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대와 단
앉는 자리 좌석은 인간 문화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좌석이라고 하면 단순한 것 같지만 여기에는 문화가 있다. 고정된 좌석이 있으면 움직일 수 있는 방석이 있다. 이를 세분하면 좌는 고정적이고 석은 유동적인 것과 매개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좌석이나 방석은 그 크기나 위치에 따라 신분과 질서를 의미한다. 윗자리 아랫자리 하듯이 그 좌석이 놓이는 위치는 질서이다 보니 의례에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다. 붓다는 붓다의 제자들에게는 가장 높은 존재였다.
그러다 보니 그 좌를 높은 곳에 축대와 같은 것을 쌓고 그 위에 좌를 놓는다. 그래서 그것이 대좌가 되었다. 대좌 위에 붓다의 상을 모셨다. 살아 있는 이들을 위해서는 대를 쌓듯이 만들어놓고 그 위에 방석을 깐다. 그곳에 앉아서 설법을 한다.
이 좌석을 놓는 대는 연화의 무늬로 석물로 많이 조성했다. 그래서 석조좌대라고 하는데, 붓다를 모시는 금당의 중앙에 석대를 만들고 불상 붓다를 모셨다. 지금은 좌대 앞에 단을 설치하고 공양물을 올리기도 한다. 수덕사나 장곡사 등에서 볼 수 있다.
요즈음 사찰은 단을 넓게 쌓고 그곳의 뒤편에 좌석을 놓거나 방석을 놓고 불상을 모시지만 옛 사찰에는 금당의 중앙에 석조좌대를 만들고 붓다의 상을 모셨다고 보인다. 라말여초에 대형 사찰 유적지 금당 구역에 좌대만 남아 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해서 좌대는 보통의 존재들과 달리 높은 존경을 받거나 높은 자리에 있음을 의미한다. 초기 대좌에 모시던 불상이 오늘날 단에서 모시는 것은 공양의식의 발달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 불교의 공양은 우리 불교 의례 개념으로 보면 운심공양이다.
마음이나 꽃에서 향기가 나오고 그곳에서 공양을 받는 존재와 공양물이 출현하여 공양되며 그 사이에 공양 올리는 재자의 몸도 그와 같이 수많은 몸과 손이 나와 수많은 붓다들에게 공양하는 운심공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운심공양의 매개는 꽃이다. 꽃은 드라비다 어로 “pu”라고 한다. 푸를 바치는 것을 우리식 말로 주는 행위는 “자 여기 있어”라는 정도이라고 할 수 있다. “꽃 자”를 드라비다 어로 표현하면 “puja: 공양"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결국 단이 없는 좌는 운심공양의 형태이고, 단은 실지 공양 올리는 모습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좌는 고정성이 강하나 단은 고정성도 있지만 임시성도 있다. 이 임시성이 우리 불교의례의 설단의식이다. 단을 설치하고 공양물을 올린다.
해서 이 설단 의식에는 불교가 수행의 종교에서 힌두교와 같은 공양과 같은 제사 종교를 겸하게 종교적 전환의 철학이 들어 있다. 옳다, 그르다 하는 데에서 벗어나면 불교 안에 있는 다양한 불교문화는 옷을 벗고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참고로 영역할 때 좌, 대, 단의 구별이다. “座 seat, 臺 table, 壇 altar” 이 마지막 단은 제단의 번역어이기도 하다. 불교의 종교성이 불교의 생명을 유지하고 확장한 것도 있고, 불교의 순수성을 감하기도 했다고 할 수 있다.
빠라미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