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 명장면] 1. 제1차 결집
부처님 가르침 따라 승단의 규율 제정
본지는 2550년간 불교사의 맥을 짚을 수 있는 ‘불교사 명장면’을 마련했다. 이번 기획에서는 한국뿐만 아니라 불교가 탄생한 인도를 비롯해 중국과 일본, 티베트, 동남아시아 등 불교가 전래된 국가의 불교사 중 선별된 50 장면이 소개된다. 각 분야 전문가들의 해설을 통해, 부처님 열반 이후 벌어진 제1결집부터 한국불교의 오늘까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500명의 비구가 모여 1차 결집을 한 인도 라자그리하의 칠엽굴. 불교신문 자료사진
제1결집은 부처님 열반 직후 라자그리하(Ra-jagr.ha)에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500 아라한의 모임을 지칭한다. 일반적으로 제1결집을 통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은 경장(su-tra)과 승단의 계율을 모은 율장(vinaya)의 토대가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부처님은 스스로 발견한 가르침(dharma) 앞에서 항상 겸손했으며, 제자들에게 이러한 가르침을 의지처로 삼고 다른 의지처를 찾으려 하지 말라고 조언해왔다. 비록 제1결집의 역사성에 대한 의문들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지만, 부처님 열반 직후 남겨진 제자들 사이에서 그들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승단의 규율을 함께 모으고 정리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다고 한다면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제1결집에 관한 기록들이 빨리 율장(vinaya)을 비롯하여 한문으로 번역된 여러 부파의 율장들과 몇몇 경전 및 아와다나(avada-na) 등에서 고르게 나타나고 있는 점으로부터, 제1결집의 역사성은 초기부파불교에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우리들에게 주어진 일은 제1결집의 주요한 에피소드들이 어떤 역사성을 가지고 있으며 현대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살펴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빨리 율장을 중심으로 제1결집에 대한 서술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500여명의 비구들과 함께 빠와(Pa-va-)에서 꾸시나라(Kusina-ra)이동 중인 까샤빠(Ka-yyapa)는 한 아지비까(a-jvika)로부터 부처님의 마지막 열반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슬픔에 빠진 비구들,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비구들 사이에서 수바드라(Subhadra)는 부처님의 열반을 기뻐하며 모든 통제로부터 벗어났음으로 자유롭게 살아가자고 제의한다. 승단이 무질서해질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으로부터 까샤빠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승단의 계율을 합송하기 위한 결집을 제의하고 499명의 아라한을 선발한다. 비록 아직까지 아라한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장 잘 이해하고 기억하고 있는 아난다(A-nanda)가 추천을 통해 소집된다. 이들은 우기동안 라자그리하에 모여서 경장과 율장을 합송하기로 하고 결정하고 결집을 위한 준비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결집이 있는 날 아침에 아난다가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면서 결집이 시작된다. 결집을 주도한 까샤빠는 아난다에게 부처님이 어떤 장소에서 누구에게 어떤 주제로 가르침을 설했는지 알리게 하고, 우빨리(Upa-li)에게 부처님이 어디에서 누구에게 어떤 목적으로 승단의 계율을 정했는지 밝히게 한다. 따라서 이들의 주도로 부처님의 가르침의 모음인 경장(su-tra)과 승단의 계율의 모음인 율장(vinaya)이 합송되게 된다.
그 후 아난다는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직전에 몇몇 기타의 중요하지 않은 계율들(小小戒)을 폐기해도 좋다고 승단에 허가했었지만 자신이 구체적으로 어떤 계율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는 점을 알린다. 까샤빠는 계율들의 범위를 확정하기 어려움으로 부처님이 정한 계율은 모두 존속시킬 것을 제안하고 대중들을 동의를 얻어낸다. 그러자 결집에 참석한 아라한들 사이에서 아난다에 대한 일련의 비난이 일어나게 된다. 대표적으로 기타의 중요하지 않은 계율들에 대해 부처님께 확인하지 않았고, 부처님의 비옷 위에 발을 올려놓았으며, 부처님께 이 세계에 더욱 오래 머물러달라고 청하지 않았고, 여인들의 출가를 부처님께 간청하였다는 것 등이다. 아난다는 자신은 결백하지만 승단의 화합을 위해 지적된 과실들을 모두 시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 결집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뿌라나(Pura-n.a)존자의 에피소드와 부처님의 유언에 따라 까우샴비(Kaua-mb)의 찬나(Channa)비구에게 범단법(Brahmadan.d.a)이란 따돌림의 벌칙을 아난다가 가하는 것으로 제1결집에 대한 에피소드가 끝나고 있다.
승단화합 유지 위해 율장 필요성 대두…500 비구 ‘왕사성 결집’
多聞제일 아난다 자격 문제로 ‘고초’…엄격주의.진보적 경향 대립
빨리본을 포함한 주요한 율장들은 제1결집이 행해진 동기로서 부처님에 의해 만들어진 계율들을 무시하고 앞으로 자유롭게 살아가자는 수바드라(Subhadra) 비구의 제안을 들고 있다. 하지만 아육왕전 대지도론 등과 같은 다른 문헌들에서는 많은 아라한들이 부처님의 마지막 열반소식을 듣고 한꺼번에 열반에 들어 부처님의 가르침과 계율을 전승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남지 않을 것을 우려한 천신들이 까샤빠를 종용하여 결집이 행해진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부처님의 마지막 열반 이후에 수없이 많은 아라한들이 한꺼번에 열반에 들었다거나 수바드라 또는 우빠난다(Upa-nanda)로 불리는 어떤 비구가 실제로 그러한 폭언을 했다는 언급들에 대한 역사적 실재성을 논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이러한 이야기들의 배후에는 부처님의 마지막 열반 이후에 엄격한 계율을 완화하려는 온건주의적 경향과 승단의 화합을 훼손하는 분열주의적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러한 흐름에 대해서 승단의 화합과 결속을 유지하려했던 율장 편집자들의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율장과 아와다나 등에서 제1결집이 일어난 곳으로 라자그리하를 언급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장소로서 죽림, 영취산, 그리고 칠엽굴 등으로 다양하게 언급되고 있다. 이들 중에서 많은 비구들이 우기를 보내면서 결집을 행할 수 있었던 장소로 가장 유력하게 언급되는 곳은 칠엽굴이다. 칠엽굴은 라자그리하 온천 뒤편 자이나 사원 옆에 아직까지 남아 있으며 비록 그 입구는 좁아 보이지만 내부는 제법 넓어서 많은 사람들이 우기를 지내면서 결집을 행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결집에 참석한 사람들의 숫자는 대부분의 율장들에서 500명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 1000명 또는 3000명까지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500, 1000, 3000 등의 숫자는 결집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아난다를 마지막으로 넣으려는 배려로 보인다. 즉 제2결집인 와이샬리(Vaiali) 결집에서 꿉지따(Kubjita)는 700번째로, 까니씨까(Kanis.ka) 왕의 후원 아래 설일체유부(Sarva-stiva-dins)에서 대비바사론을 편찬하는 결집에서 와수미뜨라(Vasumitra)가 500번째로 언급되는 것과 유사하게, 아난다는 제1결집이 있는 날 아침에 돌연히 깨달음을 얻으면서 결집에 참가하는 500번째 아라한으로 언급되고 있다.
제1결집의 에피소드 중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승단의 계율에 가장 정통한 것으로 알려진 까샤빠와 부처님의 가르침에 가장 정통한 것으로 알려진 아난다의 대립이다. 대부분의 율장들에서 겉으로 나타난 이야기들을 통해 살펴보면 결집을 주제한 까샤빠는 결집 참가자격 문제로 고초를 겪어야 했던 아난다에 비해 확실히 비교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결집의 전후에 있었던 것으로 언급되는 아난다의 과실에 대한 이야기들을 통해서 아난다의 위상이 크게 약화되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까지 갖게 한다.
두 사람의 이러한 대립관계는 아난다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존하는 지법사를 대표하고 까샤빠가 승단의 계율을 보존하는 지율사의 대표하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교종과 선종의 대립이란 관점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만 집착했던 아난다가 교종을 대표하고 실천수행을 중요시하는 까샤빠가 선종으로 대표하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또 약 25년간 부처님을 수행했던 아난다가 교단내부의 온건주의적 경향을 대표하고 엄격한 두타행 수행을 했던 까샤빠가 교단내부의 엄격주의적 경향을 대표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제1결집을 전후해서 언급되고 있는 아난다의 과실과 관련해서 우리들의 주목을 끄는 부분은 이들의 대립을 교단 내부의 온건주의적 경향과 엄격주의적 경향을 대립으로 보는 견해이다. 각각의 전통마다 차이가 있지만 적게는 한가지로부터 많게는 아홉가지의 아난다의 과실들이 여러 문헌들에서 열거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그가 부처님에게 이 세계에 더 오래 머물러달라고 청하지 않았으며, 여인의 출가를 부처님께 간청했다는 점이다.
먼저 생명을 연장하는 능력이 있다는 점이 보수적인 불교교단에서 거의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음에도 이를 아난다의 과실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교주인 부처님의 죽음을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아난다가 일종의 희생양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여인의 출가를 부처님에게 간청했다고 하는 부분을 통해서 우리들은 초기불교의 교단 내부에서 여성의 지위를 문제로 까샤빠로 대표되는 엄격주의적이고 승단의 계율을 중시하는 경향들이 아난다로 대표되는 온건주의적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중시하는 경향들과 대립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초기경전에서 아난다는 항상 다정다감하고 주위의 비구ㆍ비구니들의 고민을 들어주며 교단의 살림살이에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는 이해심이 많으며 화합형의 리더로서 나타난다.
반면 까샤빠는 보수적이며 명예를 중시하고 철저한 계행을 강조하는 엄격한 리더로서 나타난다. 때때로 그의 엄격성이 너무 지나쳐서 다른 비구들에게 비난받기도 하였고 심지어는 어떤 스님이 까샤빠의 처소에 불을 질렀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지고 있다.
제1결집에 대한 기술로 보았을 때, 까샤빠를 중심으로 하는 엄격주의적인 경향이 우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빨리 율장에 의하면 아난다는 이러한 자신의 과실에 대해 ‘나는 그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당신들을 믿기에 그 잘못을 참회한다’라고 답한다. 즉 자기 스스로는 그러한 과실들이 결코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승단의 화합차원에서 그 잘못을 인정한다는 것으로, 엄격한 의미에서 진정한 참회라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이로부터 약 100~110년 후 와이샬리(Vaiali)에서 있었던 제2결집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삼보가(Sam.bhoga), 레와따(Revata), 그리고 살하(Sha-l.a) 등의 비구들이 아난다의 제자로 묘사되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제1결집의 표층적인 기술에서 나타나는 것과는 반대로 초기불교의 교단은 온건주의적이고 진보적인 경향이 엄격주의적이고 보수적인 경향에 대해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황순일/ 동국대 교수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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