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글사전 나
- 나 -
♣ 나[那]어찌하여
♣ 나계[羅計]나후성(羅睺星) 계도성(計都星). 성명가(星命家)가 나후는 천수성(天首星)이라 하고 계도는 천미성(天尾星)이라 하는데 서로 마주 보고 행하여 모든 별을 난절(攔截)한다 하였음.
♣ 나공원[羅公遠]당 나라 명황(明皇)이 나공원(羅公遠)이란 도사(道士)를 따라 월궁(月宮)에 갔다가 온 일이 있다 한다.
♣ 나관극청살[羅貫極靑殺]나관은 삼라만상을 가리키는 말이고, 청살(靑殺)은 사책(史冊)을 뜻하는 것으로 온갖 사책에 나열된 모든 것들을 두루 박람했다는 뜻이다.
♣ 나국[拿鞠]나국은 범죄혐의자를 의금부(義禁府)에 가두고 의금부의 당상관(當上官)이 회좌(會座)하여 신문하는 것. 나처(拿處)는 나국하여 처결(處決)하는 것.
♣ 나군[羅裙]나군은 부녀자의 화려한 비단 치마로, 탁문군을 가리킨다.
♣ 나궁[螺宮]나궁은 절을 말한다.
♣ 나기[羅綺]성장(盛裝)한 여인을 가리킨다. 소식(蘇軾)의 시에 “봉오리 터지는 복사꽃 봄을 이기지 못하는 듯. 기녀(妓女)들 모인 속에, 첫째 가는 인물 있네.[小桃破萼未勝春 羅綺叢中第一人]”라는 표현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13 答陳述古》
♣ 나나[哪哪]나례 때에 악사, 기생, 악공 들이 지르는 소리
♣ 나대[螺黛]나대는 눈썹을 그리는 도구로서 소라 껍질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나라[攭攭]깃이나 털이 없는 모양
♣ 나라곡[那羅谷]불가의 말로 극락(極樂)의 천계(天界)를 가리킨다.
♣ 나례[儺禮]고려 정종(靖宗) 이후 음력 섣달 그믐날 밤에 궁중에서 악귀를 쫓던 의식.
♣ 나말[羅襪]수선화의 자태를 예찬한 말. 황정견(黃庭堅)의 수선화(水仙花) 시에, “능파선자 버선에 먼지를 날리면서 물 위를 사뿐사뿐 초생달을 따라가네.[凌波仙子生塵襪 水上盈盈步微月]" 하였음.
♣ 나말[羅襪]기생(妓生)을 가리킨다.
♣ 나말종포역로방[羅襪終抛驛路傍]양귀비가 마외역(馬嵬驛)에서 죽어서 그 역 옆에다 그대로 묻고 갔었는데, 그 후에 난리가 평정된 뒤에 다시 장사지내려고 팠더니, 시체는 없어지고 그녀가 신었던 버선 한 짝만이 있었다 한다.
♣ 나몽뢰[羅夢賚]몽뢰(夢賚)는 나만갑(羅萬甲)의 자(字)이다.
♣ 나무[南無]중생(衆生)이 부처님에게 진심으로 귀의(歸依)하여 경순(敬順)한다는 말이다.
♣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부처님의 마음으로 귀의하는 것
♣ 나부[懦夫]고풍은 드높은 풍도(風度)이고 나부는 연약하여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임. 맹자(孟子) 萬章下에 “백이의 풍도를 듣게 되면 무식한 탐부(貪夫)는 청렴할 줄 알고 나약한 자는 의로운 뜻을 세울 줄 알게 된다.[聞伯夷之風者 頑夫廉 懦夫有立志]" 하였음.
♣ 나부[羅浮]진(晉) 나라 갈홍(葛洪)이 신선의 도를 닦았다는 곳으로, 도교(道敎)에서 ‘제칠동천(第七洞天)’으로 부르는 산 이름이다.
♣ 나부[羅敷]곡명(曲名). 옛적 나부(羅敷)라는 여인이 들에서 뽕을 따는데 군수(郡守)가 지나다가 그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고 말을 멈추고 가지 않았다. 나부는 말하기를, “사또님은 아내가 있고 나부는 남편이 있으니 그만 가시오.”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고금주(古今注) 음악 조(音樂條)에, “陌上桑 出秦氏女子 秦氏邯鄲人 有女名羅敷 爲邑人千乘王人妻 王仁後爲趙王令 羅敷出採桑於陌上 趙王登臺 見而悅之 因飮酒欲奪焉 羅敷力彈笙 乃作陌上歌以自明焉”이라고 보임.
♣ 나부구장[羅浮舊障]수(隋) 나라 조사웅(趙師雄)이 나부산(羅浮山)에 갔다가 매화 선녀와 만나 흥겹게 어울려 술을 마시고 취했는데, 잠을 깨고 나니 큰 매화나무 아래에 누워 있더라는 전설이 당(唐) 나라 유종원(柳宗元)의 용성록(龍城錄)에 실려 있다.
♣ 나부립완부렴[懦夫立頑夫廉]맹자(孟子)는, “맑고 개결(介潔)한 백이(伯夷)의 풍(風)을 들으면 나약한 사람도 일어설 뜻이 있고 완(頑)한 사람도 청렴하여진다.” 하였다.
♣ 나부매[羅浮梅]수(隋) 나라 조사웅(趙師雄)이 나부산(羅浮山) 아래를 지나다가 날이 저물었는데, 숲 사이의 주막에서 소복을 입은 미인이 그를 맞아 함께 정겹게 술을 마시다 취해 자고 일어나 보니 미인도 주막도 없고 자신은 큰 매화나무 아래에 누워 있었다 한다. 《尙友錄 卷十六》
♣ 나부몽[羅浮夢]수(隋)의 조사웅(趙師雄)이 나부의 매화촌(梅花村)에 있는 주점(酒店) 가에서 소복(素服)으로 단장한 미인(美人)을 만나 함께 술을 마시고 취하여 잠이 들었다가 깨어 보니, 자신만 큰 매화나무 밑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달은 지고 삼성(參星)은 기울었으며 위에서는 비취(翡翠)가 지저귈 뿐이었다는 고사이다. 《龍城錄》
♣ 나부산[羅浮山]중국 광동성(廣東省) 증성현(增城縣)에 있는데, 이 산에는 매화가 많아서 ‘나부매(羅浮梅)’가 유명하다. 그리하여 소식(蘇軾)의 매화에 대한 시에 “나부산 아래 매화촌, 흰 눈으로 뼈를 이루고 얼음으로 넋을 이루었네.[羅浮山下梅花村 玉雪爲骨氷爲魂]" 하였다. 《蘇東坡集 後集 卷四 松風亭下梅花盛開 再用前韻》
♣ 나부산[羅浮山]중국 광동성(廣東省)에 있는 산으로, 백여 리를 길게 뻗어 있고 4백여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경치가 수려하여 월(粵)지방의 명산으로 불린다. 진(晉)나라 갈홍(葛洪)이 그곳에서 선술(仙術)을 얻었다 하여 흔히 선산(仙山)으로 이해된다.
♣ 나부산[羅浮山]광동성(廣東省)의 동강(東江) 북안(北岸)에 있는 산 이름으로, 수(隋)나라 때 조사웅(趙師雄)이 꿈속에서 매화 선녀(梅花仙女)를 만났다고 전하므로, 후대에는 매화에 대해 시를 읊을 때 흔히 인용한다.
♣ 나부자유부[羅敷自有夫]진(秦)나라 여자 나부(羅敷)가 들에서 뽕을 따는데 관원이 지나다가 황금 선물 주겠다고 유혹하였으나 거절하기를, “사또님은 아내가 있고 나부는 남편이 있습니다[使君自有婦羅敷自有夫].” 하였다.
♣ 나부접[羅浮蝶]중국 광동(廣東) 나부산(羅浮山)에서 나는 나비. 크기는 한 자 정도임. 봄이 되면 번데기가 고치를 뚫고 나오는데 문채가 각각 달라 비록 수백 마리가 떼지어 있어도 한 마리도 같은 모양이 없으므로 산동 사람들이 소봉황(小鳳凰)이라 이른다고 한다. 《廣東新語》
♣ 나부춘[羅浮春]소식(蘇軾)이 혜주(惠州)에 있을 적에 만든 술 이름인데, 즉 혜주에 있는 나부산(羅浮山)에서 취한 이름이다.
♣ 나부춘몽[羅浮春夢]수(隋) 나라 조사웅(趙師雄)이 나부산(羅浮山)에 갔는데 해가 저물 때에 숲 사이 어느 집에 한 미인이 소복담장(素服淡粧)으로 나와 영접하는데 향기가 정신을 황홀케 하였다. 사웅이 미인과 함께 술집에 가서 즐겨 놀았는데 옆에 푸른 옷 입은 동자(童子)가 노래를 불렀다. 사웅이 취하여 자다가 새벽에 깨어 보니 매화나무에 푸른 새가 지저귀고 있었다. 미인은 화신(花神)이었던 것이다.
♣ 나사[蘿絲]나사는 덩굴식물인 토사(菟絲)와 여라(女蘿)가 서로 뒤엉키듯 두 집안이 혼인 관계로 밀접하게 맺어진 것을 비유하는 시어이다.
♣ 나생[羅生]나란히 자라나다.
♣ 나성[奈城]내성은 안동(安東)의 속현(屬縣) 이름이다.
♣ 나소위[羅紹威]후량(後梁)의 정치가이며 학자. 자는 단기(端己), 벼슬이 태사(太師) 겸 중서령(中書令)에 이르렀고, 저서에 투강동집(偸江東集)이 있음.
♣ 나악주[羅鄂州]송(宋) 나라 나원(羅願)을 가리킨 말로, 나원이 악주(鄂州)의 장관(長官)을 지냈으므로 이른 말이다. 사장(詞章)의 대가(大家)로 이아익(爾雅翼)을 지었다. 《宋史 羅願傳》
♣ 나양[裸壤]나라 이름. 이 나라는 사람들이 무례하여 옷을 입지 않고 알몸으로 생활을 한다고 함.
♣ 나양봉[羅兩峯]나양봉은 청 나라 양주(揚州) 사람인데 이름은 빙(聘), 자는 돈부(遯夫), 호는 양봉이며 또는 화지사승(花之寺僧)ㆍ화지인(花之人)ㆍ주초시림(朱草詩林)이라 한다. 김농(金農)의 제자, 김동심(金冬心)의 고제(高弟)로서 시에 능하고 그림을 잘 하였으며, 더욱이 화매(畫梅)로써 해내외에 독절(獨絶)하였음.
♣ 나양해장보[裸壤駭章甫]소인이 군자를 도리어 나쁘게 여김을 비유한 말이다. 나양은 벌거벗은 몸에 문신(文身)한 것을 말하고, 장보(章甫)는 은(殷) 나라 때의 관(冠) 이름인데, 공자가 항상 이 관을 썼으므로, 전하여 유자(儒者)의 뜻으로 쓰인다.
♣ 나연[那衍]서북 지방의 야인(野人)들이 주장(主將)을 높여 부르던 이름.
♣ 나옹[懶翁]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명승(名僧) 왕사(王師) 혜근(惠勤)의 법호. 혹은 강월헌(江月軒)이라고도 하였다. 나옹은 여주 신륵사(神勒寺)에 살았다. 《東國輿地勝覽 卷六 驪州》
♣ 나옹탑[懶翁塔]나옹은 고려 공민왕(恭愍王)때의 고승. 우왕(禑王)2년(1376)에 왕명으로 밀양 영원사(瑩原寺)로 가던 도중 신륵사에서 입적하여 거기에다 부도(浮屠)를 세웠음.
♣ 나와엽전방성종[騾臥喦前訪聖蹤]법주사 전설에, “신라 중 의신(義信)이 노새로 경(經)을 싣고 와 처음 이 절을 이룩했다.” 한다.
♣ 나월[蘿月]나사(螺師)의 헌(軒) 이름이다.
♣ 나융[懶融]선사(禪師)의 이름.
♣ 나은[羅隱]당말(唐末) 시인. 여러번 과거에 응했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 나작굴서[羅雀掘鼠]최악의 상태에 이르러 어찌할 방법이 없다란 뜻의 고사성어.
♣ 나작문[羅雀門]참새 잡는 그물을 펼쳐 놓을 수 있을 정도로 문정(門庭)이 적막한 것을 말한다. 사기(史記) 급정열전 논(汲鄭列傳論)에 나오는 적공(翟公)의 고사에서 비롯된 말로 적문(翟門)이라고도 한다.
♣ 나잔승[懶殘僧]당(唐)의 고승(高僧) 명찬 선사(明瓚禪師). 성품이 게을러 언제나 다른 중들이 먹고 남은 찌꺼기를 먹었으므로 이렇게 불렀다 한다.
♣ 나장[裸葬]시신을 나체로 매장하는 것.
♣ 나전[螺鈿]광채가 나는 자개 조각을 여러 형상으로 박아 붙이어 장식한 공예품.
♣ 나조[羅趙]서법(書法)의 명가(名家)로 일컬어졌던 후한의 나휘(羅暉)와 조습(趙襲)의 병칭인데, 장지(張芝)가 이들을 평하면서 “내가 위로 최(崔)ㆍ두(杜)와 견주기에는 부족하다마는, 아래로 나(羅)ㆍ조(趙)와 비교한다면 여유가 있다.”라고 한 고사가 전한다. 《法書要錄 卷1 引 採古來能書人名》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에도 “종요(鍾繇)와 장지(張芝)에 뒤지지 않는다고 그대 자부하는데, 나 역시 나휘나 조습에 비한다면 우월하다오.[不減鍾張君自足 下方羅趙我亦優]”라는 표현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6 石蒼舒醉墨堂》
♣ 나졸[懶拙]게으르고 졸렬하여 세상의 공명(功名)에 뜻이 없는 것을 말한다.
♣ 나찬[懶瓚]원(元) 나라 무석(無錫) 사람인 예찬(倪瓚)을 말함. 호는 운림(雲林)으로 시ㆍ서ㆍ화가 삼절(三絶)이었으며, 일찍이 난찬(懶瓚)이라 서명하였음.
♣ 나체[拿遞]벼슬아치가 죄로 인해 붙잡혀서 갈리는 일.
♣ 나타제호[懶惰啼呼]도연명이 아들을 책망하는 뜻에서 지은 책자(責子)라는 시에 “아서(阿舒)는 벌써 나이 열여섯이건만 나태하여 아직 배필이 없네.” 하였고, 서인효전찬(庶人孝傳贊)에서는 “은도(殷陶)는 여남(汝南) 사람으로 나이 열두 살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마침 큰 뱀이 집의 문에 가로누워 있었다. 이에 친척들이 모두 위험하다고 자리를 피하라 하였으나 그는 아버지의 영구(靈柩)가 있으므로 피할 수 없다 하면서 더욱 크게 슬피 울었다.” 하였다.
♣ 나필[羅泌]송(宋) 나라 사람. 자는 장원(長遠), 노사(路史) 47권을 지었는데 넓은 인용과 아름다운 문장으로 국명(國名)을 고증한 것은 더욱 정미롭다.
♣ 나함택사[羅含宅舍]진(晉) 나라 나함이 덕망이 높아 관사(官舍)에 있을 적에는 흰 참새가 모여들었고 치사(致仕)하고 나서 집에 거할 적에는 난초와 국화가 홀연히 뜰에 무더기로 피었다는 고사가 있다. 《晉書 卷92 文苑傳 羅含傳》
♣ 나해봉[羅海鳳]나응서(羅應瑞)의 자(字)이다.
♣ 나향독우경출주[懶向督郵傾秫酒]진(晉) 나라 때 도잠(陶潛)이 팽택령(彭澤令)으로 있을 적에 팽택현의 공전(公田)에 모두 차조[秫]만 심게 하면서 말하기를 “나에게 항상 술에 취하게만 해주면 만족하겠다.” 하였고, 또 그 후에는 군(郡)에서 독우(督郵; 지방 감찰관)가 나왔을 때, 아전이 관복을 정제하고 독우를 알현해야 한다고 말하자, 도잠이 탄식하기를 “나는 오두미(五斗米) 녹봉 때문에 허리를 굽혀 향리(鄕里)의 소인(小人)을 섬길 수 없다.” 하고는, 즉시 인끈을 풀어 던지고 돌아갔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晉書 卷九十四》
♣ 낙가산[洛伽山]남해(南海)의 보타 낙가산(普陀洛伽山)에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머물고 있다.
♣ 낙강[樂康]편안하다
♣ 낙건[洛建]정자(程子)와 주자를 말함. 정자는 낙양(洛陽)에서 살고 주자는 복건(福建)에서 살았으므로 한 말임.
♣ 낙계기남[樂啓期男]공자(孔子)가 태산(泰山)에서 영계기(榮啓期)가 녹구(鹿裘)를 입고 새끼 두르고 거문고를 타며 노래하는 것을 보고 무엇이 그리 즐거우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하늘이 만물을 내매 사람이 가장 귀한데 내가 사람이 되었으니 한 가지 낙이고, 남자는 귀하고 여자는 천한데 내가 남자가 되었으니 두 가지 낙이고, 사람이 나서 일월을 보지 못하고 강보에서 죽는 자가 많은데 내 나이 90이니 이것이 세 가지 낙이다.” 하였다. 《列子 天瑞》
♣ 낙노[酪奴]차[茶]의 별명
♣ 낙노[駱盧]왕발(王勃)ㆍ양형(楊炯)과 함께 시문(詩文)이 뛰어나 초당사걸(初唐四傑)로 이름난 낙빈왕(駱賓王)과 노조린(盧照鄰)임.
♣ 낙담상혼[落膽喪魂]쓸개가 떨어지고 혼을 잃음. 몹시 놀라 정신이 없음을 일컫는다.
♣ 낙락[落落]낙락은 뜻이 커서 세상과 서로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즉 정도를 걷는 것이 세상과 부합되지 않음을 뜻한 말이다.
♣ 낙락단여박[落落斷如剝]박괘(剝卦)는 위 한 획만이 이어져 있고 아래 다섯 획은 모두 끊겨 있다. 이것은 산이 박괘처럼 위만 연하여져 있고 아래는 딱 끊긴 것을 말한 것이다.
♣ 낙락천성야향신[落落天星夜向晨]벗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나고 얼마 남아 있지 않은 것을 새벽하늘의 별에 비유한 것임.
♣ 낙랑옹[樂浪鰅漁]우어[鰅]는 표피에 무늬가 있는 고기로 낙랑(樂浪)의 동이(東暆)에서 난다고 함. 《說文》
♣ 낙말[洛襪]낙신(洛神)의 버선. 낙신은 태고 시대 복희씨(伏羲氏)의 딸이 낙수(洛水)에 빠져서 신이 된 것을 말한다. 온정균(溫庭筠)의 연화시(蓮花詩)에 “응당 낙신의 물결 위의 버선이라, 지금도 연꽃술에 향진이 풍기네.” 하였다.
♣ 낙매[落梅]적악곡(笛樂曲)의 이름, 즉 관산낙매곡(關山落梅曲)을 말한다.
♣ 낙매곡[落梅曲]매화락(梅花落)으로, 옛날의 적곡(笛曲) 이름이다. 진(晉) 나라 환이(桓伊)가 젓대를 잘 불어 낙매화곡을 지었다 함.
♣ 낙매조[落梅調]악곡(樂曲)의 이름. 이백(李白)의 시에 “강성(江城) 오월에 매화(梅花)가 지네.” 하였다.
♣ 낙매풍[落梅風]5월에 불어오는 계절풍을 말한다. 태평어람(太平御覽) 제97권에, “5월에는 낙매풍이 불어오는데, 강회(江淮) 지방에서는 신풍(信風)이라고 한다.” 하였다.
♣ 낙매화[落梅花]적곡(笛曲)의 이름. 진(晉) 나라 때 환이(桓伊)가 적(笛)에 뛰어나 낙매화곡을 지었다고 한다.
♣ 낙매화곡[落梅花曲]진(晉) 나라 환이(桓伊)가 만든 적곡(笛曲)을 가리킨다.
♣ 낙모[落帽]용산낙모(龍山落帽)의 준말이다. 진(晉) 나라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환온(桓溫)이 용산(龍山)에서 9월 9일에 막료 부하들을 전부 불러 잔치를 열어 즐길 때, 그의 참군(參軍) 맹가(孟嘉)의 모자가 바람에 불려 땅바닥에 떨어졌으나 맹가는 술에 취해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자 환온은 손성(孫盛)에게 그것을 주제로 맹가를 조소하는 글을 짓게 하고 맹가는 또 즉석에서 그에 화답하였는데, 맹가의 문장이 너무도 아름다워 모든 사람이 감탄하였다. 《晉書 卷九十八 孟嘉傳》
♣ 낙모지신[落帽之辰]진(晉) 나라 맹가(孟嘉)가 중구일(重九日)에 환온(桓溫)을 따라 용산(龍山)에 올라가서 술을 마시고 노닐 적에 바람이 불어 맹가의 갓이 땅에 떨어지자, 환온이 좌우 사람들에게 시켜 글을 지어 이를 조롱하게 하니, 맹가가 이때 대답으로 지은 글이 매우 훌륭했다고 한다. 《晉書 卷九十八 孟嘉傳》
♣ 낙모풍[落帽風]문사(文士)의 풍모가 소탈하고 생각이 민첩함을 형용하는 말이다. 진(晉) 나라 때 환온(桓溫)이 중양절(重陽節)에 맹가(孟嘉)와 함께 용산(龍山)에서 술잔치를 벌였다. 이때 바람이 불어서 맹가의 모자가 떨어졌는데도 맹가는 모르고 있었다. 환온이 좌우의 사람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도록 눈짓을 하였다. 잠시 뒤에 맹가가 변소에 가자 환온은 그 모자를 주워 맹가의 자리에 가져다 두고 손성(孫盛)에게 시를 지어서 조롱하게 하였다. 맹가가 돌아와서 그 시에 답하는 시를 지었는데, 시가 몹시 뛰어나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다 탄복하였다. 《晉書 卷98 孟嘉傳》
♣ 낙모풍류[落帽風流]진(晉)의 환온(桓溫)이 중구일(重九日)에 여러 막료(幕僚)를 데리고 용산(龍山)에 올라 연회할 때 바람이 불어 맹가(孟嘉)의 모자를 떨어뜨렸다. 그러나 흥취가 도도해진 그는 전혀 알지 못한 채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고 한다.
♣ 낙민[洛閩]낙은 정이(程頤), 민은 주희(朱熹)를 말함.
♣ 낙민루[樂民樓]함흥부(咸興府) 성천강(城川江) 가에 있던 정자 이름이다.
♣ 낙반소[樂飯疏]가난한 생활에 만족하는 것을 말함. 논어(論語) 述而에 “나물밥 먹고 물 마시며 팔을 베고 눕더라도 즐거움이 또한 그 가운데에 있다.[飯素食 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하였음.
♣ 낙백[落魄]낙백이란 말은 실의와 불행으로 곤궁한 세월을 보내는 것을 말함이다. 지행(志行)이 보잘것없는 것을 이름. 사기(史記)에, “家貧落魄”이란 것이 보임.
♣ 낙봉[駱峯]조선조 문신인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의 호.
♣ 낙부[樂夫]홍명원(洪命元)의 자(字)이다.
♣ 낙불사촉[樂不思蜀]즐거운 나머지 촉나라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로 반어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데, 타향을 떠도는 나그네가 산수 유람하면서 고향이나 집을 생각지 않는다는 뜻의 고사성어.
♣ 낙빈[雒嬪]洛水의 여신, 하백의 아내이다. 수신으로 이름은 宓妃이다. 전설에 의하면 그녀는 복희의 딸인데 낙수를 건너다가 물에 빠져 죽어 낙수의 여신이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빼어나게 아름다워서 시인들은 그녀에게 최고의 찬사와 칭송의 글을 적었다.
♣ 낙사[洛社]낙사는 송(宋) 나라 구양수(歐陽脩), 매요신(梅堯臣) 등이 낙양에서 조직한 시사(詩社), 혹은 문언박(文彦博), 부필(富弼), 사마광(司馬光) 등이 조직한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를 가리킨다.
♣ 낙사기영회[洛社耆英會]송나라 때 문언박(文彦博), 부필(富弼), 사마광(司馬光) 등 낙양의 나이가 많은 자 13명이 모여서 술을 마시면서 서로 즐긴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를 가리킨다. 송사(宋史) 문언박전(文彦博傳)에, “문언박이 부필, 사마광 등 13인과 더불어서 백거이(白居易)의 구로회(九老會)고사(故事)를 따라 술을 마시면서 시를 읊으며 즐겼는데, 나이의 순서에 따라 자리를 정하고 관직의 높고 낮음은 따지지 않았다. 이를 낙양기영회라 하였는데, 호 사자들이 모두들 부러워하였다.” 하였다.
♣ 낙산[駱山]서울 동대문과 동소문 사이에 있는 산 이름.
♣ 낙산사[洛山寺]낙산(洛山)은 원래 범어(梵語)인 보타락가(補陀洛伽)의 준말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항상 머무르는 곳을 뜻한다.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11년(671)에 의상(義湘)이 당(唐) 나라에서 귀국한 뒤에, 관세음보살의 진신(眞身)이 낙산 동쪽 바닷가 굴속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친견하기 위해 찾아갔다가 이 절을 창건하였다 한다.
♣ 낙생[洛生]낙생은 영가(詠歌)의 일종으로 낙하 서생(洛下書生)이 읊던 성조(聲調)인데, 동진(東晉) 때의 명사(名士)들이 이 영가를 매우 좋아하였다.
♣ 낙생영[洛生詠]진(晉) 나라 때의 낙하(洛下) 서생(書生)들의 읊조림. 사안(謝安)은 본시 코가 맹맹하였는데, 코 메인 소리로 낙생영(洛生詠)을 읊조리자, 다른 사람들은 코를 가리우고 그것을 모방하였다.
♣ 낙생음[洛生吟]시문을 읊는 것을 말한다. 동진(東晉)의 낙양(洛陽) 서생들이 중탁(重濁)한 소리로 시문을 읊곤 하였는데, 사안(謝安)이 축농증을 앓아 그에 방불한 소리를 잘 내었으므로, 혹 그를 본뜨려고 하는 사람들이 일부러 코를 막고 소리를 내었다는 ‘사안낙생영(謝安洛生詠)’의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雅量》
♣ 낙서[洛書]낙서는 하우씨(夏禹氏)가 치수(治水)할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신귀(神龜)의 등에 있었다고 하는 글로서 서경(書經) 홍범구주(洪範九疇)의 근원이 된 것이다.
♣ 낙서[駱西]숙종 때의 화가 윤덕희(尹德熙)의 호. 자는 경백(敬伯), 본관은 해남(海南), 두서(斗緖)의 아들로 맹영광(孟永光)의 영향을 받아 말과 신선을 잘 그렸다.
♣ 낙서[洛西]장만(張晩)의 호. 호고(好古)는 그의 자이다.
♣ 낙서수[洛書數]낙서(洛書)의 숫자는 45이다.
♣ 낙성[落星]오(吳)나라의 손권(孫權)이 지은 누각. 지금의 강소성 남경(南京) 동북쪽 10리에 있다. 서기 232년에 계림원(桂林苑)에 3층의 누각을 지었다는 기록이 금릉지기(金陵地記)에 보이는데, 이것이 그 누각이다. 유성이 가까이 떨어질 만큼 높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 낙송[駱宋]당(唐) 나라 때의 시인(詩人) 낙빈왕(駱賓王)과 송지문(宋之問)을 아울러 일컬은 말이다.
♣ 낙수[洛水]낙수의 신(神)을 말한다. 복희씨(伏羲氏)의 딸 복비(宓妃)가 낙수에 빠져 죽어 신이 되었다. 《漢書 音義》
♣ 낙수본[落水本]송 나라 조맹견(趙孟堅)의 난정낙수본을 말함. 조맹견이 가지고 가던 도중 탔던 배가 뒤집혔는데 사공의 도움으로 간신히 구하였던 데서 붙여진 이름.
♣ 낙수이재[落水彝齋]조자고(趙子固)의 낙수난정본(落水蘭亭本)을 말함.
♣ 낙신[洛神]낙신은 복비(宓妃)를 말한다. 복희씨(伏羲氏)의 딸로, 낙수(洛水)에 빠져 죽어 그곳의 귀신이 되었다고 하는데, 당(唐) 나라 온정균(溫庭筠)의 시 ‘연화(蓮花)’에 “분명코 물결 위에 낙신의 버선 자국, 지금껏 연꽃 잎새 버선 향기 묻어 나네.[應爲洛神波上襪 至今蓮蕊有香塵]”라는 구절이 있다.
♣ 낙신지비생별[樂新知悲生別]고시(古詩)에, “즐거움은 새로 서로 아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고, 슬픔은 생이별보다 더 슬픔이 없다[樂莫樂於新相知 悲莫悲於生別離].” 하였다.
♣ 낙안[落雁]한(漢)나라 왕소군(王昭君)은 재주와 용모를 갖춘 미인이다. 한나라 원제는 북쪽의 흉노과 화친을 위해 왕소군을 선발하여 선우와 결혼을 하게 하였다. 집을 떠나가는 도중 그녀는 멀리서 날아가고 있는 기러기를 보고 고향생각이 나 금(琴)을 연주하자 한 무리의 기러기가 그 소리를 듣고 날개 움직이는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에 왕소군은 낙안(落雁)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 낙암[樂菴]고봉이 44세 때인 1570년 2월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광주로 돌아와 고마산(顧馬山) 남쪽에 지은 서재의 이름. 퇴계가 고봉에게 보낸 서찰 가운데 “가난하면 더욱 도를 즐길 수 있다.[貧當益可樂]"에서 취하였으며 퇴계가 그 기문(記文)을 짓고 현판을 썼다고 함. 《高峯集 年譜》
♣ 낙양[洛陽]일본의 산성주(山城州)를 가리킨다. 일본에는 세 개의 도읍이 있는데, 첫째가 산성주이고, 둘째가 대판(大阪)이고, 셋째가 강호(江戶)이다.
♣ 낙양성시[洛陽城市]중국의 낙양과 장안(長安)은 오랫동안 수도(首都)가 되었으므로 이르는 말이다.
♣ 낙양지가귀[洛陽紙價貴]‘훌륭한 글을 다투어 베끼느라 종이의 수요가 늘어 값이 오르다.’라는 고사에서 유래, 문장이 훌륭함을 칭찬하는 말. 책의 평이 좋아 매우 잘 팔림. 진(晋) 나라 좌사(左思)가 10년이나 걸려 ‘삼도부(三都賦)’를 지었을 때, 낙양(洛陽)사람들이 다투어 그 글을 베꼈으므로 종이 값이 올라갔다는 고사.
♣ 낙양지귀[洛陽紙貴]서진(西晋)의 문학자 좌사(左思)가 제도부(齊都賦)와 삼도부(三都賦)를 지었을 때 낙양(洛陽) 사람들이 너도나도 베꼈기 때문에 낙양의 종이가 모자라 비싸진 고사에서 유래. 저서가 많이 팔리는 것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 낙엽귀근[落葉歸根]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있어도 끝내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뜻이다. 옛말에, “나무가 천 길 높이 자라지만, 잎새가 떨어져서 뿌리로 돌아간다.” 하였다.
♣ 낙영[落英]떨어지는 꽃. 낙화(落花), 낙홍(落紅).
♣ 낙예십순[洛汭十旬]하(夏)의 임금 태강(太康)이 낙예(洛汭)에 놀러 가서 백일(百日)이나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 낙월[駱越]고대 만이족(蠻夷族)의 이름으로, 운남(雲南)과 귀주(貴州) 일대에 살았다. 옛날 백월(百越)의 하나로 지금의 전금계(滇黔桂) 등 여러 성(省) 사이에 있었다.
♣ 낙월공량구[落月空樑句]두보(杜甫)가 이백(李白)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인 몽이백(夢李白)에, “달빛이 들보에 가득하니 그대의 얼굴을 보는 듯[落月晩屋梁 猶疑見顔色]”이라 하였음.
♣ 낙월만옥량[落月滿屋樑]두보(杜甫)가 친구 이백(李白)을 생각하는 시에, “떨어지는 달이 들보에 가득하니, 그대의 안색을 보는가 의심하네[落月滿屋樑猶疑見顔色].” 하는 구절이 있다.
♣ 낙읍[洛邑]상주(尙州)를 낙읍이라 하였는데, 낙동강(洛東江) 고을이란 말이다.
♣ 낙읍문원[洛邑問袁]후한(後漢) 원안(袁安)의 고사. 마침 큰 눈이 내려 길[丈]이 넘게 쌓였는데, 낙양 영(洛陽令)이 순찰 차 나왔다가 그의 문 앞에 당도해 보니 드나든 발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이미 죽었으리라 여기며 사람을 시켜 눈을 치우고 들어가 보니, 그가 뻣뻣이 누워 있었다.”왜 나오지 않았느냐.”고 묻자 “큰 눈이 내려 사람들이 모두 굶어 죽었으니 나 혼자만 남에게 도움을 구할 수 없다.” 대답하였다 한다.
♣ 낙이불음[樂而不淫]즐기기는 하나 음탕하지는 않게 한다. 즐거움의 도를 지나치지 않음을 뜻함.
♣ 낙이사촉[樂而思蜀]타향(他鄕)의 생활이 즐거워 고향 생각을 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 눈앞의 즐거움에 겨워 근본을 잊게 될 때를 비유하기도 한다.
♣ 낙인[烙印]불에 달구어 찍는 쇠도장. 다시 씻기 어려운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 낙일도제천[落日到諸天]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기울어 산 정상 능선의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음을 말한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諸天合在藤蘿外 昏黑應須到上頭”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2 涪城縣香積寺官閣》
♣ 낙일욕몰현산서[落日欲沒峴山西]이백의 양양가(襄陽歌)에 “석양빛이 현산 서쪽에 지려 한다[落日欲沒峴山西]" 했고, 또 “진 나라 양공의 한 조각 빗돌거북 머리 이지러져 이끼가 끼었네[晉朝羊公一片石 龜頭剝落生▣苔]" 라고 하였는데, 그 주에 “진 나라 양호(羊祜)가 남하(南夏)에 있을 때에 오(吳) 나라 사람들이 감히 그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었고, 죽은 후에 양양 사람들이 그를 위해 비를 세웠는데, 그 비를 보는 사람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므로, 두예(杜預)가 타루비(墮淚碑)라 이름지었다.” 했고, 또 “한수(漢水)를 멀리 바라보니 오리 머리처럼 푸르러, 포도주가 막 괴는 빛 같구나[遙看漢水鴨頭綠 恰似葡萄初醱醅]"라 한 글귀가 있다.
♣ 낙장불입[落張不入]바닥에 내려놓은 화투장은 (자신에게 불리하더라도) 다시 들이지 못함. 한번 시행한 일은 다시 하지 못함
♣ 낙재[樂齋]신익성(申翊聖)의 호이다.
♣ 낙전[樂全]신익성(申翊聖)의 당호(堂號)이다.
♣ 낙전공[樂全公]낙전은 신흠(申欽)의 아들로, 선조(宣祖)의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와 결혼하여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진 신익성(申翊聖)의 호이다.
♣ 낙전공자[樂全公子]선조(宣祖)의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와 결혼한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을 말한다.
♣ 낙전도위[樂全都尉]선조(宣祖)의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와 결혼해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진 신익성(申翊聖)을 가리킨다. 그의 호가 낙전당(樂全堂)이다.
♣ 낙점[落點]조선시대에 관리를 임명하는 제도. 2품 이상의 대관(大官)을 선임할 때 후보자 세 사람을 적어 왕에게 추천하면, 왕이 그 중 적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이름 위에 점을 찍어 뽑는 일을 가리킴. 경쟁 상대가 여럿 있는 중에 어떤 직책에 임명되거나 당선되는 일 등을 가리킴. 단어의 어감으로 인해 자칫 낙선을 연상하기 쉽다.
♣ 낙정하석[落穽下石]함정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떨어뜨림.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을 구해 주기는커녕 도리어 더 심하게 괴롭힘. 남의 환란(患亂)에 다시 위해(危害)를 줌
♣ 낙제[絡蹄]낙은 말의 가슴에 매는 줄을 말하고, 제는 말의 발굽을 말한다.
♣ 낙조토홍[落照吐紅]저녁 햇빛이 붉은 색을 토해 냄. 매우 붉은 석양(夕陽)을 나타냄.
♣ 낙중[洛中]낙중은 낙양(洛陽)이다.
♣ 낙중삼하[洛中三夏]장안의 세 하’라는 뜻으로 숙종(肅宗) 때 사람들이 서로 우의가 도타운 이광하(李光夏)ㆍ권상하(權尙夏)ㆍ민진하(閔鎭夏) 세 사람을 가리켜 일컫던 말.
♣ 낙지론[樂志論]후한(後漢)의 명사(名士) 중장통(仲長統)의 원림(園林)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심경을 읊은 짧은 글이다.
♣ 낙진계명[落盡階蓂]월말(月末)을 뜻한다. 여기에서의 명아주는 전설 속에 나오는 일종의 상서로운 풀인 명협(蓂莢)으로, 이 풀은 매달 1일부터 15일까지는 잎이 하루에 하나씩 피고 15일 이후로는 매일 잎이 하나씩 지며, 작은 달에는 마지막 한 잎이 시들기만 하고 떨어지지는 않는다고 한다. 《竹書紀年 卷上》
♣ 낙천근[駱千斤]임진왜란 때 좌참장(左參將)의 직위로 조선에 원병나온 명장(名將) 낙상지(駱尙志)의 근력이 다른 사람 보다 뛰어나 천근이나 되는 물건을 들어 올렸으므로 붙은 별명임.
♣ 낙천신[洛川神]낙수의 신은 복비(宓妃)인데, 위(魏) 나라 조조의 아들 조식이 낙수를 건너면서 미인 견씨(甄氏)를 사념(思念)하여 복비를 빗대어 낙신부(洛神賦)를 지었다.
♣ 낙천안토[樂天安土]예기(禮記) 애공문(哀公問)에 “안토(安土)하지 못하면 낙천(樂天)하지 못하고, 낙천하지 못하면 완전한 인격을 이룰 수가 없다.” 하였는데, 명(明) 나라 왕정상(王廷相)은 신언(愼言) 작성편(作聖篇)에서 “어디에 있든 편안한 것을 안토라 하고, 어떤 일을 하든 편안한 것을 낙천이라 한다.” 하였다.
♣ 낙천재목가삼년[樂天栽木可三年]백낙천(白樂天)이 3년 임기의 충주 자사(忠州刺史)로 부임한 뒤에 “앞으로 충주에서 보내야 할 삼년 세월, 복숭아며 살구 심어 꽃이나 볼까 하오.[忠州且作三年計 種杏栽桃擬待花]”라는 구절의 시를 지었다. 《白樂天詩集 卷18 種桃杏》
♣ 낙촉예[洛蜀裔]정직한 학자들. 송 철종(宋哲宗) 때 낙양(洛陽)의 정이(程頤)을 선두로 한 낙당(洛黨), 촉(蜀)의 소식(蘇軾)을 선두로 한 촉당(蜀黨)이 있었음. 거기에 삭방(朔方)의 유지(劉摯)를 선두로 한 삭당(朔黨)을 합쳐 원우삼당(元祐三黨)이라고 불렀다. 《小學紺珠 名臣類 下》
♣ 낙타고좌[駱駝高坐]양털에 융(絨)을 섞어서 낙타 모양으로 짠 양탄자.
♣ 낙포연교패[洛浦捐交佩]초사(楚辭) 구가(九歌)에 “나의 결(玦)을 강중에 버리고, 나의 패옥을 예포에 버리리라.[捐余玦兮江中 遺余佩兮醴浦]" 한 데서 온 말이다.
♣ 낙폭[落幅]낙방(落榜)한 시권(試卷). 낙권(落卷).
♣ 낙폭전[樂幅錢]과거의 시관(試官)이 합격자 발표 후, 묵권(墨卷)을 모아 팔아 얻는 돈을 말한다.
♣ 낙하[落霞]당 나라 문인(文人)왕발의 글에, “떨어지는 놀이 외로운 따오기와 나란히 난다.[落霞與孤鶩齊飛]”라는 이름난 구절이 있다.
♣ 낙하고목[落霞孤鶩]낙하는 지는 놀을 말하고 고목은 외로운 따오기이다. 당(唐) 나라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지는 놀은 외로운 따오기와 나란히 날고 가을 강물은 긴 하늘과 함께 한빛일세.[落霞與孤鶩齊飛 秋水共長天一色]" 하였는데, 이 구는 가장 아름다운 표현으로 오늘날까지 일컬어진다.
♣ 낙하구[落霞句]글 가운데 아주 뛰어나게 잘된 경구(警句)를 지칭한 말이다. 당(唐) 나라 왕발(王勃)이 등왕각서(滕王閣序)를 지었는데, 그 중에서 “나직한 놀은 외로운 따오기와 가지런히 날고, 가을 물은 긴 하늘과 한 빛이로세.[落霞與孤鶩齊飛 秋水共長天一色]" 한 것이 가장 세인(世人)들에게 경구로 불려지기 때문이다.
♣ 낙하음[洛下吟]영가(詠歌)의 일종으로 낙하서생영(洛下書生詠)의 약칭으로, 둔탁한 콧소리로 글을 읊조리는 것을 말한다. 낙하서생(洛下書生)이 음영(吟詠)하던 성조(聲調)인데, 특히 진(晉) 나라의 명사(名士)들이 이것을 즐겨 지었다고 한다.
♣ 낙하지비[落霞之飛]당(唐) 나라 문장가 왕발(王勃)의 고사. 함형(咸亨) 3년에 염 백서(閻伯嶼)가 홍주 목사(洪州牧使)가 되어 등왕각(滕王閣)에서 큰 잔치를 베푸는데, 미리 그 사위에게 글을 짓게 하여 자랑하려 하므로 아무도 글을 짓는 이가 없었다. 발이 마침 아버지의 임소(任所)에 가다가 풍랑을 만나 이곳에 정박하여 참석했는데 그가 가장 어린 소년으로서 서슴지 않고 글을 지으니 임공이 성내어 아전을 시켜 그 글을 엿보고 아뢰게 했는데, 아뢸 적마다 놀라워하였다.’떨어지는 놀 외로운 따오기와 가지런히 난다.[落霞與孤鶩齊飛]’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염공이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는 고사가 있다. 《古文眞寶 滕王閣序》
♣ 낙화유수[落花流水]떨어지는 꽃과 흐르는 물. 곧, 쇠잔영락(衰殘零落)의 비유. 남녀 사이의 그리워하는 정
♣ 난[鸞]난새[鸞]란 곧 천자(天子)를 상징하는 말이다.
♣ 난[亂]사(詞)나 부(賦)의 끝 부분에 전체의 요지를 요약하여 서술하는 것을 말한다.
♣ 난가[爛柯]진(晉) 나라 때 왕질(王質)이 석실산(石室山)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동자(童子) 몇 명이 바둑을 두면서 노래하는 것을 보고는 곁에서 구경하였다. 동자가 대추씨와 같이 생긴 것을 주기에 왕질이 먹었는데, 배가 고픈 줄을 몰랐다. 얼마 있다가 동자가 “어찌하여 안 돌아가는가?”하기에, 왕질이 일어나 도끼를 보니 자루가 다 썩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함께 살던 사람들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述異記 卷上》 지금 중국 절강(浙江)에 난가산(爛柯山)이 있다.
♣ 난가왕질[爛柯王質]난가는 난가산(爛柯山)을 말함. 진(晉) 나라 왕질(王質)이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두 동자(童子)가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였는데 그 판이 끝나고 보니 도끼자루가 이미 썩었다고 하였음. 《述異記》
♣ 난검[鸞檢]부인(夫人)을 요양현군(遼陽縣君)으로 봉해 준 황제의 봉고(封誥)이다.
♣ 난경[鸞鏡]금슬 좋던 부부가 배우자를 사별(死別)한 뒤 쓸쓸하게 지내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난새는 원래 부부간의 두터운 정을 상징하는 새인데, 홀로 남은 난새가 울지 않자 거울을 갖다 주니 자기 모습을 비춰 보고는 슬피 울면서 날아 오르다가 숨이 끊어졌다는 고사가 전한다. 《太平御覽 卷916 鸞鳥詩序》
♣ 난경[煖卿]당송(唐宋) 시대에 연회(宴會) 등의 일을 주관하던 위위관(衛尉官)을 달리 부르던 이름이다.
♣ 난계[蘭階]궁전(宮殿)의 미칭(美稱)이다.
♣ 난고[蘭皐]난초가 무더기로 피어 있는 물가 언덕을 말한다. 초사(楚辭) 이소(離騷)에 “난고로 걸음 옮기는 나의 말이여, 산초 언덕 치달려 휴식을 취하도다.[步余馬於蘭皐兮 馳椒丘且焉止息]”라 하였다.
♣ 난고[蘭膏]좋은 향기가 나는 기름을 말한다.
♣ 난공불락[難攻不落]공격하기 어려워 아무리 공격해도 떨어지지(함락되지) 아니함. 장애물이 너무나 견고해서 일을 이루기 어려움
♣ 난교[蘭交]금란지교(金蘭之交)의 준말로,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붕우간의 우정을 뜻하는 말이다.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 상(上)의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 하면 쇠도 자를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의 말에서는 난초 향기가 풍겨 나온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 난교[鸞膠]봉황의 부리 등을 고아 만든 고약. 서해(西海) 중의 봉린주(鳳麟洲)에는 선가(仙家)가 많은데, 봉황의 부리와 기린의 뿔을 한데 고아서 고약을 만들어 끊어진 활시위를 감쪽같이 이어 붙인다고 한다. 이 고약을 ‘난교’ 또는 ‘속현교(續弦膠)’라고 하는데, 남자가 후처(後妻)를 얻는 일에 비유하여 쓴다. 한무외전(漢武外傳)에 한무제(漢武帝) 때에 서해(西海)에서 바친 난새[鸞]의 힘줄에서 뽑아낸 아교[膠]였는데, 무제(武帝)의 활줄이 끊어진 것을 그 갖풀로 이으니 줄의 두 끝이 서로 붙어 종일 쏘아도 끊어지지 않았다는 고사가 전한다.
♣ 난국이분[蘭菊異芬]난초와 국화의 향기가 다르다. 수양제(隋煬帝)가 꿈에 진후주(陳後主)를 만나서 미인 장여화(張麗華)를 보고 후주에게 묻기를, “장여화를 나의 소비(㷌妃)에 비하면 누가 아름다운가.” 한즉, 후주는, “봄 난초와 가을 국화가 각각 한철[一時]씩 아름답다.” 하였다.
♣ 난근[蘭筋]난근은 말 힘줄의 이름으로 명마(名馬)를 가리킨다. 상마경(相馬經)에 “난근 이 원중(元中)으로부터 솟아 있으면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 하였는데, 원중은 눈 밑이 정(井) 자 모양으로 움푹 들어간 것이라 한다.
♣ 난기[鸞旗]임금의 깃발을 이름.
♣ 난능려곡[蘭能儷曲]송옥(宋玉) 풍부(諷賦)에 “신(臣)이 거문고를 치면서 유란백설(幽蘭白雪)의 곡(曲)을 부르겠다.” 한 데서 인용된 말.
♣ 난대[蘭臺]난대는 어사대(御史臺)의 별칭
♣ 난대부[蘭臺賦]전국 시대 초(楚) 나라 양왕(襄王)이 난대(蘭臺)에서 노닐 때 송옥(宋玉)이 함께 모시고서 풍부(風賦)를 읊은 일을 말한다. 《文選 風賦 序》
♣ 난도[鸞刀]자루와 칼끝에 방울이 달린 긴 칼. 옛날에 제사에 쓸 희생을 잡을 때 썼다.
♣ 난도유존장해지[瀾倒猶存障海志]쇠미해진 사도(斯道)를 다시 일으킬 뜻이 있음을 비유한 말로, 당(唐) 나라 한유(韓愈)의 진학해(進學解)에 “이미 무너진 데서 미친 물결을 끌어돌린다[廻狂瀾於旣倒].” 한 데서 온 말이다.
♣ 난두[蘭杜]난두는 향초의 이름인데 흔히 사람의 아름다운 자질에 비유함.
♣ 난랑곡[赧郞曲]이백(李白)의 시에 “난랑이 밝은 달밤에, 노래 곡조가 한천을 진동하네[赧郞明月夜 歌曲動寒川]”하였다.
♣ 난령[難鴒]할미새[鶺鴒]는 형제에 비한다. 시경(詩經)에 형제를 할미새에 비유하여, “할미새 언덕에 날 듯이 형제는 환난(患難)을 서로 구하네.”라는 구절이 있다.
♣ 난마준[亂麻皴]화법의 일종임.
♣ 난만상의[爛漫相議]오래 두고 여러 번 충분히 논의함.
♣ 난무공류경[鸞舞空留鏡]난새라는 새는 짝이 있어야 노래도 하고 춤도 춘다. 그런데 한 마리 밖에 없는 경우에는 거울을 보여 주면 미친 듯이 노래하고 춤추다가 죽는다 한다.
♣ 난방전부규[蘭芳荃不揆]어진 신하의 마음을 임금이 살펴 주지 못함을 말한다. 전(荃)은 향초의 이름으로 임금을 비유하고, 난방(蘭芳)은 난초 향기와 같은 현신(賢臣)을 비유한다. 초사(楚辭) 이소(離騷)에 “荃不察余之中情兮 反信讒而齋怒”라 하고, 《사(楚辭) 초혼(招魂)에 “結撰至思 蘭芳假些”라 하였다.
♣ 난변자웅오[難辨雌雄烏]시비를 가리기 어렵다는 뜻. 시경(詩經) 소아(小雅) 정월(正月)에 “모두 내가 성인이다 하니 누가 까마귀의 암놈과 수놈을 알겠는가?[俱曰予聖 誰知烏之雌雄]" 하였는데, 까마귀의 암놈ㆍ수놈을 가려내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시비를 분간하기 어려움을 말한 것이다.
♣ 난분[蘭盆]중원절(中元節)에 행하는 불사(佛事), 즉 우란회(盂蘭會)를 말한다.
♣ 난분보경중[鸞分寶鏡中]금슬 좋던 부부가 배우자를 사별(死別)한 뒤 쓸쓸하게 지내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봉황새는 원래 부부간의 두터운 정을 상징하는 새인데, 홀로 남은 새가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고는 슬피 울다 죽었다는 난경(鸞鏡)의 고사에서 연유한 것이다.
♣ 난사사니[爛死沙泥]한유(韓愈)의 글에 “爛死於沙泥 吾寧樂之”라는 표현이 있다. 《應科目時與人書》
♣ 난사필작이[難事必作易]어려운 일은 쉬운 일에서 일어난다. 쉬운 일을 신중히 하면 어려운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 난상공론[爛商公論]여러 사람들이 잘 의논 함
♣ 난상지목불가앙[難上之木不可仰]오르지 못할 나무 쳐다보지도 말라.
♣ 난상토의[爛商討議]낱낱이 들어 잘 토의함
♣ 난생[鸞笙]난(鸞)을 타고 피리를 부는 신선을 이름. 난생은 생황(笙簧)의 미칭(美稱).
♣ 난생봉관[鸞笙鳳管]관악기(管樂器)인 피리를 미화(美化)하여 이르는 말이다.
♣ 난성[蘭成]난성은 북주(北周) 때 사람 유신(庾信)의 어릴적 이름이다. 《周書 卷四十一 庾信傳》
♣ 난성[鸞省]문하성(門下省)의 별칭으로 난대(鸞臺), 난액(鸞掖), 난저(鸞渚)라고도 한다.
♣ 난성석책년[蘭成射策年]15세를 말한다.
♣ 난손[蘭蓀]난초는 집안의 자제(子弟)를 말한 것이다. 진(晉) 나라 사현(謝玄)이 그의 숙부 사안(謝安)에게 말하기를, “부형이 아름다운 자제를 원하는 것을 비유하면 지란(芝蘭)과 옥수(玉樹)가 내 뜰 안에 나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하였다.
♣ 난수감전화[灤水感前和]홍수로 인해 묘지의 흙이 씻겨나가 관 머리가 드러난 고사로, 한 선제(漢宣帝)가 생부(生父)인 사황손(史皇孫)의 무덤을 개장한 것을 말한다. 《漢書 卷63》
♣ 난수전애[灤水纏哀]중국 회하(淮河)의 지류인 과수(渦水)의 끝에 있는 강 이름이다. 주 문왕(周文王)의 아버지 왕계(王季)를 과수의 끝에 장사지냈었는데 난수에 의해 그 무덤이 깎여나가 관이 드러나자, 문왕이 말하기를 “선군께서 뭇 신하와 백성들을 한 번 보고 싶어하시므로 하늘이 난수로 하여금 드러나게 한 것이다.” 하고, 관을 열어 백성들이 보게 하였다는 데서 나온 것이다. 《呂氏春秋》
♣ 난승방대선[難乘訪戴船]한 번 방문하기도 어렵게 됐다는 말이다. 진(晉) 나라 왕휘지(王徽之)가 눈발이 그치고 달이 청랑하게 빛나는 밤, 친구인 대규가 홀연히 생각나서 작은 배를 타고 집 앞에까지 왔다가 그냥 돌아간 고사가 전해 온다. 《晉書 王徽之傳ㆍ世說新語 任誕》
♣ 난신[亂臣]난신은 나라를 잘 다스리는 신하를 뜻함. 무왕(武王)이 이르기를, “나에게는 난신 열 사람이 있으나, 모두 마음과 덕을 같이하고 있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書經 泰誓 中》
♣ 난신적자[亂臣賊子]임금을 죽이는 신하와 어버이를 죽이는 아들 또는 나라를 어지럽히는 무리나 역적을 일컫는 고사성어.
♣ 난아[蘭芽]어린 아들을 비유한 말. 백거이(白居易)의 생자시(生子詩)에 “추월 아래 늦게야 단계의 열매 생기고 봄바람에 새로이 자란의 싹이 자라누나[秋月晩生丹桂實 春風新長紫蘭芽]”하였다. 《白樂天詩後集 卷十》
♣ 난액[鸞掖]문하성(門下省)의 이칭.
♣ 난야[蘭若]범어(梵語)의 음역(音譯)인 아란야(阿蘭若)의 준말로, 적정(寂靜) 공한(空閑)한 비구(比丘)의 수행처, 곧 사찰을 가리킨다.
♣ 난여[鑾輿]임금의 수레를 가리킨다.
♣ 난여취[蘭餘臭]공자가어(孔子家語) 본문(文本)에 “선(善)한 사람과 같이 지내면 마치 지란(芝蘭)이 놓인 방안에 들어가 오래 있을수록 그 향내가 나지 않아도 온몸에 젖는 것과 같이 저절로 선에 훈화(熏化)된다.” 하였다.
♣ 난옥[蘭玉]지란옥수(芝蘭玉樹)의 준말로 남의 집안의 우수한 자제(子弟)를 예찬하는 말임. 세설신어(世說新語) 언어(言語)에 “비유하자면 지란옥수가 뜰안에 자라게 하고 싶다.[譬如芝蘭玉樹 欲使其生於階庭耳]" 하였음.
♣ 난왈[亂曰]작품의 마지막에 전편의 대의를 요약해 놓은 것. 초사체에서 끝에 덧붙여 자신의 감정을 서술하는 것.
♣ 난원[欄垣]담장, 울타리
♣ 난원소객[蘭畹騷客]난원은 난초밭이란 뜻인데, 원(畹)은 밭 20묘(畝)를 뜻하며 일설에는 30묘라고도 한다. 시인이란 곧 초 회왕(楚懷王) 때의 충신 굴원(屈原)을 가리키는데, 초사(楚辭) 이소(離騷)에 “이미 구원엔 난초를 심었고, 또 1백묘엔 혜초를 심네[旣滋蘭之九畹兮 又樹蕙之百畝]" 하였다.
♣ 난위수[難爲水]큰 바다를 보았으므로 이제부터는 웬만한 물은 하찮게 여겨진다는 뜻.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바다를 구경한 자에게는 물이 되기 어렵고 성인의 문에서 공부한 자에게는 말이 되기 어렵다.[觀於海者難爲水 遊於聖人之門者難爲言]" 하였다.
♣ 난위환문작도위[爛胃還聞作都尉]자격도 없는 사람들이 높은 관직을 멋대로 차지하는 당시의 세태를 풍자한 말이다. 후한(後漢) 때 장안(長安)에서 “양의 위장 굽는 사람 기도위 되고, 양 머리 굽는 사람 관내후 됐네.[爛羊胃 騎都尉 爛羊頭 關內侯]”라는 말이 떠돌았다고 한다. 《後漢書 劉玄傳》
♣ 난율취동군[暖律吹東君]연(燕) 나라에 한곡(寒谷)이 있으니 추워서 곡식이 되지 않았는데, 추연(鄒衍)이 난율(暖律)을 불어넣으니 따뜻한 기운이 돌아왔다.
♣ 난의포식[暖衣飽食]따뜻한 옷에 음식을 배불리 먹음, 생활에 부자유스러움이 없음.
♣ 난장[亂杖]발가락을 뽑히는 형벌. 조선시대 도둑 등을 다스리는 악형(惡刑)중에 난장과 주뢰(周牢) 두가지가 있었는데, 난장은 영조 46년에 이미 없어지고, 주뢰는 후기까지도 간혹 사용되었다.
♣ 난전[蘭殿]난초의 향기가 풍기는 궁전으로 후비(后妃)의 처소를 말한다.
♣ 난정[蘭亭]난정은 중국 회계(會稽) 산음(山陰)에 있던 정자의 이름인데, 동진(東晉) 때 회계 내사(會稽內史)로 있던 왕희지(王羲之)를 비롯하여 손작(孫綽)ㆍ사안(謝安)등 당시의 명사 42인이 그곳에 모여 계제사(禊祭祀)를 행한 뒤에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놀았다. 《蘭亭考 卷一》
♣ 난정묵적[蘭亭墨跡]왕희지(王羲之)의 글씨 중에는 난정첩(蘭亭帖)이 가장 유명하다.
♣ 난정서[蘭亭序]진 목제(晉穆帝) 영화(永和) 9년 3월 3일에, 당시의 명사(名士) 41명이 난정에 모여 곡수(曲水)에 잔을 띄워 계연(稧宴)을 베풀며 시를 지었다. 왕희지(王羲之)는 그 서문을 썼는데, 그것이 바로 난정서임.
♣ 난정수계[蘭亭修禊]왕희지(王羲之) 의 蘭亭集序에 “모춘(暮春)의 초엽에 회계산(會稽山)의 난정에 모여 계사(禊事)를 치렀다.” 하였다.
♣ 난정승집[蘭亭勝集]난정의 성대한 모임. 진목제(晉穆帝) 영화(永和) 9년 3월 3일에, 왕희지(王羲之)가 회계(會稽)의 산음(山陰)에 있는 난정에 모여, 재액을 떨어버리고 복을 구하는 행사를 하였다고 한다. 《晉書 王羲之傳》
♣ 난정유수적벽월[蘭亭流水赤壁月]뜻이 맞는 친구들과 어울려 멋들어진 풍류를 함께 즐겼다는 말이다. 진(晉) 나라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序)’와 송(宋) 나라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절창(絶唱)으로 회자되고 있다.
♣ 난정첩[蘭亭帖]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가 3월 3일에 벗들과 더불어 난정(蘭亭)에서 모여놀고 각각 시(詩)를 짓고 자신이 서문(序文)을 지어 그의 득의한 글씨를 서수필(鼠鬚筆)로 고치 종이[繭紙]에 쓴 것이 유명한 난정첩이다.
♣ 난정취[蘭亭醉]진(晉) 나라 목제(穆帝) 영화(永和) 9년 3월 3일에 당시의 명사들이 난정에 모여서 곡수(曲水)에 술잔을 띄워 계연(禊宴)을 베풀고 시를 읊으며 노닐었던 것을 뜻한다.
♣ 난조[鸞鳥]난새는 필조(匹鳥)로서 제 짝이 있어야 춤을 추는데, 혼자 잡혀 온 난새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슬피 울다가 끝내는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藝文類聚 卷90 註 鸞鳥詩序》
♣ 난주[蘭舟]난주는 목란주(木蘭舟)의 준말로, 보통 작은 거룻배를 가리킬 때 쓰는 시어(詩語)이다. 목란(木蘭) 나무로 만든 배. 배에 대한 미칭으로 쓰인다.
♣ 난중지난[難中之難]어려운 가운데서도 가장 어려움.
♣ 난지[蘭芷]난과 지. 모두 향초(香草)로서 현인 군자에 비유됨.
♣ 난지점수[蘭芷漸滫]난초와 구리때(향초)를 오줌에 담금. 그렇게 하면 향초의 향이 없어지고 악취가 난다. 즉, 선인善人도 악인惡人과 가까이 사귀면 악에 물든다는 말. ‘착한 사람이 나쁜 일에 물듦’을 비유하는 말
♣ 난진남산석[爛盡南山石]춘추 때에 제(齊)나라 영척(靈戚)이 곤궁하여 소를 먹이다가, 제환공(齊桓公)이 들에 나오니 소의 뿔을 건드리며 노래를 부르기를, “남산에 흰 돌이 다 닳았네. 요순(堯舜)을 만나지 못하였네.” 하였다.
♣ 난참[鸞驂]난참은 신선이 타는 수레를 말한다.
♣ 난체[蘭砌]난초의 섬돌. 전하여 남의 자손(子孫)을 아름답게 일컫는 말이다.
♣ 난타[蘭坨]난공(蘭公) 반정균(潘庭筠)을 가리킨다.
♣ 난탕[蘭湯]난초를 물에 넣어 끓이는 것을 이르는데, 이 향수(香水)를 몸에 발라 찜질하는 것을 바로 훈욕(熏浴)이라고 한다.
♣ 난택[蘭澤]향초(香草)의 이름. 일명 난향(蘭香).
♣ 난파[鑾坡]금난파(金鑾坡)의 준말인데, 당 덕종(唐德宗) 때 학사(學士)의 집을 금난파 위로 옮겼다 하여 한림원의 별칭으로 쓰인다. 우리 나라에서는 홍문관을 뜻한다.
♣ 난파봉각[鸞坡鳳閣]난파와 봉각은 대궐의 별칭이다.
♣ 난패[蘭佩]난초를 허리에 차 장신구로 삼은 것. 초사(楚辭) 이소경(離騷經)의 “강리와 벽지를 몸에 걸치고 가을 난초 꿰매어 장신구로 삼는다네[扈江離與辟芷兮 紉秋蘭以爲佩].”에서 나온 말로 처신이 고결한 것을 뜻함.
♣ 난표봉박[鸞飄鳳泊]헤어지고 흩어진 것을 의미하는 말임. 한유의 구루산시(岣嶁山詩)에 “蚪蝌拳身虀倒披 鸞飄鳳泊拏虎螭"라는 글귀가 있는데 이는 구루산 신우(神禹)의 비가 산중에 자취를 감춘 것이 마치 난봉이 표박하는 것과 같다는 뜻임.
♣ 난하[灤河]만주 열하성(熱河省) 지방을 흐르는 강 이름으로, 보통 상도하(上都河)라 불린다.
♣ 난하청풍[灤河淸風]난하(灤河)는 영평성(永平城) 서쪽 5리 지점에 있는 맑은 강물 이름으로, 난하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에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사당이 있다고 한다.
♣ 난형난제[難兄難弟]형이 낫다고 하기도 어렵고, 아우가 낫다고 하기도 어려움. 두 사람의 능력이 서로 엇비슷하여 낫고 못함을 가릴 수 없음, 사물의 우열이 없다. 곧 비슷하다는 말. 두 사람의 우열을 분간하기 어려움을 비유. 백중지세(伯仲之勢), 막상막하(莫上莫下)
♣ 난황[鸞凰]난황은 훌륭한 인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 난황무육영[鸞凰舞六英]난새와 봉황새는 곧 덕이 있고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비유한 것이고, 육영(六英)은 옛날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의 악가(樂歌)이니, 즉 조정에서 다른 조신(朝臣)들과 함께 임금을 섬기는 것을 의미한 말이다.
♣ 난훈변위모[蘭薰變爲茅]굴평(屈平)은 굴원(屈原)을 가리킨다. 이소경(離騷經)에, “난초와 지초는 변하여서 향기를 잃었고, 전초와 혜초는 변하여 띠풀이 되었네.[蘭芷變而不芳兮 荃蕙化而爲茅]”하였다.
♣ 난휴사조[難携謝眺]남제(南齊) 때 유명한 시인(詩人) 사조가 벼슬이 상서 이부랑(尙書吏部郞)에 이르렀는데, 동혼후(東昏侯)가 실덕(失德)하는 바람에 강석(江祏) 등이 시안왕(始安王) 요광(遙光)을 옹립하기 위해 사조를 꾀었으나 들어주지 않자, 사조를 하옥시켜 나이 36세로 옥사하였다. 《南齊書 卷四十七 謝眺傳》
♣ 날랄[剌剌]바람 따위의 소리
♣ 날호수[捋虎鬚]호랑이 수염을 쓰다듬다. 모험을 하는 것을 비유한 말로, 주환(朱桓)의 고사에서 온 말이다. 《三國志 卷五十六ㆍ吳志 朱桓傳註》
♣ 남[擥]쥐다. 잡다.
♣ 남가[南柯]당(唐) 나라 때 순우분(淳于棼)이 자기 집 남쪽에 있는 늙은 괴나무 밑에서 술 취하여 자다가, 꿈에 대괴안국(大槐安國)에 가서 남가군 태수(南柯郡太守)가 되어 20년 동안 부귀를 누리다가 깨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전하여 잠자고 꿈꾸는 것을 비유한다.
♣ 남가몽[南柯夢]남가의 꿈은 당(唐) 나라 이공좌(李公佐)가 지은 남가기(南柯記)에서 나온 말이다. 그 주요 내용은, 순우분(淳于棼)이란 사람이 꿈속에서 괴안국(槐安國)에 당도하여 공주에게 장가들고 남가군(南柯郡) 태수가 되어 부귀영화를 누린 뒤에, 군사를 거느리고 전쟁터에 나가 패배하고 공주도 죽었으며 끝내는 국왕의 미움을 받아 쫓겨나 돌아오다가 꿈을 깨고 보니, 마당 앞 회나무 밑에 있는 개미굴이 곧 괴안국이었고 남가군은 회나무의 남쪽 가지의 또다른 개미굴이었다고 하였다. 덧없는 인간 세상의 부귀 득실에 대한 우언으로, 이를 남가일몽(南柯一夢)이라 말한다.
♣ 남가일몽[南柯一夢]꿈같은 한때의 헛된 부귀영화를 뜻한다. 이문록(異聞錄)에 “순우분(淳于棼)이 괴수(槐樹) 아래에서 술을 마시고 취하여 누웠는데, 꿈에 구멍 속으로 들어가니 괴안국(槐安國)이 있었다. 왕은 순우분을 임명하여 남가 군수(南柯郡守)를 삼으므로 놀라 깨어보니 묵은 괴나무 아래 구멍이 뚫려 사람이 드나들 만하고 그 속에 큰 개미가 있었는데 바로 그 개미가 왕이었고, 구멍이 남지(南枝)로 통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남가군이었다.” 하였다.
♣ 남가정의[南柯庭蟻]남가군의 개미란 곧 당(唐) 나라 때 순우분(淳于棼)이 괴수(槐樹)의 남쪽 가지[南柯] 밑에서 잠을 자다가 꿈에 괴안국(槐安國)이란 곳에 이르러 국왕의 딸과 결혼하고 남가군의 태수(太守)가 되어 대단한 영달(榮達)을 누렸는데, 깨고 나서 괴수의 밑을 보니 큰 개미 한 마리가 있어 그것이 바로 꿈에 본 괴안국의 임금이었더라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남간[藍澗]두보(杜甫)의 시 ‘9일 남전(藍田) 최씨장(崔氏莊)’의 셋째 연(聯), “남수는 멀리 천 시내를 쫓아 떨어지고.[藍水遠從千澗落]”하였다.
♣ 남건[濫巾]함부로 은사(隱士)를 흉내내어 은사의 두건(頭巾)을 쓴다는 뜻으로, 은사가 아니면서 은사인 체하는 것을 이른 말이다.
♣ 남견[南犬]남월(南越) 지방의 개는 눈[雪]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눈이 오는 것을 보면 이상하게 여겨 짖는다 한다.
♣ 남고[南皐]남고는 윤규범(尹奎範)의 호인데 초명은 지범(持範)이다. 자는 이서(彝敍), 본관은 해남(海南), 선도(善道)의 손자이며 다산보다 10세 연상이다.
♣ 남고자[南皐子]윤지범(尹持範)을 가리킴.
♣ 남곽궤[南郭几]은자(隱者)의 안석(案席)을 말한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南郭子綦 隱几而坐 仰天而噓 荅焉似喪其耦”라 하였다.
♣ 남곽궤전문지뢰[南郭几前聞地籟]수양이 높은 경지에 이름을 비유한 말이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남곽자기(南郭子綦)가 안석에 기대앉아서 멍하니 마치 자신조차도 잊어버린 것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짓고 있자, 안성자유(顔成子游)가 그 연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너는 사람들의 피리 소리는 들었지만 땅의 바람 소리는 듣지 못했을 것이다.” 한 데서 온 말인데, 곧 남곽자기는 천지의 대기(大氣)로 불어내는 바람 소리를 듣고 깨달은 경지에 이른 것이다. 땅의 바람 소리란 곧 대지(大地)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리이다.
♣ 남곽남취[南郭濫吹]학문과 기예에 전문적 지식과 체계나 조리도 없이 함부로 날뛰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 남곽람우[南郭濫釪]능력이 없는 사람이 능력이 있는 것처럼 속여 외람되이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뜻의 고사성어.
♣ 남곽목[南郭木]고목나무처럼 흔들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남곽자기(南郭子綦)가 궤에 기대앉아서 하늘을 쳐다보며 멍하니 자기 몸을 잊은 것 같았다. 안성자유(顔成子游)가 앞에서 모시다가 ‘형상을 고목(枯木)과 같이 할 수 있으며 마음을 재[灰]와 같이 할 수 있습니까?’ 했다.” 하였다.
♣ 남곽병수[南郭病叟]호가 남곽인 박동열(朴東說)을 말함.
♣ 남곽선생만념회[南郭先生萬念灰]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南郭先生 …… 心固可使如死灰乎”라는 말이 있다.
♣ 남곽충금망물아[南郭冲襟忘物我]남곽자기(南郭子綦)처럼 주객(主客)을 초월한 경지를 지녔다는 말이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南郭子綦 隱几而坐 仰天而噓 嗒焉似喪其耦”라 하였고, “今者 吾喪我”라 하였는데, ‘耦’와 ‘我’가 바로 물아(物我) 즉 주객(主客)을 표현하는 말이다.
♣ 남곽취우[南郭吹竽]재주가 없으면서 지위에 거하여 자리만 채운다는 뜻. 한비자(韓非子) 내저(內儲)에 “제 선왕(齊宣王)이 피리 부는 사람 3백인을 모으려 했는데 남곽 처사가 자기도 피리를 불겠다 하니 왕이 기뻐하여 특대우를 하였다. 그 후 선왕(宣王)이 죽고 민왕(湣王)이 임금이 되어 일일이 피리를 듣고자 하니 남곽 처사는 도망갔다.
♣ 남관[南冠]고국(故國)을 그리워함을 비유한 말이다. 남관은 남방 초(楚) 나라 사람의 관으로, 춘추 시대 초나라 종의(鍾儀)가 진(晉) 나라에 포로로 갇혀 있으면서도 항상 고국을 그리워하여 초나라의 관을 썼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左傳 成公 九年》
♣ 남관객마집[藍關客馬縶]한유(韓愈)가 좌천되어 지방으로 가다가 남전관에 이르러 지은 시에, “구름 가린 진령에 집은 어디 있는고. 남전관(藍田關)에 눈이 쌓여 말이 길을 멎어라.” 하였다.
♣ 남관북교[南冠北窖]남쪽과 북쪽으로 몸이 묶여 사로잡혀 가는 것을 말한다. 춘추 시대 초(楚) 나라 악공인 종의(鍾儀)가 진(晉) 나라에 잡혀가서도 계속 남관(南冠)을 쓰고 있었다는 고사와, 한(漢) 나라 소무(蘇武)가 흉노의 선우(單于)에게 억류된 채 땅속 움집[窖]에 갇혀 있었던 고사가 있다. 《左傳 成公 9年ㆍ漢書 卷54 蘇建傳》
♣ 남관설[藍關雪]당(唐) 나라 한유(韓愈)가 불골표(佛骨表)를 드리고 멀리 조주(潮州) 8천 리를 귀양가서 지은 시의 한 연(聯). “구름이 진령(秦嶺)에 비꼈는데 집은 어디에 있는고. 눈이 남관(藍關)에 쌓였는데 말도 걸음을 못 걷는다[橫泰嶺家佈佐 雪藍關馬不前].” 했다.
♣ 남관설옹[藍關雪擁]남관은 남전관(藍田關)의 준말임. 당(唐) 나라 한유(韓愈)의 `좌천되어 남관에 이르러서 질손 상에게 보여 준 시[左遷至藍關示姪孫湘詩]`에 “…… 구름은 진령을 가로질러라 집은 어디 있는고, 눈은 남관을 가로막아 말이 가지를 못하네. …… [雪橫秦嶺家何在 雪擁藍關馬不前]" 한 데서 온 말이다. 《韓昌黎集 卷十》
♣ 남관수[南冠囚]좌씨(左氏) 성구(成九)에 “진후(晉侯)가 ‘남관(南冠)을 쓰고 포로가 된 사람은 누구냐?’고 묻자, 유사(有司)가 ‘정(鄭) 나라 사람이 바친 초(楚) 나라 죄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한 데서 나온 말로, 본래 포로의 신세를 말한다.
♣ 남관영[藍關詠]당(唐) 나라 한유(韓愈)가 조주(潮州)로 좌천되어 내려가다가 남관에 이르러서 지은 칠언 율시를 말하는데, 참고로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一封朝秦九重天 夕貶潮州路八千 欲爲聖明除弊事 肯將衰朽惜殘年 雲橫秦嶺家何在 雪擁藍關馬不前 知汝遠來應有意 好收吾骨瘴江邊” 《韓昌黎集 卷10 左遷至藍關 示姪孫湘》
♣ 남관집자동[南冠縶自同]죄인의 신세가 되었다는 말. 원의는 포로라는 말인데, 좌전(左傳) 성공(成公) 9년(九年)에 “초(楚) 나라의 종의(鍾儀)가 남관을 쓰고 포로로 잡혔다.”는 고사에서 유래된 말인데, 남관은 남쪽 지방 초(楚)의 관이라는 말.
♣ 남관초수[南冠楚囚]남관(南冠)은 춘추시대 초 나라에서 쓰는 관이고, 초수(楚囚)는 초 나라의 죄수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 성공(成公) 9년의 “진후(晉侯)가 군영을 순시하던 중에 종의(鍾儀)를 보고 유사(有司)에게 묻기를 ‘남관을 쓰고 구속된 저자는 누구냐?’ 하자, 대답하기를 ‘정(鄭) 나라 사람이 바친 초 나라 죄수입니다.’ 하였다.”에서 나온 말로, 죄를 짓고 구류된 것을 뜻한다.
♣ 남괴[南蒯]춘추 시대 노(魯) 나라 비읍(費邑)의 읍재(邑宰)인 남괴(南蒯)가 노 나라의 실권자인 계평자(季平子)를 배반했을 때, 당초에 그의 힘에 눌려 동조하던 자들이, 백성들이 남괴를 싫어함을 알고 드디어 남괴를 협박하기를, “우리는 옛 임금을 잊지 못한다. 그러니 살고 싶거든 도망가라.” 하여 드디어 제(齊) 나라로 달아났다고 한다. 《春秋 佐傳 昭公 三年》
♣ 남교경장[藍橋瓊漿]남교는 섬서성(陝西省) 남전현(藍田縣) 동남쪽의 남계(藍溪)에 있는 다리 이름이다. 거기에는 선굴(仙窟)이 있는데, 당나라의 배항(裵航)이 이곳을 지나다가 선녀인 운영(雲英)을 만나서 선인들이 마시는 음료인 경장(瓊漿)을 얻어마셨다고 한다. 《傳奇 裵航》
♣ 남교도약[藍橋擣藥]당(唐) 나라 때 배항(裵航)이 선녀인 운교부인(雲翹夫人)을 만났을 때, 운교부인이 배항에게 시(詩)를 주어 “경장을 한번 마시면 온갖 감정이 생기고, 현상을 다 찧고 나면 운영을 만나리라. 남교가 바로 신선이 사는 곳인데, 어찌 곡 기구하게 옥경을 오르려 하나[一飮瓊漿百感生 玄霜搗盡見雲英 藍橋便是神仙窟 何必崎嶇上玉京].” 하였는데, 뒤에 배항이 남교를 지나다가 목이 말라 한 노구(老嫗)의 집에 들어가 물을 요구하자, 노구가 처녀 운영(雲英)을 시켜 물을 갖다 주었다. 그래서 배항이 그 물을 마시고는, 앞서 운교부인의 예언을 생각하여 운영에게 장가들기를 청하자, 노구가 “옥저구(玉杵臼)를 얻어 오면 들어 주겠다.” 하므로, 뒤에 배항이 옥저구를 얻어서 마침내 운영에게 장가들어 신선이 되어 갔다는 전설에서 온 말이다.
♣ 남국[南國]강남(江南).
♣ 남궁[南宮]남궁은 상서성(尙書省)의 별칭이다.
♣ 남궁[南宮]예조(禮曹)의 별칭이다.
♣ 남궁[南宮]제후의 학궁(學宮). 반궁(泮宮). 성균관(成均館).
♣ 남궁리성[南宮履聲]한(漢) 나라의 정숭(鄭崇)이 상서 복야(尙書僕射)로 발탁된 뒤 아무도 못 하는 말을 감히 직간하곤 하였는데, 그가 가죽 신발을 끌고 오는 소리를 들으면 애제(哀帝)가 “정 상서가 또 오는구나.” 하고 웃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漢書 鄭崇傳》
♣ 남궁성[南宮星]남쪽에 있는 성좌로 적제(赤帝)의 궁이며, 주조(朱鳥)ㆍ권형(權衡)ㆍ태미(太微)의 삼광지정(三光之庭)이라 한다. 《史記 天官書》
♣ 남궁언[南宮彦]문장이 훌륭함을 이르는 말. 남궁은 당(唐) 나라 때의 예부(禮部)로, 예부의 낭관은 백관의 전표(牋表)를 맡고 있었다.
♣ 남귤북지[南橘北枳]강남(江南)의 귤을 강북(江北)에 옮겨 심으면 탱자나무로 변함. 곧 사람은 사는 곳의 환경에 따라 착하게도 악하게도 됨.
♣ 남극노인[南極老人]남극 노인성을 의인화(擬人化)한 말. 남극 노인성은 곧 남극성(南極星)인데, 사람의 수명을 관장하기 때문에, 이 별을 보면 오래 산다고 한다.
♣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하늘의 남극(南極)에 노인성(老人星)이 있는데, 그 별이 비치면 보는 사람이 오래 산다 한다.
♣ 남극성[南極星]장수(長壽)를 상징하는 별로, 노인성(老人星) 또는 수성(壽星)이라고도 한다.
♣ 남극일성[南極一星]노인성(老人星)을 말한다. 장수(長壽)를 상징하는 별로, 수성(壽星)이라고도 한다.
♣ 남금[南金]남금은 품질이 가장 높은 금을 말한다.
♣ 남기[南箕]유명무실함을 비유한 말. 기(箕)는 ‘키’라는 뜻이므로, 시경(詩經) 소아(小雅) 대동(大東)에 “남쪽엔 키라는 별이 있으나 곡식을 까부르지 못하고 북쪽엔 말이라는 별이 있으나 주장을 뜰 수가 없도다[維南有箕 不可以簸揚 維北有斗 不可以把漿].” 한 데서 온 말이다.
♣ 남기북두[南箕北斗]이름만 있고 실제 내용은 없는 것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대동(大東)의 “남쪽 하늘에 기성이 떠 있어도, 나락을 까부를 수 없고, 북쪽 하늘에 북두성이 있어도, 술을 떠 마실 수 없네.[維南有箕 不可以簸揚 維北有斗 不可以挹酒漿]”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 남기패금[南箕貝錦]시경(詩經) 소아(小雅) 항백(巷伯)에 “얼룩덜룩 조개 무늬 비단을 잘도 짜내었네, 참소하는 저 사람 해도 너무 하는구나. 입 딱 벌려 말 잘하는 남기성(南箕星)을 이루었네, 참소하는 저 사람 누구와 주로 모의하나.[萋兮斐兮 成是貝錦 彼讒人者 亦已大甚 哆兮侈兮 成是南箕 彼讒人者 誰適與謀]”라는 말이 나온다.
♣ 남남[喃喃]수다스럽게 말함, 글 읽는 소리
♣ 남남북녀[南南北女)남자는 남쪽 지방, 여자는 북쪽 지방의 사람이 아름답다는 말.
♣ 남내[南內]당대(唐代) 장안(長安)에 있던 흥경궁(興慶宮)의 별칭으로, 대비의 거처를 말한다. 의안태후(懿安太后)가 흥경궁에 거처할 때, 황제가 닷새마다 문안 인사를 올리고 세시(歲時)에 축하 인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新唐書 后妃傳下 穆宗貞獻蕭皇后》
♣ 남녀노소[男女老少]남자와 여자, 늙은이와 젊은이. 모든 사람.
♣ 남능[南能]남종(南宗)을 이룩한 육조(六祖) 혜능(惠能)대사.
♣ 남능북수[南能北秀]당(唐) 나라 선사(禪師)인 혜능(慧能)과 신수(神秀) 모두 중국 선종(禪宗)의 제5조(祖)인 홍인(弘忍)에게 사사(師事)하였는데, 혜능은 영남(嶺南)에 있으면서 홍인의 의발(衣鉢)을 이어받아 제6조(祖)가 되었고, 신수는 북쪽에서 활약하면서 측천무후(則天武后)의 귀의를 받는 등 교화를 펼쳤다. 《傳燈錄ㆍ宋高僧傳 卷8》
♣ 남대[南臺]남행(南行)인 대관(臺官). 즉 과거를 거치지 않고 대관이 된 자를 일컬었다.
♣ 남대[南臺]사헌부(司憲府)의 별칭임.
♣ 남대문입납[南大門入納]주소도 모르고 집을 찾거나 또는 그런 편지.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 )
♣ 남대폐우[楠大蔽牛]본초(本草)에 “남나무는 남방(南方)에서 나는데, 잎이 예장(豫章) 잎을 닮았으며 크기는 소 귀만하다.” 하였다.
♣ 남돈북점[南頓北漸]당나라 때에 수도 장안을 중심으로 신수(神秀)의 교가 소칭 북종(北宗)이, 광주를 중심으로 혜능(慧能)의 교가 속칭 남종(南宗)이 번성했다. 북종은 점오(漸悟; 점차로 깨달음)를, 남종은 돈오(頓悟; 별안간 깨달음)를 주장하였기에 ‘남돈북점’이라한다.
♣ 남두[南斗]별[星]의 이름. 남쪽에 있어 그 형체가 두(斗)와 같기 때문에 남두라 함.
♣ 남령[南靈]차[茶]끓이기에 제일 좋다는 물. 전다수기(煎茶水記)에 “차 끓이기에 적합한 물이 7등급이 있는데, 양자강(揚子江)의 남령수가 제일 좋다.” 하였다.
♣ 남루거호상[南樓踞胡床]진(晉) 나라 유량(庾亮)이 무창(武昌)을 관할하고 있을 적에 남루(南樓)의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부하 관원들과 허심탄회하게 술자리를 벌이고 달구경을 했던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容止》
♣ 남루풍월[南樓風月]남루는 유루(庾樓)라고도 한다. 진(晉) 나라 유량(庾亮)이 자사(刺史)로 나가 무창(武昌)을 다스릴 적에, 달 밝은 밤에 부하들이 풍월을 즐기고 있는 남루에 올라가서 자리를 함께하며 마음껏 회포를 풀었던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容止》
♣ 남류예[柟瘤譽]남류는 옹이가 많은 남나무를 말한다.
♣ 남류침부[枏瘤枕賦]삼국(三國) 오(吳) 나라의 장굉(張紘)은 남류로 만든 목침의 아름다운 무늬를 사랑하여 부(賦)를 지었는데 문장이 매우 훌륭하였다. 이때 하북(河北)에 있던 진임(陳琳)은 “이 부는 나의 고향 사람 장굉이 지은 것이다.” 하였는데, 이는 당시 하북에는 문장이 많지 않아 오직 진임 자신만을 알아주므로 장굉을 빌어 하북에도 자신보다 나은 문장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三國志 卷五十三 張紘傳 註》
♣ 남륙[南陸]여름철을 이름. 한서(漢書) 율력지(律曆志)에 “해가 북륙(北陸)으로 가는 때를 겨울이라 하고, 해가 남륙(南陸)으로 가는 때를 여름이라 한다.” 하였다.
♣ 남림[南林]산림에 은거함. 도연명(陶淵明)의 한정부(閑情賦)에 “가득한 시름 하소연할 길 없어 나 홀로 남쪽 숲속에서 배회하네.[擁勞情而罔訴 步容與于南林]" 하였음.
♣ 남만[南蠻]지금 운남성(雲南省)
♣ 남만어[南蠻語]남만은 남쪽 오랑캐 지방이란 뜻으로 경상도(慶尙道) 사투리를 가리킨 것이다.
♣ 남망유백운[南望有白雲]어버이를 생각하는 마음을 상징한다.
♣ 남면[南面]공자가 말하기를, “순(舜)은 몸을 공경히 하여 남면(南面)하는 임금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였다.
♣ 남면[南面]장자(莊子) 지락(至樂)에, 장자와 해골의 대화 가운데 “위로 임금도 없고 아래로 신하도 없으며, 사시(四時)도 없는 가운데 천지(天地)를 춘추(春秋)로 삼고 있으니, 남면(南面)하는 임금의 즐거움이라 하더라도 이보다는 못할 것이다. 내가 어찌 남면하는 임금과 같은 즐거움을 버리고 다시 수고로운 인간 세상에 되돌아갈까 보냐.”라고 한 해골의 대답이 실려 있다.
♣ 남명[南冥]조식(曺植)의 호.
♣ 남명시원유[南冥是遠遊]북쪽 바다의 붕새[鵬]가 남쪽 바다로 옮겨 갈 적에는 물결을 치는 것이 3천 리요, 회오리바람을 타고 9만 리나 올라가 6개월을 가서야 쉰다는 고사를 두고 한 말이다. 《莊子 逍遙遊》
♣ 남모[南膜]원래 불가(佛家)의 말로서 중생들이 부처를 향하여 진심으로 믿고 의지한다는 뜻으로 쓰임.
♣ 남목[南牧]남목은 북쪽 오랑캐가 남쪽으로 내려와 말을 먹인다는 뜻인데, 《賈誼》 과진론(過秦論)에 “북쪽으로 장성(長城)을 쌓아 흉노(匈奴)들을 7백여 리 밖으로 물리치니, 오랑캐가 감히 남으로 내려와 말을 먹이지 못하였다.” 하였다.
♣ 남목[南牧]한 무제(漢武帝)가 흉노(匈奴)를 쳐서 물리치니, 흉노가 감히 남으로 내려와 말을 먹이지 못하였다. 북방 민족이 중국에 침입하는 것을 남목(南牧)이라 한다.
♣ 남미주[藍尾酒]최후에 마신 술잔을 말한다. 또는 말석(末席)에 앉은 사람이 삼배(三杯)를 연속해서 마시는 것을 일컫기도 한다.
♣ 남민원차[南民願借]선정(善政)을 베푼 수령이 재차 그 고을에 부임해 줄 것을 바란다는 말. 후한(後漢) 구순(寇恂)이 광무제(光武帝)를 따라 영천(潁川)의 도적을 평정하고 돌아오려할 때 백성들이 길을 막고 “1년 동안만 구순을 우리 고을의 수령으로 있게 하여 달라.”고 하였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 《後漢書 寇恂傳》
♣ 남복[南服]복(服)은 서울 밖 500리 되는 지역을 뜻한다.
♣ 남부여대[男負女戴]남자는 짐을 싸서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임. 가난에 시달린 사람들이 살 곳을 찾아 이리저리 떠돌아다님. 피난 행렬
♣ 남북순타[南北順橢]남북이 타원형이다.
♣ 남비[攬轡]한 지방의 정치를 혁신하여 천하를 맑게 하려는 방백(方伯)의 포부를 말한다. 후한(後漢) 범방(范滂)이 기주 자사(冀州刺史)로 부임할 즈음 수레에 올라 말고삐를 잡으면서 천하를 맑게 변화시키겠다는 개연한 뜻[登車攬轡慨然有澄淸天下之志]을 보였는데, 범방이 기주에 이르자 탐관 오리들이 지레 겁을 먹고는 인끈을 자진해서 풀어놓고 달아났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67 黨錮列傳 范滂傳》
♣ 남비지청징[攬轡志淸澄]후한(後漢) 때 범방(范滂)이 난리가 일어난 기주(冀州)의 정정(政情)을 안찰(案察)하라는 명을 받았을 때 그가 수레에 올라 말고삐를 잡고서 개연히 천하를 깨끗이 맑히려는 뜻을 가졌었던 데서 온 말이다.
♣ 남비징청[攬轡澄淸]천하를 정화시키려는 지방 장관의 강개(慷慨)한 뜻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후한(後漢) 범방(范滂)이 기주(冀州)의 청조사(請詔使)로 안찰(按察)하러 떠날 때, 수레에 올라 고삐를 잡고서는 천하를 정화시킬 뜻을 개연히 품었다[登車攬轡 慨然有澄淸天下之志]는 고사에서 나온 것으로, 난세에 혁신적으로 정치를 행하여 백성을 안정시키겠다는 의지를 뜻하는 말이다. 《後漢書 黨錮傳 范滂》
♣ 남비행[攬轡行]후한서(後漢書) 범방전(范滂傳)에 “마침 기주(冀州) 일대에 흉년이 들어 도적떼가 일어나므로 조정에서 그를 청조사(淸詔使)로 삼아 순찰케 하였다. 그가 수레에 올라 고삐를 잡고, 천하를 한번 쇄신시켜 보겠다는 뜻을 다지며 기주 지방에 당도하니 수령들이 모두 자신의 잘못을 알고 벼슬을 내놓았다.” 하였다.
♣ 남빈팔영[南賓八詠]남조(南朝)의 심약(沈約)이 누각에 올라서 여덟 가지 경치를 읊은 팔영(八詠)이 있다.
♣ 남산[南山]남산은 중국 섬서성(陝西省) 남쪽에 있는 산으로 동쪽은 하남성(河南省) 서쪽은 감숙성(甘肅省)까지 뻗쳐 있으며, 주봉(主峯)은 장안현(長安縣)의 남쪽에 있다. 이곳은 중국의 서부인 옹주(雍州)에 해당하며 서도(西都)인 장안(長安) 지방으로서 옛날 주(周) 나라의 옛터이며, 진(秦) 나라의 발상지(發祥地)이다. 일명은 종남산(終南山), 또는 귤산(橘山)ㆍ진산(秦山)ㆍ주남산(周南山)ㆍ지폐산(地肺山)이라고도 한다.
♣ 남산가[南山歌]위(衛) 나라 영척(甯戚)이 제(齊) 나라에 가서 환공(桓公)에게 쓰이기를 바라는 뜻에서 쇠뿔을 두드리며 부르던 노래의 이름인데, 영척의 노래는 다음과 같다. “남산은 채색이 아름답고 백석은 반짝반짝 빛나는데, 그 가운데 잉어가 있어 길이가 한 자 반이 되도다. 세상에 나서 요순 같은 임금 만나지 못해, 짧은 홑옷이 겨우 정강이만 가릴 뿐이네. 초저녁부터 밤중까지 소를 먹이노니, 기나긴 밤 지루해라 언제나 날이 밝을꼬[南山粲粲 白石爛爛 中有鯉魚 長尺有半 生不遭堯與舜 短布單衣纔至骭 從昏飯牛至夜半 長夜漫漫何時旦].”
♣ 남산간[南山骭]간(骭)은 정강이를 말함. 위(衛) 나라 영척(甯戚)이 제 환공(齊桓公)에게 쓰이기를 바라는 뜻에서 남산가(南山歌)를 불렀는데, 그 노래에 “남산은 선명하고 흰 돌은 찬란하도다…… 세상에 나서 요순을 만나지 못하여 짧은 베로 지은 홑옷이 겨우 정강이에 이르네[南山粲粲 白石爛爛 …… 生不遭堯與舜 短布單衣纔至骭].” 한 데서 온 말이다.
♣ 남산계[南山桂]이백(李白)의 시에, “남산의 계수나무가 푸른 잎이 꽃다운 뿌리에 드리움을 어이 알랴.” 하였다. 계수나무는 절조를 상징하며, 경박한 도리(桃李)와는 대비된다.
♣ 남산무[南山霧]은둔생활을 의미함.
♣ 남산백석[南山白石]춘추 시대 제(齊) 나라 영척(甯戚)이 소[牛]를 기르고 있을 때 소뿔을 두드리면서 “남산은 선명하고 백석은 찬란하도다. 태어나서 요순 세상 만나지 못하니 긴 밤이 아득하다, 어느 때 밝아질까.[南山矸 白石爛 生不逢堯舜也 長夜漫漫何時旦]" 라고 노래한 것을 말한다. 《蒙求 中 甯戚扣角》
♣ 남산석[南山石]가난한 영척(寗戚)이 소를 치면서 불렀다는 노래. 제(齊) 나라 환공(桓公)이 그 노래를 듣고 불러서 재상을 삼았다 한다.
♣ 남산수[南山壽]시경(詩經)에, “남산(南山)이 무너지지 않는 것처럼 오래 사시오.” 하는 구절이 있다.
♣ 남산시[南山詩]총 2백 4구로 일대(一代)의 일을 서술한 한유(韓愈)의 시. 왕안석(王安石)같은 사람은 남산시가 두보(杜甫)의 북정시(北征詩)보다 좋다고 하였음.
♣ 남산은표[南山隱豹]남산의 흑표범이 자신의 아름다운 무늬를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비 내리고 안개 낀 일주일 동안 배고픔도 참고 전혀 밖에 나가서 사냥도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통 현사(賢士)가 산속에 은거하는 것을 뜻한다. 《列女傳 賢明陶答子妻傳》
♣ 남산종두희[南山種豆稀]한(漢) 나라 양운(楊惲)이 재상의 아들로 이른 나이에 현달(顯達)했다가 파직을 당한 뒤 시골에 돌아와서 불만스러운 뜻을 시로 표현하기를 “남산의 저 밭, 황무지로 놔 두었네. 1백 묘(畝)에 심은 콩, 콩깍지만 남았네.[田彼南山 蕪穢不治 種一頃豆 落而爲萁]”라고 하였는데, 남산(南山)은 임금을, 불치(不治)는 어지러운 조정을, 일경(一頃)은 백관을, 두(豆)는 재야(在野)에 버려진 자기 자신을, 기(萁)는 아첨하는 조관(朝官)들을 뜻한다고 한다. 《漢書 卷66》
♣ 남산풍발발[南山風發發]효성을 다 바치지 못하는 자식의 심경을 표현한 말이다. 어버이를 제대로 봉양하지 못하는 효자의 심정을 읊은 시경(詩經) 소아(小雅) 육아(蓼莪)에 “남산은 높다랗고, 회오리바람은 거세도다. 사람들 모두 잘 지내는데, 나만 왜 해를 입나.[南山烈烈 飄風發發 民莫不穀 我獨何害]”라고 하였다.
♣ 남상[濫觴]양자강 같은 대하(大河)도 근원은 잔을 잠글 만한 세류(細流)라는 뜻에서 유래. 즉 사물의 처음, 시작, 기원을 말함. “강이 처음 민산에서 시작될 때 그 근원은 잔에 넘칠 만큼이다[江始出於岷山 其源可以濫觴].”란 말이 있다. 《家語 三恕》
♣ 남상[南床]홍문관원의 별칭. 홍문관원이 사진(仕進)하여 앉는 좌차(座次)가 그 벼슬의 별칭이 되었으니, 곧 직제학(直提學)ㆍ전한(典翰)ㆍ응교(應敎)ㆍ부응교(副應敎)를 동벽, 교리(校理)ㆍ부교리(副校理)ㆍ수찬(修撰)ㆍ부수찬(副修撰)을 서벽, 박사(博士)ㆍ저작(著作)ㆍ정자(正字)를 남상이라 했다. 그리고 모두 경연을 겸임하였으며, 부제학에서 수찬까지는 또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 남선북마[南船北馬]남쪽은 배로 북쪽은 말로. 바쁘게 여기저기를 돌아다님
♣ 남성[南省]예조(禮曹)의 별칭이다. 남궁(南宮)이라고도 한다.
♣ 남소[南巢]남방의 봉황이 깃든 곳이라 함.
♣ 남수[柟樹]매화나무. 두보(杜甫)가 남수라는 제목으로 읊은 시는 다음과 같다. “초당 앞에 강을 의지한 남수는, 2백 년이 되었다고 말로서 전해 오네[依江柟樹草堂前 故老相傳二百年].”
♣ 남수[灆水]진주(晉州) 청천(淸川)의 일명.
♣ 남수초당[楠樹草堂]두보 시에 “依江楠樹草堂前 故老相傳二百年"이란 어구가 있음.
♣ 남숙북홀[南儵北忽]숙(儵)과 홀은 신(神)의 이름으로, 남해(南海)의 임금을 숙이라 하고 북해(北海)의 임금을 홀이라 한다. 《莊子 應帝王》
♣ 남순장[南巡仗]왕이나 왕비의 죽음을 뜻함. 순(舜) 임금이 남쪽으로 순수(巡狩)하여 창오(蒼梧)의 들에서 붕어하였으므로 이른 말이다.
♣ 남신구[南汛口]우리 나라 사신이 해로(海路)로 북경에 가는 도중에 거치는 곳으로, 여순구(旅順口)의 철산취(鐵山觜)와 영원(寧遠)의 사이에 있다.
♣ 남아[南衙]대내(大內)의 남쪽에 있는 중서성(中書省)ㆍ문하성(門下省)ㆍ상서성(尙書省) 등 이른바 재상부(宰相府)를 말한다.
♣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남자는 모름지기 다섯 수레에 실을 정도의 많은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뜻.
♣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남자의 말 한 마디는 천금의 무게가 있다는 뜻. 말을 함부로 하지말고 삼가라는 뜻
♣ 남악표[南嶽豹]세상이 자기를 은둔자로 만들었다는 것. 옛날 도대부 답자(陶大夫 答子)가 질그릇을 3년동안 구워냈는데도 명예는 하나도 나지 않고 가산만 전에 비해 3배가 불었다. 이에 답자의 아내가 아이를 안고 울면서 하는 말이, “남산에 있는 표범이 이레씩이나 내려와 먹이를 구하지 않고 안개만 먹고 있는 것은 제 털과 가죽을 윤택하게 만들기 위한 것으로, 모든 것이 드러나지 않아야 해를 멀리 할 수 있지 개나 돼지도 살이 쪄보이면 잡아먹히는 것이다.” 했다는데, 남산의 표범은 은둔자(隱遁者)를 의미한다. 《列女傳 賢明》
♣ 남양[南陽]남양은 남양천(南陽阡)으로 무덤을 말함.
♣ 남양[南陽]서천(舒川)의 옛 이름이다.
♣ 남양[南陽]하남성(河南省) 남양현(南陽縣)에 있는 지명으로,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승상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출사(出仕) 전에 살던 곳으로 제갈량(諸葛亮)을 일컫기도 한다. 그는 자신이 후주(後主)에게 올린 출사표(出師表) 그대로, 있는 마음과 힘을 다하여 여섯 차례나 중원(中原)을 수복시키려 했으나 끝내 오장원(五丈原)에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 남양삼고[南陽三顧]삼고초려(三顧草廬)와 같다. 촉한(蜀漢)의 유비(劉備)가 제갈량(諸葛亮)을 남양의 초려로 세 번이나 찾았다 한다.
♣ 남양옹[南陽翁]남양(南陽)의 늙은이란 바로 촉한(蜀漢) 때 남양에 살았던 제갈량(諸葛亮)을 말하는데, 그는 촉한의 유비(劉備)에게 역시 승상(丞相)으로 등용되었다. 《三國志 卷三十五》
♣ 남여[藍輿]남여는 병자가 타는 대를 엮어서 만든 가마이다.
♣ 남여수[南汝修]여수는 남홍래(南鴻來)의 자(字).
♣ 남연년[南延年]자는 수백(壽伯), 본관은 의령(宜寧)인데 청주 영장(淸州營將)으로 토포사(討捕使)를 겸하고 있던 중, 이인좌의 반란군과 싸우다가 청주성이 함락되어 잡혀 죽었다. 좌찬성에 추증되고 청주 표충사(表忠祠)에 봉안되었다.
♣ 남영주[南榮趎]경상초(庚桑楚)의 제자로서 도(道)를 듣기 위해 식량을 싸 지고 이레 낮 이레 밤을 걸어 노자(老子)가 있는 곳을 찾아갔음. 《莊子庚桑楚》
♣ 남와[南訛]염제(炎帝)에 속한 여름철 담당 불 귀신 이름이다.
♣ 남와장양[南訛長養]와(訛)는 변화(變化)의 뜻으로서, 즉 여름철에 시물(時物)이 장성(長盛)하여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書經 堯典》
♣ 남완[南阮]위진(魏晉) 시대의 명사인 완적(阮籍)의 조카 완함(阮咸)이 남쪽 동네에서 가난하게 살면서 칠월 칠석날 부유한 완씨(阮氏)들이 살고 있는 북쪽 동네를 찾아가서 잠방이를 대나무 막대기에 꿰어들고 다녔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世說新語 任誕》
♣ 남완정응경북완[南阮定應輕北阮]완적의 조카 완함(阮咸)은 길 남쪽에 살고, 다른 여러 완씨는 길 북쪽에 사는데, 북완은 부(富)하고 남완은 가난했다.
♣ 남완탐주[南阮耽酒]남완(南阮)은 도남(道南)에 살았던 진(晉) 나라 완적(阮籍)과 완함(阮咸) 등을 가리키는데, 도북(道北)의 북완(北阮)이 부유했던 데 반해 매우 가난했다 한다. 완적이 술을 탐내 보병교위(步兵校尉)를 자청하고, 완함이 돼지와 술을 마셨던 고사는 유명하다. 《晉書 卷49》
♣ 남우[濫竽]남(濫)은 실제로는 능력이 없으면서 함부로 한다는 뜻. 우(竽)는 대나무로 만든 악기. 즉, ‘우(竽)를 함부로 분다’는 뜻이다. 무능한 사람이 재능이 있는 것처럼 속여 외람되이 높은 벼슬을 차지하는 것을 말한다. 춘추(春秋) 시대 제 선왕(齊宣王)이 우(竽)라는 피리를 좋아하여 악인(樂人) 3백 명을 불러 이 피리를 연주하게 하였는데, 남곽(南廓)이라는 처사(處士)가 원래 피리를 불지도 못하면서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끼어서 함부로 이 피리를 불어 한때는 속여 넘겼으나, 민왕(湣王) 때에 이르러 한 사람씩 불러서 불어보게 한 결과, 남곽이 드디어 도망갔다고 한다. 《韓非子 內儲說上》 제우(齊竽)
♣ 남운[南雲]남쪽 구름은 고향의 정 또는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상징한다.
♣ 남운북몽[南雲北夢]강남(江南)에 위치한 운몽(雲夢)이라는 늪지대가 강의 남북으로 뻗어 있어 한 곳은 지대가 높고 한 곳은 낮기 때문에 물이 잦는 시기도 다르고, 경작 시기 역시 조만이 달라 합해서 말하면 물론 하나의 운몽택(雲夢澤)이지만 운택ㆍ몽택 둘로 분리해서 말하기도 함. 《書經 禹貢》
♣ 남원북철[南轅北轍]수레의 긴 채는 남쪽으로 가고 바퀴는 북쪽으로 간다는 말로, 행동이 마음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뜻의 고사성어.
♣ 남월[南越]남월은 중국 광동성(廣東省)과 광서성(廣西省) 사이에 있던 나라인데 미개한 나라여서 맨상투에 갓을 쓰지 않았다 한다. 《史記 卷一百十三 南越列傳》
♣ 남월금[南越金]한(漢) 나라 육가(陸賈)가 남월(南越)에 사신(使臣)으로 갔다 올 때에 남월왕 조타(趙佗)에게서 황금을 많이 얻어 왔다.
♣ 남월도강[攬月倒江]이태백이 술이 취하여 강을 건너다가 강물에 비친 달을 건지려고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는 말이 있다.
♣ 남위[南威]춘추 시대 진(晉) 나라의 미녀(美女)로, 진문공(晉文公)이 일찍이 남위를 얻은 뒤 3일 동안 정사를 게을리하고 나서는 마침내 남위를 멀리하면서 “후세에 반드시 여색 때문에 나라를 망치는 자가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戰國 魏策》
♣ 남음[南音]남방 초국(楚國)의 음악을 이른 말로, 즉 비속한 음조를 뜻한다.
♣ 남음[南音]남쪽 초(楚) 나라의 음악을 말한 것으로, 전하여 고향을 그리워함을 비유한 말. 춘추 시대 초 나라 종의(鍾儀)가 진(晉) 나라에 사로잡혀가 있을 적에 진후(晉侯)가 그에게 음악을 할 줄 아느냐고 묻자, 할 줄 안다고 대답하므로, 그에게 거문고를 주니, 그는 자기 고향인 초 나라의 음악을 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左傳 成公 九年》
♣ 남의[南疑]남방의 구의산.
♣ 남의비로의[藍衣非虜意]청에 항복하기로 결정이 났을 때 오랑캐 쪽으로부터 푸른 복장에 널을 싣고 오라는 말은 없었는데, 최명길이 밤에 남의를 만들게 했던 것이다.
♣ 남인역록[南人轣轆]육운(陸雲)의 소림(笑林)에 “한(漢) 나라 사람이 오(吳) 나라에 가니 오 나라 사람이 죽순나물을 차려 주었다. 그래서 무슨 물건이냐고 물었더니 대[竹]라고 했다. 집에 돌아와서 상책(床簀; 살평상의 대)를 아무리 삶아도 익지 않으니 하는 말이 ‘오 나라 놈이 나를 이렇게 감쪽같이 속였다.’ 하였다.” 원문에 ‘轣轆’은 은어(隱語)인데 본디 수레의 궤도(軌道)를 역록이라 이르므로 빌려서 궤도(詭道)로 쓴 것임.
♣ 남장[男粧]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교방(敎坊)에 두었던 창기 (娼妓)의 하나. 재인(才人)이 부족하자 지방에서 예쁘고 기예(技藝)가 있는 자와 경사(京師)의 무당ㆍ관비(官婢) 중에서 노래와 춤을 잘하는 자들을 뽑아 궁중에 두고 한 악대(樂隊)를 편성, 이를 ‘남장’이라 하였다.
♣ 남장[嵐瘴]열병의 원인이 된다고 하는 산천에서 생기는 나쁜 기운.
♣ 남적만[南敵萬]적만(敵萬)은 남이웅(南以雄)의 자(字)이다.
♣ 남전[藍田]산명(山名)인데, 아름다운 옥(玉)이 생산된다고 한다.
♣ 남전생옥[藍田生玉]남전(藍田)은 산사성에 있는 산 이름으로 옥의 명산지. 남전이 예로부터 명옥(名玉)을 산출하듯 명문에서 훌륭한 인물이 나온다는 뜻의 고사성어.
♣ 남전옥자[藍田玉子]양백옹(楊伯雍)이라는 사람이 선행을 쌓은 끝에 선인(仙人)으로부터 돌멩이 씨앗[石子] 한 섬을 받아 남전(藍田)에 뿌렸더니 거기에서 모두 옥(玉)이 자라났다는 전설이 전해 오는데, 보통 훌륭한 부친에 걸맞는 자식의 비유로 많이 쓰인다. 《搜神記 卷11》
♣ 남전이경[南田二頃]전국시대 동주(東周)의 유세가(遊說家) 소진(蘇秦)이 연(燕)ㆍ조(趙)ㆍ한(韓)ㆍ위(魏)ㆍ제(齊)ㆍ초(楚)등 여섯 나라의 왕을 설득하여 연합전선을 펴 진(秦)나라에 대항하게 하고 그 여섯 나라의 재상이 된 뒤에 말하기를 “만약 나에게 낙양의 성곽 남쪽에 밭 두 뙈기라도 있었다면 어찌 여섯 나라의 상인(相印)을 찰 수 있었겠느냐.” 하였다. 《史記 卷六十九 蘇秦傳》
♣ 남전지약[藍田之約]남전은 오늘날 중국 섬서성(陝西省)의 고을 이름임. 송나라 때 남전에 살던 여대충(呂大忠)ㆍ대방(大防)ㆍ대균(大鈞)ㆍ대림(大臨) 등 형제 네 사람이 그 고을 사람들과 서로 지키기로 약속한 자치 규범. 주로 “덕과 업으로 서로 권하고[德業相勸] 허물과 그른 일을 서로 경계하고[過失相規] 예다운 풍속으로 서로 사귀고[禮俗相交] 근심과 어려운 때 서로 구한다.[患難相恤]"는 등 네 조목인데, 후세 향약의 기준이 되었음. 《小學 卷六 善行 第六》
♣ 남제운[南霽雲]당 나라 때의 충신인 남제운(南霽雲)을 가리킨다. 남제운은 활을 잘 쏘았으며, 처음에는 주사(舟師)로 있다가 장순(張巡)의 부하 장수가 되었다.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하기 위하여 수양성(睢陽城)을 사수하던 중 성이 함락되었는데, 적이 투항하라고 위협하였다. 이때 장순이 남제운에게, “남팔(南八)아, 남아는 죽음이 있을 뿐으로, 의롭지 못하게 굴복해서는 안 된다.” 하자, 남제운은, “공께서 절 알아주었으니, 어찌 감히 죽지 않겠습니까.” 하고, 함께 순절(殉節)하였다. 《新唐書 卷192 南霽雲列傳》
♣ 남조[南朝]남조(南朝)는 임안으로 도읍을 옮긴 남송(南宋)의 조정.
♣ 남조[南祖]불교 선가(禪家)에 있어서의 남종(南宗)의 조(祖). 즉 혜능선사(慧能禪師)를 말한 것으로 신수(神秀)를 북종(北宗)이라 한 데 대한 말이다. 《宋高僧傳 八》
♣ 남조옥수[南朝玉樹]옥수(玉樹)는 사람의 풍채(風采)가 준수하고 고결한 것을 비유한 말이다. 진(晉) 나라 때 사안(謝安)이 여러 자질(子侄)들에게 “대체 무엇 때문에 자제(子弟)들에게 늘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냐?" 묻자, 조카인 현(玄)이 “비유컨대, 지란옥수(芝蘭玉樹)가 가까이 뜨락에 나면 보기 좋은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대답하였는데, 남조 시대에 이르러 사영운(謝靈運) 같은 명사(名士)들이 많이 배출되었음을 인용한 것이다.
♣ 남조화축[南朝畫軸]남조는 송(宋)ㆍ제(齊)ㆍ양(梁)ㆍ진(陳) 네 나라로 불교를 숭상하여 곳곳에 절이 많았다. 절[寺]에 그려진 단청(丹靑)을 말한다.
♣ 남존여비[男尊女卑]사회적 지위가 남자는 높고 귀하며, 여자는 낮고 천하다는 말.
♣ 남종[南宗]달마(達摩)의 뒤에 영남(嶺南)의 혜능(慧能)이 전한 선종(禪宗)의 일파(一派)를 말한다.
♣ 남주탑[南州榻]빈객(賓客)을 공경히 대우함을 말한다. 후한(後漢) 말기에 진번(陳蕃)이 특별히 탑(榻) 하나를 걸어두었다가 남주(南州)의 고사(高士) 서치(徐穉)가 내방하면 이를 내려서 우대하였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남지[南枝]매화를 가리키는 시어(詩語)이다. 소식(蘇軾)의 시에 “나의 소원은 매화꽃 질 무렵에, 일찍 북쪽 기러기 따라 날개짓 해 보는 것.[願及南枝謝 早隨北雁翩]”이라는 표현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35 次韻蘇伯高遊蜀岡途李孝博奉使嶺表》
♣ 남지[南至]태양이 남쪽 극점(極點)에 이르는 시기, 즉 동지(冬至)를 말한다.
♣ 남지서[南枝棲]타향에서 고향을 그리는 데 비유한 말. 월조(越鳥)가 고향을 그리워하여 남쪽 가지에 둥우리를 튼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남지일양생[南至一陽生]남지는 동지(冬至)의 별칭. 일양은 양(陽)이 처음 생긴다는 뜻으로, 1년 12월을 양월(陽月)과 음월(陰月)로 나누어 동짓달은 일양, 섣달은 이양, 정월은 삼양, 2월은 사양, 3월은 오양, 4월은 육양, 5월은 일음(一陰), 6월은 이음, 7월은 삼음, 8월은 사음, 9월은 오음, 10월은 육음월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 남징청비[攬澄淸轡]난세(亂世)에 정치를 혁신하여 천하를 안정시키고자 하는 뜻을 말한다. 후한서(後漢書) 제67권 당고열전(黨錮列傳) 범방(范滂)에, “이때 기주(冀州)에 기근이 들어서 도적떼가 일어났는데, 범방이 청조사(淸詔使)가 되어 안찰하게 되었다. 범방은 수레에 올라타 말고삐를 곧추잡고는 개연히 천하를 맑게 할 뜻을 품었다.” 하였다.
♣ 남창위[南昌尉]남창은 오늘날 중국의 강서성(江西省)에 있는 지명인데, 한(漢) 나라 때 구강(九江) 수춘(壽春) 사람인 매복(梅福)이 남창위를 지냈다 하여 그를 가리킨다. 왕망(王莽)이 권력을 독단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나중에는 성명을 고치고 오현(吳縣) 저자의 문지기가 되었다 한다. 《漢書 卷六十七 梅福傳》
♣ 남창장[南昌長]한신이 남창정장(南昌亭長)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었는데, 정장의 아내가 귀찮게 생각하여 밥을 일찍 지어먹고는 한신이 가면 밥이 없다고 거절하였다. 뒤에 한신이 초왕(楚王)이 되어 남창정장을 불러서, “자네는 소인(小人)이라 은혜를 끝까지 베풀지 못하였다.”고 책하고 백 금(百金)을 주었다.
♣ 남천[南泉]보원선사(普願禪師)의 별칭.
♣ 남천[南川]여주(驪州)의 남한강(南漢江) 변을 가리킨다.
♣ 남천[南川]이천(利川)의 고호임.
♣ 남천주[南天柱]중국 안휘(安徽) 잠산현(潛山縣)에 있는 남악(南嶽)으로 불리는 천주산임.
♣ 남청[藍靑]제자가 선생보다 더 뛰어났다는 뜻.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푸른 물감이 남(藍)에서 나오지만 남보다 더 푸르다.” 하였다.
♣ 남초[南譙]동진(東晉) 시대에 설치된 군(郡)으로, 지금 전초현(全椒縣) 서북쪽에 있다.
♣ 남취[濫吹]무능한 사람이 재능이 있는 체하거나 실력이 없는 사람이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뜻의 고사성어.
♣ 남침[南琛]남만(南蠻) 지역에서 생산되는 보물을 말한다.
♣ 남침[覽寢]혼례 치른 다음날 신랑의 친지들이 일제히 신부집을 방문하면, 그 집에서는 잔치를 베풀게 되니 이를 남침(覽寢)이라 이르고, 가례에 의해 혼사를 치르는 것을 진친영(眞親迎)이라 이르고, 혼례 치른 이튿날 신부가 시부모 뵙는 것을 반친영(半親迎)이라 이른다. 남침(覽寢)이란 이름은 고려말기에 생긴 듯하고, 진친영(眞親迎)과 반친영(半親迎)이란 말은 선조(宣祖)년간에 생기게 된 것이다.
♣ 남택지[南澤之]택지(澤之)는 남선(南銑)의 자(字)이다.
♣ 남평[南平]나주(羅州) 북쪽의 현읍(縣邑) 이름이다.
♣ 남포[南浦]남쪽 물가.
♣ 남풍[南風]남풍은 진 혜제(晉惠帝)의 후비인 가황후(賈皇后)의 이름. 가황후는 본디 황음하고 방자하여 간계를 써서 조서(詔書)를 위조하여 양황태후(楊皇太后)와 희회태자(熙懷太子)를 폐출하여 금용성에 안치시켰다가 끝내 모두 죽였는데, 이로 인해 결국 조왕 윤(趙王倫)에 의해 가황후는 폐해졌다가 사사(賜死)되었고, 혜제도 조왕 윤에게 제위를 찬탈당하고 금용성에 안치되었다. 이에 앞서 가황후의 비행을 두고 낙중(洛中)에 유행한 민요에는 “남풍이 맹렬하게 누런 모래 불어대니 …… 석달 뒤에는 너의 집을 멸망시키리라[南風烈烈吹黃沙……前至三月滅汝家].” 하였다. 《晉書 卷三十一》
♣ 남풍[南豐]송 나라 때의 증공(曾鞏)을 이르는 말이다. 증공은 당송 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남풍 지방 출신이므로 사람들이 남풍 선생이라 불렀다.
♣ 남풍[南風]순(舜)이 오현금(五弦琴)을 타며 노래했다는 시. “남풍이 훈훈함이여, 내 백성의 노염을 풀어 주리로다. 남풍이 철 맞춰 붊이여, 내 백성의 재물을 풍성하게 하리로다.” 하였다.
♣ 남풍곡[南風曲]순 임금이 지었다고 전하는 노래 이름이다. 옛날에 순 임금이 오현금(五絃琴)을 뜯으면서 남풍의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남풍이 솔솔 붊이여, 우리 백성들의 울분을 풀 수 있겠도다. 남풍이 때맞추어 붊이여, 우리 백성들의 재산을 늘릴 수 있겠도다.[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慍兮 南風之時兮 可以阜吾民之財兮]”하였다. 《孔子家語 辨樂解》
♣ 남풍불경[南風不競]남방지역의 풍악은 미약하고 생기가 없다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힘 또는 세력을 떨치지 못하다는 뜻의 고사성어.
♣ 남풍시[南風詩]우순(虞舜)이 지었다는 시. “남풍의 훈훈함이여, 우리 백성들 걱정 풀리겠네[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溫兮]”라고 한 시.
♣ 남해[南陔]남해는 시경(詩經) 소아(小雅)에 나오는 생시(笙詩 제목만 있고 가사는 없어진 시)의 편명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는 효자의 심정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 남해[南陔]효자가 서로 경계하여 부모를 봉양하는 시인데 그 시는 없다. 이에 대한 속석(束晳)의 보망시(補亡詩)에 “從彼南陔 言採其蘭"의 구가 있음
♣ 남해조운탑[南海朝雲塔]애첩(愛妾)과 정다운 한때를 보낸 것을 말한다. 초왕(楚王)과 무산(巫山)의 신녀(神女)가 운몽(雲夢)의 누각 위에서 만나 남녀간의 지극한 환락(歡樂)을 나누었는데, 그 신녀가 떠나면서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로 내리면서[旦爲朝雲 暮爲行雨] 언제나 이 누각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전설이 송옥(宋玉)의 고당부(高唐賦)에 나온다. 《文選 卷19》
♣ 남해편[南陔篇]생시(笙詩)의 편명으로, 효자(孝子)가 부모 봉양할 일을 서로 경계하는 노래인데, 본시(本詩)는 없어졌고 다만 진(晉) 나라 속석(束晳)의 보망시(補亡詩)가 있을 뿐이다.
♣ 남행[南行]남쪽 항렬(行列). 이 경우에는 ‘남항’이라 읽어야 할 터인데 ‘남행’이라 읽는 것은 관습이다. 제도상(制度上) 관용(慣用)하는 경우는 여러 가지가 있다. 1) 문관ㆍ무관의 정직(正職)이 아닌 잡직(雜職)에 있는 사람들, 2) 문과(文科)ㆍ무과(武科)에 급제하지 않고 부조(父祖)의 음덕(蔭德) 또는 본인의 학행(學行)때문에 벼슬이 오른 사람들,3) 회례(會禮)ㆍ회좌(會座) 때에 남쪽에 자리하는 사람들 등을 이르는 말로 쓰이며, 그 반열(班列) 자체를 뜻하기도 하고 그 반열에 속하는 개인 또는 전원을 뜻하기도 한다. 또 문ㆍ무의 반열을 동반(東班)ㆍ서반(西班)이라 칭하는 데에 대하여 잡직인 사람을 남반(南班)이라 칭하기도 하고, 회좌 때의 북벽(北壁)ㆍ동벽(東壁)ㆍ서벽(西壁)에 대하여 남쪽에 상(床)을 두고 앉는 좌차(座次)에 해당하는 사람을 남상(南床)이라 칭하기도 한다.
♣ 남헌[南軒]남헌은 송유(宋儒) 장식(張栻)에 대한 학자들의 존칭인 남헌 선생(南軒先生)의 약칭인데, 그의 남헌집(南軒集) 10권 ‘형주 석고산제갈충무후사기(荊州石鼓山諸葛忠武侯祠記)’에 제갈공명에 대한 곡진한 평가가 자세히 내려져 있다.
♣ 남혈괴의[南穴槐蟻]인간 일생이 속절없음. 당(唐)나라의 순우분(淳于棼)이 어느 날 남쪽으로 뻗은 홰나무 가지 아래서 잠이 들었는데, 꿈에 괴안국(槐安國)에 가서 왕의 딸을 아내로 맞고 남가군 태수(南柯郡太守)까지 되는 등 부귀를 누리다가 꿈을 깨고 보니 그 홰나무 아래에 큰 개미구멍만이 있더라는 고사. 남가일몽(南柯一夢). 《異聞集》
♣ 남화[南華]남화는 남화진인(南華眞人)의 준말로 장자(莊子)를 말한다.
♣ 남화[南華]산명(山名)인데, 선종(禪宗)의 제육조(第六祖)인 혜능대사(慧能大師)가 여기에서 불법(佛法)을 전수(傳授)했다고 한다.
♣ 남화경[南華經]장주(莊周)가 지은 것으로 장자(莊子)의 이칭. 남화진경(南華眞經).
♣ 남화생[南華生]남화생은 곧 남화진인(南華眞人)에 추증된 장자(莊子)를 말한다.
♣ 남화서[南華書]남화진경(南華眞經), 즉 장자(莊子)를 가리킴.
♣ 남훈곡[南熏曲]우순(虞舜)이 오현금(五弦琴)을 타며 불렀다는 노래로서, “남풍의 훈훈함이여, 우리 백성들의 불평을 풀어주리로다. 남풍의 때맞춤이여, 우리 백성들의 재물을 풍부히 하리로다.”
♣ 남훈시[南薰詩]남훈시는 순 임금이 지었다는 “따사로운 남풍이여 우리 백성 불만을 풀어줄 만하여라[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慍兮]"라는 내용의 시인 남풍시를 말한다. 곧 성군의 정치로 태평성대를 누리는 것을 뜻한다.
♣ 남훈시[南薰詩]남훈시란 바로 순임금이 오현금(五絃琴)을 타면서 노래한 남풍시(南風詩)에 “남풍의 훈훈함이여 우리 백성의 노염을 풀리로다[南風之薰兮 解吾民之慍兮]” 한 것을 이른 말로, 즉 임금의 죽음을 비유한 것이다.
♣ 남훈전[南薰殿]당(唐) 나라 때에 있었던 대궐 이름으로 순(舜) 임금이 지은 시가(詩歌)의 ‘남풍지훈(南風之薰)’에서 따온 명칭이다.
♣ 납극[蠟屐]납극은 나막신에 밀을 칠하여 광택이 나게 한 것. 동진(東晉) 때 조약(祖約)은 재물을 좋아하고, 완부(阮孚)는 신[屐]을 좋아하여 둘다 누(累)가 되는 일이긴 하나 누가 좋고 나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어떤 이가 조약의 집엘 가보니 조약은 마침 돈을 세고 있다가 손이 이르자 세던 돈을 농 뒤로 치우고 몸을 기울여 가리면서 매우 부자연스러운 표정이었고, 완부의 집엘 가보니 그는 마침 나막신에 밀을 칠하다가 스스로 탄식하기를 “내 일생에 이 신을 얼마나 더 신을는지 모르겠다.” 하며 기색이 자약하였으므로, 여기에서 비로소 승부가 판가름났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晉書 阮孚傳》
♣ 납극[蠟屐]납극은 밀칠한 나막신을 이르는데, 남조 송(南朝宋) 때 사령운(謝靈運)이 산에 오를 적에는 반드시 나막신을 신은 데서 온 말이다.
♣ 납극[蠟屐]진(晉) 나라 때 완부(阮孚)가 나막신을 좋아하여 항상 신에다 밀을 발라 광택(光澤)을 냈던 데서 온 말이다. 진서(晉書) 완부전(阮孚傳)에 “孚性好屐 或有詣阮 正見其臘屐"이라 하였음.
♣ 납극사공산[蠟屐謝公山]사공은 사영운(謝靈運)을 말하는데 자는 강락(康樂)이요, 사안(謝安)의 손자이다. 항상 목극(木屐)을 신으면서 산에 올라갈 때는 전치(前齒)를 버리고 내려올 때는 후치(後齒)를 버렸으므로 세상에서 사공극(謝公屐)이라 칭하였음. 이백(李白)의 시에 “脚着謝公屐 身登靑雲梯"의 구가 있음.
♣ 납납건곤공부정[納納乾坤工部亭]공부 원외랑(工部員外郞)을 지낸 당 나라의 시인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두보의 시 ‘야망(野望)’에, “하늘과 땅 포용하여 크기도 크고, 군국의 길 가고 또 가 멀기도 하네.[納納乾坤大 行行郡國遙]”하였다.
♣ 납마미흘화원도[納馬未訖華元逃]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선공(宣公) 2년 조(條)에 송(宋) 나라 화원(華元)이 포로가 되었는데, 말 1백 사(駟)를 속(贖)바치기로 하였다. 그런데 화원이 말을 반쯤 바쳤을 때 도망쳐 오자, 사람들이 “털북숭이가 갑옷을 버리고 왔다.[于思于思 棄甲以來]”고 노래를 불러서 조롱하였다.
♣ 납매[蠟梅]생강나무를 말한다. 2월에 개화하는데, 색깔이 밀랍(蜜蠟)과 같고 향기가 매화와 비슷하기 때문에 황매(黃梅)라고도 한다.
♣ 납부[蠟跗]부(跗)라는 것은 매화꽃의 화판이 붙었던 꽃꼭지이다. 매화의 꼭지는 황갈색이므로 그것은 밀[蠟]로 만든 것이라고 미화하여 말한 것이다.
♣ 납부출성[納符出城]밀부(密符)를 반납하고 도성(都城) 밖으로 나감. 의정(議政)ㆍ국구(國舅) 등이 임금의 불허(不許)를 무릅쓰고 강한 사직(辭職)의 뜻을 보이는 행동. 의정ㆍ국구가 장신 밀부(將臣密符)를 지니는 것은 혹 호위대장(扈衛大將) 등을 겸직(兼職)하기 때문이다.
♣ 납서점벽[納書粘壁]당태종. 위징(魏徵)이 간의대부(諫議大夫)로서 감히 용안을 범하면서까지 직간(直諫)하되 태종이 잘 용납했으며, 그가 소진(疎陳)한 2백여 사(事)를 벽 위에 붙이고 보았다.
♣ 납설[臘雪]동지(冬至)에서 입춘(立春)까지의 눈을 가리키는 말이다.
♣ 납언[納言]순(舜) 임금 때의 관명(官名)으로, 임금의 말을 백성에게 하달하고, 백성의 말을 임금에게 아뢰어 상하의 정을 소통시키던 직책이었다.
♣ 납육[臘肉]소금에 절인 돼지고기. 옛날 여행할 때의 식량으로 많이 가지고 다녔다.
♣ 납의[衲衣]승려의 별칭. 또는 승복(僧服)을 가리킨다. 승려는 세상 사람들이 내버린 낡은 천조각을 누덕누덕 기워서 옷을 만들어 입는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납자(衲子) 혹은 납승(衲僧)이라고도 한다.
♣ 납전백[臘前白]동지(冬至) 뒤에 셋째 술일(戌日)을 납(臘)이라 하는데, 이 납전에 오는 눈은 그 해의 채소나 보리에 아주 좋다고 한다. 《本草 臘雪》
♣ 납전요백[臘前要白]이 구절은, 납일 전에 눈[雪]이 세 번 내리면 이듬해에 풍년이 들 징조로 삼는 데서 이른 말.
♣ 납제금곡원제노[蠟啼金谷怨齊奴]진(晉) 나라 부호(富豪)였던 석숭(石崇)이 땔나무 대신 밀[蠟]로 밥을 지었다 한다. 금곡은 그의 별장이 있던 곳이며, 제노(齊奴)는 석숭의 별명이다. 《晉書 卷三十三 石崇傳》
♣ 납주[臘酒]섣달에 빚어 만든 술
♣ 납창[蠟窓]방수(防水)하기 위하여 밀을 먹인 종이로 바른 창.
♣ 납청정[納淸亭]몹시 납작하게 부서진 물건을 가리키는 말. 납청정은 본시 정자 이름으로 평북 가산(嘉山) 지경에 있었는데, 중국 사신 당고(唐皐)가 명명하고 사도(史道)가 기문을 지었으며, 그들의 시(詩)도 있었다. 그후 정자는 허물러지고 다만 사신이 왕래할 적에 말을 갈아타던 체마관(遞馬館)이 있었는데, 거주민들이 시장을 개설하였다가, 병자호란 때에 청병(淸兵)이 쳐들어와서 여지없이 유린하고 약탈하여 갔다는 데에서 생긴 말이다.
♣ 납파[納疤]개개인의 신체상의 특징, 특히 흉터 같은 것을 군부(軍簿)에 기록하는 일. 파는 흉터를 말한다. 조선시대 15∼60세까지의 남자는 병역 의무가 있었는데 남아 15세가 되어 군적을 만들 때 호적(戶籍) 외에 개개인의 구별을 명확히 하기 위하여 몸의 흉터를 명기(明記)하여 당사자임을 확실히 하였다. 목민심서(牧民心書)에 “파란 얼굴의 흉터를 말함인데 이를 군적에 기입한다.” 하였다.
♣ 납판[蠟瓣]그 꽃술이 백랍벌레[蠟蟲]처럼 생겼기 때문에 한 말이다.
♣ 낭간[琅玕]낭간은 옥 비슷한 아름다운 돌인데 전하여 아름다운 문장(文章)에 비유한다.
♣ 낭간[琅玕]대[竹]를 낭간(琅玕)이라 하는데, 낭간은 구슬 나무로써 봉황(鳳凰)이 그 열매를 먹는다는 말이 옛 글에 있으므로, 봉황이 죽실(竹實; 瓊實)을 먹는다는 옛 글과 연결시켜 대[竹]를 낭간이라 한 것이다.
♣ 낭간[琅玕]청낭간(靑琅玕)을 말한 것으로 대나무를 칭한다. 낭간은 원래 아름다운 돌로 빛이 푸른 옥[靑玉]과 같은데, 대나무는 이와 비슷하므로 청낭간 또는 낭간이라 한 것이다. 산해경(山海經)에 “곤륜산(崑崙山)에 낭간 나무가 있다.” 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대나무를 가리킨 것이다.
♣ 낭간규합서[琅玕呌闔書]주옥(珠玉)과 같은 글로 임금에게 직간(直諫)하였다는 말이다. 한유(韓愈)의 시 ‘착착(齪齪)’에 “排雲呌閶闔 披腹呈琅玕”이라는 구절이 있다. 창합(閶闔)은 대궐의 문이다.
♣ 낭간지초[琅玕芝艸]선인(仙人)의 낙원(樂園)을 말함. 소식의 시에 “芝艸琅玕培福地 瓊雲寶露潤仙林"이라 하였음.
♣ 낭경[琅莖]낭간 줄기. 낭간은 경옥(硬玉)의 일종으로 압록색과 청백색을 발하는 반투명의 아름다운 구슬인데, 토란 줄기에 비유한 말이다.
♣ 낭고[狼顧]이리[狼]는 겁이 많아서 항상 뒤를 잘 돌아다보므로, 자꾸 두려운 생각이 드는데 비유한 말이다.
♣ 낭관호[郞官湖]이태백이 상서랑(尙書郞) 장위(張謂) 등과 함께 뱃놀이를 즐겼던 호수 이름이다. 본래의 이름은 남호(南湖)였는데, 불후하게 전해질 아름다운 이름을 부탁받고 이태백이 그렇게 명명했다 한다. 《李太白集 卷19 泛沔州城南郞官湖竝書》
♣ 낭군[郎君]고려 때에 왕자(王子)를 일컫던 말이다.
♣ 낭낭[娘娘]어머니, 아내, 궁녀, 왕비, 창기
♣ 낭당[郞當]’郞當’은 ‘鎯鐺’이라고도 하는데 큰 자물쇠를 이름.
♣ 낭도사[浪淘沙]당(唐) 나라 교방곡(敎坊曲)의 이름인데, 강물 위의 뱃놀이를 소재로 하여 칠언 절구(七言絶句)로 지은 백거이(白居易)의 ‘낭도사사(浪陶沙詞)’ 6수가 유명하다. 《白樂天詩集 卷12》
♣ 낭도사[浪淘沙]옛 사패(詞牌) 이름. 28자(字) 또는 54자의 쌍조(雙調)로 되어 있음. 《詞律 卷一》
♣ 낭도사[浪陶沙]악부(樂府)의 곡사(曲辭) 이름. 유우석(劉禹錫)ㆍ백거이(白居易)ㆍ황보송(皇甫松) 등이 쓴 시가 있는데, 유우석(劉禹錫) 낭도사사(浪淘沙詞)에, “황하수 아홉 굽이 일만리 모래사장, 물결이 일어나고 바람이 짓까부네[九曲黃河萬里沙 浪淘風簸自天涯]”하였음.
♣ 낭랑[朗朗]소리가 맑은 모양, 밝은 모양, 명랑한 모양
♣ 낭랑[桹桹]나무와 나무가 서로 치는 소리
♣ 낭묘[廊廟]낭묘는 조정을 말함.
♣ 낭묘제공개육식[廊廟諸公皆肉食]일반 백성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고기를 먹는 등 특별 대우를 받으면서 높은 지위에 있으니, 그만큼 책임이 중하다는 말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 장공(莊公) 10년에 “고기 먹는 자들이 꾀한 일인데, 무엇 때문에 또 참견하려 하는가.[肉食者謀之 又何間焉]”하였다.
♣ 낭발기호[狼跋其胡]나가지 말아야 할 길은 나가지 않아야 함. 이리가 해가 묵으면 턱 밑에 늘어진 살이 붙는데, 앞으로 가려다가 그 혹을 밟으면 걸려 넘어짐. 《詩經 豳風》
♣ 낭비[娘臂]청주(淸州)의 고호임.
♣ 낭사결[囊沙決]한(漢)나라 한신(韓信)이 적장 용저(龍且)와 유수(濰水)를 사이에 두고 진을 쳤을 때, 밤중에 만여 개의 자루에다 모래를 담아 유수의 상류를 막은 뒤에 강 복판으로 적군을 유인하여 그 둑을 일시에 터뜨려 승리하였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史記 卷九十二 淮陰侯傳》
♣ 낭서[囊書]낭서는 봉사(封事) 즉 상서(上書)를 가리킨다.
♣ 낭선[閬仙]낭선은 당 나라 때의 시인 가도(賈島)의 호이다.
♣ 낭선[浪仙]당(唐) 나라의 시인 가도(賈島)의 자이다. 그가 고고(孤高)한 시풍으로 이름을 떨쳤다.
♣ 낭선[筤筅]창(槍)과 비슷한 무기(武器)의 한 가지이다.
♣ 낭성[琅城]낭성은 청주(淸州)의 고호이다.
♣ 낭성[郞星]낭장성. 별 이름인데, 무비(武備)를 관장한다고 한다.
♣ 낭수[狼宿]노인성(老人星)을 가리키는데, 일명 남극성(南極星)으로 장수(長壽)를 맡은 별이다.
♣ 낭아봉[狼牙棒]이리의 날카로운 이빨처럼 못을 많이 박아 놓은 창 비슷한 무기를 말한다.
♣ 낭야대[琅琊臺]중국 산동성(山東省) 해변에 있던 대(臺). 진시황(秦始皇)이 그 대를 묻고 각석기공(刻石紀功)했었다.
♣ 낭연[狼煙]낭연은 이리의 똥을 태운 연기. 이리의 똥을 태운 연기는 퍼지지 않고 똑바로 올라가므로 봉홧불로 사용하였다 하여 봉화불을 뜻한다.
♣ 낭예[浪栧]벼슬하러 가는 더러운 몸이라는 뜻이다. 은거 생활을 청산하고 벼슬길에 나선 주옹(周顒)을 비난한 공치규(孔稚珪)의 ‘북산이문(北山移文)’ 속에 “지금 주옹이 아랫고을에서 행장을 서둘러 수습하고 나와, 배를 저어 서울로 향하려 하는 판인데[今又促裝下邑 浪栧上京], 속마음은 대궐에 가 있으면서도 혹시 예전에 은거하던 이 산골 문에 슬쩍 발을 들여놓을지도 모르니, …… 청컨대 속된 선비의 수레를 돌려보내어, 산군(山君)을 위해 거짓 은자를 사절토록 하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 낭예부화[浪蕊浮花]낭예와 부화는 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쓸데없는 꽃이란 뜻이다.
♣ 낭옹[浪翁]산야의 한가로운 노인.
♣ 낭옹와준[浪翁窪樽]낭옹은 원차산(元次山)의 호를 존칭한 것이요, 와준은 움푹 파여 술통처럼 생긴 자연석을 가리킨 것이다. 원차산의 와준시(窊尊詩)에 “움푹 팬 돌이 술통에 적합한데, 기괴한 그 모양 형용할 수 없구려.[窊石堪爲尊 狀類不可名]" 하였다.
♣ 낭원[閬苑]신선(神仙)이 거주하는 곳. 허작(許碏)의 시(詩)에 “낭원의 꽃 앞에서 술에 취하여 서왕모의 구하상 그릇 엎질렀네. 여러 신선들 손뼉 치며 경박함을 나무라니, 인간으로 귀양보내어 술미치광이 만들었구나.[閬苑花前是醉鄕 踏飜王母九霞觴 群仙拍手嫌輕薄 謫向人間作酒狂]" 하였다. 《神仙傳》
♣ 낭원군[朗原君]조선조 선조(宣祖)의 손자인 인흥군(仁興君)영(瑛)의 아들로 이름은 간(▣), 호는 최락당(最樂堂). 형 낭선군(郞善君)과 함께 전서(篆書)ㆍ예서(隸書)를 잘 써서 이름이 높았음. 작품에 보월사 중수비(寶月寺重修碑)ㆍ송광사사원사적비(松廣寺嗣院寺蹟碑) 등이 있음.
♣ 낭자야심[狼子野心]이리 새기는 아무리 길들여 기르려 해도 야수의 성질을 벗어나지 못한다. 본래 성질이 비뚤어진 사람은 아무리 은혜를 베풀어도 끝내는 배반한다는 비유로 쓰인다.
♣ 낭잠[郞潛]관운(官運)이 트이지 않아 오래도록 승진하지 못한 채 낭서(郞署)의 관원으로 늙어가는 것을 말한다. 한(漢) 나라 안사(顔駟)가 문제(文帝) 때 낭관이 된 뒤로부터 경제(景帝)를 거쳐 무제(武帝) 등 3세(世)를 역임하면서 백발이 다되도록 낭관으로 있었기 때문에, 낭관의 자리에 잠겨 있었다는 뜻으로 낭잠(郞潛)이라는 표현이 쓰이게 되었다. 《漢武故事》
♣ 낭중[郎中]연산군 때 충청도ㆍ경상도ㆍ전라도에서 신에게 제사할 때 반드시 남자 무당을 썼는데, 그를 낭중이라고 불렀다.
♣ 낭중[郞中]낭관(郞官)의 별칭이다.
♣ 낭중손옥술[囊中飡玉術]신선을 배우는 한 방법인데 주머니 속에 숨겨 놓은 비방(秘方).
♣ 낭중영[囊中穎]남의 앞에서 재능(才能)을 과시하지 않음을 비유한 말. 재능이 뛰어나게 보이는 것이 마치 주머니 속의 송곳 끝이 겉으로 불거져 나오는 것과 같으므로 이른 말이다.
♣ 낭중의이[囊中薏苡]후한(後漢) 때 복파 장군(伏波將軍)으로 교지(交趾)의 태수(太守)로 나갔다가 돌아올 적에 율무[薏苡]를 많이 싣고 왔다. 《後漢書 馬援傳》
♣ 낭중일물[囊中一物]아주 취(取)하기 쉬운 물건의 비유. “중국이 나를 써 정승으로 삼으면 강남을 취함이 주머니 속의 물건을 더듬는 것 같으리라.” 한 구절이 있다.
♣ 낭중지추[囊中之錐]주머니 속에 든 송곳과 같이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사람들이 알게 됨을 말한다.
♣ 낭중추[囊中錐]주머니 속의 송곳은 끝이 뾰족하여 밖으로 뚫고 나오므로, 즉 재능이 남보다 뛰어난 사람을 비유한 말이다.
♣ 낭중취물[囊中取物]주머니 속의 물건을 꺼내는 것같이 매우 손쉬운 일을 일컫는다.
♣ 낭참[狼攙]낭성(狼星)과 참성(攙星)으로, 모두 흉한 조짐을 나타내는 살별이다.
♣ 낭추[囊錐]사기(史記) 평원군전(平原君傳)에 “전국(戰國) 때에 조(趙) 나라가 진(秦) 나라의 포위를 당하여 평원군(平原君)이 초 나라로 구원을 청하러 갈 적에 수행원 20명을 데리고 가야 하겠는데, 19명만을 뽑고 한 사람이 모자라 애를 태웠다. 그런데 이때에 모수(毛遂)가 갑자기 나를 데리고 가달라고 자청하니 평원군이 대답하기를 ‘선비가 세상에 나옴은 송곳이 주머니 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끝이 보이는 법인데, 선생의 재능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습니다.’ 하자, 모수가 ‘오늘부터라도 주머니 속의 송곳이 되겠습니다. 내가 진작 주머니 속에 들어갔다면 당장 자루까지 삐져 나왔지, 어찌 끝만 보였겠습니까?’ 했다.” 하였다.
♣ 낭파[郞罷]복건성(福建省)의 방언(方言)으로 아버지를 일컫는 말이다.
♣ 낭패[狼狽]낭(狼)은 앞발만 있고 뒷발은 아주 없거나 아주 짧고, 패(狽)는 뒷발만 있고 앞발은 없는 상상의 짐승. 따라서 이 두 짐승은 서로 앞뒤로 올라 타고 다녀야 온전하게 한 마리의 짐승 역할을 할 수 있다. 꾀가 부족한 대신 용맹한 낭(狼)과 꾀가 있는 대신 겁쟁이인 패(狽)가 호흡이 맞을 때는 괜찮다가도 서로 다투는 날에는 이만저만 문제가 큰 것이 아니었다. 만일 이 두 짐승이 서로 떨어지게 되면 큰일이라고 해서 생긴 말. 계획한 일이 실패로 돌아가거나 어그러진 형편을 가리킴.
♣ 낭풍[閬風]낭풍은 곤륜산(崑崙山) 꼭대기의 이름으로, 이곳에 선녀인 서왕모(西王母)가 살고 있다는 전설이 있다.
♣ 낭풍원[閬風苑]현포(玄圃)와 낭풍원(閬風苑)은 곤륜산(崑崙山)에 있는 신선의 동산이다.
♣ 낭풍잠[閬風岑]현포(懸圃)의 별칭으로 장생(張生)이 있는 시골을 가리킨다.
♣ 낭풍현포[閬風玄圃]낭풍은 곤륜산(崑崙山)꼭대기의 신선이 산다는 곳이고 현포는 낭풍의 딴 이름이다. 곧 신선 세계를 말한다.
♣ 낭함[琅函]선가(仙家)의 서적(書籍)을 말한다.
♣ 낭화[浪花]물결이 서로 부딪쳐 흩어지는 모양을 꽃에 비유하여 이른 말.
♣ 내[內]‘납(納)’과 통함. 집어넣다.
♣ 내가[內家]궁인(宮人)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 내가[內價]조선시대 명종(明宗) 때 벼슬을 얻기 위하여 권귀(權貴)들의 아내에게 뇌물을 쓰는 것으로, 권귀 본인에게 직접 뇌물을 쓰는 ‘외가’의 대가 되는 말.
♣ 내가역[來家易]명(明)의 내지덕(來知德)이 집주(集註)한 주역(周易). 《明史 卷二百八十三》
♣ 내각시[內各氏]임금에게 하첨하는 무리를 여자에 비유해 기롱한 말. 이희보(李希輔)가 말재주로 비루하게 연산군에게 아첨하여 조계형(曺繼衡)과 더불어 왕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그를 지목하여, 그가 잘 영합하고 완곡하게 따르는 것이 궁첩(宮妾)과 같다는 뜻으로 일컬은 말이다.
♣ 내거[內擧]내거는 일가 친척을 천거하여 등용함을 말한다.
♣ 내경[內景]의학상 용어로 음(陰)의 내신(內神), 곧 장부(臟腑)를 가리킨다.
♣ 내경[內經]책 이름인데, 고대의 의서(醫書)로서 황제(黃帝)가 기백(岐伯)과 문답한 소문(素問)ㆍ영추경(靈樞經)을 합하여 내경(內經)이라 함.
♣ 내경[內景]황정내경경(黃庭內景經)의 약칭으로 양생법을 기록한 도가의 서책임. 대도옥신군(大道玉晨君)이 저술하여 위부인(魏夫人)에게 전수하였다는 것으로 2권 3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 내경경[內景經]황제내경경(黃帝內景經)의 준말이다.
♣ 내공[乃公]유부(乳父)를 가리키는 말.
♣ 내공[萊公]내공은 송 나라 명신인 내국공(萊國公) 구준(寇準)을 가리킨다. 구준은 62세에 죽었다.
♣ 내공방[內工房]조선시대 과거(科擧) 시에 시관(試官)에게 음식을 공급하는 여러 관사의 하인으로서 시장(試場) 안에 들어가 직접 주선하는 일을 담당하는 자를 일컬은 말.
♣ 내구[內廐]나라의 마구간. 임금의 말을 먹이는 곳.
♣ 내구붕[耐久朋]시종 마음을 변치 않는 친구를 말한다. 당(唐) 나라 위현동(魏玄同)과 배염(裵炎)이 처음부터 끝까지 우정을 변치 않자 내구붕이라고 일컬어졌던 고사가 있다. 《唐書 魏玄同傳》
♣ 내금지사[來禽只寫]내금은 능금이다. 진(晉)의 명필 왕희지(王羲之)가 청리내금(靑李來禽)을 써서 서첩(書帖)을 만들었다.
♣ 내내[嬭嬭]부인을 높여 부르는 말
♣ 내내[奶奶]하인이 젊은 주부를 일컫는 말, 손자가 조모를 부르는 말, 형수를 이르는 말, 부인을 높이어 이르는 말
♣ 내농작[內農作]정월 보름날 볏집을 묶어 곡식 이삭을 매달고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
♣ 내대[褦襶]내대는 볕을 가리기 위하여 쓰는 모자, 또는 무더위에 내대를 쓰고 남의 집을 찾는 일을 말하는데, 즉 오활하여 사리에 어두운 사람을 내대자(褦襶子)라고 한다.
♣ 내대자[褦襶子]물정을 잘 모르는 사람을 이름. 고문원(古文苑)에 실린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정효(程曉)의 ‘조열객시(嘲熱客詩)’에 “저기 저 내대자 보소, 무더위 속에 남의 집을 찾아다니네.[只今褦襶子 觸熱到人家]”라는 표현이 있다.
♣ 내동마재서[來東馬載書]동은 동쪽 즉 조선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를 가리킨다. 기자는 조선에 오면서 홍범(洪範) 등 책을 흰 말에 싣고 왔다 한다.
♣ 내모[嬭母]유모(乳母)와 같은 뜻인데, 남조 송(南朝宋) 때 하승천(何承天)이 연로하여 비로소 장작좌랑(將作佐郞)에 제수되자, 다른 여러 좌랑들은 모두 명가(名家)의 연소자들이었으므로, 순백자(荀伯子)가 하승천을 조롱하여 항상 ‘이모’라 호칭했던 데서 온 말이다. 《南史 何承天傳》
♣ 내모[來暮]한(漢) 나라 염숙도(廉叔度)가 촉군 태수(蜀郡太守)가 되어 선정(善政)을 베푸니 백성이 노래 부르기를, “염숙도는 왜 늦게 왔는가[廉叔度 來何暮].” 하였다.
♣ 내무증[萊蕪甑]생활이 청빈(淸貧)한 것을 말한다. 한(漢) 나라 때 범염(范冉)은 자가 사운(史雲)으로, 내무현(萊蕪縣)의 장(長)이 되었다가 뒤에 당인(黨人)의 금고(禁錮)에 걸려 생활이 아주 청빈하였는데, 궁하게 살면서도 태연자약하였으며, 말과 용모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이에 당시 사람들이 노래하기를, “시루에 먼지가 이는 범사운이요, 솥에 고기가 사는 범 내무이네[甑中生塵范史雲 釜中生魚范萊蕪].”라 하였다. 《後漢書 獨行傳 范冉》
♣ 내미[內美]주자집주(朱子集註)에, “生得日月之良 是天賦我美質於內也”라고 보임.
♣ 내복[內服]왕기(王畿) 이내의 지방으로, 중국 본토를 말한다.
♣ 내복[萊服]춘추 시대 초(楚) 나라 노래자(老萊子)가 나이 70에 어버이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하여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떨었던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初學記 卷17》
♣ 내부[萊婦]주대(周代)에 초(楚)의 은사(隱士) 노래자(老萊子)의 아내인데, 자신의 아내를 낮춰서 일컫는 말.
♣ 내빈삼천[騋牝三千]시경(詩經) 정지방중(定之方中)에 “사람의 마음가짐 성실할 뿐만이 아닌지라, 우람한 말 삼천 마리 들어찼도다.[匪直也人 秉心塞淵 騋牝三千]”하였다.
♣ 내사[內史]선성 태수(宣城太守)를 지낸 남제(南齊)의 사조(謝朓)를 가리키는데, 사조는 시가 청아하고 아름다웠는데, 특히 오언시(五言詩)를 잘 지었다.
♣ 내사[內賜]임금이 물건을 신하에게 하사하는 것.
♣ 내사유상불계진[內史流觴祓稧辰]내사는 왕희지를 이름인데 그가 지은 난정서(蘭亭序)에 “流觴曲水"가 있음.
♣ 내사황감[內史黃甘]내사는 회계내사(會稽內史)를 지낸 왕희지를 말하고 황감은 그의 황감첩(黃甘帖)을 말함.
♣ 내성[㮈城]강원도 평창군(平昌郡) 동쪽 17리에 있는 미탄현(味呑峴)에 자연석(紫硯石)이 유명하다. 《輿覽 平昌》
♣ 내성불구[內省不疚]마음 속에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음. 즉 마음이 결백함을 뜻한다.
♣ 내성외왕[內聖外王]안에는 성인(聖人)의 덕을 쌓고 밖에는 왕자의 도를 행함을 이른다.
♣ 내소[來蘇]와서 살려주기를 바라는 뜻. 서경(書經) 중훼지고(仲虺之誥)에 “우리 임금 오시니 우리를 살려주겠지.[后來其蘇]" 하였다.
♣ 내신인투수[來信人投水]진(晉) 나라 때 은선(殷羨)이 예장 태수(豫章太守)가 되어 떠날 때 서울 사람들이 부친 편지가 1백여 통이나 되었는데, 석두(石頭)에 이르러 모두 물 속에 던지고는 말하기를, “뜰 놈은 뜨고 가라앉을 놈은 가라앉거라. 은홍교(殷洪喬)는 편지나 전달하는 우체부는 될 수 없다.”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 내씨[來氏]내씨는 명(明) 나라 때의 학자인 내지덕(來知德)을 이름.
♣ 내열[內熱]마음속의 해소되지 않는 갈등을 뜻한다.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의 “내가 아침에 왕의 명령을 받고 나서 저녁에 얼음물을 마시게 되었으니, 아마도 내 속이 뜨거워진 모양이다.[吾朝受命而夕飮冰 我其內熱與]”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 내열자[內熱子]벼슬살이를 하는 사람들의 고달픈 심정을 동정한 말이다.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에 “오늘 내가 아침에 사명(使命)을 받들고서 저녁에 얼음물을 마셨으니, 아마도 내 속이 벌써 뜨거워진 것 같다.[今吾朝受命而夕飮冰 我其內熱與]”는 말이 있다.
♣ 내외거[內外擧]내외거(內外擧)는 내거(內擧)와 외거(外擧)를 합칭한 것으로, 내거는 일가 친척을 천거하여 등용함을 말하고 외거는 타인(他人)을 천거하여 등용함을 말하는데, 춘추 시대 진(晉) 나라 대부 기해(祁奚)가 늙어서 사직하기를 청하자, 진후(晉侯)가 후임자를 천거하게 하니, 기해가 자기 원수인 해호(解狐)를 천거하므로, 그를 후임자로 세우려 하였으나 그가 이내 죽었다. 그래서 다시 후임자를 천거하게 하니, 기해가 그제는 자기 아들 오(午)를 천거하였다. 그리하여 군자가 이를 두고 논평하기를 “기해는 편당짓지 않았다 이를 만하다. 외거에는 원수를 숨기지 않았고, 내거에는 자식을 숨기지 않았다.” 하였다. 《左傳 襄公三年》
♣ 내외전[內外典]내전(內典)은 불교 경전을, 외전(外典)은 불교 이외의 전적을 가리킨다.
♣ 내우외환[內憂外患]안의 근심과 밖의 근심. 국내의 걱정스러운 사태와 외국과의 사이에 일어난 어려운 사태
♣ 내원당[內願堂]대궐에 설치하여 왕실(王室)의 명복(冥福)을 빌던 절.
♣ 내원장[內願狀]나라에서 해마다 중춘(仲春)과 중추(中秋)에 관원을 보내어 산ㆍ바다ㆍ강 등의 신에게 제사지내어 비와 바람이 순조롭고 곡식이 잘 되게 하여 주기를 비는 일.
♣ 내유외강[內柔外剛]겉으로 굳게 보이나 속(내심)은 부드러움.
♣ 내윤외랑[內潤外朗]옥의 광택이 안에 함축된 것을 내윤(內潤)이라 하고, 밖으로 나타난 것을 외랑(外朗)이라 함. 재주와 덕망을 겸비한 것을 비유한다.
♣ 내의[萊衣]초(楚) 나라의 효자인 노래자(老萊子)의 옷. 북당서초(北堂書鈔) 제129권에, “노래자(老萊子)가 나이 70세에 부모가 아직 살아 있었으므로 항상 색동옷을 입고서 어린아이 시늉을 하면서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하였다.” 하였다.
♣ 내의거명목[萊衣詎瞑目]봉양해야 할 어버이를 남겨두고 차마 눈을 감지 못하리라는 뜻이다. 주(周) 나라 때 노래자(老萊子)가 나이 70에 색동옷을 입고 어린애 흉내를 내면서 어버이를 즐겁게 해 드린 고사에서 유래한다. 《高士傳 上 老萊子》
♣ 내의무[萊衣舞]노래자는 춘추시대 초 나라의 은사인데 그의 나이 70세에 그때까지 생존한 부모 앞에서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어 부모를 즐겁게 해 드리는 등, 지극한 효성이 늙도록 변함 없었다 한다.
♣ 내의여강피[萊衣與姜被]부친과 아우를 만나 효성과 우애를 극진히 행해 보라는 말이다. 춘추 시대 초(楚) 나라 노래자(老萊子)가 나이 70에 어버이를 기쁘게 해 드리려고 색동옷을 입고서 재롱을 떨었던 고사가 있다.《初學記 卷17》 또 후한(後漢)의 강굉(姜肱)이 아내의 방에 들어가지 않고 아우와 한 이불을 덮고 자면서 형제간의 우애를 나누었던 고사가 전한다.《後漢書 卷53 姜肱列傳》
♣ 내의지덕[來儀之德]서경(書經)에, “소를 아홉 번 이루매 봉황이 와서 노닐었다[簫韶九成 鳳凰來儀].”
♣ 내입경강[來入驚姜]태아(胎兒)가 출생할 때 이상 출산으로 인하여 산모가 몹시 고통을 받은 것을 말한다. 강(姜)은 정 장공(鄭莊公)의 어머니 무강(武姜)을 말한다. 무강이 장공을 낳을 때 출산이 어려워 놀랐기 때문에 한 말이다. 《春秋左傳 隱公 元年》
♣ 내전[內典]석씨요람(釋氏要覽)에 의하면, 불경(佛經) 이외의 서적(書籍)들을 외전(外典)이라 일컫고 불경을 내전이라 일컬었는데, 불경은 심신 수양을 위주로 하는 것이므로, 곧 심신 수양의 뜻을 취한 것이다.
♣ 내정채복[萊庭綵服]부모에게 효도함을 비유한 말. 춘추 시대 초(楚) 나라의 노래자가 효성이 지극하여 나이 70에 알록달록한 오색의(五色衣)를 지어 입고 부모 앞에서 어린애의 장난을 하여 부모를 즐겁게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어.
♣ 내조지공[內助之功]안에서 돕는 공. 아내가 집안 일을 잘 다스려 남편을 돕는 일을 말한다.
♣ 내지덕[來知德]명(明) 나라 때의 학자. 그는 종신토록 벼슬을 하지 않고 주역(周易)에 전념하여 문왕(文王)의 서괘(序卦)와 공자의 잡괘(雜卦)의 뜻을 다 통하여 주역집주(周易集註) 1편을 저술하였고, 그 밖에도 이학변의(理學辨疑)ㆍ심학회명해(心學晦明解) 등을 저술하였다. 《明史 卷二百八十三》
♣ 내청외탁[內淸外濁]마음은 깨끗하나 행동은 흐린 것처럼 함. 군자(君子)가 난세(亂世)를 당하여 명철보신(明哲保身) 하는 처세술.
♣ 내체[內遞]벼슬아치가 내직으로 옮김으로 해서 체직되는 일.
♣ 내체[來遞]신관(新官)이 갑자기 외직으로 보직되어 오는 일.
♣ 내칙[內則]예기(禮記)의 편명으로, 부녀자들이 집안에서 준수해야 할 규범들로 채워져 있다.
♣ 내탕금[內帑金]임금의 사사 재산.
♣ 내혁[來革]인명 은(殷)의 마지막 왕으로서 주(周)나라의 간신이었다.
♣ 내황후[內黃侯]게를 말함. 게는 농짝 속에 노란 살이 들어 있기 때문에 붙여진 말이다.
♣ 내훈[內訓]당 고종(唐高宗) 때 소의(昭儀) 무씨(武氏)가 지은 책으로 총 1권.
♣ 냉관[冷官]보수도 적고 지위도 낮은 보잘것없는 벼슬. 또는, 직무가 번거롭지 않은 청한(淸閒)한 관직을 말한다.
♣ 냉금전[冷金箋]금박을 입힌 고급 종이의 하나이다.
♣ 냉난[冷煖]옥기자(玉棊子)를 말함. 두양잡편(杜陽雜編)에 “日本東三萬里有集眞島 島上有凝霞臺 臺上有手談池 池中生玉棊子 黑白分明 冬煖夏冷 謂之冷煖玉"이라 하였음.
♣ 냉난[冷煖]염량(炎凉)과 같은 뜻으로, 권세(權勢)의 성함과 쇠함을 이른 말이다.
♣ 냉랭[冷冷]맑고 시원한 모양, 음운이 맑은 모양, 선뜻하고 차가운 모양, 물이나 바람 소리의 맑은 모양
♣ 냉소[冷笑]차가운 태도로 비웃는 웃음
♣ 냉어[冷語]비평과 풍자의 뜻이 내포되어 있는 말을 뜻한다.
♣ 냉연욕어장풍거[冷然欲御長風去]옛날에 열어구(列禦寇)라는 사람이 바람을 타고 서늘하게[冷然] 달려갔다고 한다.
♣ 냉추고[冷秋菰]썰렁한 날씨 속의 가을철 줄 풀을 말한다. 두보의 ‘무더위[熱]’라는 제목의 시에 “어떡하면 차가운 수정(水晶)이 되고, 어떡하면 냉추고가 될 수 있을까.[乞爲寒水玉 願作冷秋菰]”라는 표현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5》
♣ 노[魯]노는 태산, 또는 공자를 가리킴. 맹자(孟子) 盡心上에 “공자께서 동산(東山)에 올라서는 노 나라를 적다고 여기시고 태산에 올라서는 천하를 적다고 여기셨다.[孔子登東山而小魯 登太山而小天下]" 하였음.
♣ 노가[魯家]동로가(東魯家)의 준말로, 주인 없이 텅 빈 고향집을 가리킨다.
♣ 노가[盧家]부유한 집을 뜻한다. 낙양(洛陽)의 여인 막수(莫愁)가 부자인 노씨 집에 시집갔다는 내용의 고악부(古樂府)에서 유래한 것이다.
♣ 노가[勞歌]손님을 전송하면서 부르는 노래. 노로정(勞勞亭)이라는 곳에서 노래를 부르며 멀리 가는 손님을 전송했다는 데서 온 말. 《事文類聚》
♣ 노가소부[盧家少婦]노씨네 부인과 관련하여 양 무제(梁武帝)의 하중지수가(河中之水歌)가 전해 오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하수는 동쪽으로 흐르는데 낙양 소녀의 이름 막수(莫愁)였네. 12세 되자 비단 짜고 14세엔 누에 쳤네. 15세엔 노씨에게 시집을 가 16세에 아후같은 애 낳았네. 계수나무 들보에 깨끗하게 꾸민 방 언제나 울금초 향기 감돌곤 하였다오[河中之水向東流 洛陽女兒名莫愁 年來十二能織綺 十四採桑南陌頭 十五嫁爲盧家婦 十六生兒似阿侯 盧家蘭室桂爲梁 中有鬱金蘇合香].”
♣ 노가수[魯嘉樹]진(晉) 나라 대부 한 선자(韓宣子)가 노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노 나라의 대부인 계 무자(季武子)의 집에서 연향할 때에 거기에 좋은 나무[嘉樹]가 있는 것을 보고 한 선자가 그를 좋다고 칭찬하자, 계 무자가 말하기를 “제가 반드시 이 나무를 잘 북돋아 길러서 공께서 각궁(角弓)을 읊은 뜻을 잊지 않겠습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左傳 昭公 二年》
♣ 노가옥당[盧家玉堂]노씨 집의 옥으로 꾸민 전당. 옥계생시전주(玉谿生詩箋註) 권2 대설(對雪)의 “이미 강령을 따라 옥나무를 뽐내고 또 노가로 들어가 옥당을 시기하네[已隨江令誇瓊樹 又入廬家妒玉堂].”에서 인용한 것이다. 강령은 남조(南朝) 진(陳) 나라 때의 상서령(尙書令)을 지낸 강총(江總)을 가리킨다. 노씨집은 막수(莫愁)라는 소녀가 집을 옥으로 꾸민 노씨집으로 시집갔다고 하는 양무제(梁武帝)의 하중지수가(河中之水歌)에서 나온 고사이다.
♣ 노가유막수[盧家有莫愁]막수(莫愁)는 당(唐) 나라 때 석성(石城)의 여자로 가요(歌謠)를 매우 잘하였는데, 그가 15세의 나이로 노씨(盧氏)의 집에 시집을 갔다고 하므로 이른 말이다.
♣ 노갑이을[怒甲移乙]어떤 사람에게서 당한 노여움을 다른 사람에게 화풀이하다.
♣ 노거공명부적송[老去功名付赤松]장량(張良)이 성공한 뒤에 모든 것을 받지 아니하고 다만 소원하는 것은 옛날 신선인 적송자(赤松子)를 따라서 노는 것뿐이라고 하였다.
♣ 노견쟁능이적참[盧犬爭能異趯毚]한유(韓愈)의 모영전(毛穎傳)에, “동곽(東郭)에 사는 토끼인 준(㕙)이 날래고 뜀박질을 잘하여 한로(韓盧)라는 사냥개와 능력을 다투었는데, 한로가 준을 따르지 못하였다. 그러자 한로가 화가 나서 송작(宋鵲)이란 개와 공모하여 준을 죽였다.” 하였다.
♣ 노겸[勞謙]주역(周易) 겸괘(謙卦) 구삼효(九三爻)에 “공로가 있으면서도 겸손한지라, 군자의 결말이 좋으리니, 길하리라.[勞謙 君子有終 吉]”라는 말이 있다.
♣ 노계[露鷄]야생의 닭이다.
♣ 노고[魯鼓]노고는 노 나라의 북이고, 설고는 설 나라의 북이다. 노고와 설고의 구분은 곧 음절이 서로 길고 짧고 한 데에 있었다. 《禮記 投壺》
♣ 노고추[老古錐]노고는 존칭이고 추는 물건을 뚫는 것인데 기봉(機鋒)의 예리함을 뜻하는 말로서, 즉 노대 원숙(老大圓熟)함을 의미한다.
♣ 노곡[老穀]오래된 닥나무라는 뜻이다. 은(殷) 나라 태무(太戊) 때에 요망한 뽕나무와 닥나무[桑穀]가 금새 자라났다고 하는 고사가 있다. 《史記 殷紀》
♣ 노공[魯公]노군공(魯郡公)에 봉(封)해진 당(唐) 나라 안진경(顔眞卿)을 추존(推尊)하여 부르게 된 명호(名號)이다.
♣ 노공[潞公]노공은 노국공(潞國公)으로 송 나라 문언박(文彦博)의 봉호임. 정호(程顥)에게 평소 특별한 호칭이 없었는데, 그가 죽자 문언박이 중론(衆論)을 널리 수합하여 그 묘에 명도 선생(明道先生)이라고 제(題)하였음. 제묘는 무덤에 죽은 자의 이름 등을 써서 표시하는 것. 《宋史 卷四百二十七 程顥傳》
♣ 노관[老關]후량(後梁) 관동(關同)은 산수도(山水圖)의 명가(名家)로 추산한림도(秋山寒林圖)가 있다.
♣ 노구반교[老龜蟠蛟]늙은 거북이란 비신(碑身)을 받치는 석각(石刻)한 거북 모양의 귀부(龜趺)를 가리키고, 서린 용이란 비신 꼭대기에 서린 모양의 용을 새긴 이수(螭首)를 가리킨다.
♣ 노구효월[盧溝曉月]북경(北京)의 팔경(八景) 가운데 하나인 ‘노구교 가의 새벽달[盧溝曉月]’을 두고 한 말이다.
♣ 노군후천[老君後天]도교(道敎)의 태상노군(太上老君)은 천지가 다한 뒤에까지 산다 하였다.
♣ 노규반온비수자[老虯盤穩秘鬚髭]소식(蘇軾)의 “땅 속에 천년 묵은 뿌리가 마치 규룡처럼 도사리고 있네.” 하는 창포시(菖蒲詩) 일부를 인용한 말이다.
♣ 노귤[盧橘]금귤(金橘)의 이칭이다.
♣ 노귤[奴橘]이형(李衡)이 용양주(龍陽洲)에 귤나무 천 그루를 심어 놓고 아들에게 “나에게 나무하인[木奴] 천 명이 있으니, 너의 의식(衣食)에 아무 걱정이 없다.”고 이른 고사에서 인용한 말.
♣ 노긍[盧兢]조선조 후기(1738~1790)의 시인. 과시(科詩)에 능했고, 소설 화사(花史)를 썼음.
♣ 노기[虜騎]노기는 북쪽 오랑캐의 기병(騎兵)이다.
♣ 노기난[路岐難]옛날에 어떤 사람이 양(羊)을 잃고 그것을 찾으려 뒤쫓았으나 갈림길이 많아서 끝내 찾지 못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학문의 다단(多端)한 진리(眞理)를 얻기 어려움에 비유한 말이다. 《列子 說符》
♣ 노기다처읍양주[路岐多處泣揚朱]양주(楊朱)는 길을 가다가 분기(分岐)된 길을 보면 울었는데 한 번 나뉘면 다시는 합칠 수 없는 것을 슬퍼함이다.
♣ 노기복력[老驥伏櫪]나이 많은 천리마가 헛간 널빤지 위에 잠을 자고 있다는 뜻으로, 어진 사람이 나이 먹어도 아직 세상에 쓰이지 않고 있음을 비유함.
♣ 노기수[路歧愁]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을 말한다. 옛날 양주(楊朱)가 사통팔달한 대로(大路)에 서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통곡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淮南子 說林訓》
♣ 노기읍[路岐泣]옛날 양주(楊朱)가 갈림길을 만나면, 남으로도 갈 수 있고 북으로 갈 수 있다 하여 울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마음에 주관이 없음을 비유한 말이다.
♣ 노기충천[怒氣沖天]화난 기색이 하늘을 찌를 듯이 극도로 달한 것.
♣ 노남[盧枏]명(明) 나라 사람으로 재주가 높고 특히 시에 뛰어나서 사진(謝榛)과도 교의가 깊었는데, 일찍이 현령(縣令)에게 거슬러서 옥고(獄苦)를 치르기도 하였고, 평생 동안 뜻을 펴지 못하고 죽었다.
♣ 노남[魯男]노(魯) 나라에 홀아비가 과부를 이웃하여 살고 있었는데, 밤에 폭우로 과부가 집이 무너져서 피란을 왔으나 문을 닫고 거절하므로, 과부가 말하기를, “그대는 왜 유하혜(柳下惠)와 같이 못하는가? 그는 찾아온 여자를 거절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이 난잡하다고 하지 않았다.” 하자, 홀아비는, “유하혜는 그렇게 해도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나의 할 수 없음으로써 유하혜의 할 수 있음을 배우겠다.” 하였다 한다.
♣ 노녀비소[魯女悲嘯]노(魯) 나라 한 여인이 슬프게 휘파람을 불므로 사람들이 물으니, “나라에 장차 환란이 있을까 걱정한다.” 하였다.
♣ 노노[呶呶]떠들썩하게 지껄이는 모양, 추근추근하게 변명하는 모양
♣ 노노[怓怓]왁자지껄하고 어수선함
♣ 노담[老聃]노자(老子)의 이름.
♣ 노당익장[老當益壯]사람은 늙을수록 더욱 기운을 내어야 하고 뜻을 굳게 해야 한다. 노익장(老益壯)
♣ 노대[露臺]노대는 임금이 천상(天象)을 관찰하는 장소를 말한다.
♣ 노대비[老大悲]젊었을 때 세월을 허송한 채 벼슬아치로 늙어가며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표현한 말이다. 악부시집(樂府詩集) 상화가사(相和歌辭) 오(五)의 장가행(長歌行)에 “少壯不努力 老大徒傷悲”라 하였으며, 두보(杜甫)의 시 ‘곡강대주(曲江對酒)’에도 “吏情更覺滄州遠 老大徒傷未拂衣”라는 표현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6》
♣ 노동[盧仝]당(唐) 나라 사람. 소실산(少室山)에 은거하며 스스로 옥천자(玉川子)라 불렀다. 간의대부(諫議大夫)로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일찍이 월식시(月蝕詩)를 지어 원화(元和)의 역당(逆黨)들을 풍자했다. 한유도 노동의 시를 모방하여 월식시를 지었음. 차[茶]의 품평(品評)을 잘했으며 다가(茶歌)로 유명했다.
♣ 노동상천참득하마정[盧仝上天斬得蝦蟆精]당(唐) 나라 제원(濟源) 사람으로 그의 월식시(月蝕詩)에 “고로(古老)의 말에, 하막(蝦蟆)의 정기가 달을 먹는다 하니……뭇별은 다 용서해 주고 하막만 베라.[傳聞古老說 蝕月蝦蟆精……衆星盡原赦 一蟆獨誅磔]" 하였다.
♣ 노동수[盧仝睡]당(唐) 나라 시인으로 호는 옥천자(玉川子)이다. 그의 시 다가(茶歌)에 ‘해가 높이 떴는데도 단잠에 빠졌으니[日高丈五睡正濃]’란 구절이 있다. 《古文眞寶 前集 卷 8》
♣ 노동지[盧同知]조선조 문신인 노직(盧稷). 그의 자는 사형(士馨)이고 본관은 교하(交河)이다.
♣ 노동천권서[盧仝千卷書]당(唐) 나라 시인으로 호는 옥천자(玉川子)이다. 《古文眞寶 前集 卷 8 》
♣ 노동파옥[盧仝破屋]노동은 당(唐) 나라 때의 시인인데, 허물어진 집이란 곧 한유(韓愈)가 노동의 월식(月蝕) 시를 칭찬하여 지은 시에서 “낙성에 살고 있는 옥천 선생은 허물어진 집 두어 칸이 있을 뿐이네.[玉川先生洛城裏 破屋數間而已矣]" 한 데서 온 말이다.
♣ 노두[老杜]노두는 두보(杜甫)를 가리키는 말이다.
♣ 노둔회잔두[駑鈍懷棧豆]“노둔한 말이 외양의 콩을 그리워하면 쓸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진서(晋書)
♣ 노락[盧駱]노락은 당(唐) 나라 때의 시인이며 문장가인 노조린(盧照隣)과 낙빈왕(駱賓王)이다.
♣ 노래[老來]춘추 시대(春秋時代) 때 사람인데 효자로 알려졌다. 《史記 老子傳 正義》
♣ 노래무채[老萊舞綵]노래는 노래자(老萊子)이다. 노래자는 나이 70에 부모님을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해 항상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처럼 춤을 추었다. 《初學記 卷 17》
♣ 노래의[老萊衣]춘추 시대 초(楚) 나라 은사(隱士)인 노래자가 나이 칠십에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떨어 늙은 어버이를 기쁘게 한 고사가 있다. 《初學記 卷17 引 孝子傳》
♣ 노래자[老萊子]춘추 시대 말의 초(楚) 나라의 은사. 부모에게 효도가 지극하여, 나이 70에도 꼬까옷을 입고 어린아이처럼 재롱을 부렸으며, 물그릇을 들고 마루에 올라가다가 미끄러지자, 그대로 땅에 엎어져서 아기처럼 울기도 하고, 부모 옆에서 새소리를 흉내내어 부모를 즐겁게 하였다고 한다.
♣ 노래지희[老萊之戱]주(周)나라의 노래자(老萊子)가 칠십의 나이에 무늬 있는 옷을 입고 동자의 모습으로 재롱을 부려 부모에게 자식의 늙음을 잊게 해드린 일. 자식이 나이가 들어도 부모의 자식에 대한 마음은 똑같으니 변함없이 효도를 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이다.
♣ 노력숭명덕[努力崇明德]문선(文選) 제15권 이릉(李陵)의 ‘여소무시삼수(與蘇武詩三首)’의 “우리 힘써 미덕을 수양하는 일 쉬지 마세, 백발이 성성할 때까지.[努力崇明德 皓首以爲期]”를 인용한 것으로, 여기서 명덕(明德)은 영덕(令德)과 같은 말로 곧 미덕이다.
♣ 노련[魯連]노중련(魯仲連)으로, 제(齊) 나라의 장수이다. 일찍이 조(趙) 나라에 머물러 있을 적에 위(衛) 나라에서 진(秦) 나라 왕을 황제(皇帝)로 추대하여 군대를 철수시키게 하려고 하자, 노중련은 진 나라가 무도한 나라임을 역설하면서, 진 나라가 칭제(稱帝)한다면 자신은 동해(東海)에 빠져 죽을 것이라고 하여 중지시켰다. 또 제 나라의 전단(田單)이 연(燕) 나라의 요성(聊城)을 오래도록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노중련이 글을 써서 화살에 묶어 성 안으로 쏘아 보내 내분이 일어나게 해서 성을 함락시켰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 노련기제조[魯連棄齊組]노중련은 전국시대 제(齊) 나라의 고사(高士)로서 전단(田單)의 천거에 의하여 벼슬이 내려졌으나 나가지 않고 끝내 바닷가에 은거하다가 생을 마쳤다. 《史記 卷八十三》
♣ 노련명[魯連名]노중련(魯仲連)의 명예. 제(齊) 나라 사람인 노중련이 일찍이 조(趙) 나라에 머무를 적에, 위(魏) 나라에서 진(秦) 나라 왕을 황제(皇帝)로 추대하여 조 나라에 있던 진 나라의 군대를 철수시키려고 하자, 노중련이 평원군(平原君)에게 진 나라가 무도한 나라임을 역설하면서, 진 나라가 칭제(稱帝)한다면 자신은 동해(東海)에 빠져 죽을 것이라고 하여 중지시켰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 노련범벽해[魯連泛碧海]노중련(魯中連)은 전국(戰國) 시대의 고사(高士)로, 위(魏)와 조(趙)가 진(秦)을 제(帝)로 추대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서, 위나라의 사자(使者) 신원연(新垣衍)을 찾아보고, “만일 진(秦)을 제(帝)로 추대한다면, 나는 동해(東海)에 빠져 죽을지언정 진나라 백성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였다.
♣ 노련유적[魯連遺迹]전국 시대 때 제(齊) 나라의 고사(高士) 노중련(魯仲連)이, 진(秦) 나라에서 황제를 자처하는 꼴을 보기보다는 차라리 동해에 빠져 죽겠다.[蹈東海而死]고 말한 고사가 있다. 《史記 卷83》
♣ 노로[勞勞]몹시 지친 모양, 이별을 아쉬워 하는 모양, 드문드문한 모양, 먼 모양, 노고에 보답함, 공로를 포상함
♣ 노로가[勞勞歌]이별의 노래. 중국 강소성(江蘇省)강녕현(江寧縣)남쪽에 노로정(勞勞亭)이 있는데, 옛날 그곳은 송별하던 장소로서 떠나는 사람을 위해 노래를 부르며 전별하였다. 《事文類聚》
♣ 노록반생[轤轆半生]도르래. 영고 성쇠(榮枯盛衰)가 무상한 인생살이에 비유한 것이다.
♣ 노론[魯論]논어(論語)를 말한다. 노논어(魯論語)ㆍ제논어(齊論語)ㆍ고문논어(古文論語) 등 3가(家)의 논어 중에서 현재 전해지는 논어는 노논어에 기초한 것이다.
♣ 노론[魯論]금문 논어(今文論語)의 일본(一本). 논어(論語)에 원래 제론(齊論)ㆍ고론(古論)ㆍ노론(魯論) 3종이 있었는데, 《노론》은 노인(魯人)이 전한 것으로 후세에 논어(論語)를 가리키는 말로 되었다. 《漢書 藝文志》
♣ 노론분이반[魯論分二半]논어(論語)에 노론(魯論)과 제론(齊論)이 있는데, 지금 전하는 것은 노론(魯論)이다. 송나라 조보(趙普)가 항상 논어를 읽으면서 송 태조(宋太祖)에게 말하기를, “신이 논어(論語) 반부(半部)로서 폐하를 보좌하여 천하를 얻었고, 다시 반부로서 폐하를 보좌하여 천하를 다스리겠습니다.” 하였다.
♣ 노료[嫽嫽]외조모
♣ 노룡[盧龍]중국 하북성의 고을 이름. 명 나라 때는 영평부의 관할 지역이다.
♣ 노류장화[路柳墻花]길 가의 버들과 담 밑의 꽃. 누구든지 쉽게 만지고 꺾을 수 있다 하여 기생(妓生)을 의미한다.
♣ 노릉[魯陵]노산군(魯山君)즉 단종(端宗)의 능(陵).
♣ 노릉견[魯陵鵑]노릉은 단종(端宗)을 가리킨 말. 세조(世祖)는 단종을 몰아내어 영월(寧越)로 연금(軟禁)시키면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降等)하였다. 두견새는 일명 자규(子規)라고도 한다. 단종은 영월의 자규루(子規樓)에서 두견새가 구슬피 울자 “달 밝은 밤 자규새는 구슬피 우는데 시름겨워 자규루에 기대노라. 네 울음 슬퍼 내 마음 괴롭구나 네 소리 없으면 이내 시름 없을 것을. 이 세상 괴로운 사람에게 말하노니 부디 춘삼월에 자규루에 오르지 마오.[月白夜蜀魂啾 含愁情倚樓頭 爾啼悲我聞苦 無爾聲無我愁 寄語世上勞苦人 愼莫登春三月子規樓]" 하였다. 즉 이곳에서 울던 두견새를 가리킨 것이다.
♣ 노린견수[魯麟見狩]세상이 무도함을 비유한 말. 노 애공(魯哀公) 14년에 서쪽으로 사냥을 나가 기린을 잡았는데, 공자가 그 소식을 듣고는, 기린은 성왕(聖王) 시대의 상서인데 성왕이 없는 세상에 나왔다가 잡혀 죽었다 하여, 주(周) 나라의 도가 부흥하지 못함을 마음아프게 여겼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左傳 哀公 十四年》
♣ 노마십가[駑馬十駕]둔한 말도 열 대의 수레를 끌 수 있음. 재주 없는 사람도 노력하고 태만하지 않으면 재주 있는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음을 비유한다.
♣ 노마지지[老馬之智]제(齊)나라 환공(桓公)이 길을 잃고 헤맬 때, 관중(管仲)이 늙은 말을 풀어놓고 그 뒤를 따라가 마침내 길을 찾았다고 하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 경험이 풍부하고 숙달된 지혜. 쓸모없는 사람도 때로는 유용함을 이르는 말로도 쓰인다. 《韓非子》
♣ 노망[魯望]당(唐) 나라 시인 육구몽(陸龜蒙)의 자. 호는 천수자(天隨子), 또는 보리선생(甫里先生)이라 하였다. 그는 육경(六經)에 밝고 춘추(春秋)에 통달하였으나 벼슬하지 않고 송강(松江) 보리(甫里)에 은거, 고저산(顧渚山) 밑에 다원(茶園)을 경영하였으며, 항상 강호(江湖)에 배를 띄워 낚시를 즐겼다. 친구 피일휴(皮日休)와 서로 화답(和答)한 시를 모아 송릉창화시집(松陵唱和詩集)을 편찬하였고, 그 밖에도 뇌사경(耒耜經)ㆍ입택총서(笠澤叢書) 등의 저서가 있다.
♣ 노면[露冕]후한 때 곽하(郭賀)가 형주 자사(荊州刺史)로 있으면서 매우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임금이 그를 대단히 가상하게 여겨 그에게 면류관(冕旒冠)을 하사하면서, 고을을 순시할 적에 일부러 수레의 휘장을 걷고서 백성들에게 그의 면류관 쓴 모습을 보도록 하여 그를 영광되게 하도록 했던 데서 온 말이다.
♣ 노묘[魯墓]공자가 노(魯) 나라에서 부친의 묘소를 찾아 모친을 합장(合葬)하고 먼저 돌아왔는데, 때마침 폭우가 쏟아지자 제자들이 그 봉분을 수리하고 늦게 도착했던 고사가 전한다. 《禮記 檀弓上》
♣ 노물[老物]하늘을 도와 세사(歲事)를 성취시키는 만물(萬物)의 신(神)을 말한다.
♣ 노미[撈米]햅쌀에 대하여 묵은 쌀을 노미라고 한다. 이 쌀은 몇 년 동안 보관하더라도 상하지 않게 특수 처리한 쌀이다.
♣ 노반[鷺班]노반은 백로가 서 있는 것처럼 질서 정연한 조정 관원의 반열을 가리키는 말이다.
♣ 노반자려택[魯泮資麗澤]성균관에서 서로 학문을 강마하였다는 뜻이다. 반궁(泮宮)은 학궁(學宮)으로, 시경(詩經) 노송(魯頌) 반수(泮水)에, “즐거운 반수에서 잠깐 미나리를 뜯는도다. 노후가 이르시니 그 깃발을 보리라.[思樂泮水 薄采其芹 魯侯戾止 言觀其旂]”하였다. 이택(麗澤)은 친구간에 서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학문을 강습하는 것으로, 주역(周易) 태괘(兌卦)에, “두 못이 서로 붙어 있는 것이 태괘이니, 군자는 이것으로 붕우간에 강습한다.[麗澤兌 君子以朋友講習]”하였다.
♣ 노번[魯璠]노 나라에서 생산되는 여번(璵璠)으로, 질이 좋은 옥을 말한다.
♣ 노병[老兵]노병은 주인을 조롱하는 말인데, 진(晋)나라 때에 환온(桓溫)을 노병이라고 조롱한 고사가 있다.
♣ 노병유마[老病維摩]불교의 유마힐경(維摩詰經)에, “유마힐 거사(居士)는 병으로 늘 누워 있으면서도 문병(問病)하러 온 문수보살(文殊菩薩) 등 여러 보살에게 설교하였다.” 하였다.
♣ 노병준전화예안[老病樽前花翳眼]늙으면 꽃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옛 시인들은 탄식하였다.
♣ 노부[老符]노부는 늙은 수재(秀才) 부림(符林)을 이름. 송 나라 때 소식(蘇軾)이 일찍이 상사일(上巳日)에 술을 가지고 제생(諸生)들을 찾아갔는데, 모두 외출하고 유독 노부 수재(老符秀才)만이 있으므로, 그와 함께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하는데, 부림은 대체로 안빈낙도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蘇東坡詩集 卷四十二》
♣ 노부[鹵簿]임금이 행차할 때의 의장(儀仗)을 말한다.
♣ 노부세[路浮稅]왜인(倭人)에게 빚을 얻어 쓴 것을 말한다. 이를 범한 경우에는 준 사람이나 받은 사람이나 다같이 사형(死刑)으로 다스리게 되어 있었다.
♣ 노불[老佛]활인불(活人佛)로서 노의(老醫)를 말함.
♣ 노비[魯丕]후한(後漢) 사람으로 자는 숙릉(叔陵). 성품이 침착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오경(五經)을 정통하였으며 노시(魯詩)ㆍ상서(尙書)를 가르쳐 당시의 명유(名儒)가 되었다. 《後漢書 魯丕傳》
♣ 노사[弩士]고구려 영양왕(嬰陽王) 25년에 수(隋) 나라 왕이 와 정벌하자 왕이 겁이 나서 사신을 보내 항복하겠다고 빌었는데,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그 때 어느 한 사람이 비밀리에 작은 활을 가슴에 품고, 표문[表]을 가지고 가는 사신의 뒤를 따라 수 나라 왕이 있는 곳으로 가서 수 나라 왕이 표문을 읽고 있을 때 활을 당겨 그의 가슴을 명중시켰다. 수제는 군대를 회군하려고 하면서 좌우에게 이르기를, “내가 천하의 왕으로서 친히 이 작은 나라를 정벌하다가 이렇게 불리한 꼴을 당했으니 만세를 두고 비웃음을 받을 일이다. 지금 저 사람을 보니 그는 바로 형가(荊軻)ㆍ섭정(聶政) 같은 사람이다.” 하였다 한다.
♣ 노사[魯史]노사(魯史)는 노 나라의 역사로 춘추(春秋)를 말한다.
♣ 노사[露斯]시경(詩經)에 담담로사편(湛湛露斯篇)이 있는데, 천자가 제후(諸侯)와 연회하는 시다.
♣ 노사경어운월주[弩射鯨魚隕月珠]풍파를 잠재우며 항해할 것이라는 말이다. 전설에 의하면 고래의 눈이 변하여 명월주(明月珠)로 된다고 한다. 《文選 吳都賦 注》
♣ 노사나[盧舍那]비로자나(毗盧遮那)를 말한다. 햇빛이 온 세계를 비추듯이 광명(光明)으로 이름을 얻은 부처, 즉 광명불, 보신불이다.
♣ 노사서운[魯史書雲]노사는 춘추좌전(春秋左傳)을 가리키는데, 노 나라에서는 춘분(春分)ㆍ추분(秋分)ㆍ하지(夏至)ㆍ동지(冬至)ㆍ입춘(立春)ㆍ입하(立夏)ㆍ입추(立秋)ㆍ입동(立冬) 때에는 반드시 운기(雲氣)를 관측하여 길흉(吉凶)을 점쳐서 그것을 책에 기록했던 것을 이른 말이다. 《左傳 僖公 五年》
♣ 노산고[盧山高]구양수가 동년(同年)인 유중윤(劉中允)이 벼슬을 버리고 여산(盧山)의 남쪽으로 옮겨 가니, 구양공이 그 절개를 높이 여겨 이 시를 지어 찬미하였음.
♣ 노산묘[魯山墓]영월(寧越)에 있는 조선조 제6대 왕 단종의 무덤. 숙부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찬탈되어 노산군에 봉해짐. 나중 1698년(숙종 24)에 복위(復位)되고 묘효(廟號)가 추증되었음. 능호는 장릉(莊陵).
♣ 노삼가[魯三家]춘추 시대 노 나라의 세 공족, 곧 맹손씨(孟孫氏)ㆍ숙손씨(叔孫氏)ㆍ계손씨(季孫氏)를 말한다. 환공(桓公)의 자손들로 국정(國政)을 잡으며 권세가 강성해져 왕실(王室)이 도리어 미약했었는데, 뒤에 계손씨의 가신(家臣) 양호(陽虎)에게 권력을 빼앗겼다.
♣ 노상[魯桑]뽕나무의 일종으로 오디가 적게 열린다 한다.
♣ 노생상담[老生常譚]새롭고 독특한 의견을 제시하지 않고 언제나 똑같은 상투적인 이야기를 일컫는 고사성어.
♣ 노생지몽[盧生之夢]중국 당나라 때 노생이 한단으로 가는 길에 주막에서 도사 영옹을 만나 그 베개를 빌어 베고 자면서 일생의 영화를 꿈꾸었다는 데에서 나온 말로, 세상의 부귀영화가 덧없음을 비유하는 말.
♣ 노서[鷺序]노서란 백로(白鷺)가 나는데 차서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조관(朝官)의 반차(班次)를 말한다.
♣ 노석[老釋]늙은 중.
♣ 노성[老成]나이 많고 덕이 높은 사람.
♣ 노성수원전형존[老成雖遠典刑存]한(漢) 나라 공융(孔融)은 채옹(蔡邕)을 좋아하였다. 채옹이 죽은 뒤에 얼굴이 채옹과 비슷한 늙은 병졸(兵卒) 한 사람을 불러 함께 술을 마시면서, “시경(詩經)에, 노성한 이는 갔으나 전형은 남았구나 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아들이 아버지를 닮았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 노성승부[魯聖乘桴]공자가 세상에 도가 행해지지 않자 뗏목을 타고 바다를 항해하고 싶다고 말한 데서 나온 것으로, 본디 세상을 피해 바다를 건너 멀리 떠나고 싶다는 뜻을 말한 것이다. 《論語 公冶長》
♣ 노소[老蘇]노소는 본디 소식(蘇軾)의 아버지인 소순(蘇洵)을 가리킨다.
♣ 노소년[老少年]노소년은 안래홍초(雁來紅草)의 별칭.
♣ 노수[魯叟]노나라 늙은이, 곧 공자(孔子)를 이름.
♣ 노수부[魯叟桴]노수는 공자(孔子)를 이른 말로, 공자가 말하기를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내가 떼를 타고 바다에 뜨리라.” 한 데서 온 말인데, 전하여 바다에 나가 노니는 데에 비유한 다. 《論語 公冶長》
♣ 노수신[盧守愼]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로서 의정까지 되었으며 76세의 나이로 죽었다.
♣ 노수욕승부[魯叟欲乘桴]노수(魯叟)는 공자를 말한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내가 장차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가볼까 한다.”라고 하였다.
♣ 노수절량[魯叟絶糧]노수는 공자(孔子)를 가리키는 말인데, 공자가 진(陳)ㆍ채(蔡)의 두 나라 사이를 지나다가 광도(狂徒)에게 포위를 당하여 7일간이나 식량이 떨어졌던 일을 말한다. 《論語 衛靈公》
♣ 노수철환[魯叟轍環]노나라 늙은이는 곧 공자(孔子)를 이르는 말로, 공자가 세상에 도(道)를 행하기 위하여 일생 동안 천하를 두루 돌아다녔던 일을 말한다.
♣ 노수한묘수[魯叟恨苗秀]노수는 공자를 이르는데, 공자가 학문을 시작만 해 놓고 이루지 못하는 것을 가리켜 이르기를 “싹만 나오고 꽃을 피우지 못한 자가 있고, 꽃만 피우고 결실을 못한 자도 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子罕》
♣ 노숙[露宿]한데서 자다. 길에서 잠을 잠.
♣ 노숙무추능탁지[老宿無錐能卓地]노숙은 나이와 덕이 높은 유자(儒者)를 이름. 전국 시대에 손경자(孫卿子)가 진 소왕(秦昭王)의 물음에 답하기를, “유자란 아무리 궁곤하여도 부정한 방도로 탐하지 않고, 송곳 하나 세울 만한 땅이 없어도 사직(社稷)을 지키는 대의에 밝다.” 한 데서 온 말이다. 《荀子 儒效》
♣ 노순[鱸蓴]농와 순채. 진(晉)의 장한(張翰)이 자기 고향의 순채국과 농어회가 생각나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었음. 《晉書 張翰傳》
♣ 노순몽[鱸蓴夢]진(晋) 나라 장한(張翰)이 중원(中原)에 와서 벼슬하다가 가을 바람이 일어남을 보고, 고향인 강동(江東)의 순채(蓴菜)와 농어(鱸魚)의 맛이 그립다 하고 곧 행장을 차려 돌아갔다.
♣ 노승발검[怒蠅拔劍]파리 때문에 성질이 난다고 칼을 뽑아 듦. 작은 일을 갖고 수선스럽게 화내는 것을 비유한다.
♣ 노시경편[魯詩駉篇]경(駉)은 시경(詩經) 노송(魯頌)의 편명으로, 노(魯) 나라 사관(史官) 극(克)이 희공(僖公)의 목마(牧馬)를 칭송한 시이다.
♣ 노시동궁[盧矢彤弓]노시는 검은 화살이고, 동궁(彤弓)은 붉은 활인데, 주 평왕(周平王)이 진 문후(晉文侯)를 방백(方伯)에 임명하면서 동궁과 노시를 하사한 데서 온 말이다. 《書經 文侯之命》
♣ 노시승리대[魯詩承鯉對]가전지학(家傳之學)을 이른 말로, 공자가 아들인 공리(孔鯉)에게 시경을 읽었느냐고 묻자, 아직 읽지 못했다고 대답한 데서 온 말이다.
♣ 노심초사[勞心焦思]몹시 마음을 졸이고 애태우며 생각함. 어떤 일에 걱정과 고민을 심하게 많이 하는 것을 일컫는다.
♣ 노야어가[魯野漁歌]어떤 유자(孺子)가 어부가를 노래하기를,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을 것이요, 창랑의 물이 흐르면 내 발을 씻을 것이다.” 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소자(小子)들아, 들어 보아라. 맑으면 갓끈을 씻게 되고, 흐리면 발을 씻게 되는 것이니, 모두가 스스로 취하는 것이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離婁 上》
♣ 노어[魯魚]실수로 잘못 필사(筆寫)한 글자를 말한다. 노(魯)와 어(魚). 곧 글자 모양이 비슷한 데서 오는 잘못을 이른다. 포박자(抱朴子) 내편(內篇) 하람(遐覽)의 “글을 세 차례 정도 옮겨 쓰다 보면, 어(魚)가 노(魯)로 변하고 허(虛)가 호(虎)로 바뀌곤 한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노어지류(魯魚之謬). 노어해시(魯魚亥豕). 노어도음(魯魚陶陰).
♣ 노오[盧敖]본디 연(燕) 나라 사람인데, 진 시황(秦始皇)이 그를 불러 박사(博士)로 삼아서 그로 하여금 신선(神仙)을 구하게 하였으나, 그는 한번 가서 돌아오지 않고 노산(盧山)에 은거하다가 선인(仙人) 약사(若士)를 만나서 뒤에 신선이 되어 갔다고 한다. 《淮南子 道應訓》
♣ 노오생[盧敖生]노오는 진 시황(秦始皇) 때 사람으로, 진시황이 그를 박사(博士)로 삼고 신선을 구하게 하였는데, 그는 노산(盧山)에 은거하다가 뒤에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회남자(淮南子) 도응훈(道應訓)에 “노오는 북해(北海)에서 노닐고 태음(太陰)을 경유하여 현궐(玄闕)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 노옹[潞翁]노옹은 송(宋) 나라 때 노국공(潞國公)에 봉해진 문언박(文彦博)을 말한다.
♣ 노위[魯衛]주(周)나라 때에 노(魯)ㆍ위(衛) 등은 동성(同姓)의 제후(諸侯)였다.
♣ 노위상근[魯衛相近]노(魯) 나라는 주공(周公)의 봉국(封國)이고 위(衛) 나라는 주공의 아우 강숙(康叔)의 봉국인데, 두 나라의 정치 상황이 마치 형제처럼 엇비슷하기 때문에, 공자가 “魯衛之政 兄弟也”라고 말하였다. 《論語 子路》
♣ 노위정무시[魯衛政無猜]노위는 노 나라와 위 나라를 가리킴. 노 나라는 주공(周公)의 후예이고, 위 나라는 강숙(康叔)의 후예인데, 주공과 강숙이 친형제간이었기 때문에 그 후예들의 국정(國政)도 형제처럼 해나갔다는 뜻이다. 논어(論語) 자로(子路)에 “노위는 정치를 형제처럼 한다.” 하였다.
♣ 노위형제[魯衛兄弟]친형제처럼 서로 정이 매우 두터움을 말한다. 노위 형제(魯衛兄弟)는 곧 노(魯)에 봉해진 주공(周公)과 위(衛)에 봉해진 강숙(康叔) 형제를 말하는데, 강숙은 위에 봉해진 뒤 항시 형인 주공의 정사를 본받아 국정(國政)도 마치 형제같이 한 데서 온 말이다. 논어(論語) 자로(子路)에 “노와 위의 정사는 형제처럼 한다.” 하였다.
♣ 노이무공[勞而無功]애는 썼으나 애를 쓴 보람이 없고, 수고만 하고 아무런 공이 없다는 뜻의 고사성어.
♣ 노이선생[老李先生]화석정(花石亭)을 지은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가리킨다.
♣ 노익장[老益壯]나이가 들어 늙을지라도 젊은이 못지 않게 건강하다는 뜻.
♣ 노인령[老人嶺]황해도 평산(平山)영풍(永豐)북쪽에 있는 재.
♣ 노인성[老人星]남극성(南極星)의 이명. 병방(丙方)에서 떠올라 정방(丁方)으로 진다. 장수(長壽)를 상징하는 별이다. 수성(壽星)이라고도 한다.
♣ 노일경[老一經]서생이 다 늙도록 한 경전만 읽는 것을 말한다. 왕유(王維)의 ‘송조도독부대주득청자시(送趙都督赴代州得靑字詩)’에, “어찌 서생의 무리들을 배워서 창 사이서 한 경전만 늙도록 읽으리오.[豈學書生輩 窓間老一經]”하였다.
♣ 노일변[魯一變]문물(文物)을 새롭게 진흥시킨다는 뜻이다.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제(齊) 나라가 한 번 변하면 노(魯) 나라가 되고, 노 나라가 한 번 변하면 도(道)에 이른다.” 하였다.
♣ 노자[魯雌]꿩이 사람의 거동을 살피다 산골에 내려앉자 공자가, “산골에 내린 암꿩 때를 만났도다. 때를……" 했다. 《論語 鄕黨》
♣ 노자[鸕鶿]물새의 이름인데, 특히 물고기를 잘 잡아먹는다고 한다.
♣ 노자[鸕鶿]술그릇을 말한다. 금모(金母)가 여러 신선과 적수(赤水)에 모여 잔치할 때 벽금앵무배(碧金鸚鵡杯)와 백옥노자표(白玉鸕鶿杓)가 있었는데, 앵무배가 비면 노자표가 저절로 술을 따르고 술을 마시려 하면 앵무배가 저절로 들렸다.
♣ 노자의[老子衣]효성스러운 상주(喪主)를 뜻함. 노래자는 초(楚) 나라의 유명한 효자(孝子)였으므로 이른 말이다.
♣ 노자이[老子夷]노자에, “보아도 안 보임을 이(夷)라 이름한다.[視之不見 名曰夷]”는 말이 있다.
♣ 노자표[鸕鶿杓]술그릇의 이름. 이백(李白)의 양양가(襄陽歌)에 “노자작 앵무배(鸚鵡杯)로 백년 삼만 육천 일에 날마다 삼백 배를 마신다[百年三萬六千日 一日須傾三百杯]" 한 시가 있다.
♣ 노자흥불천[老子興不淺]진(晋) 나라 유량(庾亮)의 부하들이 밤에 남루(南樓)에서 술자리를 차리고 놀다가 창졸 유량이 오니 모두 자리를 피하려 하였다. 유량이 그들을 만류하여, “이 늙은이도 여기에 흥(興)이 열지 않네.” 하고, 같이 마시며 즐기었다.
♣ 노잠[老蠶]노년에 근심 걱정으로 자신을 속박하는 것에 비유한 말로, 송(宋) 나라 소식(蘇軾)의 석지(石芝)라는 시에, “늙은 누에고치 틀어 어느 때나 벗어날꼬. 꿈속에 지인(至人)을 생각하매 공연히 격렬하네.” 하였다.
♣ 노장용[盧藏用]당 나라 노장용(盧藏用)이 과거 시험에 낙제된 후에 도읍에 가까운 종남산에 숨어 있었으므로 임금이 듣고 등용시켰다는 고사가 있다.
♣ 노재[駑材]우둔한 재주, 즉 재능이 용렬하다는 뜻이다.
♣ 노재[魯齋]허형(許衡)의 호.
♣ 노전[盧前]당 나라 초기에 왕발(王勃), 양형(梁炯), 노조린(盧照鄰), 낙빈왕(洛賓王)을 사걸(四傑)이라 칭하였는데, 양형이 “내가 왕발의 뒤에 있는 것은 부끄럽고 노조린의 앞에 있기는 어렵다.” 하였다.
♣ 노전[魯殿]전한 경제(景帝)의 아들로 노왕(魯王)이었던 공왕(恭王)이 세운 영광전(靈光殿)을 가리킨다. 문선(文選) 왕연수(王延壽)의 노영광전부(魯靈光殿賦)에, “연광전만이 홀로 우뚝 남아 있어라.” 하였다.
♣ 노전괴[盧前愧]헛되이 명예를 입은 것을 비유한 말이다. 당(唐) 나라 때 왕발(王勃)ㆍ양형(楊炯)ㆍ노조린(盧照鄰)ㆍ낙빈왕(駱賓王)은 모두 시명(詩名)이 높아 사걸(四傑)로 일컬어졌는데, 양형은 노조린을 가장 높이 여겨 “나는 노조린의 앞에 있기는 송구스럽고, 왕발의 뒤에 있기는 수치스럽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唐書 卷二百一》
♣ 노전분하[爐田分下]현장에 있는 사람에게만 나누어 줌.
♣ 노전왕후[盧前王後]문재(文才)의 우열을 말한 것으로, 초당(初唐) 때, 똑같이 문장으로 명성이 비등하던 왕발(王勃)ㆍ양형(楊炯)ㆍ노조린(盧照鄰)ㆍ낙빈왕(駱賓王)을 천하에서 ‘왕ㆍ양ㆍ노ㆍ낙’으로 칭해서 ‘사걸(四傑)’이라 부른 데 대하여 양형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노조린의 앞에 있기는 미안하고, 왕발의 뒤에 있기는 수치스럽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唐書 卷二百一》
♣ 노제[老除]군정(軍丁)ㆍ공천(公賤)을 막론하고 또 실역(實役)에 종사하는 자이거나 신포(身布)ㆍ보포(保布) 등을 내는 자를 막론하고 일정한 노년(老年)에 이르면 신역(身役)을 면제하는 것을 뜻한다.
♣ 노제십가[駑蹄十駕]순자(荀子) 관학(勸學)의 “무딘 말이라도 열흘 동안 달려가면 준마를 따라잡을 수 있는 것이니, 그 공은 멈추지 않는 데에 있다.”에서 나온 것이다.
♣ 노조린[盧照隣]당(唐) 나라 사람으로 문장에 능하여 왕발(王勃)ㆍ양형(楊炯)ㆍ낙빈왕(駱賓王)과 함께 당초(唐初) 사걸(四傑)로 일컬어짐. 그는 풍병(風病)이 걸려 수족이 마비되자, 벼슬을 버리고 구자산(具茨山)에 은거하며 오비문(五悲文)을 지어 자신을 한탄하다가 끝내는 영수(穎水)에 투신자살하였다.
♣ 노주[蘆酒]갈대의 줄기를 술통 속에 밀어넣어 빨아서 마시는 술. 곧 술을 마신다는 것임.
♣ 노주[魯酒]노 나라의 술. 장자(莊子) 거협편(胠篋篇)의 “노 나라 술이 언짢았기 때문에 한단(邯鄲)이 포위를 당했다.”는 고사에서 전(轉)하여 박주(薄酒)란 뜻으로 쓰인다. 전국 때 초 선왕(楚宣王)이 제후들을 조회받을 때, 노 공공(魯恭公)이 뒤늦게 왔는데, 가지고 온 술이 아주 박주였다 한다.
♣ 노주가[魯朱家]초ㆍ한(楚漢) 시대 의협심이 대단했던 계포(季布)는 처음에 항우(項羽)에게 붙어 많은 전쟁에서 유방(劉邦)으로 하여금 곤욕을 치르게 했었다. 급기야 항우가 몰락하자 뒤에 고조(高祖)가 된 유방은 천금의 현상금을 내걸고 계포를 찾았는데, 이때 계포는 자기 자신이 머리를 깎고 죄수로 위장한 후, 노인(魯人)인 주가(朱家)가 당대호걸로서 자기 집에다 수많은 문객(門客)을 두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자원하여 그 집으로 팔려갔었음. 《史記 季布傳》
♣ 노주경[魯酒輕]생각지도 못하게 일이 복잡하게 얽혀 들어 재앙을 당하는 것을 말한다. 노(魯) 나라의 술은 묽고 조(趙) 나라의 술은 진했는데, 그것을 바꿔서 초(楚) 나라 왕에게 올리는 바람에 엉뚱하게도 조 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이 포위당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莊子 讓王》
♣ 노주사마매[壚酒司馬賣]사마(司馬)는 전한(前漢) 때의 문장가 사마상여(司馬相如)를 가리킨다. 사마상여가 일찍이 임공(臨邛)의 부인(富人) 탁왕손(卓王孫)의 딸 문군(文君)에게 장가들어 그와 함께 성도(成都)로 돌아왔으나, 가세(家勢)가 빈곤하므로 목로술집을 차리고 문군과 함께 술을 팔았다. 《史記 卷一百十七 司馬相如傳》
♣ 노중련[魯仲連]전국시대 제(齊) 나라 사람. 장평전(長平戰) 이후 진(秦)이 조(趙) 나라 서울을 포위하자, 위(魏) 나라 임금은 신원연(新垣衍)을 조 나라에 보내어 진왕을 황제로 추대하도록 조왕을 설득하라고 시켰는데, 마침 조 나라에 와 있던 노중련이 신원연을 만나 그 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하여 이를 저지하였다. 이 때 노중련은, “만일 진 나라가 황제가 된다면 우리 선비와 인민들을 종으로 부릴 것이니, 나는 차라리 동해 바다에 빠져 죽겠다.” 하였다 한다. 《史記 卷八十三》
♣ 노지우[露地牛]노지백우(露地白牛)를 이름인데 노지는 일체의 번뇌가 단절된 곳이고 백우는 점의 염오(染汚)도 없고 오로지 청정한 소로서 법신(法身)의 무구(無垢)에 비유한 것임. 《法華經 譬喩品》 주희(朱熹)의 시에 “飛騰莫羨摩天鵠 純熟須參露地牛"라 하였음.
♣ 노직[魯直]노직은 송(宋) 황정견(黃庭堅)의 자(字). 황정견은 시(詩)와 문장(文章)ㆍ행초(行草)등이 다 당대를 풍미할 만큼 절묘했는데, 진관(秦觀)ㆍ장뢰(張耒)ㆍ조보지(晁補之)와 함께 소문사학사(蘇門四學士)로 일컬어졌으나 유독 황정견과 소식(蘇軾)만을 들어 소황(蘇黃)이라고도 하였음. 《宋史 卷四百四十四》
♣ 노진[盧禛]노진의 자는 자응(子膺)이고 호는 옥계(玉溪)이다.
♣ 노착륜[老斲輪]재주에 정통하고 경험이 풍부한 사람을 말한다. 장자(莊子) 천도(天道)에, “윤편(輪扁)이 말하기를, ‘저는 제가 하고 있는 일로써 관찰한 것입니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엉성하게 깎으면 헐렁하여 견고하게 되지 않고, 너무 꼼꼼하게 깎으면 빠듯해서 서로 들어맞지 않게 됩니다. 엉성하지도 않고 꼼꼼하지도 않게 하는 것은 손의 감각에 의하여 마음의 호응으로 결정되는 것이지, 입으로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법도가 존재하기는 합니다만, 저는 그것을 저의 아들에게도 가르쳐 줄 수가 없고, 저의 아들도 그것을 저에게서 배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칠십이 되도록 수레바퀴를 깎고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하였다.
♣ 노천[老泉]당송 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송 나라 소순(蘇洵)의 호이다.
♣ 노초[老艸]일이 조솔(粗率)함을 말함. 주자의 훈학재규(訓學齋規)에 “寫字未問工拙如何 且要一筆一畫嚴正分明 不可老艸"라 하였음.
♣ 노추[魯鄒]추로(鄒魯)는 맹자와 공자의 고향이다.
♣ 노추[老錐]노고추(老古錐)의 준말로, 노고는 존경하는 뜻이고 추는 송곳처럼 예민함을 뜻하는 말로서, 즉 노대 원숙(老大圓熟)함을 의미한다.
♣ 노추[鑪錘]도주(陶鑄)와 같은 뜻임. 유준(劉峻)의 문(文)에, “雕刻百工 鑪錘萬物”이란 것이 보임.
♣ 노추[爐槌]노추는 쇠붙이를 달구고 두들기는 기구.
♣ 노치분자혁난황[老鴟奮觜嚇鸞凰]소인들이 권세를 빼앗길까 봐 군자를 경계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원추(鵷鶵)라는 봉황새가 연실(練實)이 아니면 먹지를 않고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를 않으며 남해(南海)에서 북해(北海)로 날아가는데, 마침 썩은 쥐 한 마리를 잡은 올빼미가 자기 위를 지나가는 원추를 보고는 “이크, 큰일났다.[嚇]”고 놀라워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莊子 秋水》
♣ 노태[駑駘]느린 말, 굼뜬 말.
♣ 노파심[老婆心]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경험으로 보아 신경을 맣이 쓰는데, 필요 이상의 신경을 쓰거나 뒷바라지를 하는 것.
♣ 노파심[老婆心]늙은 할머니의 마음. 할머니는 아주 자잘한 일까지도 지나치게 걱정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지나치게 걱정하는 마음이나 지나친 염려를 가리킴.
♣ 노팽[老彭]노팽(老彭)은 곧 8백 세를 살았다는 팽조(彭祖)로, 이름은 전경(籛鏗)이라 한다. 논어(論語) 술이(述而)의 “전술(傳述)하기만 하고 창작하지 않으며 옛것을 믿고 좋아함은 내 삼가 우리 노팽에게 견주노라.” 한 데서 나온 말이다.
♣ 노풍[老楓]술이기(述異記)에 “老楓化爲羽人"이라 하였음.
♣ 노학[老學]공부한다는 핑계로 그냥 늙기만 하여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뜻의 겸사(謙辭)이다.
♣ 노한궁[露寒宮]노한궁은 한(漢) 나라 궁전 안의 관소(館所) 이름이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만리 저쪽 노한전, 얼음물 담은 맑은 옥 병.[萬里露寒殿 開氷靑玉壺]”이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9 槐葉冷淘》
♣ 노한옹[潞韓翁]노옹은 송(宋) 나라 때 노국공(潞國公)에 봉해진 문언박(文彦博)을 말하고, 한옹은 역시 한국공(韓國公)에 봉해진 부필(富弼)을 말하는데, 문언박이 일찍이 부필ㆍ사마광(司馬光) 등과 함께 당(唐) 나라 백거이(白居易)가 만든 구로회(九老會)의 고사를 본받아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를 만들어 주연(酒宴)을 베풀고 시를 읊으며 서로 즐겼다.
♣ 노호[老胡]노호(老胡)는 석가(釋迦)나 달마(達摩) 등 인도의 중을 칭하는 말이다.
♣ 노화[爐火]도가(道家)의 연단술(鍊丹術)임.
♣ 노화비침[爐火飛沈]호롯불을 뒤적이다. 화롯불은 도가에서 선약인 단홍(丹汞)을 굽는 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과 품덕(品德)을 수양한다는 뜻이다.
♣ 노후반[魯侯泮]제후(諸侯)의 학궁(學宮). 시경(詩經) 魯頌 泮水에 “즐거운 반수(泮水)에 잠깐 그 미나리를 캐었노라.” 했는데, 그 주에 “반수는 반궁(泮宮)의 물이다. 제후의 학궁을 반궁이라 하니, 동ㆍ서ㆍ남방에 물이 있어 반벽(半壁)과 같다.” 하였음.
♣ 노희채의[老戲彩衣]춘추 시대 초(楚) 나라의 효자인 노래자가 나이 70세에 채색옷을 입고 어린애처럼 장난을 하여 부모를 즐겁게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 녹[綠]풀 이름. 일명 왕추(王芻)라고도 함.
♣ 녹거[鹿車]겨우 사슴 한 마리를 실을 만한 작은 수레. 전하여 소박한 생활을 의미한다.
♣ 녹거귀[鹿車歸]부부가 노력하며 청고(淸苦)한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 포선(鮑宣)이 청빈(淸貧)을 숭상하자, 갓 결혼한 그의 처가 화려한 혼수품(婚需品)을 모두 친정으로 돌려보내고, 남편과 함께 녹거(鹿車)를 끌며 향리로 돌아간 고사가 있다. 《後漢書 列女傳 鮑宣妻》
♣ 녹괴[綠槐]‘푸른 홰나무’란 세 그루의 홰나무[三槐]로서, 재상[三公]의 지위를 뜻한다. 송(宋) 나라 병부시랑(兵部侍郞) 진국공(晉國公)왕호(王祜)가 재상의 덕망이 있었으나 직언(直言)했던 까닭에 끝내 재상이 되지 못하자, 뜰에 세 그루의 홰나무를 심고 “내 자손 가운데 반드시 삼공이 되는 이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윽고 아들인 위국(魏國) 문정공(文正公) 왕단(王旦)이 재상이 되었다는 고사가 있다. 《古文眞寶 後集 三槐堂銘》
♣ 녹기[綠綺]녹기는 녹기금(綠綺琴)의 준말로, 한(漢) 나라 사마 상여(司馬相如)가 가지고 있었다는 거문고 이름이다. 《古琴疏》
♣ 녹기금[綠綺琴]거문고 이름. 고금소(古琴疏)에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옥여의부(玉如意賦)를 지으니, 양왕(梁王)이 기뻐하여 녹기금(綠綺琴)을 하사하였다.” 하였다. 장재(張載)의 시에, “故人遺我綠綺琴”이라 하였음.
♣ 녹녹[碌碌]한(漢) 나라 소망지(蕭望之)가 왕중옹(王仲翁)과 함께 병길(丙吉)의 추천을 받고 당대의 실력자 곽광(霍光)을 만나러 갈 때, 곽광의 경비가 삼엄하여 면회인의 몸을 수색하기까지 하는 것을 보고는 홀로 돌아왔는데, 뒤에 고관이 된 왕중옹이 소망지를 보고서 “어찌 녹록하게 굴려고 하지 않고서 거꾸로 문지기 따위가 되었단 말인가.[不肯碌碌 反抱關爲]”라고 하자, 소망지가 “각자 자기 신념대로 살 뿐이다.[各從其志]”라고 대답한 고사가 있다. 《漢書 蕭望之傳》
♣ 녹대[鹿臺]은(殷)의 주왕(紂王)이 재물과 보화를 쌓아놓았던 창고 이름. 《書經 武成》
♣ 녹도[籙圖]녹도는 미래(未來)의 일을 기록한 책인데, 진시황 때의 방사인 노생(盧生)이 해중에 들어갔다 오면서 가지고 온 것인데, 그 내용은 바로 “진 나라를 망칠 자는 호이다[亡秦者胡也].”라는 것이었다. 《史記 秦始皇本紀》
♣ 녹독장[碌碡場]녹독은 밭을 평평하게 고를 때 사용하는 농기구로서 녹독장은 지평을 잡아놓은 마당을 말한다.
♣ 녹라월[綠蘿月]푸른 등라(藤蘿) 사이로 비추는 달빛.
♣ 녹로[鹿盧]우물 정자(井字) 형태의 문 고리 모양을 말한다.
♣ 녹록[漉漉]땀 따위가 줄줄 흐르는 모양
♣ 녹료[綠醪]푸른빛이 감도는 명주(名酒)를 가리킨다.
♣ 녹린[綠鱗]고기 비늘처럼 잔잔하게 일렁이는 물결을 형용하는 시어(詩語)이다.
♣ 녹림[綠林]푸른 숲이란 뜻으로, 도둑 떼의 소굴을 일컫는 말의 고사성어.
♣ 녹림호객[綠林豪客]도둑의 별명. 왕망(王莽) 때 신시(新市) 사람 왕광(王匡)ㆍ왕봉(王鳳) 등 무뢰배 수백 명이 산에 숨어 강도를 일삼기로 그들의 별명을 녹림(綠林)이라 붙였음.
♣ 녹마불변[鹿馬不辨]진(秦) 나라 승상(丞相) 조고(趙高)가 위세(威勢)를 제멋대로 부리기 위해, 짐짓 이세황제(二世皇帝)에게 말을 바치면서 사슴이라 일컫고, 여러 신하 중에서 사슴이 아니고 말이라고 말한 자는 모두 법으로 얽어 처벌하였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녹마전대[鹿馬專對]사신으로 외국에 가서 무함당한 진상을 밝혀 흑백을 가려내는 출중한 능력을 말한다. 녹마(鹿馬)는 진(秦) 나라 2세 황제 호해(胡亥)에게 조고(趙高)가 사슴을 바치며 말이라고 했던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를 가리킨다. 《史記 秦始皇本紀》 전대(專對)는 사신이 능수능란하게 응대하며 왕명(王命)을 완수하는 것을 말한다.
♣ 녹명[鹿鳴]시경(詩經)의 편명인데 천자가 군신과 빈객(賓客)을 접대할 때 부르는 노래이다. 이는 선왕(先王)이 예의로 신하를 부린 것을 찬미한 것이다.
♣ 녹명시[鹿鳴詩]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篇名)으로, 임금이 군신(群臣)과 가빈(嘉賓)을 연향(燕饗)할 때 부르던 시.
♣ 녹명연[鹿鳴筵]신하의 노고를 위로하는 연회라는 뜻이다. 녹명은 시경(詩經)의 편명인데 신하나 빈객을 접대할 때 부르는 노래이다. 이는 선왕(先王)이 예의로 신하를 부린 것을 찬미한 것이다.
♣ 녹명연[鹿鳴宴]창방(唱榜)은 과거 시험 합격자를 발표하는 것. 향시(鄕試) 창방 뒤에 지방관이 시관(試官)과 급제자들을 불러 연회를 베풀고 녹명(鹿鳴)의 시를 노래 부르게 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를 녹명연(鹿鳴宴)이라 하였다 한다. 녹명은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이다. 《唐書 選擧志上ㆍ隨園隨筆 科第類 鹿鳴宴》
♣ 녹명연[鹿鳴宴]당대(唐代)에 주현(州縣)에서 천거되어 경사(京師)에 모인 선비들을 위로하던 연회. 시경(詩經)의 녹명편(鹿鳴篇)을 부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함. 녹명편은, 사슴이 울면서 먹이를 함께 먹는 것을 군신간(君臣間)의 정리에 비겨 노래한 것이다.
♣ 녹명편[鹿명편]시경 소아(小雅)의 편명. 훌륭한 손님을 맞아 흥겨운 잔치를 벌인 자리에서 부르는 노래로, 도를 강론하고 덕을 닦는 취지라고 한다.
♣ 녹문[鹿門]녹문은 호북성(湖北省) 양양현(襄陽縣)에 있는 산 이름으로, 후한(後漢) 때 방덕공(龐德公)이 처자식을 데리고 녹문산에 올라가 약초를 캐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후대에는 이로 인해서 은자가 사는 곳을 지칭하게 되었다.
♣ 녹문[鹿門]후한(後漢)의 은자(隱者)로 녹문산(鹿門山)에 들어가 약초를 캐며 살았던 방덕공(龐德公)을 가리킨다. 그는 한 번도 도회지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채, 유표(劉表)의 간절한 요청에도 끝내 응하지 않고서 처자를 데리고 녹문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며 살다 생을 마쳤다. 《尙友錄 1》
♣ 녹문경[鹿門耕]한(漢)나라 말기의 방덕공(龐德公)과 당(唐)의 맹호연(孟浩然)을 이름. 녹문산(鹿門山)은 중국 호북성(湖北省)양양현(襄陽縣)에 있는 산인데, 한의 방덕공이 그 산에 들어가 약을 캐면서 돌아오지 않았고, 당의 맹호연도 그 산에 가서 숨어살았음.
♣ 녹문계[鹿門計]세파(世波)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온전한 삶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 방덕공(龐德公)이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의 간곡한 요청도 뿌리치고서, 처자를 데리고 녹문산(鹿門山)으로 들어가 약초를 캐며 살았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龐公傳》
♣ 녹문기[鹿門期]은거한다는 뜻이다. 녹문은 호북성(湖北省) 양양현(襄陽縣)에 있는 산 이름으로, 후한(後漢) 때 방덕공(龐德公)이 처자식을 데리고 녹문산에 올라가 약초를 캐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후대에는 이를 인해서 은자가 사는 곳을 지칭하게 되었다.
♣ 녹문방[鹿門龐]방공은 후한(後漢) 때의 은사(隱士)로 현산(峴山) 남쪽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일찍이 형주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가 그를 찾아가 벼슬하기를 권했으나 듣지 않았고, 뒤에는 마침내 처자(妻子)를 다 거느리고 녹문산으로 들어가 약(藥)을 캐면서 끝내 나오지 않았다. 《後漢書 卷八十三》
♣ 녹문산[鹿門山]중국 호북(湖北) 양양현(襄陽縣)에 있는 산인데, 한말(漢末)에 방덕공(龐德公)이 처자를 거느리고 녹문산에 올라가 약을 캐며 돌아오지 않았다 한다. 《相友錄 卷一》 당 나라 맹호연(孟浩然)이 또 그곳에 은거하였다 하여 은거지의 대명사로 쓰인다.
♣ 녹문옹[鹿門翁]후한(後漢) 때의 은사 방덕공(龐德公)을 가리킴. 그는 도량이 넓고 물욕이 없어, 당초부터 처자와 함께 농사를 짓고 살다가, 뒤에는 유표(劉表)의 간절한 요청에도 끝내 응하지 않고서 끝내 처자를 거느리고 녹문산(鹿門山)으로 들어가 약을 캐며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後漢書 卷八十三》
♣ 녹문은[鹿門隱]후한(後漢)의 방덕공(龐德公),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처자식과 함께 녹문산(鹿門山)으로 들어가 약초나 캐면서 영원히 세속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한다. 《尙友錄 卷一》
♣ 녹미[鹿尾]불자(佛子)라고도 하고 총채라고도 하는데, 사슴의 꼬리로 묶어서 만든 것을 말한다. 불도(佛道)를 뜻하기도 한다.
♣ 녹보[祿父]상(商) 나라 무경(武庚)의 이름. 회남자(淮南子) 요략(要略)에, “輔公子祿父”라 하였는데, 그 주에, ‘祿父 紂之兄子 周封之以爲殷後 使管蔡監之’라고 하였음.
♣ 녹사[錄事]술을 권하는 일을 맡은 기녀(妓女)를 가리킨다.
♣ 녹사불택음[鹿死不擇音]사슴은 소리를 아름답게 내지만, 죽을 때를 당하면 아름다운 소리를 가려서 낼 여유가 없다. 사람도 위급한 지경을 당했을 때는 나쁜 소리 즉, 좋지 않은 말이 나오게 마련이다.
♣ 녹석[綠石]벼루 이름인데, 이 벼루에는 바람 물결 모양의 결이 있다고 한다.
♣ 녹수[淥水]악부(樂府) 금곡(琴曲)의 가사 이름.
♣ 녹수[淥水]압록강(鴨綠江)의 일명.
♣ 녹수홍련[綠水紅蓮]남조(南朝) 제(齊) 고제(高帝) 때에 위장군(衛將軍) 왕검(王儉)의 막하(幕下)에 인재들이 많이 모여들었으므로 사람들이 연화지(蓮花池)라고 불렀는데, 당시 문명(文名)을 떨치던 유고지(庾杲之)가 다시 막료로 들어가자 소면(蕭緬)이 “녹수에 떠다니며 홍련에 기대었구나.[泛綠水 依芙蓉]”라고 찬미했던 고사가 전한다. 《南齊書 庾杲之傳》
♣ 녹시[鹿豕]사슴과 멧돼지. 곧 산속의 짐승을 뜻함.
♣ 녹시공시형[鹿豕共柴荊]깊은 산골의 생활을 표현한 말이다.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순(舜) 임금이 깊은 산골에 살 때에는 나무나 돌과 함께 살고 사슴이며 멧돼지와 노닐었나니[與鹿豕遊], 그때에는 산골의 야인(野人)과 다른 점을 찾기가 힘들었다.”라는 말이 나온다.
♣ 녹야[綠野]녹야는 당(唐) 나라 때 배도(裵度)가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던 별장 녹야당(綠野堂)의 준말로, 곧 은거를 지칭하는 말이다. 《舊唐書 卷一百七十 裵度傳》
♣ 녹야[綠野]녹야는 당(唐) 나라 때의 명상(名相) 배도(裵度)의 당호(堂號). 배도는 오교(午橋)에 다가 별장을 지었는데, 수목(樹木)이 우거지고 온갖 화초(花草)가 심어져 있었다. 《舊唐書 裵度傳》
♣ 녹야[綠野]은퇴한 재상의 별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당(唐) 나라 헌종(憲宗) 때의 재상 배도(裵度)가 만년에 환관이 발호하는 것에 환멸을 느껴 은퇴한 뒤 녹야당(綠野堂)이라는 별장을 짓고 백거이(白居易), 유우석(劉禹錫) 등과 풍류를 즐겼던 고사가 전한다. 《新唐書 裵度傳》
♣ 녹야당[綠野堂]당(唐) 나라 때의 명상(名相) 배도(裵度)가 오교(午橋)에 건축한 별장 이름이다. 백거이(白居易)ㆍ유우석(劉禹錫) 등과 시주(詩酒)를 즐겼던 고사가 있다. 《新唐書 裴度傳》
♣ 녹야별업[綠野別業]만년에 은퇴하여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생활을 즐긴다는 말이다. 당(唐) 나라 재상 배도(裵度)가 환관이 득세하는 조정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벼슬을 그만두고 나서 녹야당(綠野堂)이라는 별장을 지어 놓고는 백거이(白居易), 유우석(劉禹錫) 등과 함께 시주(詩酒)를 나누며 노닐었던 고사가 있다. 《新唐書 裵度傳》
♣ 녹야원[鹿野苑]불가의 말로 석가세존이 성도한 지 삼칠일(三七日)만에 처음으로 법륜(法輪)을 굴리어 아야교진여(阿若憍陳如)등 다섯 비구(比丘)를 제도한 곳이라고 함. 《雜阿含經 二十三》
♣ 녹야장[綠野庄]녹야장은 당 나라 배도(裴度)가 재상을 그만두고 유우석(劉禹錫)ㆍ백거이(白居易) 등 문인들과 시주(詩酒)의 모임을 즐겼던 별장 이름으로, 하남(河南)의 낙양에 옛터가 있다 한다.
♣ 녹엽성음[綠葉成陰]초록빛 잎이 그늘을 만든다는 말로, 여자가 결혼하여 자녀가 많다는 뜻의 고사성어.
♣ 녹옥수[綠玉樹]천제(天帝)가 사는 곳에 생장한다는 나무의 이름.
♣ 녹옥장[綠玉杖]녹옥지(綠玉枝)를 가리킨 것으로 지팡이를 말한다.
♣ 녹요[綠腰]당(唐) 나라 곡조 이름이다.
♣ 녹운의[綠雲衣]녹운의는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입는 녹포(綠袍)를 이르는데, 비파기(琵琶記)에 “상아가 녹운의를 만들어 놓으니, 달 속의 계수나무 첫째 가지를 꺾었네.[嫦娥剪就綠雲衣 折得蟾宮第一枝]”하였다.
♣ 녹원[鹿園]녹야원(鹿野苑). 불가의 말로 석가세존이 성도한 지 삼칠일(三七日)만에 처음으로 법륜(法輪)을 굴리어 아야교진여(阿若憍陳如)등 다섯 비구(比丘)를 제도한 곳이라고 함. 《雜阿含經 二十三》
♣ 녹위이추[鹿危而趨]사슴이 위급하면 험한 데를 가리지 않고 달린다는 말이 춘추 좌전(左傳)에 있는데, 여기에서 진(秦) 나라의 사슴이란 고사(故事)까지를 겸하여 쓴 것이다. 그것은 진 나라 정승 조고(趙高)가 황제를 농락하기 위하여 사슴을 몰고 앞에 가서 말이라 하니, 다른 신하들이 조고를 겁내어 감히 사슴이란 말을 못하는 이가 많았다. 그러므로 진나라가 사슴을 놓쳤으매 영웅들이 다투어 쫓아서 발이 빠른 자가 먼저 얻는다고 말한 이가 있었다.
♣ 녹음방초 승화시[綠陰芳草 勝花時]신록이 우거진 초여름. 녹음이 봄의 꽃보다 좋은 시절.
♣ 녹음방초[綠陰芳草]푸른 나무 그늘과 향기로운 풀. 우거진 나무 그늘과 싱그러운 풀. 곧, 여름의 자연 경치. 여름철의 정경
♣ 녹의[綠蟻]녹의는 술을 말한다.
♣ 녹의[綠衣]하인들이 입는 옷으로, 전하여 하인을 가리킴.
♣ 녹의사자[綠衣使者]푸른 옷을 입은 사자라는 말로, 앵무새의 다른 명칭을 일컫는 고사성어.
♣ 녹의사자[綠衣使者]유사(遺事)에 “장안(長安)의 부민(富民) 양숭의(楊崇義)의 아내 유씨(劉氏)가 이웃 사람 이감(李弇)과 간통하면서 함께 숭의를 살해했다. 그 집에 있는 앵무새가 ‘범인은 이감이다.’ 하여 모든 사실이 드러나게 되자 명황이 듣고 그 앵무새를 녹의사자로 봉(封)했다.” 하였다.
♣ 녹의홍상[綠衣紅裳]연두 저고리에 다홍 치마. 곱게 차려 입은 젊은 아가씨의 복색
♣ 녹이[騄駬]녹이는 본래 녹이(綠耳). 귀가 푸른 천리마로, 주목왕(周穆王)의 팔준마(八駿馬)의 하나이다. 뛰어난 인재를 비유한 것이다.
♣ 녹이상제[綠駬霜蹄]중국 주나라 목왕이 천하를 주유할 때 탔던 준마[綠駬]와 굽에 흰 털이 난 좋은 말[霜蹄]. 훌륭한 말의 비유
♣ 녹장[綠章]녹색의 종이에 글을 써서 아뢰는 것으로 도사(道士)가 천신(天神)에게 표(表)를 올릴 때 쓰는 것임. 육유의 화시편유제가원시(花時遍遊諸家園詩)에 “綠章夜奏通明殿 允借春陰護海棠"의 글귀가 있음.
♣ 녹주[綠珠]진(晉) 나라 석숭(石崇)의 애첩(愛妾) 이름. 그녀는 무척 아름답고 고운데다 피리를 잘 불었는데, 그를 탐내 손수(孫秀)가 석숭에게 그녀를 자기에게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석숭이 들어주지 않으므로, 손수가 거짓으로 조서(詔書)를 꾸며 석숭을 수감하려 하자, 녹주가 금곡원(金谷園) 별관(別館)에 있다가 슬피 울며 누(樓) 아래로 떨어져 자살하였다. 《晉書 石崇傳》
♣ 녹주건[漉酒巾]녹주건이란 곧 두건(頭巾)으로 술을 거른다는 뜻으로, 도잠(陶潛)이 술을 무척 좋아하여 매양 술이 익으면 머리에 쓴 갈건(葛巾)을 벗어서 술을 걸러 마시고 다시 쓰곤 했다는 고사이다. 《晉書 陶潛傳》
♣ 녹주옹[漉酒翁]술 거르는 늙은이라는 뜻으로 도연명(陶淵明)을 가리킨다. 도연명이 술이 익으면 갈건(葛巾)으로 술을 걸러낸 다음 다시 머리에 썼다고 한다. 《南史 隱逸傳上 陶潛》
♣ 녹주원[綠珠冤]석숭에게 녹주(綠珠)라는 예쁜 첩이 있었는데, 손수(孫琇)가 그녀를 달라고 하였으나 주지 않았다. 석숭이 그 때문에 죄를 얻어 잡히자 녹주는 누(樓)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晉書 卷三十三 石崇傳》
♣ 녹준경북해[綠樽傾北海]주인이 손님을 좋아하여 잘 대접한다는 비유이다. 후한서(後漢書) 공융전(孔融傳)에 “그가 북해상(北海相)에서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임명되었을 적에 선비를 좋아하여 손님들이 날마다 집 안에 가득하였다. 그는 언제나 한탄하기를 ‘좌상에는 손님이 항상 가득하고 술동이에는 술이 떨어지지 않으니 아무 걱정이 없다.’ 했다.” 한 데서 나온 말이다.
♣ 녹창[綠槍]푸른창은 푸른 물감을 바른 창으로 무기를 뜻한다.
♣ 녹천서[綠天書]녹천은 파초잎을 이름. 청이록(淸異錄)에 “당승(唐僧) 회소(懷素)가 영릉(零陵) 동교(東郊)에 살면서 파초를 심어 수만 본이 어우러졌는데 그 잎을 따서 종이 대신 글씨를 쓰며 소거(所居)를 이름하여 녹천암(綠天庵)이라 했다.” 하였음.
♣ 녹태책[鹿貽幘]은자(隱者)가 쓰는 녹비(鹿皮)로 만든 건(巾). 양 무제(梁武帝)가 즉위하여 옛친구인 하점(何點)에게 녹비건을 하사하며 불렀다 한다. 《梁書 何點傳》
♣ 녹평[鹿苹]녹평은 시경(詩經) 소아(小雅) 녹명(鹿鳴)에 “평화롭게 우는 저 사슴 들판에서 쑥을 뜯누나 우리 집에 반가운 손들이 모여 비파 타고 피리도 부노라[呦呦鹿鳴 食野之苹 我有嘉賓 鼓瑟吹笙]” 한 데서 온 말인데, 이 시는 임금이 어진 신하들을 불러 잔치하면서 군신간의 정을 두터이함을 노래한 것이다.
♣ 녹포[綠蒲]단오절(端午節)을 말한다. 이날 창포(菖蒲)를 문에 꽂아 재액(災厄)을 방지하는 풍습이 있던 데에서 나온 말이다.
♣ 녹피관[鹿皮冠]은사(隱士)의 관. 하상지(何尙之)가 집에 있을 적에는 늘 이 관만을 썼는데 벼슬길에 나아간 뒤 어느 날 천자가 거둥하고 백관이 시위한 자리에서 심경지(沈慶之)가 “오늘은 왜 녹피관을 쓰지 않았는가.” 농하였다. 《南史 何尙之傳》
♣ 녹피옹[鹿皮翁]한(漢) 나라 때 치천(淄川) 사람으로 녹피공(鹿皮公)이라고도 하는데 기계를 잘 만들었다 함. 젊었을 때 지방 관청의 말단 관리로 있다가 잠산(岑山) 위에 있는 신천(神泉)에 수레와 잔도(棧道)를 만들어 올라가서 샘 곁에다 집을 짓고 사슴갖옷을 입고서 지초(芝楚)를 캐먹고 신천을 마시며 70여 년을 살았다 한다. 《列仙傳 鹿皮公》
♣ 녹학[祿鶴]녹학(祿鶴)은 곧 학(鶴)에게 녹위(祿位)를 준다는 뜻이다.
♣ 녹황[鹿隍]열자(列子) 주복왕(周穆王)에 “정(鄭) 나라 사람이 땔나무를 하다가, 갑자기 쫓겨오는 사슴을 때려잡아 섶나무로 덮어놓고는 이내 그곳을 잊어버렸다. 혹시 꿈을 꾸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그 일을 혼자 중얼거렸는데 옆에서 한 사람이 듣고는 몰래 그 사슴을 찾아가 버렸다고 했다.
♣ 녹효[綠驍]강원도(江原道) 홍천(洪川)의 고호이다.
♣ 논[論]법에 의거하여 죄를 논고하다.
♣ 논공행상[論功行賞]공적이 많고 적음에 따라 알맞은 상을 내림.
♣ 논독[論篤]실천은 못 하면서 언론만 독실한 것을 이름. 공자가 말하기를 “언론이 독실한 것만 가지고는 그가 군자인지, 외모만 그럴 듯하게 꾸민 사람인지 알 수 없으므로 하여할 수가 없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先進》
♣ 논사[論思]논사(論思)는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의논하고 생각함이다.
♣ 논점일탈[論點逸脫]논설의 요지를 벗어남
♣ 농가[農家]허행(許行)
♣ 농가성진[弄假成眞]장난으로 한 것이 참이 됨.
♣ 농단[壟斷]깎아지른 듯 우뚝 솟아 있는 높은 언덕. 후에 혼자 이익을 독점하는 것을 뜻하게 됨.
♣ 농락[籠絡]남을 제 마음대로 이용한다는 뜻의 고사성어.
♣ 농롱[曨曨]어스레한 모양, 어둠침침한 모양
♣ 농리[瀧吏]농은 급류(急流)의 뜻으로, 농리는 즉 배가 다니기 어려운 험악한 곳에 특별히 두어 배의 운행을 경계시키도록 했던 아전을 이르는데, 한유(韓愈)가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부임해 갈 적에 창락롱(昌樂瀧)에 이르러 농리와의 문답(問答)에 의탁하여 읊은 시에서 온 말이다. 《韓昌黎集 卷六》
♣ 농리요도교염춘[穠李夭桃嬌艶春]모두 미인(美人)을 형용한 말이다.
♣ 농말홀횡촌[濃抹忽橫村]떠오르는 아침 햇빛에 반사되어 연무(煙霧)가 붉게 물든 것을 짙게 화장한 여인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이다.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에 “서호를 서시(西施)에 비유한다면, 짙은 화장 옅은 화장 모두 어울린다 할까.[欲把西湖比西子 淡粧濃抹摠相宜]”라는 구절이 나온다. 《蘇東坡詩集 卷9 飮湖上初晴後雨》
♣ 농매[隴梅]산 위에 활짝 피어 있는 매화꽃. 당 나라 송지문(宋之問) 제대유령북역시(題大庾嶺北驛詩)의 “내일 아침 고향을 바라보는 곳, 활짝 핀 산 위 매화 응당 보리라[明朝望鄕處 應見隴頭梅].”에서 나온 것으로 역시 고향을 그릴 때 인용한다.
♣ 농산[隴山]육반산(六盤山) 남단의 별칭으로, 중국 섬서성(陝西省)의 농현(隴縣)과 감숙성(甘肅省)의 평량(平涼) 일대에 깔려 있는데, 산세가 험난하여 그 지방의 요새이다. 옛날에 행역(行役)나간 사람들이 모두 이 산에 올라 고향을 생각하며 슬퍼했다고 한다. 앵무의 원 서식지(棲息地)로 일컬어 옴.
♣ 농상경[隴上耕]농상은 본디 중국 천수군(天水郡)에 있는 지명. 전야(田野)를 가리킨다. 후한 말의 명사(名士)방덕공(龐德公)이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의 간곡한 초빙을 사양하고 현산(峴山)의 남쪽에 살며 자기는 전야에서 밭을 갈고 처자는 김을 매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後漢書 卷八十三 逸民列傳》
♣ 농상증차연여홍[壟上曾嗟燕與鴻]진말(秦末)에 진승(陳勝)이 큰 뜻을 품었으나 가난하여 품팔이로 밭을 갈다가 밭둑에 앉아 쉬면서, “왕후(王侯)와 장상(將相)이 어찌 종자가 있으랴.” 하고 탄식하니, 곁에 사람이 비웃었다. 그가 말하기를, “제비가 어찌 기러기ㆍ따오기의 뜻을 알까보냐.” 하였다.
♣ 농서[隴西]한(漢) 나라 때 흉노(匈奴)가 출몰했던 농산(隴山) 이서(以西)의 지역 이름으로, 농우(隴右) 혹은 농음(隴陰)이라고도 하는데, 보통 북쪽 변방을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다.
♣ 농서공자증미진[隴西公子曾迷津]이백(李白)이 하늘 나라에서 유배당한 적선(謫仙)의 처지로 세파(世波)에 부대끼며 살았던 것을 의미하는데, 신당서(新唐書) 권202에는 이백이 황노(黃老)를 좋아하여 청산(靑山)에 들어가서 생을 마감하려다가 결국에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기사가 기재되어 있기도 하다. 한편 이백은 흥성 황제(興聖皇帝)의 9세 손으로서 당 고조(唐高祖) 이연(李淵)과 같은 농서(隴西) 성기(成紀) 사람인데, 그가 지은 여한형주서(與韓荊州書)에도 이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 농서원[隴西園]이씨(李氏)의 본고장이란 뜻으로, 맨 처음 농서(隴西) 성기(成紀) 사람이 이연(李淵)이 당(唐) 나라를 세우고 천하의 이씨(李氏)는 모두 농서(隴西)에서 나왔다고 하면서 노담(老聃)을 시조(始祖)로 삼은 데서 유래한 것이다. 《舊唐書 卷一 高祖本紀》
♣ 농서자[隴西子]농서 출신인 이백(李白)을 가리킨다.
♣ 농수[隴水]중국 서부 산악지대인 감숙성(甘肅省)과 섬서성(陝西省)에 위치한 농산(隴山)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일반적으로 깊은 산속에서 흘러나온 강물을 뜻한다.
♣ 농수음[隴水吟]농수음은 농두음(隴頭吟)으로, 한 나라의 횡취적곡(橫吹笛曲)이며, 이연년(李延年)이 지었다고 한다.
♣ 농승[聾丞]한(漢) 나라 때 황패(黃霸)가 영천 태수(潁川太守)가 되었는데, 허씨(許氏) 성을 가진 승리(丞吏)가 늙어서 귀머거리가 되었으므로, 독우(督郵)가 그를 쫓아내려 하자, 황패가 말하기를 “허승(許丞)은 청렴한 관리이다. 그는 비록 늙었지만 오히려 배기(拜起)ㆍ송영(送迎)에 능란하니 귀가 어두운 것이 무어 해롭겠는가. 잘 도와주라.” 하였다.
♣ 농아전[籠鵝全]진(晉) 나라 때 왕희지(王羲之)가 거위를 매우 좋아하여 산음(山陰)의 도사(道士)에게 도덕경(道德經)을 써 주고 그 대가로 거위를 싸 간 고사에서 온 말이다.
♣ 농암[農巖]조선 숙종(肅宗) 때의 성리학자(性理學者) 김창협(金昌協)의 호.
♣ 농암집[農巖集]김창협(金昌協)의 문집
♣ 농옥[弄玉]진목공(秦穆公) 때에 소사(簫史)가 퉁소를 잘 불므로, 그 소리를 듣고 봉황새가 날아 왔다 한다. 목공의 딸 농옥(弄玉)이 소사를 좋아하므로 짝을 지어 주었더니 부부가 봉황을 타고 신선이 되어 갔다 한다.
♣ 농옥[弄玉]춘추시대 진목공(秦穆公)의 딸로 퉁소를 잘 불었음.
♣ 농와지경[弄瓦之慶]딸을 낳은 기쁨
♣ 농와지희[弄瓦之喜]딸을 낳은 기쁨. 옛날 중국에서 딸을 낳으면 장난감으로 실패를 주었다는 데서 온 말
♣ 농우[隴右]농서(隴西) 지방으로, 감숙성(甘肅省) 일대를 가리킨다. 이씨(李氏)의 자칭 본관(本貫).
♣ 농우희음객[隴右喜吟客]농서(隴西)에서 태어난 시인 이백(李白)은 일찍이 ‘황운성가에 까마귀가 깃들려고 날아와서 까악까악 가지 위에 운다.[黃雲城邊烏欲棲 歸飛啞啞枝上啼]’로 시작되는 시를 지었다. 《李太白集 卷三 鳥夜啼》
♣ 농장[弄璋]생남(生男)을 말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사간(斯干)에 “남자를 낳으면 구슬[璋]을, 여자를 낳으면 실패[瓦]을 가지고 놀게 한다.” 한 말이 있으므로 아들을 농장(弄璋), 딸을 농와(弄瓦)라 한다.
♣ 농장성[農丈星]즉 농장인성(農丈人星)으로 남두성(南斗星) 서남쪽에 있는 별이름인데, 추수(秋收)를 맡고 있다고 한다. 《晉書 天文志》
♣ 농장인[農丈人]진서(晉書) 전문지(天文志)에 “농장인의 한 별이 남두(南斗)의 서남쪽에 있는데 노농(老農), 가색(稼穡)을 맡는다.” 하였음. 또는 농가(農家)의 늙은이를 말함.
♣ 농장인성[農丈人星]별 이름. 남두성(南斗星) 서남쪽에 있는 별로 추수(秋收)를 주관한다고 한다.
♣ 농장지경[弄璋之慶]사내 아이를 낳았을 때 장(璋)으로 만든 구기를 주어 놀게 했다는 데서 나온 말로 사내 아이를 낳은 경사를 뜻 함.
♣ 농장지희[弄璋之喜]아들 낳은 즐거움. 옛날 사내아이를 낳으면 장난감으로 장(璋)이란 일종의 장난감을 주며 놀게 했음.
♣ 농적[隴笛]농적은 농서 지방의 젓대 소리를 말한다.
♣ 농조연운[籠鳥戀雲]새장 속에 있는 새는 구름을 그리워 한다. 곧 몸이 속박 당한 사람은 자유를 갈망한다는 뜻이다.
♣ 농조추[弄鳥雛]옛날 초(楚) 나라의 효자(孝子) 노래자(老萊子)가 나이 70에 부모 앞에서 어린애 옷을 입고 새 새끼를 희롱하여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한 일에서 온 말이다.
♣ 농주인[弄珠人]당(唐) 나라 시인 왕적(王適)의 시 ‘강빈매(江濱梅)’에 “알지 못하는 새에 찾아온 이른 봄빛, 아마도 구슬 갖고 노니는 사람인 듯.[不知春色早 疑是弄珠人]”이라는 표현이 있다. 농주인(弄珠人)은 계란(鷄卵)만한 구슬을 차고 있었다는 전설 속의 신녀(神女)로, 매화를 가리키는 시어이다. 주대(周代)의 정교보(鄭交甫)가 초(楚) 나라 한고(漢臯)의 누대 아래에서 강비(江妃) 2녀를 만나 그들이 차고 있는 형계(荊鷄)의 알 크기만한 구슬을 달라고 요청하자 구슬을 풀어 주고 떠났는데, 얼마 가지 않아서 다시 확인해 보니 구슬도 사라지고 신녀(神女)도 온데간데없더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文選 卷4 張衡 南都賦 註》
♣ 농중약[籠中藥]문객(門客)을 비유한 말. 적인걸(狄仁傑)이 정원담(貞元澹)에게 “그대는 바로 나의 농 안의 약품과 같으니 하루도 없어서는 안 되겠다.” 하였다. 《唐書 貞元澹傳》
♣ 농지우선[農地優先]농사 짓는 땅이 가장 중요하다.
♣ 농촉병수[隴蜀竝收]사람의 욕심은 한이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 농추[弄雛]옛날 초(楚) 나라의 효자(孝子)인 노래자(老萊子)가 나이 70세가 되어서 두 어버이를 즐겁게 해드리기 위하여 어린애처럼 색동저고리를 입고서 새 새끼를 가지고 장난을 하며 놀았던 데서 온 말이다.
♣ 농탄가[弄彈歌]금곡가사(琴曲歌詞)를 말한 것이다.
♣ 농판[隴坂]농판은 감숙성(甘肅省) 청수현(淸水縣)에 있는데 큰 들이 있으므로 판(坂)이라 한 것이다.
♣ 농판[隴坂]섬서성(陝西省)에 있는 농산(隴山)을 이르는데, 옛날에 행역(行役)나간 사람들이 모두 이 산에 올라 고향을 생각하며 슬퍼했다고 한다.
♣ 농환[弄丸]환은 구슬로, 태극(太極)을 말한다. 송 나라 소옹(邵雍)의 ‘자작진찬시(自作眞贊詩)’에, “농환하는 여가에 한가로이 오간다.[弄丸餘暇 閒往閒來]”하였는데, 이에 대한 소주(小註)에, “환(丸)은 태극이다.” 하였다. 《擊壤集 卷12》
♣ 농환[弄丸]어느 사물에 집착하지 않고 침묵 속에서 자가의 경지에 도취하면 남은 일들이 자연적으로 풀림. 시남 의료(市南宜僚)가 구슬놀이를 잘했는데, 그 바람에 초(楚)와 송(宋)의 전쟁이 종식되었다는 것이다. 《莊子 徐無鬼》
♣ 농환가[弄丸家]구슬 놀이 잘하는 사람을 말한다. 장자(莊子) 徐旡鬼 注에 “초(楚) 나라 사람 웅의료(熊宜僚)가 둥근 구슬 놀이를 잘 하였는데, 8개의 방울은 늘 공중에 띄워 두고 한 개만 수중에 가지고 있었다.”고 하였다.
♣ 농환옹[弄丸翁]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누추한 오두막에서 가난하게 살면서도 자신의 집을 ‘안락와(安樂窩)’라고 이름하고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즐긴 송(宋) 나라의 철인(哲人) 소강절(邵康節) 소옹(邵雍)을 가리킨다. 주역(周易)의 수리(數理)를 연역(演繹)하여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를 저술하였는데, 자작진찬(自作眞贊)에 “구슬을 굴리는 여가에 틈이 있으면, 한가히 갔다가는 한가히 오노매라[私桂操行 鸎花文才 江山氣度 風月情懷 借爾面貌 假爾形骸 弄丸餘暇 閑往閑來]”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그를 농환옹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는데, 그 시의 자주(自註)에 “환(丸)은 태극(太極)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擊壤集 卷12 自作眞贊》
♣ 농희[農羲]상고 시대의 성왕(聖王)인 태호복희씨(太昊伏羲氏)와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를 말한다.
♣ 뇌[惱]번뇌하다.
♣ 뇌개[雷開]간신. 참첨(讒諂)
♣ 뇌공대택중[礨空大澤中]장자(莊子) 추수(秋水)에 “천지의 사이에 들어 있는 사해(四海)가 마치 대택(大澤) 가운데 들어 있는 누공(礨空)과 같지 않은가?" 라는 데서 나온 말인데, 석문(釋文)에 의하면, “누공은 작은 구멍이다.” 하였다.
♣ 뇌괴[磊槐]불평 덩어리
♣ 뇌구[牢九]식품(食品)의 이름. 이아(爾雅) 석복류(釋服類)에 “뇌구는 떡붙이이다.” 하였다.
♣ 뇌기하처[雷起何處]송(宋) 나라 학자 소옹(邵雍)이 정이(程頤)에게 “뇌성이 어느 곳에서 일어나는가?"고 묻자, 정이는 “일어나는 데서 일어난다.”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 뇌당중음귀부터[雷當衆陰貴不攄]동지는 주역(周易)으로 따지면 지뢰복괘(地雷復卦)가 되어 음 5획이 위에 있고 양은 한 획만이 아래에 있다. 음은 곤(坤)이므로 땅에 해당하며 우레는 동(動)하는 물건이므로 양에 해당하니 이것은 우레가 땅 속에 있는 형상이다. 그러므로 우선 잠복해 있다가 양이 많아진 4~5월이 되어서 비로소 천둥하여야 하는데, 지금에 한 것은 너무 이르다는 뜻이다.
♣ 뇌록[磊碌]뇌성산(磊城山)에서 녹석(綠石)이 나는데, 염료(染料)로 쓸 수 있는 돌로 그 지방 사람들이 그를 일러 뇌록(磊碌)이라고 하였음.
♣ 뇌뢰[儡儡]높낮이가 있는 모양, 산이 울쑥불쑥한 모양
♣ 뇌뢰[磊磊]돌이 많은 모양.
♣ 뇌문[雷門]뇌문은 뇌문고(雷門鼓)의 준말로, 그 소리가 백리 밖에까지 들렸다는 월(越) 나라 회계성문(會稽城門)의 큰 북이다.
♣ 뇌문[誄文]죽은 사람의 생전의 공덕을 칭송하는 글을 말한다.
♣ 뇌문고[雷門鼓]뇌문(雷門)에 있는 큰 북으로, 그 소리는 백 리까지 들린다 한다. 뇌문은 월(越) 나라 회계성(會稽城)의 문이다.
♣ 뇌봉[雷封]현(縣)이 보통 사방 백 리인데, 천둥이 치면 그 소리가 백 리쯤 진동한다 하여 현령(縣令)을 뇌봉이라고 한다.
♣ 뇌봉전별[雷逢電別]갑자기 잠깐 만났다가 이내 곧 이별한다는 것.
♣ 뇌부[雷斧]뇌신(雷神)이 벽력을 칠 때 사용한다는 도끼 모양의 신구(神具)이다.
♣ 뇌성진진축향거[雷聲陣陣逐香車]향거(香車)는 귀인(貴人)의 타는 칠향거(七香車)인데, 눈 위에 바퀴를 굴리어 뇌성소리가 난다는 뜻이다.
♣ 뇌수상가의[雷水象可疑]비가 올까 의심스럽다는 뜻. 이괘의 아래 세 효(爻)는 진(震)으로 우레를 뜻하고 위의 세 효는 간(艮)으로 산을 뜻한다.
♣ 뇌연[雷淵]雷公의 집을 말한다.
♣ 뇌영원[蕾英院]연산군이 가흥청(假興淸)을 제안대군(齊安大君 ; 예종 2남 현)의 집을 치우고 거처하게 한 뒤에 뇌영원이라 이름함.
♣ 뇌우도상빈[雷雨到湘濱]다시 조정으로 불러 주는 임금의 은혜를 말한다. 상빈(湘濱)은 초(楚) 나라 굴원(屈原)이 조정에서 쫓겨난 뒤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상강(湘江) 물가를 말한다. 뇌우(雷雨)는 주역(周易) 해괘(解卦)의 “하늘과 땅의 기운이 화통하면서 뇌우 현상이 일어난다.[天地解而雷雨作]”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임금의 사면(赦免)을 받는 것을 뜻한다.
♣ 뇌진[雷陳]뇌의(雷義)와 진중(陳重)인데 동한(東漢) 사람이다. 그들이 한 고장에 살며 벗이 되었는데 같이 노시(魯詩)와 안씨춘추(顔氏春秋)를 배웠다. 태수(太守)가 진중을 효렴(孝廉)으로 추천하자 진중이 뇌의에게 양보하니 태수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 뒤 자사(刺使)가 뇌의를 무재(茂才)로 추천하자 뇌의가 진중에게 양보하니 자사가 들어 주지 않자 뇌의가 거짓으로 미친 척하면서 산발(散髮)하고 떠났다. 그 고장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교와 옷칠이 스스로 견고하다고 하겠지만 뇌의와 진중보다는 못하다.”고 하였다. 《後漢書 卷 81 陳重傳, 雷義傳》
♣ 뇌환[雷煥]진(晉)의 예장 사람. 천문(天文)을 보고 풍성(豐城)에서 용천(龍泉)과 태아(太阿)라는 두 보검(寶劍)을 찾아냈다 함.
♣ 뇌환검[雷煥劒]진(晋) 나라 장화(張華)가 천문(天文)을 본즉 두성(斗星)ㆍ우성(牛星) 사이에 자기(紫氣)가 뻐치었으므로, 천문 잘 보는 뇌환(雷煥)을 불러 함께 자다가 같이 누에 올라서 천문을 보고, 두우(斗牛) 사이에 자기(紫氣)가 삐친 징조를 물으니 뇌환이 말하기를, “보검(寶劍)의 정기(精氣)가 위로 하늘에 뻐친 것이요.” 하였다. “그러면 어느 지방이겠는가.” 하니, “예장(豫章) 풍성(豊城)에 있소.” 하였다. 장화는 뇌환을 풍성령(豊城令)으로 보내었더니, 뇌환이 풍성의 옥터[獄基]를 파서 과연 보검 한 쌍을 찾아내었다.
♣ 뇌후지환[腦後之丸]뇌후의 탄환이란 오대(五代) 때 왕은(王殷)이 두중위(杜重威)의 화살을 맞자 바로 뽑아 버리고 적에게 활을 쏘았다는 고사로서 기사회생시키는 수단을 말한다.
♣ 누[漏]불교의 용어로 번뇌를 말함.
♣ 누[婁]누는 서방 백호(西方白虎) 7성의 하나. 《協紀辨方書義例五》
♣ 누란[樓蘭]누란은 한(漢) 나라 서역(西域)의 나라 가운데 하나인데, 오랑캐 나라의 왕을 뜻한다. 한 소제(漢昭帝) 때 부개자(傅介子)가 누란을 정벌하여 왕 안귀(安歸)를 죽인 뒤 울도기(尉屠耆)를 왕으로 세우고 나라 이름을 선선(鄯善)이라 고쳤다. 《漢書 卷七十 傅介子傳》
♣ 누란지세[累卵之勢]쌓아올린 달걀이 금방 무너질 것 같이 몹시 위태로운 형세.
♣ 누란지위[累卵之危]알을 쌓아 놓은 듯한 형세. 즉 매우 위태로운 형세를 말함.
♣ 누루[壘壘]연이은 모양, 줄지은 모양
♣ 누루[漊漊]비가 멎지 아니하고 계속 내리는 모양
♣ 누루[慺慺]정성스러운 모양, 공손한고 삼가는 모양
♣ 누루마여구[樓樓馬如狗]조정에서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불우한 처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에, 임금이 신하를 자신의 손과 발[手足]처럼 여기는 경우와 개와 말[犬馬]처럼 여기는 경우와 흙과 풀[土芥]처럼 여기는 경우에 대해서 설명한 내용이 있다.
♣ 누리[虆梩]삼태기와 흙수레를 가리킨다.
♣ 누망[漏網]누망은 죄인이 법망(法網)을 빠져나가는 것을 이르는데, 육기(陸機)의 오등제후론(五等諸侯論)에 “육신은 약망을 범하였고, 칠자는 누망에 저촉되었다.[六臣犯其弱網 七子衝其漏網]" 한 주석에 “누망은 한 경제(漢景帝) 때에 법망이 느슨했던 것을 이른 말이다.” 하였다.
♣ 누문공근[婁門恭謹]누문은 당(唐) 나라 때의 명상(名相) 누사덕(婁師德)을 이른다. 누사덕은 30년 동안 장상(將相)을 지내면서 특히 덕이 많고 공근박충(恭勤樸忠)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唐書 卷一百八》
♣ 누복귀염[屢卜龜厭]고대 중국은 거북의 등뼈를 불로 지져서 점을 쳤다. 거북은 신성한 동물이므로 너무 자주 점을 치면 모독한다 여겨 싫어한다고 한다.
♣ 누서[絫黍]누서는 본디 무게를 다는 두 단위로, 누는 기장 낱알 10개의 무게이고 서는 기장 낱알 1개의 무게인데, 무게가 아닌 폭의 뜻으로도 쓰인다. 《漢書 律曆志》
♣ 누선[樓船]누각이 있는 큰 배로, 작전을 지휘하는 사령관의 배를 뜻한다.
♣ 누선장군[樓船將軍]장군의 명호(名號)이다. 한 무제(漢武帝) 때 양복(楊僕)이 누선장군에 임명된 뒤 수군(水軍)을 이끌고 남월(南越)을 정벌하여 장량후(將梁侯)에 봉해진 고사가 있다. 《漢書 卷90 酷吏傳 楊僕傳》
♣ 누선진사[樓船秦使]진시황(秦始皇)이 삼신산의 불사약을 찾기 위해 서복(徐福)으로 하여금 동남 동녀(童男童女) 수천 명을 데리고서 큰 배인 누선을 타고 바다로 나가게 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 누설궁아일편정[漏洩宮娥一片情]궁녀(宮女)가 가을철의 붉은 잎에 시를 써서 어구(御溝 궁중의 개울)에 띄워 밖으로 흘러 보낸 옛날의 이야기. 당 나라 때에 궁녀 한씨(韓氏)가 붉은 잎에 시를 써서 물에 흘려 밖으로 내보냈는데, 그 시에, “흐르는 물은 왜 이다지도 급한고, 깊은 궁중은 종일토록 한가한대 은근히 붉은 잎을 부치노니, 잘 가서 인간에 이르러라[流水何太急 深宮盡日閒 慇懃付紅葉 好去到人間].” 하였다. 우우가 개울에서 이 시를 읽고 화답하는 시를 역시 붉은 잎에 써서 궁성(宮城) 뒤 개울의 상류(上流)에서 궁중으로 띄웠더니, 그 뒤에 궁녀를 방출(放出)하여 시집보낼 때에 우우가 마침 한씨(韓氏)를 만나 첫날 밤에 붉은 잎을 내보이니, 한씨도 역시 그 붉은 잎을 내놓으면서 시를 짓기를, “한 절의 아름다운 글귀 흐르는 물 따랐으니, 십년동안 시름이 가슴에 가득하였네. 오늘날 봉황의 짝을 이루니, 홍엽이 좋은 중매인 줄 이제야 알겠네[一聯佳句隨流水 十載幽愁滿素懷 今日已成鸞鳳侶 方知紅葉是良媒].” 하였다.
♣ 누성기이최[樓成記已催]죽어서 하늘나라로 올라갔다는 뜻이다. 옥루는 상제(上帝)나 혹은 신선들이 산다고 하는 곳으로, 당나라 이상은(李商隱)의 이장길소전(李長吉小傳)에, “이장길이 장차 죽을 때 홀연히 낮에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서 웃으면서 말하기를, ‘상제가 백옥루(白玉樓)를 완성하고는 그대를 불러들여 기문(記文)을 지으려고 한다. 하늘나라는 즐겁고 괴롭지가 않다.’ 하니, 이장길이 홀로 눈물을 흘렸는데, 조금 있다가 이장길이 기절하였다.” 하였다.
♣ 누수[漏水]물시계. 옛날에 누수기를 만들어, 담은 물이 관(管)을 통하여 아래 그릇에 흘러 떨어진 양(量)을 보고 시간을 재었다.
♣ 누신[纍臣]죄를 처벌받은 신하를 이름.
♣ 누실명[陋室銘]당 나라 유우석(劉禹錫)이 누실명(陋室銘)을 지었다.
♣ 누운[漏雲]구름 사이로 새어나옴.
♣ 누의번인제패비[螻蟻翻因齊霸肥]사기(史記)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에 “환공이 병이 들자 다섯 명의 공자(公子)가 왕위 쟁탈전을 벌였다. 그러다가 환공이 죽고 난 뒤에는 서로들 공격하면서 궁궐을 텅 비워둔 채 아무도 장사지내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6~7일 동안 환공의 시체가 방치된 결과 구더기가 시체에서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하였음.
♣ 누조[嫘祖]서릉씨(西陵氏)의 딸로 황제(黃帝)의 원비(元妃). 멀리 나가서 놀기를 좋아하다가 길에서 죽었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길의 신[行神]으로 높여 제(祭)를 지냈다.
♣ 누진[漏盡]전예(田預)가 말하기를, “나이 70이 넘어서도 벼슬에 있는 것을 비유하건대, 종(鐘; 人定)이 울고 누수[漏]가 다 된 때에도 밤길을 걸어 쉬지 않음과 같다.” 하였다. 《魏志》
♣ 누첨[漏籤]시간을 알리는 누수(漏水; 물시계)를 헤아리는 줏대[籤]다.
♣ 누최수인옥섬서[漏催水咽玉蟾蜍]물시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두꺼비 형상의 물통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 것으로 시간이 쉬지 않고 흐르는 것을 뜻함.
♣ 누항[陋巷]공자(孔子)의 제자 안회(顔回)가 누항(陋巷)에 살았다. 누항은 누추한 골목이란 말이다.
♣ 누항단표도부빈[陋巷簞瓢道不貧]안빈낙도(安貧樂道)의 생활을 말한다.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훌륭하다, 안회(顔回)여. 일단사(一簞食)와 일표음(一瓢飮)으로 누항(陋巷)에 살면서도 그 낙(樂)을 변치 않으니.”라는 말이 있다.
♣ 누항단표락[陋巷簞瓢樂]도(道)를 즐기는 것. 공자의 제자 안연(顔淵)이 가난하게 살면서도 스스로 도를 즐겼다는 데서 나온 말.
♣ 누항유진락[陋巷有眞樂]공자의 높은 제자 안회(顔回)가 밥 한 대그릇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마을[陋巷 자기가 사는 동네 겸칭]에 살아도 그 즐거움은 그치지 않았다.
♣ 누항좌여우[陋巷坐如愚]공자가 말하기를 “내가 안회(顔回)로 더불어 종일토록 말을 했으나 안회가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이 마치 어리석은 것 같았다.”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爲政》
♣ 누호분진타오후[樓護分珍詫五侯]한(漢) 나라 누호(樓護)가 권세가 왕씨(王氏) 집안의 다섯 제후들로부터 진귀한 음식을 각각 나눠 받은 뒤 이를 합쳐 끓여서 오후정(五侯鯖)이라는 요리를 만들었던 고사가 있다. 《西京雜記 卷2》
♣ 눈봉[嫩峯]여린 새싹이 움트는 봄산.
♣ 눌눌[吶吶]말을 더듬는 모양
♣ 눌언민행[訥言敏行]말에는 더디고 행동에는 민첩하다는 뜻의 고사성어.
♣ 눌옹[訥翁]호가 눌재(訥齋)로 충주 출신인 박상(朴祥)을 말한다. 문장으로 이름이 높아 성현(成俔), 신광한(申光漢), 황정욱(黃廷彧)과 함께 서거정(徐居正) 이후의 사가(四家)로 칭송되며, 만년에 충주 목사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國朝人物考》
♣ 늑[扐]주역(周易)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점칠 때 서죽(筮竹)의 수(數)가 원래 50개인데(이것을 대연(大衍)이라 함), 그 중 한 개는 제쳐놓고 49개를 양쪽 손에 나누어 가지고, 그 중 천수(天數)에서 한 개를 뽑아 무명지와 새끼손가락 사이에 끼우는 것을 괘(掛)라 하고, 왼손에 있는 서죽을 네 개씩 덜어내고, 나머지 서죽을 무명지와 새끼손가락 사이에 함께 끼우는 것을 늑(扐)이라”하였음.
♣ 늑연연[勒燕然]동한(東漢)의 두헌(竇憲)이 흉노를 격파하고 연연산에 올라가 공적비를 세울 때 반고(班固)가 봉연연산명(封燕然山銘)을 지었다.
♣ 늠[廩]차다.
♣ 늠름[凜凜]두려워 삼가는 모양
♣ 늠름[廩廩]위의가 바름, 풍채가 있음, 위태로운 모양
♣ 늠름[懍懍]위태로워하고 두려워하는 모양, 위엄있는 모양, 삼가고 조심하는 모양
♣ 늠추[廩秋]차가운 가을.
♣ 늠추편[凜秋篇]초사(楚辭)에 수록된 구변(九辯)을 말한다. 일 년 사계절 중에서도 특히 사람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가을의 정경을 절절이 읊고 있는데, 그중에 “皇天平分四時兮, 竊獨悲此凜秋”라는 구절이 나오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 능가경[楞伽經]불경의 하나. 능가아발다라보경(楞伽阿跋多羅寶經)ㆍ입능가경(入楞伽經)ㆍ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 등으로도 불리며, 부처가 사자국(師子國) 능가산(楞伽山)에서 설교한 내용이 실려 있다.
♣ 능견난사[能見難思]보통 이치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라는 뜻.
♣ 능곡기변천[陵谷幾變遷]언덕이 변하여 골짜기가 되고 골짜기가 변하여 언덕이 됨을 말한 것으로, 즉 세상 일의 변천이 격심함을 형용한 말이다.
♣ 능곡지변[陵谷之變]언덕과 골짜기의 변화, 언덕이 골짜기가 되고 골짜기가 언덕으로 변함.
♣ 능기[能起]공자가 복상(卜商)의 시(詩)에 능함을 칭찬하여 한 말인데, “나를 흥기시킬 자는 상(商)이로구나. 같이 시를 말할 만하구나.” 하였다.
♣ 능대능소[能大能小]재주와 주변이 좋아 모든 일에 두루 능함.
♣ 능릉[棱棱]추위가 몸에 스며드는 모양, 모가 나고 바른 모양, 한결 두드러지게 세력이 있는 모양
♣ 능리[鯪리]포유 동물(哺乳動物)의 일종. 혀가 길고 네 다리는 짧은데, 발마다 발가락 다섯 개씩 있고 셋째 발가락의 발톱이 유독 길고 구부정하여 굴을 잘 뚫는다고 함.
♣ 능명안[能鳴雁]장자(莊子)가 산에서 나와 평소 잘 아는 사람 집을 찾아서 숙소를 정하였다. 그 집 주인은 반가워서 동자를 시켜 집에서 기르는 기러기를 잡아 삶으라고 했는데 이때 동자가 말하기를, “한 마리는 잘 울고 한 마리는 울지 못하는데 어느 놈을 잡을까요?”하니, 주인은 울지 못하는 놈을 잡으라고 하였다. 이튿날 제자가 장자에게 묻기를, “어제 산에서 나무 베는 사람이 지엽이 무성한 큰 나무를 쓸모없는 나무라 하여 베지 않았을 때는 선생께서 ‘저 나무는 재목감이 아니기 때문에 제 살대로 다 살 수 있는 것이다.’ 했는데, 기러기는 그와는 반대로 우는 재주가 없다 하여 죽음을 당하니 선생께서는 과연 어느 쪽이십니까?……”하였음. 《莊子 山木》
♣ 능사[能事]능사는 능히 할 수 있는 일을 이른다.
♣ 능서불택필[能書不擇筆]글씨에 능한 사람은 붓을 가리지 아니함.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연장에 관계없이 잘 함.
♣ 능석[陵舃]능석(陵舃)은 질경이[車前草]인데, 그 풀 속에 울서(鬱棲)라는 벌레가 들어가 있으면 오족(烏足)이라는 풀로 변한다고 함. 《列子 天瑞》
♣ 능양[陵陽]능양후. 큰 파도
♣ 능양헌박[陵陽獻璞]능양후는 초(楚) 나라 변화(卞和)의 봉호. 변화가 초 나라 산중에서 박옥(璞玉)을 얻어 초왕(楚王)에게 바쳤으나 초왕이 박옥을 알아주지 않자, 변화는 그 박옥을 또 바치고 또 바치고 하여 끝내 알아줌을 받았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능어[鯪魚]산해경(山海經) 해내북경(海內北經)에 서해 중(西海中) 열고사산(列姑射山) 근처에 능어(鯪魚)가 있는데 사람얼굴, 사람 수족에 물고기 몸을 가진 것[鯪魚人面手足魚身, 在海中]으로 이것이 나타나면 파도가 인다고 하였다.
♣ 능언조[能言鳥]능언조는 앵무새이다.
♣ 능엄경[楞嚴經]불경(佛經)의 한 종류.
♣ 능연[凌煙]능연각(凌煙閣)의 약칭. 당 나라 서안부(西安府) 성 안의 서내태극전(西內太極殿) 동쪽에 있는데, 당 태종이 천하를 안정시킨 뒤 공신 24명의 초상을 이 각에다 그렸다. 《資治通鑑 唐紀》
♣ 능연각[凌煙閣]당 나라 때 공신들의 화상(畫像)을 보관하던 곳. 태종(太宗)은 천하를 통일한 다음 정관(貞觀) 17년(643) 장손무기(長孫無忌) 등 24명의 공신에 대한 화상을 이곳에 보관하게 하였다. 이후로 공신들의 화상을 보관해 두는 곳의 대명사로 쓰이게 되었다.
♣ 능연구우[凌煙休誇歐興虞]당나라에서 어진 신하들의 초상을 능연각(凌烟閣)에 그려놓았는데 구양순ㆍ우세남이 그 중에 들어 있다.
♣ 능운[凌雲]한(漢)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자허부(子虛賦)를 지었는데, 무제(武帝)는 읽고서 말하기를, “휘날리고 휘날려서 능운(凌雲)의 기개가 있다[飄飄然有凌雲之氣].” 하였음.
♣ 능운부[凌雲賦]한(漢) 나라 때 사마상여(司馬相如)가 대인부(大人賦)를 지어 올리자, 천자(天子)가 그것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여 마치 표표히 구름 위로 치솟아 오를 듯한[凌雲]기세가 있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漢書 卷五十七》
♣ 능운수[凌雲手]보통 능운필(凌雲筆)로 많이 쓰는데, 시문(詩文)에 뛰어난 재질을 갖춘 것을 말한다.
♣ 능운지[凌雲志]능운의 뜻은 진세(塵世)를 떠나 선계(仙界)로 가려는 마음을 말한다.
♣ 능음[凌陰]얼음을 저장해둔 곳.
♣ 능조도사하호일[菱租道士賀湖一]당(唐) 나라 때 하지장(賀知章)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가자, 임금은 그 곳의 호수인 감호(鑑湖) 일대를 하사했다.
♣ 능지[凌遲]극형(極刑)을 말한 것인데, 먼저 그 지체(支體)를 끊고 다음에 목을 끊는다. 대역(大逆)을 범한 자에게 적용됨.
♣ 능창군[綾昌君]인조(仁祖)의 친동생으로, 이름은 전(佺)이다. 광해군(光海君) 7년(1615), 신경희(申景禧)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려고 했다는 죄수 소명국(蘇鳴國)의 무고(誣告)로 인해 교동(喬桐)에 안치되었다가 죽음을 강요당하자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여 도성 동쪽 교외 밖에 황장(荒葬)되었으며, 인조 10년에 대군(大君)으로 추봉(追封)되었다.
♣ 능파라말[凌波羅襪]신선을 말함. 낙신부(洛神賦)의 “물결 위로 사뿐사뿐 걸어가니 비단 버선에서 먼지가 난다.”에서 인용하였다.
♣ 능파선[凌波仙]물 속의 신선이란 뜻으로 쓴 말이다. 수선화(水仙花)의 이칭. 능파선자(凌波仙子).
♣ 능파선자[凌波仙子]능파선자는 원래 수선화의 별칭 또는 아름다운 여인을 뜻하는 말이다.
♣ 능피[綾被]능견(綾絹)으로 만든 이불. 상서랑(尙書郞)으로서 입직(入直)한 사람에게 푸른색 비단 이불을 제공했다고 함. 《漢官典職儀》
♣ 능한산성[凌漢山城]곽산군(郭山郡)에 있는 석성(石城)이다.
♣ 능행[陵行]산으로 가다.
♣ 능화경[菱花鏡]옛날 거울의 이름으로, 뒷면에 능화 무늬를 새긴 거울이다.
♣ 니구[尼丘]공자(孔子)가 살았던 곳을 말한다. 니구는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에 있는 산 이름으로, 공자가 출생한 곳인바, 바로 공자를 가리킨다. 공자가 죽은 뒤 제자들이 유약(有若)의 모습이 공자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공자를 섬기던 예로 그를 섬기려고 하자, 증자(曾子)가 “안 된다. 강한(江漢)으로 씻은 것과 같으며, 가을 볕으로 쪼인 것과 같아서 깨끗하여 더할 수 없다.” 하였다. 《孟子 滕文公上》
♣ 니상구[泥上龜]거북은 죽어서 점치는 데 쓰여서 귀히 되는 것보다는 살아서 꼬리를 진흙 속에 끌고 다니기를 좋아한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즉 벼슬아치가 되어 속박을 받기보다는 필부로서 편히 살기를 바라는 데에 비유한 말이다.
♣ 니성위편절[尼聖韋編絶]공자가 만년에 주역(周易) 읽기를 부지런히 하여서 가죽으로 책을 꿰어 맨 것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
♣ 니조[泥詔]천자(天子)의 조칙(詔勅)을 자이(紫泥)로 봉한다.
♣ 니충[泥蟲]니충은 남해 바다에 사는 벌레인데 뼈가 없고 물 속에 있으면 활발하게 움직이다가 물 밖으로 나오면 죽은 듯이 가만히 있다 한다.
♣ 니취[泥醉]이백(李白)의 양양가(襄陽歌)에 진(晉) 나라 때 은자 산간(山簡)을 노래하여, “우스워라 산옹(山翁)이 니충처럼 취했다오.”라 하였다.《古文眞寶 前集》 니충은 남해 바다에 사는 벌레인데 뼈가 없고 물 속에 있으면 활발하게 움직이다가 물 밖으로 나오면 죽은 듯이 가만히 있다 한다. 따라서 니취(泥醉)란 술에 몹시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누워 있는 것을 비유한다.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복사가 가능토록하였으면 더욱 활용하기에 좋을텐데 좀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