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전 11: 16 논쟁하려는 생각 -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찌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 )
본 절에서 바울이 이 말을 언급하는 것은 헬라 인들의 국민적 특성인 논쟁이 무익하며 잘못된 습관임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의 인정된 규례이므로 누구든지 이 문제에 대해 변론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1]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
논쟁하려는(*, 필로네이코스)은 '사랑하는'(*, 필로스)과 '싸움'(*, 네이코스)의 합성어로서,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 변론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기기 위해서 '변론을 위한 변론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2]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1) 하나님의 모든 교회
단순히 '모든 교회'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라는 것을 부가하여 수식하는 것은 모든 교회들의 거룩성과 존귀함을 나타낸다.
이는 헬라 인들이 교회의 관습에 대해서 경솔하게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것과 대조되는 것으로 교회에 대한 존경을 강조한다.
(2)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관례(규례, 規例)가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① 변론하는 것이다(Calvin, De Wette, Edwards, Meyer).
②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는 것이다(Bengel, Godet, Maier).
두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전자의 견해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변론하는 것이 헬라인들의 관습(custom)이라고 하나(Mey-er), 그것은 무익한 습관(habit)에 불과한 것이다(Godet).
더욱이 이제까지 바울이 공예배 때에 여자가 수건을 써야 한다는 관습의 정당성에 대해 논증해 왔기 때문에 본 절은 그런 논증의 결론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3] 주 안의 여자와 남자 : 박조준 목사
본문 말씀은 시대적으로 또는 지역적으로 국한된 의미에서 이해하여야 될 말씀입니다. 여기서 취급되고 있는 상황은 이미 우리와는 상관없이 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서 매우 흥미 있고 요긴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초대교회의 내부 사정이나 문제들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 당시에 일어난 문제들을 영원한 원리에 입각해서 해결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문제를 다룰 때, 칭찬하는 일로부터 시작합니다.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아마 고린도에 있는 많은 교인들이 여기 말한 대로 행했을 것입니다. 교회가 좋은 소문과 그리스도의 율례와 제도를 계속해서 지켰습니다. 비록 어떤 일에 있어서는 탈선하기도 하고 부패하기도 했지만 좋은 점도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을 책망할 때 그의 장점을 먼저 칭찬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책망은 악의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선의로 충고하여 그 충고에 관심을 가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주님의 교회에 여자들이 너울을 쓰지 않고 집회에 참석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사이 서양 문명의 영향을 받은 데서는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만 옛날 동양에서는 여자들이 밖에 나갈 때는 모두 너울을 쓰고 다녔습니다. 40~50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 부인들이 두건을 썼었습니다. 지금도 중동에는 여자들이 너울을 쓰고 다니는데 눈만 겨우 보게 구멍을 내고 머리부터 온몸을 가리우고 다니는 것이 상례입니다.
너울은 복종의 표시였습니다. 아랫 사람이 높은 사람 앞에 나아갈 때 반드시 너울을 썼습니다. 그런데 남자는 가장(家長)이란 의미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위치적으로 낮은 것이라고 취급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가 예배시에 무엇을 쓰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잘못이고, 여자가 너울을 쓰지 않고 나오는 것도 잘못으로 생각했습니다.
본문 말씀 3절에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인류의 처음이며 주요, 주권자이십니다. 그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가 비록 직책과 권위에 있어서 뛰어나신 분이시지만 하나님이 그의 머리십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머리이신 것같이 그리스도는 인류의 머리요, 남자는 여자의 머리입니다.
물론 남자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같은 지배적인 권위는 가지고 있지 않지만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하고 남자의 위치를 빼앗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여자의 위치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이 성경의 원리를 생각해서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고린도교회의 여성들이 이 원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오늘과 같은 민주 사회에서 차별 대우를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질서가 서야 민주주의가 되는 것이지 이 질서가 무너지면 민주주의가 아니라 혼란을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 가정은 민주주의입니다. 그러나 그 가정을 대표하는 가장이 누구냐고 할 때, 내외가 살 때는 남편이 가장이고, 자녀들이 있을 때는 아버지가 가장이 됩니다. 물론 본문을 그대로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20세기의 눈이 아니라 1세기의 눈을 가지고 읽어야 바르게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할 것은 동양 사람들의 생활에서 너울이란 어떤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살고 있던 시대에는 점잖은 동양의 여자라면 너울을 쓰지 않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헤스팅의 성경 사전에 보면 “동양의 거리나 마을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는 부인은 너울을 쓰지 않고는 절대로 외출하는 일이 없었다. 만일 너울을 쓰지 않고 외출을 하게 되면 창기로 오해를 받기가 쉬웠다”라고 했습니다.
너울은 두 가지 의미가 있었는데 그 하나는 아랫사람이라는 표시요, 다른 하나는 강력한 보호 수단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서양은 문화적으로 그 의미가 정반대입니다. 여자가 머리에 너울을 쓰는 것은 “자기가 누군가의 권위 밑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를 머리에 쓰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윌리암 람제이는 이것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양에서는 너울이 부인의 힘과 명예와 존엄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머리에 너울을 쓰고 있으면 여자는 어디에 가도 안전했고 또 사람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여자의 모습이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거리에서 너울을 쓴 여자를 쳐다보는 것은 매우 무례한 짓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너울을 쓰지 않으면 그 여자는 아무것도 아닐 뿐 아니라 모욕을 당해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여자의 권위와 존엄은 전신을 덮는 너울을 벗을 때 함께 사라지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그 당시의 여자에게 있어서 너울이 갖는 의미가 얼마나 크고 중요했는지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자의 지위를 나타낼 뿐 아니라 여자의 정숙과 순결성을 지켜주는 강한 방패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의 눈으로 본 여자의 지위에 대해서도 알고 지나가는 것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유대의 율법에 의하면 여자는 남자보다 훨씬 낮은 위치였습니다.
창세기 2장 22~23절을 보세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2장 18절에 보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은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했습니다. 남자를 돕는 배필로서 여자를 지었습니다.
옛날 랍비의 주석에는 이런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자를 머리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여자가 교만해져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자를 눈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여자가 정욕이 강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여자를 귀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여자의 강한 호기심을 억제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여자를 입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여자가 말쟁이가 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여자를 심장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여자가 질투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이 여자를 손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여자가 욕심쟁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이 여자를 발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여자가 이리저리 다니며 말참견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자를 갈빗대로 만드셨습니다. 갈빗대는 몸 안에 숨겨져서 밖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정숙함이야말로 여자의 제일의 덕성이 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불행한 것은 옛날 유대 율법에서는 여자는 단순한 물건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회당에서는 여자들이 함께 앉아 예배할 수가 없었고, 남자들과 완전히 떨어진 복도나 그밖의 장소에 모였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남자만 예배당 안에서 앉아 예배 드리고 여자는 저 로비에서 선 채 예배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일을 지금 생각이나 할 수가 있습니까? 그것을 보게 되면 누가 뭐라고 해도 지금 여권 신장이 얼마나 되었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아도, 예수님 때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셨을 때 기록을 보면 여자와 어린애들 외에 오천 명이 먹고도 열두 바구니가 남았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여자와 어린 아이는 수에도 치지 않았어요.
유대인의 율법과 관습으로 볼 때, 어떤 의미로도 여자가 남자와 동등한 주장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를 사도 바울이 언급하게 되었을까요? 여자들로 인하여 생기는 문제가 바로 고린도교회에서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고린도는 아마 세계에서 가장 음란한 도시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음란한 도시에 처하여 있는 교회가 엄격한 규칙이 없으면 모두가 해이해져서 그리스도인이 방종하다는 비난을 들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10절에 보면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에 둘지니라”하는 이상한 표현이 있습니다.
천사들 때문에 여자가 너울을 써야 한다고 했는데 윌리암 바클레이는 창세기 6장 1~2절에 있는, 천사들이 사람들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끌려 범죄했다는 옛날 이야기를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해석했습니다. 너울을 쓰지 않는 여자는 천사들에게도 유혹이 된다는 말입니다. 옛날 랍비의 구전에도 여자의 긴 머리카락의 아름다움이 천사들을 유혹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자가 아름다운 것은 좋지만 그것이 유혹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생각한 말씀으로 보아서 바울이 너무 여자를 눌러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11~12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아니하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를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서로를 위하여 지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남자를 위하고 남자는 직접적으로 여자를 위하여 지어지지 않았으나 여자를 돕고, 위로하고, 보호하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습니다. 사람은 서로가 도움을 받아야 하고, 서로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어느 한쪽이 노예가 되고 어느 한쪽이 폭군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처음에 만들어졌듯이 그 이후에 남자는 여자에게서 낳아지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권위와 복종은 남녀의 관계에서 적합해야만 합니다. 여자가 자기의 위치를 지켜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자도 자기의 권력을 남용하지 않도록 명심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22절에 보면 주 안에서 이루어진 부부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말씀했습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바울의 이론은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태초에 남자와 여자를 만드실 때에 그렇게 제정하셨다고 합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은 원리인 것을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부부 생활을 하는데 서로가 다른 남녀가 모여서 가정을 이루게 될 때 처음에는 모든 것이 신비하고 좋기만 합니다. 그래서 처음 결혼한 한 달을 ‘밀월’(蜜月)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꿀처럼 달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미 결혼생활을 해 보신 분은 다 이해하시겠지만, 세월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고 한 달이 지나면 결혼 생활이라는 것이 꼭 그렇게 단 것만은 아닙니다. 씁쓸할 때도 생기곤 하죠.
왜 그렇습니까? 모든 것이 다른 사람이 함께 살려고 하니까 서로 잘 맞지 않는 일이 생기곤 하거든요. 그래서 의견의 차이가 생기고, 말다툼이 생기고 성격의 차이에서 오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모가 난 것이 서로 부딪치게 됩니다. 그래서 오래 사는 동안에 사랑이란 매개체를 통해서 서로의 개성을 죽이고 양보해서 서로가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툭탁거리며 다투다가 결국은 서로가 헤어지는 비극을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내들아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여기 ‘구주’라는 말에는 ‘보호자’(Preserver)라는 뜻이 있습니다. 남편은 그의 몸인 아내에 대해서 머리로서, 구주로서 행동합니다. 그에게는 아내를 돌보고 보호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 아내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교훈이요, 창조의 질서입니다. 여성도님들은 오해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은 여성을 무시하거나 차별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몸과 머리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교회는 몸이요, 그리스도는 머리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있어서도 여자는 몸이요, 남자는 머리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몸을 전체로 생각할 때 비교적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이 몸은 지체들의 집합이 아닙니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붙어 있다고 해서 몸이 아닙니다. 몸은 유기적이고 자활적인 결합체입니다. 그것은 하나요, 전체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정도 둘이 하나입니다. 사실 머리와 몸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내 마음과 두뇌와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기를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 몸은 그것을 표현하는 방편입니다.
만일에 내 몸이 나와는 상관없이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경련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얼굴이 실룩거리는 분을 보셨습니까? 그 마음으로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 얼굴의 근육이 자꾸만 움직입니다. 이것은 정상이 아니라 병입니다. 이런 병이 들면 어떤 목적에 의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 움직입니다. 그의 마음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경련입니다.
어떤 가정은 남편과 아내가 따로따로인 것을 봅니다. 그것은 혼란이요 이별입니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남편은 가정의 머리로서 모든 것을 통제합니다. 아내가 상의없이 멋대로 하는 일이 없습니다. 어떤 가정은 중풍을 일으킨 몸과 같습니다. 사람은 팔 다리를 움직이기를 원하지만 말을 듣지 아니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 말은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여자는 여자로서의 고유한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경의와 존경심이 가득한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그 아내를 보호하고, 양육하고, 사랑하고, 돌봐주고, 자기 아내를 존귀하게 여기라는 교훈입니다. 사도 바울의 교훈은 아내 된 사람은 자기 남편을 기쁘게 하고 남편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 그를 돕고 보필해서 남편의 기능을 잘 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에 크게 공헌한 분들을 보십시오. 그 아내가 훌륭한 경우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런 권면을 했습니다.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남편을 위해서는 겸손과 온유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계속 권면했습니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서 값진 것이니라” 했습니다. 이 원리 안에서 최선을 다 하십시오.
그리고 남편에게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아내에 대해서는 복종이요, 남편에 대해서는 사랑입니다. 이 말은 남편만 아내를 사랑해야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 균형이 언제나 유지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남편에게는 아내의 머리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남편은 언제나 사랑으로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이처럼 남편의 다스림은 사랑의 다스림입니다. 독재가 아닙니다.
남편이 아내를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참사랑입니다. 아내를 위해 죽기까지 남편이 그 아내를 사랑한다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런 차원에서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보다 더 높은 차원의 사랑은 없습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바울은 여기서 모든 사람이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랑을 알기 원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교회에 가지는 관심을 진정으로 인식할 때 모든 예수 믿는 남편들이 자기 책임을 바로 감당할 수 있을 것으로 믿어서 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것이 남편을 위한 교훈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교회가 보잘것없어도, 부족해도, 마음에 좀 들지 않아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도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교회가 영광스럽고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영광스럽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게 되는 비결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의 교회가 완전해져서 비평을 받을 여지가 없기를 바라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열망이요 사랑입니다. 세상 사람은 자기 중심적인 사랑을 합니다. 그러나 참사랑의 특징은 자기를 생각지 아니합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때 교회가 행복스럽고 가정이 행복스러워질 것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