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
<2001. 3. 4 성륜사 정기법회>
[4]
우리 마음이 지금 어떻게 상태가 돼있는가.
마음자세에 따라서 우리 그런 생리적인 문제 같은 것도
그때그때 그냥 바로 대응을 합니다.
기분 사나우면 또 기분 사나운 표정이 그냥 나오지 않습니까.
기분 좋으면 기분 좋은 그런 표정이 나오고 말입니다.
우리 몸에 있는 백혈구나 적혈구도
역시 우리 마음이 지금 어떻게 움직이는가,
그것 따라서 불어나기도 하고 또 줄어지기도 한단 말입니다.
이 물질이란 것은
그때그때 순간순간 찰나도
모두가 다 우리 마음에 그냥 반응을 일으킵니다.
즉 대응한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물질적인 우리 몸은
그때그때 변화무쌍(變化無雙)한 것이고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고...
그러나 우리 마음은
과거에도 존재하고 또는 미래에도 죽지 않는단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불생불멸이라,
불생불멸이란 말도 굉장히 심오한 철학적인 말입니다.
낳지 않고 죽지 않는단 말입니다.
나지 않고 죽지 않는 것은
결국은 영원히 있다는 뜻이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 『반야심경』을 그렇게 많이 외시고 하셔도
불생불멸의 뜻을 그렇게 깊이 음미해 보셨습니까?
그냥 지나치게 많이 읽고 그러셨겠지요.
그 불생불멸이라,
나라는 생명이 과거에나 미래에나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있지가 않고서 항시 영원히 존재한단 말입니다.
새삼스럽게 생겨날 것도 없고
또는 새삼스럽게 생겨나지 않았으니
또 죽지도 않는단 말입니다.
낳지 않고 죽지 않는다는 것은 영생한다는 뜻과 똑같습니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에
이 불생불멸을 확실히 믿어버리면
사실은 우리가 무서울 것이 없단 말입니다.
왜 그런가하면
나라를 위해서 우리가 전쟁에 나가 죽는다하더라도
이 허망한 몸뚱이만 그때는 바꾸어지는 것이지
우리 정신은 죽음이 없단 말입니다.
또는 우리가 무슨 일을
남을 위해서 애쓰고 봉사한다 하더라도
봉사하면 몸은 좀 피로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생명자체는 죽음이 없습니다.
봉사하므로 해서 다른 사람과 나의 생명도
본래 생명의 뿌리가 똑같기 때문에
다른 사람한테 하는 것은 바로 자기한테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바로 자기를 돕는 것입니다.
따라서 조금 수고는 스러워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은
그냥 또 그 공이 다 자기한테로 온단 말입니다.
눈에는 설사 그냥 당장에 안 보인다 하더라도
그 영원적인 차원에서는
틀림없이 남한테 베푼 이상으로 자기가 다 받는 것입니다.
그런 도리를 분명히 안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가 봉사 않고
자기 이익만 차리고 그렇게 하겠습니까?
생명의 뿌리가 다 똑같이
저사람 생명이나 내 생명이나 불생불멸하고,
불생불멸한 모양이 없는 것이 생명의 뿌리라고 생각할 때에
내 생명만 불생불멸이 아니라
여기 계신 분들 다 지금 생명이 불생불멸입니다.
따라서 이 모양으로 해서는
몸뚱이 따라 우리 마음도 다르다고 생각할런가 모르겠지만
몸뚱이 같은 모양은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우리 마음이란 것은 원래 형상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자리는 결국은 똑같습니다.
우리 중생은 무지(無智)하기 때문에
무명심(無明心)에 가리워서 잘 모르기 때문에
내 마음은 지금 내 몸뚱이에 들어있는 것이고
저 사람 마음도 저 사람 몸뚱이에 들어있어서
저 사람마음과 내 마음이 지금 다르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 범부심입니다.
범부심인 것이지 이것이 진리의 뜻이 아니란 말입니다.
아무리 지금 미운 사람이 옆에 있다하더라도
그 사람마음과 내 마음이 지금 뿌리에서는 똑같습니다.
작용은 지금 같이 한단 말입니다.
옆에 사람이 좀 미운 짓을 해가지고서
굉장히 미워한다고 생각합시다.
그러면 그냥 미워하는 악념(惡念)이
그 사람한테 전류(轉流)가 됩니다.
이른바 텔레파시(telepathy)가 건너간단 말입니다.
인생이란 것은 근원도리를 안다고 생각할 때는
사실은 참 살기가 수월하단 말입니다.
가급적이면 남한테 좋게 안하려야 안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하면
그 남한테 좋게 하면
그냥 자기한테 그 이상으로 보답이 온단 말입니다.
보답을 바라고 하는 것은 또 그것이 소인이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생명이 하나라는 도리에서
그 자리에서 자유자재로 어느 순간이나 남한테 겸손하고 말입니다.
그 쥐꼬리만 한 권위의식 내지 말고 말입니다.
자기 가족이나 남이나 모두를 위해서 산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마음이 칭칭 묶여있는
그런 계박(繫縛)으로부터서 마음이 풀려갑니다.
우리 마음은 지금 칭칭 묶여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구속이 돼 있습니다.
자기라는 존재가 무엇이건데
존재가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업으로 해서 잠시간 이와 같은 모양을 받았을 뿐이란 말입니다.
또 이런 것이 항시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도 변화무쌍하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드디어는 또 암에 걸려서 죽고 무엇에 죽고,
모다 그야말로 부지불식간에 생로병사를 면치 못한단 말입니다.
불경에 보면
어떤 사람이 죽어가지고 저승에 가서
염라대왕 앞에 갔단 말입니다.
그 나쁜 짓을 많이 해서
틀림없이 지옥으로 그 사람을 보내야 되겠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염라대왕도 보기에 참 안타까우니까
그대를 인도하는데 천사를 내가 세 사람 보냈는데
그대가 그 천사를 봤는가, 이렇게 물어보니까
제가 천사란 분을 한 번도 못 만나봤단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대관절 천사입니까? 그러니까
이른바 늙고[老], 병들고[病], 죽는[死]
이것이 삼천사(三天使)라 그 말입니다.
그 아주 곱던 그런 얼굴 손발 같은 것이 젊어서는 그러지만
금방금방 그것이 이울어지지 않습니까.
마치 꽃이 시들 듯이.
그와 같이 그 늙음이란 것으로 해서
우리가 그걸 깊이 생각할 때는
세상의 무상을 느끼고 함부로 게으름부리고
남한테 해코지하고 또 할 수가 없는 문제 아닙니까.
또는 아프다고 생각할 때는 아파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아플 때는 얼마나 사람이 처량합니까.
처참한 일이란 말입니다.
아프기도 아프고 또 남한테 신세 끼치고
또 돈도 많이 들어가고 말입니다.
그래서 아플 때는
내가 건강에 주의해서 다시 안 아파야 되겠다고 마음먹지만
또 건강해지면 다 잊어버리고서
그냥 함부로 먹고 함부로 행동한단 말입니다.
함부로 먹는 것이 굉장히 우리한테 손해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절대로 함부로 자시지 말으십시오.
함부로 먹는 것이 여러분들이 경험이 부족해서 모르실런가 모르지만
함부로 먹는 것이 우리한테 굉장히 큰 해악을 줍니다.
저는 그 시골이 고향입니다만
시골사람들 지금 제 연갑에서 산 사람들이 별로 없어요.
그 한 20대에 갑계(甲契)를 묻었어요.
갑계원이 한 50명됩니다.
한 50명되는데 지금 고향에 가서 보면
저까지 포함해서 2, 3명 살아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 어째서 그 사람들이 빨리 죽었는가.
그 시골지방이 되어놔서 겨울에는...
지금은 겨울에도 무슨 비닐하우스에다 농작물을 하고 합니다만
옛날에는 겨울에는 할 일이 없지 않습니까.
가마니나 치고 모다 그런 것이라면 모르거니와
그러니까 하여튼 그 주막집에 가서
가축을 추렴하고 도박이나 하고 말입니다.
그러다보면 또 출출하니까
가서 또 고기고 뭣이고 먹어야 되겠지요.
폭주하고 그러니까 그 건강이 배겨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대체로 하여튼 그 50대 60대
위병이 났다 무슨 병 났다 하고 죽는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출가스님네가 안 돼도 좋으시니까,
그 함부로 자시지 말고
정말로 하여튼 자기 몸을 사랑하고
자기 마음을 소중히 안다고 생각할 때는
꼭 음식을 바로 드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많이 드시지 말으시고...
이런 것이 사소한 것 같지만 그것이 부처님 계율이예요.
여러분들 육재일(六齋日)날 아십니까.
하루에 한 끼만 자시고,
8일 14일 15일 23일 29, 30일 이것이 육재일 아닙니까.
육재일 이것은 재가불자가 지키는 날입니다.
이날은 무슨 날인가하면
재가불자들도 하루에 한 끼를 자시라는 것이어요.
남녀 간도 각방 써서 같이 안자고 말입니다.
비록 출가는 못한다하더라도
부처님 믿는 사람들은
우리 출가한 사람들이사 매일매일 다 재일을 지켜야 되겠지만
일반 재가불자는 그렇게 안 되니까
8일 14일 또는 15일 23, 29, 30일.
그날만이라도 하루에 한 끼씩 자시고
또는 음식도 그 고기나 그런 것은 자시지 말고 말입니다.
꼭 출가한 그런 스님 네 같이 그렇게 지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육재일 날이란 말입니다.
마치 지금 기독교에서 주일날 같이
일주일마다 주일(週日)은
바이블 끼고 교회가고 그러지 않습니까.
주일날은 결국은 하나님을 바로 믿는
이른바 맹세의 날이 주일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불교에서는 그것이 없어요.
육재일날도 그냥 그렇게 있는가 만가 그러는 것이고,
이슬람교도도 하루에 다섯 번씩이나
그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에 대해서 꼭 기도를 모십니다.
또 라마단 달이라고해서 9월 달은
해 뜰 때부터서 해 저물 때까지는 다 단식한단 말입니다.
한 달을 온전히 말입니다.
☞ 출처 : 본정 김영동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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