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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손대 좌측 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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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갈맷길은 부산을 상징하는 갈매기의 길로서 시민공모를 통해 선정된 이름이다. 칠백리 어느 구간이든 걸어 본 사람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현재 갈맷길은 기장 월내에서 가덕도까지의 ‘해안 갈맷길 7백리’와 함께 제2회 갈맷길축제를 통해 선보였던 ‘사포지향 갈맷길 200리’를 포함해 21개의 코스가 있다. 갈맷길 중 특히 추천하고픈 구간 중 하나가 감천(감내포)에서 다대포까지의 부산 남서부 해안 비경 길이다. 이 길은 부산 해안지형의 백화점으로 불릴 만큼 다양한 경관을 펼칠 뿐 아니라 역사탐방의 동선 역시 뛰어난 곳이다.
발은 감천사거리. 남부발전(구 화력발전소) 담벼락을 따라 이동한다. 예전에 불미골로 불렸던 감천은 공업도시 울산보다 앞서 공해의 아픔이 서린 곳으로, 전후 피란민이 몰려와 세운 판잣집이 천마산 자락을 빼곡히 채웠고 아직도 그 흔적은 뚜렷하다. 사진작가 최민식 이후 이곳은 출사지로 전국에 이름나 있다.
여러 영화 촬영한 명소 감천항
근래 감천항은 영화 촬영지로 알려지고 있다. 여기서 드라마 ‘타짜’, ‘히트’를 비롯해 영화 ‘사생결단’, ‘님은 먼 곳에’ 등을 찍었다.
부두길이 끝나는 곳에 YK스틸이 있다. 예전에 한보철강이 있던 자리다. 이 일대는 조선시대 초부터 만호영(萬戶營), 즉 서평포진(西平浦鎭)이 설치된 군사상의 요충지였고, 독지장(禿旨場)이 열렸던 교역의 중심지였다. 서평포는 해륙(海陸)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왜병과의 전투는 치열했을 것으로 추측되나, 그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이순신 장군이 왜선 9척을 깨뜨렸다는 전사가 전한다.
구평 삼거리에는 수령 200년 가까이 되는 회화나무 한 그루가 감천항 도로개설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지키고 섰다.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나무가 훼손당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며 주민들이 결사반대로 지켜낸 개발시대의 상징목이다.
회화나무에서 한국전쟁 당시 고아들이 있던 성화원길을 5분 정도 오르면 비포장길이 열린다. 장군반도와 두송반도(頭松半島)가 나란히 바다를 향해 경주하는 장면을 연상하게 만든다. 승학산에서 봉화산을 지나 남쪽으로 뻗어 내린 두송반도는 해발 95m에 불과한 구릉형 산지다. 조선시대 병선을 만드는 재료를 조달하기 위한 경상좌우영 관할의 봉산으로 다대8경 중의 하나인 두송만취(頭松晩翠)의 무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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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몰운대 꽃지해변으로 가는 낙조대 데크길, 2 다대만의 동쪽 낫개와 다댓개 사이에 돌출된 언덕인 야망대. 예전에 멸치떼를 살피고 바라보는 곳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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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대포 일원과 감천항내 암남공원과 두도의 풍광을 수시로 조망하며 걷는다. 숲은 소나무숲에서 참나무숲으로 천이 중이다. 두송반도의 끝 지점인 헬기장까지는 약 1km 거리로 폭 1.5m의 오솔길이다. 길은 구불구불 사행이며 숲지붕이 있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아늑하다.
오솔길 끝 작전도로를 따라 헬기장에 이른다. 거기 해안절벽 뛰어난 풍광을 간직한 두송대(頭松臺)가 있다. 몰운대에서 암남공원 태종대에 이르는 해안의 좌우측이 좌청룡 우백호처럼 버티고 섰는데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 많은 시인묵객은 어쩌다 이곳을 못 보고 지나쳤던가. 탁 트인 개방감에 거대한 공룡의 발톱처럼 바다를 움켜쥐듯 형성된 해식대로 흰 거품을 물고 작열하는 파도의 몸짓이 일대 장관이다. 거기다 다대포만 쪽으로 화손대 끝과 솔섬 너머 낙동강 하구의 사주가 전혀 새로운 얼굴로 다가선다.
다시 작전도로를 따라 다대2동 쪽 국제여객터미널로 이동한다. 길 좌우로 제법 키를 자랑하는 곰솔이 어둑하니 섰다. 그 길을 따라 4~5분 거리에 군부대 입구가 있다. 2차 갈림길까지 약 1.39km 이동한 다음 거기서 좌회전하여 1km 정도를 산허리를 타고 돌아서 내리면 국제여객터미널 입구와 만나게 된다. 이 길 또한 매력적이다. 다대포 해상에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이 다가 선다.
사하구는 부산에서 가장 많은 섬을 품은 곳이다. 그중에서도 다대포 일원에 집중되어 있다. 가장 가까이 거북섬으로 불리는 무인도인 금문도와 함께 가장 멀리 부산의 최남단 남·북형제섬을 비롯해 몰운대 앞의 동호섬과 동섬, 모자섬, 팔봉섬, 화손대 앞의 모자섬(경도) 그리고 다대팔경 중 삼도귀범(三島歸帆)의 무대인 솔섬과 오리섬, 쥐섬(鼠島)이 죄다 다대포 일원에 흩어져 있다. 다대포와 두송반도의 풍광에 맛을 더하는 이 섬들을 이 길에서 조망할 수 있다. 이 섬들이 없었다면 다대포는 얼마나 허전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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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갈림길에서 국제여객터미널까지는 30분이면 도착한다. 하지만 이 길이 보여주는 풍경 또한 예사롭지 않다. 고개를 넘나들던 사람들이 낸 오솔길로 3분 정도 내리막에서 뒤돌아보면 길은 고개로 향해 좁다랗고 긴 S자 형태로 나 있다. 그 장면에 시선이 머문다. 그 풍경은 누구라도 담고 싶은 장면이다. 그렇다고 아무 때나 이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체로 늦가을에서 이른 봄까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특별 이벤트다.
그렇게 풍경과 하나가 되고 난 뒤 산자락을 두어 번 감돌다 야망대와 연해 있는 낫개와 대선조선의 선박 건조를 한동안 구경한다. 다대만 쪽 두송반도의 오른쪽 해안을 매립해 들어선 대선조선은 한 척의 거대한 선박이 건조되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아이들과 소풍삼아 온다면 현장학습으로는 그만이다. 거기다 데크를 따라 내려서면 거기 중생대말 백악기의 오랜 지질사를 읽을 수 암반지대를 만난다. 국내에서는 칼크리트(석회질단괴)가 여기처럼 다양하게 나오는 곳은 없다고 하니 새삼 각별해진다.
다대팔경도 가진 진정한 포구 다대포
다대포로 향한다. 다대포는 부산포 이전 부산을 대표하던 포구였다. 다대포(多大浦)라는 지명도 크고 넓은 포구라는 지명이다. 지난 2002년 다대국제여객부두에는 북한의 만경봉호가 미녀응원원단을 태우고 와서 보름 남짓 정박했다.
야망대로 향한다. 야망대(夜望臺)는 다대만의 동쪽 낫개와 다댓개 사이에 돌출된 언덕을 말한다. 예전에 멸치떼를 살피고 바라보는 곳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곳이다.
다대지역의 어로철은 보통 음력 3월 초순부터 시작한다. 4월 말까지 젓갈용인 봄멸치를 잡는 시기이며, 5~6월은 작은 멸치가, 추석 전후에서 11월까지 가을 멸치가 잡히고, 12월에 철망했다. 어로철이 되면 경험이 많고 고기떼를 식별할 수 있는 어로장이 해질 무렵 야망대에 올라 멸치떼가 몰려오는지 관망하다 고기가 몰려오는 징조가 있으면 작은 배를 타고 나가 확인 후 징을 쳐 동네사람들에게 알렸다. 그때 불렸던 노래인 다대포 후릿소리는 오늘날 부산시 무형문화재 7호로 지정되어 전승·보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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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늘 소란스러운 다대항. 포구로서 기능을 넘어 국가항으로 일대의 어패류의 집산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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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망대는 다대팔경 중의 하나인 야망어창(夜望漁唱)을 노래한 곳이기도 하다.
포구로 넘어 가기 위해 해수찜질방 안으로 들어가 석축 계단을 오르면 옛 포구마을 골목이 나온다. 윤공단(尹公壇)으로 향한다. 다대초등학교 방향 5분 거리에 있다. 윤공단삼거리에서 육교를 건너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있다.
윤공단은 동래 송상현 장군, 부산진 정발 장군, 그리고 다대포 윤흥신 장군을 일컫는 부산 3단(三壇) 중의 하나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첨사 윤흥신 장군의 충절을 기리고자 세웠으나 그 시기는 훗날(영조 37) 1761년 경상 감사 조엄에 의해서였으며, 5년 뒤 다대첨사 이해문이 객사가 있던 지금의 다대초등학교에 세웠다.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뒤 다대진을 공격하자 윤홍신 장군은 동생 흥제와 군관민을 이끌고 왜적과 대치하다 장렬히 전사했다. 파죽지세로 조선을 유린한 왜군이 실은 다대포전투에서 첫 패배를 했다는 기록이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어쨌든 이를 기리기 위해 매년 음력 4월 14일 제사를 지낸다. 계단 오른쪽에 다대진(지금의 사하)에서 목민관을 지낸 참사며, 관찰사 등의 불망비며 선정비 11기가 서 있다.
그런데, 정말 선정을 베풀었을까. 오히려 다대포 사람들이 칭송했던 이는 따로 있다. 길 건너편 원불교 다대교당 뒤편에 있는 절충 한광국의 구폐불망비(久廢不忘碑:폐습을 구제한 것을 잊지 못함)가 그것이다.
지금도 남해안 바닷가 어촌 마을에서는 신년 다례를 정월 초하루 아침에 지내지 않고, 섣달 그믐날 저녁쯤에 지내는 세시풍습이 남아 있다. 어민이 천역에 종사하던 천인의 신분으로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고종 때 한광국은 이 같은 어민에 대한 처우가 부당함을 제기하고 해소하기 위해 한양을 7차례 오르내리며 개선하고자 했다. 요즘 말로 하면 ‘인권운동가’였다. 고종은 그의 애민정신을 수용해 해면(바닷사람의 천민 면제)을 윤허하고 어민이 상민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한편 진사 벼슬을 내리고 다대 일원에 토지를 하사했다.
다대포 매립을 끝까지 막아낸 현명한 주민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어민들이 그의 묘지 앞에 그의 업적을 기리는 ‘진사 한광국 구폐불망비’를 세웠으나, 전국 각 항, 포구 어민 모두가 입을 모아 “일부 어민들만의 일이라고 할 수 없다”며 엽전 한 닢씩 갹출해 다대포 입구(다대포 현대아파트 길 건너편 해송아파트 자리)에 비각을 짓고 공덕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절충 한광국 구폐불망비’라 했고, 뒷면에는 ‘융희 2년 무신 4월 각 포민 개립’이라 새겼다. 따라서 기존의 흔해빠진 불망비와는 차원이 다른 비석이다. 안타깝게도 불망비는 도로공사와 아파트 건설로 허물어져 방치되다 현재의 위치에 있다.-
- ▲ 두송반도의 끝 두송대 멀리 낙동강하구와 다대만의 풍광이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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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다대포구로 향한다. 갯내음이 몰려온다. 부산에 허다한 포구가 있지만 시가지 주변은 거의 쇠락해 다대포만이 포구답다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늘 포구다운 활력과 싱싱함을 내뿜는 곳이다. 중소 규모의 수리조선소를 비롯해 선창에는 갓 잡아 올린 어패류를 싼 값에 살 수 있는 시장이 서기도 한다.
부덕수산 끝에서 우회전해 자유아파트 105동 모퉁이를 돌아 옛 다대해수욕장으로 1.5km를 이동한다. 원모텔 모퉁이에서 죄회전하면 솔섬과 화손대 사이의 만을 이룬 해안이 수평선을 펼치며 반긴다.
한때 이 바다가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 항만개발을 이유로 제1해수욕장을 비롯해 몰운대 끝에서 소각장까지의 해안을 매립하려는 계획 때문이었다. 1995년에 지역민의 반대로 한 차례 백지화된 이후 2000년 다시 매립계획이 알려지자 지역이 발칵 뒤집어졌다. 환경단체와 지역민이 하나가 되어 다대포매립반대공동대책위가 결성되었고 2년여의 싸움 끝에 계획 백지화를 이끌어 냈다. 이를 영원히 기념하고 경계하기 위해 다대포해수욕장 입구에 매립백지화 기념비가 이듬해 세워졌다. 다대포가 가진 저력이었다. 그것은 다대포 일원이 간직한 자연을 지키고 싶어 했던 시민의 성원이기도 했다.
몰운대(沒雲臺)와 다대포해수욕장은 그 상징이다. 예부터 시인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몰운대는 해운대, 태종대와 더불어 부산 3대(三臺)의 한 곳으로 칭송받던 곳으로 그 이름이 말해 주듯 안개가 자욱한 날이면 구름 속에 빠진 듯 선경으로 다가서는 곳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푸른 게가 양 집게발을 벌리고 있는 형상이다. 왼쪽 집게발 끝은 ‘화손대(花孫臺)’, 오른쪽 집게발 끝에는 ‘장운대’가 있다. 장운대가 있는 곳은 현재도 군사지역으로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몰운대는 몰운섬을 이루고 있는 해발 78m의 구릉에 가까운 몰운산 전체를 지칭한다. 산정 부분이 둥그스름한 종순형으로 되어 있고 사면 또한 완만하나 산기슭의 끝부분은 낭떠러지 단애를 이루고 있다. 산 전체가 짙은 송림으로 덮여 있고, 이 때문에 몰운산은 두송산, 금티산과 함께 조선시대에는 경상좌수영 관할의 봉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전체 일주 거리는 4.1km로서 속속들이 발품을 팔아도 후회 없는 풍광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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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임도에서 두 번째 갈림길 이후 만나게 되는 오솔길. 원래 동백숲이었으나 시나브로 사라졌고 최근 새로이 심어 옛 명성을 회복하고자 한다. 2 끝간 데 없이 펼쳐진 다대포해수욕장. 지평선 너머에 1,300리를 흘러온 낙동강이 해산을 하느라 파도가 날을 세우고 달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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횟집촌을 뒤로하고 몰운대 입구 군부대에서 좌측으로 꺾어들면 화손대로 이어간다. 다대팔경의 한 무대인 삼도귀범(三島歸帆: 쥐섬, 고리섬, 솔섬-삼도 사이 만선으로 돌아오는 돛배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는 풍광이 펼쳐진다. 전망대로 향하면 동호섬과 목도, 쥐섬과 동섬이 펼쳐진 해안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몰운관해(沒雲觀海)와 화손낙조(花孫落照)를 볼 수 있다.
다대포 객사로 이동한다. 현재 부산에서는 유일하게 남은 객사 건물로 역사적 가치와 의미가 높은 건물이다. 해수욕장으로 향하는 송림길에 동래부사 이춘원이 선조 40년에 지은 몰운대 시비가 있다. 매번 느끼는 바지만 절경에 걸맞은 시라, 소리 내어 읽음으로써 호연지기를 품어 본다.
호탕한 바람과 파도는 천만리로 이어지고
[浩蕩風濤千萬里]
하늘가 몰운대는 흰 구름에 묻혔네
[白雲天半沒孤臺]
새벽바다 돋는 해는 붉은 수레바퀴
[扶桑曉日車輪赤]
언제나 학을 타고 신선이 온다
[常見仙人賀鶴來].
해수욕장으로 내려선다. 이곳은 이 땅의 또 다른 땅끝이다. 백두산에서 시작된 백두대간 줄기가 낙동정맥을 따라 영남알프스군의 가지산도립공원을 타고 내리다 금정산맥을 통해 이곳 몰운대를 끝으로 한반도 육상생태계의 끝을 맺는다. 한편으론 낙동강 1,300리의 종점으로 민물과 짠물이 몸을 섞는 곳이다.
지평선처럼 펼쳐진 백사장은 끝간 데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저물녘 그 하늘이 붉게 물든다. 날이 흐려도 좋다. 해무가 사람의 세상이 아닌 듯 착각하게 만든다. 특히 겨울 수천 마리의 민물가마우지떼가 편대를 지어 오륙도(五六島)로 이동하는 장면은 평생을 기억할 압권이다. 여기에 해수욕장 입구 횟집에서의 소주 한잔은 여독을 푸는 데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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