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부터 고려인삼은 공물 또는 왕실의 재정확보를 위해 사용되었고, 특히 고려시대부터는 국가의 중요한 무역품으로 취급 되었다. 또한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인공재배와 홍삼가공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국가 재정에서 인삼 교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커져갔다. 이처럼 다양한 용도의 인삼은 17세기 후반 일본과 조선 그리고 중국을 잇는 동아시아 삼국교역의 핵심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조선의 고려인삼을 매개로 일본의 은과 중국의 비단이 교류 하였다.
고려 말부터 인삼 교역량 증가와 민간의 공납부담증가로 인한 무분별한 채굴로 남획이 심해지면서 산삼이 희귀해지게 되었다. 따라서 일부 사람들은 산삼의 종자나 묘삼을 비밀리에 깊은 산속에 심어 인공재배하는 산양삼 재배법을 실시했는데 이것이 인삼재배의 시초라고 추정된다.
문헌상 인삼이 언제부터 재배되기 시작했는지 정확한 연대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고려시대 전남 화순군 동복면의 최씨 성을 가진 자가 중병을 앓자, 그의 부인이 남편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산신령에게 기원하여 산삼을 얻어 그 종자를 재배한 것이 인삼재배의 시초라고 한다. 그러나 전설로 이야기될 뿐 뚜렷한 문헌적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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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하나는 풍기인삼 재배기원설이다. 15세기 중반 조선 중종 주세붕(1488~1544)이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산삼종자를 채취하여 인삼재배를 시작하여 보급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역시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조선조「정조실록」에 "가삼 재배한 인삼이 성행한 이후 자생 인삼을 공납치 아니하고 모두 서울 인삼상인이 청부받아서 경상도 가삼을 사용한 듯 하다." 라는 기록이 있어, 이미 이 시기에는 인삼의 인공재배가 성행하였음을 확인 할 수 있으며, 이보다 훨씬 이전에 인삼의 재배가 시작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