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부평이야기8 - 인천육군조병창
지난 일요일 아침 KBS에서 방영되는 TV쇼 진품명품 프로그램을 통해 부평역사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유물이 소개되었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을 보고 방송작가가 출연을 제안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개인의 소장품을 소개하고 가치를 매기는 포맷을 갖고 있는 이 프로그램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유물이 소개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그만큼 소개되는 유물의 의미가 중하다는 것 일 것이다.
지난 여름 필자가 몸담고 있는 부평역사박물관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일제강점기 부평에 있었던 인천육군조병창 제1제조소에서 만들어진 총검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기증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기증자는 일본의 한 경매 사이트에서 조병창 제조 총검이 거래되는 것을 확인하고 사비로 구입하였으며, 이후 이 유물이 보다 가치있게 활용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박물관에 연락을 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인천육군조병창은 뭘 하는 곳이었을까?
‘조병창’ ‘부평조병창’ ‘인천조병창’ 등 제각각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일본 육군성의 자료속 정식 명칭은 인천육군조병창이며 이 중 부평제조소는 제1제조소로 기록되어 있다. 중일전쟁 발발 후 일제는 전장으로의 원활한 물자공급을 위해 한반도에 무기생산을 위한 대규모 공장 건립을 계획하고 적당한 부지를 모색하였다. 그리고 낙점된 곳이 바로 부평이었다.
왜 부평이었을까? 당시 부평은 인천항과 경인철도를 이용한 물자 수송이 용이하였고, 서울과 가까운 지리적 특성에 따라 공장 건설 및 운영에 필요한 인력의 모집도 수월할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부평은 분지의 지형으로 연합군의 공습을 피할 수 있다는 지리적 이점도 있었다. 1939년, 일본 육군은 부평에 조병창 건설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일본군 제 20사단이 관할하던 부평연습장 70만 8000평을 우선 이관받기로 하였고, 인접한 민간 토지 33만평을 추가로 매입해 마련하였다. 오늘날 부평구 산곡동 및 부평동 일대다.
▲ 부평연습장 일대의 사진(부평역사박물관 소장)1920년대 초에 조성된 부평연습장에서 일본군은 포격 연습을 하였다.이후 인천육군조병창 부평제조소 건설을 위한 부지로 양도되었다.
1940년부터 해방 전까지 조병창에서는 수많은 무기가 생산되었다. 개창 당시 초기 생산목표는 소총 20,000정, 경기관청 100정, 총검 20,000정, 군도 천 자루 제조였으나, 실제 월간 생산한 무기는(1943년 기준) 총검 10,000정, 소총 9,000정, 30㎏ 이하 소형 폭탄 2,800개, 100㎏ 중형 폭탄 2,000개에 달했다.
누가 만들었을까?
대규모 조병창의 건설은 물론이거니와 개창 이후 무기 생산을 위해서는 수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우선 조병창 건설부터 살펴보자. 조병창은 군 시설물 공사였으나 공사는 민간 기업이 담당했다. 다다구미, 시미즈구미, 간토구미 등 당시 일본 굴지의 건설회사가 참여하였다. 민간기업이 건설을 담당하였으나 노동은 근로보국대를 통해 이루어졌다. 강화와 김포 등지에서 근로보국대가 소집되었고, 학습권을 박탈당한 인천과 서울의 학생들은 노동력 착취의 희생양이 되었다. 개창 이후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생산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희생된 것은 조선인이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매일같이 돌아가는 날카로운 기계 앞에 세워졌다. 무기를 생산해내는 곳인 만큼 공장 내에서 부상을 입는 사람도 많았다.
몇 해 전, 일본육군조병창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는 한 할머니를 만나 당시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할머니는 부평 산곡동에 거주하면서 소화고등여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당시 마을 반장이 위안부 모집을 위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여학생의 이름을 적어가는 등 분위기가 험악했다고 했다. 그러다 조병창에서 일하면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는 하는 수 없이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할머니는 조병창 내 병원 서무과로 배치를 받았는데, 하루에도 7-8명의 사람들이 손가락이 잘리거나 다리가 절단 돼 병원으로 왔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노동의 강도는 비교적 약한 편이었으나 매일같이 부상당한 사람들을 지켜봐야 했던 것은 지금까지도 잊혀 지지 않을 만큼 끔찍한 일이었다.
그 많은 무기들은 무엇으로 만들었을까?
대규모 부지에 군수공장을 세웠고, 그 안에서 일할 노동력까지 강제적으로 확보하였으니 이제 남은 것은 무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원료.
일제는 무기생산에 필요한 원료 확보를 위해 무자비한 광산 채굴은 물론 전국적으로 금속류 공출에 사활을 걸었다. 놋그릇과 제기, 세숫대야 등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물품은 물론이거니와 사찰의 불상과 동종에 이르기까지 금속으로 된 것은 그야말로 싹 거둬간 것이다. 이렇게 공출 된 금속기의 최종 종착지는 조병창이었다. 놋그릇과 제기는 뜨거운 쇳물에 녹여진 후 서슬퍼런 기계 앞으로 끌려 온 조선인의 손을 거쳐 총검이 되고 폭탄이 되었다.
▲ 인천 경정(京町)의 동유기 헌납 기념사진 (부평역사박물관 소장) 대다수가 강압에 의한 공출이었지만 일부 친일세력에 의한 자발적 헌납도 이루어졌다.▲ 공출보국(供出報國) 사기그릇 (부평역사박물관 소장) 일제는 금속기를 공출하는 대신에
공출보국(供出報國)이라는 글씨가 적힌 사기그릇을 배급하여 사용토록 했다.▲ 인천육군조병창 부평제조소에서 만들어진 총검(부평역사박물관 소장) ▲ 총검 확대모습(부평역사박물관 소장) 총검 날 안쪽으로 새겨진 별모양의 마크가
인천육군조병창 부평제조소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나타낸다.
해방, 그리고 그 후
온 민족이 바랐던 해방의 날이 왔고 일제는 한반도에서 철수하였다. 그러나 일장기 대신 태극기가 휘날릴 것이라 생각했던 조병창 본부 건물에는 성조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해방 후 인천항을 통해 들어 온 미군이 인천육군조병창을 접수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발발로 인해 철수 한 미군은 1·4 후퇴를 기점으로 하여 다시 조병창을 접수하였다. 이후 이곳을 미군수지원사령부(애스컴시티) 기지로 정하고 휴전선 인근에 있는 주한미군 부대에 전쟁물자와 식량을 보급하는 보급창 역할을 담당했다. 1973년 6월 30일 한국 국방부로 기능이 이전하면서 많은 병력들이 경북 왜관 등지로 이전하여 애스컴시티는 폐쇄되었다. 다만 빵과 과자를 만드는 부대는 오늘날까지 남아 캠프마켓으로 불리며 오랜 주둔의 역사를 쓰고 있다.
근래에 일본육군조병창으로 사용되었던 캠프마켓 부지의 반환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오르내리고 있다. 정확한 시점을 알 수는 없지만 오랜 시간동안 닫혀 있었던 문이 열리는 날이 머지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지자체나 시민들의 관심은 부지 반환 이후 이곳의 활용방안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아 아쉽다. 이 땅에 서려있는 역사의 무게를 볼 때 현장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선행되는 것이 맞지 않을까?
방송 녹화에 참여하는 학예사가 방송국으로 가기 전 고민을 이야기한다. 프로그램의 포맷이니만큼 유물의 희망가를 적어야 하는데 도저히 금액을 적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기증자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민족의 아픈 역사를 온전히 품고 있고 있는 유물에 산술적 가치를 매기는 것이 영 불편한 것이었다. 결국 희망가를 적지 않았고 대신에 부평의 역사에 관심이 높은 지역민이 기증해 준 고귀한 유물이라는 말로 방송을 마무리했다.
애스컴시티 철수 후 조병창 옛 터 일부에는 아파트가 들어서는 과정 중 현장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당시의 조병창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은 남아있지 않다. 역사적 현장이 아무리 잘 보존되어 있더라도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면 그건 곧 죽은 공간이나 마찬가지이다. 비록 조병창의 당시 모습을 찾을 수는 없지만, 유물을 기증한 분처럼 지역의 역사에 대한 꾸준한 관심을 갖는다면 살아있는 역사가 되지 않을까?
글· 사진 김정아 부평역사박물관 총괄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