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때 석주관 전투는 일본의 십자군과 조선의 화엄사 승군간에 벌어진 특이한 종교 전쟁이었다.
1597년 8월 6일 조선국 구례에서 쓰다.
들도 산도 성도 모두 태워 버리고 사람을 쳐죽이고 쇠사슬로 손을 묵었다.어머니는 아이를 찿아 울부짖고 아이는 어머니를 붙들고 운다.어린아이를 어머니로 부터 떠어내 어미를 죽이니 두번 다시 볼수 없는 지옥의 참상이다.
일본의 정토진종 승려 경념이 정유재란때 의사이며 종군승려로 일본군들을 따라 다니며 눈으로 본 사실을 매일 일기로 기록한 내용중 구례에서 목격한 내용이다.
임진왜란의 선봉장으로 한양을 접수하고 평양성까지 단숨에 함락시킨 일본장수는 소서행장이다.
그의 딸은 마리아이며 사위는 대마도주 종의지이다.그는 독실한 가토릭신자로 세레명은 아우구스티누스이다.
스페인출신 예수회 신부 쎄스페데스를 조선으로 초대하여 1년 6개월 동안 일본군들에게 미사와 고해를 이끌어준 종군신부역할을 수행하게 하였다. 그는 소서행장이 일본에 데려간 5만의 조선포로중 15000명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레를 주었다.
명나라의 원군이 조선에 와서 심유경을 보내 소서행장과 화친을 맺는다.그때 일본이 내세운 화친조건이다.
1.명나라 황녀를 일본에 보낼것
2.일본과 다시 무역을 할것
3.조선 8도중 4도는 명이 갖고 4도는 일본 소유로 할것
4.조선의 조정대신과 왕자를 인질로 보낼것.
조선은 제외 시키고 명과 일본이 내세운 화친조건이다.
심유경과 소서행장은 무리한 조건임을 생각하고
가짜 외교문서를 만들어 화친을 맺고 일본군은 본국으로 철수한다.
풍신수길은 자기가 주장한 화친조건이 변경된 사실을 알고 크게 분노하여 다시 조선을 침략하니 바로 정유재란이다.
풍신수길은 일본군에게 몇가지 명을 내린다.곡창지대인 전라도를 먼저 점령하여 조선군의 식량을 공급받지 못하게 하라.
조선은 관군뿐아니라 의병.승병등 누구나 적으로 바뀔수 있으니 움직이는 것은 모두 죽여라.
그 증거로 코와 귀를 소금에 절여 보내라는 끔찍한 명을 내린다.
거제 칠천량해전에서 조선수군을 몰살시킨 왜군은 파죽지세로 진주성을 초토화시키고 하동구례를 거쳐 남원까지 진격했다.
이 무렵 당시 화엄사 주지 설홍스님이 승군 300여명을 이끌고 석주관 전투에서 용감히 싸웠으나 왜군의 조총앞에 섬진강을 피로 물들인채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석주관은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171번지 일대이다.그 당시 순국한 7의사묘와 기념비는 있지만 화엄사 승군을 추념하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왜군이 화엄사를 전소시켜 버린것은 석주관 전투때문이다.승군의 거점인 화엄사는 물론 81개에 이르는 산내암자를 모두 불태워버렸다.
소서행장의 18000명 군대는 모두 십자가를 앞세운 가토릭 신자로 구성되었다.
섬진강변 석주관 전투는 일본의 십자군과 조선의 승군간에 벌어진 특이한 종교전쟁이었다.
나라위한 부름에
백성과 승려를 어찌 가리겠는가.
피가 흘러 강이되니
푸른 물이 붉게 물들었네
나라위해 몸바치는 일은
신하된 자의 직분이라
돌조각에 옛일을 새기노니
천추에 길이 남으리라
정유년 전망의병추념비에 새겨진 한귀절이다.
정유재란이 끝나고 각황전을 다시 중건하였다.
계파대사는 각황전 중건기념으로 한그루 홍매화를 심었다.
조선을 구하기 위한 화엄사 승군들이 흘린 붉은 피가 홍매화 붉은 빛으로 피어난다.
첫댓글 4백년전 정유재란에 일본 십자군 18000명과 가톨릭장군 소서행장과 3백명 화엄사승군의 대결이 구례에서 승군이 왜군의 총에 몰살돼도 기념비도 없다니 당시 승려는 천민으로 기록을 안했으나 일본종군승려가 기록을 남겼다 기막힌 역사다
김효운 고려불교승려는 귀족계급이었으나 거란 금 몽골전쟁 백년에 나라가 위급해 승병들이 참전했고 조선왕조 오백년간 승려는 천민이었기 때문에 강제징집 자진승병단 조직으로 나라 구했죠 임진왜란 병자호란에는 병사의 절반이 승병이었죠 그러나 기록은 백분지 일에 불과함 ㅡ전쟁사박사 임영웅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