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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날들 메리 올리버 (1935~ )
미국의 시인. 뉴욕 타임스에서 인정한 최고의 베스트셀러 시인이자 퓰리쳐 수상(1984년)작가 . 아버지가 교사인 가정에서 성장했으며 14살에 시를 쓰기 시작했다. ‘월트 휘트먼’과 ‘헨리 데이비드 소로’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내면의 독백, 고독과 친밀하게 지냈다는 측면에서 ‘에밀리 디킨슨’과 비교되기도 한다. 미국 시인 ‘맥신 쿠민’은 ‘소로’가 “눈보라 관찰자”였던 것처럼 ‘올리버’는“습지 순찰자”이며 자연 세계에 대한 포기할 줄 모르는 안내자라고 일컬었다. 1950년대 말 사진작가였던 남편 Molly Malone Cook을 만나 결혼했으며, 2005년 남편이 세상을 떠나기 전 까지 40년 넘게 동안 미국 북동부 해안도시인 프로빈스타운에(Provincetown) 서 함께 살았다. 현제는 플로리다에서 살고 있다.
■ 서문
산문의 방식은 너무도 많다. 설명, 권고, 도덕적 교훈, 코미디, 그리고 반짝이(다른 용도로는 너무 작고 달콤할 수도 있지만)와 그 그림자들로 활기를 얻는 환상적인 이야기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시의 마법적 장치인 행갈이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물론 산문에서도 종이 끝에서 행갈이가 이루어진다. 아, 그 진실함이란! 시의 말(馬)이 날개를 가졌다면 산문의 말은 마구를 쓰고 있다. 질 좋고 튼튼하고 편안한 마구. 나의 경우 밭을 갈기보단 나는 걸 더 좋아하지만 말이다.
시인들도 읽고 공부해야 하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몸을 기울여 속삭이고 소리치고, 춤추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아니면, 옛날 책들을 그대로 베끼는 게 낫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절대 아니다. 우리의 오래된 세상에는 늘 독보적인 표현을 할 수 있다고 느끼는 새로운 자아가 헤엄쳐 다니니까. 중요한 건 그것이다. 촉촉하고 풍성한 세상이 우리 모두에게 새롭고 진지한 반응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 세상은 아침마다 우리에게 거창한 질문을 던진다. “너는 여기 살아 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이 책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글이 시작되기 전에 한 가지 더 말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누구에게나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나에게 사는 세상에 바치는 찬사다. 이 책에서 여러분은 산문들 사이에서 시 몇 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시들은 작은 ‘할렐루야‘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 시들은 산문과 달리 무엇을 설명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저 책갈피에 앉아 숨만 쉰다. 그 시들은 몇 송이 백합 혹은 굴뚝새 혹은 신비한 그림자들 사이의 송어, 차가운 물, 거무스름한 떡갈나무다.
■ 흐름
[흐름]
M과 나는 물에서 3미터쯤 떨어진 곳에 산다. 폭풍이 칠 때 바람이 남동쪽에서 밀고 올라오면 우리는 물에서 30센티미터쯤 떨어진 곳에 산다. 물은 온종일, 밤새 노래하고 같은 노래를 부르는 법이 없다. 바람, 온도, 조수위 위치, 달의 밀고 당김이 다른 노래를 만든다. 물이 빠질 때는 물이 차오를 때보다 소리가 거칠다. 떠나기 싫어 으르렁거리듯 현 굵은 악기의 어두운 소리를 낸다. 물이 들어올 때는 쾌활한 소리를 낸다. 나는 날마다 이른 아침에 물가를 거닐 때 다시 깨어난다. 발걸음이 날렵해지고 비로소 귀가 깨어나 바다의 노래에 감사를 보낸다. 이 광대함, 이 변화무쌍한 초록과 파랑의 큰 가마솥은 지구의 거대한 궁전이다. 이 안에 모든 게 있다. 괴물들, 악마들, 헤엄치는 천사들, 물가에 선 우리와 주저 없이 시선을 교환하는 부드러운 눈빛의 포유동물들, 배와 함께 가라앉거나 배에서 짐을 내릴 때 떨어진 것들, 과거 수십 년, 수백 년 전 인공물들, 바다 밑에서 분출한 용암 덩어리들, 해조류 숲과 산호, 선반, 그리고 너무도 많은 다른 비밀들, 고래들이 기억에 담았다가 충실히 암송하는 소리들, 돌고래의 언어, 그리고 무수함 그 자체, 무수한 종류와 수의 상어, 물개, 벌레, 식물, 온갖 물고기들-대고, 해덕대구, 황새치, 남방대구, 라벤더 둑중개, 치즐마우스(잉엇과 물고기로 아래턱에 끌 모양의 날카롭고 단단한 판이 있어서 chiselmouth라고 불린다, 골드아이(은빛 청어의 한 종류로 눈에 금빛 테가 둘러져 있다), 복어, 참돔, 스타케이징(stargazing, 그대로 옮기면 별 보는 잉어라는 뜻이다), 우리가 이미 낙원에 살고 있다는 걸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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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7월의 아침, 물때가 지난 후 나는 물가를 걷는다. 밤사이에 무수한 작은 물고기들이 모래밭에 갇혔다. 일부는 아침 햇살 속에서 이미 몸이 뜨거워져 움직이지 못하고, 나머지는 아직도 꿈틀거리거나 젖은 모래 속으로 기를 쓰고 파고들거나 물로 돌아가려고 팔딱거린다. 하지만 그들은 최후의 시간을 맞이했다. 바다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달려와 스스로를 정화한 듯하지만, 그건 아니다. 물고기들은 해변에 너무 가까이 있었고 물이 너무 많이 들어왔다가 빠지는 바람에 모래밭에 남겨졌을 뿐이다. 까나리는 크지도 않고 무게도 안 나간다. 대개 7센티미터에서 10센티미터 정도 길이밖에 안 된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길이가 15센티미터에서 18센티미터까지 되는 것들도 간간이 있지만 말이다. 물가에 쌓인 까나리들은 미끌미끌한 밧줄 모양을 이룬다. 이 밧줄은 드문드문 높이가 15센티미터에 달한다. 물고기들의 올리브색 은빛 몸에 점이 촘촘히 박혀 있다. 아래턱이 위턱보다 길게 뻗어 있고, 배 부분은 색깔이 엷고, 꼬리지느러미가 있다. 눈은 그 반짝임과 동그란 모양이 환상적이다. 물고기들은 죽으면 입이 벌어진다. 고통스러운 입 속의 혀는 분홍색이고 목구멍은 좁은 반투명 통로다. 기온이 오르면서 아가미가 핏빛으로 물들고 피부는 뻣뻣해진다. 빠지는 물을 향한 마지막 몸부림이 아직 이어진다. 하지만 아무도 물로 돌아가지 못한다. 조수의 못된 장난질에 꼼짝없이 걸려드는 것이다. 한 청년이 해변을 따라 내려오며 비닐봉지에 까나리를 주워 담는다. 미끼로 쓰려는 것이다. 아직 팔딱이는 것들도, 축 늘어진 것들도 다 담는다. 이 작고 예쁜 물고기는 죽어서도 다른 물고기를, 어쩌면 큰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다시 해변에 나간다. 깨끗해진 모래밭이 창백하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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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가 우리의 주목을 끌 듯 하나의 생물이나 순간도 그러하다. 개들을 데리고 물이 많이 빠진, 그리고 아직 빠지고 있는 해변을 걷고 있는데 얕은 뭀고에서 뒹구는 게 눈에 띈다. 나는 발목까지 차는 물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고립된 아귀다. 아, 너무나도 그로테스크한 몸, 지독히도 불쾌한 입, 몸 전체 크기만큼 거대한 어둠의 문! 아귀의 몸 대부분이 입이다. 그런데도 그 초록 눈의 색깔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에머랄드보다, 젖은 이끼보다, 제비꽃 잎사귀보다 더 순전한 초록이고 생기에 차서 반짝인다. 나는 어쩔 줄을 모른다. 그 가시와 이빨투성이 몸을 선뜻 집어 들 수가 없다. 한 남자가 아이 둘을 데리고 걸어온다. 그들도 물속으로 들어와 그 불행한 물고기를 구경한다. 그 남자가 나에게 어깨에 걸고 있는 개 목줄을 빌려달라고 하더니 아귀의 육중한 몸 아래로 목줄을 넣어 아귀를 살짝 들어 올려서, 발 없는 괴상한 개를 끌고 가듯 천천히 깊은 물로 인도한다. 만새! 그 창의적인 정신과 따뜻한 마음씨에 환호가 나온다. 아귀는 거대한 입을 쩍 벌리고 초록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며 몸이 물에 완전히 잠길 때까지 허우적거린다. 그러더니 개 목줄 올가미에서 날렵하게 빠져나가 바닷속으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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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이다. 파랑새들이 하늘에서 미끄러지듯 날아다닌다. 4월이다. 고래들이 고향으로 돌아온다. 긴수염고래, 혹등고래, 희귀한 참고래가 해안에 도착한다. 만으로 들어오고, 가끔 항구로 들어오기도 한다. 그들도 우리처럼 장난을 아는지 거대하고 육중한 몸을 뒤채고, 물위로 뛰어오른다. 욥은 “그는 심해를 솥같이 끓게 하며, 자신의 뒤에 빛나는 길을 만드는도다”(욥41장)라고 말했지만 이 거구의 생명체들에게 이성과 온순함도 있음을 알지 못했던 듯하다. 고래 두 마리가 항구로 헤엄쳐 들어왔다가 한 마리가 줄에 걸리면 한께 온 고래는 줄에 걸린 동무 곁을 떠나지 않고 용감한 사람들이 작은 배를 타고 나가 엉킨 줄을 잘라 줄 때까지 남아있는다. 혹등고래의 눈은 코끼리 눈에서 볼 수 있는 어둠과 희망의 고통을 담고 있다. 혹등고래를 아는 사람들은 혹등고래의 뇌에서는 아무것도 망각되지 않는다는 걸 인정한다. 그 눈은 가장 깊은 우물보다도 깊다. 어느 늦은 봄날 M과 함께 배 갑판에 서 있는데 혹등고래 한 마리가 바로 우리 옆에서 물 위로 뛰어올라 나팔 같은 울음소리를 냈다. 녀석의 물 뿜는 구멍에서 물안개가 분수처럼 솟아올랐고 빛이 그 위에 무지개를 만들었다. 물안개는 부드럽게 솟았다가 갑판으로 비처럼 떨어져 우리 모두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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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구멍이 숭숭 뚫린 해묵은 고래 뼈가 해안으로 밀려와 방사제에 끼어 10년, 20년 닳아 없어져간다. 그곳에선 다른 흥미로운 물건들도 발견된다. 그중에는 깨진 접시 조각, 불어서 엄지손가락만 해진 볼트나 못, 낚시 미끼 같은 인간이 만든 물건도 있다. 깨지고 속이 빈 조개껍질도 수두룩한데 제일 흔한 건 모래밭에 사는 몇 가지 종류의ㅏ 대합들, 가리비, 쇠고둥, 굴이다, 아이스크림콘 벌레도 있다. 거친 록 음악 같은(완전히는 아니지만 얼마간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후 빈 껍질만 남은 아이스크림콘 벌레, 아이스크림콘 벌레가 모래로 만드는 10센티미터쯤 되는 길쭉한 깔때기 모양의 껍질은 보통 날씨에는 매우 훌륭한 요새가 된다. 이 벌레는 거꾸로 t라면서 물속으로 촉수 달린 머리를 내밀고 주위를 탐색한다. 그 이상한 집에서 살짝 빠져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편안하게 자리를 잡기도 한다. 아이스크림콘처럼 생긴 껍질은 침으로 모래알을 붙여서 만든 것으로 거의 무게가 없고 물기가 마르면 더 가벼워진다. 이음새가 보이지 않는 매끄러운 모래벽은 반투명이고 사용된 모래알들의 색에 따라 밝은 색부터 검은색까지 다양한 색상의 점들이 박혀있다. 모래알들의 크기는 놀라우리만큼 고르다. 벌레가 그만큼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집에 가져온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혹은 실수로 건드려져 분해된다. 그러면 낡은 모슬린 색깔의 모래 한 줌 외에 무엇이 남을까? 배열, 그리고 그 배열을 만든 에너지가 전부다. 하지만 각자가 세상의 일부이기도 하다. 나는 그것들을 도로 물가에(영원히 재사용할 수 있는 물질들로 이루어진 흙더미에) 가져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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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운 건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난 그것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세상에 주어야 할 선물은 무엇일까?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습관, 다름, 그리고 머무는 빛]
1.
균형 잡힌 삶을 사는 데는 습관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신앙심 깊은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습관을 옷처럼 입고 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요한 일보다는 사소한 일에 습관적으로 행동할 때가 많다. 더 심각하고 흥미로운 일,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더 복잡한 일은 하루 더 기다리는 경우가 많지만 단순한 문제들은 바로 처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습관을 통해, 그 현명한 도움을 통해 스스로를 아주 훌륭하게 개선 할 수 있다. 하지만 습관은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기보다는 우리를 지배한다고 볼 수 있다. 숲속의 새나 산언덕 위의 여우는 사소한 것을 위해 중요한 것을 포기하는,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다. 그들에게도 습관은 옷 같은 것이며 사실상 신체 생활의 구조 그 자체다. 생명 유지를 위해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영원히 못하는 것이다. 짝짓기, 둥지 만들기, 가족 부양하기, 이주, 겨울에 더 따뜻하게 무장하기, 이 모든 일들이 제때에 정성을 다해 이루어진다. 이 일들에는 생명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장난스러움, 우아함, 유머도 들어 있지만 말이다. 또한 나무는 잎을 억제하지 않고 때가 되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돋아나고 스르르 떨어지게 한다. 물도 어느냐 마느냐를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다. 온도의 법칙에 맡긴다. 신앙심 깊은 사람들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가서 무릎 꿇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고 기도하며, 커피 한잔 하거나 긴급 뉴스를 듣거나 영화를 끝까지 보기위해 기도 시간을 미루지 않는다. 습관이 그들의 삶이 된 것이다. 그런 정해진 기도 시간을 제약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들에겐 그 시간이 내면의 삶을 살찌우는 기회다. 그 시간은 기도의 시간으로 정해지고 이름 붙여진 주님의 시간이다. 기도 시간에 그들은 안달복달하는 삶을 초월한다. 듦과 기발함은 달콤하지만, 규칙성과 반복 또한 우리의 스승이다. 신에게 집중하는 일은 무심히 행할 수도 없고 베니스나 스위스를 여행하듯 한 철에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설령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도 거기에 얼마나 집중할 수 있겠는가? 화려할 수도, 소박할 수도 있지만 정확하고 엄격하고 친숙한 의례가, 습관이 없다면 신앙의 실재에(하다못해 도덕적인 삶에라도) 어떻게 도달할 수 있겠는가(애매하게 말고)? 우리 삶의 양식은 우리를 보여준다. 우리의 습관은 우리를 평가한다. 우리가 습관과 벌이는 싸움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꿈들을 말해준다. 나는 헌신과 유머, 둘 다에 진지한 여우가 되 고 싶다. 기나긴 겨울에 육중한 문을 닫는, 용감하면서도 순응할 줄 아는 연못이 되고 싶다. 하지만 아직은 그런 빛나는 삶에, 순백의 행복에 도달하지 못했다. 아직은.
2
M과 나는 40년 넘게 다름으로 서로를 괴롭혀왔다. 하지만 다름은 삶의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M은 나무에는 거의 눈길도 안 준다. 그녀는 고속 모터보트를 갖고 싶어 한다. 나는 모래밭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며 몽상에 젖고 싶어 한다. 장미꽃들의 얼굴에서 어떤 정령이 밖을 엿보고 있나 확인하고 싶어 한다. 몇해전,M은 비행교습을 받았다. 나는 오후에 항구 가장자리에서서 그녀가 바다 위에서 소형 비행기를 실속시키는 걸 지켜봐야했다. 실속이란 엔진을 끄고 비행기가 코부터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행기가 떨어지는 동안 다시 엔진을 켜고 수평을 잡은 다음 쏜살같이 날아간다. 여러 주 동안 M은 내가 야생 백조를 봤을 때 짓는 얼굴을 하고 집에 돌아왔다. 그건 끔찍하면서도 경이로웠다.
[세 개의 역사와 벌새 한 마리]
■ 워즈워즈의 산
[워즈워즈의 산]
그는 호수에 가서 작은 배를 빌려 노를 저어 물 위로 나갔다. 처음엔 달빛과 고요한 물을 가르는 노 소리가 주는 즐거움에 흠뻑 빠졌다. 그러다 갑자기 가까이 있는 친근한 상봉우리가 그의 마음과 눈에 섬뜩한 유연성을 보였다. 우뚝 솟은 험하고 육중한 바위 봉우리가 그를 인식하고 물을 향해 기울어져 그를 뒤쫓는 듯했다. 그는 겁에 질려 정신없이 노를 저어 도망쳤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문지방들을, 별을 보러 나가거나 온기와 가족을 찾아 돌아오는 집들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집은(들보와 못이 아닌, 존재 그 자체로 이루어진 집은) 전부 흙으로 되어 있고 문도 없다. 바다나 별들, 기쁨이나 비참함, 희망, 나약함, 탐욕 이외의 주소도 없다.
우주가 무수히 많은 곳에서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아름다운 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그러면서도 우주는 활기차고 사무적이다. 우주가 우리를 위해서나 우리의 발전을 위해서 그 섬세한 풍경들을 보이고 괴력을 과시하고 인식을 하는 건 분명 아니다. 그럼에도 그 억양들은 우리에게 최고의 활력소가 된다. 우리가 그것들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말이다. 우주에는 빛나는 암시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로든 우리 마음은 세상의 모습과 행위들을 도덕성과 용기로부터 분리할 수 없으며, 모든 관념은 실체에 표현됨으로써 그 힘이 강화된다(창조되는 건 아니라고 해도). 우리는 나비에서 거듭거듭 초월이라는 관념을 본다. 숲에서는 무기력함이 아닌 야심을 본다. 영원히 떠나고 영원히 돌아오는 물에서는 불멸을 체험한다.
[개 이야기]
개는 저 앞에서 들판 수풀에 주둥이를 박고 있다. 이윽고 내가 그곳에 닿았을 때는 갓 태어난 새끼 들쥐가 개의 목구멍으로 사라지고 있다. 개는 내 기분을(칭찬을 할지, 재미있어야 하는지, 못마땅해 하는지) 살피려고 눈알을 위로 굴리지만 나는 그저 가볍게 머리를 만져주고 내처 걷는다. 판단은 스스로 내리라고. 들쥐들은 수풀 깊숙이 찻잔 모양의 두툼한 둥지를 지어놓고 거기서 무수한 굴들을 따라 샛강으로 가기도 하고 멍든 사과나 박하 잎, 월귤을 가지러 과수원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러곤 둥지에서 찍찍거리며 고물대는 새끼들에게로 서둘러 돌아간다. 하지만 그 새끼들은 벤의 어금니에 우적우적 씹혀 변형을 향해 어둠과 산酸으로 이루어진 통로를 내려간다. 나는 새끼들이 잘 씹혔기를 바란다. 집에 돌아온 벤은 걸신들린 것처럼 먹어댄다. 밥그릇에 얼굴을 박고 숨도 제대로 안 쉬면서 싹 먹어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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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개에 대하여, 우리는 개처럼 밤의 깊은 어둠을 세세히 파헤칠 수는 없다. 어둠 속에서 수풀을 헤치고 나아가는 무수한 존재들을 개처럼 낱낱이 구분할 수가 없다. 생쥐, 들쥐, 밍크, 여우 발톱, 그리고 여우의 가느다란 오줌 줄기, 풀잎에 달라붙은 오줌방울들, 그 투명한 금빛 목걸이, 그리고 토끼- 그 발 냄새, 체액, 털 한 올, 흰 꼬리 아래 선腺에서 나오는 울음소리, 배설물 한 방울, 여기저기 떨어지는 검은 진주들. 나는 벤이 젖은 땅에 찍힌 사슴 발자국에 세심하게 코를 대고 무엇엔가 귀 기울이듯 눈을 감는 걸 본 적이 있다. 그가 듣는 건 소리가 아닌 냄새였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냄새의 거칠고 높은 음악. 오늘 밤 벤이 마당을 달려가고 베어가 그 뒤를 따른다. 그들은 들판으로 사라져버린다. 실크 띠처럼 부드러운 바람이 집을 감싼다. 나는 개들을 따라 들판 끝까지 가서 숲 가장자리의 키 큰 소나무에 앉은 칡올빼미의 울음을 듣는다. 올빼미는 밤새 거기 앉아 울음소리를 내다가 이따금 파리한 날개를 펼치고 나방처럼 풀 위를 날 것이다. 올빼미가 날아가자 벤과 베어가 고개를 들고 구경한다. 들쥐도 조약돌 같은 조그만 심장으로 그 소리를 들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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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작은 흰 개는 무슨 기운이 넘쳐서 무얼 그리 즐기려고 진흙길에서 웅덩이마다 뛰어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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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들은 불변의 야행성을 지니고, 어떤 것들은 온순하게 길들여진다. 호랑이는 야생적이다. 코요테, 올빼미도 그렇다. 나는 길들여졌고 여러분도 그렇다. 야생적인 것들이 변하는 경우도 있지만 겉보기에만 길들여진 것이지 진짜 달라진 건 아니다. 그러나 개는 그 두 세계에 다 속한다. 벤은 헌신적이며 우리 사이에 문이 있는 걸 싫어한다. 우리와 떨어지는 걸 두려워한다. 우리뿐만 아니라 개 친구도 있으며 오랫동안 그 친구에게도 충실했다. 날마다 두 녀석은 다른 개 몇 마리와 시끄럽게 어울려 다니며 피비린내 나는 놀이를 하기도 한다. 개는 순하다가도 그걸 잊는다. 개는 약속을 하지만 그걸 잊는다. 목소리들이 개를 부른다. 늑대 얼굴들이 꿈에 나타난다. 벤은 수풀이 놀랍도록 우거진 곳이나 불모의 땅을 달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가 한 번도 보지 못한 곳들이다. 깊은 잠에 빠진 벤의 발이 경련하고 입술이 실룩거린다. 개는 꿈에서 덤불을 헤치고 나는 듯 달리고 좁은 굴을 따라 땅속으로 들어간다. 거기가 집이다. 개는 잠이 개면 동요한 눈빛이지만 우리가 이름을 부르면 어렴풋이 알아듣는다. 우리를 보고 얼마나 기뻐하는지, 그 기쁨을 표현하려고 조그맣게 재채기를 한다. 그러나 아! 서서히 물러나며 희미해지는 꿈에서는 다시 그곳에, 자연의 지배를 받는 바위투성이의 순수한 근원에 존재한다. 그곳에서 다시 야생동물이 되어 그런 삶밖에는 모른다. 다른 가능성을 모른다. 나무들과 개들과 흰 달, 둥지, 가슴,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젖의 세계! 굴 끝에는 털이 무성한 사나운 존재가 버티고 있다. 아버지로 알려진 자, 자신이 나중에 자라서 될 용사. 개는 약속하지만 곧 잊어버린다. 그걸 탓할 순 없다. 울퉁불퉁한 입에서 이빨이 번쩍거린다. 등뼈를 따라 털이 곤두선다. 다리 하나를 들고 빛나는 물안개를 뿌린다. 돌 위에, 죽은 두꺼비 위에 혹은 누군가의 모자 위에, 개는 주인이 무얼 요구하는지 알고 거기 부응하려고 애쓴다. 그렇게 오랫동안 착하게 살다가 잊어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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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질주하는 삶은 몹시도 짧다. 개들은 너무 빨리 죽는다. 내게는 그에 대한 슬픈 사연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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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가 찬양하고 싶은 건 개의 상냥함이나 얌전함이 아니라 야생성이다. 개는 야생성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고, 그건 우리에게도 득이 된다. 야생성은 우리의 고향이기도 하며, 우리는 걱정거리와 문제들을 지닌 현대로 질주해 들어오면서 우리가 지키거나 복구할 수 있는 근원과의 훌륭한 연결 장치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자유로이 뛰어다니는 개들이 나무라면, 평생 목줄에 묶여 얌전히 걸어 다니는 개들은 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개들은 인간의 소유물, 인생의 장식품밖에 안 된다. 그런 개들은 우리가 잃어버린 광대하고 고귀하고 신비한 세계를 상기시켜주지 못한다. 우리를 더 상냥하거나 다정하게 만들어주지 못한다. 목줄에 묶이지 않은 개들만 그걸 해줄 수 있다. 그런 개들은 우리에게만 헌신하는 게 아니라 젖은 밤이나 달, 수풀의 토끼냄새, 질주하는 제 몸에도 몰두할 때 하나의 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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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들이 없다면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완벽한 날들 - 전문]
산은 산이다. 모든 햇살 눈부신 여름날에 산은 지극히 한결같다. 가을의 숲도. 길고 푸른 나날에 늘 똑같다. 호수도, 그 에너지들이 눈에 보이는 확실한 습성 속에서 움직이는 바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 그렇다면 오돌도돌한 알갱이들로 이루어지고, 잎이 무성하고, 액체인 세상은 얼마나 단순한 곳인가! 움직임의 거장 아이올로스만 아니라면 말이다.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는 자신의 동굴에 바람들을 가두었다가 기분 내킬 때마다 세상으로 날려 보내서 하나의 세상이 아닌 수천 개, 수백만 개의 세상을 만든다! 우리가 쓰는 날씨라는 말은 과거 어느 시기에 바람 혹은 공기를 뜻하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어떤 바람이 찾아오는가? 속삭이는 바람, 아니면 울부짖는 바람? 짓밟는 바람, 아니면 봄의 부드러운 손길 같은 바람? 그건 올바른 확실성들 사이의 변화 의 매듭, 고요를 뒤흔들어 광란 상태로 만들었다가 다시 그지없는 행복의 상태로 돌아가게 하는 촉매제다. 나는 최소량의 날씨를 선호한다. 아주 조금이면 된다. 최고의 날씨는 날씨가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워즈워즈처럼 바다보다는 호수가, 의 눈 덮인 험한 산봉우리보다는 사색에 잠기고 작품도 구상할 수 있는 길고 쉬운, 산책이 좋다. 나는 최고 날씨의 작고 유익한 움직임들이 좋다. 그것들은 장엄한 움직임이 아니다. 폭풍우, 사이클론, 홍수, 빙하, 산사태처럼 뉴스거리가 되고 영웅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 아니다. 셸리(Percy Bysshe Shelley. 조지 고든 바이런, 존 키츠와 함께 영국의 낭만주의 3대 시인으로 불린다)가 몽블랑에 대해, 그 무시무시한 풍경과 끊임없이 재배열하고 다듬는 바람들에 대해 많은 작품들을 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자신은 거기서 안전한 거리를 두고 있어서 펜은 잉크가 마르지 않고 종이는 젖지 않고 정신은 사색에 몰두할 수 있었다. 흥분의 옹호자들도 있지만, 나는 2년 전인 3년 전 여름에 베닝턴의 토네이드를 놓친 걸 애석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때(보도에 의하면) 하늘은 섬뜩한 초록으로 변하고 숲과 길가 나무들이 전장의 병사들처럼 쓰러졌다고 한다. 문제는, 삶에서든 글쓰기에 있어서든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혹독한 날씨는 이야기의 완벽한 원천이다. 폭풍우 때 우리는 무언가 해야만 한다. 어디론가 가야만 하고, 거기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기쁨을 느낀다. 역경, 심지어 비극도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고 스승이 된다. 우리 모두 도전과 용맹을 찬양한다. 바람 없는 날 단풍나무들이 천개를 길게 드리우고 푸른 하늘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을 때, 어느 향기로운 들판에서 불기 시작한지 한 시간도 안 된 바람이 살그머니 우리를 스치고 지나갈 때, 우리가 하는 건 무엇인가? 너그러운 땅에 누워 편안히 쉬는 것이다. 그리고 잠이 들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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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이른 아침에 산책을 마치고 숲에서 벗어나 환하게 쏟아지는 포근한 햇살 속으로 들어선 아주 평범한 순간, 나는 돌연 발작적인 행복감에 사로잡혔다. 그건 행복의 바다에 익사하는 것이라기 보단 그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에 가까웠다. 나는 행복을 잡으려고 애쓰지 않았는데 행복이 거저 주어졌다. 시간이 사라진 듯했다. 긴급함도 사라졌다. 나 자신과 다른 모든 것들 간의 중요한 차이도 다 사라졌다. 나는 나 자신이 세상에 속해 있음을 알았고 전체에 속박되어 있는 것이 편안했다. 그렇다고 세상의 수수께끼를 푼 기분을 느낀 건 결코 아니었고 오히려 혼란 속에서 행복할 수 있었다. 여름 아침, 그 평온함, 내가 서 있는 풀밭은 떨림조차 거의 없지만 위대한 일이 행해지고 있다는 느낌, 아주 평범한 순간이었고 흔히 말하는 신비 같은 건 전혀 없었다. 환각도, 특별한 것도 없었고 하나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나뭇잎들과 먼지와 지빠귀들과 되새들과 남자들과 여자들에 대한 갑작스러운 인식만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을 결코 잊을 수 없었고 그 후로 몇 해 동안 그 순간을 토대로 많은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내 이야기에는 산이나 계곡, 눈보라, 우박 혹은 세상을 할퀴고 지나가는 송곳 바람이 들어 있지 않다. 나의 희귀하고 경이로운 인식은 그런 분주한 시간에는 찾아오지 않는 듯하다. 날씨에 관한 이야기들은 폭풍이나 악천후를 만난 일, 얼음 덮인 좁은 산길을 기어오르거나 반쯤 언 늪을 건넌 것에 대한 내용이기 쉽다. 나는 그 반대되는 내용을 특별하게 만들어서 그런 이야기들의 가치를 떨어뜨릴 생각은 없다. 악천후 속에서 개인 의 정신과 우주의 교감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감히 내 의견을 말하자면, 그런 교감은 푸른 하늘의 축복 아래 햇살 가득한 세상이 평온을 구가하고 바람의 신이 잠들었을 때, 그 조용한 순간에 몰입하는 사람에게 일어나기 쉽지 않을까 한다. 그런 때 우리는 모든 겉모습과 부분성의 베일을 들추고 그 속에 숨겨진 걸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태양의 장미꽃잎들 속에 서서 바람이 벌의 날개 아래서 졸면서 내는 소리보다 크지 않게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 가장 강력한 가정에(심지어 확실성에까지)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평온한 날씨도 엄연히 날씨이며 보도할 가치가 있다.
[황무지 : 엘레지]
몇 해 전부터 공식적으로 가동을 멈춘 우리 시의 쓰레기 소각장에선 버려진 박하나무와 라즈베리가 자갈투성이 땅에 다시 뿌리를 박고 자랐다. 사과나무 두 그루가 꽃을 피우고 해마다 울퉁불퉁한 초록 열매를 20킬로그램씩 생산했다. 블랙베리가 언덕들을 타고 오르거나 내려가며 자라고 엉겅퀴, 비누풀, 영구화, 미역취, 야생 당근이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그 다음엔 많은 씨앗을 맺었다. 울타리의 인동덩굴이 몇 송이 분홍 장미를 향해 물결쳐 올라갔다.
여름이면 검은 뱀들이 크림색 인동덩굴 꽃들과 분홍 장미들 사이를 소용돌이치듯 기어갔다. 풀밭을 걷다보면 뱀들의 검은 얼굴이 이국적인 꽃처럼 나타났다. 거의 항상 두 마리였고 가끔 세 마리일 때도 있었다. 한 마리는 눈이 석류석 색이었다. 그 뱀은 인사는 안 하고 한참 동안 가만히 나를 응시하기만 했다. 그 뱀들은 용감했다. 이따금 두 마리가 양지 바른 돌 위나 낡은 아스팔트 싱글 무더기에서 자다가 내가 다가가면 한 마리가 달려와 나에게 몸을 날린 후에야 먼저 도망친 짝을 따라 장미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상자거북들이 여기 둥지를 틀었고 , 비단거북들도 그랬다. 언덕 정상 아래에 있는 얕은 연못들에서 늑대거북들이 가죽 같은 창백한 알을 낳기 위해 기어 나왔다. 너구리들이 그 알들을 노리고 있다가 거북이 알을 낳고 느릿느릿 떠나기 무섭게 알들을 약탈했다. 여우들이(그리고 여름에는 붉은 옷을 입은 사슴들이)우아한 발자국을 남겼다. 눈에 금테를 두른 두꺼비도 늘 여기 있었다. 그리고 근처의 그늘진 장소에 서늘하게 빛나는 진귀한 풀산딸나무가 있었다.
■미를 추구하는 예술가들
[에머슨 : 서문]
품위를 잃은 글은 중요성을 잃는다. 더욱이 영감을 주면서도 절도를 지키는 글을 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표현의 불꽃들은 잘 다듬어진 글 속에서 합리적으로 부드럽게 나아가다가 갑자기 도약한다. 시인이 운율에 의지하듯 그는 금언에 의지하며, 결론에 도달하지 않고 정지하여 독자 스스로 결론을 향해 나아가도록 현명하게 밀어준다. 그의 글은 화려한 웅변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알차고, 원숙하고, 씨앗과 가능성이 가득하다.
[호손의 <낡은 목사관의 이끼>]
[일곱 박공의 집]
■ 먼지
[먼지]
1.
M은 모든 걸 간직하려 든다. 봉투 하나도 개인의 이름, 주소(손으로 쓴 것이면 더욱 더), 우체국 소인, 우표가 있는 것이면 꼭 간직한다. 빈 봉투라도 말이다. M에겐 봉투가 비었다고 해서 쓸모가 없어지는 게 아니다. 물론 그 안에 뭐가(편지! 아, 행운이라도 따른다면 사진!) 들어 있다면 더 좋겠지만 그런 보물과 기쁨이 없어도 봉투는 소중히 간직해야 할 수수께끼의 일부다. 봉투 안에 뭐가 들었었고. 누구에-게 무슨 이유로 보내온 것이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지 에 대한 수수께끼,M은 탐정인 동시에 수호자다. 그녀는 이제는 사라진 모든 이야기들을 안다. 바람에, 세월에, 무심함에 흩어져버린 이야기들, 버려진 책상의 뒤쪽 칸막이나 없어진 협회 서류철, 만 도시들에서 여름에 중고 가정용 품 세일에 나왔다가 결국 1달러에 혹은 노래 한곡에 팔려 누군가의 차에 실려서 떠나간, 아니면 그 길고 따뜻한 하루가 다 가도록 안 팔려서 도로 계단으로 끌고 올라가 다음을 기약하며 낡은 헛간 처마 밑에 던져진, 축 늘어진 갈색 상자 속에 묻혀버린 이야기들. M은 그 이야기들에 무관심할 수가 없다. 편지뿐만 아니라 물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헌 옷들, 모자들, 변색된 자국이 줄무늬처럼 이어진 거울들. 너무 낡고 건조해서 기를 쓰고 습기를 빨아들여 다시 바싹 마르긴 했지만 잔뜩 부풀어서 영원히 닫히지 않는 책들, 시폰, 레이스, 멍든 벡벳, 옆에 작은 단추들이 줄지어 달린 신발. 이름을 댈 수 없는 얼굴들이 내다보고 있는 사진들.(그 얼굴들이 하는 말을 절대로, 다시는 들을 수 없는.)
2.
겨울 아침, 나는 5시나 그 전에 계단을 내려온다. 하늘은 검지만 오래가진 않는다. 나는 커피를 끓이고 창문마다 다니며 블라인드를 올리고 밖을 내다본다. 분홍, 귤색, 라벤더색 빛이 동쪽 수평선을 딸라 돌진하다가 안개처럼 하늘로 기어올라 어둠의 안쪽 모퉁이에서 바르르 몸을 떤다. 우주의 은밀한 곳! 색깔들이 물속으로 흘러들고 모든 것이 푸르게 변한다. 미국 오리들이 바위들 근처에서 첨벙거린다. 겨울이 된 지금까지도 많은 오리들이 다정히 짝을 이루고 있다. 흑기러기 떼가 지나간다. 우아한 작은 기러기들, 빛이 점점 더 강해지고 하얘진다. 태양이 주저하다가 물 위로 솟아오르면서 분홍빛과 붉은빛이 희미해진다. 갈매기들이 이미 공중에 있다. 봄에도 이 해돋이는 계속될 것이다. 정원의 푸른 붓꽃과 당아욱 너머로 깔깔대는 갈매기들이 봄의 검은 얼굴을 하고 집 옆을 날아갈 것이다. 개꿩들이 옅은 물에서 먹이를 쪼아 먹을 것이다. 4월이면 가끔 혹등고래들이 거대한 몸을 뒤채며 항구로 헤엄쳐 들어온다. 돌고래들도 파도 사이로 뛰어오르며 들어온다. 바다검둥오리들이 집 가까이까지 온다. 참솜깃오리와 눈빛이 온순한 바다꿩들도 어느 아침, 아비새 한 마리가 우리 집 바로 앞에 나타난다. 녀석은 작은 어뢰처럼 맑은 물을 가르며 돌진한다. 여름이면 제비갈매기들과 오후에 먹이를 찾아 모여 연신 물속으로 다이빙, 다이빙한다. 물에서 올라올 때 두 날개가 흰 꽃잎 같다. 새는 상승의 리듬을 깨며 날개를 빠르게 한 번 흔들어 물을 털어낸다. 물론 폭풍도 찾아온다. 집 전체가 흔들리고 파도가 테라스까지 밀려들고 바람이 휘몰아치면, 바다의 편이 되는 게 좋다. 안 그러면 두려워지니까. 늦여름이 되면 작은 돔발상어 한두 마리가 종종 우리 가까이로 헤엄쳐 온다. 백조 한 쌍이 온 적도 있다. 여름이 지나가고 긴 가을, 그리고 겨울이 다시 우리 곁을 찾아오면 ㅈ마시 우리 것이 된 이 낡고 기울어진 바닷가 집에서 우리의 일을 하면서 깊고 느린 숨을 쉰다.
3.
25년 만에 처음으로 침대 옆에 작은 발판이 없다. 그걸 밟다가 발가락이 부러지곤 했는데, 작은 개들이, 처음엔 재스퍼가, 그 다음엔 베어가 떠났다. 상실은 정리하는 역할을 한다. 있던 게 없어지는 거니까. 소중히 여기고, 걱정하고, ㄷ오정하고, 위안을 얻을 지각력 있는 ㅅ애물체가 하나 없어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곁을 떠난 베어는 어디 있을까? 우리는 흰 구름을 유심히 본다. 조만간 저 하늘에서 무심하고 평온하게 흘러가는 베어를 보게 될 것이다. 전능의 신들은 떠도는 먼지로 얼마나 풍요롭고 화려한 세상을 창조했는가! 비단 같은 흑기러기, 시폰 스카프, 편지, 빈 봉투, 미국오리, 낡은 신발, 떠나간, 떠나 가버린 조그만 희 개. 우리 삶의 모든 음악은 그것들 안에 있다. 신들은 행위하고, 우리는 그 행위의 목적은 알지 못하지만 이것만은 안다. 세상은 우리의 깊은 관심과 소중히 여김의 소용돌이와 회오리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 하늘의 신도 그러하고 강의 신도 마찬가지다. 금칠한 대성당의 신뿐만 아니라 초록 들판(사람들이 무심코 걸음을 멈추고 서로 사진을 찍어주는, 개똥지빠귀들이 어둠속에서 노래하는, 작은 개들이 짖어대며 깡충거리다가 귀를 뒤로 젖히고 우리를 향해 기쁘게 달려오는)의 신도 마찬가지다.
[위안]
비는 찾아오는 장소에 따라 다른 목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이곳 항구에, 넘실대는 모래 언덕에, 소귀나무에 내리는 빗소리는 저지대의 더 풍성한 빗소리나 심지어 옥수수 밭의 빗소리와도 다르다. 나는 여러 해 동안 빗속을 걸으며 이 좁은 곶의 빗소리를 뼛속 깊이 간직해 두었다. 어디서든 어둠 속에 누워 빗소리를 들으면 내가 집에 있는지 다른 데 있는 지 알 수 있다. 밤에 걸으면서도 리틀 시스터 연못의 윤기 나는 어깨에 떨어지는 빗소린지, 더 길게 뻗은 해치스 항구에 음산하고 활기차게 내리는 빗소린지 알 수 있다. 그런 때 나는 그 물의 몸체들을 생각하며 마음의 방랑을 떠난다. 나는 기쁨과 생산적인 찬미로 나를 가득 채웠던 사건, 시간, 생물체 들을 100가지쯤 댈 수 있다. 체험! 체험! 비, 나무들, 그런 모든 것들과의 체험은 내게 위안과 겸허함, 세상의 모든 산에 묻힌 모든 금과도 바꿀 수 없는 일체감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처음엔 단순한 기쁨만을 느끼다가 생각을 하고 신념을 갖게 되었다. 세상이 제공하는 그런 아름다움에는 위대한 의미가 있으리란 신념, 그리하여 나는 세상이 사실적일 뿐 아니라 상징적이기도 하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밀과 백합이 자라는 것처럼 확실하게, 세상은 우리에게 고결한 꿈을 준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날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참을성 있는 초록 얼굴을 가진 거북을 만날 때마다, 매가 날아가며 내는 금속성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연못에서 노는 수달들을 지켜볼 때마다, 나는 피와 뼈로 이루어진 존재지만 특별한 체험과 생각에 의한 신념들의 집합체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신념들을 빚어내는 건 세상에서의 시간(거칠든 온화하든 충분히 친밀하고, 시적이고, 꿈같고, 단호하고, 사납고, 애정 깊고, 삶을 빚어내는)이다. 아침이 가까워지면서 빗줄기가 약해졌다. 나는 옷을 입고 서둘러 세상으로 나갔다.
[집]
나는 평생 내면의 가장 심오한 생각들과 감정들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빛나는 교감의 도움을 받아왔다. 그 교감은 바로 내 마음과 풍경(물질계, 그중에서도 특히 세월과 함께 내게 친숙해진 부분)의 관계다. 내 교감의 대상은 나이아가라나 열대우림, 사하라 같은 거창한 풍경이 아니다. 하지만 아름답고, 비바람이 칠 때면 오대호 못지않게 활발히 물결친다. 이 풍경은 사소한 전환, 반짝이 장식, 일상적인 변화로 기쁨을 제공하는 데 전념하는 듯하며, 실제로 그렇다. 나는 그 항상성, 법칙들에 대한 준엄한 복종에서는 상상이란 걸 할 수 없고 이해는 더욱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더 귀중한 동반자다.
겉으로 보면 나는 습관을 거의 바꾸지 않고 산다. 내 친구들이 멀리서 나를 보고 이런 말을 하지 못할 날이 없다. “저기 올리버가 아직 잡초 밭에 서 있군. 아직 노트에 뭔가를 끼적이고 있군.” 하지만 속으로는 떨기도 하고 반짝이 장식처럼 빛나기도 한다. 나는 불안해하며 관념들에 대해 읽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저 관념에 머문다. 정신적 완성에 이르기 위해 책을 던져버린 시인에 대해 읽는다. 그러나 나는 책들을 버리지 못한다. 나는 동요한다. 정신을 집중하고 조금 일어나 균형을 잡기까지 하지만, 도로 무너져버린다.
그게 나고, 이런 식으로 산다. 나는 날마다 내 풍경 속을 걷는다. 늘 똑같은 들판, 숲, 창백한 해변, 늘 푸른빛으로 즐겁게 넘실대는 바닷가에 선다. 늦은 여름 오후, 보이지 않는 바람이 거대하고 단단한 똬리를 틀고, 파도가 흰 깃털을 달고 해변을 향해 달려와 소리 지르며, 고동치며 마지막 상륙을 감행한다. 나는 그런 순간들을 기억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수히 목격했다. 여름이 물러가고, 다음에 올 것이 오고, 다시 겨울이 되고, 그렇게 계절은 어김없이 되풀이 된다. 풍요롭고 화려한 세상은 우주 안에서 그 뿌리, 그 축, 그 해저로 조용히 그리고 확실히 흔들리고 있으니까. 세상은 재밌고, 친근하고, 건강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상쾌하고, 사랑스럽다. 세상은 정신의 극장이다. 하나의 불가사의에 지극히 충실한 다양함이다.
우리의 스승이 되어주는 건 우리에게 친숙한 것이지 일반적인 게 아니다. 사랑의 관념은 사랑이 아니다. 바다의 관념은 소금도, 모래도 아니다. 물개의 얼굴은 관념에서 솟아올라 우리를 바라보고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사건과 함께 풍성해지고 즐거워져야만, 비로소 생각이 시작될 수 있다.
[내가 사는 곳]
나는 먼 대륙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그건 상관없다. 나는 1960년대에 처음 프로빈스타운을 보고 이곳의 주민이 되기로 결심하며 여기 아무리 오래 살아도 날마다 푸른 망망대해를 바라보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 도시에 온 지 벌써 43년이 되었다. 올해는 모든 도시들에게 힘겹고 고통스러운 해였다. 그래도 여전히 사과는 아삭아삭하고 단단하다. 내가 매일 아침 걷는 솔숲에는 버섯이 풍년이고 그 버섯들은 반짝이는 비늘 같은 소나무들 사이에 독창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나는 버섯을 따서 저장한다. 겨우내 우리의 식량이 될 것이다. 야생 크린베리도 구불구불한 늪들에 지천으로 열려 반짝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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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눈에 있는 것만큼 마음에도 있으며 따라서 슬픈 사건은 멀어진다고 해서 지워지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나는 이곳이 다른 대부분의 장소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이 곶, 특히 내가 사는 프로빈스타운 주민들은 인내심이 많고 변화에 개방적이다. 물론 과거에 대한 애착도 많고 오래된 건물을 허물거나 길을 새로 내거나 나무들을 잘라낼 때 분노의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기도 하지만 결국 견해 차이를 충돌 없이 수용하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성향이 승리한다.
가을은 몇 주밖에 머물지 않는다. 화려한 색깔로 휴식을 취하다가, 도시 뒤쪽 연못들처럼 검어진다. 제비갈매기들이 떠난다. 흰 모자를 쓴 후안 파도들이 다시 꿈틀거리며 깨어나 더 춥고 힘든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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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을날 나는 숲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와 우편물을 가지러 시내로 차를 몰고 나간다. 시에서 나온 직원들이 주차금지 표지판들을 철거하고 있다. 낯익은 얼굴과 목소리들, 몇 사람은 내가 40년 전부터 알고 지낸 프로빈스타운 주민들의 아들들이다. 작업을 마친 트럭이 떠난다. 늦은 오후, 아직은 여리고 고요하기만 한 어둠의 기운이 허공에 감돈다. 우체국 계단을 내려오는데 거기까지도 모레가 날아와 발에 밟힌다. 무수한 상점 진열장들과 레스토랑 문들, 화분들, 100년 동안 변함이 없거나 새로 멋지게 단장한 집들을 지나 서쪽으로, 동쪽으로 길게 뻗은 거리가 잠시 텅 비어있다. [Review]
시인은 산문도 시처럼 쓴다. 문장하나하나에 시인의 섬세한 마음이 들어있어서 참 따뜻한 글이라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시가 큰 바다를 바라본다면, 산문은 그 안에 살고 있는 무수한 수의 생물들 상어, 물개, 벌레, 식물, 온갖 물고기들, 해덕대구, 황새치, 남방대구, 라벤더 둑중개, 치즐마우스 …….를 남김없이 찾아나서는 탐험이다. 저자는 그것을 말(馬)에 비유하여, 시는 날개를 단 말처럼 빠르고 산문은 밭을 가는 말처럼 느리게 간다고 표현했다.
“시의 말(馬)이 날개를 가졌다면 산문의 말은 마구를 쓰고 있다. 질 좋고 튼튼하고 편안한 마구. 나의 경우 밭을 갈기보단 나는 걸 더 좋아하지만 말이다.”
시는 세상에 날아다니는 수많은 말들을 고도로 정선된 낱말로 바꾼다. 그리고 전후 순서를 아주 섬세하게 배열시킨다. 반면에 산문은 온갖 색상의 말들을 있는 그대로 정돈시킨다. 시가 고급 백화점에 진열된 물건이라면 산문은 거리의 재래시장 좌판에 늘어놓은 각양의 물건들과 같다.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은 있다. 그녀의 산문에는 아주 힘들게 짜낸 반짝이는 시어들이 가득하다. 이 책이 2005년도에 출판되었으니 시인의 나이가 칠십이 넘은 나이다. 삶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존재의 이유에 대한 성찰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뇌가 산문 곳곳에 나타나 있다.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운 건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난 그것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세상에 주어야 할 선물은 무엇일까?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이십대 초에 사진 작가였던 남편을 만나서 미국 북동부 해안도시 '프로빈스타운'에 보금자리를 만들고 사십년 넘게 함께 살았다. 그리고 아름다운 대서양 바닷가와 습지를 산책하며 자연 속에서 보석 같은 시어들을 캐내며 살았다. 그의 시들은 큰 호옹을 얻고 수많은 상들도 받았다. 문인들에게는 최고의 찬사인 "퓰리쳐상"까지 받았으니 여한이 없는 인생일 것이다. 함께 동거 동락한 남편은 2005년에 운명을 달리했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최고의 조력자였다. 이 산문집에는 M라는 필명으로 소개되고 있다.
"M과 나는 물에서 3미터쯤 떨어진 곳에 산다. 폭풍이 칠 때 바람이 남동쪽에서 밀고 올라오면 우리는 물에서 30센티미터쯤 떨어진 곳에 산다. 물은 온종일, 밤새 노래하고 같은 노래를 부르는 법이 없다. ~~~ 나는 날마다 이른 아침에 물가를 거닐 때 다시 깨어난다. 발걸음이 날렵해지고 비로소 귀가 깨어나 바다의 노래에 감사를 보낸다.“
저자가 보는 자연은 그 자체가 시다. 나비에서 보는 초월, 숲에서 보는 야심, 호수에 비친 산 그림자에서 느끼는 두려움, 그리고 영원히 떠나지 않고 또다시 돌아오는 바다의 밀물과 썰물에서는 불멸을 본다. 먼 곳을 여행하기보다는 한 장소 한정된 곳에서, 지루하도록 매일 대하는 일상 속에서 그녀는 처절하도록 완벽한 삶을 추구했다. 늘 연필과 종이를 들고 습지를 서성이는 그녀를 향해 ‘맥신 쿠민’은 “올리버’는 습지 순찰자이며 자연 세계에 대한 포기할 줄 모르는 안내자”라고 일컬었다. 그녀의 친구들 역시 그녀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고 적고 있다. “저기 올리버가 아직 잡초밭에 서 있군. 아직 노트에 뭔가를 끼적이고 있군.”
그러나 그녀는 그런 남들의 말에 아랑곳 하지 않고 그곳에 집착했다. 그런 자신을 향해 그녀는 이렇게 변명 한다.“우리의 스승이 되어주는 건 우리에게 친숙한 것이지 일반적인 게 아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완벽한 시간 이란 오로지 자연 속에서 그것들과 하나가 되는 최고의 순간이었다. 모든 일상으로부터 해방, 그것은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모든 것들을 누리는 시간이었다. 그녀는 그런 마음을 수천 수 만 가지로 자연에 조화를 일으키는 바람에 비유했다 .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는 자신의 동굴에 바람들을 가두었다가 기분 내킬 때마다 세상으로 날려 보내서 하나의 세상이 아닌 수천 개, 수백만 개의 세상을 만든다!”
이 책속에는 그녀의 산문과 함께 몇 편이 시와 산문시도 함께 들어있다 .
“저 작은 흰 개는 무슨 기운이 넘쳐서 무얼 그리 즐기려고 진흙길에서 웅덩이마다 뛰어들까.“
시를 쓰고자하는 독자들 또 자연 속에서 영감을 얻어 그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독자 모두에게 유익한 책이다. 젊은이에게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나이가 든 사람에게는 존재의 이유에 대한 성찰을 주는 책이다. 14살에 시를 쓰기 시작해서 이제 82세의 노령이 이른 아직도 그녀의 시집은 출간되고 있다. 현재는 플로리다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내 교감의 대상은 나이아가라나 열대우림, 사하라 같은 거창한 풍경이 아니다. 하지만 아름답고, 비바람이 칠 때면 오대호 못지않게 활발히 물결친다. 이 풍경은 사소한 전환, 반짝이 장식, 일상적인 변화로 기쁨을 제공하는 데 전념하는 듯하며, 실제로 그렇다.”
“우리 삶의 양식은 우리를 보여준다. 우리의 습관은 우리를 평가한다. 우리가 습관과 벌이는 싸움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꿈들을 말해준다. 나는 헌신과 유머, 둘 다에 진지한 여우가 되 고 싶다. 기나긴 겨울에 육중한 문을 닫는, 용감하면서도 순응할 줄 아는 연못이 되고 싶다. 하지만 아직은 그런 빛나는 삶에, 순백의 행복에 도달하지 못했다. 아직은.”
“그는 호수에 가서 작은 배를 빌려 노를 저어 물 위로 나갔다. 처음엔 달빛과 고요한 물을 가르는 노 소리가 주는 즐거움에 흠뻑 빠졌다. 그러다 갑자기 가까이 있는 친근한 산봉우리가 그의 마음과 눈에 섬뜩한 유연성을 보였다. 우뚝 솟은 험하고 육중한 바위 봉우리가 그를 인식하고 물을 향해 기울어져 그를 뒤쫓는 듯했다. 그는 겁에 질려 정신없이 노를 저어 도망쳤다.”
“밤과 개에 대하여, 우리는 개처럼 밤의 깊은 어둠을 세세히 파헤칠 수는 없다. 어둠 속에서 수풀을 헤치고 나아가는 무수한 존재들을 개처럼 낱낱이 구분할 수가 없다. 생쥐, 들쥐, 밍크, 여우 발톱, 그리고 여우의 가느다란 오줌 줄기, 풀잎에 달라붙은 오줌방울들, 그 투명한 금빛 목걸이, 그리고 토끼- 그 발 냄새, 체액, 털 한 올, 흰 꼬리 아래 선腺에서 나오는 울음소리, 배설물 한 방울, 여기저기 떨어지는 검은 진주들. 나는 벤이 젖은 땅에 찍힌 사슴 발자국에 세심하게 코를 대고 무엇엔가 귀 기울이듯 눈을 감는 걸 본 적이 있다. 그가 듣는 건 소리가 아닌 냄새였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냄새의 거칠고 높은 음악.”
“그게 나고, 이런 식으로 산다. 나는 날마다 내 풍경 속을 걷는다. 늘 똑같은 들판, 숲, 창백한 해변, 늘 푸른빛으로 즐겁게 넘실대는 바닷가에 선다. 늦은 여름 오후, 보이지 않는 바람이 거대하고 단단한 똬리를 틀고, 파도가 흰 깃털을 달고 해변을 향해 달려와 소리 지르며, 고동치며 마지막 상륙을 감행한다. 나는 그런 순간들을 기억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수히 목격했다.”
“몇 해 전, 이른 아침에 산책을 마치고 숲에서 벗어나 환하게 쏟아지는 포근한 햇살 속으로 들어선 아주 평범한 순간, 나는 돌연 발작적인 행복감에 사로잡혔다. 그건 행복의 바다에 익사하는 것이라기 보단 그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에 가까웠다.”
“그런 교감은 푸른 하늘의 축복 아래 햇살 가득한 세상이 평온을 구가하고 바람의 신이 잠들었을 때, 그 조용한 순간에 몰입하는 사람에게 일어나기 쉽지 않을까 한다. 그런 때 우리는 모든 겉모습과 부분성의 베일을 들추고 그 속에 숨겨진 걸 엿볼 수 있을 것이다.”
“3월이다. 파랑새들이 하늘에서 미끄러지듯 날아다닌다. 4월이다. 고래들이 고향으로 돌아온다.”
“나는 평생 내면의 가장 심오한 생각들과 감정들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빛나는 교감의 도움을 받아왔다. 그 교감은 바로 내 마음과 풍경(물질계, 그중에서도 특히 세월과 함께 내게 친숙해진 부분)의 관계다. 내 교감의 대상은 나이아가라나 열대우림, 사하라 같은 거창한 풍경이 아니다. 하지만 아름답고, 비바람이 칠 때면 오대호 못지않게 활발히 물결친다. 이 풍경은 사소한 전환, 반짝이 장식, 일상적인 변화로 기쁨을 제공하는 데 전념하는 듯하며, 실제로 그렇다. 나는 그 항상성, 법칙들에 대한 준엄한 복종에서는 상상이란 걸 할 수 없고 이해는 더욱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더 귀중한 동반자다.”
“겉으로 보면 나는 습관을 거의 바꾸지 않고 산다.”
“나는 날마다 내 풍경 속을 걷는다. 늘 똑같은 들판, 숲, 창백한 해변, 늘 푸른빛으로 즐겁게 넘실대는 바닷가에 선다. 늦은 여름 오후, 보이지 않는 바람이 거대하고 단단한 똬리를 틀고, 파도가 흰 깃털을 달고 해변을 향해 달려와 소리 지르며, 고동치며 마지막 상륙을 감행한다. 나는 그런 순간들을 기억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수히 목격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