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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과 바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바람 없는 연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연은 바람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하늘 높이 날아오를 수도 있고, 끝없이 추락하여 결국 땅바닥에서 나뒹굴 수도 있습니다. 인생과 고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은 고해苦海입니다. 고난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고난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은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특히, 복음주의 설교가인 그A. W. Tozer는 “하나님이 깊은 고통 속에 집어넣고 단련해 보지 않은 사람을 크게 축복하실 지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라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단련이라는 과정에서 거친 다음에야 축복하신다고 주장했습니다. 요셉의 삶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형들의 안부를 확인하고 오라는 아버지 야곱의 명령을 받고 집을 떠난 이후,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도단에 도착한 그는, 평소 자신을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했었던 형들에 의해서 채색 옷이 벗겨졌습니다. 물도 없는 사막의 구덩이 속으로 인정사정없이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졌습니다. 다행히 이집트를 향해 가고 있었던 무리들 가운데 미디안 상인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겨우 구덩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렸습니다. 이집트에 도착한 다음에는 곧바로 왕 바로의 경호대장 보디발의 집에 팔렸습니다. 이번에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두렵고 떨리는 낯선 환경 속에 던져지고 말았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 열일곱 살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다행히 성경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창39:2a)라고 증거 합니다. 여호와는 당신이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복된 언약을 베풀어주시고 또 베풀어주신 언약을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완벽하게 성취하기 위하여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성실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바로 그 여호와께서 하루아침에 종으로 전락해 버린 그와 함께 동행 해 주셨습니다. 그가 손을 대는 모든 일들이 하나같이 현저하게 좋아지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띄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지켜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자신들은 알 수 없는 어떤 신적 축복과 보호하심 속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깨알아 알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사실 그는 쓰임이 다했다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용도 폐기할 수 있는 무수히 많은 도구들 가운데 하나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목숨을 끊어버릴 수 있는 하찮은 종에 불과했습니다.
거기다 그는 이집트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세상 경험이 전혀 없는 열일곱 살의 어린 이방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왕 바로의 안전을 책임지는 경호대장으로서 천하를 호령하고 있었던 주인까지도 그의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보디발이 직접 처리해 오던 가정의 대소사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모두 다 요셉에게 믿고 맡길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보디발의 가정에 속한 종들 가운데 누구도 감히 요구하거나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놀라운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형통할 수밖에 없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맺은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상상할 수 없었던) 큰 재물을 이끌고 (마치 쫓겨나는 사람들처럼) 나오게 되리라”(창15:13b-14),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게 되리라.”(창15:16)라는 언약을 이루기 위한 완벽한 발판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당사자인 요셉조차 전혀 깨알아 알 수 없었던 특별하면서도 치밀한 또 완벽한 섭리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는 어두운 현실이 여호와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한 당신의 창세전 작정을 온전히 이루어주시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허락하신 하나의 거룩한 과정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비록 외롭고, 고독하고, 의미도 없어 보이고,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강물처럼 흘러내릴 정도로 고통스러워도 믿음으로 받을 수 있어야합니다. 묵묵히 참고 견디며 최선을 다해서 살아내야 합니다. 자신을 위해 진행되고 있는 여호와의 위대한 여정에 기꺼이 동참할 수 있어야합니다. 여호와께서 의도적으로 허락하신 요셉의 고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주인은 주어진 업무를 완벽하게 처리할 뿐 아니라 빼어난 용모까지 갖추고 있었던 그에게 마음을 완전히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찾아왔습니다. 끊임없이 유혹했습니다. 그는 “주인이 집안의 모든 사무를 저에게 맡기고 아무 것도 간섭하는 일이 없으니 이 집에는 저만한 권한을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주인은 저에게 아무 것도 금하지 않았지만 오직 당신만은 금하셨습니다. 이것은 당신이 자신의 아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감히 이런 악한 짓을 하여 하나님께 범죄 할 수 있겠습니까?”(창39:8b-9)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안주인의 요구를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맡긴 주인의 신뢰를 완전히 저버리는 악행으로 규정했습니다.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고난을 당하면서도 놓지 않고 있었던 여호와에 대한 명백한 죄로 규정했습니다. 당시에는 손에 잡히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철저히 외면한 채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고 있는 것 같이 보였던 그렇기 때문에 얼마든지 서운해 할 수도 있었던 여호와께 범죄 할 수 없다고 외쳤습니다. 여호와를 붙잡은 믿음의 손을 결코 놓지 않았습니다. 안주인의 요구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단호하게 뿌리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최고의 고난은 사랑하는 백성들로부터 당하는 조롱도, 멸시도, 비웃음도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른 두 명의 죄수들처럼 실제로 죽으셨는지 확인하기 위해 로마 군병이 무지막지하게 휘둘렀던 몽둥이찜질도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저와 여러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어두움 또는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절대 절망으로 표현하는 죽음도 아니었습니다. 비록 영원한 죽음과 저주와 지옥불구덩이를 깨뜨리고 부활하기까지의 지극히 짧은 순간이지만 아버지 하나님의 철저한 외면이었습니다.
영원 전부터 완벽하게 하나였던 아버지 하나님과의 완전한 분리였습니다. 완벽한 단절이었습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는 물론 영적으로도 도무지 감당할 수 없으셨습니다. 심장이 터졌습니다. 물과 피가 분리되었습니다. 분리된 물과 피는 로마 군병이 찌른 창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아버지 하나님과의 단절과 분리는 그야말로 엄청난 고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신다면 이 고난의 잔을 내게서 거둬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눅22:4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당신을 아버지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의 완벽한 단절까지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한 모형이었던 요셉 역시 자신을 여호와께 온전히 맡겼습니다. 그렇다고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안주인의 마음을 바꿔주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녀는 마치 우는 사자 같았습니다. 매번 결사적으로 달려들었습니다. 실패로 돌아가자 쾌락의 광기는 증오의 광기로 돌변했습니다. 요셉이 자신을 희롱하고 겁탈하려 했다며 모함했습니다. 결국, 그는 받은 은혜를 저버린 채 파렴치한 죄를 지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억울한 처지를 누구에게도 먼저 내놓고 설명하기도 어려운 가장 더럽고 치명적인 죄를 뒤집어쓰고 말았습니다. 종으로 팔려온 상황에서 이만하면 그런대로 견딜만하겠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놓으려는 순간 또 다시 끝없이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루아침에 내려가고 또 내려갔습니다. 떨어지고 또 떨어졌습니다. 바로 왕과 관련된 죄를 지은 죄수들만 가둬두는 특별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도무지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지극히 절망적인 상황 속에 던져지고 말았습니다. 연애와 결혼과 출산과 인간관계 정도만 포기하면 해결되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약한 사람은 아예 인생 자체를 송두리째 포기할 수도 있는 너무나 절망적인 상황 속에 던져지고 말았습니다. 평소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아니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거기다 자신의 억울함을 어디에다 하소연 한 번 제대로 해볼 수 없는, 입을 다문 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너무나 황당하고도 끔찍한 일을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벌건 대낮에 공개적으로 당하고 말았습니다. 철저히 깔아뭉개져 지고 말았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 약 이십칠 세였습니다. 불과 열일곱의 어린 나이부터 무려 십년 동안이나 쌓아왔던 공든 탑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너무나 허무하지 않았을까요? 차라리 콱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히지는 않았을까요?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저와 여러분이라면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요? 놀랍게도 성경은 이 상황에 대해서도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창39:23b)라고 증거 합니다. 하루아침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종으로 전락한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파렴치한 죄인이라는 억울한 누명까지 뒤집어썼습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옥에 갇혔습니다. 도무지 빠져나오기 어려워 보이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이제 겨우 기를 펴고 살만하게 되었다고 판단했을 때 또 다시 치명적인 죄를 뒤집어쓰고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가 형통하였다고 증거 합니다. 여호와께서 여전히 그를 떠나지 않고 함께 동행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견디기 어려운 고난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를 위한 여호와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원하는 모든 일들이 완전히 막혀 있다 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함께 하고 계시면 형통합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한 여호와의 창세전 작정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에 형통합니다.
주어진 오늘이 아무리 어렵고 힘겨울지라도 절대로 거부하지 말아야합니다. 원망이나 불평도 늘어놓지 말아야합니다. 믿음으로 받아야합니다. 믿음으로 참고 견뎌내야 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또 뜨겁게 살아내야 합니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로 섬기는 믿음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 보여야합니다. 하루는, 바로 왕의 자문諮問 역할은 물론 국정에 대해서 함께 의견을 나누는 왕의 비서실장인 술 맡은 관원장이 옥에 들어왔습니다. 거룩한 제사를 책임지는 제사장인 떡 굽는 관원장도 함께 들어왔습니다.
동시에 이제까지 나타나지 않았던 경호대장이 등장했습니다. 그들이 비록 죄인의 신분으로 옥에 들어오기는 하였지만, 자신보다 훨씬 고위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원래의 자리로 복직될 경우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경호대장은 즉시 자신이 옥에 집어넣었던 요셉을 불렀습니다. 그들을 잘 섬기라고 명령했습니다. 필요다고 판단되는 직책과 환경까지도 마련해 주었습니다. 아내의 고발을 무시할 수는 없었고 또 바라보는 시선들도 있었기 때문에 요셉을 옥에 집어넣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신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신뢰하는 경호대장이 특별히 부탁한 그들을 “섬기되שָׁרַת(솨라트)” 충성을 다해서 섬겼습니다. 모세를 지근거리에서 섬겼던 여호수아처럼, 엘리야를 끝까지 따라다니며 섬겼던 엘리사처럼, 여호와를 최우선으로 섬기는 하늘의 군대처럼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섬겼습니다. 마치 여호와를 섬기듯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섬겼습니다. 술 맡은 비서실장과 떡 맡은 제사장의 그를 믿고 마음을 열기에 충분할 정도로 섬겼습니다. 그가 얼마나 성실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었는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그들은 꿈을 꾸었습니다.
같은 날, 같은 밤이었습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꿈을 꾸었습니다. “각각 의미를 가진 꿈each dream with its own meaning”(RSV)을 꾸었습니다. 누구나 쉽게 해석할 수 있었지만, 해석이 전혀 다른 꿈을 꾸었습니다. 그렇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운명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도무지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다음날, 이른 아침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평소처럼 일반 죄인들과 분리되어서 다른 특별한 장소에 머물고 있던 그들을 찾았습니다. 곧 그들의 안색이 평소와는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즉시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같은 날, 같은 밤, 각자 꿈을 꾸었는데 해석해 줄 사람이 없어서 불안해하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요셉은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꿈을 푸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창40:8b)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섬기고 있었던 여호와를 소개했습니다. 꿈의 내용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자세히 일러달라고 말했습니다. 비서실장격인 술 맡은 관원장이 꾼 꿈은 길몽이었습니다. 요셉은 그가 사흘 안에 누명을 벗고 원래의 자리로 복직될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동시에 그가 복직되는 날 제발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자신은 히브리 사람들의 땅에서 억울하게 유괴되어 온 사람이고, 감옥에 들어올 만한 파렴치한 일을 한 적이 전혀 없다고 마치 부르짖어 외치듯 설명해 주었습니다. 제사장격인 떡 맡은 관원장의 꿈은 흉몽凶夢이었습니다. 요셉은 그가 사흘 안에 죽임과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정중하면서도 가혹하리만치 단호하게 말해 주었습니다. 요셉의 해석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술 맡은 비서실장은 억울한 누명을 벗고 원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떡 맡은 제사장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요셉은 술 맡은 비서실장이 자신을 기억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안타깝게도 성경은 “술 맡은 관원은 요셉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창40:23b)라고 증거 합니다. 비서실장은 자신의 꿈이 길몽이라는 해석을 듣는 순간, 분명 요셉의 부탁을 반드시 들어주겠다고 거듭 약속했을 것입니다. 당시의 관습대로 몇 번씩 맹세까지 했을 가능성도 상당히 높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형편이 바뀌자 요셉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요셉의 간절한 기대는 또 다시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될 듯, 될 듯 기대하며 마음을 졸이게 하다가 되지 않는 쪽으로 결론이 나고 말았습니다. 맥이 완전히 풀리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절망이었습니다.
한편, 성민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사49:14)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향해서 “여인이 자신의 젖먹이는 아이를 어찌 잊어버릴 수 있겠느냐! 자신이 (죽을 만큼 힘들여서)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느냐!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않으리라. 너는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잊혀 지지 않도록) 나의 두 손바닥에 (너무나 뚜렷하고도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또 너 시온의 성벽은 항상 나의 눈앞에 (또렷하게) 있다.”(사49:15-16)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당신의 사랑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보다 훨씬 승하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인륜이 땅에 떨어지는 오늘날의 세태에서도 가끔 볼 수 있거니와 당시 이방인 부모들 가운데서도 형편상 어린 자녀가 죽도록 버려두는 일이 있었지만 당신에게 만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당신은 오히려 사랑하는 백성들로부터 멀리 계시지도 않고 또 지극히 짧은 순간인 찰나刹那라도 눈을 떼지 않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또렷하게 기억하기 위해서 아예 두 손바닥에 선명하게 새겨두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당신은 그들을 절대로 잊을 수 없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또 시인은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는 나를 버려도, 주님은 나를 돌보아 주십니다.”(시27:9b-10)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로부터 지극히 찰나의 순간조차 눈을 떼지 않으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함께하여 주십니다. 동행하여 주십니다. 지켜주십니다. 보호해 주십니다. 마침내, 구원해 주십니다. 요셉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술 맡은 비서실장의 기억 속에서는 완전히 잊혀 졌을지 모르지만, 아니 때가 이르기까지 잊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의 인생을 설계하시고 이루어 가시는 여호와의 기억 속에는 또렷이 남아 있었습니다.
실제로 본문은 “만 이 년 후에”(창41:1a)라고 증거 합니다. 술 맡은 비서실장이 원래의 자리로 복귀한 지 만 이년 째 곧 햇수로는 삼년 째 되던 해를 가리킵니다. 요셉이 이집트 총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춰야할 나이가 되었을 때를 가리킵니다. “여호와의 때가 찼을 때”라고 의역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의 바로 왕이 꿈을 꾸었습니다. 건강하고 살진 암소 일곱 마리가 강에서 올라와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곧이어 흉측하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다른 일곱 마리의 암소가 강에서 올라왔습니다. 건강하고 살진 소들을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먹어치웠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란 바로는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이내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또 꿈을 꾸었습니다. 한 줄기에서 무성하고 알이 꽉 들어찬 일곱 이삭이 나왔습니다. 같은 줄기에서 사막의 바람에 말라붙어서 쭉정이가 되어버린 다른 일곱 이삭이 나왔습니다. 먼저 나온 무성하고 알이 꽉 들어찬 일곱 이삭을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삼켜버렸습니다. 바로는 또 다시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잠에서 깨었습니다. 즉시 신하들을 불러들여 꿈을 들려주었지만 누구도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복직된 술 맡은 비서실장은 이때 비로소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요셉을 기억해 냈습니다.
여호와께서 통제하고 있었던 그의 기억을 되살려 주셨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바로에게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바로는 그때도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었던 요셉을 즉시 왕궁으로 불러들였습니다. “내가 꿈을 꾸었는데 아무도 풀 사람이 없다. 그러던 중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풀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창41:15)라고 말했습니다. 마치 요셉에게 꿈을 해석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요셉은 즉시 “저에게 무슨 그런 능력이 있겠습니까? 폐하께 편안한 대답을 일러주실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창41:16)라고 대답했습니다.
꿈을 꾸도록 역사하신 여호와께서 해석도 주실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베푸실 해석은 내심 불편했던 바로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두 죄수의 꿈을 해몽해 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자신을 숨겼습니다. 오직 여호와 한 분만 드러냈습니다. 바로가 꾼 꿈에 대해서 들은 후에는, 바로가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칠년 동안의 풍년과 흉년이 연속해서 이어지게 될 것이라고 해석해 주었습니다. 칠년 동안 이어질 풍년과 계속해서 칠년 동안 이어질 흉년을 지혜롭게 보낼 수 있는 대책까지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바로와 신하들은 하나같이 요셉의 해석을 좋게 여겼습니다. 특히, 바로는 요셉에게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보이셨으니 너같이 명철하고 지혜로운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너의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이 왕좌뿐이라...내가 너를 이집트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창41:39-41)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손에 끼고 있었던 인장반지를 뺐습니다. 요셉의 손에 끼워주었습니다. 세마포 옷을 입혀주었습니다. 금 사슬을 목에 걸어주었습니다. 자신만 유일하게 탈 수 있도록 제작되어 있었던 버금수레에 태웠습니다.
당시 열두 개의 주州로 나뉘어져 있었던 이집트 전국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주었습니다. 그를 위한 여호와의 창세전 작정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 때를 위해서 그를 낮추고 또 낮추셨습니다. 당신의 때가 이르렀을 때,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높여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반드시 고난의 양을 채우게 하십니다. 때로는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은 삶을 살게 하십니다. 모세는 40년 동안이나 광야에 방치해 두셨습니다. 이집트에서 배운 최고의 학문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완전히 잊혀 진 채, 이름 없는 양치기로 살게 만드셨습니다.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은 시인은 무려 13년 동안이나 도망자의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뜨거운 열정으로 불타던 사도는 고향 땅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13년 동안이나 완전히 방치해 두셨습니다. 하루하루 어떤 기약도 없는 절망적인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허리가 완전히 꺾이는,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 때까지 지극히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요셉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극히 이기적인 자신으로 충만하던 상태가 거룩하신 당신으로 충만한 전혀 다른 상태로 변하는 임계점에 이를 때까지 철저하게 낮추셨습니다.
수소 폭탄이 핵반응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일곱 개의 원소 봉이 필요합니다. 여섯 개의 원소 봉을 집어넣을 때까지 원자로 안에서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곱 번째 원소 봉이 들어가면 그 때 비로소 임계점에 이르면서 핵반응이 일어납니다.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만들어집니다. 사람은 저와 여러분을 잊어버릴 수 있지만, 여호와께서는 한 순간도 저와 여러분을 잊어버리지 않으십니다. 여호와의 때는 저와 여러분이 서두른다고 해서 절대로 앞당겨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여호와께서 정해놓으신 양의 시간과 눈물과 기도가 채워져야 합니다.
특히, 여호와께서는 “내가 고통 중에 있는 너의 방패다. 내가 너의 방어자다. 내가 너의 요새다. 내가 너의 피난처다. 내가 너의 공급원이다. 내가 너의 치유다. 내가 너의 평강이다. 내가 너의 기쁨이다. 내가 너의 지혜다. 내가 너의 힘이다. 내가 너의 영광이다. 내가 너를 높여 주마!”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저와 여러분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유일한 해법이라고 제시하십니다. 또 시인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으니 종으로 팔린 요셉이다. 족쇄에 발이 상하고 몸이 쇠사슬에 묶였으니 여호와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라.”(시105:17-19a)라고 외쳤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완벽하게 성취하기 위하여 한 사람 곧 요셉을 앞서 보내셨다고 외쳤습니다. 그가 이집트의 총리 자리에 오를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발은 족쇄에 상하고 몸은 쇠사슬에 묶이는 고통을 당해야 했었다고 외쳤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때가 될 때까지 철저하게 준비하셨습니다. 야곱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요셉을 형들에게 보내셨습니다. 형들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이스마엘 상인에게 팔게 하셨습니다. 이집트로 들여보내셨습니다. 보디발의 종으로 팔리게 하셨습니다. 손을 대는 일마다 형통하도록 치밀하게 역사해 주셨습니다.
그를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도무지 인정하기 어려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힐 수밖에 없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비서실장과 제사장을 만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그들의 꿈을 해석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비서실장이 그를 까맣게 잊어버리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당신의 때가 이르렀을 때 바로로 하여금 당신 외에는 누구도 풀 수 없는 꿈을 꾸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비서실장이 요셉을 생각해 낼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요셉이 바로의 꿈을 시원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전국을 다스리는 바로는 물론 열두 개 주를 나눠서 다스리고 있었던 방백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드디어 누구나 인정하고 따르는 이집트 총리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불과 열일곱에 불과했던 어린 요셉의 삶에 무려 십삼 년 동안이나 고난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도록 역사하신 궁극적인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요셉을 위한 당신의 창세전 작정을 완벽하게 이루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무엇보다 여호와께서는 요셉이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을 잘 견뎌낼 수 있도록 상황에 꼭 필요한 은혜를 넘치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두 해가 지난 뒤 벨릭스 총독 후임으로...베스도가 부임하였다.”(행24:27a)라는 증거에 따르면, 사도 역시 이년 동안 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대단한 낭비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다른 성경은 이 구절에 “누가는 두 해 동안 사도가 무슨 일을 했는지 밝히지 않는다...(아마도)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냈을...그 기간은, 그가 로마에서 상소하는 동안에 썼던...서신들 곧 신성한 계시에 있어서 가장 비밀하고 깊고 풍성한 골로새서, 에베소서, 빌립보서에 (대단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 서신들이...교회에 가져다 준 공급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라는 각주를 달아놓았습니다. 낭비가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진보를 이루는 기간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저와 여러분의 삶 역시 치밀하게 이끌어주셨습니다. 꼭 필요한 은혜를 넘치도록 부어주셨습니다.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고난을 만났을 때,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고난을 허락하시고 낙오하지 않도록 친히 이끌어주시고 필요한 은혜까지 채워주고 계시는 여호와 한 분만 바라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여호와의 때가 찰 때까지 묵묵히 믿음으로 살아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자신을 위한 여호와의 창세전 작정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기꺼이 동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창세전 작정이 무엇인지 똑똑히 목격하고 또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은 물론 소리를 높여서 여호와를 찬양하고 자랑하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