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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6 : 17 진노의 큰 날
환난 속에서의 소망 ( 박 조준 목사 ) 저자와 견해가 다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리워 있던 두루마리의 네 번째 인을 떼는 것까지 생각했습니다. 본문에서는 어린양 예수님께서 다섯째 인을 떼자 놀라운 광경이 일어나는 것을 사도 요한이 보았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2천년 역사를 통해서 계시록을 읽는 사람들을 혼란하게 만들었던, 너무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웅장한 광경이었습니다.
한 번 상상해 보세요. 네 명의 말탄 자들은 지구를 향해 경고의 여행길을 달려갔습니다. 이제 다섯째 인을 떼시는데 갑자기 무수히 많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요한은 숨을 죽이며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주신 광경을 보았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제단 아래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크게 부르짖고 있었습니다. “거룩하시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상상해 보세요. 앞에는 믿음 때문에 죽은 남녀의 영혼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들은 분명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언제 공의가 행사됩니까?” “언제 우리가 안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언제 보상될 것입니까?” 사실 이 질문은 모든 사람들이 묻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이 질문에 답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은 지금처럼 침묵하셨습니다. 그 순간 요한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면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요? 우리는 모릅니다. 추측하기도 어렵습니다.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소동이 가라앉았을 때 순교자들은 각각 흰 두루마기를 받았고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들과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 신비스러운 순간으로부터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배웁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땅의 거민들을 심판하실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 순간이 오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그 나라에 충성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그리고 그 증거를 위해 순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이 세계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를 알기 원하고 있습니다.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컴퓨터도 대규모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무엇이, 장차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하여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합니다. 장래에 일어날 일에 대하여 가장 권위 있게 쓴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이 짤막한 환상은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예비해야 할 것인가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비관과 절망의 한가운데 처하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도 희망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의 약속입니다. 요한복음 14장 3절에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장차 언젠가 그가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약속을 믿습니다.
부활하신 후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하신 후 그는 하늘로 들리워 올라가셨습니다. 그들은 그의 승천을 지켜보았고 곧 구름이 그를 에워싸 더 이상 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쳐다보던 제자들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리던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여전히 작았고, 심지어 그들 중에는 주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다시 주님을 뵐 수 있을지에 대해 의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주님이 승천하실 때 그들은 주님을 떠나보내는 서운한 마음 그리고 주님이 안 계실 때에 오게 될 여러 가지 어려움을 예상한 두려움으로 하늘을 올려다 보았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때 그들 옆에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
예수님께서 이미 다짐해서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의 재림의 때는 하나님 아버지밖에는 알 수 없는 비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아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신 오신다는 약속은 수세기에 걸쳐 참으로 믿는 사람들의 소망이었습니다. 에밀 브루너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산소와 폐의 관계처럼 소망과 삶의 의미와의 관계도 그러하다.” 다시 말하면 소망이 없을 때 삶의 의미도 없다는 말이 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 온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인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찰스 웨슬레는 7,000곡의 찬송가를 썼습니다. 그 중에 5,000곡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언급했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가 켄터베리주교에게서 왕관을 수여받았을 때, 주교는 여왕에게 왕관을 씌어주며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오 위대한 여인이여! 이것을 쓸 권한을 가지신 분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왕관을 그대에게 바칩니다.” 미국의 유명한 칼럼니스트 가운데 한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때까지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무질서하고 위험하며 제대로 통치되지 못하여 혼란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그 질서를 회복할 것입니까? 누가 과연 세계를 통치할 수 있습니까? 그 대답은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 큰 위로가 됩니다. 왜냐하면 마침내 믿음의 남녀들이 죄사함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고난받은 것, 억울한 일 당한 것이 그때에는 다 갚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에는 믿지 않던 사람들도 그리스도인들이 왜 그처럼 세상에서 어려움을 받으면서도 소망을 가지고 행군했던가를 비로소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믿지 않던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은 무서운 재난이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재림은 그들에게 있어서 최후의 심판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다음 장면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당하는 최후의 심판을 보며 말할 수 없는 공포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어린양이 조심스럽게 여섯째 인을 떼었습니다(12~17절). 갑자기 우주에 혼돈이 가득 찼습니다. 어떤 계기(計機)로도 측정할 수 없을 정도의 강도를 가진 강한 지진이 온 땅을 흔들었습니다. 해는 완전히 가려졌습니다. 요한은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계 6:12~13)라고 표현했습니다. 세계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대도시들이 붕괴됩니다. 요한은 왕, 장군, 부자, 권세자, 종이나 자유인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최후의 심판의 두려움을 피하려고 달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산 속의 동굴로 도망합니다. 바위와 돌 뒤에 숨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그것이 어떻게 피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까?
그들은 필사적으로 울부짖습니다. 본문에 기록한 대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잔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책을 덮으시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날이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최후의 심판에 앞서 여러 가지 예비 심판의 환상은 성경 66권 속에 골고루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을 “진노의 날”(습 1:15; 롬 2:5)이라 말하기도 했고, 아모스는 “여호와의 날”(암 5:8)이라 불렀고,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고전 1:8; 빌 1:6)이라 불렀습니다. 흔히 그것은 ‘큰 환난’이라 불립니다.
인류 역사를 통해 심판의 날이 있어 왔습니다. 하나님의 최초의 심판은 역사의 첫 시대에 아담과 하와에게 내려졌습니다(창 3:16~19). 그들의 원죄가 그 모든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의 날과 영원한 저주를 가져다주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노아의 가족을 제외한 모든 후손들을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그 밖의 심판들로는 바벨탑에서의 언어의 혼란, 소돔과 고모라에 내린 불의 심판, 이스라엘 민족의 포로 생활과 분산 같은 것이 있습니다. 더구나 신약성경에 보면 최후의 심판을 명확히 제시합니다. 예루살렘 밖의 광야에서 세례 요한은 장차 올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그는 설교를 들으러 나온 사람들에게 참된 회개만이 심판의 날을 피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 다음 예수님 자신이 오셨습니다. 예수님 역시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흔히 밭과 추수하는 일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경고하셨습니다.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30). 또 다른 곳에 보면 예수님이 유대 선생을 만나 그에게 심판을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7)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의 진노에 대해서도 어떻게 피할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8절에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 했습니다.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을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부모 된 사람은 자녀들이 잘못된 길로 나아갈 때 그들을 훈계해야 합니다. 심판이 없이는 공의도 없습니다. 우리는 사실 아이들을 책망하고 싶지 않습니다. 부모도 괴롭습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선 훈계를 하는 부모의 마음이 훈계를 받는 자식의 마음보다 더 아플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해가 될 행동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좋은 자녀 양육이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의 유익을 위해 심판을 경고합니다. 또한 같은 목적을 위해 심판을 결행합니다. 불순종하는 자녀인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을 거역할 때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은 때를 기다리십니다. 그가 우리의 죄를 벌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에게 합당치 않는 일입니다. 공의는 심판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불순종의 과오로부터 구원하려고 애쓰십니다.
그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장차 있을 심판을 거듭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를 회개하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시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시며 다시금 제 길을 걷게 하시려고 네 명의 말탄 자들과 같은 전령관을 보내셨습니다. 최후의 심판은 다가오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 날을 싫어하셔서 세상이 모두 구원받을 때까지 미루고 싶어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심판을 영원히 철회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결코 철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어렸을 때 자주 부르던 이런 찬송가가 있습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
실제로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순전하십니다. 우리가 가장 순전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 분의 순전하심에 비해 아무것도 아닙니다. 깨끗한 흰 옷을 입은 사람도 방금 쌓인 눈 속에 서 있으면 그 옷이 어둡고 색이 바랜 것처럼 보이듯이, 경건해지려는 인간의 노력은 하나님의 순전하심에 비한다면 더러운 누더기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악을 방관하실 수 없습니다. 악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심판의 날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계속 행하십니다.
우리는 니느웨 백성에게 경고했던 요나 선지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네 명의 말탄 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선지자는 마지못해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왕과 백성들이 모두 경고에 따랐습니다. 그들은 베옷을 입고 재를 뿌리며 회개했습니다. 요나의 설교를 통해 자기의 죄를 회개한 사람의 수는 12만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아마 이것은 역사상 최대의 영적인 자각의 사건일 것입니다.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였으므로 하나님은 생각을 바꾸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시고 심판의 손길을 거두었습니다. 실제로 그 후 150년 동안 니느웨에 심판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백성들이 다시 악해지기까지 몇 세대 동안 심판이 연기되었습니다. 그 후에 니느웨는 침략군들에 의해 멸망하였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심판이 당분간 연기될 수는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계획을 연기하기 위해서 온 성이 다 회개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이 본 환상을 생각해 보세요. “제단 아래”의 성도들은 “죽임당한” 믿음의 형제들이 그들과 함께 되기까지 더 오래 기다리라고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 순교자들과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증거에 충성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잡을 때, 우리가 충성스럽게 증거할 때 우리도 역시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는 그로 인해 죽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구원을 받는 것은 쉽지만 결코 “값싼 은혜”는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은 하나님께는 너무나 큰 대가였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어떤 일을 남겨 놓아야 할지 결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 늘 쉬운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일이 복잡한 갈림길에 서게 될 때 어느 한편을 택한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심판이 연기될 수 있도록 악과 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바로 그 일을 하기 위해 우리가 부름받은 것입니다. 말탄 자들은 계속 우리를 향해 달려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성경은 불법이 급속히 퍼져 이 세계에 너무나 만연해질 것이므로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인류를 구원할 수밖에 없다고 예언합니다. 성령으로 감동된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 1절 이하에서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7절에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여러 중요한 측면에서 두 갈래의 평행선을 발견하게 됩니다. 불법이 번성하고 도처에 대환난들이 있을뿐 아니라 경고가 고조되고 피난처가 예비됩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120년 동안 하나님을 전파했습니다. 그동안 그는 백성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경고했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을 비웃고 경멸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유사이래 처음으로 많은 구름들이 하늘에 모여들었습니다. 동물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비가 내립니다. 홍수가 나서 땅을 뒤덮었습니다. 인간이 회개하지 않는 한, 처참하고 전면적인 결과를 초래할 어떤 일이 다시금 일어날 것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미래에 희망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새로운 사회적 질서가 찾아온 것이지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가 친히 가지고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44). 주님 맞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계 6 : 17 진노의 큰 날 -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
17-1) 진노의 날 :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아무도 피할 수 없는심판= 여호와의 날. Day of the Lord [히] [句](yom yhowah) 종말론적 표현.
그들의 진노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스 오르게스 아우톤'(*)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진노를 의미한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성경 여러 곳에서 동격으로 언급된다.
이러한 하나님과 어린양의 진노는 역사적 사실이며 동시에 종말론적 심판으로서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대적하는 악에 대한 보응이다(Mounce).
큰 날의 헬라어 '헤 헤메라 헤 메갈레'(*)는 문자적으로 '그 큰 그날'이란 의미로 '큰'이 강조된 표현이다.
이는 악의 무리들에게 임하는 심판의 공포로 인해서 외쳐진 용어로(Beckwith)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날임을 시사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진노의 범위가 전 우주적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Mounce, Johnson).
* 욜 2: 11 - 여호와께서 그의 군대 앞에서 소리를 지르시고, 그의 진영은 심히 크고 그의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
* 습 1: 14 -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 도다.
* 유 1: 6 -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1) 구약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
(2) 이스라엘에게는 구원과 희망의 날.
(3) 대적에게는 멸망과 형벌의 날.
* 암 5: 18-20 – 18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 19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20 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
* 사 13: 6,9 - 6 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9 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 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 습 1: 7 -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
* 겔 13: 5 – 너희 선지자들이 성 무너진 곳에 올라가지도 아니하였으며, 이스라엘 족속을 위하여 여호와의 날에 전쟁에서 견디게 하려고 성벽을 수축하지도 아니하였느니라.
* 욜 1: 15 – 슬프다.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같이 전능자에게로부터 이르리로다.
* 옵 1: 15 -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네가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4) 말일.
* 사 2: 2 -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 렘 23: 20 - 여호와의 진노가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그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끝날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
* 단 10: 14 - 이제 내가 마지막 날에 네 백성이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 이는 이 환상이 오랜 후의 일임이라 하더라.
* 호 3: 5 -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하나님께서 심판과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자기를 나타내시는 날이다.
* 학 2: 6-7,21-22 – 6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7 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21 너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말하여 이르라.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 22 여러 왕국들의 보좌를 엎을 것이요, 여러 나라의 세력을 멸할 것이요, 그 병거들과 그 탄 자를 엎드러뜨리리니, 말과 그 탄 자가 각각 그의 동료의 칼에 엎드러지리라.
* 롬 1: 18 -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7-2) 누가 서리요. :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본문은 심판으로 인한 멸망이 너무 엄청나므로 그 어떤 죄인도 피할 길 없이 무력함을 나타낸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 티스 뒤나타이 스타데나이'(*)는 부정과거 수동태 부정사 구문으로 수사의문문이다.
이는 본문을 말한 주체가 15절에 언급된 모든 계층을 대표한 인간들임을 나타낸다(Swete).
이것은 그들이 피할 길 없는 엄청난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하여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음을 시사한다.
심판으로 인한 멸망이 너무 엄청나므로 그 어떤 사람도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계 6: 15에서 언급된 모든 계층을 대표한 사람들을 말한다. 이것은 그들이 피할 길이 전혀 없는 하나님의 큰 심판을 직면하여 말할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이 이 땅의 종교계에 임하게 된다는 것을 밝히 말씀하고 계신다.
* 나 1: 6 -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 도다.
* 말 3: 2 -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 보자.
다섯째 인과 여섯째 인은 핍박과 순교와, 큰 지진의 징조를 나타낸다.
이 세상 종말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참된 신앙에 대한 핍박이 있고 순교도 있을 것이며 또 큰 지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징조들을 볼 때 성경의 예언들을 기억하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고 또 고난과 핍박과 순교도 각오하며 역사적 기독교 신앙 곧 성경적 신앙, 옛신앙을 굳게 지켜야 한다.
창조자, 섭리자,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작정하신 일들을 다 이루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성경의 교훈대로 삼위일체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