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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백성의 호칭의 의미와 은혜
이사야 41:8,9,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우리는 지난 주일 저녁에 이사야서 41장 1절로부터 7절까지 말씀에서 재판정을 열고 이방 나라들을 불러 변론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하게 될 유다 백성들에게 다시 고토로 돌아오는 기이한 일을 위하여 동방의 의인을 불러서 모든 이방 나라들을 쳐서 정복하게 하실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미 말씀 나눈 대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그 동방의 의로운 사람은 바로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입니다. 이사야의 이 예언이 있은 지 거의 150년 뒤에 페르시아의 걸출한 정복 왕 고레스 2세가 일어나 정복 전쟁을 통하여 지극히 광대한 세계 제국을 건설하였고 바벨론을 정복한 직후에 유대인 해방령을 내려 유대인들로 고토로 돌아가게 하였으니,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뜻대로 사람을 세우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고 나라를 일으키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부족 신이 아니요 온 세상 만국을 다스리시며 모든 사람들의 인생의 대주재자가 되심을 확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국의 대주재이심을 증거한 하나님은 이제 어려운 현실 속에서 낙심하고 두려워하며 이방의 우상들을 숭배하는 습관을 끊지 못하는 그의 택한 백성들을 향하여 눈을 돌리고 그들을 위로하며 격려하며 돌이키도록 권면합니다. 이것이 이사야서 41장 8절로부터 계속하여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오늘은 그 중에 서두 부분만을 함께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특권과 은혜에 대하여 깊이 깨닫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먼저, 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그러나 너는”이라고 시작합니다. 이는 고레스 왕의 출현과 그의 열방을 향한 대규모의 정복 전쟁으로 인하여 이방 나라들이 두려워하며 서로 힘을 모으며 헛되이 우상들을 만들어 의지하는 무익한 일로 소동하는 것과 달리 이스라엘은 아무런 두려워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이방의 백성들과 달리 유다 족속 곧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이 8절에 말씀을 보면, 구약 성도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끈끈한 사랑이 담은 세 가지의 호칭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 예배에서는 하나님 백성의 호칭의 의미를 살펴봄으로써 주의 백성 된 은혜와 축복에 대하여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 백성을 두고 하나님의 종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좀 더 실감나게 다시 말하면 ‘너 이스라엘 내 종아’라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부릅니다. ‘종’이라는 단어는 섬기는 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계 만민 중에서 제사장 나라로 구별되어 부름받은 자들입니다. 시내산 앞에서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 곧 이방 나라와 구별된 하나님을 예배로 섬기는 백성으로 부름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이스라엘을 특별한 특권과 거룩한 의무를 받은 자들입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일합니다. 정치가, 의사, 사업가, 장사꾼, 농삿꾼 다 하나님의 일꾼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앞서 말한 의미에서의 ‘종의 개념’에 의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종은 아닙니다. 직업이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를 예배하며 그의 영광을 위하여 수고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종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 그를 예배하는 자만이 곧 하나님의 종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자기의 종들을 특별히 귀하여 여기십니다. 그들을 사랑하시고 아끼시고 축복하십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정성을 다하여 예배하며 그를 충성스럽게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서도 그를 지극히 아끼시고 지극히 사랑하시고 그의 자손들까지도 복을 주십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서 선민 이스라엘을 두고 쓴 ‘나의 종’ 곧 ‘내 종’이라고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호칭은 하나님의 애정이 듬뿍 담겨 있는 호칭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내 종’이라고 부른 사람들이 몇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모세입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모세의 이방인 여인과의 결혼을 트집잡으며 비방하여 모세의 영적 권위를 손상시켰을 때입니다. 미리암은 모세의 형 제사장 아론까지 합세시켜서 모세를 비방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회막으로 불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를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민수기 12:6~8)
여기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마다 ‘내 종 모세’라고 반복하십니다. ‘내 종’이라고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이 호칭에는 하나님의 애정과 신뢰가 그만큼 듬뿍 담겨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한 호칭으로 자주 불리워졌던 분이 구약 시대 이스라엘의 왕 다윗입니다.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나단 선지자를 불러 자기가 하나님의 집을 지어드리고 싶다고 말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밤에 나단 선지자에게 임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사무엘 7:5)
‘내 종 다윗’이라고 사랑을 담아 부르셨습니다. 또한 열왕기의 적지 않은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부를 때마다 ‘내 종’이라는 호칭을 함께 사용하곤 합니다. 열왕기상 11:32 말씀에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한 성읍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라”
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의 우상 숭배의 악에 대하여 크게 분노하셨지만 하나님은 솔로몬의 아버지 다윗과 맺은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면서 그의 종 다윗 때문에 유다 지파만큼은 솔로몬 이후에도 다윗 가문이 왕위에 계속 오르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열왕기하 20:5 이하의 말씀에서도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를 죽을 병에서 살려주시는 은혜를 베푸실 때에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그 뜻을 전달하실 때에 이렇게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내가 네 날에 십 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열왕기하 20:5~6)
여기서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언급하시면서, 다윗을 언급할 때에 여지없이 ‘내 종 다윗’이라고 부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겼었기에 하나님은 그의 지극한 애정이 담아서 다윗을 부를 때마다 ‘내 종’, ‘내 종’이라고 부르곤 하셨던 것입니다.
동방의 의인 욥을 두고서 하나님께서 사탄 앞에서 그의 경건을 자랑하실 때에도 이 호칭을 사용하였습니다. 욥기 1:8 말씀에,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지극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삶을 살았던 의인 욥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사탄 앞에서 욥은 내 종이라고 소개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욥을 신뢰한 그대로 욥도 그 모진 사탄의 시험과 고통의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믿음과 충성을 끝까지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신뢰에 보답했습니다. 진실로 욥은 하나님의 종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종이라고 불리우는 호칭의 아름다움과 영광스러움을 생각할진대, 우리 구주 예수님에 대한 호칭 중에 하나가 바로 ‘여호와의 종’이라고 불리웠다는 것을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할 때 결코 놀라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 42:1~4 말씀에 보면,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소개할 때 하나님은 이렇게 소개하고 계십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사도 마태가 쓴 복음서 12:17 말씀은 이 말씀이 바로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행하신 사역을 두고 하신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불렀던 이 구절이 예수님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소개한 것은 사도 베드로의 설교에서도 나옵니다. 사도행전 3:13 말씀에 보면, 사도 베드로가 나면서 걷지 못한 미문 거지를 고친 후에 성전 바깥뜰 솔로몬 행각에서 모여든 사람들에게 설교할 때에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종 예수’라고 소개한 까닭은 예수님께서 본체상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인간의 대표가 되어 모든 사람의 죄와 질고와 저주와 죽음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내 종’이라고 부르는 이 호칭만큼 고귀하고 아름다운 호칭도 없을 것이라 생각이 들게 됩니다. 정녕 주님으로부터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내 종아’라고 부르는 경우를 우리가 맞이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요 행복일 줄 믿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진실하고 충성되어 모세처럼, 다윗처럼, 욥처럼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긴다면, 우리들을 향하여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 종아’라고 불러주시고 흐뭇해여기시고 사랑하실 줄 믿습니다. 또한 다윗이 세상을 떠난 후에라도 하나님의 자기 종 다윗을 언제나 기억하면서,
“내 종 다윗을 위하여 그 후손들에게 이러 이러한 복을 베풀겠다”
“내 종 다윗 때문에 그 후손에게 비록 잘못이 있더라도 내가 긍휼을 베풀리라”
는 등 복된 약속을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죽기까지 충성하신 우리 주님의 본을 받아, 앞선 믿음의 선배들 하나님의 종 욥과 모세와 다윗을 본받아 성심으로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받들어 섬김으로써 주님의 사랑을 받고 후손들까지도 다 복을 받는 하나님의 종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하나님 백성을 두고 하나님이 택한 야곱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야곱은 이삭의 둘째 아들입니다. 이삭은 아내 리브가를 통하여 쌍둥이 아들을 얻었는데, 태어날 때 야곱이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뱃속에서부터 하도 두 형제가 싸우길래 하나님께 리브가가 물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기를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에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창 25:23)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뱃속에서 선과 악을 알기 이전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과 경륜을 따라 큰 아들 에서가 아니라 둘째 아들 야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때가 되니, 에서의 후손 에돔 족속은 하나님의 백성의 반열에서 사라지고 둘째 아들 야곱의 후손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에 의하여 애굽에서 구출된 후에 하나님의 선민으로 부름받아 시내산에서 하나님 앞에서 성민 언약을 맺고 하나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야곱의 뱃속에서부터 택함을 받았고 그 후손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 것은 오적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택하심에 의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택하다’라는 히브리어 단어 ‘빠하르’라는 단어는 매우 조심스럽고 깊이 있게 숙고한 후에 선택한다는 뜻이 항상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만민 중에서 이스라엘을 특별히 자기 백성으로 선택한 것은 갑작스럽고 감정적으로 한 일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깊이 숙고하시고 마음의 결심을 갖고 의지를 담아서 하신 자기 구별된 백성으로 야곱과 그의 후손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나님의 택정함을 받았으니 하나님 백성은 참으로 존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자존감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함을 받아 하나님 백성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하나님의 택정함을 받아 하나님 백성이 되었으니 이러한 자존감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주눅들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권세 앞에서 비굴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보여준 본보기를 기억합시다. 그는 복음 때문에 죄수가 되어 가이사랴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자기 앞에 헤롯 아그립바가 왕복을 입고 앉아 있고 그 곁에 버니게 공주가 화려한 옷을 입고 앉아 있고 로마 총독 베스도가 권위를 잡고 심문을 하고 천부장, 백부장 등 귀족들이 즐비하게 있으나 그는 그들에게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권면의 말을 듣고 거부하는 아그립바 왕에게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일개 죄수로 취급하는 왕족들과 로마의 고위 관리들과 여러 귀족들 앞에서 사도 바울은 지극히 당당하게 그들에게 위대한 구원의 길 되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당당하게 전하며 결박된 이 고생스런 모습 외에는 다 자기를 닮기를 원한다고 당당히 선언하였습니다. 그들이 곧 당할 영원한 하늘 법정에서의 심판당할 것을 바라보며 사도 바울 자신은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될 미래를 확신하기에 이렇게 당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영원한 택정함을 받은 자답게 이와 같은 영적인 자부심을 갖고 험한 세상 속에서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됩시다.
셋째로, 하나님 백성을 하나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을 향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부릅니다. 왜 그러시냐면, 이스라엘 백성의 고귀한 영적 특권은 사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호칭이 의미가 있는 까닭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밝히신 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리웠기 때문입니다. ‘벗, 친구’라는 이 이름은 ‘오하브’라는 단어는 사랑한다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 히브리어 동사가 피엘 분사형으로 쓰일 때에는 애인, 친구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각별한 사랑을 입은 자라는 의미로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단지 계약의 상대방으로만 삼은 것이 아니라, 그를 지극히 사랑하여 늘 마음을 나누며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였던 친구로 여겼던 것입니다. 친구란 이해 관계, 어떤 사업의 동업자 관계를 뛰어넘어 아무런 조겅 없는 우정을 가지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즐거움을 나누며 비밀을 털어놓고 주고 받는 친밀한 존재 아닙니까? 하나님은 바로 사람 중에서 아브라함을 자기의 친구, 자기의 벗으로 삼고 이 땅에 아브라함이 사는 동안 그를 늘 찾아오시고 대화를 나누시며 장래의 하실 하나님의 일들도 함게 나누고 하셨습니다. 그의 장래에 자손들이 번성할 것과 그 땅 가나안을 주실 것과 그 아내 사라에게 늦둥이 아들을 주실 것과 그의 친척 롯이 사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할 수 있음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친구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건지기 위하여 여섯 번에 걸친 간절한 중보 기도를 두려움을 무릅쓰고 매달려 의인 열 명만 있으면 그 성을 용서해달라고 감히 요청하였고 하나님도 친구인 아브라함의 청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친구였던 아브라함의 후손들이기에 하나님은 그 후손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각별한 사랑과 우애를 가지고 아끼고 돌보고 끝까지 책임져주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좋은 본보기가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큰 아들 요나단과 깊은 우정을 나눈 친구였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아들 므비보셋을 끝까지 찾아내어 절름발이였던 므비보셋을 왕자들의 식탁에 함께 앉게 하고 아들처럼 사랑하며 끝까지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친구요 우리 구주 예수께서 자기의 친구로 삼은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우리가 친밀하게 그의 친구답게 행할진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을 특별한 사랑으로 돌보시고 사랑하시고 책임져주실 줄 믿습니다.
설령 우리의 자손들이 부족하고 실수가 있고 잘못을 좀 범하더라도 우리의 우정과 헌신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9절 말씀의 약속입니다.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비록 하나님이 백성들이 범죄하여 하나님을 심히 떠났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조상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등 충성된 그의 백성들의 조상 까닭에 그 후손을 완전히 버리지 아니하시고 다시금 불러주시고 복을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이사야 54:7,8 말씀의 약속과 같습니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의 친구로서의 우정을 더욱 깊이 가꾸어갑시다. 식물과 우정은 계속 관심과 사랑을 쏟아야 자랍니다. 하나님과의 우정 역시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고 시간을 드리고 우리의 마음과 사랑을 쏟을 때 우정이 깊어집니다. 하나님의 친구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넘어지고 쓰러졌고 멀리 포로가 되었지만 다시 돌아오고 사랑을 받고 끝까지 버림당하지 아니한 이유가 바로 아브라함 하나님의 벗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친구로 부름받았습니다. 그를 더욱 사랑합시다. 우리를 자기의 친구로 삼으신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그 각별한 은혜를 기억하면서, 그를 뜨겁게 사랑합시다. 우리 인생 전체를 그와의 깊은 우정 속에서 보냅시다. 그리할 때 우리를 기억하면서 “나의 벗 누구의 자손들아!” 하시면서 우리 자녀들을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