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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므파탈 외 4편 / 황봉학
-매발톱꽃
벌레를 잡으려고 꽃잎을 뒤집다가 매의 발톱을 본다
매혹적인 꽃잎 뒤쪽에 숨겨 놓은 날카로운 모순
금세라도 상대를 움켜잡을 것 같은 섬뜩함
독특한 색깔, 짙은 향기에 잠시 정신이 아득하다가
장미를 꺾다 장미 가시에 찔려 죽은 릴케를 생각한다
불꽃에 반해 불로 뛰어드는 나방처럼
매 발톱에 확 할퀴어지고 싶은 오후의 꽃밭
부엉이 / 황봉학
전등 스위치를 켜는 순간
소나무를 깎아 만든 나뭇가지 위에
박재 부엉이 한 마리가 들어서는 나를 쏘아보고 있다
푸른 섬광이 번쩍인다
섬뜩하다
죽어서도 갈고리 같은 발톱으로 나뭇가지를 움켜잡고 놓지 않는다
금방이라도 허공을 박차고 날아오를 듯
날개를 반쯤 펼친 그
와 나 사이에
말할 수 없이 깊은 강 하나가 흘러가고 있다
밥을 먹는 동안 / 황봉학
내가 밥을 먹는 동안 중동에서 전쟁이 났다
내가 밥을 먹는 동안 옆집 아저씨가 새장가를 갔다
내가 밥을 먹는 동안 검정 고양이 아톰이 새끼를 낳았다
내가 밥을 먹는 동안 불쑥 기름 값이 올랐다
내가 밥을 먹는 동안 아르헨티나 어느 교차로에서는 교통사고가 났다
아아 내가 밥을 먹는 동안 나비 한 마리 사마귀에게 물려 죽고
내가 밥을 먹는 동안 낡은 수도관이 터지고
내가 밥을 먹는 동안 한 드라마가 종영되었다
내가 밥을 먹는 동안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고
내가 밥을 먹는 동안 주식이 폭등하고
내가 밥을 먹는 동안 누군가는 이사를 갔다
밥 위로 쇠파리 한 마리가 저공비행하고 있다
이런 소문이 있었다 치자 / 황봉학
-회룡못回龍池
혼인도 하기 전에 동네 남자들과 혼음을 즐겼다는 면장네 둘째 딸이
소문이 퍼지자 못으로 뛰어들었다 치자
딸을 구하겠다고 함께 뛰어든 엄마와 함께 물귀신이 되었다 치자
잠수부는 처녀 시체를 건져 올리면 재수가 없다고 엄마 시체만 건져 올렸다 치자
그 후 밤마다 낚시를 하던 총각들이 못에 빠져 죽었다 치자
못은 처녀 귀신이 떠돈다는 소문으로 낚시꾼 하나 없는
물고기들의 천국이 되어버렸다 치자
금강모치버들개버들치연준모치새미가는돌고기감돌고기쉬리갈겨니참갈겨니피라미돌고기중고기참중고기몰개줄몰개간몰개참몰개점몰개끄리눈볼개치리송사리대륙송사리왜몰개참붕어빙어은어황어초어부안종개종개졸종개점졸종개기름종개북방종개참종개미호종개동방종개왕종개남방종개새코미꾸리얼룩새미꾸리수수미꾸리대륙종개좀수수치쌀미꾸리미꾸리미꾸라지각시붕어떡납줄갱이납자루납자리묵납자루칼납자루임실납자루줄납자루큰줄납자루한강납줄개큰납자리가시납자리흰줄납줄개독종개동사리얼룩동사리밀어한둑종개꾹저구갈문망둑민물검정망둑민물두줄망둑좀구굴치미유기메기자가사리퉁가리퉁사리꼬치동자개대농갱이동자개눈동자개꾸구리돌상어흰수마자왜매치돌마자모래주사버들매치됭경모치참마자누치어름치모래무지쏘가리황쏘가리꺽지꺽저기블루길베스산천어열목어연어무지개송어다묵장어드렁허리뱀장어붕어잉어이스라엘잉어큰가시고기가시고기잔가시고기강준치백조어가물치버들붕어
들이 그 처녀 몸을 탐하여 모여들었다 치자
물고기들 골고루 처녀 맛을 보았을 것이라는 소문이 끊이지를 않았다 치자
그 소문을 청둥오리들이 물어 날라 강원도 산골짜기까지 퍼져 나갔다 치자
그리고 40여 년이 흘렀다 치자
그 못에서 잡은 물고기를 처녀들이 먹어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생겼다 치자
그래도 총각들은 고기에서 처녀 맛이 난다고 키득거리며 물고기 속살을 탐하여 낚시로 그물로 물고기들을 잡아먹는다 치자
이런 소문이 있었다 치자
제비꽃은 / 황봉학
오랑캐꽃이라는 이름 말고도
앉은뱅이꽃이라는 이름 말고도
반지꽃이라는 이름 말고도
장수꽃이라는 이름 말고도
씨름꽃이라는 이름 말고도
병아리꽃이라는 이름 말고도
외나물이라는 이름 말고도
엄마가
꼬르륵꼬르륵∼ 배고픈 꼬마 아이
해 질 녘 동구 밖에 쪼그리고 앉아
사기그릇 광주리 이고 행상 나간 엄마 기다릴 때
씨방 톡톡 터뜨려 사금파리에 하얀 쌀밥 한 그릇으로 담기던 그것
말고도
막다른 골목길 / 황봉학
-조개구이
들어갔다가는 꼭 되돌아 나와야 하는
젖은 오줌 냄새가 나는
- 나를 사줘
엉거주춤 싸 버린 사람이
부르르 몸을 떠는
- 그리고 나를 뜨겁게 달구어 줘
왼쪽 벽이 가위를 들고
C-8 잘라버린다고 말하는
- 쫘악 벌려줄게
오른쪽 벽이 털 없는 가랑이를 벌리는
한 무더기의 똥 위에
- 속살 다 보여줄게
게워낸 라면 국물이 더해지는
그리고 또
- 먹혀 줄게
쌀 차례를 기다리는
이장移葬 / 황봉학
40년 전에 죽은 아버지를 꿀꺽 삼켰던 흙의 아가리를 벌립니다
양 한 마리를 다 삼키고도 벌린 입을 다물 줄 모르는 사자처럼 흙은 시치미를 떼고 빈 입을 벌려 보입니다
입속을 샅샅이 파헤쳐 보지만 아버지는 없고 거무죽죽한 흔적만 보입니다
아마도 이빨 하나 없는 그가 아버지를 알사탕처럼 서서히 녹여서 먹었나 봅니다
흔적만 남은 아버지를 형상으로 떠서 칠성판에 얹습니다
다른 곳에서 천연덕스럽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흙으로 조심스레 칠성판이 옮겨집니다
사람들은 늙은 이무기에게 제물을 바치듯 거기에 칠성판을 넣습니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아가리를 닫습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벌렸던 입을 꽉 다문 채 딴청을 부리는 흙 위에 잔디를 심고 꽃을 심습니다
어디선가 자꾸 상여소리가 들립니다
삶의 모순에 대하여
김태선
시가 태어나는 자리는 일상의 순간들이다. 특별한 순간은 드물다. 드문 순간들은 우리에게 어떤 감동을 주기에는 너무나 희귀하다. 그러나 시인이 일상의 순간에서 길어 오르는 시적 상황들은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아마도 시에 나타난 그 상황이 독자가 처한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시적 상황은 일상에서 단순하게 얻어지지 않는다. 시인이 그 일상의 자리에서 어떤 낯선 것, 어떤 긴장을 발견할 때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이 돌연 낯설게 느껴질 때, 혹은 갑자기 시선을 이끌 때, 그러한 정서가 어째서 발생하는가. 이런 물음이 시인의 손을 움직이게 한다.
이번에 함께 읽을 황봉학 시인의 작품을 살펴보면, 시인이 이 세계에서 경험하는 모순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발견하는 모순은 아름다움에 내재한 위험의 요소라든지, 일상적인 순간들에 함께하는 특별한 사건, 삶의 공간에 침투해 들어오는 죽음의 흔적과 같이 서로 대비되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런 모순이 함께 어울려 우리의 삶을 구성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황봉학의 시는 일상의 자리에서 발견하는 이런 모순들을 따라가면서 삶의 비의를 캐내려 한다.
매혹적인 꽃잎 뒤쪽에 숨겨 놓은 날카로운 모순
금세라도 상대를 움켜잡을 것 같은 섬뜩함
-「팜므파탈 -매발톱꽃」 중에서
팜므파탈, 즉 치명적인 매력은 모순되는 속성이 한 몸에 내재해 있음을 나타내는 낱말이다. 하나는 에로틱함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생명력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자를 절멸에 이르게 하는 죽음의 힘이다. 이 두 가지 힘은 모순되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떼어놓을 수 없다. 구분은 가능하지만 분리 불가능한 이 힘은 생명을 움직이게 하는 원천이기도 하다. 이 힘은 생명체를 살게 하면서 동시에 죽이는 성질을 지닌다. 「팜므파탈 -매발톱꽃」의 화자는 이러한 힘을 매발톱꽃의 “꽃잎을 뒤집다가” 발견한다. 꽃은 상대를 유혹하는 강렬한 매혹을 지녔지만, 그 안에는 “금세라도 상대를 움켜잡을 것 같은 섬뜩함”이 도사리고 있다. 사실, 매발톱꽃이 갖고 있는 기관 중 “매의 발톱” 같이 생긴 것은 꿀을 담고 있는 주머니로, 상대를 해치는 힘은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의 시선을 잡아끄는 매혹적인 것에서 “날카로운 모순”을 발견한다. 이 모순은 시인으로 하여금 세상 곳곳에 숨어 있는 일종의 뒤틀림을 경험케 한다. 어째서 아름다운 것들은 그 안에 한 생을 앗아갈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가.
세계의 모든 것들이 움직일 수 있는 이유는 어딘가에 구멍이 있기 때문이다. 그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움직임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 움직임은 다시 또 다른 곳에 빈 자리를 만든다. 이런 식으로 움직임은 끊임없이 순환한다. 나타남과 사라짐은 이러한 반복 운동에 의해 존재의 생멸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이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난다는 점은, 생의 에너지인 에로스와 죽음의 충동인 타나토스가 야누스의 얼굴처럼 한 몸에 붙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러준다. 가장 강렬한 쾌감은 언제나 심각한 고통과 함께 찾아온다. 그럼에도 불 속으로 뛰어드는 일은,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움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해 움직일 것인가. 시인은 찰나의 아름다움을 선택했다. 삶을 긍정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일은 생을 긍정하기에 가능하다.
금방이라도 허공을 박차고 날아오를 듯
날개를 반쯤 펼친 그
와 나 사이에
말할 수 없이 깊은 강 하나가 흘러가고 있다
-「부엉이」 중에서
꽃에 이어 시인의 시선이 가 닿는 곳은 박제된 부엉이이다. 시인은 “박재 부엉이 한 마리가 들어서는 나를 쏘아보고 있다”고 진술하며, 이 상황을 두고 “섬뜩하다”고 표현한다. 어째서 시인은 부엉이에게서 두려움을 느낄까. 부엉이의 모습이 당장이라도 자신의 목숨을 당장이라도 앗아갈 듯한 기세이기 때문이다. 부엉이는 이미 죽어서 박제가 되었지만, 그 모습으로 삶의 공간으로 들어와 시인으로 하여금 죽음의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부엉이는 죽어 있으면서도 “갈고리 같은 발톱으로 나뭇가지를 움켜잡고 놓지 않는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허공을 박차고 날아오를 듯”하다. 이미 죽은 부엉이이지만 마치 살아 있는 듯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이런 모순은 시인으로 하여금 “말할 수 없이 깊은 강 하나가 흘러가고 있다”로 표현되는 심연을 느끼게 한다. 스틱스 강 같은 이런 심연은 살아 있는 자는 건너갈 수 없다. 그러나 죽음의 흔적들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 침투해 들어온다. 죽음이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이런 모습이 시인에게 섬뜩함을 느끼게 한다.
삶의 자리에서 발견되는 죽음의 흔적들은, 우리에게 불안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삶의 움직임을 가능케 한다. 부엉이는 죽어서 박제가 되었지만, 그 모습은 살아있는 것처럼 “금방이라도 허공을 박차고 날아오를 듯”하다. 시인은 당장이라도 목숨을 앗아갈 듯 위협적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박제 부엉이 모습에서, 그 부엉이가 삶에 대한 강인한 의지를 내보이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미 죽어버린 부엉이마저도 “나뭇가지를 움켜잡고 놓지 않는” 모습으로 삶의 의지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분명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분명, 죽음은 존재하는 것들을 세계와 단절시키는 심연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불가능으로 이르게 하는 그 심연 때문에 우리는 삶을 더욱 소중한 것으로 여긴다.
내가 밥을 먹는 동안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고
내가 밥을 먹는 동안 주식이 폭등하고
내가 밥을 먹는 동안 누군가는 이사를 갔다
밥 위로 쇠파리 한 마리가 저공비행하고 있다
-「밥을 먹는 동안」 중에서
시인이 죽음의 흔적을 발견하는 자리는 어떤 특별한 공간이 아니라, 앞서 이야기했듯이 우리가 매순간 마주하는 일상에서이다. 일상의 여러 세목들 중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반복하는 행위는 밥을 먹는 일이다. 시인은 밥을 먹는 동안에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을 하나씩 열거한다. 어떤 장면들은 TV 뉴스 등을 통해 접했을 법한 것들이고, 또 다른 장면들은 시인의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을 직접 경험했을 법한 일들이며, 다소간 시인이 그동안 살아오면서 경험한 것들에 비추어 짐작했을 법한 일들도 시에 나타난다.
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밥그릇은 그다지 크지 않겠지만, 일상이 담아내는 그릇의 크기는 이처럼 거대하다. 한 쪽에서는 탄생의 이야기가, 다른 한 쪽에서는 전쟁과 같은 죽음의 이야기가 일상이라는 그릇에 함께 담겨 있다. 앞서 살펴 본 두 편의 시에서는 일상의 한 순간을 두려움의 감정으로 다른 때와 차이를 두어 간극을 벌려놓았다면, 이 시는 수많은 차이들을 “밥을 먹는 동안”에 모아둠으로써 간극을 좁힌다. 거리는 가까워졌지만 그 틈 사이의 깊이는 깊다.
여러 사건들을 한 곳에 모아놓는 정도의 일로는 특별한 의미가 형성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시에서 재미있는 점은 마지막 행 “밥 위로 쇠파리 한 마리가 저공비행하고 있다”는 부분이다. 시인은 다양한 사건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도 그에 대해 어떤 품평을 하거나 감정을 발산하는 대신, 담담하게 나열할 뿐이었다. 그런데 쇠파리 한 마리가 시인이 밥 먹는 일을 방해하려 한다. 일상의 순간에 침입한 불청객이다. 이처럼,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일상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지금을 담담히 살아내는 일이 중요할 뿐이다.
그 못에서 잡은 물고기를 처녀들이 먹어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생겼다 치자
그래도 총각들은 고기에서 처녀 맛이 난다고 키득거리며 물고기 속살을 탐하여 낚시로 그물로 물고기들을 잡아먹는다 치자
-「이런 소문이 있었다 치자 -회룡못回龍池」 중에서
「이런 소문이 있었다 치자」는 소문이 일으키는 파문을 추적한다. 소문이기 때문에 시에 나타난 사건들은 “있었다”로 종결되지 않고, “치자”라는 말이 덧붙는다. “치자”라는 표현은 그 앞에 진술된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부정해야 할 것으로 여긴다. 일단은 진술된 내용이 맞는 것으로 간주하지만, 발화자는 그에 반하는 생각을 품고 있음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소문이 만약 사실이더라도 죄는 처녀에게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모든 이에게 속한다. “그 소문을 청둥오리들이 물어 날라 강원도 산골짜기까지 퍼져 나갔다 치자”라는 말처럼 소문은 쉽게 확산된다. 한 처녀를 비극으로 이끈 소문은 40년이 흘러도 계속된다. 소문은 무서운 힘을 지녔다.
이 시는 소문에 의해 생겨난 죄에 모두가 연루되어 있음을 이야기한다. 동시에 언어의 연쇄를 통해 말의 이어짐을 보인다. 연쇄는 실제 사건에 의해 나타난다기보다는 말에 의한 공백을 사물들이 메우기 위해 부단히 움직이면서 계속 돌고 도는 모양새를 띈다. 이 시에서 독특한 부분은 각종 민물고기들의 이름이 모두 붙어 있다는 점이며, 어떤 경우는 이름이 반복하여 나타나기도 한다. 말에 의해 생겨난 빈 자리를 사물들이 메우려는 모양새이다. 이는 곧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이 서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서로에게 연루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실제로 죄가 있었다고 치자, 그러나 그 죄는 개인이 아니라 모두가 책임져야 할 것이다.
시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삶에 나타나는 모순의 자리이다. 모순은 삶에 추동력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갈등이 일어나게 하는 빌미를 주기도 한다. 이러한 모순은 우리가 살아 있는 이상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갈등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소문에 의한 일방향적인 말의 움직임보다는, 상호 간의 소통에 의한 열림의 차원을 구성해야 할 것이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벌렸던 입을 꽉 다문 채 딴청을 부리는 흙 위에 잔디를 심고 꽃을 심습니다
어디선가 자꾸 상여소리가 들립니다
-「이장移葬」 중에서
앞선 시가 소문에 의해 산 자가 죽게 되고, 그 이후에 주변에서 일어나는 과정을 추적하는 이야기를 다루었다면, 「이장」은 사람의 죽음 이후의 모습을 보여준다. 두 편의 시가 공통적으로 40년 전에 일어난 죽음과 그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시인은 아버지의 묘를 옮기기 위해 개장하는 일을 “아버지를 꿀꺽 삼켰던 흙의 아가리를 벌립니다”라고 표현한다. 흙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시인의 아버지를 “알사탕처럼 서서히 녹여서” 먹어버리고, 그 흔적만을 남겨두었다. 이처럼 사람의 삶은 죽음으로 그 움직임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자연과 하나가 되는 과정으로 이행한다.
이장은 보통 더 나은 묏자리로 옮기는 일이지만, 시에서는 사람의 흔적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죽음은 분명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삶의 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다. 그러나 시에 나타난 죽음은 단순히 삶의 끝으로서만 나타나지 않고, 또 다른 움직임을 예비한다. 한 생에서 다른 삶으로의 이동. 흙이 살아있는 것처럼 나타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시인은 이장을 끝내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벌렸던 입을 꽉 다문 채 딴청을 부리는 흙 위에 잔디를 심고 꽃을” 심는다. 꽃이 스러지면 열매가 맺듯, 한 생이 끝나면 그 다음 생이 이어질 것이다. 이러한 이어짐은 ‘나’와 세계가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징후이다. 그런데 마지막 행에 “어디선가 자꾸 상여소리가 들립니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죽음 이후에 이어질 생을 긍정하더라도, 자신에게 닥칠 최후의 사건은 쉽게 이겨내기 힘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삶을 소중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
김태선 (roquen@korea.ac.kr)
2011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당선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