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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기대치
하버드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연구하는 로버트 로젠탈 교수는 집에서 들쥐 200마리를 연구용으로
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여름휴가를 몇 달 동안 떠나게 된 교수는 쥐들을 관리해줄 사람들을 몇 명 고용했습니다.
200마리의 쥐들 중 40마리 정도의 머리에는 흰점이 있었는데 사육사들은 이 쥐들이 뭔가
특별하다고 막연히 생각하며 더 잘 보살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표시용으로 흰 페인트를 발라놓은 것이었습니다.
휴가에서 돌아온 교수는 마치 우연처럼 머리에 표시가 있는 쥐들이 더 발달이 잘 되고 똑똑한 것을 보고는 샌프란시스코의 한 초등학교와
연계를 해 학생들을 대상으로 비슷한 실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쥐들과 마찬가지로 무작위로 선발된 ‘우수한 학생’들이 실제로 우수한 성적을 냈습니다. 로젠탈
교수는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을 향한 관심이 실제 학생들의 능력보다 더 큰 효과가 있다고 연구를 발표했고,
이 실험은 ‘로젠탈 효과’로 현대 심리학의 가장 중요한 실험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향한 기대치가 진짜 신앙생활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자세를 갖되 더 굳건한 신앙을 향한 마음 역시 놓지 마십시오. 반드시 주님께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주님! 저를 특별히 여기시는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굳건히 살게 하소서
주님께서 특별하게 생각하신다는 믿음을 글로 써서 이웃에게 간증합시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하늘의 법은 다르다
19세기 초반 미국 보스턴에서 있던 일입니다.
어두운 밤에 한 남자가 부두를 거닐다 발을 잘못 디뎌 바다에 빠졌습니다. 수영을 못해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크게 외쳤으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결국 남자는 바다에 빠져 죽었습니다. 잠시 뒤 그를 찾으러 온 가족들이 근처 가로등에 서 있는 사람에게 남자의 행방을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어떤 남자 한 명이 바다에 빠져서 죽었습니다.”
가족들은 서둘러 경찰에 신고를 했고, 물에 빠져 죽은 남자는 가족의 일원이 맞았습니다. 그리고 남자가 물에 빠지던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목격자가 계속 가로등에 서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수영까지 잘했습니다. 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외면했다는 이유로 가족은 목격자를 법원에 고소했는데 법원은 목격자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도덕적인
책임은 있지만 법적인 책임까지 물을 수는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세상의 법은 생명을 외면한 책임을 묻지 않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물으십니다. 그러나 두려움이
아닌 사랑의 책임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복음을 전하고 또 전하는 충성된 제자로 사십시오. 반드시 주님께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주님! 제 앞에 있는 죄로 인해 죽은 영혼들을 복음으로 살리게 도와주소서.
지인들에게 전화나 문자나 신앙서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교회로 초청합시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진짜를 발견한 인생
어느 유명한 소설잡지의 편집장에게 한 여자가 같은 원고를 계속해서 보냈습니다.
원고를 보낸 뒤에 사무실로 전화해서 원고를 읽었는지, 가능성이 어떤지 계속해서 물었으나
별 다른 재미나 유익이 없는 글이었기 때문에 전화를 받을 때마다 “저희는 모든 원고를 소중한 마음으로 읽습니다.
검토한 뒤 뽑히게 되면 답신 드리겠습니다”라는 사무적인 응대만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엄청 화가 난 목소리로 여자가 따져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동안 거짓말을 해왔어요! 정말로 글을 읽는지 확인하려고 내 원고의 중간을 풀로
붙여 놓았는데 붙은 채로 다시 돌아왔군요. 그러고도 당신이 편집장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분노에 가득 찬 여자의 말에 편집장은 차분히 대답했습니다.
“아, 물론 읽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읽지는
않았지요. 음식이 상했는지 아닌지는 한 입만 먹어보면 알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굳이 세상의 죄에 빠져보지 않아도 말씀에 비추어, 양심에 비추어 우리는 판단할 수 있습니다. 참된 진리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믿는 삶을 살고 있다면 잘못된 것을
알면서 굳이 세상의 유혹과 죄에 발을 담글 필요는 없습니다. 참된 진리에 집중하십시오. 반드시 주님께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주님! 남을 비난하기 전에 내 자신을 살필 줄 아는 겸손을 주소서.
죄에 대한 유혹과 호기심에 빠지지 말고 오로지 주님 안에 거하십시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편견과 오해
‘아랍인에 대한 편견과 오해’로 스탠딩 코미디를 하고 있는 마즈 조브라니가 두바이로 공연을 갔습니다.
숙소에서 쉬다가 운전기사를 보냈다는 공연 관계자의 말을 듣고 로비로 내려왔는데 한 인도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인도사람도 자신을 빤히 쳐다보기에 마즈가 다가가 운전기사냐고 묻자 인도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천만에요. 저는 이 호텔 주인입니다.”
깜짝 놀란 마즈가 다급히 사과를 하며 말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저를 쳐다보셨죠?”
“당신이 제 기사랑 닮아서 저도 살짝 헷갈렸습니다.”
마즈는 편견을 주제로 코미디를 하는 자신도 인도사람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며 이 소재마저도 자신의 코미디에 사용하며 사람들에게 외모와
인종에 대한 편견을 가지지 말아줄 것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나의 작은 편견과 오해로 다른 사람들이 큰 상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다른이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기에 몸가짐을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무의식중에라도 편견으로
다른 사람을 상처주지 않도록 항상 먼저 배려하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반드시 주님께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주님! 인류는 주님의 작품이므로 어떤 인종에 대해서도 편견이 없게
하소서.
혹시 인종에 대한 편견이 있다면 그도 하나님의 작품임을 기억합시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인재의 조건
중국 후한 시대 관료인 유소는 사람을 등용하는 일을 하다가 어떤 법칙을 깨닫고 ‘인물지’라는 책을 썼습니다.
국내 대기업의 한 경제연구소에서 이 책의 내용이 가치 있다 생각해 ‘인재를 못 알아보는 7가지
이유’로 다음과 같이 정리해 온라인에 올렸습니다.
1. 명성이 실력의 전부라고 생각해서.
2. 주관적인 판단으로 인재를 평가하기 때문에.
3. 내면이 아닌 외면적인 성격으로만 그릇의 크기를 판단해서.
4. 대기만성형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빨리 꽃피는 사람들만 찾기 때문에.
5. 자신과 비슷한 부류만 좋아하기 때문에.
6. 처한 상황에서 인재를 판단하고 미래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7. 인재를 겉모습과 환경만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진짜 인재는 겉이 아닌 속을 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로지 나의 중심만을 보시고 판단하십니다. 그래서 사람의 판단에 나를 맡기지 말고 오직 주님이 어떻게 나를 생각하실지에 집중해야 합니다. 나의 모든 부족함을 하나님께 맡기고 오로지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 믿음의 중심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힘쓰십시오. 반드시 주님께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주님! 제 마음의 중심에 오로지 주님만을 의지하고 향하는 마음을 주소서.
위 7가지 중에 몇 가지가 해당되는지 살피고 개선합시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웃음의 가치
미국의 리얼리즘 작가 호퍼는 대공황시대에 활동했는데 한 때 작품이 팔리지 않아 돈을 벌기 위해 매일 새벽 인력시장에 나갔습니다. 그러나 경기가 안 좋아 많은 사람들이 일을 구하러 나왔기에 일자리를 얻는 것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웠습니다. 아무리 일찍 나와도 사람들이 벌써 수 백명이 기다리고 있었고, 생기는
일자리는 몇 개뿐이었습니다.
며칠간 허탕을 친 호퍼는 ‘사람을 뽑는 기준’이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계획을 세워
하루는 엄청 호들갑을 떨어보고, 하루는 화를 내보고, 하루는
슬픈 표정을 하고, 하루는 밤을 새고 맨 앞줄에서 기다려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활짝 웃기로 한 날 갑자기
사람을 구하는 한 남자가 호퍼를 보고 외쳤습니다.
“페인트칠 할 사람 두 명 구해요. 그리고... 일단
저기 웃고 있는 사람!”
호퍼는 매일 웃는 표정으로 일자리를 거의 매일 구할 수 있었고 어려운 시기를 지혜롭게 극복하고 훗날 미국의 대표적인 화가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고난 중에도, 환난 중에도 웃을 수 있는 것이 성도의 참된 복이며 믿음입니다. 힘든 만큼 위로를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더욱 환하게 웃으십시오. 반드시
주님께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주님! 저의 방패가 되시며 지극히 큰 상급이 되시는 주님을 더욱 의지하게
하소서.
어떤 표정을 자주 짓는지 살펴보고 항상 웃음진 표정으로 삽시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간결한 고백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나라를 이끌 장관을 뽑으려고 관료들에게 추천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조건을 충족하는 수의 추천을 받은 후보가 3명이나 되었습니다. 여왕은 세 명의 후보를 불러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건네주며 말했습니다.
“1주일 뒤 이 책의 내용을 한 장으로 요약해오세요. 가장
요약을 잘한 사람을 뽑겠습니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2차 세계대전 중에도 모든 보고서를 1장으로
요약해 받았습니다. 전쟁과 관련된 아주 중요한 일이라도 보고서가 1장을
넘으면 읽지 않고 다시 작업을 지시했습니다.
훌륭하고 어려운 내용을 간단하게 압축하는 것은 지혜가 있지 않으면 할 수 없다고 예로부터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고려 시대에도 과거 시험은 약술 능력으로 평가했고, 지금의
제네럴 모터스 같은 많은 세계적인 회사들도 입사 시험에 요약 능력을 꼭 넣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성경의 모든 내용을 그리스도의 보혈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했습니다. 66권의
성경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우리의 신앙을 요약하면 하나님께 뭐라고 보고할 수 있는지 묵상하며 적어보십시오. 반드시 주님께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주님! 주님이 내게 어떤 분이신지를 잘 깨닫고 잘 믿게 하소서.
주님이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경험했는지 일일이 적은 후 나눕시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고요하게 집중하라
우리가 일반 집안에서 생활할 때 나는 소음을 측정하면 50데시벨 정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기준에서 데시벨이 5씩 높아질수록 혈압이
10%씩 상승합니다. 일반 직장 사무실은 70데시벨인데
이정도 소음이면 혈압이 평소보다 20,30% 정도 오르는 심한 스트레스 상황입니다. 애초에 노이즈라는 영어단어도 ‘메스꺼움, 고통’이라는 라틴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이런 소음에 익숙한 삶을 살다보니 조용히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습관적으로 TV나 라디오를 켜놓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뇌는 최소한 하루에 2시간 정도 고요한 가운데 있어야 기능이 회복됩니다. 20분 동안
잔잔히 클래식을 듣는 것보다도 2분 동안 조용한 곳에 있는 것이 훨씬 효과가 좋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불편해도 차차 소음이 없는 상황에 있으려고 하다 보면 결국 뇌의 기능도 회복이 되고, 훨씬 일에 집중도 잘되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세상의 신호가 너무 많을 때 본질에 집중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위한
예배와 경건의 시간에는 오로지 하나님의 음성에 집중해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외부의 소음이 너무 많을
땐 마음을 내려놓고 잠잠히 주님의 임재를 구해야 합니다. 외부의 환경뿐 아니라 내면의 마음의 소음까지
관리해 조용히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반드시 주님께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주님! 고요한 심령으로 주님을 묵상하며 집중해 성령이 충만하게 하소서.
소음에 얼마나 노출되어 있는지 생각하고 조용한 시간을 가집시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TV를 틀어놔야 잠이 드는 남편의 내력(來歷)
샬롬!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여 아침인사 드립니다. 즐겁고
행복한 하루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시인이었던 주요한 씨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친구라는 사람은 많지만, 떨어지면 그립고 꿈에도 보이는 그런 친구는
드물다. 영혼의 교감이 있는 사이가 참다운 친구이니, 연령과는
관계가 없다.’
남편과 저는 오랜 연애 끝에 결혼했습니다. 서로를 잘 알기에 조율할 시간은 필요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착각이었습니다. 화장실 휴지 거는 방향부터
치약 짜는 모양까지, 서로 다른 습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힘든 것은 ‘수면방법’이었습니다. 저는 조용하고 깜깜해야 잠이 드는 가하면, 남편은 TV를 틀어놔야 잠을 잤습니다. 우리는 서로 유별나다며 자주 언성을 높였습니다. 명절에는 시댁에서
잠을 잡니다. 그날 새벽, 잠결에 방 밖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나갔습니다. 시어머님께서 TV를 켜신 채로 거실 소파에서
주무시고 있었습니다. 저는 리모컨을 찾아 TV를 껐습니다. 그 기척에 잠에서 깨신 어머니가 “아이고 아가, 시끄러워서 깼니? 얼른 자거라.”하시며 저의 등을 토닥여주셨습니다. 다음날, 어머니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나 때문에 잠을 설쳐서 어쩌누? 그게 습관이 돼서…. 나도 예전엔 조용해야 잠이 잘 왔는데, 결혼하고 달라졌단다. 너희 시아버지는 외국에서 일했으니, 홀로 어린애를 안고 집에 있으면
어찌나 허전하고 텅 빈 것 같은지. 사람 소리가 그리워 TV를
켜놓고 밥을 먹거나 잠을 자곤 했어. 이젠 그 소리 없이는 잠이 안 오더구나. 네 남편도 그게 몸에 배어 쉽게 고쳐지지 않을 게야. 이해하려무나.” 이제 저는 TV를 보다 잠든 남편의 코 고는 소리에 슬며시 미소
짓곤 합니다.(출처; 좋은생각, 김윤정)
우리 내외도 서로 다른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처음엔 ‘내 방식이 옳다’면서 이따끔
다툼이 있었지만, 지금은 서로 상대방의 스타일을 존중해주고 있습니다.
때론, 아내가 해놓은 것을 내 방식대로 고쳐놓기도 하지만,
굳이 내 방식을 고집하지는 않습니다. 짧은 인생,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서로 다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물맷돌)
[너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과는 이유 없이 다투지 마라(잠3:30) 다투기 좋아하는 사람과 한집에 사는 것보다, 차라리 옥상
한 구석에서 혼자 사는 것이 더 낫다.(잠25:24) 무슨
일을 하든지 불평하거나 다투지 마십시오.(빌2:14)]
이 세상에서 당신이 제일이지요!
샬롬! 지난밤도 편히 잘 쉬셨는지요? 오늘 하루도
건강하고 행복한 날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동안 가장 두렵게 여겼던 ‘코로나바이러스’의 정체를
밝힌 과학자에게 “이제 무엇이 가장 두려우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지금은 아무래도 아내가 화를 내면 좀 무섭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2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어제 일처럼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장면 하나가
있습니다. 캐나다에 잠시 머물고 있을 때, 우리는 한 카페에
들러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벽면에 가득히 걸려있는 명화도 감상하면서
아기자기한 실내장식에 눈길을 주고 있었습니다. 순간, 영화
같은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허구가 아닌 실제상황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곱게 나이든 부부가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서로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노부부의 표정은 “이 세상에서 당신이 제일이지요!”라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앞에는 두 잔의 커피와 달콤한 계피빵이 놓여있었는데, 남편은 빵을
먹고 아내는 커피만 마셨습니다. 잠시 후, 남편이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와 아내의 손에 소독한 틀니를 쥐어줬습니다. 아내는 자연스레 그것을
받아 잇몸에 끼우고 나서 커피에 빵을 찍어 맛있게 먹었습니다. 남편은 그런 아내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습니다. 잠시 후, 그들은 나가고, 동화
속 주인공처럼 해맑았던 노부부의 모습이 저의 망막 속에 오래도록 자리했습니다. 저는 그때도 ‘나도 저렇게
늙어가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출처; 빛과 소금, 수필가 전희훈)
그야말로, 영화 속 한 장면을 보는 듯 같습니다. ‘아름답다’는
말이 절로 나오네요. 저도 그렇게 늙어가고 싶습니다. 물론,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겁니다. 진정, 우리 두 내외의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겠지요.(물맷돌)
[나는 너희가 늙어 백발이 될 때까지, 너희 하나님이 되어 너희를 보살필 것이다. 내가 너희를 만들었으니, 너희를 돌보고 보살필 것이며, 너희를 도와주고 구해주겠다.(사46:4)
이들 부부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운 사람들이었으며,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을 빈틈없이
잘 지켰습니다.(눅1:6)]
언니는?
샬롬! 유월 초하루 아침입니다. 초여름 무더위
잘 이기시고 건강한 하루하루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사는 단지 옆에는 미니 분수대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분수대가 있는 인공수조에서 ‘개굴개굴’하고 개구리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은퇴 후에 처음 들어보는 개구리소리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반갑고도 정겨운 소리를 듣게 되어 기분이 좋았습니다.
어느 날, 동생들한테서 제 모습을 봤습니다. 남동생이
숙제를 도와달라고 하자 신경질부터 내는 여동생, 부모님 앞에서 태연히 비속어를 쓰는 남동생, 그동안 제가 한 행동들이었습니다. ‘그러지 말라’ 하고 싶어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언니는?” “누나도 그랬잖아?”라는 대답이 돌아올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저부터 달라지기로 했습니다. 동생들이 저를 따라 한다면, ‘달라진 모습 또한 닮지 않을까?’하는 작은 기대감에서였습니다. 그렇게 저의 모난 점을 하나씩 다듬어나갔습니다. 여동생의 태도가 누그러지고, 남동생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변한 것을, 직접 보고 듣게 되었습니다. 사소한 일에도 가시 돋친 듯 반응하던
우리 셋은 진솔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고맙거나 미안한 일이 생기면 서툴게나마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어릴 적에는 외동인 친구를 부러워했으나, 이젠 동생들 없는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늦은 밤 맞은편 침대에 누워 엄마에게 못한 이야기를 재잘거리던 여동생이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독감에 걸렸을 때, 친구들과의 축구를
뒤로하고 옆에 있어준 남동생이 그리워집니다.(출처; 좋은생각, 박채완)
우리 속담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이 있습니다. 태어나 자라면서 자연스레
주변사람들의 행실을 본받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도 생겨났을 겁니다. 아무튼,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이,
우리 자신이 먼저 말과 행동을 다듬어나가야 합니다.(물맷돌)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롬12:2) 여러분은 나(바울)를
본받으십시오. 그리고 우리를 본받아 사는 사람들을 지켜보십시오.(빌3:17)]
저는 마님을 모시는 삼돌이가 되었습니다!
샬롬! 지난밤 편히 쉬셨는지요? 오늘도 아름답고
행복한 하루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어느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리
큰 고통이라 할지라도 고통은 곧 사라지지만, 그러나 사랑은 남는 것….
그러니, 내가 사라져 버린 후에도 이 지상에 남을 수 있는 사랑을 만들기 위하여 ‘오늘
무슨 말, 무슨 일을 할까?’하고 고민한다.”고 말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청춘들 앞의 운명은 만만치 않고 현실은 버겁습니다. 출판사 초임
편집자의 작은 급여에 생활은 늘 곤고했습니다. 방 하나에, 엉덩이를
돌리기 어려울 만큼 좁은 부엌이 붙은 전세방에서 큰아이를 낳고 키웠습니다. 고단한 살림은 크고 작은
갈등을 유발하기 마련입니다. 이태가 지날 때쯤, 아마도 좁은
부엌의 불편함에서 비롯되었을 말다툼 끝에 “요즘 세상에 밥이야 굶겠어요?”가 떠올라서, 저는 옹졸하게도 그때 ‘이런 말을 하지 않았었느냐?’고 따졌습니다. 결혼 전에는 ‘마당이 있는 주택’에서 개를 키우며 살았던 아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혼생활이 이런 건지, 그때는 몰랐어요.” / 어느 날, 저는
아주 영리한 한 아기의 일화를 전해들었습니다. 네모와 세모 구멍에 ‘별’과 ‘동그라미’를 넣지 못해
고민하던 그 아기는 상자 뚜껑을 열고 모든 나무 조각들을 넣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나라는
어린아이들의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문득 이 험난한 세상
속에서 오래 참고 모든 것을 견디며 운명을 함께 해온 여인에게 제가 할 일이 무엇인지 떠올랐습니다. 굳이
별과 동그라미를 맞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의 뚜껑을 열어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깨달음의 그 순간, 저는 마님을 모시는 삼돌이가 되었습니다.(출처; 빛과 소금, 장경식)
사실, 그렇습니다. 조금만 시간이 지난 후에
생각해보면 ‘참으로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정말 바보스럽게 굴었다’는 후회를 하게 됩니다. 인생은
너무나 짧습니다. 그리고 순간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다투거나 갈등하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물맷돌)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결코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동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신만 생각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나쁜 마음을 먹지 않습니다.(고전13:4-5)]
이렇게 찾아와줘서 정말 고마워, 미안해!
샬롬! 오늘 하루도 건강하고도 행복하게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네덜란드의 ‘피쉬’라는 작가는 ‘인사(人事)’를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했습니다. 조각가
‘유영호’는 이에 힌트를 얻어서 ‘인사하는 모습’의 조각상을 만들었습니다. 다양한 각도로 실험한 끝에
‘겸손하면서도 비굴해보이지 않는 각도’를 찾았는데, 그것은 ‘15도’였습니다.
저는 거동이 불편한 분들을 찾아가 진료하고 있습니다. 임 할아버지는 혼자 살고
있습니다. 종종 외출도 하고 사람들도 만나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할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약 먹는 것을 깜박하고 잊을
때가 많습니다. 오래 전에 받은 약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당뇨가
심해서 꼭 챙겨 먹어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말씀도 잘하고, 종종
외출해서 친구들과 술 한 잔을 하실 때도 있다고 하니, 괜찮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약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헷갈려 하실 때가 많아 치매
의심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검사해봤으나,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하루는 조심스레 물어봤습니다. “어르신, 죽을 만큼 힘드세요?” “수면제를 모아놨어. 아직 먹을 생각은 하지 않았어. 모아만 놓았어.” 할아버지는 서랍 속의 수면제를 보여주었습니다. “어르신, 먹지는 마시고 모아만 두세요. 그걸 먹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요!” “이렇게 찾아와줘서 정말 고마워, 미안해!” 할아버지는 어렵게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살짝 눈물을 보였습니다. 자세한
말씀은 없었지만, 깊은 절망에 감정이 무뎌진 듯했습니다. 생을
포기하려는 선택을 머리맡에 두고 사시는 그 마음을 꺼내놓은 것만으로도 큰일을 해냈다고 생각합니다. 할아버지가
겪은 힘든 세월과 슬픈 감정을 다 헤아리긴 어렵지만, 힘내서 살아갈 수 있도록 곁에서 잘 돌봐주고 싶습니다.(출처; 좋은생각, 의사
홍종원)
그 누구든지 반드시 가야만 하는 길입니다. 생사를 결정할 권리가 우리 인간에게는 없는 고로, 주께서 오라 하실 때까지, 우리는 열심히 살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몸과 마음이 점점 약해져서 삶을 지탱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힘이 좀 더 있는 사람들이 그들을 돌봐야 합니다. 언젠가는 우리도 마지막 여정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살아야 합니다.(물맷돌)
[인생살이 기껏해야 한 70년, 건강하게 살아도 80년인데, 그 인생살이 고통과 슬픔뿐, 덧없이 지나가고 쏜살같이 빠르게 날아갑니다.(시90:10) 나는 주님을 위해서 오랫동안 어려운 싸움을 치러 오면서 주께 한결같은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워졌습니다. 면류관이 하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딤후4:7-8)]
위기는 언제나 계속되고 있습니다.
샬롬! 지난밤 편히 쉬셨는지요? 즐겁고 행복한
하루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엊그제 공원으로 운동하러 갔더니, 어느
젊은 아주머니가 목줄이 풀린 강아지와 실랑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주머니는 “너, 엄마 말 잘 들어야지!”하고, 마치
어린자식 타이르듯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강아지가 저한테
왔습니다. 그러자, 이 아주머니가 “‘할아버지,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해야지.”하고
말했습니다. 제가 갑자기 ‘개 할아버지’가 되고, 생전 처음
보는 ‘개 엄마’의 아버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영~ 기분이
안 좋았습니다.
(문)결혼생활에 위기가 있었습니까? 남편: 결혼생활은 언제나 위기인 것 같습니다. 전혀 다른 두 남녀가 만나
‘자신들에게 비슷한 구석이 있다’고 착각한 나머지 결혼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아내와 저를
반반씩 닮은 아이’를 키우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성숙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아무튼 위기는 언제나 계속되고 있지만, 아내와 함께
위기를 이겨내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아내: 부부의 위기는
언제나 일상 가운데 도사리고 있습니다. 상대의 말투, 아주
미미한 차이가 있는 ‘각자의 생활양식’ 때문에 서로 부딪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갈등을 풀지 않고 그냥 참다보면, 상대방을 부정적인 모습들로
짜깁기해서 보게 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문)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남편: 내 가정이 내 것이 아니고,
내 아이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속으로 계속 되뇌고 있습니다. 아내가 내 아내이기 전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잊으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아내: 부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화가 정말 중요합니다. 하지만, 서로 감정이 상한 상태에서는 원만한 대화를 나누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럴 때, 저는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말씀을 묵상하다 보면, 문제의 원인이 상대가 아닌 ‘바로 저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출처; 빛과 소금, 이승연)
요즘, 저는 안경을 쓰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행하는 것들 중에는 ‘말씀’이라는 안경을 써야 비로소 깨닫고 발견하게 되는 ‘자신의 허물과 잘못’이
아주 많으리라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평소에 ‘말씀의
안경’을 벗어놓고 살 때가 많습니다.(물맷돌)
[사람의 행위가 자기 눈에는 모두 깨끗하게 보이나, 주께서는 그 속마음을 꿰뚫어 보신다.(잠16:2) 나는 여러분의 마음을 밝혀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예비해두신
것을 깨닫도록 기도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복이 얼마나 풍성하고 놀라운지 깨닫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엡1:18)]
‘미안하다’는 말, 그 한 마디의 중요성
샬롬! 오늘도 어김없이 새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
하루도 건강하게 보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어느 분이 말하기를 “인간이 아름다운 이유는, 슬프거나 상처를 받았을 때에 서로 위로하면서 ‘어떻게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하나?’를 추구할 줄 알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제 신랑은, 제가 시댁과의 관계에 속에서 서운할 일이 없도록, 늘 사려 깊게 행동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사위가 예쁘고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마음속 깊이 눌러놓고 있던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이 새록새록 솟아났던 모양입니다. 아버지가 행했던 옛일에 대한 하소연이 점점 늘어나고, 부부싸움이
잦아졌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머니가 과거 일을 들춰내어
폭발적으로 화를 내도, 그저 가만히 계셨습니다. 저는 그런
아버지가 불쌍해보였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행동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어머니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저는 아버지께
‘지난날의 일들에 대하여 어머니께 정식으로 사과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잘못을 알면서도 ‘미안하다.’ 이 한 마디 하기가 정말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올해 이월,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에, 어머니가 저에게 카톡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여보! 오늘이 우리 결혼한 지
34주년 되는 날이오. 당신과 내가 아무 도움도 받지 않고 두 딸을 자랑스럽게 잘 키워서
살림을 꾸리게 한 것은, 모두 당신의 현명한 판단과 정성, 그리고
가족애의 결과라고 생각하오. 다만, 열심히 살다보니, 우리 둘만의 공간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소. 그동안 당신의 마음을
이해하는 폭을 키우지 못하여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었구려. 결혼생활을 하면서, 내 부족함으로 인하여 당신이 받은 상처를 항상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오. 여보, 미안하고 고마워요! 사랑해요! -
당신의 남편으로부터(출처; 좋은생각, 안다현)
우리는 평소 ‘듣기에 안 좋은 말, 해서는 안 될 말’들은 아주 쉽게 내뱉고 있지만, 그러나 ‘꼭 해야 할 말, 말하면 서로에게 좋고 유익이 되는 말’들은
좀처럼 하지 못하는 ‘이상한 버릇’이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상처가 될 말은 그야말로 아무 고민도 하지
않고 용감하게 말하건만,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은 참으로
어지간히도 아끼고 있는 것입니다.(물맷돌)
[은쟁반에 담겨 있는 금사과가 보기에도 아름답듯이, 경우에 따라서 적절히 하는 말은 얼마나
듣기가 좋은가?(잠25:11)
상대 배우자의 상처와 고통을 아는 것이 해독제가 됩니다.
샬롬! 지난밤 편히 쉬셨는지요? 오늘 하루도
내내 평안하시고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미국에서 여러 경영자들의 고문역할을 하고 있는 ‘스터트먼’이라는
사람이 ‘경영자들이 어떻게 재충전하는지?’ 연구했습니다. 그들이
행한 것은 클래식감상, 스쿠버다이빙, 요트항해, 사이클링 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공통점은 ‘목소리 부재’ 곧 ‘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외도(外道)로 인한 불화에 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못된 방법으로 접근했습니다. ‘거짓말로 잡아떼거나
사건을 축소하고, 명품가방을 사줘서 기분을 풀게 하거나, 큰소리쳐서
제압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때로는, 보복성 외도를 부치기도 하고, 이혼만이 답이라고도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방법들은 오히려 독이 됩니다. 실제로 부부치료를 마친 많은 부부가 ‘이때까지 경험하지 못한 관계’로 인하여 회복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창세기 2장 25절은
“아담과 그 아내가 다같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부부는 진심으로 자기 잘못을 깨닫고 그 잘못을 숨기지 않아야 합니다. 이처럼
벌거벗고 다가가면 부끄럽지 않게 되고,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숨기거나 감추고, 또는 거짓말을 하거나 축소하면, 상처는 심해지고 회복은 더욱 힘들어지게 마련입니다. 어제 말씀드린 60대 부부는 3개월간 상담을 받았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자신을 괴롭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외도 때문에 아내가 심각하게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픔에 다가가서 진심으로 사과했습니다. 외도가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 배우자의 상처와 고통을 아는 것이 해독제가 됩니다.(출처; 빛과 소금, 박성덕)
인간은 본래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십자가를 땅에다 내려놓고 살 때가 참 많습니다.
특히, 부부사이에 그런 일이 많습니다.(물맷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마16:24)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주권과 능력을 꺾으시고, 온 세상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통한 승리’를 보여주셨습니다.(골2:15)]
꾼과 리더의 차이
“아픔을 느껴야 리더가 됩니다. 아픔 없는 능력은 ‘꾼’이 되게 하지만 아픔을 느끼는 능력은
‘리더’가 되게 합니다.” 작가 최필규의 책 ‘30센티 마음
여행’ 중 한 구절입니다.
‘꾼’은 이웃을 아프게 해서라도 자신의 성공을 추구하지만 ‘리더’는 이웃의 아픔을 보듬으며 이웃의 삶을 꽃피우게 합니다. 꾼은 카우보이처럼 뒤에서 양들을 몰아가지만, 리더는 목자처럼 양들 앞에 서서 역경을 헤치며 이끕니다. 꾼은 설탕같이 자기 맛을 내려 하고, 리더는 소금같이 자신이 없어지면서 남의 맛을 내어 줍니다.
진정한 리더이신 예수님은 자신이 오신 이유와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7~28)
교회와 나라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꾼이 아니라 지도자가 되길 늘 기도합니다.
(강남비전교회)
예수님의 얼싸안기
농촌에서 목회할 때입니다. 온종일 방치되는 동네 어린이들을 위해 놀이방을 시작했습니다. 부모가 일하러 나갈 때 아이들을 맡기고, 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
데려가는 방식으로 운영했습니다. 그때 닭 몇 마리를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 점심 반찬으로 달걀을 주기 위해 길렀지만, 뜻밖에 생명의
신비를 느낀 계기가 됐습니다.
암탉 한 마리가 알을 품었는데 하필 막 장마가 시작될 무렵이었습니다. 후텁지근한 날씨 속에 3주 동안 둥지에 틀어박혀 시간을 보낸 암탉은 털이 거의 다 빠질 만큼 기진했죠. 저러다 죽는 게 아닌가 싶던 어느 날, 솜털 같은 병아리들이 깨어났습니다. 아이들도 그 광경을 보며 탄성을 질렀습니다.
그때 경험이 소중하게 남아 있습니다. 생명의 변화는 시간이 지나가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자기 생명을 걸고 품어야 그 시간 끝에 일어나는 기적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주님의 고난과 부활은 주님의 얼싸안기였습니다.
한희철 목사(정릉감리교회)
언택트
한국사회가 고강도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고 있습니다. 미세한 에어로졸 입자로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전파될 가능성이 있기에 가급적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좋답니다.
그래서 요즘 부각되는 단어가 언택트(untact)입니다. 접촉을 뜻하는 콘택트(contact)의 반대 개념으로 서로 접촉하지 않고도 이뤄지는 활동을 뜻합니다. 매장의 키오스크, 자판기 주문·결제 앱, 셀프 주유소, 모바일 선물 등이 좋은 예입니다.
코로나19로 이런 문화가 교회까지 밀려 들어왔습니다. 라이브 영상 예배, 영상 편집 특송, 온라인 헌금 등 생소했던 문화가 어느덧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가정의 편안한 예배 환경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본질과 수단의 문제를 고민하게 됩니다. 대치 가능한 것과 대치해서는 안 되는 것의 경계 말입니다. 예배받으시는 하나님, 유일한 구원자 예수, 시공을 초월하시는 성령님, 나 자신의 몸과 마음의 헌신 등 언택트 문화 속에서도 꼭 콘택트해야 할 것을 붙드는 분별력과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이성준 목사(인천 수정성결교회)
한라산 같은 하나님
한라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높은 산입니다. 한라산 중턱에 큰 구름이 걸쳐있는 것을 보며 웅장함에 감탄합니다. 8년 전 제주도에 왔을 때 지리학적으로 한라산이 얼마나 위대하고 중요한 산인지 처음 알게 됐습니다. 한라산의 높이는 서울 남산의 열 배인 1950m입니다. 매년 남쪽에서 올라오는 태풍들의 힘을 나약하게 만들어 일본이나 서해상으로 진로를 바꿔주는 역할을 합니다. 한라산이 없으면 태풍이 전라도나 경상도 쪽으로 북상해 한반도에 큰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태풍 피해를 입을 때마다 제주도의 한라산을 원망한다고 합니다. 한라산은 대한민국의 방패 역할을 하며 태풍으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줍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과 경제위기라는 큰 태풍을 만났습니다. 이들 태풍의 힘을 나약하게 만들고 우리를 보호해 주실 수 있는 분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분은 바로 한라산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차진호 목사(여의도순복음서귀포교회)
생명을 살리러 간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도호쿠 지방에 진도 9.0의 강한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쓰나미가 사람과 삶의 현장을 쓸어가 버렸습니다. 후쿠시마에 있던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해 방사능이 누출됐습니다.
방사능 가득한 그곳에 죽음을 각오하고 뛰어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은 이렇게 이유를 말했습니다. “나는 18세 때부터 그곳에서 일했습니다. 내가 가장 잘 압니다. 그래서 내가 가야 합니다. 나는 지금 생명을 살리러 갑니다.”
2000년 전 하늘의 하나님이 전능의 옷을 벗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미움을 당하시고 채찍을 맞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은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 6:40)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를 가장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우리에게서 죽음을 물리시고 생명을 주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부활의 생명이 당신 마음속의 생명으로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부활의 생명을 만나고 누리는 하루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전담양 목사(고양 임마누엘교회)
리모델링
우리 교회 주변에 재개발이 한창입니다. 봄마다 벚꽃이 만개했던 나무가 다 사라지는 게 참
아까웠습니다. ‘나무는 최대한 살리면 좋지 않을까’ 싶었지만, 재개발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살릴 것은 살리는 리모델링과 달랐습니다. 30년
넘은 나무나 건물도 모두 철거해 폐허처럼 변했습니다. 땅까지 다 파헤치니 예전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젠 아파트들이 거의 완공돼 가림막을 거뒀는데, 완전히 새로운 동네로 변했습니다. 공원도 학교도 새로 생겼습니다. 높이 세워진 아파트 야경 덕에 참 예쁘고 세련된 느낌입니다.
새것이 되려면 옛것은 남김없이 사라져야 합니다. 아파트 재개발을 보며 죽음이 있어야 부활이 가능함을 실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를 새롭게 했습니다. 전혀 다른 새 세상을 열어줬습니다. 성금요일인 오늘, 옛것을 온전히 버려야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는 하루가 됩시다. 버리고 싶지 않은 게 있어 리모델링만 하고 싶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버려야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를 기억하며 새로운 피조물답게 부활에 참여합시다.
손석일 목사(서울 상일교회)
연민이 아닌 공감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돼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미국의 소설가 수전 손택의 책 ‘타인의 고통’ 중 한 구절입니다. 연민과 공감은 다릅니다. 연민은 고난받는 그에 대한 측은한 ‘감정’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연민의 차원에서만 바라본다면 “나는 당신의 고통의 원인에 연루돼 있지 않아요”라는 자기합리화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감은 상대방이 돼버리는 것입니다. 소설가 이외수는 세상에서 제일 매운 고추는 빨간 고추도 빻은 고추도 아니라 ‘눈에 들어간 고추’라고 했습니다. 공감은 이와 같습니다. 눈에 들어간 고추처럼 대상과 내가 하나가 돼 맵고 아픔을 같이 느끼는 것이 공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아픔을 같이 겪으시며 십자가에 달려 우리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되신 공감의 사랑! 그 사랑이 우리를 살렸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 3:16)
한재욱 목사(강남비전교회)
내가 입힌 모든 상처를 용서하소서
살다 보면 ‘이런 일이 다 있구나’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생각하지 못한 일을 만나는 때이지요.
며칠 전이었습니다. 컴퓨터로 원고를 작성한 뒤 프린터로 출력하기 위해 버튼을 눌렀지만, 인쇄가 되질 않았습니다. 무슨 일일까 확인해 보니 종이가 다 떨어진 것이었습니다. 보관해 둔 종이를 꺼냈습니다. 그냥 넣으면 인쇄 중 종이가 서로 겹치는 경우가 있어, 종이를 넣기 전 종이와 종이 사이를 손으로 훑었습니다. 그렇게 한 뒤 종이를 넣으면 서로 겹치지 않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순간 손끝이 따끔했습니다. 손끝을 살피니 종이에 손을 벤 것이었고, 벤 자국을 따라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손을 벤 것보다 종이에도 손을 벨 수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습니다. ‘내가 입힌 모든 상처를 용서하소서.’ 상처를 감싸며 나도 모르게 기도를 드렸답니다.
한희철 목사(정릉감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