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율교실] ⑥ 선행의 기반은 올바른 지혜
선·악의 판단, 결과보다 의도 중시
계·정·혜 조화 이룰때 좋은의도 생겨
얼마 전 TV의 한 프로그램을 보다가 가슴이 철렁했다. 어쩌다 그리 높은 곳까지 올라가게 되었는지, 아직 어려 보이는 개 한 마리가 아득한 절벽 위에서 내려 갈 곳을 찾으며 주춤거리고 있었다. 주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몇 명의 관공서 직원들이 포획하려 애썼지만, 겁먹은 개는 더 놀라 미친 듯 주변을 맴 돌았고, 그렇게 한 시간 이상을 보내다 결국 밑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다행히 밑에 안전망을 쳐둔 덕에 아슬아슬 목숨은 부지했다. 그 장면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만약 개가 안전망에 걸리지 못하고 떨어져 죽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위험한 상황에 놓인 개를 안타깝게 여겨 살리고자 한 행위는 의심할 여지없이 선행이다.
그러나 만약 그 개가 죽었다면 이는 결과적으로 살생이라는 악행이 되는 것은 아닐까?
선행과 악행. 명확히 구별 가능할 것 같지만, 현실적으로 한 가지 행동이 과연 선행이었는지 악행이었는지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불교의 경우, 계가 선행의 구체적인 내용이 되므로, 계를 지키는 것이 곧 선행을 실천하는 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복잡하게 얽힌 우리의 삶은 곧잘 당혹스러운 상황을 만들어낸다. 좋은 의도로 시작한 일이 때로는 예상치도 못한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 어떤 기준에 근거해서 선행과 악행을 판단해야 할까?
문헌에 따라 견해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불교는 결과보다 의도나 동기를 중시하는 입장이다. 마음에 무슨 생각을 품고 한 행동인가가 그 행동의 선악을 결정하는 주된 잣대가 된다. 즉 결과가 아무리 좋다 해도 만약 악의를 지니고 한 행동이라면 이것은 절대 선행으로 간주될 수 없는 한편, 설사 결과가 좋지 못해도 만약 올바른 마음으로 다른 이의 행복을 위해 한 행동이라면 악행이라 할 수 없다.
이것은 의도만 좋으면 결과는 아무래도 좋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좋은 결과를 낳는 선행의 실천을 위해서, 우선 좋은 의도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선행의 실천을 위해 필요한 올바른 의도나 생각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그것은 사물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올바른 시각, 즉 지혜로부터 생겨난다.
『잡아함경』권28에서는, 지혜를 갖추었을 때 비로소 올바른 견해와 올바른 사유, 올바른 말, 올바른 행동, 올바른 생활, 올바른 노력, 올바른 정신통일 등을 실천할 수 있다고 한다. 여실하게 진리를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갖추었을 때, 비로소 그 지혜를 기반으로 자기 자신의 완성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생물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최선의 자비행이 실천 가능하다.
불교의 대표적 교리인 계정혜 삼학은 흔히 계·정·혜라 하여 단계적인 배움으로 이해되지만, 한편 이 세 가지는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계와 정을 실천함으로써 지혜를 얻기도 하지만, 또 진리를 이해하고 사물을 제대로 바라보는 지혜를 갖춤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계와 정의 실천이 가능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언젠가 이 세 가지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을 때, 이번에는 선과 악이라는 분별조차 잊은 채 자연스럽게 최고의 선을 실현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불교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상태이다. 마치 우리가 처음 피아노를 배울 때, 각 건반이 지니는 음색을 정확히 배워 기억하고 이를 꾸준히 연습해가다 보면, 어느 새 무의식중에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계·정·혜, 이 삼자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상태, 이것이야말로 불도 수행의 극치라 할 것이다.
日 도쿄대 연구원
[출처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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