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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신년말씀 제 3 강 메시지_아산UBF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말씀 / 베드로전서 5:1~14
요절 / 베드로전서 5: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1973년 10월 6일 유대교의 가장 거룩한 날인 욤 키푸르에 남쪽에서 이집트, 북쪽에서는 시리아가 동시에 이스라엘을 갑자기 공격합니다. 이스라엘군은 대부분 휴가 중이었습니다. 북쪽의 시리아군은 탱크 1440대로 공격하였는데, 이스라엘군은 177대의 탱크로 막아야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전쟁에서 시리아군이 졌습니다. 이스라엘이 시리아를 상대로 승리한 비결에는 장교들의 솔선수범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장교들은 전술적 이해가 높고 현장 적응력이 좋았던 것 외에도 “Follow me” “나를 따르라” 정신이 투철하였습니다. 시리아군 장교들은 병사들을 앞세우고 후방에서 지휘하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양 무리의 본이 되라”입니다. 지금 여기 있는 분들은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캠퍼스 목자들이고 앞으로 목자 되실 분들입니다. 오늘 말씀이 앞으로의 목자의 길을 밝혀주는 말씀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베드로는 자신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편지를 보내고 있는 자신을 이야기 하여 편지 받는 사람들이 서신의 내용에 집중하고 전하는 바를 행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세 가지 자격을 언급합니다. 첫째는 “함께 장로 된 자”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맡기신 직무가 있습니다. 교회의 리더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며 예수님의 양들을 부탁한 수석 장로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을 다른 장로들과 동등한 동료 장로라 함으로써 겸손한 태도를 보입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공생애 3년간 예수님과 함께 하였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으신 사람 예수님과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의 지극히 높은 신성을 다 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입니다. 셋째 “장차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라 합니다. 그는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그 부활과 재림의 소망을 다른 성도들과 함께 가진 자라고 밝힙니다. 사도 베드로는 권면하는 자신의 영적 권위와 자격을 제시합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 자기를 부각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자기의 인간적인 욕망에 따라 사람들을 통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 받는 성도들이 믿음으로 가는 길을 더욱 힘차게 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 베드로를 포함한 열한 제자들에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분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의 양을 치고 돌보고 먹이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하는 사명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때 목자가 가져야 하는 세 가지 태도를 강조합니다.
첫째가 자발성입니다. 주님의 양을 치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자발적으로 기꺼이 자원하여 감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께서 맡기신 일을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님의 양을 돌보는 것은 예수님께서 맡기신 일이며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며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해서 뿐 아니라 예수님의 다른 양들을 위하여 그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주의 생명으로 산 귀한 양들을 억지로 돌볼 수는 없습니다. 다음으로 주의 양들을 돌볼 때 순수하게 도와야 합니다. 양들의 숫자로 자기 영광 드러내려 하는 것은 더러운 이득을 탐하는 것입니다. 양들을 돌보았다는 실적으로 자기의를 삼는 것 역시 더러운 이득을 추구한 것입니다. 주의 양들, 주의 일을 한 것으로 유명해지려는 것, 그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자기 유익을 추구하는 것 모두 더러운 이득을 추구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교회를 이끄는 리더는 순수한 동기와 목적을 가져야 합니다. 세 번째로 중요한 것은 책임감입니다. 양들은 하나님의 양 무리입니다.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주의 백성들 돌보는 일을 무책임하게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내 일 먼저 하려고 뒤로 미룰 수 없습니다. 주의 양들 돌보는 일 중에서 부담스러운 일, 힘든 일은 거부하고 할 만한 일만 할 수는 없습니다. 주의 양들 돌보는 일은 책임감을 가지고 끝까지 감당하여야 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세상의 리더는 권위적입니다. 세속적 리더십은 위에서 지시하고 듣지 않으면 보복하는 리더십입니다. 리더 자리를 지시하고 지적하는 자리로 이해하는 리더가 세상에는 많습니다. 사실 권력이란 말의 힘입니다. 말 하면 말 하는 대로 사람들이 움직이고 말하는 대로 조직이 움직이고 말 하는 대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권력입니다. 이 권력을 맛 본 사람들이 권력의 달콤함에 빠져 권력을 놓지 않으려 합니다. 예수님께서 크리스천 리더십은 세속적 리더십과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리더십은 종의 리더십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의 리더십을 말로만 가르치지 아니하시고 친히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지시하고 지적하고 명령하기보다 자신이 먼저 행하여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따라서, “본이 되라” 하신 것은 예수님께 배운 것, 그래서 교회의 리더가 양들에게 가르치는 것과 리더의 실제 행동이 일치되게 하라는 말씀이며 자신이 먼저 모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군이 치른 현대전쟁에서 장교들이 많이 전사하였습니다. 그들은 위험 앞에 생명을 내놓고 자신들이 앞서가며 “나를 따르라” 실천함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나라를 구하였습니다. 예전 광주에 소위 임관한 초급장교들과 부사관들이 교육받는 교육기관이 있었습니다. 육군보병학교입니다. 지금은 옮겼는데, 육군보병학교의 슬로건도 “나를 따르라”입니다. 주의 일을 하는 리더는 그 말과 행동이 일치하여야 하며, 양들 앞에 실천으로 먼저 본을 보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삶을 통하여 보여주는 교훈은 중요합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 가까이 있는 소중한 사람을 괴롭히는 어른을 본 자녀들이 똑 같은 삶을 산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그동안 많이 들어왔습니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등을 보면서 자라 아버지의 삶을 따라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므로 조상의 망령된 행실을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따라서 우리도 양무리의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손해가 나는 일에 먼저 본을 보여야 합니다. 희생하는 일에 먼저 본을 보여야 합니다. 수고하고 고난 받고 괴롭고 힘든 일에서 본을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가장 수고하고 가장 괴롭고 가장 힘들고 가장 큰 고난에서 본이 되셨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하나님의 말씀은 명령과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고난 받는 일, 희생하는 일, 헌신하는 일, 괴로운 일, 힘든 일, 어려운 일에서 행함으로 모범을 보일 때 약속이 있습니다. 목자장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영광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본을 보이는 목자,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리더에게 예수님께서는 친히 영광을 주십니다. 이러한 상급은 최후의 상급으로써 종국적으로 세상을 심판하는 날 만왕의 왕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보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모든 것이 빨리 오가는 세상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우리는 말세에 얻게 될 최후의 상급을 미리 맛보는 기회를 얻습니다. 솔선수범하는 리더, 양들의 유익을 위하여 자기를 앞장서서 희생하여 본을 보이는 리더를 이용해 먹기만 하고 아무런 보상을 주지 않는 그런 조직이 제대로 서겠습니까? 망하는 조직, 망하는 기업, 망하는 학교는 그렇게 합니다. 조직이 망하지 않고 서려면 그런 리더를 귀하게 여깁니다. 기업이 망하지 않으려면 학교가 문을 닫지 않으려면 그런 리더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주어야 합니다. ‘대학 다니는 동안 섬김을 배웠다’는 서울 어느 센터 목자를 모든 면접위원들이 환영하고 다른 기업에 가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더라는 예를 제가 예전에 소개했었습니다. 이제 기업은 개인의 성과 뿐 아니라 조직 내에서 상하관계, 수평적 동료관계가 돈독한 사람을 귀하게 여깁니다. 말만 하고 희생하기 거부하는 사람, 힘든 일 어려운 일을 아랫사람이나 동료들에게 미루고 빠져나가는 사람을 식별해냅니다. 권고사직 대상입니다. 그런 사람이 설 자리는 이 땅에서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민주화되고 빨리 오가는 세상에서 지금 우리는 장차 받을 영광이 어떠할지 미리 맛볼 기회가 많아진 것입니다. 희생하는 일에 본이 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다. 헌신하고 고생하는 일에서 솔선수범하는 것은 자기혼자 수고하고 어려워지는 길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을 점점 더 알아보고 존중하고 보상하는 기업들 학교들이 늘고 있습니다. 이런 수고와 헌신에 따른 보상은 장차 우리가 받을 영광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이야말로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보상이며 영광입니다. 우리의 모든 수고와 그에 따른 눈물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게 할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젊은 자들은 단순히 나이가 어린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장로들에 비할 때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세대 간의 질서와 존중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젊은 사람들을 향하여 강조하는 것은 겸손입니다. 청년의 시기에 갖기 어려운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이 가져오는 선물이 아주 많음에도 불구하고 청년은 그 큰 선물을 동반하는 겸손을 쉽게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젊음은 안타까움이 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장로들을 존중하는 것은 현실적인 유익이 큽니다. 장로들은 많은 세월을 보내면서 주의 능력을 많이 체험하고 은혜도 체험한 분들입니다. 장로들은 성공의 경험도 있고 실패의 경험도 있습니다. 그런 경험들이 그분들의 인생에 축적되어 있습니다. 교육중에서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교육이 시행착오를 통한 교육입니다. 장로들에게 존중과 순종을 주면, 젊은 사람들은 장로들로부터 많은 교훈과 지혜를 전수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다 겪어서 배우려면 아주 많은 비용이 드는 것들을 시행착오없이 과도한 비용 없이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청년시기 큰 센터에 갔을 때, 그 센터 많은 목자들이 말씀공부 시간에 손을 놓고 있거나 코후비고 졸고 딴 짓하는 사람들이 꽤 보였습니다. 그 큰 센터 목자님은 4년동안 성서문학을 전공하였습니다. 힘들게 밑바닥부터 개척도 하였고 불과 50명도 안 되는 센터를 몇 배로 성장시키기도 하였습니다. 평소 끊임없이 독서량도 많았습니다. 존중하는 마음 한 가지를 품고 열심히 말씀공부 시간에 잘 받아적었습니다. 실제 기도모임 메시지 수양회 메시지 지적도 적극 수용하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저의 아들과 딸이 국제수양회에 갔더니 저도 알지 못하는 분들이 아산센터 메시지를 열심히 보고 있다고 하더랍니다. 서휘현 목자가 시카고 갔을 때, 거기서도 아산센터 메시지 읽은 선교사님들이 와서 인사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청년은 배울 때 그 가능성과 역량이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앞선 목자들로부터 배우는 청년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겸손은 망하는 길이 아닙니다. 청년들이 겸손을 힘들어 하는 것은 겸손해지면 그대로 낮은 자리가 자기 자리로 고정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청년이 겸손을 꺼리는 것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사람들로부터 존중받지 못하면 그대로 존중받지 못하는 곳에 자신이 고정될까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낮은 자리, 인정받지 못하는 자리, 존중 받지 못하는 자리에 겸손한 사람이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높여 줄 사람, 그 영광을 선물해줄 사람을 찾으십니다. 겸손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높여 주는 선물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영광 얻는 은혜를 체험하게 하십니다. 우리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겸손’은 인간성 차원이 아니라 “믿음”차원에서 다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신뢰’에서 ‘겸손’이 실행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청년의 특징 중의 하나가 장래에 대한 염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은혜의 주권으로 청년들의 삶을 돌보십니다. 스스로 낮아진다고 해도 그대로 비천한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됩니다. 염려는 대부분 실현 가능성 없는 것이 많습니다. 염려의 대안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을 믿고 의지하는 청년들의 장래를 반드시 책임져 주십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절도 함께 보겠습니다.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고난 겪는 성도들에게 보이는 것은 핍박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어려움 주는 사람들, 고통 겪게 하는 로마제국의 정치시스템이 눈에 보이는 실체로 느껴질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면의 실체를 인식할 것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분별하고 유의하여야 하는 것은 영적 전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영적 전쟁이 실재하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어렵게 하는 것은 마귀입니다. 마귀의 속성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두려워하고 피해의식 느끼고 고립감 느끼며 마음과 영이 약해질 때, 마귀는 절망과 낙심을 더하여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참고 인내하는 길, 겸손하게 은혜를 구하며 기다리는 일을 중단하게 합니다. 이런 마귀를 대적하여야 합니다. 고난은 주를 믿는 신자라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고난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마귀를 대적하는 구체적인 방법과 내용은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믿음, 하나님께서 주를 찾는 자들에게 반드시 상급 주신다는 믿음을 굳건하게 유지하여야 합니다.
10, 11절을 보십시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주 예수님을 따르는 주의 제자들에게 모두가 고난이 주어지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있어서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에 주의 자녀들, 예수님을 배우고 뒤따르는 제자들을 들어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택하신 자들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사랑하시는 자들의 마음과 영혼을 강건하게 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세운 교회의 터를 견고하게 해주십니다.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며 이 약속을 이루시려는 목적으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일시적인 것이며 영광은 영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온전함과 굳건함과 강함과 견고함을 주십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이 말씀을 통해서 편지 전달자가 실루아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실루아노가 전하는 편지는 각 교회에 도착하여 모든 사람들이 듣도록 소리 내어 읽었고 성도들은 함께 들었습니다. 이 편지는 소아시아 지방의 여러 교회들에 전달되었으며 각지에서 고난 받던 교회들은 서로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13, 14절을 보십시오.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바벨론에 있는 교회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은유적으로 지칭하는 말입니다. 로마교회와 소아시아지역에 있는 교회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로 같은 믿음 같은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 이름으로 인하여 이제는 함께 고난 받는 주 안의 형제들입니다. 지금 아프리카에 있는 센터들은 하루에 전기 들어오는 시간이 제한적입니다. 안심하고 마실 수 있는 물도 부족합니다. 이런 형제들에게 사랑으로 선물을 보내고 전기 쓸 수 있도록 도와주고 맑고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헌금할 때, 형제애는 실체가 됩니다. 형제 사랑이 먼 거리를 뛰어넘어 실재하는 사랑으로 서로를 연결하여 줍니다. 마가는 사도 베드로의 헬라어 통역 을 맡으며 함께 하였던 마가복음의 저자 요한 마가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연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많았으나, 주의 은혜 아래 강건하여져서 세계선교의 동역자요 고난에 함께 하는 주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 편지가 쓰여 지던 때는 네로 황제의 통치 시기였습니다. 서기 54년부터 로마를 다스리기 시작한 네로는 서기 64년부터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에 따라 로마의 지방 총독들도 기독교인들을 탄압하는 일이 증가하였습니다. 유대교 회당에서 함께 예배드렸던 기독교인들이 회당에서 유대인들로부터도 쫓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도들의 순교가 시작되는 시기였으며 사회적 차별과 경제적 불이익은 일상적이었으며, 잘 모르는 이방인들은 기독교인들이 사람의 살점과 피를 마시는 사람들이라 오해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문제의 근본은 로마제국에 있다며 반란에 많이 가담하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사도 베드로는 교회의 리더들이 고난 앞에서 솔선수범할 것을 강조합니다. 지도자들을 신뢰하며 젊은 자들이 교회와 지도자의 권위를 존중하고 질서 지킬 것을 가르칩니다.
교회가 고난의 강을 건너가는 가장 큰 힘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하나 됨은 먼저 위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장로들이 가르치는 것과 삶을 일치시켜 솔선수범하는 지도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청년들은 이와 같이 고난 중에도 겸손하며 앞장서서 주의 가르침대로 순종하는 목자들을 존중하고 본받아 나가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의 권면대로 교회는 고난 속에 서로 흩어져 있었으나, 주의 가르침대로 순종하였고 고난을 인내하였으며, 겸손과 존중으로 안으로 하나가 되고 교회들끼리도 서로 연결되어 그리스도의 이름을 드러내었습니다. 하루 이틀 이렇게 하지 않고 250년 간 이렇게 하였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교회 모습을 보고 핍박과 박해 가운데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돌아왔습니다.
우리 아산UBF는 그동안 새로운 형제들이 계속하여 오는 센터로 지내왔습니다. 개척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그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생명력 있는 제자양성 역사가 몇 년 후 개척하고 자립할 남서울대 센터를 중심으로 천안 북부 여러 캠퍼스에서 이전보다 더욱 활발하게 지속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김사무엘 목자의 기도대로 순천향대 센터를 중심으로 아산 서쪽의 여러 캠퍼스에서 새롭고 큰 생명 역사가 지속되기를 기도합니다.
그에 앞서서 우리의 각 캠퍼스에 솔선수범하여 먼저 고난 받는 영적 지도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먼저 희생하고 먼저 헌신하며 앞서 나가는 예수님 닮은 목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고난에서 본이 되는 목자들이 주의 영광 얻는 일에도 본이 되어 주의 고난을 사랑하는 일에 모든 후배들과 청년들이 확신으로 따르고 함께 하는 역사가 지속되기를 기도합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고난 받는 청년들에게 복 주시는 하나님, 주 예수의 이름으로 헌신하고 희생하는 일에 앞장 서는 목자들에게 부활의 영광을 체험하게 하시는 주 하나님의 이름이 높이 드러나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산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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