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길곤 교수 칼럼]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이라는 희곡을 보면 못된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를 재판관이 통쾌하게 혼내 주는 장면이 나온다. 고리대금업자는 채무자의 살 1파운드를 요구하지만 재판관은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1파운드의 살을 가져가라고 판결한 것이다. 그러나 이 판결이 끝난 후 이어지는 장면은 더욱 흥미롭다. 채무자는 재판관의 명판결에 감사해 하면서 10Kg 정도의 금을 사례금으로 지급하려 한다. 재판관은 이를 사양하지만 그 대신에 채무자가 가지고 있던 반지를 요구한다. 재판관의 이런 행위를 부패라고 볼 수 있을까? 세익스피어는 ‘수고비’와 ‘성의 표시’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뇌물이라는 말은 쓰지 않은 것을 보면 부패라고 보지는 않은 듯하다. 하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행위는 부패로 볼 여지가 충분히 있다.
위의 사례는 우리나라에서 '공직부패란 과연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먼저 우리나라의 부패정도를 측정한 각종 지표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의 2013년 부패인식지수(corruption perception index) 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55점으로 177개국 중 46위이다. 2010년 39위를 차지한 이후 3년 만에 7계단 떨어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34개국 중에는 27위로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또 국민권익위원회가 2013년 시행한 부패인식도 조사 결과를 보면 국민의 54.3%가 "공직사회는 부패했다"고 대답했다. 이 조사 결과는 지난 10년 간 큰 변화 없이 그대로 유지돼 왔다. 이것은 우리나라 국민들이 공직사회가 부패했다고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국제투명성기구에서 2013년 국내 1,500명을 대상으로 뇌물 제공 경험을 조사한 국제부패지수(global corruption barometer)에 따르면 5% 미만만이 "뇌물 제공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이는 전 세계 평균인 25%보다는 매우 낮은 수치이다. 국민권익위의 조사에서도 뇌물 제공 경험이 있는 시민의 비율 역시 매우 낮으며 공무원의 경우 "공직사회가 부패했다"고 응답한 비율은 3% 미만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실제 부패 경험은 크지 않음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공직사회 윤리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 수준 높아져
이처럼 공직부패에 대한 인식과 실제 경험 간의 차이, 그리고 시민과 공무원의 인식 차이는 우리나라 공직부패 문제 해결을 위한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첫째, 시민들의 공직사회에 대한 윤리적 기대 수준이 매우 높아졌다는 점이다. 뇌물을 받거나 불법행위를 하는 고전적 부패의 개념을 넘어서 투명하고 공정하게 정책을 만들고 시민을 위해 봉사하는 행정서비스를 제공하는 수준의 공직윤리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즉 공직자들에 대하여 청렴(integrity)의 윤리를 기대하면서 직무 관련성이나 대가성이 없는 알선·청탁 행위도 부정한 행위로 간주하는 국민들이 늘어나고 있다.
둘째, 공직자의 청렴에 대한 높아진 기대 수준은 강력한 법과 제도에 따른 처벌 중심의 반부패 정책의 한계를 보여 주고 있다. 정부는 지난 20년 동안 공직자 재산공개, 금융실명제, 부패방지법 제정, 공무원행동강령 제정, 부패방지위원회(현 국민권익위원회) 설치, 공익신고자보호제도 도입 등 무수히 많은 법과 제도를 시행하였고 나름대로 결실을 거두어 왔다. 하지만 공직자들의 청렴에 대한 획기적인 인식의 전환이 없이는 윤리적 기대 수준이 높아진 국민과 공직자의 인식 차이는 좁혀지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셋째, 공직자의 청렴에 대한 인식의 전환은 공직의 본질적 가치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최근 정년 보장, 여유로운 시간, 금전적 보상 등과 같은 외재적인 동기 때문에 공직을 선택하는 대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 율기(律己)편에서 “청렴은 지방관(수령)의 본래 직무로 모든 선(善)의 원천이며, 모든 덕(德)의 근본”이라고 하였다. 공직이라는 자리가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어려운 자리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직업 안정, 명예, 부를 달성할 수 있는 방편으로 공직을 선택하는 사람들에게 시민들이 존경과 신뢰를 보내기는 쉽지 않다.
넷째, 청렴이 공직자의 핵심적인 가치라는 공직자의 인식 전환 못지않게 민간의 부패에 대한 반성 역시 필요하다. 뇌물과 청탁을 받는 공직자의 다른 한편에는 이를 제공하는 기업인들과 시민 역시 존재한다. 국민권익위원회가 조사한 2010년도 청소년 부패인식도 조사 결과에 따르면 “불법으로 10억 원을 주면 감옥을 가더라도 받겠다”라고 응답한 비율이 무려 21%나 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성숙한 시민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 부정부패는 공무원만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사회 전체의 문제이다.
청렴은 불편한 게 아니라 경쟁력이 된다
다섯째, 청렴은 불편하고 힘든 것이 아니라 이제 경쟁력이 되고 있다. 다산은 “욕심이 큰 사람은 반드시 청렴하려 한다. 사람이 청렴하지 못한 것은 그 지혜가 짧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국내적으로는 관행에 따라 불법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다가 곤욕을 치르고 있는 한국수력원자력의 사례가 그렇고, 각종 인사 청문회에서 과거의 불법행위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사회 지도층의 사례가 그렇다. 국제적으로도 유엔의 반부패협약이 170여 개 국가에 의해 비준되면서 리베이트와 뇌물을 경쟁력으로 생각하던 다국적 기업들이 점점 더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부패의 영어 어원은 함께(cor)와 파멸하다(ruptus)가 결합된 말이다. 한자로 부패는 썩어서 무너져 내린다는 의미이다. 부패는 나라를 파멸하게 할 뿐 아니라 개인이 이루어낸 온갖 공적도 무너뜨리게 된다. 명재상으로 칭송받던 황희 정승도 세종실록에 기록된 뇌물수수, 매관매직 등의 비리가 밝혀지면서 최근에 비판을 받기도 한다. 다시 다산은 말한다. “뇌물은 누구나 비밀스럽게 주고받지만, 한밤중에 한 일도 아침이면 드러난다.” 싱가포르에서는 뇌물사건에 연루된 공무원에 대해서 그 실명과 얼굴을 신문을 통해 공개하고 이를 엄히 처벌함으로써 사회적 처벌과 법적 처벌을 함께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청렴하지 못한 공직자는 언젠가는 받게 될 역사적, 사회적, 법적 처벌의 무거움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한다면 청렴은 개인과 기업, 국가의 핵심적인 경쟁력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부정부패를 척결하지 않고는 선진국으로 나아갈 수 없다. 데일리한국이 지난 8월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기 위해 어떤 개혁이 가장 필요한가'라고 질문해 두 가지씩 꼽으라고 한 결과 '부정부패 척결'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37.2%로 '정치개혁'(43.0%)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다. 공직사회와 시민사회의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청렴한 사회를 만들어야 우리의 국격을 높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시민사회는 공직자의 청렴에 대해 극단적인 관점도 경계해야 된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 사람이 저지른 잘못에 바탕을 두는' 부정적 접근과 '그 사람이 성취한 업적에 바탕을 두는' 긍정적 접근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일부 부패한 공직자의 문제를 가지고 공직사회 전체를 부정적으로 보고 정부를 불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맹자의 진중자(陳仲子) 편에 보면 진중자는 형의 녹을 불의하다고 하여 먹지 않고, 형의 집을 의롭지 않은 집이라고 해서 살지 않았으며 지나치게 결백한 삶을 살았다. 이에 대해 맹자는 조그마한 결백을 위해 모든 유혹을 거부하는 진중자의 청렴은 지렁이의 청렴이지 사람의 청렴으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공직사회가 우리나라에 기여하고 있는 것을 전면 부정한 채 도덕적 근본주의(fundamentalism)에 입각하여 관료 때리기를 계속하게 되면 진정한 청렴이 아니라 형식적인 청렴에 그칠 수 있다. 우리는 '베니스의 상인'의 예처럼 무엇을 청렴으로 볼지에 대해 세대 간, 계층 간 인식의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공직자와 시민의 청렴 수준을 높여가는 노력을 함께 해나가야 할 것이다.