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5회 하곡학교실 강의자료 (存言, 中, 第14-16條, 2013년 11월 25일)
14、一理一貫道
14-1、○帝極【天命於穆】、儀象、衆生(衆生, 象生)【衆物各正】,一理一貫【易知簡能】,卽中一生萬化者。
神之體【神理】、氣殼【純一眞靜有動】、衆理【純眞妄動】,一理【有本末而無二。○其有牽蔽妄動者,其有昏蔽不明者,其病也,以其有放失也】,一貫【意與衆物、知與物理,有體用而已,一而無二。○其隔絶爲二者,其遮蔽不徹者,其流弊也,以其有拘蔽也。】。
性之德【性善】、情用【至善有惡】、事物【至善有惡】,一理【有顯微而無二,其有偏勝、過不及者,其失也,以其有放失也】一貫【意知與事物,有體用而已,一而無二。○其隔絶不貫者,其蔽失也,以其有拘蔽也】。
제극(帝極)【하늘의 명(命)이 은연중에 주재하는 것이 심원하다.】과 의상(儀象)과 중생(衆生)【모든 만물이 각각 바르다.】 셋은 하나의 이(理)가 일관(一貫)하며【건곤의 이지와 간능이다.】 가운데 하나(一)가 만화(萬化)를 낳는 것이다.
신(神)의 체(體)【신리(神理)】와 기각(氣殼)【순일(純一)하며 진정(眞靜)이지만 동(動)함이 있다.】과 중리(衆理)【순진(純眞)하지만 망동(妄動)한다.】 셋은 하나의 이(理)【본말(本末)이 둘이 아니다. ○끌리고 가려서 망동하기도 하며, 어둡게 가려서 밝지 못한 것은 병(病)이며 잃어버렸기 때문이다.】가 일관(一貫)한다.【의(意)와 중물(衆物) 그리고 지(知)와 물리(物理)는 체용(體用)이며 하나이며 둘이 아니다. ○서로 막히고 끊어져서 둘로 되는 것, 가려서 투철하지 못한 것은 유폐(流弊)이며 구속되어 가려졌기 때문이다.】
성(性)의 덕(德)【성선(性善)】과 정용(情用)【지선(至善)이지만 악(惡】도 있다.】과 사물(事物)【지선(至善)이지만 악(惡)도 있다.】 셋은 하나의 이(理)【현미(顯微)하지만 둘이 아니며 한 쪽에 치우쳐서 이기거나 지나치고 미치지 못하는 것은 잘못이며 잃어버렸기 때문이다.】가 일관(一貫)한다.【의지(意知)와 사물(事物)는 서로 체용(體用)이며 하나이며 둘이 아니다. ○서로 막히고 끊어져서 관철하지 못하는 것은 가려진 잘못이며 구속되고 가려졌기 때문이다.】
以虛體爲理爲性,實物爲氣爲心,氣發心用,爲氣用,爲情爲用,而曰理與氣、理與心、性與氣、性與心、性與氣質、性善氣質性、志與氣、心與情、體與用而爲二,是本末之二也。
又以心體【卽心體,卽心意知】物用【卽事物,卽行處】,而曰心與事、志與物、知與行而爲二,是內外之二也。
又以虛勢爲理【卽修道虛體】,實體爲心【卽心體實物,卽情知,卽物用】,而曰理與心【知與行之二】;以實體爲心【卽心知】,虛勢爲理【卽物理】,而曰心與理【行與知之二】,是心理知行之二也。
(주자학자는) 허체(虛體)를 이(理)로 여기고 성(性)으로 여기며 실물(實物)을 기(氣)로 여기고 심(心)으로 여기기 때문에, 기발(氣發)과 심용(心用)이라고 하거나 기용(氣用)이라고 하거나 정용(情用)이라고 여긴다. 말하자면 이(理)와 기(氣)、이(理)와 심(心)、성(性)과 기(氣)、성(性)과 심(心)、성(性)과 기질(氣質)、성선(性善)과 기질성(氣質性)、지(志)와 기(氣)、심(心)과 정(情)、체(體)와 용(用)으로 둘로 나누었는데 이것은 본말(本末)을 둘로 나눈 것이다.
또한 심체(心體)【심체이며 심의지(心意知)이다.】와 물용(物用)【사물(事物)이며 실행하는 대상이다.】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심(心)과 사(事)、지(志)와 물(物)、지(知)와 행(行)으로 둘로 나누었는데 이것은 안과 밖을 둘로 나눈 것이다.
또한 허세(虛勢)를 이(理)로 여기고【수도(修道)하려는 허체(虛體)이다.】 실체(實體)를 심(心)으로 여기기【심체(心體)가 실물(實物)이며 정지(情知)이며 물용(物用)이다.】 때문에, 이(理)와 심(心)【지(知)와 행(行)을 둘로 나눈다.】을 나눈다. 실체(實體)가 심(心)이라고 여기고【심지(心知)이다.】 허세(虛勢)가 이(理)이라고【물리(物理)이다.】 여기기 때문에, 심(心)과 이(理)【행(行)과 지(知)를 둘로 나눈다.】을 나누었는데 이것은 심(心)과 이(理) 그리고 지(知)와 행(行)을 둘로 나눈 것이다.
此則皆其流弊者也,不知其流弊也,便以爲實體之正當者,何也?蓋未有見於本體者,故不得已而以其虛者爲之宗。又以其流弊者,指爲實體云耳,惟其以虛者爲宗也,彼虛也,不貫於其心體,則其於內外,不得不分而爲二矣。見其內外之分如此,不知其流弊也,而便以爲實體之當然,遂以此爲道理之本然、功夫之正當,則於道體遠矣。
위와 같은 것은 모두 주자부터 흘러온 유폐(流弊)이지만 유폐(流弊)라는 것을 모르고 실체(實體)의 정당(正當)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대체로 본체(本體)를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며 그래서 부득이하게 허(虛)를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또한 유폐(流弊)가 되는 것을 실체(實體)라고 여기는 것은 허(虛)를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며 허(虛)가 심체(心體)까지 일관(一貫)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부득불 안팎을 둘로 나눈 것이다. 이와 같이 안팎이 둘로 나뉜 것을 알면서도 유폐(流弊)인 줄을 모르고 실체(實體)의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며, 결국에는 유폐(流弊)를 도리(道理)의 본연(本然)이며 공부(功夫)의 정당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도체(道體)와는 거리가 멀다.
15、全體一性
○夫以理爲法式而別件者,雖是統體一原而性無不在云,然旣曰各具一性,而如犬牛之性不同,則於此求之【於其各具而不同者】,將奚用?亦何以能會歸於一原之地歟?其爲功不亦難乎?【彼各具之理者,雖亦謂之物理,然是豈大本、至善之謂哉?豈至善之爲仁義中正之德者哉?】
惟是此全體一性【一箇仁理神明】,通天地萬物,原是一箇者,乃是理,其無不完全,流行感應,貫通中節,溥博時中者是也,故曰只是一明德。“有物有則”,一箇明珠至空,萬形具照,姸媸黑白,各隨其物;一箇洪鐘至虛,萬聲具發,大叩大應,小叩小應,各隨其叩。
水流高低地,空在大小甁,天人之一體分形是也,是謂體;珠從姸媸形,鐘逐大小筳,人性之隨物中節是也,是謂用,皆心性也。
대체로 이(理)를 법식(法式)이라고 하여 어떤 구체적인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비록 본체의 전체는 일원(一原)이므로 성(性)이 있지 않은 데가 없다고 말하는데, 그러나 이미 만물이 각각의 성(性)을 갖추어도 개나 소의 성(性)이 다르다고 하면서 각기 다른 이(理)를 구하는 것은【각기 갖추어졌으나 서로 다른 것에서 구한다.】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또한 〔이렇게 얻은 서로 다른 이(理)를〕 어떻게 하나의 일원(一原)으로 귀결시킬 수 있는가? 공부(功夫)도 아주 어렵지 않은가? 【만물이 각각 갖춘 이(理)를 비록 물리(物理)라고 하더라도 이것을 어떻게 대본(大本)이나 지선(至善)이라고 이르겠으며? 어찌 지선(至善)의 인의중정(仁義中正)한 덕이 되겠는가?】
오직 전체의 일성(一性)【하나의 인리와 신명(仁理神明)이다.】이 원래부터 천지만물 모두를 통하는 하나인 것이며 이것이 이(理)이며, 완전한 것이며, 유행(流行)하여 감응(感應)하며, 관통(貫通)하여 중절(中節)하며, 부박(溥博)하여 시중(時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만 하나의 명덕(明德)이라고 한다. 『시경』에서 “물(物)이 있으면 법이 있다.”고 한 것은 하나의 맑은 구슬(明珠)이 지극히 공허하지만 만 가지 형상을 모두 비춰보면 곱고 못난 것과 검고 흰 것들이 각기 물건에 따라 나타나는 것과 같다. 또는 하나의 커다란 종(洪鍾)이 지극히 공허하지만 만 가지 소리를 모두 내는데 세게 두드리면 큰소리가 나고 약하게 두드리면 작은 소리가 나는 것은 각각 두드리는 것에 따라 크고 작은 소리가 나는 것과 같다.
물(水)이 높은 곳에서 낮은 땅으로 흐르는 것과 허공이 병에 따라 크고 작은 것은 천지와 사람이 하나의 본체이면서도 형상이 서로 달리 나뉜 것을 형체(形體)라고 하며, 구슬이 곱고 못남에 따라 나타내고 종이 종치는 막대에 따라 소리 내는 것은 사람의 본성이 물(物)을 따라 절도에 맞게 하는 것을 용(用)이라고 하는데 모두 심성(心性)이다.
栗谷以爲理本無爲【是以其本體言之,如是可也。今本體則反以爲實有,今正作實狀,爲如是空空焉】,其統體處,如大海,如一天,謂一無極。其各具處,水逐方圓器,空隨大小甁,謂物理也。言理氣不離,此其爲理之懸空,與其爲實用者之所別可見,此其所以爲理之不同者如此。
理之體、性之原,固如此矣,其用功當如何?豈不在存養而乃事窮格乎?蓋所言者,卽必指“人生以上”、物之理、天之道,是爲命之屬也,不在人身,率性之事、德性之功,卽命上將安用功?於天將安所事乎?惟窮吾之理,盡吾之性,以至於命焉而已,『易經』惟此而已矣。
율곡(栗谷)이 이(理)가 본래 무위(無爲)하다고 여긴 것은【본체를 말하자면 이렇게 말하여도 옳다. 그런데 지금 학자들은 본체를 도리어 실유(實有)라고 여기는데 지금 실상(實狀)을 설명하면 이렇게 텅빈 것(空空)이다.】 통체(統體)를 말한 것이며 큰 바다 또는 커다란 하늘처럼 하나의 무극(無極)을 말하는 것이다. 만물의 각각 갖춘 이(理)를 말하자면 물이 그릇에 따라 모나고 둥글거나, 허공이 병에 따라 크고 작은 것을 물리(物理)라고 한다. 이(理)와 기(氣)가 서로 나뉘지 않는다고 말하더라도 이것이 이(理)를 공허한 것이라고 여긴 것인지 또는 실용으로 여긴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이(理)를 보는 까닭이 서로 다른 것이 이와 같다.
이(理)의 본체와 성(性)의 근원이 확실하게 이러컨대 공부를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어찌 존양(存養)하지 않고 궁리격물(窮理格物)을 일삼는가? 대개 말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사람이 태어나기 이전” 또는 물(物)의 이(理) 또는 천지의 도(道)를 명(命)에 속하는 것이라고 가리키며 인신(人身)에 있지 않다고 한다. 그렇다면 솔성(率性)의 일(事)과 덕성(德性)의 공부를 명(命)에서는 어떻게 공부할 것이며? 천지에서는 어떻게 일삼을 것인가? 오직 나에게 있는 이(理)를 궁구하고 나에게 있는 본성을 다하여 명(命)에 이르러야할 뿐이다. 『역경(易經)』도 오직 이것을 나타냈을 뿐이다.
至善之理也,天之體也,可求之於事物而循之,則『中庸』當曰:物性之謂理,合理之謂道,不當以其率循己性,繼而戒懼中和之功言耳。然蓋己性者,又原無內外者也。
經傳中固亦溯本而言,有言性命者矣,曷嘗有言主窮格此理,以爲學之說耶?【如言“有物有則”之處,言其理者,其說固有如此矣。至於其功,則曷嘗有必以此窮格爲學者乎?】 惟誠意、正心、明明德、止於善,以求盡乎其己之性理焉是已【如曰毋自欺、曰顧諟天之明命等事者,卽其存心養性之方也。『大學』中,諸引詩書所明,皆德性之實功】。
지선(至善)의 이(理)가 천지의 본체이지만 사물(事物)에서 구하여 따를 수 있다고 한다면, 『중용(中庸)』에서는 마땅히 “물(物)의 성(性)을 이(理)라고 이르고, 이(理)에 합하는 것을 도(道)라고 이른다.”고 말해야하며, 나의 본성을 따라야한다거나 뒤를 이어서 계구(戒懼)와 중화(中和)의 공부를 말하지 말았어야 한다. 그러나 대체로 나의 본성은 더구나 원래부터 안팎이 없다.
경전(經傳)에서도 분명히 근본에 거슬러 말한 것이 있는데 성명(性命)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어찌 일찍이 이(理)를 궁격(窮格)하는 것에 치중하는 것을 학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가? 【“물(物)이 있으면 법이 있다.”고 말한 곳에서는 이(理)를 말한 것이 궁격(窮格)의 주장과 진실로 같다. 그렇지만 공부에 대하여 어찌 일찍이 반드시 궁격(窮格)을 학문으로 삼으란 적이 있었는가?】 오직 성의(誠意)、정심(正心)、명명덕(明明德)、지지선(止於善) 등은 나의 성리(性理)를 다하기를 구할 뿐이다.【“스스로를 속이지 말라.” “하늘의 밝은 명(命)을 돌아보라.”고 말한 것들은 모두 맹자가 말한 존심(存心)양성(養性)하는 방법이다. 『대학』에서 『시경』과 『상서』를 인용하여 밝힌 것은 모두 덕성(德性)의 실공(實功)이다.】
聖學,卽惟盡夫吾之理是已【所當致者,惟吾之理焉,如不先主乎吾之理,則天地之理,雖盡明,何關乎?此求盡吾之理,則天地之理,不必別窮而自無不盡】。如天地萬物之理,雖爲常在如死底,人於自身,此理都滅,則於此何關哉?【故惟當論在吾之理者耳】?故『中庸』以爲至誠者,爲能盡其性【爲主】,能盡其性,則可以盡人之性、物之性,而與天地參云,其本末之序如此。【未嘗言先盡天地萬物之性命】 雖然,盡其性,原無內外,雖曰盡己性,其實所以盡其己者,所以盡其物也,非有彼此之功異也,非有二事也。【如五止善(止至善?),爲明明德、親民所在之驗。○明明德,卽所以親民,格致誠正修身,則家以齊國以治平,無無家國之身心也,無無民之明德也,無無物之知也。】
성학(聖學)은 오직 나의 이(理)를 다하는 것뿐이다.【마땅히 이르러야 할 것은 오직 나의 이(理)이다. 만약 먼저 나의 이(理)를 치중하지 않는다면 천지의 이(理)를 비록 다 밝혔더라도 나와 무슨 상관있는가? 나의 이(理)를 다하기를 구한다면 천지의 이(理)를 반드시 별도로 궁구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다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만약 천지만물의 이(理)가 비록 항상 있더라도 죽은 것이라면 사람의 자신에게는 이(理)가 모두 없어진 것이므로 나와는 무슨 상관있는가? 【그러므로 오직 나에게 있는 이(理)를 마땅히 논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중용』에서 지성(至誠)이라야만 본성을 다할 수 있고【핵심으로 삼으라는 뜻이다.】 나의 본성을 다할 수 있어야만 사람의 본성과 만물의 본성을 다할 수 있기 때문에 천지의 위육공화(位育功化)에 참여한다고 하였으니, 본말(本末)의 순서는 이와 같다.【일찍이 먼저 천지만물의 성명(性命)을 다하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렇지만 본성을 다한다는 것에는 원래부터 안팎이 없다. 비록 나의 본성을 다하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나의 자신을 다하는 까닭이 만물의 본성을 다하는 까닭과 같은 것이므로 피차의 공부가 다르다는 것은 아니며 둘로 나눌 일이 아니다.【마치 지지선(止至善)이 명명덕(明明德)과 친민(親民)에 있다는 것을 명증이다. ○명덕(明德)을 밝히는 까닭은 친민(親民)하려는 것이며, 격치성정수신(格致誠正修身)을 하면 집안이 편안해지고 나라가 다스려진다. 그래서 집안과 나라가 없는 몸과 마음은 없고, 백성이 없는 명덕(明德)은 없으며, 물(物)이 없는 지(知)는 없다.】
如物理之學,以物理爲在物,而心身爲在我,岐而求之,如告子之分仁義,謂非有長於我,從其白於外之說,以行義爲因於外也,分之。孟子辨之,如飮食之在內也【在於物者,卽在於我,無口無飮食,凡甘苦之味,莫非口也,無口無甘苦】。
盡其性者,爲盡其物理,無明德心身,則無倫理矣。非我明,則無彼白,非我義,則無所長。如此處此之,如彼處彼之,其權衡,卽我之義也,卽以其此處彼處者爲主本則貳矣。
○帝曰:惟精惟一,子曰:吾道一以貫之,忠恕而已,曰:予一以貫之,非多學而識之,孟子曰:夫道一而已矣,『庸』曰:可一言而盡,其物不貳,則其生物不測,皆無內外一件事也。
(주자학처럼) 물리(物理)의 학술은 물리가 물(物)에 있고 심신(心身)이 나에게 있기 때문에 둘로 나누어 구하는 것이다. 마치 고자(告子)가 인(仁)과 의(義)를 나누어 높임(長)이 나에게 있지 않다거나 하얗다고 여기는 것이 밖의 것을 따른다는 주장처럼 의(義)를 행하는 것이 밖에서 연유되었기 때문에 인의(仁義)를 나눈다는 것과 같다. 맹자(孟子)가 이것을 변별하여 음식이 안에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물(物)에 있는 것은 나에게 있는 것이며, 입이 없다면 먹고 마실 수 없다. 무릇 달고 쓴 맛도 입에 있으며 입이 없다면 달고 쓴 맛도 없다는 것이다.】
본성을 다하는 것은 물리(物理)를 다하는 것이며, 명덕(明德)과 심신(心身)이 없다면 윤리(倫理)도 없다. 내가 밝지 못하면 저것이 희다고 여기는 것도 없고, 내가 의롭지 않다면 높이는(長) 대상도 없다. 이런 곳에는 이렇게 하고 저런 곳에는 저렇게 하는 권형(權衡)은 나의 의(義)이며, 이곳과 저곳을 주본(主本)으로 삼는 것은 나와 물(物)을 둘로 나눈 것이다.
순임금(舜)이 “오직 정(精)하고 오직 전일(專一)하라.”고 하였으며, 공자(孔子)가 『논어、이인편』에서 “나의 도(道)는 하나(一)로써 관철한다. 충서(忠恕)뿐이다.”라고 하였다. 공자는 『논어、위령공편』에서 “내가 하나로써 관철한다는 것은 많이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며, 맹자는 『맹자、등문공상』에서 “도(道)는 하나뿐이다.”라고 하였고, 『중용』에서는 “한 마디 말로써 다하자면 물(物)은 하나이지만(爲物不貳) 그가 낳는 물(生物)은 헤아릴 수 없다.”고 하였다. 이것은 모두 안팎이 없는 한 가지 일이다.
16、知行一者
○或知或行而二之者,蔽於欲而不全也,知行一者本體也。知行二者庸人也,知行一者賢智也。思之、學之、行之各異者,失大本而非工夫之本源也。思之、學之、行之一者,工夫之本體也。
心之於義理,不能如耳目之[聰]明、當血氣之眞切者,欲蔽之而間其本體也,庸人也。心之於義理之是非,無異耳目、血氣,則本體也,賢智也。
어떤 이는 지(知)를 강조하고 어떤 이는 행(行)을 강조하여 지행을 둘로 나눈 것은 모두 인욕(人欲)에 가려서 온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행이 하나라는 것은 본체 때문이다. 지행을 둘로 나눈 것은 보통사람이며, 지행을 하나로 한 것은 성지(聖智)이다. 생각하고 배우고 행하는 것을 각각 다르게 하는 것은 대본(大本)을 잃는 것이며 본원(本源)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하고 배우고 행하는 것을 하나로 한 것은 본체를 공부하는 것이다.
마음이 의리(義理)에 대하여 능히 귀와 눈처럼 밝지 못하고 혈기(血氣)를 참으로 절실하게 여기는 것은 사욕(私欲)이 마음을 가리기 때문에 본체(本體)와 떨어졌기 때문이며 보통사람을 말한다. 마음이 의리(義理)의 시비(是非)에 대하여서 눈귀(耳目)와 혈기(血氣)와 다르지 않다면 본체를 깨달은 현지(賢智)이다.
朱子、伊川以知行爲二,以庸人之不得本體者言也。以知行一者,直以本體言也,非謂人人皆已得本體然也。
退溪以心之義理,爲不能如血氣,以庸人流蔽處言也。如以爲心之義理,知而行者,以本體之眞言也,非謂人人初皆得本體如此矣。其所指而言則各有其別,然乃就其流蔽失體,因以爲工夫在此,而不知其本體,而不能用功於本體,則其迂直、難易、眞假、一二之相去則遠矣。如夫子學而不思,思而不學、傅說知之匪艱,行之惟艱,亦就其俗人不明本體者言也,然曷嘗以此專爲工夫在此,而爲本體之當然哉?
주자와 정이천이 지행을 둘로 나눈 것은 보통사람이 본체를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지행을 하나라고 한 것은 곧바로 본체를 말한 것이며 사람마다 본체를 깨달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퇴계(退溪)선생이 “마음의 의리(義理)를 혈기(血氣)처럼 할 수 없다는 것은 보통사람의 유폐(流弊)된 곳을 지적한 것이다. 만약에 마음의 의리(義理)가 지(知)하여 행(行)하는 것이라고 여긴 것은 본체의 참된 것을 말한 것이며 사람마다 처음부터 모두 본체를 이와 같이 깨달았다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지적하여 말한 것을 보면 각기 다르다. 그러나 유폐(流弊)와 잘못된 것을 모르기 때문에 공부가 여기에 있다고 하였다면 본체를 몰라서 본체를 공부할 없었다면 우회와 직행, 난이(難易), 진가(眞假), 하나거나 둘로 나누는 것은 서로 거리가 멀다. 공자가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거나,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춘춘시기 부열(傅說)이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 아주 어렵다.”(『서경、열명편』)라고 말한 것 모두 세상사람이 본체를 깨닫지 못한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어찌 일찍이 이것으로 공부가 여기에 있다고 여기고 본체의 당연한 것이라고 하였겠는가?
人心道心,天人一也,性情中和,體用一也。知能其體,明誠其功也,學行其事,博篤其法也。
今以知與行對言,則凡人不能歸復爲一,故心知與行事,實有異觀,所以欲分其功也。若曰致知,則知之而行焉,已無不盡矣。如旣曰致知,又曰力行,則是純篤不撤,以至於篤實光輝,終之之事也,“知至至之,知終終之。”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에서 천지와 사람이 하나이며, 성정(性情)과 중화(中和)에서 체용(體用)이 하나이다. 지(知)와 능(能)은 체(體)이고 명(明)과 성(誠)은 공부이며, 학(學)과 행(行)은 일(事)이고 박(博)과 독(篤)은 방법이다.
지금 지(知)와 행(行)을 상대시켜 말하는 것은 보통사람이 하나(一)로 귀복(歸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지(心地)와 행사(行事)를 실제로 다르게 보는 것은 공부를 둘로 나누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치지(致知)라고 말하면 아는 것이며 행하는 것은 이미 다하지 아니한 것이 없다고 한다. 만약 이미 치지(致知)라고 말한 뒤에 다시 힘써 행한다(力行)고 말하여야만, 순수하고 돈독하여 멈추지 않아서 독실(篤實)하고 광휘(光輝)함에 이른 것이며 끝맺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주역』에서는 “이를 데를 알아야 이르고 마칠 데를 알아야 마친다.(知至至之,可與幾也。知終終之,可以存義也.)”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