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다
| ▲ 학창 시절의 김홍섭. |
김홍섭은 1915년 8월 28일 전북 김제군 수류면 금산리에서 아버지 김재운과 어머니 강재순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선대부터 임실에 터를 잡고 살았으나 집안 중에 세금징수직을 맡아 일하던 이가 억울한 일을 당하는 바람에 일가친족 전부가 가산을 몰수당하게 되었다. 그 후 온 집안이 금산으로 옮겨왔지만 농사지을 땅이 없어 부친은 산에서 나무를 해다 팔아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다.
금산리 원평 마을, 그중에도 홍섭의 집은 바로 큰길가에 있었다. 전주로 나가는 네거리 옆으로 마방이 있어 옛날에는 말과 마차들로 붐볐지만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는 화목차 같은 것도 자주 보이게 되었다. 금이 나는 곳이라 하여 김제라는 지명이 붙은 이 지역은 또한 손꼽히는 곡창지대 김제평야이기도 했다. 하지만 김홍섭이 태어나던 시절 그 넓은 들에서 거두어들이는 볏섬은 나라 잃은 농민들의 몫이 될 수 없었다. 일제의 수탈과 압박으로 숨 막히던 시절이었다.
김홍섭은 부모가 혼인한 지 여덟 해 만에 얻은 귀한 자식이었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지극하였다. 김홍섭이 아파서 결석하게 될 것 같으면 십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업어서 학교에 데려다 줄 정도였다. 자신은 가난으로 배우지 못했지만, 아들에게는 그 설움을 물려주지 않으려는 다짐이었던 것이다.
| ▲ 1940년 8월 조선 변호사 시험 합격자들과. 가운데줄 왼쪽 끝이 김홍섭. |
보통학교 입학 전부터 개신교 신앙을 접했던 김홍섭에게는 동시에 또 다른 세계가 열리고 있었다. 바로 한학과 자연의 세계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김홍섭은 조부 김광언의 가르침을 아주 잘 받아들였다. 원릉 참봉을 지낸 분으로 학문이 깊었던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한학은 물론 천지의 이치와 자연의 순리까지 두루 넓게 알게 해주었다. 조부의 가르침에 대해 김홍섭은 나중에 이렇게 기억했다.
“나의 조부는 정심성의, 즉 사람의 가죽을 쓰고서 거짓을 따를 수 없어야 하며 뿐만 아니라 그런 마음을 먹어서도 안 된다는 내 윤리관의 기초를 닦아준 분이다.”
여름밤이면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를 무릎에 앉히고 북두칠성과 삼형제 별자리 등 하늘의 별을 가리키며 이 세상이 얼마나 크고 무궁한지를 알게 해주었다. 이때부터 김홍섭은 천문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천체도와 망원경은 그가 평생 성경책과 더불어 필수로 지니고 다니던 물품이 되었다.
별과 더불어 어린 김홍섭의 마음을 키우는 데는 풀이나 꽃이 있었다. 봄마다 또래 아이들은 몰려다니며 꽃싸움이나 풀놀이를 하였는데 꽃이나 풀을 가짓수대로 뜯어와 겨루는 놀이였다. 김홍섭은 아이들과 놀이가 끝나고 나면 반드시 시든 꽃잎이나 풀들을 모아가다 꽃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한낱 작은 것들이라도 생명 있는 것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사실을 어릴 때부터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김홍섭의 고향 마을 어귀에는 아주 오래된 느티나무가 버티고 서 있었다. 그 거목의 그늘은 동네 사람들이 흥겨운 잔치를 벌이는 마당이 되기도 했고, 아이들이 모여 돼지 오줌보로 공놀이를 하는 동네 운동장이 되기도 했다. 때로 어울려 놀기도 했지만 김홍섭은 언제나 저만치 떨어져 앉아 책을 보는 아이였다. 동네 사람들에게 김홍섭은 공부 잘하고 책 많이 읽는 아이, 착하고 성실한 아이의 표본이었다. 그래서 김홍섭이 집안 형편 때문에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형편이 조금만 되었어도 가까운 지역의 농림학교로 자식들을 보내곤 했기 때문이었다. 졸업 후 1년 정도 김홍섭은 나뭇단을 지고 아버지를 도와 일했다.
그런 어느 날 김홍섭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오수에서 사는 고모부의 도움으로 집안이 그곳으로 이사하게 된 것이다. 부친에게는 물레방앗간 일자리가 생겼고 홍섭에게는 일본인 송기(마쯔야끼)가 운영하는 약방의 점원 자리가 났다.
김홍섭은 새벽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가게 일은 물론이고 주인집의 허드렛일, 심지어 아기 보는 일까지 해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싫은 내색 없이 맡은 일을 묵묵히 해냈다. 그 대신 짬 날 때마다 책을 들여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기둥에 기대선 채 책을 읽었고 밥을 먹을 때라도 읽었다. 그것을 본 동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이구, 저기 홍섭이 좀 봐라. 저렇게 책을 열심히 읽고 있네. 길을 걸어가면서 읽고 있잖아. 도랑을 건널 때도 책을 보네!”
진학하지 못한 김홍섭에게 책은 가장 확실한 길잡이며 가장 훌륭한 스승이기도 했다. 책 속에서 홍섭은 자신의 미래를 꿈꾸었다. 특히 링컨의 전기를 읽으면서 그는 변호사라는 직업을 생각해 보았다. 켄터키 시골에 살던 가난한 링컨이 통나무를 베면서도 틈틈이 법전을 꺼내 보며 공부했다는 대목에서 김홍섭은 자신의 처지를 비교해 보았다. 특히 일제 강점기 조선 사람들에게 변호사는 선망의 직업이었다.
김홍섭과 같은 해에 태어난 미당 서정주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내가 초등학교 때 성적이 좋은 것을 보자 나의 아버지는 일본 사람의 세상에서도 그저 무던히 살게 하려면 판사나 검사 같은 것이 되는 게 상책이라 생각하고 꼭 법과를 가라고 하셨다.’
당시 어른들의 생각이 일반적으로 그러했지만 김홍섭은 남의 말이 아니라 스스로 결심하고 결정했다. 10대 청소년 김홍섭은 중고 법전을 구해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주경야독으로 공부하던 그가 어느 날 드디어 마음을 정했다.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제대로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오수를 벗어나 대처인 전주로 향했다. 전주에서는 마침 같은 고향 사람 조남석 변호사가 사무실을 열고 있었다. 그의 소개로 김홍섭은 일본인 구영(히사나가) 변호사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김홍섭은 일본인 변호사에게 정중히 절을 한 후 청을 했다. “급료를 받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법률 일을 배우고 싶습니다. 제게 일자리를 주십시오.”
조선인이라면 쉽게 경멸하고 능력을 의심하는 일본인들이었지만 김홍섭의 사람됨을 알아보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구영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게 된 김홍섭은 성실하게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꾸준히 자신의 길을 탐색했다. 그 시기에 난 공고를 보고 군산 지방법원 서기 시험에 응시하여 어렵지 않게 합격할 정도의 실력을 닦았다. 그 후 법원에 들어가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근무도 해 보았지만, 그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김홍섭은 결코 자신의 꿈을 낮추지 않았다. 변호사에 자신의 목표를 이미 정하고 있었던 그는 일본에 가서 본격적으로 법 공부를 하고 싶었다. 경제적인 형편이 가로놓여 있었지만, 전주에서 알게 된 친구 오평기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화순에서 가까운 지역인 동복 출신인 만석꾼의 아들 오평기는 이 시절부터 김홍섭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어 어려운 고비를 함께 넘어가는 둘도 없는 사이가 되었다.
1939년 봄 김홍섭과 오평기는 동경의 니혼 대학에 함께 입학하였다. 둘은 같은 하숙집에서 서로 격려해 가며 변호사 공부를 했지만, 김홍섭이 언제나 더 열심히 했다. 오평기가 이런 불평을 할 정도였다. “홍섭이, 자네는 도대체 언제 잠을 자는가? 내가 오늘은 기어코 자네보다 늦도록 공부해야지 하면서 지켜보았지만 언제나 내가 먼저 잠을 자고 말게 되더구먼. 아무리 해도 자네한텐 못 당하겠어. 정말 대단한 친구야, 존경하네!”
김홍섭은 불기도 없는 차가운 다다미방에서 주전자에 떠다 놓은 물을 들이키며 공부에 일로 매진했다. 그리고 법과대학 1년 만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당시 경성에서 치러진 법관 시험의 경쟁률은 대단히 높았다. 1940년 조선에서 있었던 마지막 사법시험이라고 알려진 이 시험에 무려 600여 명이 응시하여 단 18명만이 통과하였다. 합격자 명단에는 김홍섭과 오평기, 그리고 해방 후 함께 검사로 일하게 된 조재천도 있었다.
그러나 변호사 시험 합격 후 김홍섭은 바로 귀국하지 않았다.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욕구가 그를 일본에 잡아두었다. 김홍섭은 와세다 대학 문과에 청강생으로 등록하였다. 그 공부는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잃어버린 조국이지만 그 속에서 변호사로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1941년 김홍섭은 그리운 고향 땅을 다시 밟았다. 법률가로서의 삶이 펼쳐질 순간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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