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눈으로 보지 않아도 많은 걸 알 수 있는 순간이 있습니다. 최근 베트남에서 겪은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27일 저녁이었습니다. 별일 없이 집 소파에 앉아 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순간 난리라도 난 것처럼 아파트 단지가 들썩하더라고요. 바로 촉이 왔습니다. 허둥지둥 리모컨을 찾아 티비를 켰어요.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시리아와 8강에서 만난 베트남 23세 이하(U-23) 축구대표팀이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에서 연장 승부를 벌이다 골을 넣은 것이었습니다. 이내 경기가 끝나고 이후 분위기는 말이 필요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사는 단지는 아파트 정문에서 꽤 안쪽이라 웬만하면 거리의 소음이 거의 들리지 않는 지역입니다. 그런데도 그날은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뿌뿌'하는 경적 소리가 인상 깊게 들리더군요. 예상대로 이날 베트남은 또 한번 뒤집어졌습니다. 베트남 국기는 '금성홍기'라고 불립니다. 빨간 바탕에 노란 별이 그려져 있는 구조지요. 베트남 현지 매체는 베트남 거리가 빨간색과 노란색으로 뒤덮였다고 묘사했습니다.
이전까지 베트남 축구대표팀이 아시안게임에서 거둔 최고 성적은 16강이었습니다.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과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서 이 같은 성과를 거뒀지요. 그런데 토너먼트에서 두 번이나 더 올라가 4강 진출을 이뤘으니 베트남이 난리가 난 것입니다. 다음날 베트남 신문을 보니 1면에 온통 축구 얘기뿐이더라고요. 현지 매체 'VN익스프레스'는 박항서 감독을 '미라클 맨'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베트남으로서는 두 번에 걸쳐 '박항서 매직'을 경험한 셈입니다. 올해 초 베트남은 박 감독 지휘 아래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대회에서 결승에 진출하는 쾌거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반 년 정도 지나 아시안게임에서 또 한 번 4강에 오르는 성과를 낸 것입니다. 베트남이 뒤집어질 만한 성과입니다.
사실 이번 아시안게임은 베트남이 크게 비중을 두는 대회는 아니었습니다. 사실 베트남의 눈은 이 대회 이후에 열리는 '스즈키컵'에 쏠려 있던 게 사실입니다. 스즈키컵 대회란 아세안축구연맹(AFF) 주최로 11월에 열리는 2018 동남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입니다. 격년제로 열리는데, 올해가 대회가 열리는 해입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축구로 한판 자웅을 겨루는 대회라 할 수 있지요. 베트남은 2008년 스즈키컵에서 우승했습니다. 올해는 10년 만에 우승을 노리고 있습니다. 베트남이 박 감독에게 기대하는 것은 축구로 동남아에서 패권을 쥐고 싶다는 것입니다. 동남아 외에 중동, 동아시아 팀까지 함께 뛰는 아시안게임에 큰 기대를 안 한 이유입니다. 중동의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동아시아의 일본과 한국 전력을 고려하면 크게 기대할 상황이 아니라는 게 현지 분위기였죠. 당초 베트남 주요 방송국이 아시안게임 축구 중계권조차 사지 않은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16강 진출 소식에 그제야 중계권 계약에 나섰고, 이후 베트남 분위기는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이후 베트남은 4강에서 만난 한국에 아쉽게 패하고, 동메달 결정전에서는 아랍에미리트(UAE)에 승부차기 혈투 끝에 패했습니다. 하지만 아시안게임에서 보여준 베트남의 실력은 엄청났습니다. 예선전에서 일본전 승리를 포함해 3전 전승을 했고, 16강에서 바레인을 집으로 보내고 8강에서는 시리아를 꺾었습니다. UAE와의 동메달 결정전을 무승부로 계산하면 이번 아시안게임 성적표 합계가 5승1무1패입니다. 금메달을 차지한 한국의 6승1패와 비교해 처질 것이 없는 성적이죠.
반면 베트남 대신 동메달을 차지한 UAE는 예선에서 1승2패로 힘겹게 올라와 이후 인도네시아, 북한과의 경기에서 승부차기로 꾸역꾸역 올라온 팀입니다. 결국 최종 성적표 1승3무2패로 동메달을 차지한 셈이 됐네요. 베트남 현지에서 아쉽게 메달을 따지 못한 베트남 축구대표팀을 소방차 2대가 쏘는 물대포 사열까지 하며 환영한 이유입니다. 지난 2일 베트남대표팀이 귀국하는 날에는 비가 오는 와중에도 수천 명의 환영 인파가 몰리며 뜨거운 열기가 모였습니다. 금성홍기와 태극기가 동시에 휘날리며 박 감독의 인기를 보여줬죠.
베트남에 머무는 한국인으로서는 입꼬리가 올라갈 만한 장면입니다. 한국과의 4강전이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학교에 간 딸아이의 셔틀버스가 도착 기준 오후 4시 50분 정도에 떨어지는데 이날만큼은 20여 분 앞당겨진 4시 반에 도착했습니다. 알고 보니 상당수 현지 기업이 조기 퇴근을 했더라고요. 아마 이날 학교도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마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이날 경기는 현지시간 기준 4시에 열렸는데, 집에 가서 친지들과 축구를 보라고 퇴근시간을 2시간 넘게 앞당긴 기업들 스토리도 속속 들려왔습니다.
▲ 지난 29일 한국과 베트남의 2018 아시안게임 축구 4강전에서 미래에셋자산운용 베트남 법인 임직원들이 회식을 하고 있다.
현지에 법인이 있는 미래에셋자산운용은 아예 이날을 단체 회식날짜로 잡았습니다. 법인장과 한국 임직원, 베트남 직원이 한자리에 모여 축구 중계를 보기로 한 것이죠. 다만 이날 한국이 3대 0으로 앞서나가자 회식 자리는 마치 도서관처럼 잠시 침묵에 빠졌다고 하네요. 기나긴 침묵의 시간은 멋진 프리킥으로 베트남이 만회 골을 터뜨리면서 비로소 풀렸다고 합니다. 호찌민에 법인이 있는 CGV 베트남 역시 이날을 즉석 '치맥 파티' 날로 잡았습니다. 베트남 현지에서 머무는 동안 베트남과 한국이 굵직한 축구대회 4강에서 만나 경쟁을 벌이는 것도 흔치 않은데 베트남 감독이 한국인인 상황이니,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으로서는 이날의 의미를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거리에서 태극기와 금성홍기가 동시에 나부끼는 것을 보면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기억하는 분들은 박 감독이 주는 묘한 기시감(旣視感)에 빠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박 감독은 2002년 당시 코치로 한국팀의 월드컵 4강을 일궈냈죠. 16년이 지나 감독으로 아시안게임 4강 성과를 냈습니다. 월드컵과 아시안게임을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양국의 축구 역사 격차를 보면 비슷한 성과로 한데 묶어도 큰 무리는 아닐 것 같습니다.
▲ 29일 호치민 소재 CGV 베트남 법인에서 한국과 베트남 임직원이 함께 모여 한국 대 베트남 2018 아시안게임 축구 4강전을 지켜보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언더독의 반란'을 응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리만족을 주는 효과가 있거든요. 세계 축구 변방을 면치 못했던 한국은 2002년 우승 후보인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등을 잇따라 침몰시키며 4강에 오르는 기적을 썼습니다. 베트남은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사상 최초로 일본을 꺾었지요.
그리고 2002년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은 '투지'라는 단어 하나로 요약됐던 투박한 한국 축구를 강력한 압박을 기반으로 한 세련된 축구로 탈바꿈시켰습니다. 박항서는 강팀을 만나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후반부터 번개처럼 퍼져나가며 한 골 넣고 오는 전략으로 4강 신화를 썼습니다. 언더독 입장에서 강팀을 잡을 수 있는 확실한 색깔을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이제 두 차례 걸쳐 팡파레를 울린 박항서호는 11월 스즈키컵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합니다. 이미 베트남 현지 기대는 한없이 높아져 있습니다. 한껏 올라간 기대치를 낮추는 것은 참 어려운 얘기지요. 그래서 걱정이 됩니다. 이미 다수의 베트남 축구 팬들은 베트남이 동남아 축구 맹주로 올라섰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지난 AFC U-23대회 결승에 이어 아시안게임 4강까지 오르면서 동남아 팀으로는 유례없는 결과물을 냈으니까요. 하지만 베트남 축구팬들은 지난해 12월 박 감독이 M-150컵 대회를 통해 10년 만에 라이벌 태국에 2대 1로 짜릿한 승리를 쟁취한 것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을까요. 베트남 축구가 스즈키컵에서 우승은 따논 당상이 아니라는 얘기를 지금 분위기에서 누가 할 수 있을까요.
이미 베트남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베트남이 한국에 패한 4강전 결과를 놓고 박 감독이 한국과의 대회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온 게 사실입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박 감독을 믿고 지지하는 물결이 크고 거세 잔잔한 파도는 가볍게 누를 수 있는 상황이지만 스즈키컵 대회 결과에 따라 여론은 언제나 바뀔 수 있습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베트남이든 시시각각 갈대처럼 변하는 게 민심이고 여론입니다. 자칫 박항서호가 스즈키컵에 조기 탈락한다면 지금까지 쌓아왔던 찬란한 업적이 한순간 무너지지 않을까 적잖게 걱정이 됩니다.
히딩크가 아직까지 한국에서 인기가 높은 것은 한국인이 기억하는 히딩크의 이미지는 '월드컵 4강'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2002년 월드컵이 끝나고 히딩크 감독이 후속 대회에서 신통치 않은 성과를 내고 물러났다면 인기가 지속될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박항서를 아끼는 일부 팬은 박 감독이 '정상에서 내려올 수 있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베트남을 전율시킨 박항서의 마법에 흠집이 나기 전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퇴장할 수 있기를 꿈꿉니다.
이래저래 11월 열리는 스즈키컵이 관건입니다. 꼭 이 대회에서 베트남 축구대표팀이 소기의 성과를 내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때쯤이면 날씨도 선선해지고 금성홍기로 뒤덮인 거리 어딘가에 태극기과 금성홍기를 번갈아 쥔 제 모습도 함께 있을 것 같습니다
첫댓글 좋은 축구 정보 감사합니다 베트남이 생각보다
축구에 강하군요 박감독의 노력 이겠지요
대단한 쾌거입니다 고운 정보 감사합니다
건승 하십시오
오늘도 기분좋은 하루 시작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