않는다
- 정일근 엮음, 『세상에 없는 책』(작가, 2005)
-----------------------------------
흐르는 시간
올려다 본 세월 그 얼마인가
수많은 마디마디 사연,
이제는 내려다 보는 지난 날
모두가 사랑이었노라고 그리움이었노라고
- 이숙희 -
------------------------------------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담쟁이 / 손현숙
온몸으로 너를 더듬어서
변변한 꽃 한번 피워내지 못했지만
상처 많은 내 가슴
내 손으로 만지면서
담장 끝
너를 보듬어 오르다 보면
그때마다
사랑이니 뭐니
그런 것은 몰라도
몸으로 몸의 길을 열다 보면
알 길 없던 너의 마음
알 것도 같아
캄캄했던 이 세상
살고 싶기도 하다
#창작시
걸리기만 해봐
한춘화
시발보다 씨팔이 혹은 씹할이 더 찰진데
그렇치만 나는 표면적으로 배우고 우아한 사람이라
속으로만 작게 중얼거리듯
니미시발, 씨에 힘을 빼고 눈을 슬쩍 치켜뜨고
제대로 뱉지도 못하는 억울하고 답답한 상황이
일 이 일이었겠어
에라 씹할이 모 어떻다고
씹을 한다는 건 좋은 거잖아
처음부터 입이 걸었겠어
살다 보니 그리됐어
모, 제일 잘하는 욕은
개새끼
개새끼가 강아지지
어쩌라고
뱀발 : 신인숙쌤 요청에 이제 응혀요 근디 지는 개새끼만 욕해요 ㅋ
-----------------------------------
먹은 죄
반칠환
새끼들에게 줄 풀벌레 잡아오던
지빠귀를 새매가 나꾸어 갔다
가까스로 허물 벗고 날개 말리던
잠자리를 물총새가 꿀꺽 삼켜 버렸다
오전에 돋은 새싹을 다람쥐가 갉아 먹는다
그러나 어느 유족도 복수를 꿈꾸지 않는다
다 먹은 죄가 있기 때문이다
한없이 슬퍼도 적막한, 푸른 숲 속의 일이다
------------------------------------
구포역에서/ 박창민
천안 가는 길
구포는 장마만 오면 시간이 빨리 불어나서 기다리고 가려다 다 못 들고 가는 길이다
할매, 잔치국수 곱빼기 주이소
낙동강 하류로 한꺼번에 넘치는 역전
철새 반 텃새 반으로 미어 터지는 사람들 늦다고 급할수록 국물부터 마신다
생각에 체하면 약도 없으니
문득, 끊어먹은 여인에게 연락하고픈 맛
할매, 맛은 있는데 바빠서 다 못 먹겠소
얼만교
곱빼기니까 보통보다 불려서 줘
곱빼기로 생각하면
얼굴 한 번 더 볼 수 있는 양일까
바빠서 남겼으나 남은 사랑은 없다는 구포 기찻길
시집 안개가 된 낱말
-----------------------------------
#시감상
밤편지
시은
모든 낮색이 내려앉아 모인 밤은
오로지 깊고 어두울 뿐입니다
그런 밤마다
나의 생각도 쓸모없이 깊고 어두워져
오롯이 흑암이나 흑색 같아서 나는
색의 무거움과 빛의 가벼움 가운데 앉아
늘상 희고 밝은 선명한 빛색으로 남아있는
당신을 나직이 호명하여 소환합니다
결국은 자명 같은 제 풀에 겨운 울음이건만
하루도 건너뛸 수 없는 의식이 되었습니다
어디선가 당신도 그러합니까
스스로 부르고 스스로 답하고,
혼자 어둠을 지워가며 시를 쓰고,
혼자 울고 웃고 또 구겨진 채 버려지는,
홀로 지쳐 쓰러졌다가 홀로 일으킬 수밖에 없는
씁쓸하거나 참 쓸쓸한 일,
아직 살아있음의 안부를 전하고픈 가차운 이는
나보다 먼저 마지막 안부를 묻고 떠나버려서
나의 안부는 기착지도 없고 도착지도 없어져
자꾸만 먼 길을 갑니다
당신도 어디선가 그러합니까
알 수 없음과,
볼 수 없음의 의미는 참 멀다는 말이더랍니다
하여, 사방이 막힌 방에서 이 구차한 마음이라도
놓치지 않으려 숭숭한 창을 봉쇄합니다
한 조각의 기억이라도 허투루 빠져나가지 못하게,
새어드는 것들로부터 물들어 얼룩지지 않게
틈틈이 외로운 것이 올 때마다
갇힌 방에 사는 적막의 고적孤寂으로
끼니를 때우듯 달래는 일은
언제라도 당신의 자답自答이 내게 와
반가운 안부로 전해지는 어느 날에
나, 맑은 답장 쓸 수 있기 위함입니다
당신도 그러합니까 어디선가
https://youtu.be/SQMPgUAts2c?si=UyUGZ_kUxR1I74wY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