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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8. 묵상글 들 ( 부활 팔일 토요일 - 불신의 완고함에서 신앙의 확고함으로 < 김찬선 신부님> 등 )
*** 오늘 cpbc이외의 통신매체로 미사를 청취하거나 시청하셨습니까?
그러하셨거나 아니시면, 맨아래 김 알로이시오 신부님이 집전하신 미사 영상 중 10:17. 부터 18:21까지의 강론을 들어보시기를 권합니다.
맨아래 김 알로이시오 신부님이 집전하신 미사 영상 중 10:17. 부터 18:21까지의 강론을 들어보시기를 권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믿고 있는 신앙이 무엇인지? 다시 기억하고 생각해 보시자고 하십니다.
이번 감염병의 원인에 대한 예언적 성찰로 문명의 전환이 필요하고, 특히 관계성 회복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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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8.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활 팔일 토요일-불신의 완고함에서 신앙의 확고함으로
마르코 복음서의 부활 얘기는 가장 짧습니다.
아니, 짧다는 말로는 부족하고 너무 엉성하다는 느낌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먼저 만난 사람들의 얘기가 아주 짧습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에게 나타나셨다는 간단한 언급에 이어
길을 가다가 주님을 만난 얘기도 전하는데 루카복음에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얘기는 얼마나 길고 풍성합니까?
그리고 이들이 전해주는 부활소식을 믿지 않은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시어 완고하다고 야단을 치시는 얘기와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시는 얘기로 끝납니다.
이렇게 전하는 마르코 사가의 의도가 있는 것일까요?
어찌보면 주님의 부활을 전하려는 의도보다는
부활을 믿지 않는 제자들의 불신과 완고함은 들춰내고
제자들의 신앙은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더 큰 것 같은데 정말 그런 겁니까?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닐 겁니다.
마르코 사가가 이 복음을 쓸 때에는 이랬던 사도들이
오늘 독서에서 볼 수 있듯이 맹렬하게 복음을 선포할 때이지요.
그러니까 제자들마저도 믿기 어려운 것이 부활이라는 것과
그러나 이랬던 제자들도 완고한 불신자에서 확고한 신앙인 되었고
복음 선포자가 되었으니 이제 막 복음을 듣고 믿기 시작한 초심자들이
부활을 믿기 어려워하는 자신에 대해 너무 실망하지도 말 것이며,
부활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을 너무 만만하게 생각지도 말라는 뜻일 겁니다.
그렇습니다.
완고한 불신자가 확고한 신앙인을 바뀌는 것은 정말 쉽지 않고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니 확고함도 웬만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거지만
완고함은 어쩌면 확고함보다 더 흔들리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완고頑固나 확고確固 모두 '단단하고 굳을 고固'자가 들어가는 것으로서
완고하다 하면 나이 많은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생각나면서 그렇게
고정관념이 굳어질대로 굳어진 노인네를 깨는 것은 불가능타 생각되잖아요?
사실 무르거나 여린 신앙을 확고한 신앙으로 바꾸는 것은
어쩌면 세월이 지나면 거의 자연스럽게 될 수도 있는 거지만
완고한 불신을 확고한 신앙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그 완고함을
먼저 깨야 하기에 불가능타 생각되는 거지요.
제자들의 완고한 불신을 깨는 것은 이렇게 힘든 것이고,
그래서 사실은 예수님도 이 불신을 깨는 것에 실패하였기에
오늘 마르코는 제자들이 믿지 않았다는 얘기를 세 번이나 반복하고,
완고한 불신을 꾸짖는 것으로 자신의 복음을 끝맺은 것일 겁니다.
이 완고함을 깨고 신앙의 확고함을 갖게 하는 것은
예수님도 실패하고 성령만이 성공하실 수 있는 것이기에
예수님은 그것을 성령께 양보하고 유보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과 독서의 제자들에게서 이것을 교훈삼는 우리들이라면
먼저 지금 나는 나이먹을수록 신앙이 확고해져야 하는데
쓸데없는 고집만 강해지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하고,
다음으로 이제부터라도 성령께서 내게 임해주시기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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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8. 새벽을 열며.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빠다킹신부님.
국가 간 축구 경기를 하고 있습니다. 피파 순위 세계 131위인 나라와 세계 4위인 나라가 경기를 한다면 어느 나라가 이길 확률이 더 높을까요? 물론 각본 없는 드라마가 스포츠 경기라고 하지만, 그래도 세계 4위인 나라가 손쉽게 이길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 131위인 나라가 이겼습니다. 이 나라는 예선에서 피파 순위 7위인 포르투갈과 비겼고, 유럽의 강호 오스트리아를 2:1로 이겼습니다. 그리고 지금 피파 순위 4위인 잉글랜드를 16강에서 꺾는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바로 아이슬란드 이야기입니다. 2016년 유로 남자 축구 토너먼트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아이슬란드는 1년 내내 빙하로 뒤덮인 화산섬으로 축구 시즌이 가장 짧고, 인구 33만에 불과해서 축구를 할 수 있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축구 감독이 치과 의사를 겸할 정도였습니다. 더군다나 세계적인 슈퍼스타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파란을 일으킨 것은 단순히 운이 아니었습니다. 공동체의 힘이었습니다. 실제로 뛰어난 사람으로만 구성된 공동체보다 부족하지만 서로 유기적인 협조가 이루어지는 곳이 훨씬 더 생산성이 올라간다는 실험 결과도 있습니다. 즉, 개인보다 공동체가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공동체를 만드셨던 이유를 묵상해 보십시오. 그것도 당대에 내로라하는 뛰어난 사람은 모두 배제하셨던 것은 자기 자신만을 드러내는 것보다 함께하는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개인의 능력보다 공동체의 능력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 이후 제자들은 하나 되는 공동체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들은 도대체 믿지를 못합니다.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이야기에도, 시골로 가고 있는 제자 두 사람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씀을 듣고도 믿지 못합니다. 주님의 부활은 이미 제자들에게 예고하셨던 말씀이었지만, 믿지 않습니다.
하긴 제자 중에서 예수님을 팔아넘긴 배신자가 나왔기 때문에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는 모습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지요. 불신과 완고한 마음으로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존재 그래서 서로를 더욱더 성장시키는 공동체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앞에 발현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십니다. 믿음 없음은 주님께서 만드신 공동체의 붕괴를 가져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만드신 교회라는 공동체가 필요하고, 이 교회를 통해서 우리는 성장하게 됩니다. 따라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통해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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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의 어두운 면과 맞부닥뜨려 봐야 비로소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베르나르 베르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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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지난 4월 15일(수)에 제 어머니께서 하늘나라로 떠나셨습니다.
평생 새벽 3시면 일어나서 조용히 기도하셨던 어머니이셨지요. 따라서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시겠지만, 자식으로서는 아쉬움과 함께 큰 슬픔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장례 기간에 많은 분이 빈소를 방문해 주시어 미사를 봉헌해 주시고, 어머니 천상영복을 위해 기도해주셨습니다. 저를 비롯한 유가족 모두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어제(17일) 어머니를 충남 부여의 선영에 모시고 돌아오면서 많은 기억을 하게 됩니다. 아들 신부에 대한 걱정으로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잘 살아야 한다.”를 말씀하셨던 어머니, 가장 좋은 길을 사는 것이라면서 사제의 삶을 행복하게 받아들이라고 하셨던 어머니, 제가 쓴 묵상 글 보는 것을 좋아하시고 또 저의 강론이나 강의 듣는 것을 좋아하셨던 어머니. 저의 삶을 변화시켜주신 어머니셨고 가장 행복한 길로 이끌어 주셨던 어머니셨습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다시금 가슴이 뻥 뚫린 듯한 슬픔이 밀려듭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신앙과 사랑을 본받으며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삶을 더 열심히 살아야 함을 다짐합니다. 이 모습이 어머니께서 원하시는 것이고, 어머니를 위해 기도해주신 많은 분께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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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8. 이영근 신부님.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마르 16,15) -양주 올리베따노
오늘 <알렐루야 환호송>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날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시 118,24)
이 날은 인간에게 가장 큰 사랑이 베풀어진 날이기 때문입니다. 곧 당신의 죽음으로 부활생명을 선물로 주신 날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진 날입니다. 이 날의 아름다움을 교종 프란치스코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구원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아름다움”(36항)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막달레나 마리아도, 엠마우스의 두 제자들도, 모여 있던 열 한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는 못 하였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 하였던 것입니다. 맑고 투명한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은 까닭입니다. 이미 듣고 보았지만, 믿지를 않은 까닭입니다. 이를 믿게 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이를 우리는 요즈음 <제1독서>인 <사도행전>을 통해서 계속해서 듣고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이들 안에서 어떠한 어마어마한 일들이 일어나는지 말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오직 믿음 안에서 체험하게 되는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믿음이 삶이 될 때, 비로소 깨닫게 되고 증거 됩니다. 믿음이 삶이 될 때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당신의 몸을 매달 듯, 그렇게 자신을 내어놓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이 주어집니다.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마르 16,15)
여기에서, 먼저 알아들어야 할 것은 우리는 온 세상에로 “가라”는 파견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곧 자신 안에만 머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타자에게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신원임을 말해줍니다. 마치 당신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향하여 먼저 다가오셨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파견 받은 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파견하신 분의 뜻을 사명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곧 그분의 부활을 믿고 따르는 제자가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파견 받았으되, “온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파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곧 유다민족이나 이방민족이나. 우방이나 적국이나,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민족 온 인류에게로 가라는 것이요, 또한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로 가라는 파견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이웃이 되고 형제가 되고 한 가족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며 걸으며, 동료와 손을 잡고 걷되 다름 아닌 당신과 함께 걸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Laudato Si, 2015, 6,18)에서, 우리가 더불어 사는 집인 지구가 “우리와 함께 사는 누이이며, 두 팔 벌려 우리를 품어주는 어머니”(1항)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피조물에 관한 책임을 성경의 전승에 비추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제2장 피조물에 관한 복음).
그런데 오늘, 나는 내 형제에게 모든 피조물에게,
이웃이 되고 형제가 되고 한 가족이 되어주고 있는가?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마르 16,15)
주님!
제 자신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소서.
세상에로, 이웃형제들에게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아가게 하소서.
먼저 다가가게 하소서.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자국민이나 이주민이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친구이거나 적이거나
사람이거나 자연이거나, 더불어 형제가 되게 하소서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이 아닌, 복음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
함께 걷되 손을 잡고 걸으며,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기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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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8.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복음을 선포하여라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합니다. 다양한 사람이지만 그들을 인정해 주고 공감해 주며 위로해 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을 기억하고 그로부터 주어진 기쁨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보람입니다. 그러므로 일상 안에서 행복과 보람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는 정성이 꼭 필요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나와 만남을 이루는 이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은총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금맥보다 중요한 것이 인맥이다.’라는 말도 합니다. 한 개인과의 관계를 얼마나 큰 정성과 사랑을 가지고 맺어야 하는가를 말해줍니다. 관계의 형성이 곧 복음의 선포입니다. 한 사람을 주님 안에 감사할 수 있도록 눈뜨게 한다면 그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될지는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한 사람과의 선한 관계가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었던 까닭입니다. 자기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면 다른 어떤 것도 들어갈 수 없는 법입니다. “담기는 것은 담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달라진다.”는 옛 말이 있듯이 은총이 풍부해도 담을 그릇의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담을 수 없습니다. 비어 있지 않은 그릇에 무엇을 담을 수 있겠습니까? 부활의 사실을 이미 예고해 주었고 또 그대로 이루어졌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시고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16,15). 완고한 마음은 말씀이 전달되는 것을 막고 부활이 선포되는 것을 방해합니다. 우리 마음이 거칠어지고 굳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완고해진 내 마음을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으로 고쳐주시길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복음 선포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선포하는 방법은 다양하고 일상 안에서 표현되는 사랑이야 말로 주님을 만나는 감동을 줍니다. 어떤 기회를 특별히 만들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매 순간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큰 사랑이요, 복음의 선포입니다. 어영부영, 양다리 걸치기는 증거와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께서는 듣는 사람의 반응에 상관없이 당신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자유의지를 지닌 본인의 몫입니다. 우리도 누구의 말에 구애 받지 말고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자상함과 따뜻함으로 사랑을 가지고 온 정성을 다하여 그러나 사람의 눈에 들기보다 하느님의 눈에 들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전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을 읽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그들의 눈높이로 접근해야 효과 있게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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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8.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부활 팔일 축제의 마지막 날입니다.
물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과 믿는 이들의 기쁨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 강림의 순간까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죽음을 이기고 죄에 물든 우리가 주님 부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 기쁨을 우리 가운데 아직도 누군가가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오늘 복음을 반드시 읽고 묵상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서 “불신과 완고한 마음”으로, 주님 부활을 증언하는 이들이 기뻐하며 환호하는 ‘알렐루야.’를 받아들이지 못한 자신을 허물어야 합니다.
부활 팔일 축제 동안 우리가 읽고 묵상한 복음 가운데 오늘 처음으로 마르코 복음사가가 전하는 주님 부활 이야기를 접하게 됩니다.
간결하고 단순한 보도 속에 주님 부활 이야기의 핵심만을 전하는 마르코지만,
그가 진심으로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따르고자 하는 이들이, 부활하시어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싶다면 그분의 실천을 계속 이어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오늘 독서의 베드로와 요한처럼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예고하시면서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 됨을 밝히셨던 예수님의 말씀은, 부활 팔일 축제 이후에도 그 기쁨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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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8.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마술 공연을 본 적이 있습니다. 분명 눈으로 보았지만 믿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손동작 하나로 눈앞에 있던 동물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모자에 아무것도 없었는데 새 한 마리가 나오기도 합니다. 보자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색색의 스카프가 계속 나오기도 합니다. 허공에 손동작을 했는데 카드가 떨어지기도 합니다. 규모가 커져서 탱크가 사라지기도 하고, 비행기가 사라지기도 합니다. 눈으로 보고서도 믿지 못할 일들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이 마술의 묘미입니다. 마술사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고, 끊임없이 노력해서 신기하고, 재미있는 마술을 보여 줍니다.
바이러스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하였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에 인류는 바이러스의 존재를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바이러스로 인해 생기는 질병을 통해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1930년 전자현미경을 통해서 인류는 바이러스를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인류는 바이러스를 물리칠 수 있는 백신을 만들었고, 인류에게 고통을 주던 많은 질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최근에 인류는 바이러스로부터 새로운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동물에게 있는 바이러스가 변형되어 인간에게 전해지는 겁니다.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 이번에 세계적으로 퍼진 코로나19는 변형된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전파된 것입니다. 시간이 걸리지만 백신이 만들어지면 바이러스는 사라질 것입니다. 철저한 개인위생과 사회적 거리두기가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두 가지 차원에서 전해졌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지냈던 공동체의 신앙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을 보았습니다. 십자가를 지고가신 예수님을 배반하였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감격했습니다. 매일 함께 모여 기도하였고, 어려운 이들을 도왔고, 가진 것을 기쁘게 나누었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지면서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신앙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표징을 보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예수님과 함께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신앙의 신비는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체험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신앙’을 전해 주어야 했습니다. 무엇으로 신앙을 전했을까요? 예수님을 체험했던 사람들이 전해준 ‘전승’입니다. 전승은 교리가 되었고, 신학이 되었고, 법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전승’을 수호한 사람을 ‘교부’라고 부릅니다. 저의 신앙도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께서 전해주신 신앙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기록한 ‘복음서’입니다. 평생 성서를 번역하였던 예로니모 성인은 ‘성서를 모르면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라고 하였습니다. 성서를 가까이하면 우리의 신앙은 더 뜨거워지고, 더 깊어집니다. 나의 신앙이 약해졌다고 생각하면, 나의 신앙이 무뎌졌다고 생각하면 교회의 가르침을 가까이 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성서를 가까이 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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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8.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사도4,13-21 마르16,9-15
복음 선포의 삶
-예수님을 알아가는 참공부-
제 강론을 읽으시는 분은 우선 제목을 주시하시기 바랍니다. 강론 내용은 잊더라도 강론 제목은 곰곰이 마음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제 강론 쓰는 새벽 밤시간은 하루중, 하루를 여는 가장 중요한 시간입니다. 사제서품후 만31년 하루하루가 그랬습니다.
깊은 침묵의 고요중에 하느님을, 예수님을 공부하는 시간이요, 기도하는 시간이요, 묵상하는 시간이요, 회개하는 시간이 바로 강론 쓰는 시간입니다. 강론 묵상중 전날부터 내내 생각하는 강론 주제, 즉 제목입니다. 매달 강론집을 제본하여 나눠드릴 때도 강론을 보지 못하면 제목만 봐도 좋다고 말하곤 합니다.
“복음 선포의 삶-예수님을 알아가는 참공부-”
오늘의 강론 제목입니다. 정말 평생 한 번뿐인,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평생 인생학교에서 우리 믿는 이들이 할 참공부는 파스카의 주 예수님을 알아가는 공부, 하나뿐입니다. 바로 무지無知에 대한 궁극의 답도 이 하나뿐입니다. 인생 허무虛無와 절망絶望, 무의미無意味에 대한 답도 이 하나뿐입니다. 참으로 파스카의 주 예수님을 알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그 삶자체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의 삶도 없습니다.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해야 삽니다. 참으로 공부를 사랑해야 합니다. 공부중의 공부가 파스카의 주 예수님을 알아가는 공부입니다. 참으로 파스카의 주 예수님을 사랑하면 공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분을 날로 알아 닮아가고 싶은 것은 영적본능이기 때문입니다. 마침 어제 어느 교구 사제가 제 종신서원 성구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말라”(성규4,21).
바로 제 종신서원 성구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성규의 성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성규72,12).
사람에게 참 고질적인 것이 무지의 악, 무지의 병, 무지의 죄요 이것은 제가 늘 강조해온 것입니다. 바로 무지에 대한 유일한 해법은 파스카의 주 예수님을 알아가는 공부뿐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데, 무지의 병을 치유하는데 파스카의 주 예수님뿐이 처방이 없습니다. 참으로 파스카의 주 예수님을 알아가면서 무지로부터 해방되어 참자유의 참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공부에 대한 열망은 우리 인간의 근본적 욕구입니다. 무지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근본적 욕구의 반영입니다. 대한민국이 자랑스럽게도 세계 일류의 선진국, 문명국, 민주주의 국가에 도달하게 된 것도 참 대단한 교육열, 공부에 대한 갈망 덕분입니다. 그러나 궁극의 공부는, 공부중의 공부는 참진리이자 참지혜이신 파스카의 주 예수님을 알아가는 공부입니다.
세상 공부 많이 깊이 했어도 참사람되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파스카의 주 예수님 공부, 하느님 공부 하지 않았으면 헛공부입니다. 파스카의 주 예수님을 모르고 참 나를 모르는 공부라면 그 공부 무슨 소용이 있겠는지요. 결코 파스카의 주 예수님에 대한 공부 없이는 무지와 허무, 죽음에 대한 답도 없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파스카의 주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당신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불신과 완고한 마음의 무지한 제자들에게 나타나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입니다.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지닌 이들에게 발현하신 파스카의 주님을 만나는 순간 복음의 제자들은 분명히 회개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뵙는 순간 많은 것을 배우며 깨달았을 것입니다. 살아계신 파스카의 주 예수님을 만나면서 회개요 깨달아 주님을 배우는 공부입니다. 한 두 번이 아니라 평생과정입니다. 당신을 만난 복음의 제자들은 물론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사명의 숙제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바로 내 몸담고 있는 오늘 지금 여기가 세상의 중심이자 복음 선포의 현장입니다. 사람을 포함한 우리 주변의 모든 피조물이 복음 선포의 대상입니다. 참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 예수님을 사는 것이요 선포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모든 피조물이 구원받을 길은 이 하나뿐입니다. 자리는 문제가 아닙니다. 어디든 뿌리 내리면 거기가 바로 복음 선포의 자리입니다. 우리 자신이 파스카의 주 예수님과 하나될수록 그 삶자체가 바로 참 좋은 복음선포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베드도와 요한이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서두의 묘사가 생생한 증거입니다.
‘그 무렵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학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평생 파스카의 주 예수님과 동거동락하여 배우고 공부했기에 그리도 담대하고 자유롭고 지혜로울 수 있었던 두 사도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담대하게 합니다. 무지에서 오는 온갖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허무에서 오는 무기력감을 극복하게 합니다.
이런 진리이신 파스카의 주 예수님을 알아갈수록 샘솟는 열정에 순수입니다. 이런 진리이신 파스카의 주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복종이 순교적 삶의 원동력이 됩니다. 두 사도의 예루살렘 최고의회에서의 다음 증언은 오늘 말씀의 백미요 절정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담대하고 자유로운 진리의 사람, 파스카의 주 예수님의 사람,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진리이신 파스카 주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항구히, 충실히 복음 선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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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8. 작은형제회.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 부활에 대한 믿음을 촉구합니다.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마르 16,11).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마르 16,13).
예수님 곁에 머물며 직접 가르침을 듣고 때로는 파견되어 주님의 일을 수행하기까지 했던 소위 엘리트 그룹 열한 제자들이 영 면이 서지 않네요. 예수님 생전에 수난과 부활 예고를 여러 차례 들었건만, 좀처럼 부활 소식을 믿지 못하니 말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게 맞다면 마리아 막달레나나 다른 두 제자에게가 아니라, 그래도 자기들에게 먼저 나타나셔야 한다고 생각한 걸까요. 그들의 완고한 불신 안에는 정예부대 제자단의 우월감과 주님과 끝까지 함께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구겨진 자존심도 뒤엉켜 있는 듯 보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마침내 열한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시지요. 하지만 꾸짖음도 잠시, 곧바로 그들을 파견하십니다. 주님의 꾸짖음은 실망이나 단죄, 영원한 절연이 아니라 깨우쳐 주시려는 가르침의 한 방식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직도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들을 뭘 어떻게 믿고 파견하시는 걸까요? 그들의 신앙은 아직 검증되지 못한 상태인데도 말입니다.
제1독서에는 유다 지도자들, 원로들, 율법 학자들에게 신문 당하는 베드로와 요한이 등장합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푼 좋은 일 때문이지요.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
사도들의 변화된 모습이 보이십니까? 그들은 겉으로만이 아니라 속부터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제대로 믿지도 못하는 부적격자 상태에서 "감히" 온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파견을 받은 그들은 자기들의 믿음 수준과 스승의 믿음이 완전히 다른 차원임을 절감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아무리 좋은 일을 보여 주고 그분의 가르침을 전해도 자기들을 불신하고 배척하는 세상 앞에서 자기들의 믿음이 어떠했는지를 떠올리며 인내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제자들은 "무식하고 평범한"(사도 4,13) 자기들의 복음 선포를 들으면서도 기꺼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 앞에서 무한한 겸손과 존경을 품게 될 것입니다. 믿지 못했던 자기들보다 백 배 천 배 나은 그들 앞에서 겸손해지고 낮아지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주님의 선택입니다. 특출난 인성도 충직한 신앙도 제대로 갖추지 못해 한없이 부족한 상태인 우리에게 주님께서 모험을 감행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그분을 제대로 믿지 못하지만 그분은 우리를 진심으로 믿으시기 때문이지요.
우리를 향한 주님의 믿음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도망치고 외면하고 미지근하던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 자체가 불구자를 일으킨 것 이상의 기적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그래서 더 낮아지고 더 겸손해지며 더 인내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부활 축제가 무르익어 갑니다. 부족한 죄인인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면서" 부활의 증인으로 변모할 때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서 연장되고 완성되는 것이지요. 우리 영혼 깊숙한 곳에서 울려나오는 "알렐루야"를 선포하지 않을 수 없으니 우리 역시 부활의 사람입니다. 부활의 증인인 벗님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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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8.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
오늘 복음(마르16,9-15)은 마르코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발현사화입니다.
복음은 세 발현사화와 함께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이들의 말을 믿지 않는 제자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부여된 세상 복음화의 사명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로 인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만도 아니고 전 세계가 함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것도 부활시기에.
모두가 힘들어 하고 있는 이때에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이 난국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먼저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적극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라는 정부와 질병본부의 말을 잘 믿고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지금이 바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부활하시기 위해 먼저 수난과 십자가 죽음의 고통을 겪으신 예수님의 본질적인 사랑과 마음을 서로에게 드러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본질적인 사랑과 마음은 '이타적'(利他的)입니다. 완전히 너를 위한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먼저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구체적인 사랑과 마음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사도4,20)
복음화의 사명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서로가 먼저 너에게 예수님의 사랑과 마음이 되어 주어야 하고,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화 사명의 절대적 전제입니다.
불신과 완고함을 떨쳐버리고, 담대하게 말과 행동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도록 합시다!
오늘도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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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8.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사도행전 4,13-21
마르코 16,9-15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천국 같은 봄날
지난 몇 주간, 수도원 마당은 천국이 따로 없었습니다.
이 꽃이 피어나면 저 꽃이 떨어지고, 기다렸다는 듯이 또 다른 꽃이 고개를 내밀고...
따사로운 봄 햇살 아래 잠시나마 꿈결 같은 꽃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꽃향기가 얼마나 그윽하던지 지나가던 사람들까지 들어와서 잔뜩 분위기를 잡곤 했습니다.
꽃그늘 아래서 포즈도 잡고, 사진도 찍고 그렇게 기뻐들 하지요.
그런데 그것도 잠시뿐이네요.
무심하게 우리 곁에 다가온 봄은 낙화(落花)와 더불어 멀어져 갈 것입니다.
낙화의 순간이 또 어김없이 찾아올 것입니다.
꽃 같은 순간은 잠시뿐이네요.
화사한 날들도 찰라군요.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봄도 곧 떠나갑니다.
자연의 순환을 신기한 눈으로 관찰하고 있습니다.
꽃잎들이 떠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연초록 잎들이 앞 다투어 솟아오릅니다.
‘꽃잎의 낙화에 이은 새순의 등장’을 바라보며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한분의 희생으로 인해 뭇 생명들이 되살아났습니다.
예수님 한분의 죽음으로 인해 수많은 죄인들이 희망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한분의 부활로 만물이 소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부활로 인해 모든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의 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사건 이후 제자들의 삶은 그야말로 암울함 그 자체였습니다.
다들 깊숙한 동굴로 숨어들어갔습니다.
상실감, 패배감, 낙담, 두려움이란 육중한 바위로 꽉 막혀있는 어두운 동굴 속에 자신들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제자들의 눈을 가로막고 있던 불신과 의혹의 바위를 치우십니다.
제자들 한 명 한 명의 내면 안으로 부활하십니다.
제자들이 그토록 오랜 나날 염원해왔던 스승과의 참 만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부활 예수님과의 일대 일 만남 이후 제자들의 인생은 180도 바뀝니다.
그야말로 화사한 봄날로 바뀝니다.
더 이상 두려움도 없습니다.
더 이상 절망하지도 않습니다.
더 이상 의혹을 품지도 않습니다.
제자들은 다시금 청춘을 되찾았습니다.
이제 남아있는 것은 천국 같은 봄날입니다.
비록 제자들의 인생이 전과 같이 부침을 거듭한다할지라도 그들의 내면에는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굳게 형성되어 계시기에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더 이상 그 무엇도 그들을 속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 이상 방황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더 이상 어두운 동굴 안에 갇히지 않을 것입니다.
부활 이름으로 다시금 제자들을 찾아가신 예수님, 그 날 이후 제자들의 인생은 항상 봄이었습니다.
부활 예수님이란 이름으로 내게 오신 당신,
그날 이후 제 인생도 항상 봄이랍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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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8.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사도행전 4,13-21
마르코 16,9-15
교회에 대한 공경과 복음에 대한 공경은 하나다
어느 날 신문에 나이 드신 어머니를 판다는 광고가 실렸습니다.
그날 저녁 한 부부가 광고에 적힌 주소를 보고 그 집을 찾아갔는데, 집은 뜻밖에 웅장했습니다.
벨을 누르자 한 노파가 그들을 맞았습니다.
남편이 노파에게 물었습니다.
“어느 분을 파시는 거죠?”
“바로 나라오. 그런데 남들은 있는 부모도 안 모시려고 하는 세상에 당신들은
무슨 생각으로 늙은 어머니를 사려고 하오?”
“저와 제 아내 모두 어려서 부모를 잃었답니다.
그래서 저희는 항상 부모님을 모시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부러워했지요.
그리고 마침 신문에 광고가 났기에 찾아왔습니다.”
머리를 긁적이는 남편의 말에 노파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뜻이 맞으니 이것으로 거래가 성사되었군.
그럼 이제부터 어머니로서 말을 놓겠다.
아무래도 너희 가족이 이 집으로 와서 함께 사는 것이 좋겠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너희 부부의 차림새를 보니 넉넉한 것 같지 않은데, 어떻게 나를 모시고 살겠느냐?
그러니 너희가 이 집에서 함께 살자꾸나.”
“그럼 왜 스스로 돈을 받고 팔겠다고 광고를 하신 겁니까?”
“만일 내가 양자를 구한다고 해보아라. 아마도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겠지.
하지만 모두 돈을 보고서 오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없는 살림에도 나를 사러 왔으니 진정 내 아들딸이 될 자격이 있다.
지금부터 이 집과 재산은 너희 것, 아니 우리 것이다.
나는 너희 가족과 한 식구가 되어 남은 삶을 행복하게 보내고 싶구나.”
이 할머니는 자신을 공경할 줄 모르는 젊은 사람은 돈을 주어도 잘 관리하지 못할 것을
아는 분입니다. 부모에게 하는 것이나 부모가 주는 재산을 대하는 것이나 다를 수가 없습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누군가 복음을 전하면서도 복음을 전하라고 파견한 교회를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대한다면 그 사람이 전하는 복음은 복음일 수 없습니다.
본당에 있다 보면 하느님을 체험했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어떤 분들은 본당 사제에게 알리고 본당 사제가 안 믿어주면 개인적으로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립니다.
그리고는 교회가 자신들을 박해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그 자체로 그런 체험들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오상의 비오 성인은 교회가 자신의 체험을 받아들이지 않자 몇 년이고 혼자서 잠자코 미사를 했습니다.
교회가 파견하지 않으면 자신이 전하는 체험이 어쩌면 교회를 분열시키는 잘못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공경할 줄 아는 사람만이 복음도 온전하게 전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부모라고 한다면 복음은 그 교회가 주는 재산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저것도 존중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성격이 있듯이 하느님도 성격이 있으십니다.
하느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사랑과 반대되는 행위입니다.
사랑은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인데 그와 반대되는 것은 매우 싫어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께 기도하실 때 교회가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본성을 버리시는 행위는 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복음 때문에 교회가 갈라질 수 있습니다.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기쁜 소식을 받았다고 주장할 때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예수님께서 부활의 기쁜 소식을 각자가 전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모든 여인과 제자들은 일제히 사도들에게로 향했습니다.
만약 각자가 그 기쁜 소식을 전했다면 교회를 파견하신 의미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들은 어떠한 증언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사도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의 불신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사도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고 하십니다.
부활을 목격했던 이들 개인을 파견하시지 않고 교회를 파견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교회가 하나가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당시 교회가 부와 권력에 집착해 있을 때 가난으로 나아가려 했습니다.
교회는 당연히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를 쫓아낸 교황은 그날 꿈에 자신이 사는 라떼란 성전이 무너지는 것을
프란치스코 성인이 받들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의 회칙을 인준해줍니다.
이렇게 필요하면 하느님께서 개입하시어 교회가 하나 되게 합니다.
교회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뛰쳐나간 개신교들이나 수많은 이단과 사이비들은
하느님께서 당신 기쁜 소식이 교회를 통해 선포되기를 원하셨음을 간과한 까닭에 생긴 것들입니다.
아무리 교회에 불만이 있어도, 자신의 체험이 아무리 강력해도 하느님께서는 그것이 교회를 통해서만 선포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이단이나 사이비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개인적인 체험이 아무리 강해도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교회의 권위를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그것을 바라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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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18일 토요일 부활팔일축제 토요일 매일미사
_김종화 알로이시오 신부집전
https://youtu.be/TQInxVVRKS0 (32:48)
https://www.youtube.com/embed/TQInxVVRKS0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2020년 4월 18일 토요일 부활팔일축제 토요일
Saturday in the Octave of Easter
김종화 알로이시오 신부(작은형제회)집전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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