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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온극장 원문보기 글쓴이: 맑은영혼(김승규)
공동경비구역 JSA
01. 공동경비구역 21. 무제
원작 : D.M.Z(박상연) 출연 : 김태우(남성식 일병), 이영애(소피 E 장 소령)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또 다른 주인공은 고 김광석과 여전히 `현역'인 한대수씨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라며 남한 젊은이들의 감성을 촉촉히 적시던 김광석의 노래 '이등병의 편지'는 북한 청년의 가슴에 흘러 들어가 양쪽 젊음의 긴 거리를 우정으로 잇는다.
또 이들의 친교가 어이없게 중단되고 남북 사이에 격렬한 교전이 벌어질 때 흘러나오는 '부치지 않는 편지'는 애잔한 포크 기타의 선율과 함께 시대의 비극을 격정적으로 체험하게 해준다.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흘러 그대 잘가라…."
'접속'에서 보여줬던 조영욱 음악감독의 탁월한 감각은 한대수씨를 선택한 데에서도 다시금 확인된다. 지리한 초소 안의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한대수씨의 '하룻밤'이나 '하루아침'의 애달픔은 병사들의 쓸쓸한 심정을 넘어 객석으로 예리하게 날아든다. 국악과 외국의 토속악기를 이용한 작곡가 방준석씨의 곡이나 사라예보와 러시아의 포크송 역시 긴 여운을 남긴다.
공동경비구역 JSA 전곡듣기
이등병의 편지
작사 : 김현성
집 떠너와 열차타고
친구들아 군대 가면 편지 꼭 해다오
짦게 잘린 내머리가 처음에는 우습다가
이등병의 편지 - 김광석
하룻밤
작사 : 한대수
하룻밤 지나서 저 초가집 안에 구수한 나뭇내 맡으며
비치는 새 태양 참새의 첫울음 이 모든 것은 나의 새 세상
새벽에 빛나는 펴진 바다 보면서 모래 차며 바닷가로 거닐 때
하얀 갈매기는 옆을 지나가면서 기쁜 맘의 노래소리 들리네
하룻밤 - 한대수
왜
작사 : 오상우
왜 그런 다른 느낌으로
왜 처음 느낀 눈빛으로
난 널 가린 눈물속에서
왜 나의 맘을 아직도
왜 - 마루
하루아침
작사 : 한대수
하루 아침 눈뜨니 기분이 이상해서
할 일도 하나 없이 갈데도 없어서
배는 조금 고프고 눈은 본 것 없어서
방문을 열고 보니 반겨주는 빈대 셋
하루아침 - 한대수
부치지 않은 편지
詩 : 정호승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언강 바람속으로 무덤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부치지 않은 편지 - 김광석
공동경비구역 JSA O.S.T
김진성 (음악연구모임 WAS, IZM 2001.02)
남북화해의 무드를 타고 스크린을 점령한 '휴먼 블록버스터' <공동경비구역 JSA>는 <쉬리>이후 한국 영화의 미래를 밝게 해준 명화다.
<금지된 장난>의 메인테마인 '로망스', <닥터 지바고>의 '라라의 테마'와 같이 영상미를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음악이라는 개념이 직감적으로 연상되게 만드는 작품은 그리 흔치않다. 뿐만 아니라 평면적 영상미와 공감각적 사운드트랙을 하나의 정서로 응집시켜 관객에게 전달하기란 더욱 어려운 작업이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사운드트랙은 그런 의미에서 특히 음악의 직접성과 영화와의 결합을 한꺼번에 만족시켜준다..
흔히 블록버스터의 컨셉인 오케스트레이션 위주의 덩치 큰 사운드를 택하기보다는 우리 감각에 쉽게 융화될 수 있는 한국적인 소리와 외국 토속악기의 아기자기한 하모니를 엮어 냄으로써 내용면에서 우리의 감수성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섰다. 현대적 감각에 맞는 편곡과 샘플링을 통해 나오는 국악기의 선율과 리듬은 영화의 미스터리 구조를 한층 더 신비롭게 만든다.
1970~1980년대 포크록음악은 이 영화의 주춧돌 역할을 한다. 포크록 명인 한대수씨의 명곡인 '하룻밤'과 '하루아침' 그리고 '이등병의 편지', '부치지 않은 편지'(김광석)는 영화 곳곳에서 한국인의 상징적 정서를 대변한다. 단지 듣기 위한 음악의 차원을 넘어선 영화를 위한 진상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스크린과 묘한 교감을 이룬다.
남쪽초소에서 잠시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왔던 한대수의 '하루아침'은 외적 현실과 대비되는 자유로운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가볍고 경쾌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지막 교전장면에서 가슴 찡한 전율을 느끼게 하는 김광석의 '부치지 않은 편지'는 이 영화의 정수(精秀)이다. 이 장면에서 영상과 음악이 서로 뒤질세라 맞서면서 남북 체제의 갈등 분위기를 한층 더 고조시킨다.
김광석의 노래는 겨우 들릴까말까 할 정도로 총성과 포화소리에 휩싸여 있지만 마치 그 안에 살아서 노래를 부르는 것 같은 애절한 기분이 들게 한다. '총성과 김광석'의 불협화음은 관객들의 가슴을 찢어놓는다. 남북한 병사들이 교전중인 스크린과 개인과 체제가 교전을 벌이는 소리 사이의 공감대는 절묘하다.
박찬욱 감독도 '이 장면이 전체 속의 맥락에서 생명을 얻었고, 초소내부에서 지속된 숨막힐 듯한 긴장이 이 교전을 통해 비로소 폭발한다. 뜻밖에도 가장 감정적으로 고양된 순간을 이룩한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에필로그에 쓰여진 러시아 민요(원제: The Russian Light)는 기성음악을 차용했다고 볼 수 없을 만큼 카메라 워킹에 맞는 비장미와 온기를 영상에 투과한다.
이렇게 멋진 영화음악이 창출되기까지 조영욱 음악감독과 방준석 작곡가의 탁월한 자질과 경험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두 사람은 영화 <텔 미 썸씽>이후 <접속> <해피엔드>의 영화음악을 담당했다. 조영욱 감독은 이외에도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과 <조용한 가족>의 음악감독을 맡기도 했으며 무엇보다도 사운드트랙의 조율사 노릇을 한 방준석은 영화 <접속>에선 바흐에서 루 리드까지 폭 넓은 곡 배열로 영화의 질감을 한껏 끌어올린 바 있는 주인공. 이번에 그는는 아예 작곡 연주된 스코어를 도맡아 손질해주었다.
'애초 의도했던 대로 에스닉(민족적인)한 이디엄을 좀더 대담하게 구사했으면 좋았을 뻔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방준석이 가진 뛰어난 센스를 더 발휘시켰어야 했는데..!'라는 박찬욱 감독의 말은 실은 방준석에 대한 극찬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방준석은 재미교포로 94년 2인조 록 밴드인 <U & Me Blue>를 결성 활동했으며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끝 부분 삽입곡 '그대의 영혼에'라는 곡으로 평단으로부터 호평을 얻은 바 있다. 영화 <꽃을 든 남자>에선 타이틀 송을 자신만의 독특하고 블루지한 보컬과 기타연주실력으로 노래했다.
무엇보다도 영화를 통해 정말 어렵사리 듣게되는 한대수의 곡들은 의외의 반가움이다. 사운드트랙으로 삽입된 두 곡 모두 유신정권시절 판금, 압수 조치에 의해 희귀 앨범이 되어 버린 초기 앨범의 곡들이기에 더 그렇다. 고인이 된 김광석은 '이등병의 편지'와 '부치지 않은 편지' 두 곡으로 공동경비구역을 온통 울음바다로 만들다못해 자신의 헌정앨범(?)으로 만든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영화를 통해 가장 현저하게 드러난다. 영화 속의 음악이라기보다 '음악을 위한 영화'가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라는 착각마저 일으킨다.
1970~1980년대를 수놓았던 포크 록음악의 시대적 울분과 절망 그리고 열정은 공동경비구역의 사운드트랙으로 인해 잠시나마 다시 관심을 모으는 것처럼 보인다. 통기타 하나 동전 한닢뿐일지라도 창작적인 참여음악풍토가 영화 흥행 물결을 타고서라도 다시 확대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남북통일에 앞선 남북 평화무드 조성이라는 변화의 바람도 과거 포크음악에 대한 향수를 다시 불러 일으키는 이 즈음 뜻밖에 맞닥뜨린 <공동경비구역 JSA>와 영화 사운드트랙은 이념과 체제를 넘어선 시대의 명작으로 남을 것이다.
맹렬하게 통일을 다그치는 이 순진한 전쟁영화
정성일 (영화평론가, 월간 말 2000년 10호)
1953년 8월 5일 휴전협정에 따라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 유엔군으로부터 북한국 포로송환이 있었다. 그 이듬해 11월 8일 판문점 회담장을 중심으로 공동경비구역을 세웠다. 국제명칭으로는 'Joint Security Area' 약칭 JSA라고 부른다. (박상연의 원작소설『DMZ』를 다소 가볍게 뒤틀어서 각색한) 박찬욱 감독의「공동경비구역 JSA」는 이곳에서 벌어진 작은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그 작은 사건이라는 것이 좀 이상하다. 작은 총격전이 벌어지고, 북한국 초소에서 한 명의 장교와 다른 한 명의 전사(신하균)가 사망하고, 중사(송강호)는 부상을 당한다. 그리고 남한군 병장(이병헌)이 총을 맞고 북한군 초소에서 가까스로 다리를 건너다가 급히 출동한 남한군에 의해 구조된다. 유엔은 중립국인 스위스에서 (한국인 아버지를 둔 스위스 국적의) 소피 장 소령(이영애)을 책임수사관으로 파견해서 이 사건을 조사한다. 소피 소령은 진술서와 현장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들 사이에 정말 무슨 일이 생겼는지 파고들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쉬리」와 같은 방법으로 출발해서 정반대에 도착한 영화이다. 박찬욱 감독도 강제규 감독과 마찬가지로 분단 모순을 영화 장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쉬리」가 액션영화에 몰두하는 만큼이나 미스테리와 추리, 그리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마지막 장면까지 밀어부친다. 정말로 이 영화는 분단 모순을 정면으로 다룰 생각이 전혀 없는 영화이다. 그래서 사건을 따라서 정면으로 승부하는 대신 의도적으로 그 순서를 뒤죽박죽으로 만든 다음 퍼즐처럼 짜맞추는 일에 몰두한다. 추리소설과 하드보일드 풍의 스타일, 미스테리와 코미디가 사방에 지뢰밭처럼 널려 있다. 게다가 지뢰를 숨길 생각조차 없다. 처음에는 우리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다음, 사건을 파악할 때 즈음에는 조마조마하게 몰고 간다. 여기에는 역사 앞에서 분단 현장을 엄숙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그 어떤 의식적인 배려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는 진정성이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아리어리야말로 어쩌면 우리들을 처연하게 만드는 반성적 성찰에로 이끌고 간다. 박찬욱 감독은 영화 안에서 공공연히 그 자신이 한국전쟁의 경험과 무관한 전후세대라는 점을 선언한다. 거리낌없이 온갖 통일 논쟁으로부터 고개를 돌린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분단과 통일을 논쟁하자는 것이 아니라 전쟁 없는 전쟁영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전쟁영화라고? 그렇다. 그것도 아주 순진할 정도로 전쟁영화 속의 군인들의 장르적인 컨벤션을 동원하여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그러니까 시종일관 그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를 미스테리로 풀어나간다. 박찬욱 감독이 그 미스테리를 풀어나가면서 거의 한눈을 팔지 않기 때문에 심지어 의아할 지경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영화의 전략이다.
우리들은 어찌되었건 남북한 문제가 나오고, 그 모순의 최전선인 판문점에 이르면 그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한다. 이데올로기 논쟁과 색깔론이 비수를 들이민다. 그 안에서 무언가 불편하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분단은 우리들의 역사이자 현실이다. 그 앞에서 그 어떤 영화도 한 가지 입장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공동경비구역 JSA」는 시침 뚝 떼고 판문점 경계선에서 벌어진 총격사건을 외국영화처럼 그려내기로 작정한다. (이 말이 오해 없기를. 말 그대로 할리우드영화가 아니라 '외국'이라는 어휘 그대로의 느낌으로 공동경비구역에서의 사건을 다룬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벌어진 미스테리를 풀어나가면서 우리들을 그 모든 입장으로부터 뚝 떼어놓는다. 그 어느 누구의 입장에도 서지 않는 그 순간, 그래서 반공영화와 빨갱이영화 사이의 그 어느 편에도 서지 않으면서, (스위스에서 온 소피 장 소령을 내세워 관객인 우리들에게조차) 마치 그 어떤 다른 외국에서 벌어진 사건처럼 친절하게 이 나라의 분단이 왜 생겼으며, 판문점이 무엇인지 일러주면서, 아무 망설임 없이 남북한을 왔다갔다하면서, 미스테리가 되어버려야 하는 이 전쟁영화의 조건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깔깔대고 대놓고 웃는다. 그런데 그 순간부터 영화 속의 장르가 영화 바깥의 현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이제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남은 분단국가가 만들어낸 장르 안에서의 아이러니가 현실을 휘저어놓고, 장르의 법칙을 기어이 굴복시키면서 차례로 등장인물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주인공들의 영화적인 선잭 속에서 자꾸만 현실이 빚어내는 비극을 일깨운다.
남한국과 북한국 병사들의 동선을 따라 평범하게 원형이동하는 카메라가 남북한 분단의 경계를 뛰어넘는 통일의 염원으로 읽히고, 대치하는 두 진영의 병사들 사이에서 생겨난 우정이(적군을 형이라고 부른다!) 빚어낸 대사들이 영화 바깥의 남한의 심의기구를 예민하게 긴장하게 만든다.(처음에는 18세 등급으로 나왔다가 재심에서 15세 등급으로 다시 조정되었다) 당연히도 그저 잘 짜여진 추리 드라마의 전쟁영화로 보아야 하는 이 영화가 우리들의 현실 안에서 비극을 일깨우고 분단의 아이러니에 어쩔 줄 모르게 만든다. 그리고 이 웃음이 더 이상 이런 어이없는 아이러니를 연출하는 상황에 제발 이제는 종지부를 찍자고 간절하게 호소한다. 이 영화는 정말로 손에 땀을 쥐면서 웃자고 만든 영화이다. 그런데 보는 동안 자꾸만 눈물이 난다. 우리들의 현실은 이 순진한 전쟁영화 앞에서 부끄러워진다. 이보다 더 맹렬하게 통일을 다그치는 우리 세대의 영화를 나는 알지 못한다.
박상연의 JSA X-FILE : 판문점/공동경비구역 비밀일지 50년 전쟁의 상흔이 얼룩져 남아있는 곳. 판문점/공동경비구역. 민간인 출입이 철저히 통제된 가운데 두 이념의 팽팽한 긴장만이 감도는 곳. 군사분계선에서 남북으로 각각 2km. 그 곳 판문점에서는 지금 이 시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박상연 ('공동경비구역 JSA'의 원작 'D.M.Z' 작가)
2000:7:3
난 1972년에 태어났다. 그 해에는 7.4 남북공동성명이 있었고, 10월 유신도 있었다. 유신의 칼바람 따윈 알지 못하지만, 하여간 그 해 태어나게 된 나는 당연하게도 1972년 생이 되었고, 그후 20년 뒤에 1972년 생은 X 세대의 첨병이 된다.이수혁도 1972년에 태어났다. 그와 난 동갑이다. 생일은 내가 약 두 달 빠르고 기억이 나진 않지만 우린 서로 다른 장소에서 유신을 같이 겪었고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내가 겪은 것을 그도 똑같이 겪으며 자라왔다. 하지만 우린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그를 만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살아온 얼마간의 시간을 극복하고 스물 네 살 때쯤, 소설 D.M.Z를 구상하며 우린 만났다.
우리가 태어나던 1972년이 얼마나 역사적인 한해였나 하면, 유신이니, 남북공동성명이니 하는 것은 제껴두고라도 그해 3월에는 파이오니어 10호가 벌거벗은 남녀와 태양계의 그림이 새겨진 알루미늄 동판을 싣고 머나먼 우주로 끝없는 여행을 떠난 일도 있었다. 그로부터 25년 후, 그러니까 1997년 3월 파이오니어 10호는 지구와의 교신을 끊고 영원한 우주미아로, 지구에서 최초로 태양계를 벗어난 우주선이 되어 자유로워졌고, 이수혁은 그때서야 비로서 소설 D.M.Z 를 통해 세상에 나왔다. 파이어니어 10호가 태양게 인력에서 벗어나듯이, 이수혁은 이제 내 안에서 해방되었다. 올해 9월에 갇힌 소설 속에 뛰쳐나온 이수혁은 배우 이병헌의 모습으로 스크린을 통해 `공동경비구역 J.S.A' 안에 다시 한번 나타나게 된다.
사실 이수혁은 소설 D.M.Z 에서도, 영화 J.S.A 에서도, 단 한번도 공동경비구역을 벗어난 적이 없다. 소설과 영화 속에 보여지는 그의 삶은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시작되고, 또한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끝나게 된다. 그가 이탈한 것은 자신의 근무지와 M.D.L(군사분계선)이지, J.S.A(공동경비구역)는 아닌 것이다.
1972년 생인 이수혁은 그 해 태어나 자라온 모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반공교육에 잘 조련된 훌륭한 학생이었고, 반공글짓기로 날렸으며, 민족수장 획책하는 금강산댐건설 음모를 앞장서서 규탄한다던가, 이승복에게 가슴깊이 슬퍼하고, 아웅산에 치를 떨며 분노하는 모범적인 소년으로 자라났다. 그렇게 자란 이수혁이 북한군과 코앞에서 대치하고 있는 J.S.A 에 배치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는 왜 죽음의 선 M.D.L을 넘었을까. 과연 어떤 사건이 일어났던 것일까. 얼마나 거대한 음모가 숨겨져 있을까.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는 이런 문제를 파헤치는 드라마이다. J.S.A 에 대한 이해가 없이 이 문제들을 풀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난 이 이야기를 처음 고안한 사람이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대단한 행운이었다. 그것은 두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첫 번째는 공동경비구역이 내 눈에 띄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의 눈에 안 띄었다는 것이다. 내가 이 장소를 소재로서 발굴하기까지, 무려 50년 동안이나 이 장소를 주목한 사람이 별로 없었다는 것은 무척 신기한 일이다. 전세계 어디에 이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극적인 공간이 있단 말인가. 유일하게 같은 언어를 쓰는 두 국가의 사람들이 서로를 바로 앞에 두고 어떤 몸짓도 언어도 금지되어 버린 곳, 철조망도 벽도 없이, 어린아이들 땅따먹기 하듯, 우습게 그어놓은 선을 경계로 삶과 죽음을 가르는 곳, 몇 발자국 앞에 선을 넘는 것만으로 근무지 무단이탈과 국가보안법 제 7조 잡입.탈출에 관한 법률에 의해 인생이 끝장날 수 있는 곳, 손을 뻗으면 잡힐 듯이 가까이 있는 같은 동포에게 말을 건네는 것만으로 국가보안법 제 7조 회합.통신죄를 적용받을 수 있는 곳, 북한의 핵위협이든, 불바다 선언이든, 미국 항공모함이 전진배치되든 말든, 정작 가장 최전선인 공동경비구역은 고요했지만, 어처구니없는 총성 한발에 미친 듯이 서로를 물어뜯도록 프로그래밍 되어진, 이런 기막힌 장소가 지구 위에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공동경비구역이란 공간은 이 공간자체만으로도 거대한 음모다.
앞으로 진행될 이야기는 공동경비구역에 관한 모든 것이다. 이 역사적인 장소에서 50여년의 세월동안 떠돌던, 또한 숨겨진 이야기들과 사건들을 조심스럽게 풀어나갈 것이고, 이수혁의 베레타가 불을 뿜기까지의, 72년 생 이수혁(이병헌 분)의 삶과 그를 수사하는 기구한 운명의 소피 베르사미(이영애 분) 소령의 가족사, 제 3세계에 반제국주의 용병으로 활약했던 인간병기 오경필(송강호 분) 에 대해서 써나갈 것이다. 어차피 이런 것들은 영화라는 매체가 맡아내지 못할 몫이었다.
원작소설 D.M.Z 의 마지막 페이지로도,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의 엔딩크레딧으로도, 이수혁의 삶은 막히지도 닫히지 않는다. 이야기는 페이지를 넘어서 스크린 밖으로 흐르는 드라마다. 9월은 머지 않았다.
2000:7:16
나는 이수혁이다. 오늘 조간신문은 `사라예보의 총성'이라는 거창한 헤드라인으로 시작되었다. 굳이 읽지 않아도 나를 `세르비아의 한 청년'쯤으로 묘사한 기사일거라는 걸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1914년 보스니아의 수도 세르비아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세르비아의 한 청년이 암살하여 유럽은 만 4년이 넘는 시간동안 전란에 휩싸이게 되었다는 이야기. 어느 기자인지는 몰라도 적절한 비유일지도 모른다. 이번 사건으로 미국의 존 c 스테니스호가 동해로 진출했고, 오키나와 미군기지에서 제 7함대가 부산을 향해 출발할거라는 소문도 들린다. 존 C 스테니스호는 항공모함으로 가장 큰 니미츠급이고 더군다나 세게 최강, 최신의 핵 항모다. 저번 TS(팀스피리트) 때 들은 적이 있다. 북한은 민민전 방송을 통해, 스테니스호의 동해진출을 강력히 비난하면서 최정예 기계화사단을 전진배치하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펜타곤의 수뇌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것이고 수많은 군사위성들이 북한에 촛점을 맞추고 있을 것이다. 나의 M-9 베레타 권총에서 발사된 몇발의 총알로 이 엄청난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새삼 우스워졌다.
언론이 놓치고 있는 게 있다. 정말 이 사건으로 인해 전쟁이 발발하든, 말든, 이 사건의 본질은 살인사건이라는 것이다. 사람을 죽였다. 사람이 죽었다. 정확히 몇 발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꽤 많은 총알이 발사되었고, 두 사람이 죽었다. 그들이 적군이든, 친구든, 이것은 살인사건이다.나는 72년생이다. 영웅본색에 열광하며 자랐고, 성냥개비를 물고 위악의 일탈을 꿈꾸었던 세대다. 하지만 살인은 영화처럼 미학이거나 매력적이지 않았다. 살인은 그냥 살인일 뿐이었다. 정우진전사의 얼굴 인중부근에 들어간 총알은 얼굴 윗 부분을 함몰시켰다. 코 부분이 앞으로 떨어지면서 눈알이 피덩어리와 함께 쏟아졌다. 그걸 보면서도 총격을 멈출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 그 전의 총격으로 이미 시체였겠지만 끔찍한 기억이다.
사건 발생 후. 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당시의 화약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시간이 흐르다보면 어느 정도 잊혀질지도 모르지만 이 냄새만큼은 오래갈 것 같다. 아니, 그 전에, 나에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남아있을까...
그 계집애가 무엇을 알아낼 수 있을까? 안다하더라도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중립국감독위? 개수작이다. 중립국이 어디 있나. 다분히 동양적인 외모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능숙한 한국어실력은 사실 날 약간 놀라게는 했다. 그리고 의외로 의욕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녀도 결국엔 이방인일 뿐이다. 그 잘난 스위스 연방공화국민이 이 나라를 이해할 수 있을까? 무리다. 그 반쪽의 한국인 피로는 무리다. 화려한 경력에 승승장구하면서 패배를 모르고 자라왔을 것이다. 알량한 반쪽피와 뛰어난 한국어실력으로 스위스 군정보단에선 한국통으로 이름을 날렸을테고, 그녀 자신 또한 이번 사건에 대해서도 자신만만하겠지. 그 화려한 경력을 더욱 빛나게 하는 좋은 건수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배치되는 중감위 장교라는 사람들은 군인이라기보다는 외교관이다. 여기서 흔히들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세상엔 세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옳은 방법, 틀린 방법, 그리고 군대식이라는 말이다. 그녀는 군대식이 어떤건지도 모르고, 더더욱이 판문점을 모른다. 그녀는 그녀의 상부조직이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모르는 애송이다. 그녀에게 기대를 하진 않기로 했다.
난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난 태어난 이후, 의식이 생기면서부터 북한의 위협을 받았다. 북한은 자꾸 땅굴을 팠고, 국회의사당이 지붕까지 잠긴다는 금강산댐을 만들었고, 어린아이를 `공산당이 싫다' 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입을 찢어서 죽였으며, 독침을 가진 간첩을 침투시켜 양민을 학살했다. 아웅산에서의 폭파사건이 일어났을 때, 순진하고도 멍청했던 나는 눈물을 흘렸으며, 당시 약간 삐딱했던 담임선생이 `죽을 놈은 안 죽고, 안 죽어야할 놈만 다 죽었다'라고 말했을 때, 난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내가 유일하게 잘 했던 것은 반공글짓기였고, 6.25기념 반공글짓기 대회에서 문교부장관상을 탄 것이 내 길지 않은 인생 최대의 영광이었는데, 당시 나의 반공시는 소년동아일보에 대문짝만하게 실리기도 했다.
아, 한가지 또 잘하는 것이 있었다. 권총돌리기. 난 아홉 살때부터 그 짓을 했다. 서부영화가 한창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크리스마스선물로 받은 모형권총을 가지고 친구들앞에서 빨리 뽑는 것을 보여주거나, 권총 돌리는 묘기를 보이는 것으로 인기를 끌기도 했다. 좀더 자라선 권총에 대해서 매니아적인 성향을 보였다. 내가 만드는 권총 프라모델은 점점 더 정교해졌고 재료의 가격도 비싸졌다. 그리고 권총돌리기 묘기는 더욱 세련되어졌다. 난 의식하지 못했지만 난 이미 대단한 속사수였다. 애석하게도 그랬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고, 나는 어느새 건장한 청년이 되어 논산으로 입영했다. 운좋게도 카투사 차출시험이 있었다. 평소에 영어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한 것은 아니었는데, 역시 또 운이 좋았다. 난 시험에 합격을 했고 평택에서 다른 카투사병들과 함께 후반기 교육을 받았다. 가장 배치받고 싶었던 것은 당연히 용산, 하지만 내 성적이 그 정도를 기대하기엔 너무 형편없었다. 요즘은 그냥 뺑뺑이 돌려서 배치한다고 하지만 내가 입영할 당시만 해도 성적순이었다. 현실적으로 동두천이나, 의정부, 혹은 대전같은 곳에 배치받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 재수가 없으면 JSA 에 걸린다고 했다.
재수가 없던 나는 후반기 교육을 마치고 공동경비구역 경비중대에 배속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거의 유일하게 사병으로서 권총을 만져볼 수 있는 곳이었고, 일반병과 구별되는 멋있는 군복도 맘에 들었다. 물론 전쟁이 나면 가장 먼저 전멸할 부대였지만 뭐, 상관없었다. 북한 핵사찰이든, 불바다선언이든, 정작 판문점은 고요했으니까 말이다. 단지 전쟁같은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랬다. 그런 내가 가장 먼저 베레타를 뽑고 총격을 가하고, 살인을 하게 될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몇 번이나 내 빠른 손을 저주했다. 누가 먼저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몇번이나 내 자신에게 되뇌었지만 내가 먼저였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베레타와 백두산이 불을 뿜을 뿜었고 두 사람이 처참하게 죽었다...
끝이다.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되든 관심이 없다. 정작 중요피의자인 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운명은 나에게 무력하게 지켜보라고만 했다. 무릎꿇고 눈물 흘리며 안타깝게 지켜보고만 있으라 했다. 다 끝났다. 다만, 오경필 중사와 남성식 일병... 그들이 무사하기를 바랄 뿐이다.
2000:7:26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욱씬거리는 어깨의 통증에 잠을 깼다. 총상은 정말 오랜만이다. 총을 맞을 때의 느낌이 어떤지 궁금하지 않은가. 그것은 칼과는 많이 다르다.
칼에 찔릴 때의 느낌은 불에 데인 듯 뜨겁다. 그래서 화들짝 몸이 놀라고 경련이 이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의외로 총은 차갑다. 갑자기 맨살에 얼음을 갖다대는, 혹은 순간적으로 마취되는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격렬한 전투 중에는 자신이 총을 맞은 것을 못 느끼는 경우도 생긴다.
난 실제로 총상을 입은 채, 앙골라와 나미비아 국경지대에 흐르는 쿠네네를 도강한 적도 있다. 강기슭에 다다라서야 내가 총을 맞은 것을 알게되었는데, 평소에 느꼈던 총에 대한 공포감에 비하면 고통이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았다. 물론 난 그때 최초의 살인을 한 직후였고, 또 상당한 흥분상태였기 때문에, 고통을 그대로 감지할 만큼의 정신이 없었을 수도 있다. 당시 나는 스무 살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 십여 년 동안 점점 노련해지면서 총을 맞을 때의 느낌을 살피게 되었는데, 총을 맞을 때의 느낌은 언제나 얼음처럼 차가웠고 뜨거운 느낌의 칼이 오히려 더 고통스러웠다.
차가운 느낌의 총상(銃傷)이든, 뜨거운 느낌의 자상(刺傷)이든 적절한 처치를 하지 못한다면 결국에 느끼게 되는 것은 추위다. 출혈이 심해지면서 점점 추워지고 졸리게 된다. 잠이 들면 그것으로 끝이다. 선배들은 레몬을 가지고 다녔다. 레몬에는 지혈효과가 있다면서 사뭇 자상하게 입에 물려주곤 했었다. 정말 지혈효과가 어느 정도 있는지 모르지만 난 삶과 죽음을 가르는 그 경계에서 느꼈던 그 레몬맛을 잊지 못한다. 편안하고 깨끗한, 이런 하얀 침대 위에서 맛보는 레몬은 시기만 할뿐이다. 이내 뱉어버렸다. 중립국감독위 소령이라는 계집애가 가져온 것이다.
나이는 기껏해야 서른 한 두 살 정도. 트기답게 하얀 피부, 큰 눈... 그래도 동양인에 가까운 외모였다. 우리말을 구사하는 것은 경이로울 정도였고...그뿐이다. 요식행위다. 난 이 사건의 수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어떻게 종결될지 잘 알고 있다. 중립국이래봤자 서방자본주의국가에 다름아닌 스위스, 그 나라의 군인인 그녀는 결국 남쪽에 유리한 수사방향을 잡을테고, 우리 공화국은 편파수사에 항의하면서 수사공조를 거부한다는 선언을 할 것이다. 그리고 중단되었던 대남방송을 통해, 미제국주의와 남한괴로도당의 도발에 대한 비난을 계속할 것이고, 이렇게 공조수사가 깨지면 그걸로 사건은 흐지부지 종결될 것이다. 모두가 그걸 원하고 있다. 진실 따위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나는 적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훌륭한 테러수출품이고, 공화국의 입장에선 제국주의와 시오니즘에 신음하는 제3세게 동지들을 지원하는 위대한 반미전사다. 스무 살 때부터 십여 년 동안 앙골라, 아프칸, 리비아 등에서 활약했다. 죽을 고비도 수 차례 넘겼고, 살인도 숱하게 했다. 죄책감은 죽인 사람의 숫자를 세도록 만들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잊어버렸다. 죽인 사람의 숫자도, 죄책감도 잊혀졌다. 뿐만 아니라, 여타의 인간적인 감정들도 버렸었다.
그러다 귀국하고 판문점에 배치되면서 우리 막내랑 동갑내기인 스무 살 정우진이란 놈을 만났다. 계급은 전사이고 나와 같은 초소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날 끔찍히도 좋아하고 잘 따랐다. 좀 덜렁거리고 나이가 나이이니 만큼 철없이 구는 적도 많았지만 난 스무 살 우진이를 통해서, 내가 스무 살 시절 이후로 잊어버린 많은 것들 되찾을 수 있었다. 누구보다 착하고 순수한 녀석이었다.
스무 살 우진은 내 눈앞에서 처참하게 죽었다. 열 발의 베레타 탄환을 맞고 쓰려졌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공동경비구역에 오는 게 아니었다, 그날 DMZ 수색을 나가지 말았어야 했다, 지뢰를 제거하지 말았어야 했다,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어야 했다, 아니 귀국하지 말아야했다, 감정없는 살인병기로 앙골라에서 최후를 맞았어야 했다. 면회 온 우진의 어머니를 외면해야했다. 우진에게 그리고 그의 어머니에게 아무 것도 약속하지 말아야 했다.
모두 내 잘못이다. 하지만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는 도저히 알 수 없다. 몇 발의 총성으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두 명이 처참하게 죽고 세 명이 살았지만 살아남은 셋에게 남겨진 몫은 아무 것도 없다. 해야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언제나 그랬듯이 힘없이 서로를 바라보는 일만이 남았다.
2000:7:31
"난 이 사건에 대해서 이미 네 가지의 추리가 있어요" 나는 이 사건을 처음 접하자마자 페르손에게 호기롭게 이야기했다. 남.수.정... 그녀를 만나기 전 까진 그랬다. 난 이 사건에 대해서 자신이 있었다.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최대한 가정하고 그중 가능성 없는 것을 가지쳐내는 방식은 내가 가장 즐겨쓰는 것이다. 제네바에서도, 쮜리히에서도 그렇게 했다. 법의학자출신으로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던 동료인 피에르조사관은 카오스이론에, 뻬이징 나비까지 들먹여가며 아무리 정교한 상상력을 발휘한다하여도 모든 상황을 가정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난 지금까지 그렇게 했다. 더군다나, 난 상상력과 주관만으로 일을 처리하진 않는다. 상황에 대한 가정을 이끌어내는 것은 객관적인 조건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나의 주관은 내가 가정해낸 상황을 버리거나 선택할 때 쓰여진다.
그 결과 네 가지 추리가 남았었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남측의 주장에 기초한다. 이수혁은 북측 경비병들에 의해 납치된 것이다. 하지만 남측의 주장처럼 그 배후에 북한 고위층이 연루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지목하는 배후는 이수혁에게 살해당한 최상위다. 다분히 출세지향적인 인간형으로 파악되는 최상위는 자신의 전공을 위해 개인적으로 오경필 중사와 정우진 전사에게 명령을 내려 납치를 지시한 것이다.
이수혁은 납치된 후, 북측초소로 끌려가 묶여있던 중, 묶은 끈을 느슨하게 만들고 탈출하려 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총격전이 발생, 두 명이 사망했고, 이수혁 자신도 부상을 입고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서 돌아오던 중 실신한 것이다.
이 추리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는데, 하나는 시간이 좀 지났다고 해도, 손목엔 묶여있던 흔적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전세계 분쟁지역들에서 활약하며 온갖 야전에 단련되어 있는 오경필 같은 노련한 프로가 끈을 느슨하게 묶었다던가, 또 그렇게 했다고 해도, 동료 두 명이 당할 때까지 변변한 응사 한 번 못 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추리는 북측의 주장을 참조한 것이다. 이수혁은 모종의 임무를 띤 특수부대원이다. 철저한 보안 속에 특수훈련을 마치고 일반병처럼 JSA 에 배치되어 근무하다, 지령을 받고 북쪽에 잡입하려고 한 것이다. 물론 임무의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오경필 중사가 제대로 응전하지 못한 것을 설명해줄 수 있는 가정이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하나는 기습이라는 점, 또 하나는 이수혁 역시 특수훈련을 받은 군인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또 석연치 않은 점이 남는다. 이수혁이 남한 특수부대원이라 해도 임무가 무엇이던 간에, 북한 초소병을 살해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역시 임무를 수행하는데 뭔가 문제가 생겼던 것일까...?
세 번째 추리는 이수혁의 철저한 개인범행이라는 가정이다. 이수혁은 특수부대원도 아니고, 모종의 임무를 부여받지도 않은 그저 공명심에 사로잡힌 군인이다. 적성국의 군인과 최전선에서 얼굴을 맞대고 근무하면서, 일계급 특진과 포상휴가의 환상에 젖어 있던 그는, 어느 날, 드디어 MDL을 넘는다. 북측초소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오경필 중사와 정우진 전사, 그리고 마침 초소에 순찰을 나와있던 최상위를 향해 총격을 가한 것이다.
하지만 특수부대출신의 병사가 끼어있는 세 명을 상대로 혼자서, 평범한 일반사병인 이수혁이 그와 같은 활약(?)을 할 수 있을 것일까 하는 의문이 여전히 남게 된다. 난 여기서 현장에 있었던 제 5의 인물에 대한 가능성을 생각하기로 했다. 현장에서 사용된 총알 숫자에 대한 퍼즐을 한참 풀고 있던 중이라 더욱 매력있는 가정으로 여겨졌다.
네 번째는 이수혁의 귀순가능성이다. 이수혁은 북한에 귀순하려고 한 것이다. 같은 부대원들 간의 갈등이라던가, 아니면 집안문제라던가, 귀순의 동기가 될만한 것들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는 저녁 8시 이후, 판문점일대가 텅 비는 시간을 골라, 같은 초소에 근무하는 남성식을 따돌리고 몰래,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넘은 것이다.
그런데, 북측초소에 있던 오경필과 정우진에게 귀순의사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고, 그 결과 오경필과 정우진은 적의 도발로 오인하여 사격을 시작했고, 총격전이 벌어진 것이다. 남북한이 맞닿은 최전선 판문점에서 초긴장상태로 근무하는 경비병들간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상이 내가 사건을 접하고 초등수사단계에서 할 수 있었던 네 가지 가정이다. 그러나 남성식의 동생이자, 이수혁의 애인인 남수정을 서울에서 만나고 모든 게 뒤집어졌다. 남수정, 그녀와의 만남은 고작 10분 남짓이었다. 10분 동안 나눈 이야기도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과 그녀의 미소가 다른 것들과 오버랩되면서 난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돌아오는 차안에서도 난 흥분을 가누지 못했다. 나의 네 가지 추리는 일순간에 뒤집어졌다. 모두 틀렸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 사건엔 나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거대한 음모가 있다. 예전에 피에르가 한 말이 떠올랐다. `강이 너무 크면 강 같지 않아 보이고. 음모가 너무 크면 아무런 음모도 없는 듯이 보이지'
중감위로 돌아와 남수정과의 인터뷰 때 찍은 비디오테잎을 다시 돌려보며, 난 무서워졌다.
2000:8:11
`난 그녀의 아버지다. 난 당연하게도 50년 전에 50년 후를 알지 못했다. ' 그녀...스위스 군정보단 장교 `소피.E.장' 국적은 스위스 연방 공화국... 32세... 스위스 제네바 출생... 켈트게 스위스인과 한국계 브라질인의 혼혈... 3세부터 19세까지 브라질 상파울로에서 거주... 20세에 스위스로 돌아온다... 23세에 대학을 졸업하고, 스위스군에 입대, 통역장교 업무. 4개국어 자유롭게 구사... 27세에 군정보단으로 배치. 군수사업무와 외교관업무... 32세 소령진급 후, 판문점 중립국감독위 수사책임자로 발령...
소피 E 장.. 그녀는 내 딸이다. 나는 한국, 아니 조선인이다. 아니, 조선인이었다. 조선을 떠난 건 1953년이었다. 그리고 인도에서 1년, 그리고 지구를 반바퀴 돌아서 브라질로 왔다. 캄피나스 커피농장에서 5년간 일했고 그 이후엔 리우데자네이루 항구의 13번 부두에서 하역노동자로 일했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동양인, 초라한 부두의 하역노동자... 그런 내 앞에 20대의 그녀가 나타났다. 상파울로 주재 스위스 외신기자, 쮜리히법대 출신의 엘리트, 더군다나 스위스연방공화국민인 그녀가 나타났다. 여기서 우리의 신분과 국경을 초월한 사랑이니, 뭐니를 떠들고 싶지는 않다.
여튼, 그녀는 소피를 임신한 채, 제네바로 돌아가 소피를 낳았다. 켈트계 스위스인과 한국계 브라질인의 혼혈아가 태어났다. 스위스에서 스위스인 엄마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녀는 스위스인이 되었다. 엄마를 닮아서 피부가 하얗고, 눈이 컸지만, 외모는 다분히 동양적이었다. 그녀는 내가 유전학적으로 우성이라서 그런가보라고 말하며 웃었다...
난 이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 중 가장 살인을 많이 한 사람이다. 이 영화엔 살인사건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기껏해야 하나, 혹은 둘 정도를 사살했을 뿐이고, 북한군 오경필 중사가 앙골라, 아프간, 리비아등의 제 3세계에서 반미전사로 활약했다고 하지만 기껏해야 얼마를 죽였겠나. 내가 겪은 건 그런 국지전, 테러전과는 비교도 안된다.
조선인인 내가 어떻게 브라질에 와 있었는지 이야기를 해야겠다. 내가 브라질에서 그녀를 만나고 소피를 낳고, 그녀가 스위스로 돌아가 군인이 되고.., 그리고, 나의 딸인 소피가 남도 북도 아닌, 판문점으로 돌아가기 까지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난 Korean Civil War 의 최전선에 있었다. 난 23세의 나이로 조국해방전쟁이라는 성전을 영광스럽게 맞이했다. 1950년 6월 25일... 난 그날을 확실히 기억한다. 출발할 당시의 어스픔레한 새벽의 찬 공기, 손에 자꾸 땀이 나서 총이 미끌거렸을 때의 느낌, 내가 쏜 첫 총알의 경쾌함, 그리고 그날 떠오르던 태양... 해가 뜰 무렵엔 이미 횡성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 날의 태양을 잊지 못한다. 평소보다 몇 배나 더 장엄했고, 몇 배나 더 붉게 느껴졌다. 난 그 태양을 가슴깊이 꾹꾹 눌러 새겨 넣었다. 가슴이 벅차 올랐다. 미제국주의의 꼭두각시 이승만 정권과 남한괴뢰도당들은 도망치기에 바빴다. 수많은 자국 인민들을 수장시킨 한강 인도교 폭파라는 만행까지 저질러가면서 그들은 퇴각했다.
우리는 불과 사흘만에 서울을 해방시켰다. 서울의 인민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공화국기를 손에 들고 있었고, 인민해방군 만세를 외쳤다. 거리를 꽉 메운 그들을 보며, 뿌듯한 마음에 괜히 우쭐해져서 혹시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지 살피기에 바빴다. 월북하는 나를 비웃었던 개량주의자들 앞에 내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모두 피난을 가버린건지, 한 사람도 찾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 `장백산 줄기로...' 로 시작하는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귀에 거슬렸지만 참았다. 김일성... 놈은 애초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난 들떠 있었다. 일주일후면 부산에서 전후 피해복구와 조국재건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낙동강까지는 파죽지세였다. 적들은 반격다운 반격 한번 하지 못했다. 얼마 뒤, 미국이 참전했다. 이렇게 신속히 미국과 세계 각국이 행동하리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었다. 거대한 함정에 빠진 거라고 이야기하는 동지들도 있었다. 처음으로 나도 부상을 입었고 피를 흘렸다. 동지들이 마취도 하지 못한 채, 수술을 했다, 비명과 절규... 아비규환... 탈영자들이 생겨났다. 인천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렸고, 보급이 원할하지 못해 굶는 날이 많아졌다. 혁명군으로서의 자존심을 버리고 보급투쟁을 나가 민가를 약탈했다. 곧 우린 낙동강전선에서의 그 치열한 사투 끝에 퇴각하기 시작했다.
결국 난 도솔산의 가칠봉 전투에서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송되는 트럭 안에서 나는 비로소 뒤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남로당에 가입 후, 1946년에 박헌영 부수상 동지를 따라서, 월북한 후로, 5년... 남쪽에 버려두고 온 동생 연철이와 어머니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살아있을까. 다시 만나게될까...
내가 도착한 곳이 거제도였고, 거대한 포로수용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거기서 동생 연철이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채,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갔다...
2000:8:19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실로 거대한 곳이었다. 중공군 동무들을 포함하면 10만 명은 족히 될 듯이 보였다. 이곳은 감옥이나 교도소와는 달랐다. 미군과 남한군 모두 우리 포로들을 통제하고 관리할 능력은 없어보였다. 단지 수용소라는 거대한 테두리를 쳐두고 감시만 할뿐이었다. 따라서 포로수용소 안에선 우리 나름의 질서가 잡혀갔다. 각 막사 안에 군관출신의 동지들이 조장이 되어 그 막사를 관리했다.
우린 곧 체계와 조직을 갖추었다. 52년 5월 7일엔 포로수용소 소장인 미 준장 돗드가 수용소 시찰을 나왔을 때, 미 경비병등의 제지를 막고 역으로 우리가 그를 납치하여 포로로 삼는 쾌거를 올리기도 했다. 물론 난 그 선봉에 섰다. 우리는 그를 미끼로, 식량, 약품, 기타물자를 공급해줄 것과 포로송환을 위한 심사를 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포로의 신분이 되기는 했지만, 난 그때까지도 치열하게, 맡은 바 임무에 충실히 살고 있었다. 문제는 반공포로 대열이라는 것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다.
소좌출신인 나도 한 막사를 맡아서 관리하고 있었다. 전쟁 중이긴 하지만 모두들 사람을 몇이나 죽인 자들이다. 당연히 거칠었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포로라는 상황은 더욱 그들을 히스테릭하게 몰고 갔다. 당연히, 나를 비롯한 군관출신 조장들의 지배, 통치, 관리방식 또한 거칠 수밖에 없었다. 강압적인 지배방식에 불만을 품은 무리들과 남한에서 징집되어 북으로의 송환을 거부하는 자들이 반공포로 대열을 이루었다. 그 숫자는 생각보다 엄청났다.
공산포로진영과 반공포로진영의 반목과 갈등은 점점 심해졌다. 하루에도 한 막사 안에서 몇 명씩 싸우다가 죽어나갔다. 반공포로들과의 싸움에 있어서 보다 전문적이고, 전투적인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사상교양이 잘 되어 있는 동지들이 뭉쳐서 '애국대'라는 전위 전투조직을 만들었다. 나를 따라 해방전쟁에 참여한 동지들을 무사히 송환시키 위해서라도, 반공포로진영과의 싸움에서 이겨야했고 난 애국대에 지원했다. 애국대는 빛나는 활약을 했고, 총대신 칼과 몽동이들을 든 잔인한 싸움은 더욱 치열해져갔다...
난 참전하면서부터 진군일지라는 제목으로 일기를 썼었는데, 다음은 거제도에서 쓴 일기의 일부분이다.
1953년 2월 26일 수용소의 살육전은 더욱 치열해져갔다. 툭하면 칼을 들고 패싸움이 벌어졌다. 절망한 양측 포로들은 시체에도 보복을 가했다. 잘려진 손목, 팔뚝이 굴러다니는 것을 보는 것은 예사였다. 며칠 전에는 애국대 동료이며 행동대장을 맡고 있던 동지가 반공포로 놈들에게 끌려가 살해당했다. 그는 평양에서부터 나와 같이 지냈으며 이번 전쟁에 같은 대대로 참가한 유능한 소좌였다. 난 분노했고, 너무나 당연하게 그 동지의 뒤를 이어 애국대의 행동대장을 맡게 되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리쪽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는데, 중공군 동무들이 다시 북퇴를 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반공포로 아이들이 더욱 설쳐댔다.
더구나 남한 아이들과 미군들이 반공포로를 비호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가끔 중무장을 하고 순찰을 하는 날이면 수용소는 공포의 도가니가 된다. 정찰조가 '미군이다'하고 소리만 지르면 우리는 모두 막사로 들어가 수용소는 쥐죽은듯이 고요해지곤 했다. 특히 미군에 대한 우리의 공포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모두 전쟁 중에 미군의 만행에 대해 너무나 많은 이야길 들어왔다. 물론 과장도 있었겠지만 어쩄건 우리들은 미군에 대한 끝없는 증오와 공포를 갖고 있었다. 한 번은 장난으로 '미군이다'를 외친 철없는 아이가 뭇매를 맞아 숨진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당장 시급한 것은 우리 막사만이라도 확실히 반공포로들을 가려내는 것이다. 이 안에서도 이미 많은 동지들이 죽어나갔다. 부상자는 대개가 죽기 마련이었다. 어떤 약도, 구호품도 지급되지 않았다. 죽어가는 동지를 바라보며 사상이전의 분노를 느꼈고, 우리는 모두 복수를 다짐했다. 물론 나도 많은 사람을 죽였다. 전쟁초기부터 내 손으로 죽여온 반동분자의 수를 세는 것도 이제 지쳐버렸다. 지금은 전쟁 중이다. 죄책감 따위는 이미 유치했다.
1953년 3월 18일 또 사람을 죽였다. 20살이 훨씬 안될 것 같은 어린아이였다. 온양에서 강제징집당해서 인민군이 되었다가 인천상륙작전 때 포로가 되었다고 했다. 그 아인 반공포로진영에 있었지만 반공포로도 공산포로도 뭣도 아니었다. 여기 포로들 가운데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마르크스, 레닌, 자본론, 공산당선언 등의 단어를 한 번이나 들어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뭘 안다고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찬성을 한단 말인가? 그래도 죽여야 했다. 이것은 전쟁이므로. 하지만 두 손의 피를 평생 씻어도 지워질 것 같지 않았다.
1953년 4월 13일 지난달 초에 스탈린 동지가 서거했다고 한다. 그러므로써 판문점에선 회담이 재개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번 달 말부터는 부상포로 교환협정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모두들 들떠있었다. 하지만 난 이제 너무 지쳐버렸다. 혁명, 통일, 해방전쟁, 살인, 방화...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3년간의 전쟁으로 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테고, 국토는 쑥대밭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와서 휴전을 한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더욱 짜증이 났다.
우린 삼 년 동안 도대체 무엇을 했나? 모든 것이 원점, 아니 원점이하가 되려 하고 있다. 유행어가 하나 생겨났다. 제네바협정... 필경 제네바가 지명인지 사람이름인지도 모를 것 같은 놈들도, 개나 소나, 들먹이는 제네바협정. 만나면 누구나 제네바협정을 이야기했다. 모든 것에 자신을 잃어가는 것 같다. 가슴 한 구석이 항상 답답했다. 그러는 나를 위로한답시고, 북송만 무사히 되면 모두 영웅이 될 거라는 이야기를 하는 동무들을 보면 더욱 그랬다.
2000:9:07
1953년 8월 1일
7월 27일 10시를 기해 모든 전선의 포성은 멈췄다. 38선 대신 휴전선이 생겨났을 뿐이었다. 평화는 휴전이라는 애매한 이름으로 찾아왔다. 포로교환문제로 판문점에서 회담이 진행중인 모양이었다. 벌써 일부 포로들이 북송되었다. 오늘은 포로심사가 있었다. 남이냐, 북이냐, 제 3국이냐를 자유롭게 이야기하라고 했다. 난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다 나오고 말았다. 아닌게 아니라, 사실 난 말을 잃어버린 듯 했다. 주위에서 나를 미쳤다고 하는 소리에도 대꾸를 하지 못했다.
사실 난 한달가까이 미쳐있었다. 아니 그 이전부터 이미 미쳐있었던 것이다. 이제와서야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었는지 깨달은 것이다.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었다. 내 마음 속에 남아있던 북송의 희망은 사라졌다. 몇 달전 우연히 듣게 된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남로당 수뇌들이 모두 숙청되었다는 것이었다. 장시철동무는 말할 것도 없고 박헌영선생님도 미제국주의의 간첩이라는 말도 안되는 누명을 쓰고 숙청되었다고 했다.
선생님께 김일성, 그 자식을 조심하시라고 그렇게 말씀드렸건만... 박헌영 부수상 동지께 별 셋을 달아주면서 총정치국장이니 중장이니 할 때부터 석연치 않았다. 어쩌면 정해진 순서였을지도 모른다. 박선생님은 혁명가고 김일성이는 정치가다. 혁명가가 정치가를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한반도를 뒤덮고도 남을만큼 뿌려진 젋은이의 피가 모두 오물이 되어버린 이 전쟁도, 이름만 바뀌어버린 휴전선도, 북송되면 남로당간부라는 이유로 숙청될 것이 뻔한 내 처지도 나를 미치도록 우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미치게 된 사건은 한달 전에 일어났다. 그토록 보고싶던 하나뿐인 혈육, 연철이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봄부터 나에게 밀려왔던 절망, 공포, 허무, 짜증은 나를 광기에 사로잡힌 훌륭한 행동대장으로 만들어왔다.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복수였다. 난 더욱 더 잔인하게 반공포로들과 싸웠다. 정말 많은 사람이 내 두 손에 죽어나갔다. 이대로 몇 달만 더 지속한다면 이 수용소안에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다.
1953년 7월 21일
수백명의 큰 패싸움이 있던 날이었다. 반공포로 아이들은 자기 편을 구별하기 위해 광목천을 오른팔에 두르고 있었다. 당연히 난 칼을 들고 앞장서서 싸웠다. 내 칼에 서너 명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그들이 두른 흰 광목천은 피로 물들어갔다. 우리 쪽이 우세한 듯 했다. 전열을 정비하기 위해서 전투조 뒤로 빠지려고 할 때, 오른팔에 광목천을 두른 놈 하나가 각개목을 들고 나를 가격했다. 난 피할 수도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 내 시선을 고정시킨 체 멍하니 서 있었다. 빗장뼈가 부러진 것 같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내 얼굴을 다시 가격하려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연철이였다... 월북한 이후로 7년만에 만나는 동생... 연철이도 행동을 멈추고 한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주위에선 칼이 난무하고 비명과 함성으로 아수라장이었지만 그 난리 속에서 우리 둘만 정지해 아무 말없이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반공포로 장연철... 이런 곳에서 이런 위치로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주위는 점차 진정되고 있었다. 우리 공산포로측의 승리인 것 같았다. 그제서야 난 동생의 팔뚝에 있는 광목천을 풀어줘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다가서자 그는 뿌리치며 외쳤다. '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아?' 그런 말을 들을 겨를이 없었다. '연철아, 빨리 이거부터 풀자...' 광목천이 감긴 오른팔을 잡으려 할 때, 우리측 포로 한 명이 몽둥이로 연철이를 가격했다. 머리를 맞은 연철이는 머리를 감싸쥐며 쓰러져 뒹굴었다.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다시 쳐다보았다. 분노, 놀라움, 슬픔, 공포로 뒤섞인 그의 눈동자가 나에게 무언가를 묻고 있었지만 난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었다. 애국대 동료 하나가 시퍼런 칼을 들고 쓰러진 연철이 앞으로 나섰고, 난 막아서며 내가 처리한다고 외쳤다. 애국대원들이 나와 쓰러져 있는 연철이를 둘러쌌다.
내 머리속은 하얘졌다. 칼을 잡은 손은 부르르 떨렸고, 연철은 증오의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주위에선 죽이라고 아우성이었다. 죽이라고 외치는 광기어린 수백명의 시선을 통해 난 처음으로 지금까지 내가 무슨 짓을 해왔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끝이다. 더 이상 살인을 할 힘도 의지도 없다. 여기서 끝내야 겠다. 고향을 떠난 이후 10년, 내가 그동안 무엇을 했나... 그 숱한 고통과 갈등, 번민의 댓가가, 치열하게 살았다고 자부하는 내 인생의 결말이 이런 것이란 말인가...
내가 다가서자 그는 뿌리치며 외쳤다. '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아?' 그런 말을 들을 겨를이 없었다. '연철아, 빨리 이거부터 풀자...' 광목천이 감긴 오른팔을 잡으려 할 때, 우리측 포로 한 명이 몽둥이로 연철이를 가격했다. 머리를 맞은 연철이는 머리를 감싸쥐며 쓰러져 뒹굴었다.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다시 쳐다보았다. 분노, 놀라움, 슬픔, 공포로 뒤섞인 그의 눈동자가 나에게 무언가를 묻고 있었지만 난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었다. 애국대 동료 하나가 시퍼런 칼을 들고 쓰러진 연철이 앞으로 나섰고, 난 막아서며 내가 처리한다고 외쳤다. 애국대원들이 나와 쓰러져 있는 연철이를 둘러쌌다.
내 머리속은 하얘졌다. 칼을 잡은 손은 부르르 떨렸고, 연철은 증오의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주위에선 죽이라고 아우성이었다. 죽이라고 외치는 광기어린 수백명의 시선을 통해 난 처음으로 지금까지 내가 무슨 짓을 해왔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끝이다. 더 이상 살인을 할 힘도 의지도 없다. 여기서 끝내야 겠다. 고향을 떠난 이후 10년, 내가 그동안 무엇을 했나... 그 숱한 고통과 갈등, 번민의 댓가가, 치열하게 살았다고 자부하는 내 인생의 결말이 이런 것이란 말인가...
그래, 같이 죽자... 다 끝났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구? 저승에 가서 같이 듣자꾸나... 난 천천히 손에 쥔 칼을 내 목쪽으로 향했다. 연철아... 너도 죽게 된다. 난 여기서 자살하지만 넌 너를 에워싼 저 이데올로기의 허상들에게 난자당할 것이다. 이게 우리 형제의 마지막 모습이구나... 연철이는 그냥 여전히 나를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순식간에 일이 벌어졌다. 정찰조에서 '미군이다'를 소리쳤고, 난 등골이 오싹하면서 모든 세포가 거꾸로 서는 느낌이었다. 미군에 대한 공포로 온 몸이 반응하는 것이다. 순식간에 주위는 아수라장이 되어 나와 연철이를 둘러싸고 있던 공산포로들은 빠르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꿇어앉아 있던 연철이가 급히 일어났다. 아직도 그것이 칼을 빼앗아 나를 공격하기 위해서였는지, 그냥 단순히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는지 알 수는 없다.
그리고... 내가 언제 칼을 뻗었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선피를 쏟으며 반이상 잘려나간 연철의 목이 나에게로 떨구어지던 기억... 그 연철이의 마지막 고개짓... 난 비명을 질렀지만 아무도 내 비명을 듣지 못했고 내 귀에도 그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내가 무슨 짓을 했나... 미군이라는 소리에 모두들 뿔뿔이 흩어질 때도 난 헉헉대며 그냥 멍하니 쓰러진 연철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애국대 동료 한명이 '장동무, 장동무' 하며 나를 강제로 끌다시피해서 막사로 끌고 들어갔다. 뒤를 돌았을때, 내가 찌른 내 동생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사태가 수습된 후에도 연철의 시체를 찾을 수 없었다. 어딘선가 썩어가고 있을리란 처참한 생각이 나를 미치게 했다. 죽어 저승에서 어머니를 무슨 면목으로 만난다 말인가... 내가 신봉하는 유물론대로 결코 저승이 존재하지 않길 바란다. 난 결코 죽어서도 저승에 가지 않을 것이다. 연철이를 포함해 나에게 살해당한 수많은 영혼이, 또한 그들의 아내가, 그들의 어머니가 나에게 울부짓으며 나에게 달려 들 것이 아닌가...
난 내 가슴을 세게 치지만 조금도 아프지 않다. 난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입술을 악 물어 흐르는 피를 삼키지만 아무런 맛도 느낄 수 없다... 한가지... 날이 더워짐에 따라 썪어가는 시체냄새만이 코를 후벼 파고 있다... 그것이 내 몸에 나는 냄새인지도 모른다... 나는 썪어간다... 말을 잃었다. 미쳐버렸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 땅에서 도망가야 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 땅에서 빨리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다 끝났다.
1953년 8월 17일
인도든 어디든 이 땅을 벗어나는 것만으로 족했다. 인도로 간다는 커다란 배에 올라타며 난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 땅엔 사상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제 일기는 쓰지 않겠다. 장연우는 죽었다... 장연우는 포로수용소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이상이 한국전쟁 참전 당시, 내가 쓴 일기의 마지막 부분이다. 그리고 내 손으로 수없이 저질러온 살인의 마지막부분이기도 하다. 전쟁은 끝났고, 50년이 흘렀지만 아무 것도 변한 것은 없었다. 난 결국 브라질인도, 스위스인도, 조선인도 되지 못했고, 여전히 내가 돌아갈 땅은 없다.
다만, 나의 딸, 소피가 남도 북도 아닌, 공동경비구역 J.S.A 로 돌아갔다...
2001:2:05
난 단지 76인의 제 3국행 포로 중 누군가의 자손이 남한으로 돌아와 겪는 이야기를 중편소설로 써보려고 하고 있었다. 1994년, 난 23살이었고 신춘문예 예심도 한번 통과해보지 못한 작가지망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이라는 기막힌 공간이 눈에 띄었다. 다른 작가들이 지난 50여년 동안 별로 손대지 않았다는 사실이 충격적일 정도로 그곳은 매력적이고, 또한 비극적이며 드라마틱했다. 습작을 하면서 추구했던 주제는 인간의 자유로운 의식을 통제하는 시스템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것을 구현할 최적의 장소를 찾은 셈이었다. 군대경험도, 판문점에 가본 적도 없었지만 난 용감하게 매달렸고, 몇 번의 우여곡절 끝에 장편소설 'DMZ' 가 세상에 나왔다.
이후, 김훈 중위 사건이 터졌을 때는 예언자 취급을 받기도 했고, 영화화가 되면서는 원작자라는 말로 나를 소개하는 일이 많아졌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는 훌륭했다. JSA의 마케팅팀장은 영화를 보고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어떤 작가주의 영화는 스크린에 감독만 보이고, 어떤 코미디영화는 개인기가 뛰어난 한 배우만 보이곤 하는데, 우리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는 감독을 비롯한 전 스탭에, 각각의 배우의 연기, 제작사의 기획력까지 모두 살아움직이는 것이 보인다는, 그녀의 자평같은 것이었다. 사실 그랬다. 영화는 감탄할만큼 잘 나왔다. 미디어들의 찬사는 과장 없는 진실이다.
각색작업 중에 모니터링을 하면서 일부 참여했었는데, 난 매체의 차이를 분명히 인정했고 원작자로서의 딴지를 거는 일을 하지는 않았다. 박찬욱 감독님이 주인공을 여자로 바꾸자고 했을 때도, 난 서둘러 감독님의 편을 들었다. 지난 반세기동안 반복되어온 폭력과 갈등이 남성성이라면 그것을 중간에서 바라보고 보듬고 껴안을 수 있는 것은 여성성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서였다. 베르사미의 성(性)이 바뀐 것 외에도 많은 것들이 각색되었다. 원작에는 나오지 않는 '이수혁과 오경필의 대질신문'같은 명장면이나 2부 Security의 세련되고 참신한 공식의 코믹들, 또 글로는 표현해내기 힘든 빛나는 엔딩 스틸은 박찬욱 감독과 정성산,이무영,김현석 작가의 뛰어난 창조적 각색의 훌륭한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쉬움이 남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문학하는 사람으로서 단지 스토리텔링과 이야기구조만을 놓고 생각해보면, 좀 느닷없는 감이 있는 이수혁의 자살에 약간의 장치와 설명으로 설득력을 좀더 부여하면 좋았을 것 같은 생각도 들고, 총알숫자의 퍼즐에서 '단지 습관의 문제'로 사라진 탄환과 제 5의 인물을 추리해내는 과정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하지만 영화의 완성도와 상관없이 내가 이 영화의 원작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남는 안타까움이 있다. 원작에서 분량으로도 절반 가까이 할애한 베르사미의 가족사와 포로수용소 이야기, 그리고 Operant Conditioning 이라는 코드에 관한 부분이다. 이런 부분이 삭제,축소되면서 소설에서 가장 공들여만든 소피(원작에서 베르사미)는 변화하지 않는 캐릭터로 다른 네 명의 인물에 비해 자리매김이 쉽지 않았고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 이영애씨는 또다른 힘겨움이 있었을 것이다.
50년 동안 조금도 바뀌지 않고 계속되어온 증오의 조건반사 "Operant Conditioning" 과 '반복되는 비극'이라는 원작의 주제는 수정되었고, '체제는 우리의 자유의지에 반하는 지뢰를 의식의 기저에 심어놓고 그것이 특정조건하에서 언제든 작동하고 폭발하도록 프로그래밍한다'는 내 목소리가 영화에서 잘 들리지 않는 것은 아쉬었다. 이것은 단순한 냉전적 사고의 해체와는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영화라는 매체에서 같이 가져가기에 여러모로 부담스러웠던 것을 이해하고 깔끔한 구조와 영화의 완성도를 위해 불가피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신 박찬욱 감독님은 '진실을 감추므로써 유지되는 평화의 비극'이 라는 세련된 새로운 주제로 영화를 진행해나갔고 그 성과 또한 충분한 의미가 있다. 어차피 소설 'DMZ'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나 하고싶은 말은 '분단의 부조리'에서 만난다. 수많은 관객이 런닝타임 109분 동안 그에 공감하고 그 외의 시간에 다시 곱씹어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졌다는 것은 정말 뿌듯한 일이다. 그것이 일회성에 그치고 또한 지금의 통일열기나 화해무드가 하나의 트렌드가 되버린다 할지라도 말이다.
마지막으로 내 아쉬움에 위안이 되는 이야기 한토막. 얼마전 술자리에서 원작을 읽지 않은 한 영화인이 북측 초소에 등장하여 사건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최상위의 존재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최상위가 총을 맞고 쓰러지는 것을 보고 정우진에게 무의식적으로 총을 뽑아들게 하는 그 어떤 힘이 무서운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나에게 한 적이 있었다. 영화에도 내 목소리가 살아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게 바로 'D.M.Z'의 주제예요."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신 독자분들,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