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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미를 초대하기까지.
아미는 올해 대학생이 된 그레이셔스의 어머니입니다. 그들은 라이베리아에서 왔어요. 야만적인 관습인 여성할례를 거부하고 그곳을 탈출한 것이지요.
알트루사가 아미를 알게 된 과정은 이렇습니다.
작년 말, 그레이셔스 이야기가 경향신문에 기사로 실린 적이 있지요. 문은희 선생님께서 그 기사를 보고 그레이셔스를 만나보자고 제안하셨어요. 그 제안으로 이들과의 만남은 시작되었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그레이셔스는 좋은 성적으로 대학에 합격했지만 눈에 병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난민으로 형편이 어려워 입학 여부가 불투명했던 상황이었어요.
알트루사 난민과함께살기 모임에서 그레이셔스와 어떻게 연락할 수 있을지 의논을 시작했습니다. 우선 한제선 님이 난민지원단체 피난처 간사와 연락을 취해 소통의 길을 열었어요. 그리고 나서 우리는 그레이셔스에게 카드를 썼습니다. 기사를 보고 느낀 바와 친구가 되고 싶은 알트루사 모람들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카드를 받고 좋아했습니다. 힘이 되고 감동했다고요. 그들도 우리를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난민과함께살기 모임은 그레이셔스와 아미를 온라인 상으로 초대했습니다. 우리는 처음으로 얼굴을 맞대고 서로를 소개하고 인사를 나누며 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기사가 나간 후 그레이셔스를 알아보는 한국인들이 늘었고 대학은 그레이셔스에게 한 학기 장학금을 지급하여 입학이 가능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레이셔스는 어려서 엄마를 따라 한국에 온 터라 한국어를 아주 잘했습니다. 그러나 아미는 딸만큼 한국어에 익숙하지는 않았어요. 아미는 영어를 씁니다. 그레이셔스가 중간에서 간단히 통역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날은 주로 그레이셔스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나누었어요. 아미는 몇 마디 하지 않았지만 아주 인상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우리가 먼저 자기 소개를 한 후 그레이셔스와 아미가 자기소개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때 아미는 우리에게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당신들은 어떻게 이 단체에 나오게 된 것이죠?"
초대했던 난민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은 것이 처음이었어요. 그도 우리 사정을 궁금히 여겼습니다. 우리가 어떤 이들인지 궁금해 했어요. 어찌보면 아주 당연한 일이지요. 그러나 이런 질문을 별로 들은 적은 없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습니다. 아미가 남달리 능동적이고 막힘없이 표현하고 사람에게 관심이 많았기 때문일까요?
질문해 준 아미에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제사 당시 모임을 중간에서 연결해 주었던 피난처 간사 오은정님은 아미가 지역에서도 아주 적극적으로 지도력을 발휘하는 리더라는 사실을 들려주었습니다. 당시 줌 모임에 참여했던 모람들을 모두 돌아가며 자기가 알트루사에 오게 된 사연을 제각각 아미와 그레이셔스에게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자리에서 다음에는 그의 활동이 궁금하다고 아미가 하는 지역활동 이야기를 들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아미도 좋다고 흔쾌히 약속해주었습니다. 그렇게해서 이번 화요모임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 만남 이후 알트루사 모람들에게 화요모임 소식을 전했습니다. 소식을 전해 들은 구미정 선생님을 통해 이은교회에도 관련 내용이 전달됐습니다. 그랬더니, 아주 작은 교회임에도 그레이셔스에게 20만원을 모금하여 후원금을 전달해 왔습니다. 알트루사에서는 그것을 곧 그레이셔스에게 전달했습니다.
2. 새로운 얼굴, 더 많은 관심 - 이은교회와 아담, 새로운 모람, 통역자 정기연, 그리고”
몇 년 전 알트루사 모람들과 친구가 된 수단에서 온 청년 아담도 알트루사가 그레이셔스에게 관심 갖는 사실에 기뻐했습니다. 자신도 난민과함께살기 모임에 시간이 맞는다면 함께 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래서 낮에 일하는 아담이 참여가능한 저녁 8시에 화요모임을 열기로 모람들과 의견을 모았습니다. 매번 회의를 그 시간에 열기는 어렵겠지만 아담이 참여한다고 하니 그 의미를 새기며 가급적 화요모임은 그의 시간에 맞춰보자 했어요. 그래서 저녁에 모임을 열게 된 것이지요.
후원으로 마음을 모아준 이은교회 교우들에게도 아미와 대화하는 화요모임 소식을 알렸습니다. 구미정 선생님이 적극적으로 교회에 알려 권미영, 안나 님 두 분이 함께 아미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전체 메일로도 모임 사실을 전하니 화답이 있었습니다. 두 분이셨는데 조윤숙 선생님과 문 선생님이십니다. 조윤숙 선생님은 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다며 화요모임 참여 의사를 밝혀주셨지요. 보통 전체메일 회신자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두 분의 반응이 반가웠습니다. 조윤숙 선생님은 저도 처음 뵈었습니다. 반가웠습니다.
오랜만에 장미란, 이인미, 김윤정, 김양미, 선생님도 함께 하셨습니다. 평소에 난민에 관심 갖고 후원도 하셨던 분들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알트루사 대표 통역자나 다름없는 봉사자 정기연 님이 역시나 통역에 나서주었습니다. 기연 님은 아미와 모람들 사이를 훌륭하게 이어주셨습니다.
3. 아프리카 어머니 연구?
모임에 참여하기는 어려웠지만 문선생님은 도움되는 말씀을 전해주셨어요. 아프리카 여성들이 이해하는 모성과 어머니에 대한 생각이 우리와 다르다며 앞으로 어머니연구 팀에서 연구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그러고보니 그간 알트루사에서는 아프리카 이웃들 가운데 여성으로는 콩고민주공화국 출신 여성들과 라이베리아 여성을 만난 셈입니다. 기억을 떠올려보니 그들이 우리와 태도가 다르고 양육 방식이 다른 것을 봅니다. 가령 다른 집 아이들에게도 내 집 아이처럼 엄격하고, 그러면서도 우리 아이들에 비해 그들의 자녀들이 표현이 분명한 점 등이 인상적이어서 몇 가지 기억이 났습니다.
서로 거울 삼을 수 있는 우리와는 또 다른 그들의 세계를 알아가는 것은 그만큼 서로에게 각자의 한계를 알게 하고 그것을 극복하며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겠지요. 서로를 더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 역시 물론이겠고요. 이런 의견을 간단하게라도 모람들에게 전했는데 그래서였는지 다른 때모다 모임 참여 모람이 많았습니다.
4. 엄마 아미
아미는 아이가 원하는 걸 지지하는 엄마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아이가 똑똑해서 한국에 온 후 5개월 정도 지나자 한국말을 잘했다고 해요. 자신은 간호사가 되고 싶었는데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아이는 똑똑하니 공부해서 원하는 바를 이루면 좋겠다고 여겼대요.
아미는 자기 딸 그레이셔스가 의사가 되기를 바랐답니다. 지금 처지에서 가족 가운데 의사가 있으면 좋겠고 난민공동체를 위해서도 의사가 절실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아미가 청소년이 되면서 자신은 의사가 되기 싫다고 했답니다. 가수가 되고 싶어 했대요. 그래서 아미는 가수가 될 거라면 가스펠 가수가 되는 게 어떻겠냐고 권했답니다. 의사를 계속 강요하는 엄마는 아니었지만 엄마로서 아이가 생각해 볼 수 있게 좋은 제안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미는 독실한 기독교인입니다. 지금은 대학에 들어가 통번역가가 되고자 하는 걸 보면 아미의 딸 그레이셔스는 자기대로 계속 실험하며 자기 길을 개척해 가는 것 같습니다. 아미 말로는 라이베리아도 아이들에게 엄격하고 공부를 중시하긴 하지만 한국만큼 대학이나 성취를 강요하고 부담주는 건 아니랍니다.
모임 중에 아미는 1년 6개월된 딸 조안나를 안고 있었어요. 조안나가 요구하는 걸 계속 집어주며 자기 이야기를 했어요. 조안나하고도 인사를 나누고는 오늘 저녁에는 네가 엄마를 좀 도와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조안나가 비교적 협조를 잘 했어요. 이야기 나누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으니까요.
아미는 어려운 환경이지만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힘이 된 건 아이였다고 합니다. 아이가 있어 힘을 내서 살 수 있었다고요. 저는 어려서 내가 엄마의 짐이 된다는 생각을 오래 했었는데 엄마의 입장은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먼 나라에서 온 이웃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듣게 되었어요. 나 때문에 엄마가 고생한다가 아니라, 내가 있어서 엄마가 힘을 내어 살고 일할 수 있었다! 는 해석은 얼마나 다른 걸까요. 그레이셔스에게 이런 아미의 태도가 어떻게 영향을 미쳤을지 짐작이 되었습니다.
5. 난민도 목소리를 내자!
아미는 지역에서 난민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도 목소리를 내자는 생각이 들었대요. 적극적으로 난민의 목소리를 내자고요. 지역 친구들 반응이 좋았던 모양이에요. 정말 공동체가 만들어졌어요. 난민공동체는 서울에 와서 난민을 위해 시위도 하고 지역 주민들을 위해 봉사에도 적극으로 나섰습니다. 겨울에는 지역에 사는 한국노인들이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눈 치우기에 열심이었대요. 작년에는 마스크를 제작해서 마스크가 필요한 한국인들에게 기증도 했습니다. 이것에 대해 뉴스 영상도 있으니 링크를 답니다. 저는 지역에서 나서서 이런 일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능동적이고도 선한 마음으로 봉사에 나선 아미의 마음이 저와도 다르다는 생각에 놀랍고 감탄하면서도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먼 나라에서 난민으로 살면서도 자신의 힘으로 적극적으로 동료들과 함께 이웃을 위해 행동하는 모습이 말이에요. 그들에게 한국인들이 곱지만은 않았을 텐데도 한국 노인들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나서다니 말입니다. 우리도 못사는데, 한국인 가운데도 어려운 이들이 많은데, 외국인, 난민, 이주민을 돕는다는 게 왠말이냐는 태도가 우리들에게 있는데 아미는 그렇게 여기지 않았어요.
6. 당신의 부모가 궁금합니다!
용기 있고, 능동적이며, 선한 마음으로 한국에서 살아가는 아미의 특별함에 모두가 감탄했던 것 같습니다. 중간 중간 아미에게 질문을 했고 아미는 성의껏 대답을 해주었는데요, 아미의 이야기를 듣던 김윤정 님이 당신의 부모각 궁금하다며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인지 부모님 영향이, 부모님 교육이 남다를 것이라 예상했던 것 같아요. 그 덕분에 우리는 아미 가족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아미에게는 언니들이 있었는데 그 언니들은 할례를 받았답니다. 그런데 군인이었던 아버지는 두 딸의 할례를 보고 셋째 딸에게는 도저히 할례를 받게 할 수 없다고 여겼던 것 같아요. 그는 할례를 거부했습니다. 군인이었던 그가 할례를 거부하자 그는 총살을 당했답니다. 그길로 아미는 도망을 칠 수밖에 없었고요. 아미 나이 열세 살이었다고 합니다. 그후론 난민캠프를 전전하며 살아야 했다고 해요. 아주 어려운 시간들이었다고 합니다.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그 난민캠프에서 살며 몸이 좋지 않았고 영양이 좋지 못해서 그레이셔스 눈이 좋지 않게 된 게 아닌가 추측했던 것 같아요.
너무 엄청난 사실에 함께 있던 이들은 모두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딸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그의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또 여러 가지를 고민해보게 되었습니다.
7. 아이들을 도와주고 상담할 사람들은 있는가?
난민 아담이 아미에게 질문했습니다. 자신이 아는 이집트인 가족이 있다. 아이들이 괴롭힘을 당할까봐 신경을 많이 쓴다. 당신은 어땠는가? 아이들을 도와주고 상담하는 이들은 있는가?
아미는 자신의 딸 그레이셔스도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고 하더군요.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없을 만큼 딸이 우울해하기도 했다고요. 난민공동체 어른들이 있는데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지원도 끊어지고 모이기도 어려워 어려움이 있다고 합니다. 아담은 마음 아파했지만 우리는 괜찮을 거라며 아미를 위로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그렇게 말합니다. 오히려 저희를 위로하곤 하지요. 우리는 괜찮을 거라고요. 지금의 어려움에만 사로잡혀 있지 않습니다. 더 크고 높은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 점에 늘 감명받습니다.
8. 아미와 공동체와 함께할 방법
감히 아미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난민과함께살기 모임에서는 아미와 공동체와 함께 협력할 길을 찾고자 합니다. 무엇이든 의견을 듣고 누구와도 함께 힘을 모아보고자 합니다. 같이 살기를 실천해보고자 합니다.
저 혼자의 후기에 불과합니다. 같이 참여했던 분들의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마지막으로 정기연 선생님의 소감을 묻지 못했던 게 마음에 걸립니다. 통역자에게 통역만 부탁하고 말이지요....^^;
첫댓글 아미 언니들의 할례 여부에 관해서는, 제가 질문했습니다. 아미의 할머니께서 '여성할례'를 오랜 세월 집도해오신 분이라고 해서, 한편으로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보충해주어서 감사감사합니다. 다른 분들도 제가 놓친 것, 혹은 달리 기억하는 것 달아주시면 매우매우 감사하지요.
아버지가 두 딸의 할례이후 기독교인이 되었어요. 그래서 셋째 딸인 아미에게는 할례를 할 수 없었다는 말 기억하고 있어요.
ㅎ혼자만의 기억? ㅎㅎ 전 그렇게 기억해서 엄청 놀랐거든요.
아!! 내용이 훨씬 풍부해지네요! 고맙고 고마워요!
아미의 용기와 아미가 살아온 힘은 어디서 나올까? 궁금해집니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 이야기는 너무 아프고 위대하네요.
그쵸? 희영씨 반응 무척 반갑습니다. 같이 하는 거니까요. 파일로도 들을 수 있으니 참고하셔요!
아미님과 대화를 나눈 밤 마음이 욱신욱신 많이 아팠어요. 여성할례라는 신념을 믿고 행한 할머니, 목숨을 걸고 그 신념을 바꾼 아버지, 13살에 난민캠프생활을 선택한 아미님의 삶이 너무나 생생하게 다가왔어요. 난민캠프에서 또 할례가 진행되자 또다시 다른 길을 선택한 아미님, 한국에 와서 아프리카난민공동체에서 난민의 권리를 옹호하고 난민가족과 한국 이웃을 돌보는 삶을 선택하는 아미님의 삶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미님은 냉혹한 현실을 피하지 않고 자기 길을 선택해서 이웃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듯 보였어요. 13살에 집을 떠난 아미님에게서, 어린 시절 가족과 떨어져 자기 삶을 개척해나간 (어머니연구) 어머니들이 많이 생각났어요. 나의 어머니도 포함해서요. 자식 보며 견뎠고 버텼다고 했던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어요. 아미님과 비슷해보였어요. 아이들이 삶의 희망이고 원동력이었겠구나 싶어 그 말이 또 달리 들렸어요. 저도 엄마라서 그 맘이 이해가 됐어요. 큰 딸이 부산에서 인종차별과 겪을 때 엄마인 아미님은 그것과 싸워야 한다고 이야기했다고 해요. 현실을 피하지 않고 용감하게 대면하는 마음이었겠구나..싶었습니다.
자새한 후기, 다시 모임에 참석해서 이야기 듣는 기분이 들 정도로 성의껏 자세히 전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댓글들이 없었으면 어쩔뻔 했나 싶어요^^
마지막에 아담님이 아미님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많이 났어요. 가족을 떠나 비슷한 처지에 있는 아담님의 이야기가 아미님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겠구나 느꼈어요. 슬픔이 위로로 나누어지는 현장이었어요. 아담님이 사람을 향해 품는 따뜻한 애정이, 같이 있는 저에게도 큰 위로가 되더라구요. 그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어서 감사했어요. (소감이 길어졌네요^^;;)
좋은 글 읽으며 가슴 벅찼어요. 댓글들 보면서 눈물 흘리고 있어요. 그 자리에 같이 있지 못했지만 지금 같이 있는 듯이 느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요!!!! 우리가 혈연 포함 단위에 멈추어 살고 있을 때 아프리카 사람들, 특히 어머니들은 공동체의 어머니로 살아간다고 하지요. 그러니 어디서든지, 난민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의 땅에서도 공동체 생활의 윤리로 사는 거예요. 미국에 이민 가서도 우리나라 사람들과만 사는 버릇 (윤리)으로 살다가 흑인 소동을 경험한 경험과 대조되는 거지요. It takes whole village to raise a child.라는 말이 아프리카 명언이지요. <난민과 같이 살기> 운동으로 우리 마음을 넓히는 기회가 되기 바랍니다.
아프리카 윤리가 어머니들 태도와 그렇게 연결되는지 미쳐 생각해보지 못했어요. 나와 아주 다른 이웃을 만나 저를 알게 되고 자극을 받으니 이웃을 만나는 일이란 걸 새삼 다시 또 의미 되새기게 되네요.
아미님이 우리를 만나고 있는 내내 어린막내를 업고, 칭얼거림을 달래며 힘들고 짜증이 날만도한데 한번도 얼굴을 찡그리거나 우리를 의식해 미안해하거나 하지 않았어요. 아미님에 삶을 보면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힘이 남다른데 부모님 얘기를 들으며 놀랄수 밖에 없었어요. 댓글을 쓰며 다시 생각되는데 부모는 아이들에게 숨쉬는 공기 같은것이구나..
목숨을 걸고 지켜낸 가치를 아미님이 고스란히 받아 삶으로 살아 내고 있구나.
먼 이국땅에 와서 이곳 사람들의 어려운 처지를 돕고 마음을 나누며 사는 모습에 고개가 숙여졌어요. 아미보다 사회적으로 안전한 장치안에서 사는 저에 삶도 돌아보게 되어 여운이 계속 남는 시간이었습니다. 꼼꼼하게 정리해주신 후기가 더욱 반가웠어요.
감사합니다.
섬세한 관찰과 표현이 정말 그렇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같이 해서 좋았어요.
자기만의 아이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아이라면 눈치 볼 것 아니지요. 우리는 아이보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거라 아이에게 짜증도 내고 다른 사람에게 미안해 하기도 하지요.
@문은희 선생님 댓글을 여러번 읽었어요. 사람에 대한 믿음에 문제인거 같아요. 알트루사에서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면 신통하고 사랑스럽고, 우리 아이들을 잘 키우기위해 아낌없는 조언을 듣고 감사해하며 살았어도 "우리 모두에 아이"라고 생각 못해봤어요. 아니 제 마음에 확신이 없었던건가 하게도 되요. 같이 살고 싶은 욕구를 느낀적도 있는데 말예요...
아미 만나고 난 밤,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내가 어린아이에게 어떤 엄마인가를 저절로 돌아보게 했어요.
내가 사랑을 한다고 할 때, 과연 필요한 사랑을 주는 엄마인가, 다른 이들과 만나는데 어려워했던 것은 내가 그들에게 눈치를 보며 맞춰야하는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인지,
그들 각자를 관심으로 살피고 돌보는 마음이 부족해서 였는지 말이예요.
아미가 엄마는 아이를 지원하는 존재라는 말의 울림에 계속해서 나를 되묻게 되었어요.
그러게요. 난민과함께살기를 시작할 때는 이런 의미가 있고 이런 기회가 될 거라는 걸 전혀 몰랐어요. 신기하고 신기합니다.
기록과 댓글을 읽으며 함께하면서도 많은 것을 놓친 것에 마음 쓰이지만 앞으로 언제 눈 뜰지 모른다고 다독이고 있어요. 계간지 3년앞을 예측 못했지만 이렇게 15년을 함께하고 있으니 의심많은 저에게 계속 믿음의 기회 주심을 잊지않도록 노력해야지요.
같이 노력하십시다. 좋은 얘기네요.
한제선님한테 난민과 함께살기운동에 대해 듣고 지금 자세히 읽어봅니다. 난민으로 살고 계실 분들의 어려움이 얼마나 크고 막막할까 생각해 봅니다. 저도 부족하지만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아이디 바꾸셨네요! 인터넷 기능을 잘 익히시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응원과 참여로 부족한 저도 더 용기를 내어 참여하게 됩니다. 정말 감사해요. 모두에게 큰 응원이 됩니다!
선생님과 함께라니! 꿈만 같아요!!
두분 한샘들께 오히려 제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