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새해 첫 기고문입니다.
모두 복 많이 받으시고 하는 일마다 잘 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 이 기고문은 12월 중순에 쓴 글입니다.
계엄의 악몽
이인규/소설가
1979년 10월 26일, 박 대통령이 사망하자 다음 날,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그런 후 그해 겨울, 신군부에 의해 12.12 군사 반란이 발생하였다. 이게 내가 처음으로 맞이한 비상계엄이었다. 그때 나는 고2였는데, 다니던 학교가 부산, 영도에 있었다. 방과 후 집으로 돌아오는 70번 버스에서 본 남포동, 광복동 인근의 계엄군과 장갑차, 탱크 등은 현실적이지 않았고 마치 영화촬영장에 세워 둔 세트 같았다.
아마 12.12 군사 반란 전후로 기억된다. 학교 선생님과 부모님은 방과 후 절대 사람 많이 모인 곳으로 가지 말라고 당부하였지만, 나를 비롯한 친구들은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리는 시내에 가고 싶었다. 목적지는 남포동 먹자골목 끝에 자리한 일명 ‘찌짐집’이었다. 막걸리와 파전, 빈대떡을 주로 파는 이 골목은 고등학생이 아니라고 우기면 어물쩍 넘어가는 곳이라 가끔 친구들과 이용한 집이었다. 그날도 학급 친구 너덧 명과 약속한 터라, 나는 학교가 파한 후, 얼른 집에 와서 당시 은행원이었던 형님의 양복을 걸치고 짧은 머리를 감출 아버지의 중절모를 쓰고 시내로 나섰다.
집이 있는 초장동에서 걸어서 시내로 나온 나는 광복동 부영 극장 앞으로 지나치는데 여기서 사달이 났다. 탱크 앞에 늘어서 있던 계엄군 중 장교 한 명이 길 가던 나를 위협적으로 세운 것이다. 그는 어리둥절해 있던 내게 학생이냐고 물었다. 당황한 나는 그렇다, 하고 말했는데, 그는 내가 대학생인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그는 다짜고짜 내게 학생증을 요구했다. 그때만 해도 불량기는커녕 순전했던 나였기에 나는 순순히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 학생증을 내밀었다. 그러자 흥분한 그는 “대학생도 아닌 고삐리 새끼가 양복에 중절모까지 쓰고 어디에 가냐?”고 몰아세웠고, 나는 머리를 굴리다가 “친구 만나러 빵집에 간다.” 하고 말하였다. 그런데 이 거짓말을 어떻게 눈치채었는지 그는 다짜고짜 내 뺨을 때리며(그 덕분에 안경이 날아갔다), 나를 위장한 불순 분자로 몰면서 한 떼의 계엄군을 불러서 연행하려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추운 날, 시민들은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으며 즐거워하는데, 자신들은 생면부지의 땅에서 근무하는 게 불만이던 일단의 계엄군들을 장교의 말에 단번에 내게 다가와서 무작정 때리기부터 시작했다. 그런데도 나의 비명과 그들의 고성, 욕지기가 난무한 현장에서 시민들은 말리기는커녕, 이 일에 휩싸일까 봐 본 척도 하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피해 갔다.
어쨌든 극장 뒷골목에 끌려간 나는 이 위험천만한 난리에 혹 개 맞듯이 맞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모골이 송연했다. 과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계엄군 중 한 명이 내게 엎드려뻗쳐를 시켰다. 그리곤 군홧발로 날 차기 시작했다. 그때 난 죽는 줄 알았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났다. 마침 버스에서 내려 목적지로 향하던 친구 두세 명이 이 장면을 목격한 모양이었다. 공부는 별로지만, 당시 용감했던 친구들은 그야말로 전광석같이 계엄군을 몸으로 밀어내고 날 구출해 낸 것이다. “튀어!” 하는 말에 평소 학급에서 달리기 꼴찌이던 나는 죽을힘을 다해 달렸고 결국, 그 친구들과 목적지였던 ‘찌짐집’에서 극적으로 만났다.
이듬해 5.17일에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였고, 다음 날 5.18일에 민주화 운동이 광주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43년 만에 이 정부 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이 땅의 국민과 야당 그리고 일부 여당이 항거하여 탄핵을 가결하였다. 2024년 12월 3일, 아내의 생일이던 그날 우리 부부는 시골 중국집에서 포장한 짜장면 두 그릇을 먹고 편안한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이었다. 그때 느닷없는 비상계엄 사태를 TV에서 생생하게 보던 나는 무려 43년 전 남포동 계엄군에게 두들겨 맞던 트라우마를 떠올렸다.
이번 비상계엄 전 과정을 모두가 똑똑히 보았으니 특별히 언급은 하지 않겠다. 다만 올해 교수들이 뽑은 ‘도량발호(跳梁跋扈 : 제멋대로 권력을 부리며, 함부로 날뛴다)’라는 사자성어로 대신한다.
이인규
- 2008년 경남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 작품집 : 장편소설 '사랑과 절망의 이중주' 등 다수
- 음반집 : 보헤미안 영혼을 위한 여덟 곡의 랩소디(창작곡 '비와 그대' 등 8곡 수록)
*신간(2024.12) : 이인규 장편퓨전웹소설 시리즈 3
- K-교도소 생존자 구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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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짐승의 숫자 6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